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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2016 SPRING

LIFE

IN LOVE WITH KOREA 라이언 캐시디: 그의 ‘소리’가 문화의 경계를 허물다

한복 차림의 키 큰 서양인이 판소리를 부르는 모습은 꽤나 낯선 풍경이다. 그러나 판소리에 대한 라이언 캐시디(Ryan Cassidy) 교수의 열정은 단순히 판소리가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매력적 예술 장르임을 보여주는 차원을 넘어 이 한국 고유의 소리 예술을 화석화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반적 인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현저히 두드러져 보이는 낯선 환경에 발을 들여놓기란 결코 쉽지 않다. 1997년 한국에 첫발을 디딘 캐나다인 라이언 캐시디는 자신이 그런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이내 발견하게 된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 오래 머무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국에 돌아가면 다시는 하기 힘들 무언가를 배워보자고 생각했죠.” 여기저기 알아본 끝에 그는 구청에서 진행하는 사군자 그리기 수업에 등록했다. “첫날 가보니 제가 유일한 외국인일 뿐만 아니라 남자도 저 하나밖에 없더군요” 하며 그는 웃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색함을 느끼며 수업을 포기했겠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근차근 기본을 배워나갔다. 이러한 인내심과 전통 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이 결국 그를 판소리의 세계로 이끈 것이다.
때로 ‘한국판 오페라’라고 설명되기도 하는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과 북을 치는 고수가 짝을 이뤄 음악에 이야기를 실어 전하는 형식을 취한다. 캐시디 교수가 처음 판소리를 접한 것은 그가 한국에 산 지 십 년 정도 됐을 무렵이다. “정말 놀라웠어요”라며 그는 당시를 회고했다. “굉장히 단순해 보였죠. 단지 한 사람의 목소리가 있을 뿐이었고 악기 또한 매우 평범해 보였죠. 하지만 그 안에서 표현되는 감정의 폭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판소리 명인은 바로 소지영 명창으로 캐시디 교수처럼 춘천에 살고 있다. 이후 소지영 명창의 공연을 몇 차례 더 관람한 후 그는 소지영 명창을 직접 만나 북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당신이 북을 정식으로 가르치지는 않는다 하셨어요. 하지만 소리를 배우면 북을 치는 기본 정도는 함께 가르쳐 주실 수 있다고 하셨죠.” 노래에 별다른 취미가 없는데다 노래방 가는 것 조차도 내켜 하지 않던 그였다. 하지만 판소리의 매력에 끌려 수업을 듣기 시작해 지금까지도 그는 소지영 명창에게 사사를 받고 있다.

한국에 뿌리를 내리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열정이 요리에 있다 믿었다. 1990년대 스키 리조트로 유명한 캐나다 휘슬러에 살 당시만 해도 돈을 모아 요리 학교에 갈 요량이었다. 하지만 휘슬러에서는 그의 꿈을 이루기가 녹록치 않았고 친구의 권유로 학원 영어 강사 일을 잡아 한국에 오게 됐다.
“한국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부터 일곱 살배기들 수업을 맡았어요. 교사 연수도 없이 바로 강의실에 저를 밀어 넣으며 수업을 진행하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반년 뒤 학원에서 진행한 제2언어로서의 영어(ESL: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워크숍을 들으며 제가 얼마나 가르치는 걸 좋아하는지 깨닫게 됐죠.” 몇 년 후 그는 일종의 영어 교사 양성 프로그램인 셀타(CELTA: Certificate in 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과정을 수료하고 결국 석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자기 스스로 ‘촌뜨기’라 칭하는 그에게 서울이라는 도시는 여러 면에서 문화 충격으로 다가왔다. “캐나다에서 제가 살던 곳은 길이 4km, 폭 2km에 지나지 않는 매우 작은 섬이었어요. 스키 시즌이 아닐 때는 인구도 2천 명에 불과했죠.” 부인 김현숙씨를 처음 만나 일 년 뒤 백년가약을 맺은 후로 이들 부부는 2002년 춘천으로 다시 이사 오기 전까지 몇 년 간 강릉에서 둥지를 틀었다. 이제 이들은 11살 먹은 아들 기인(영어 이름 시안)과 8살짜리 딸 한나를 슬하에 두고 있다. 캐시디 교수는 현재 한림대 국제학부에서 학문으로서의 영어 능력 함양, 즉 독해와 비평적 사고 능력 함양에 초점을 맞춘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애송이 판소리꾼
판소리는 이제 캐시디 교수가 열정을 쏟는 취미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판소리를 배우는 데는 적지 않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판소리에는 악보가 없습니다. 그저 스승님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따라 하는 거죠. 한 구절씩 한 구절씩 제대로 할 때까지 계속 연습하고 이제 됐다 싶으면 다음 구절로 넘어가는 방식입니다.”
“가사를 외우는 게 특히 힘들었어요. 다 한자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다 더 이상은 사용하지 않는 고어도 많이 포함하고 있어요. 가끔 주변의 한국 사람들한테 제 판소리 가사집을 보여주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요. 그러니 어렵지만 암기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가 현재 집중하고 있는 작품은 효녀 심청이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야기를 담은 <심청가>다. 판소리 작품은 원래 12마당이던 것이 이제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다섯 마당밖에 전하지 않는다. 한 작품을 완창하는 데 최소 네 시간에서 여섯 시간이 걸린다.
처음엔 자신의 여가 시간에 즐기던 개인적 취미 활동이던 것이 이제 관객 앞에서 공연도 하게 됐다. 그의 첫 공연은 순탄치 않았다.
“한국 전통 음악을 하는 외국인 교수 몇 명을 초대해 무대를 꾸미는 TV 프로그램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래, 한 번 해 보자’ 생각했죠. 하지만 ‘국악 한마당’이라는 프로그램이 그렇게 큰 무대일 줄은 몰랐던 거죠. 관객을 앞에 두고 처음으로 해보는 공연이었습니다. 그 전엔 교단에 서거나 검도를 할 때도 무대 공포증이 없었는데 그날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드는 겁니다. 정말 엉망이었죠.”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한국판소리보존회가 주관하는 대회에 참가했다. 두 번째 무대에서는 처음에 비해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고 “그 이후로 어찌어찌 계속 해나가고 있다”고 그는 전한다.

“판소리의 저변이 더 확대돼서 자연스럽게 향유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길 바랍니다. 판소리를 즐기는 데 꼭 전문가가 되야 하는 건 아니죠. 서양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처럼 그저 그렇게 즐기면 됩니다.”

새로운 공동체를 찾다
요즘은 춘천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캐시디 교수가 공연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소리도 하지만 춘천 지역에 제대로 훈련 받은 고수가 부족한 탓으로 종종 스승 소지영 명창의 고수 자격으로 무대에 서기도 한다.
국악계에서는 대부분 그를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여줬다. “저를 기꺼이 포용해 주셨습니다. 제 부족한 실력에도 최소한 제 면전에 대고 나무라는 분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매우 놀라워하시고 외국인이 국악의 매력에 빠져 있는 걸 반기셨죠.”

실제로 그는 자신처럼 외국인이면서 국악의 미를 ‘발견한’ 지인 몇 명과 함께 공연을 펼치곤 한다. “사물놀이를 하는 스위스 출신의 헨드리케 랑게(Hendrikje Lange)씨와 공연을 여러 번 같이 했습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공연을 보고 심리치료사라는 직업도 버리고 한국으로 건너온 분이죠. 가야금을 연주하시는 대전의 조슬린 클락(Jocelyn Clark) 교수님도 계시고, 힐러리 핀첨 성(Hilary Finchum-Sung) 서울대 교수님은 해금을 하십니다. 다들 동일한 경험을 하는 듯합니다. 대부분의 한국인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국악이라는 음악의 멋을 외국인이 이해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다가오는 거죠.”
캐시디 교수가 판소리를 설명하는 방식에서 그가 얼마나 이 음악에 무한한 열정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히 드러난다.

소리꾼의 ‘소리’가 일반적인 노래와 어떻게 다른지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노래는 그 소리의 폭이 매우 협소합니다. 대부분 듣기에 즐거운 소리들이죠. 반면 판소리의 ‘소리’는 그 폭이 훨씬 광범위합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포함해 때론 새의 지저귐이나 천둥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까지도 소리꾼은 담아낼 줄 알아야 합니다. 춘향가의 한 대목 중에 춘향이 이몽룡과 이별하는 장면을 보면 새가 구슬피 우는 소리가 배경으로 깔립니다. 제 스승님의 소리를 들으시면 마치 새가 옆에 있는 듯 느껴지실 겁니다. 실로 놀라울 따름이죠.”

판소리의 미래
아버지 캐시디 교수를 따라 그의 두 자녀도 판소리를 배우고 있다. “모두들 우리가 시켜서 배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웃음) 아들 녀석이 공연을 종종 보러 오고 그걸 또 즐기길래 ‘너도 한번 배워 볼래’ 하고 물어 봤죠. 딸내미도 마찬가지구요.” 세 사람은 최근 네팔 지진 피해자 구호를 위한 기금 모금 공연에 함께 섰다. 아들 기인이 특히나 판소리를 습득하는 속도가 빠르다.
“아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걸 배우느냐고들 물으세요. 근데 전 여기서 아이러니를 좀 느껴요. 제 자식 또래의 한국 아이들이 정말로 어려운 피아노나 바이올린 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자주 보거든요.”
한국에서 판소리는 이제 전문가만이 하는 예술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고 그는 얘기한다. 전문가 그룹 외에 대부분의 사람은 판소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양극화 현상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 양극단을 연결하는 중간 층이 오늘날 한국에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 그는 조심스레 의견을 제시해 본다.
“판소리의 저변이 더 확대돼서 자연스럽게 향유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길 바랍니다. 판소리를 즐기는 데 꼭 전문가가 되야 하는 건 아니죠. 서양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처럼 그저 그렇게 즐기면 됩니다.” 그는 기존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창작 작품으로 판소리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작창가들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예를 들어 소리꾼 이자람은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사천의 선인(The Good Person of Szechwan)>을 모티브로 한 창작 판소리를 지어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그의 <사천가(Sacheon-ga)>는 해외에서 많은 호평을 받고 있다.
“기존의 판소리 다섯 마당은 그 자체로 정말 탁월합니다. 그러나 창작 판소리는 더 많은 사람이 판소리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데 윤활유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캐시디 교수는 말한다. “그 역사를 보면 판소리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관중과 호흡을 같이 하며 변화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판소리는 원래 저잣거리에서 하층민이 즐기던 유흥이던 것이 19세기 들어 양반층이 그 주요 청중으로 바뀌면서 지속적인 변화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로는 화석화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판소리가 계속해서 진화,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젊은 층이 보다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달시 파켓(Darcy Paquet)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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