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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2017 SPRING

생활

두 한국 이야기 탈북민의 디딤돌, 북한이탈주민 글로벌교육센터(TNKR)

TNKR은 북한 이탈주민들의 영어 학습을 돕는 비영리 민간단체이다. 원어민 자원봉사자와 탈북민의 1대 1교육 방식으로 탈북민들이 남한 사회에서 외국어 경쟁력을 바탕으로 평등한 기회를 갖도록 이끌어준다.

인터넷 신조어와 괴상한 줄임말이 범람해 그렇지 않아도 분단 이후 이질적으로 변화해 온 남북한 일상용어는 한 통계에 의하면 이미 40% 가깝게 그 차이가 벌어졌다. 남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쓰는 외래어만 해도 탈북민들에게는 낯선 정도를 넘어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통일부가 2014년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40%가 넘는 응답자가 외래어로 인한 의사소통 문제를 남한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의 하나로 꼽았다. 남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탈북민이 컴퓨터를 고치기 위해 ‘컴퓨터 클리닝’이라고 쓰인 세탁소를 찾아갔다는 웃지 못할 사연도 있다.

독특한 운영 방식
탈북민들에게는 여기에 ‘영어 격차’라는 엄청난 고민이 더해진다. 영어를 배워 한 단계 도약하고 싶지만, 대부분 생계를 꾸려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형편이어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나타난 게 서울 마포구 독막로 180-8에 자리한 ‘북한이탈주민 글로벌교육센터’(TNKR Global Education Center)이다. 약칭으로 쓰는 ‘TNKR’은 ‘Teach North Korean Refugees’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탈북자들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이곳은 미국인 케이시 라티그(Casey Lartigue) 씨와 한국인 이은구(Lee Eun-koo) 씨가 의기투합해 2013년 3월 만든 비영리 민간단체다.

북한 이탈주민 글로벌 교육센터를 이끄는 케이시 라티그 씨(일어선 이)와 이은구 씨(사진 맨 왼쪽)가 원어민 자원봉사자들과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의 프로그램 운영 방식은 독특하다. 직접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배우려는 탈북자와 영어를 가르치고 싶은 원어민 자원봉사자를 연결해준다. 여러 수강생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가르치는 영어 학원과 달리 학생이 강사에게 1대 1 맞춤형으로 배운다. 교육 장소, 시간, 수업방식, 교재 결정은 학생 희망에 맞춰준다. 인연 맺은 강사가 자신과 잘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바꿔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같은 시기에 여러 명의 강사에게 동시에 배우는 열혈 학생들도 적지 않다. 라티그 씨는 “강사들이 말하기를 잘 가르치는 사람, 문법을 잘 가르치는 사람, 탈북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데 뛰어난 사람 등 다양하기 때문에 여러 강사들에게 배우는 게 유리한 면이 많다”고 설명한다.
학생들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현장 면담(matching session)을 통해 강사를 고를 수 있다. 이런 만남의 날을 두는 것은 서로 신뢰를 쌓고 학습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2016년 말까지 50여 차례 열렸다. 강사와 연결되기 전 대기자들은 TNKR 사무실에서 과도기적으로 배울 기회(in-house tutoring)를 갖는다.

지금까지 이곳을 통해 영어를 배웠거나 배우고 있는 탈북인은 250여 명으로, 그 55% 가량이 학교에서 영어를 따라잡기 힘들거나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싶어서 이곳을 찾은 대학·또는 대학원생이며, 30%는 직장인, 나머지는 주부, 구직자 등이라고 한다

열의에 찬 학생들
지금까지 이곳을 통해 영어를 배웠거나 배우고 있는 탈북인은 250여 명으로, 그 55% 가량이 학교에서 영어를 따라잡기 힘들거나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싶어서 이곳을 찾은 대학 또는 대학원생이며, 30%는 직장인, 나머지는 주부, 구직자 등이라고 한다. 라티그 씨는 “영어를 배워 더 나은 직업을 구하고, 자연스레 남한 생활에 더욱 잘 적응하고 싶어 하는 탈북민들이 TNKR의 문을 두드린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가르쳤거나 가르치고 있는 자원봉사자는 470여 명에 이른다. 취재하던 날 현재 현장 만남 대기자가 80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이들 가운데 고아, 인신매매 피해 경험자, 25살 이하 지원자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고 했다. 이곳에서 영어를 배웠거나 배우는 탈북인들은 구직과 남한 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수요자 중심 교육이어서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습니다.” 탈북인 학생들의 사후 의견을 꼼꼼하게 챙기는 이은구 공동대표의 얘기다.
라티그 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으로 박연미(Park Yeon-mi) 씨를 꼽는다. “TNKR를 열기 전 2012년 12월 박연미 씨를 처음 만났는데, 당시엔 영어를 그리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 2013년 말께 공식적으로 우리 프로그램에 참여했지요, 박연미 씨는 2014년 1월 리매칭 학생으로 참여해 8개월 동안 무려 18명의 선생님들과 1대 1로 만나 일주일에 40시간 가까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는 영어를 배우려는 열의가 엄청나게 강했고, 우리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TNKR 홍보대사로도 활동한 박연미 씨는 지금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 재학 중이다.

TNKR 프로그램이 이어준 강사(사진 오른쪽)와 학생이 마주앉아 수업하고 있다.

30대 늦깎이 대학생인 양세리(Yang Che-rie) 씨는 “학교 수업시간에 영어로 제 의견을 말하는 데 큰 용기가 생겼다. 우리 탈북민들에게 새로운 환경에서 제대로 배우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 기회를 제공해 남한 사회 적응을 도와주는 TNKR이 정말 고맙다”고 말한다.
호주, 캐나다, 미국, 뉴질랜드 출신 강사들과 영어 공부를 한 30대 출판 편집인 엄영남(Eom Yeong-nam) 씨는 “영어실력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생긴 것 같다. 더 많은 북한이탈주민들이 TNKR에서 삶의 자신감을 얻으면 좋겠다”고 추천한다.
자원봉사자들의 국적과 직업은 다양하다. 미국인이 가장 많고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같은 영어권의 다른 나라 출신도 많다. 이들의 직업도 교수, 교사, 학원 영어 강사, 대학원생, 프리랜서 작가 등 각계에 걸쳐 있다. 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의무가 주어진다. 한번 참여하면 적어도 3개월 동안, 한 달에 두 번 이상, 한번에 90분 이상 가르쳐야 한다.
자원봉사자들이 TNKR에 참여하는 까닭도 갖가지다. 크게 보면 세 부류로 나뉜다. 우선 북한과 북한사람을 알고 싶어서다. 두 번째는 이미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탈북민들을 가르치는 일도 해보고 싶어서 하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탈북민에게 특별히 관심이 많지는 않지만 가르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밖에 단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다거나, 영어 교사로서 어린아이들만을 가르치는 것이 따분해 성인들을 가르치고 싶어서 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20대 미국인 매튜 맥가윈(Matthew McGawin) 씨는 “발음과 문법을 바로 잡아주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음 번 수업 때는 꼭 고쳐옵니다. 수업 때마다 실력이 느는 모습을 보면 더 열심히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요.”라며 뿌듯해 한다.
6명의 탈북인에게 영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영국인 라이언 가드너(Ryan Gardener) 씨는 이렇게 말한다. “TNKR의 가장 큰 장점은 탈북자들이 다양한 나라에서 온 여러 원어민 강사들을 스스로 선택해 영어와 더불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게다가 배우는 장소를 그때마다 달리 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TNKR 프로그램에서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은 두 부문으로 나눠진다. ‘트랙 1’로 불리는 첫 단계는 영어와 친숙해지면서 기초영어, 문법, 어휘, 발음 등을 배우고, 스스로 공부하는 길을 찾는 단계다. 이 때 원어민 자원봉사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외국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노하우도 자연스레 덤으로 얻도록 한다. 현재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단계를 거치고 있다. ‘트랙 2’는 공석에서 말하기(public speaking) 등 발표 능력을 익히고 키우는 단계다. 비즈니스에 활용하거나, 공공연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특별프로그램이다. 이 단계에서는 글쓰기, 연설, 프리젠테이션 등을 배운다. 탈북인들이 무대와 영어에 대한 공포를 한꺼번에 해소할 수 있도록 영어 웅변대회도 정기적으로 연다. 한 해 두 차례, 2월과 8월에 대회를 열려고 노력하고 있다.
TNKR은 필요에 따라 영어 외 언어도 가르친다. 이를테면 변호사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법률용어로 많이 쓰이는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다.

개인 후원금에 의존
하버드대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90년대 연세대, 한양대 등에서 영어 강사로 활동한 라티그 씨는 2010년 다시 찾은 한국에서 북한의 실상을 알고부터 탈북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2012년 3월, 30여 명의 탈북민들이 중국에서 강제 북송된 사건은 라티그 씨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대사관 앞에서 열린 강제 북송 반대 집회 현장에서 단식농성을 했던 박선영 자유선진당 국회의원이 탈북 학생들을 위한 대안학교인 물망초학교를 세우려는 계획을 말씀하셔서 저도 국제협력이사로 참여했습니다. 저의 주요 역할은 물망초 학교에 영어 자원봉사 선생님들을 모집하는 것이었죠.”
라티그 씨는 ‘물망초학교’에서 이은구 씨를 알게 되자 자신의 외국인 인맥과 이은구 씨의 탈북민 네트워크를 합해 뜻을 펴기로 했다. 그 동안 자신이 만났던 탈북민들이 하나같이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했고, 영어 실력이 일정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한국 실정을 알기에, 이들에게 디딤돌을 놓아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은구 씨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 석사, 영국 셰필드대학교(University of Sheffield)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북한인권정보센터,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에서 연구원으로 10여 년간 일하다가 현재 한국자원봉사협의회에서 근무하면서 TNKR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처음에 사무실도 홈페이지도 없이 몇 명의 학생과 자원봉사자만으로 시작했던 이 프로그램은 이제 탈북민들 사이에 제법 널리 알려졌다.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TeachNorthKoreanRefugees), 트위터(TNKR@TeachNKRefugees), 홈페이지(www.teachnorthkoreanrefugees.org) 등 SNS를 통해 배우고 싶은 사람, 가르치고 싶은 사람들이 활발하게 소통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재정문제다. 4년 가까이 이 일을 하면서 변변한 단독 사무실을 마련하기 어려워 이태원을 비롯해 서울의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현재의 사무공간도 예산에 걸맞은 곳을 찾다가 골목 안의 허름한 단독주택에 세 들어 마련한 것이다. 정식으로 TNKR 프로그램 운영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얻은, 사실상 첫 단독 사무실인 셈이다.
TNKR 운영비는 오로지 개인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강사들 중에 자기 학생을 위한 교재를 스스로 구입하거나 개인 후원금을 내는 이도 많다. 학생들도 선생님들의 무료 자원봉사에 감동받아 적은 액수지만 기부금을 내기도 한다. 라티그 씨와 이은구 씨의 자비도 들어간다. 두 사람은 “탈북민들의 열망이 눈에 밟혀 힘들어도 이 일을 도저히 그만 둘 수 없을 것 같다”며 강한 열의를 드러냈다.

김학순 (Kim Hak-soon, 金學淳) 언론인,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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