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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2017 WINTER

생활

두 한국 이야기 유진벨재단의 이웃 사랑, 휴전선을 넘나들다

긴장과 대립이 반복되는 남북한 관계는 최근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실험으로 더욱 위험스런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대북 인도적 지원을 꾸준하게 계속해 온 민간 단체가 있다. 미국 선교사 유진 벨(Eugene Bell)의 한국 선교 활동 100주년을 기념해 1995년에 그의 외증손자 스티븐 린튼(Stephen Linton)이 설립한 유진벨재단이다.

유진벨재단의 스티븐 린튼 회장이 북한 방문 중 환자들과 결핵 치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남북한과 북미 관계가 아무리 얼어붙어도 스티븐 린튼 유진벨재단 회장과 대표단은 해마다 두 차례씩 어김없이 북한에 다녀온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5월에 이어 11월에도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가지고 의료진을 포함한 외국인 대표단들과 함께 방북했다. 심각한 상태인 북한 주민들의 결핵 치료가 어떤 정치적, 외교적 현안보다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도적 지원은 남북 관계가 좋든 나쁘든 초정치적, 탈이념적이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됐다.
미국인이지만 마음은 언제나 한국인이어서 ‘인세반’이란 한국 이름을 쓰는 린튼 회장은 올해로 20년째 북한 결핵 퇴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 보건성(保健省)이 “보건 문제 1위도 결핵, 2위도 결핵, 3위도 결핵”이라고 말했을 만큼 북한에 결핵 환자가 많기 때문이다.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설립한 뒤 대북 식량 지원 활동을 벌이던 린튼 회장이 결핵 퇴치에 전념하기로 방향을 튼 것은 북한 당국의 공식 요청을 받은 후부터다. 1997년 북한 보건성 최창식(Choe Chang-sik 崔昌植) 부부장이 “식량 대신 결핵 치료 지원을 해 달라”고 린튼 회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시 극심한 식량난으로 ‘고난의 행군’을 하던 북한이 먼저 결핵 치료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그동안 80차례 이상 북한을 방문한 린튼 회장은 결핵 퇴치 작업만을 위해 50차례 이상 방북했으며,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비롯해 20년간 대북 의료 지원에 사용한 금액은 약 5,100만 달러(578억 원)에 달한다. 여기에는 이동 X선 검진 차량, X선 진단 기계, 현미경, 수술실 패키지 같은 것들이 망라됐다. 그런 적극적 의료 지원 사업으로 1997부터 2007년까지 25만 명 이상의 일반 결핵 환자가 치료됐다.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에 집중
린튼 회장과 유진벨재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결핵 환자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다. 겨울철 날씨가 남쪽보다 추워서 그렇기도 하고, 가족들이 좁은 방에서 함께 생활하는 환경이 결핵 노출과 전염을 빠르게 하기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뿐만 아니라 갓 출산한 젊은 여성들이 결핵에 걸리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아이를 출산하면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결핵에 잘 걸리고, 그러면 아기를 돌보기가 더욱 어렵게 되죠.”
더욱이 일반 의약품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는 다제내성 결핵 환자가 점점 많이 생겨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다제내성 결핵 환자는 결핵약에 내성이 생겨 재발한 환자를 뜻한다. 북한은 해마다 새로운 다제내성 결핵 환자가 4,000~5,000명 규모로 발생한다. 다제내성 결핵균은 여러 종류의 치료 약제에 내성을 갖고 있어 치료하기가 쉽지 않다. 일반 결핵 환자는 6∼8개월간 일반적 결핵약을 먹으면 완치율이 90%에 달하지만, 다제내성 결핵 환자는 일반 결핵약보다 많게는 100배 이상 비싼 약을, 그것도 1년 6개월에서 2년 정도 장기 복용해야 치료가 가능하다. 완치율도 낮은 편이다.
“일반 결핵 환자 1명을 치료하는 데 약 20달러가 소요되는 반면, 다제내성 결핵 환자 1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값을 포함한 치료비가 5,000달러 정도 듭니다.”
더욱 난감한 것은 고가의 약을 장기간 투약해야 되는 다제내성 결핵 환자는 치료 시기를 놓치면 치명적이란 데 있다. 다제내성 결핵이 흔히 ‘슈퍼결핵’으로 일컬어지는 광범위 약제내성 결핵으로 이어지면 치료가 더욱 어렵고 사망률도 높다. 다제내성 결핵 환자에 대한 치료가 중단되면 짧은 기간 안에 광범위 약제내성 결핵 환자로 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 지원은 최소한 6개월에 한 번씩 이어져야 한다. 한번 이런 환자로 등록되면 약 2년간 책임을 지고 치료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 때문에 유진벨재단은 2007년부터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에 집중해 왔다. 그러는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다제내성 결핵 치료 프로그램 하나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백 명의 북한 결핵 환자와 의료진들이 다제내성 결핵 환자를 치료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2008년 북한에서 다제내성 결핵 가능성이 높은 잠재적 환자들 19명의 가래 샘플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 뒤 양성 반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다제내성 결핵 약제를 가지고 북한으로 갔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현재 1,500명 이상의 환자가 언제든지 치료받을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지요. 우리는 이제 현장에서 바로 검사를 실시하고 즉시 치료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6개월마다 린튼 회장을 포함한 방북단 10여 명이 보통 3주간 북한에 머물며 결핵 퇴치 활동을 하지만 “충분한 활동을 위해선 기간이 짧다”고 한다.
“21일간 12개 요양소를 다 찾아다니지요. 새 환자를 검사해 입원시키고, 기존 환자가 얼마나 호전됐는지 확인하고 약을 직접 전달합니다.”
이런 살뜰한 관리 덕분에 “다제내성 환자 완치율이 76%에 달한다”고 린튼 회장은 설명했다. 세계 평균 완치율이 45%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다. 그래서 북한 주민 사이에선 “다제내성 결핵에 걸려도 유진벨 요양소에 가면 희망이 있다”는 말이 돌 정도다.
의약품 및 의료 장비 지원과는 별개로 린튼 회장과 유진벨재단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결핵 환자와 의료진에 대한 교육이다. 유진벨재단의 결핵 치료 프로그램을 통해 수천 명의 북한 주민들이 감염된 경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자세히 알게 됐다. 또한 북한 주민 치료를 돕다 보니 린튼 회장 스스로도 결핵에 관한 지식이 웬만한 전문가 수준에 이른 듯하다.

유진벨재단이 가져온 약품을 북한 의료진들이 차에서 내리고 있다. 모든 약품과 의료기 상자에는 남한과 미국의 후원자들 이름이 적혀 있다.

우리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린튼 회장 자신도 어린 시절 결핵을 두 번 앓았다고 한다. 그런 만큼 결핵 환자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안다. 듣다 보니 린튼 가문은 결핵과 인연이 매우 깊다. 린튼 회장의 어머니 로이스 린튼(Lois Linton)은 1960년 전남 순천 일대에 큰 수해가 난 뒤 결핵이 만연하자, 순천기독결핵재활원을 설립해 30여 년간 결핵 퇴치 운동을 벌였다. 린튼 모자가 남북한에서 결핵 치료 활동을 전개한 특이한 이력과 인연을 만든 셈이다.
린튼 회장은 의약품과 의료 장비에 대한 사용 결과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분배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유진벨재단은 한국 내 후원자와 재미 교포, 한국과 미국 정부 등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현재 후원자의 85%가 한국인이고, 후원받는 북한 주민들은 남한 사람들이 지원해 준 것임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유진벨재단은 모든 지원 대상 의료 기관을 1년에 두 번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 사소한 물품이라도 반드시 후원자 이름을 밝힌다. 후원자들이 마련해 재단이 전달하는 결핵약 상자에는 ‘유진벨재단’이라는 글자가 없다. 그 대신 큼지막하게 후원자 이름이 적혀 있다. 린튼 회장은 “유진벨은 심부름하는 단체이고, 나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며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영웅시되는 것을 경계했다.
“우리는 택배 기사나 당나귀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운송하고 관리할 뿐이지 의료 활동에 필요한 돈을 기부하고, 직접 의료 활동을 하며, 혜택을 받는 것은 모두 한민족입니다. 한국인의 사랑이 좀처럼 북한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환경 때문에 유진벨재단과 제가 나섰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평양, 서울, 워싱턴에서 동시에 필요한 모든 협력을 얻어 내는 것”이라고 했다.
“남북 간의 긴장 관계는 항상 대북 지원에 영향을 미치지만, 우리 일에 관심을 갖는 많은 후원자가 있어 걱정하지 않습니다. 남북한 간의 긴장감이 없었던 때를 기억하기 어려우니까요.”
지난해에는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한 정세 변화로 방북 일정에 차질이 있었다. 한국 정부의 약품 반출 승인과 일정 혼란으로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 지원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올해는 계획한 일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린튼 회장은 전했다.
한 번 방북할 때마다 가져가는 치료약은 6개월 분량이다. 그런데 다음 방북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들이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하게 된다. 이 때문에 린튼 회장은 한국 정부에게 대북 인도적 지원 단체에 대한 면허 제도 같은 것을 도입해 주길 희망한다. 건수별로 물자 반출을 승인하지 말고, 정기적으로 방북하는 검증된 민간 단체는 일정 기간 동안 별도의 승인 없이 물품 반출 승인이나 방북 일정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하면 좋겠다고 한다.

“우리는 택배 기사나 당나귀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운송하고 관리할 뿐이지 의료 활동에 필요한 돈을 기부하고, 직접 의료 활동을 하며, 혜택을 받는 것은 모두 한민족입니다. 한국인의 사랑이 좀처럼 북한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환경 때문에 유진벨재단과 제가 나섰을 뿐입니다.”

린튼 가문의 대를 잇는 한국 사랑
린튼 회장이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7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였다. 그 뒤 1992~1994년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의 통역 겸 고문으로 김일성 주석을 세 차례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컬럼비아대학교 교수였던 그는 외증조부인 유진 벨 선교사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설립하고, 북한 식량 지원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대북 지원 활동에 나섰다.
유진 벨은 구한말인 1895년 한국 땅을 밟아 전라도 지역에서 선교와 봉사 활동을 시작한 미국 선교사였다. 린튼 회장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은 유진 벨 선교사의 딸 샬럿 벨(Charlotte Bell Linton)과 결혼한 뒤 역시 전라도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윌리엄 린튼은 일제 강점기 전주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교와 함께 추방당했다가 광복 후 다시 한국을 찾아 지금의 한남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1919년 전북 군산의 만세 시위 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3·1운동을 미국 사회에 알리기도 했다. 린튼 회장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1950년에 태어났지만, 선교사인 아버지 휴 린튼(Hugh Linton)을 따라 한국에 와 전남 순천에서 자랐다.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컬럼비아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남북한 비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컬럼비아대 교수 겸 동아시아연구소 한국연구센터 부소장을 지냈다. 그는 학자에서 대북 지원 활동가로 변신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저는 개인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지 않습니다. 관건은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1995년 북한 식량난이 본격화하면서 북한 당국이 국제 사회에 공식적으로 지원 요청을 했을 때야말로 ‘이웃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의 동생 존 린튼(John Linton)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장으로 활동하며 초창기에 형의 대북 의료 지원 사업을 도왔다. 린튼 회장은 한국 땅에 첫 발을 디딘 유진 벨 목사 이후 4대에 걸친 한국 사랑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대학 교수라면 은퇴할 나이겠지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한 북한 결핵 환자 돕기 활동을 지속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또한 “후원자들과 북한 의료진의 희생 정신이 없으면 이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면서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김학순(Kim Hak-soon, 金學淳) 언론인,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초빙교수
안홍범(Ahn Hong-beom 安洪範)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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