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Tales of Two Koreas

2018 SPRING

생활

두 한국 이야기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희망을 찾다

골목마다 러시아어 간판이 즐비하다. 행인들의 대화에서도 한국어보다 러시아어가 더 많이 들린다. 중앙아시아에서 살다가 조국으로 이주한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고려인 마을’이 자리 잡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의 풍경이다. ‘고려인’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러시아로 이주한 한국인들의 자손들을 가리킨다.

광주 고려인마을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한글을 배우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조상의 나라를 찾아 이주해 오는 고려인들은 가족 단위로 3대가 함께 들어오는 일이 많아 자녀 교육, 특히 한국어 수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이들뿐 아니라 청소년과 성인들을 위한 여러 단계의 한국어 교실도 운영되고 있다.

독립국가연합(구 소련)에 살고 있는 한국계 교포들을 통틀어 ‘고려인’이라 부른다. 이들은 100년 전 러시아로 이주한 한국인의 후예인데, 3~5세대를 거치면서 최소한 세 번 이상 디아스포라의 비애를 경험했다. 20세기 초반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1세대는 스탈린 시절 일본 스파이로 의심된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당해야 했다.
2개월 만에 총 17만 1,781명의 한국인(3만 6,442 가구)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강제로 이주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질병과 영양 실조 등으로 4만 명이 사망했다. 낯선 황무지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은 1991년 소련 해체 후 중앙아시아에서 또 다시 차별을 겪어야 했고, 견디다 못해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한국으로 건너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현재 한국에 거주 중인 고려인은 4만여 명에 달하고 그중 4,000여 명에 이르는 고려인들이 광주 월곡동에 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원룸 같은 협소한 곳에 살면서 제조업체 직공이나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문학대학과 의과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쳤던 시인 김블라디미르 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김 씨는 부인과 딸, 아들, 손자 등 일가족 10여 명과 함께 2011년 무작정 한국행을 선택했다. 광주에 고려인 마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김 씨처럼 소문을 듣고 이곳에 찾아온 고려인들은 대개 광주 내 산업단지와 인근 농공단지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일터와 가깝고 집값이 싼 원룸 촌에 거주지를 마련하게 되었고, 월곡동은 그렇게 고려인 마을이 되었다.

카페 시먀에서는 중앙아시아의 전통 방식으로 구워 낸 빵을 팔고 있다. 고려인들은 이곳에서 그리운 고향 음식을 맛볼 수 있고, 이곳을 방문하는 다른 지역 사람들은 색다른 음식을 경험할 수 있다.

마을의 터전을 닦다
이곳의 고려인들은 낯선 환경과 곤궁한 경제적 여건에 처해 있지만, 끈끈한 공동체 정신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일궈나가고 있다. 협동조합을 만들고 어린이집을 운영하는가 하면 주민지원센터, 지역아동센터, 상담소, 쉼터, 마을 방송국 같은 각종 지원 공간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활기차게 삶의 터전을 다져가고 있다.
유입 인구가 늘면서 자영업 성공 사례도 늘고 있다. 러시아어로 가족을 뜻하는 ‘시먀(семья́)’란 이름의 카페에서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주식인 누룩빵과 꼬치구이를 만들어 판다. 전발레리 씨가 2015년 1호점을 낸 이래 큰딸과 아들 부부가 4호점까지 낸 이 가족 카페는 고려인 마을에 생겨난 최초의 맛집이란 평가를 얻었다. 그런가 하면 허아나스타시야 씨가 2017년 10월 개업한 유럽 스타일의 카페 ‘코레아나’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렇게 성공한 자영업자들이 늘면서 음식점, 여행사, 환전소, 기념품 가게 등 30여 개 점포가 들어선 ‘고려인 마을 특화거리’까지 생겨났다.

이곳에 고려인들이 터전을 잡기 시작한 것은 마을의 산파역을 맡은 고려인 3세 신조야 씨가 한국 땅을 밟은 2001년 무렵부터다. 공장에서 일하던 신 씨가 월급이 체불되자 새날교회 이천영(李天永) 목사에게 도움을 청한 게 계기였다. 이후 신 씨는 이 목사의 도움으로 2005년 월곡동에 ‘사단법인 고려인 마을’을 설립하고, 낡은 상가 건물 1층에 고려인센터를 열었다. 2007년부터 중국 동포와 고려인 동포에게 합법적 체류의 길을 열어 준 방문취업비자가 발급되자, 이로 인해 광주를 찾는 고려인의 수도 급증했다. 고려인들이 유독 이곳에 몰려드는 까닭은 간단하다. 고국이 낯선 이들에게 쉼터는 물론 숙식과 통역 등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입소문이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고충을 자기 일처럼 처리해 주는 해결사 신조야 씨 덕분이다. 그래서 신 씨의 별명은 ‘고려인의 대모’다. 이곳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조야 엄마가 없으면 우린 못 살아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신 씨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고려인들의 전화번호만 2,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또 신 대표와 2008년 결혼한 남편도 이주민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탈북민이어서 고려인들의 든든한 동지가 돼 주고 있다.

다문화가정 자녀들을 위한 국내 최초의 대안학교인 새날학교에서는 고려인 청소년들이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목공 교실을 비롯해 여러 가지 직업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사단법인 고려인마을

아이부터 어른까지 맞춤형 한국어 교육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고려인이 아무리 똑똑해도 낮은 대접밖에 받지 못해요. 대학교를 두 곳이나 졸업해도 취직을 못합니다.”
신조야 씨의 말이다. 그녀는 고향에서는 생계를 이어가기가 너무 힘들어 할아버지의 조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고려인 3세 정스베틀라나 씨도 신 씨와 같은 이유로 이곳에 왔다.
“여기 와서 세탁기 조립 공장에 들어갔어요. 일요일에는 식당에서 그릇을 닦고, 그렇게 돈을 모아 원룸 보증금 50만 원을 만들었죠.”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자국어 쓰기와 자국민 우선 정책을 펴는 바람에 러시아어만 할 줄 아는 고려인들은 점차 사회적 약자로 밀려났다. 그런데 언어로 인한 차별 때문에 고향을 떠난 고려인들이 조국에 와서도 부딪히는 가장 큰 걸림돌은 언어다. 비자 문제 등으로 관공서를 찾아가서 공문서를 작성하는 일은 물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소소한 일상도 한국어가 서툰 이들에게는 넘어서기 어려운 장벽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려인 마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업이 바로 교육이다.

조선족 같은 중국 동포나 동남아 노동자들은 대개 혼자서 돈을 벌러 오지만, 고려인들은 가족 단위로 3대가 함께 들어오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자녀 교육 문제에 더욱 정성을 들인다. 이곳에서 고려인 교육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는 곳이 한국 최초의 다문화 대안학교인 새날학교다. 2007년 개교한 이 학교는 2011년 학력인정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무상 교육기관이자 초∙중∙고 통합형 대안학교로 인성교육을 중시하여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고 한다. 이 학교는 고려인 마을을 탄생하게 한 또 다른 주역인 이천영 목사가 이끌고 있다. 신조야 씨가 고려인 마을의 ‘대모’라면 이 목사는 ‘대부’인 셈이다.
고려인 마을의 한국어 강좌는 여러 기관에서 수준별, 시간대별로 나눠 진행한다. 수강생이 늘어나 현재 성인을 위한 기초반, 중급반, 고급반 등 3개 반과 최근 이주한 청소년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도 운영되고 있다. 주말 근무와 야근으로 시간을 낼 수 없는 동포를 위한 고려FM 방송 강좌는 일을 하면서도 들을 수 있어 반응이 좋다고 한다.
또한 2013년 문을 연 아동센터에서는 초∙중∙고생들을 위해 방과 후에 한국어, 영어, 수학, 러시아어 쓰기, 예능 학습을 지도하며 축구와 기타도 가르친다. 2012년 개관한 어린이집은 맞벌이 부부 가정의 어린이들을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맡아 한글 학습, 문예 활동, 운동을 지도하고 급식과 간식도 제공한다. 2017년 7월부터는 초등학교 과정의 주말 러시아학교가 운영되고 있는데, 고려인 자녀들은 한국어와 러시아 두 개의 언어를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출생지에서 러시아어를 배웠지만, 한국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러시아어를 잊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국권 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어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임을 조국인 이 땅에서 증명해 내겠습니다.”

고려인마을에서는 2013년부터 10월 셋째주 일요일을 ‘고려인의 날’로 정하고 해마다 기념 행사를 벌이고 있다. 2017년 제5회 ‘고려인의 날’에는 마을 아이들이 한국의 전통 부채춤을 추었다. ©사단법인 고려인마을

미디어, 공동체를 지탱하는 중심축
고려인 종합지원센터는 이 마을의 심장이다. 이곳은 당장 거처가 없이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딱한 처지의 고려인들이 잠시 머물러 가는 쉼터이자 취업, 산업재해, 체불 임금, 비자 문제 등 온갖 애로사항을 상담하고 해결해 주는 공간이며 교육장이다. 2017년 6월 문을 연 고려인역사박물관도 눈길을 끈다. 종합지원센터 바로 옆에 있는 박물관은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1860년대 연해주에 자리를 잡은 한인들이 1937년 중앙아시아의 불모지로 강제 이주되기 전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항일투쟁을 벌였는지, 그 후손들이 온갖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견디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2017년엔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 기념 사업’도 자체적으로 벌였다. 광주 고려인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바로 미디어다. 중병에 걸리거나 수술비가 부족한 경우처럼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고려FM방송과 나눔방송 뉴스를 통해 서로 돕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주민 역사상 첫 자체 라디오 방송으로 개국한 고려FM방송은 한국어보다 러시아어가 편한 고려인들을 위해 80%의 프로그램이 러시아어로 진행된다. 24시간 프로그램을 송출하는 고려FM방송은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친인척과 지인들이 애플리케이션을 깔고 청취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한편 나눔방송 뉴스는 페이스북이나 이메일로 11만여 명에게 전파되면서 고려인 마을의 시시콜콜한 소식까지 실어 나른다.

외국인으로 분류되는 4세들
광주 지역 고려인들은 투철한 공동체 정신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다. 이들은 서로 도우면서 관혼상제를 치르는 것은 물론 ‘깔끔이 봉사단’을 창설해 거리 청소 자원봉사와 자율방범 활동도 벌이고 있다. 또한 매달 ‘고려인 마을 방문의 날’을 정해 운영하면서 한국 사회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기도 하다. 2017년 11월에는 신아그리피나 바실리예프 우즈베키스탄 교육부 장관이 방문하기도 했다.
다양한 지원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삶이 그저 평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이곳 고려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병이 났을 때다. 체류 기간 90일을 채워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을 얻더라도 매달 10만 원 가량인 보험료를 부담하기란 보통 버거운 일이 아니다.
이들에게 닥친 또 다른 어려움은 체류 비자 문제다. 현 재외동포법은 고려인 3세까지는 ‘재외동포’로 분류해 장기 체류를 인정하지만, 4세부터는 ‘외국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인 동포 4세부터는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도 방문동거비자 자격이 만료되는 만 19세가 되면 한국을 떠나거나 3개월짜리 방문비자를 계속 갱신하면서 재입국을 거듭해야 한다. 출생지가 한국인데도 말이다. 이런 법 적용으로 불편을 겪고 있는 고려인 4세 자녀들이 광주 고려인 마을에만 4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왕래가 자유로운 재외동포비자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다. 2018년은 고려인이 조국인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지 30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우리는 국권 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어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임을 조국인 이 땅에서 증명해 내겠습니다.”
신조야 씨의 당찬 다짐은 고려인들의 도저한 생명력을 보여 주는 듯하다.




김블라디미르 시인의 ‘반전의 삶’

김블라디미르 시인은 광주 고려인 마을에서 조금 각별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학 교수를 지낸 지식인이 이곳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려인 3세인 그는 마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주고 있다. 고려FM 방송에서는 ‘행복문학’이란 문학 프로그램을 러시아어로 진행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광주와 전국 단위 행사에 고려인 대표로 참석할 때가 많다.

“저는 펜 말고는 평생 손에 뭔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모국에 와서 난생처음 육체노동을 하고 있지요. 한국 말을 잘 못하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밖에 없죠. 그나마 몇 해 전 소장암 수술을 받은 뒤로는 힘쓰는 일을 거의 못합니다. 과수원과 농장에서 사과, 배, 블루베리, 딸기 같은 작물을 가꾸고 수확하는 게 주된 일입니다.”
처음 공장에서 일할 때는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한국에 온 뒤 2~3년간은 후회가 밀려와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한국에 온 게 잘한 일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아버지께서는 1990년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한국 이야기를 들려주며 ‘너는 꼭 조국 땅을 밟아야 한다’고 당부하셨어요.”
그에게는 틈틈이 시를 쓰는 게 큰 즐거움이다. 한국에 와서 쓴 시를 모아 2017년 2월 첫 시집 『광주에 내린 첫눈』을 냈다. 눈 내린 광주의 풍경에 반해 시를 쓰고, 그 시의 제목을 시집에도 붙였다. 이 시집에는 한국 땅을 밟은 후 김 시인이 쓴 35편의 시가 한국어로 번역돼 러시아어와 함께 실렸다. 계명대 러시아문학과 정막래(鄭莫來) 교수가 시집 출판을 권유하는 바람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러시아어로 쓴 시의 한국어 번역도 정 교수가 맡았는데, 그녀는 고려인 동포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다가 김 시인과 인연을 맺었다.
그의 시에는 조국과 자연에 대한 사랑, 스탈린의 강제 추방 때문에 중앙아시아로 가게 된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애환 같은 것들이 진솔한 표현으로 오롯이 담겨 있다. 그가 쓴 많은 시 가운데 유난히 폐부를 찌르는 대목이 있다.
‘대한민국이여! 우리 조국이여 이해해 주소서 / 우리가 멀리서 살았던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님을’(「힘들게 기다려 온 80년 세월」)
그는 2017년 여름 고려인강제이주80주년기념사업회와 국제한민족재단이 주관한 ‘회상열차-극동 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에 고려인 마을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와 알마티까지 13박 14일 일정으로 고려인 선조들이 겪은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회상열차 체험은 그에게 다양한 영감을 주었다. 앞으로 펴낼 두 번째 시집에는 고려인 강제 이주에 관한 시가 많이 담길 것이라고 한다.
시인인 그는 언어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언어가 모국어여야 하지만, 한국어로 시를 쓸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여기서 몇 년 살면서 조금은 늘었지만, 한국어를 더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30여 년 동안 타슈켄트 외국어대학과 타슈켄트 의과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였던 김 시인은 55세 정년 퇴직 규정에 따라 이른 나이에 강단을 떠나야 했다. 퇴직 후 한국행을 결심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게 2011년 3월이었다. 곧이어 아내와 자녀들도 한국으로 왔다. 이제 손주들까지 포함하면 고려인 마을에서 10명이 넘는 대가족을 이루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이곳이 내 조국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을 꿈꾸고 있다. 그의 시에도 그런 심경이 듬뿍 묻어난다.
“내 벗들이여, 역사적인 조국의 땅에서 / (……) 나는 외국인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원하지 않습니다 / 나는 고려인, 나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정신적으로도 양심적으로도 혈통적으로도 그렇습니다.”(「추석」)

김학순(Kim Hak-soon, 金學淳) 언론인,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초빙교수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