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Lifestyle

2016 SUMMER

LIFE

라이프스타일전세의 추억, 전세의 미래

한국의 독특한 주택 임대차 방식인 전세 제도에 위기가 닥쳤다. 오랜 기간 전세 제도를 뒷받침했던 요소들 — 고도성장, 집값의 지속적인 상승, 고금리 같은 — 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급격한 근대화, 산업화가 진행된 1970년대의 삶을 다룬 박완서(Park Wan-suh 朴婉緖 1931~2011)의 단편 소설 <도둑맞은 가난>의 배경은 서울의 어느 산동네다. 여자인 주인공은 월세를 아끼기 위해 남자친구와 같은 방을 써야 하는 신세다. 그가 그 곳까지 흘러 들게 된 것은 얄궂은 운명 탓이었다.
먼저 아버지의 사업이 잘못됐다. 그래도 가족에게 집 한 채는 남아 있었다. 주변에서는 그 집 방 한 칸을 남에게 전세로 내주고, 받은 전세금으로 식료품 가게라도 차리라고 권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더 많은 빚을 끌어들여 아버지를 도왔다. 사업은 재차 망했다. 더 이상 고단한 삶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고 여긴 부모와 오빠는 동반 자살을 선택하고 말았다. 무일푼이 된 주인공은 월세 4천원짜리 방을 찾아 산동네를 전전해야 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주거 형태는 자가(自家)-전세-월세로 이어진다. 이는 어엿한 중산층 자녀에서 빈곤층 고아로 전락하는 주인공의 처지를 상징한다. 산업화 시대의 한국에서 주택 보유 유무나 임대차 형태는 곧 계층을 의미했으며, 이런 의식 구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전세라는 임대차 방식
전세는 한국에만 있는 고유한 임대차 방식이다. 임대인은 임차인으로부터 전세 보증금이라는 목돈을 받고 임차인은 주택 사용에 따른 월세를 내지 않는다. 전세 계약의 대상은 집 한 채일 수도 있고 방 한 칸일 수도 있다. 임차인은 만기가 되어 임대인이 이사 나갈 때 전세 보증금 전액을 돌려준다.
이 희한한 임대차 방식의 역사는 100년을 훌쩍 넘길 정도로 길다. 수 세기 전 조선시대에서 전세 제도의 연원을 찾는 설도 있지만, 19세기 후반 개항이 시작되면서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 제도가 전국으로 널리 퍼진 것은 본격적인 산업화로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이 급증했으나 도시의 주택은 턱없이 부족했던 1960년대부터이다. 그 시대에 전세는 임대인과 임차인의 이해가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임대 방식이었다. 임대인으로서는 신분이 불확실한 타지 사람을 들여 매달 임대료를 꼬박꼬박 받게 되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임차인이 건넨 전세금은 이에 대한 완벽한 보험이었다. 임차인 처지에서는 고향을 떠나오면서 시골의 땅이나 집을 판 목돈이 있었다. 이 종자돈을 축 내지 않으면서 주거 문제를 해결할 최적의 해법이 바로 전세 계약이었다.

지속적인 집값 상승과 고도성장
임차인이 목돈을 보증금으로 맡겼다가 나갈 때 고스란히 찾아갈 뿐, 주택 사용료는 전혀 내지 않는 제도가 어떻게 임대의 보편적인 방식으로 이렇게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었을까?
지난날 한국의 경제 환경에 답이 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20세기 말까지 연평균 8%가 넘는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다른 선진국들이 백 년 이상에 걸쳐 이룬 성장을 단기에 이뤄냈다는 점에서 압축성장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뒤쳐진 주택은 언제나 가격이 뛰었다. 한국 경제의 대표적 성장기였던 80년대 후반 호황기(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전후한 시기)에는 집값이 4년 만에 꼭 두 배로 뛰기도 했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집을 사려고 했다. 금융권에서 필요한 돈을 빌리기 힘든 주택 구입 희망자들은 전세를 끼고 집을 샀다. 이렇게 하면 집값에서 전세 보증금에 해당하는 금액만큼은 해결되니 그 나머지 금액만 조달하면 집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전에 많은 서민들이 집을 사고도 임차인의 보증금을 반환해줄 만큼의 자금을 모을 때까지 자신들도 전세살이를 계속하곤 했다. 즉 전세 제도가 주택 임대차 계약의 한 형태이자 임대인이 임차인을 통해 필요한 목돈을 충당하는 ‘주택 사금융’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아직 모기지(mortgage 장기 주택담보대출) 시장이 발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생겨난 독특한 주택 구입 자금 조달 방식이었다. 한편, 집값이 계속 뛰는 상황에서 주택 구입은 노동 없이 큰 돈을 버는 대표적인 재산 증식 기술로 굳어졌다. ‘돈이 약간 있으면 은행에 넣고, 꽤 많으면 집을 사라.’-- 이것이 고도성장 기간 동안 널리 통용된 ‘재테크’의 법칙이었다.
이 시기 두 자릿수 고금리가 정착됐다는 것도 전세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었다. 임대인인 집주인은 자신이 받은 전세금을 활용해 월세 이상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오랫동안 전세의 월세 전환 시 통용되었던 시중 금리가 연리 12%였던 점도 이를 반증한다. 1천만 원의 전세금은 월세 십만 원에 해당했다. 거꾸로 십만 원의 월세를 전세로 돌리려면 전세금을 1천만 원 올렸다. 고도 성장기에는 그만큼 자금에 대한 수요가 많았고, 이자도 높게 쳐줬다.

전세, 옛 추억이 될까?
최근 국내 경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전세 시장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전세가 가능했던 전제 자체가 허물어지고 있다. 한국 경제에 더 이상의 고도성장은 없다. 2001년 한 해를 빼면, 2000년 이후 연평균 성장률은 3%대 미만에 머무르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와 10년 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저성장 기조가 자리 잡았다. 경제가 위기를 겪을 때도 언제까지나 끄떡없을 것 같던 집값마저 떨어지기 했다.
게다가 2010년을 기점으로 공식 주택보급률은 100을 넘어섰다. 산업화 시대의 도시 주택 부족 문제는 완전히 해소됐다. 경제 환경뿐만 아니라 인구 통계적 요소도 집값을 낙관할 수 없게 하는 요소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장기적으로 주택 수요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를 근거로 집값 폭락을 예고하는 이들마저 나타났다. 이제 집을 사는 것은 더 이상 재테크가 아니다. ‘꼭 필요하고 여유가 있다면 집을 사라’는 신중한 조언이 나도는 가운데 실제로 자금의 여유가 있어도 주택 구입을 주저하거나 미루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주택 금융의 발전이나 저금리 장기화도 전세의 존립 근거를 허물고 있다. 비록 주택 금융 규제가 아직 많기는 하지만, 주택 구입자는 원한다면 비교적 쉽게 대출을 받을 수 있다. 굳이 전세를 끼고 집을 살 필요가 없어졌다. 집주인은 전세금이라는 목돈을 굴려 월세 이상의 수익을 올릴 방법이 사실상 없어졌다. 은퇴가 시작된 베이비부머들과 주택 외에는 다른 수입이 없는 노인들은 이제 매달 일정한 현금이 들어오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하게 됐다.

전세가 사라지면 개인으로서는 집을 사거나 월세를 내고 임대하는 두 가지 선택밖에는 남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전세가 사라지게 만든 바로 그 요인들 탓에 개인은 전처럼 주택 구입에 열을 올리지 않게 될 것이다. 한국인의 주택에 대한 유별난 집착이 점차 누그러질 수밖에 없다.

2015년 국토교통부에 신고된 전-월세 거래량 중 전세의 비중은 58.9%로, 2011년의 69.0%에서 10% 이상 감소한 수치다. 장기적으로 전세는 사라질 운명일까? 지난 2월 23일 올해 국정과제를 논하는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이에 관해 선언적 입장을 내놓아 화제가 됐다. 그는 “전세라는 것은 옛날의 추억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역점 추진중인 월세형 민간 임대주택인 뉴스테이(New Stay) 홍보 맥락에서 나온 말이었다.
길게 보면 맞는 말일 것이다. 이 발언이 논란이 된 것은 예측의 정확성 여부가 아니라 전세가 종말을 맞는 과정에서 벌어질 부작용이나 그에 대한 국가의 대책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지난 몇 년 사이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서는 유례 없이 심각한 전세대란이 계속되고 있다. 전세 공급은 급격하게 줄어드는 상황에서 아직도 전세를 선호하는 세입자들이 적지 않다. 매달 치러야 할 임대료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전세 수급 불일치로 매매가 대비 전세가율은 가파르게 상승하여 3월 현재 서울 평균 전세가율이 70%를 넘어섰고 일부 지역에서는 80%를 웃도는 현실이다.
월세로 매달 50만원에서 150만 원을 추가로 지출하는 중산층과 서민층이 늘어나면서 이들의 소비 여력은 크게 줄었고 이러한 ‘월세 쇼크’는 가계부채 문제와 함께 내수 불황을 장기화 시키는 요인이 됐다. 전세가 사라진 후 합리적인 중저가 월세 주택이 많이 공급될지도 의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주택시장에서는 집값과 전세 대란에 이어, 월세 대란이 이어질 것이다.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전세가 사라지면 개인에게는 집을 사거나 월세를 내고 임대하는 두 가지 선택밖에는 남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전세가 사라지게 만든 바로 그 요인들 탓에 개인은 전처럼 주택 구입에 열을 올리지 않게 될 것이다. 한국인의 주택에 대한 유별난 집착이 점차 누그러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고 나면 미래 세대는 서두에 소개한 소설 속에 등장했던 이야기 구조, 즉 주택 보유 유무나 임대차 계약 형태가 곧 개인의 사회경제적 신분을 상징했던 산업화 시대의 유산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오늘날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전세 제도를 이해할 수 없듯 말이다.

김방희 (Kim Bang-hee, 金芳熙) 생활경제연구소 소장(Director of “Center for Economic Research of Everyday Life”)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