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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s of Heritage

2016 WINTER

문화 예술

전통유산을 지키는 사람들 직물로 삶을 복원한다

18세기 중엽 조선의 왕이 사치를 금한다는 이유로 금사 문양을 넣어 짜는 비단 생산을 금지했다. 그 이후 왕실을 비롯한 상류사회의 금직 비단 수요는 청나라 수입품으로 조달했고 천년 넘어 내려왔던 화려한 직조 기술은 망각 속에 묻히게 되었다. 수십 년 고된 조사와 연구, 실험을 거쳐 완전히 잊혀졌던 금직 비단 직조술을 재현한 부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심연옥 교수의 작업실을 찾았다.

한국 전통문화대학교 전통미술공예과 심연옥 교수가 자신이 복원한 문직기 앞에 앉아 16세기 직금능을 짜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평소에는 심교수가 이끄는 전통섬유연구소 연구원들이 이 자리를 번갈아 지킨다.

우리는 과거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과거의 금실 제작 비밀을 이제야 풀었다”는 기사를 봤을 때, ‘과거의 직물’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른 채 그 동안 전통 복식의 금사(金絲) 문양을 얘기했던 것인가. 문화재라 불리는 것들의 과거는 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금사의 비밀을 풀다
“조선시대 출토 복식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복식의 형태 복원을 상당히 잘 해요. 옛날 바느질법 그대로 형태를 만들어 내죠. 문제는 소재예요. 동대문 시장에서 산 직물로 백제 옷, 고려 옷, 조선 옷을 만든다는 말이죠. 그건 반 쪽짜리 복원밖에 안 돼요.”
부드럽고 느슨하게 일상을 얘기하던 심연옥(Sim Yeon-ok) 교수의 목소리가 단호하고 팽팽해진다. 다른 나라의 경우 흔히 복식 복원의 기초는 소재 복원이다. 형태 복원은 그 다음에 논하는 것이었지만 우리나라는 많은 경우 그것이 불가능했다.

금박을 전통 한지에 아교로 붙인 뒤 광택을 내고 얇게 잘라 옛 방식의 금사를 만든다.

“특히 금사로 문양을 넣은 비단의 경우 손으로 짤 수 있는 문직기 전통이 단절된 지 오래예요. 조선 후기 영조 임금[재위 1724-1776]이 사치를 금한다는 이유로 1733년 금사 문양의 직조를 불허하는 교지를 내린 뒤로 금사 공예 기법도 사라졌어요. 이후 세월이 흐르며 20세기에 들어 모든 게 전자동으로 넘어가버렸어요. 1분에 얼마나 짤 수 있는지 속도로 말하는 자동화된 직기, ‘입체’가 아닌 ‘평면’을 짤 수밖에 없는 직기만 남은 거죠.”
그는 조선시대 실용 기술을 집대성해놓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수록된 문직기 도해와 중국에서 전승되어온 문직기 등 옛 문헌과 현존 자료를 분석해 문직기부터 복원했다. 길이 6m, 높이 4m 규모의 정교한 나무틀이다. 그러곤 돌아본 것이 과거 궁중, 양반가 복식의 정수였던 금사 문양이었다. 문양을 빛내던 재료, 금사 연구부터 시작했다. 금사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했다. 제자들과 국내외 111종의 문헌, 한중일 68종의 유물을 살폈다. 연구는 발견으로 이어졌다. 금사는 금을 실처럼 쭉 뽑아낸 것이 아니었다. 금박을 전통 한지에 아교로 붙인 뒤 광택을 내고 얇게 잘라 실처럼 만든 것이었다.
“고려시대 금사를 과학적으로 조사해보니 우리나라 전통 닥지 성분이 나왔어요. 함께 출토된 불교 경전의 종이와 같은 닥지였죠. 우리나라에서 금사를 만들고 짰다는 결론에 이른 거예요.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지역은 종이 대신 가죽을 썼어요. 가죽을 두드리면 종이보다 더 얇거든요. 가죽이 여의치 않은 지방에서는 동물의 창자를 택했어요. 일본과 중국이 종이를 썼는데 일본은 산닥나무 계통의 안피지, 중국은 뽕나무나 대나무를 활용한 상피지와 죽지로 우리와는 그 종류가 다릅니다. 이제껏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던 부분이 규명된 거죠.”
그는 이론의 규명에 그치지 않았다. 그 금사의 실체를 직접 보고 싶었고, 복원한 문직기로 그 시대 직물을 직접 짜보고 싶었다. 재현의 과정은 익숙하지 않은 조건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실을 만드는 데 쓸 닥지는 어떠해야 하는지 알아가야 했고, 최적화된 아교의 농도를 끊임없이 살펴야 했으며, 금박과 종이가 서로 안겨 하나 될 수 있는 시간과 환경을 헤아려야 했다.
가장 제어하기 힘든 건 자르기였다. 금박 붙인 한지를 0.3mm 두께로 자르는 것은 마음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오차 없이 자르기 위해 칼날을 끊임없이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감각과 집중력도 함께 갈아내야 그 작업을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얻은 실을 문직기에 걸고 문양을 짤 땐, 사소한 잡념의 침입에도 여지없이 끊어져 나가는 실을 이겨야 했다. 그는 마침내 금사 문양을 직조한 고려시대 직물 1점, 조선시대 직물 2점을 복원해냄으로 써 항상 응달에 있던 수공 직조술의 한 부분이 빛을 보게 했다.

금박 붙인 한지를 0.3mm 두께로 자르는 것은 마음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오차 없이 자르기 위해 칼날을 끊임없이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감각과 집중력도 함께 갈아내야 그 작업을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얻은 실을 문직기에 걸고 문양을 짤 땐, 사소한 잡념의 침입에도 여지없이 끊어져 나가는 실을 이겨야 했다.

발견의 순간들
하지만 그는 “그것은 전통 섬유 복원의 작은 성과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곤 이미 10여 년 전에 한국 직물사를 기술사적인 측면에서 체계화하여 한국전통직물도판 자료집인 <한국직물오천년>으로 집대성한 바 있는 저자답게, 복원이라는 단어의 품을 넓혀 이야기를 펼쳐갔다. 직물 복원은 몇 개의 퍼즐 조각으로 전체의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작업과 같다. 긴 세월 땅에 묻혀 있던 직물은 크고 작은 훼손을 피할 수가 없기에, 그는 늘 ‘천 쪼가리’와 같은 작은 단서에서 출발한다. 조각의 성격을 낱낱이 분석해 온전한 직물로 구현하고 일부만 남은 문양의 형태를 고증을 통해 완성하는 것, 그것이 그가 진행해 온 직물 복원이라 했다.

전통섬유연구소 박기찬 연구원이 문직기로 금사 문양을 짜 넣고 있다.

8세기에 세운 불국사 석가탑 해체 과정에서 수습한 직물 파편의 경우도 그랬다. “심하게 훼손된 직물이었는데, 문양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섬유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엮음을 한 올 한 올 다 세었어요. 수만 올을 3개월에 걸쳐서 세었죠. 그래서 결국 문양을 찾아냈어요. 선진적인 기술로 직조된 오채색 주머니였을 것이라 밝히고 실제 형태를 재현했어요.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직물이 없는 상황에서 의미 있는 복원이었죠.”
그는 발견의 순간들을 여럿 이야기했다. 금박인 듯한 조각에서 미미한 종이의 성분을 알아채고 그것이 금실의 흔적임을 논하던 순간도 있었고, 독특한 꼬임이 예사롭지 않던 조각이 백제의 면임을 밝혀 목화의 전래시기를 기존에 알려져 있던 14세기에서 700년이나 앞당긴 결정적 순간도 있었다. “노리개라고 추정되는 작은 직물 조각을 만났는데, 글쎄 열댓 종의 금사 직물을 조각조각 이어 구성을 했더라고요. 금박이며 자수며 모든 공예기법도 다 들어가 있고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서 보고 또 봤어요.”

그의 직물 이야기는 섬세하고 풍요롭다. “실크는 얄미울 정도로 화합을 잘하는 직물이에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화려함을 드러내는 방법도 잘 알죠. 변신에 아주 능해요. 모시는 아주 청아해서 건드리지 말아야 돼요. 녹차의 마지막 덖음을 ‘모시 빨래하듯’ 덖는 듯 안 덖는 듯 해야 한다잖아요. 모시는 아주 까다로워요. 그래서 본연의 성질을 그대로 드러내줘야 하는 직물이기도 하죠. 무명은 검박하고 순호하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가장 애를 먹이는 직물이에요. 솜털을 이어 만든 것이니 짜기 전까진 끊어지기 쉽거든요.”

단순해진 현대 의생활
그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전통 직물의 종류가 500종이 넘는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직물의 품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면서도 그 다양한 종류를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고 산다. 그는 ‘사철 깨끼한복’으로 그 이야기를 풀었다. “요즘 나오는 사철 깨끼한복이 우리 직물을 다 망쳐놨어요. 옛 한복은 계절을 세분화할 줄 알았거든요. 오늘 날씨에 입는 옷감이 있고, 조금 더 추워진 내일 입어야 하는 옷감이 또 있었죠. 한여름엔 모시, 은조사를 입다가 조금 추워지면 생고사가 등장해요. 추석 지나면 숙고사를 찾다가 그 담엔 항라도 입고, 조금 더 추워지면 그 항라에다 살짝 솜을 넣기도 하고. 그 다음에는 사시사철 입는 무명을, 조금 더 지나가면 능을 입었어요. 근대에 와서는 양단으로도 맞췄고. 사시사철 돌아가면서 입는 옷감의 종류가 수도 없이 많았어요.”
난방이 생활화되지 않았던 시절엔 몸이 알아챈 계절의 변화를 이길 것이 의복밖에 없었다. 당연히 몸을 감싸는 옷감에 세밀한 분류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옷감보다는 디자인으로 말하는 오늘의 옷은 그것을 끝내 모르겠지만.
그는 직물을 직물 자체로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을 꿈꾼다고 했다. 직물을 치밀하게 직조할 수 있었던 우리의 섬세함이 시대의 쓸모에 닿기를, 각 직물이 지닌 고유의 미감과 멋이 그 사이에서 환히 드러날 수 있기를, 그것으로 우리의 일상이 보다 풍요로워지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전통 직물은 현대 미술의 아이디어를 품은 보물창고라고도 했다. 직물로 시작한 이야기의 끝은 그렇듯 삶이었다.

금사 문양은 직물에 입체감과 기품과 화려함을 불어넣어 예부터 의례용 복식뿐만 아니라 장엄용 직물의 제작에도 폭넓게 사용되어 왔다.

스승과 제자
저에게 직물이란… ‘사람답게 해주는 것’이에요. 먹고 자는 것도 중요한데 왜 의식주(衣食住)라고 ‘의’를 가장 먼저 내세우는 건지를 늘 생각해 보거든요. 나를 나답게, 너를 너답게 해주는 것이 직물인 것 같아요.”
사람과 삶에 대한 심 교수의 화두가 어떻게 전해진 것인지, “직물이 당신에게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대한 제자 금다운 씨의 답변이다. “제자들이 있어서 전통섬유복원연구소의 모든 작업이 시작되고 진행되며 끝이 난다”고 거듭 강조했던 심 교수가 차를 우리던 손을 잠시 멈춘다. 그 사이의 침묵을 걷어내고자 “교수님의 어떤 점을 가장 배우고 싶은지”를 물었다. 돌아오는 답변은 질문을 뛰어넘은 듯했다. “이런 점이 멋지고 저런 점이 훌륭하단 이유로 교수님을 따르는, 그런 개념이 아닌 것 같아요. 자식이 태어나면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저절로 생겨지는 것처럼 존재 자체가 결부되는 것이랄까요. 지금 하고 있는 공부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입고 있는 옷처럼 내게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거죠.”
순리를 따르는 듯 평온한 얼굴의 제자를 심 교수가 조용히 바라본다. 성취를 이야기할 때마다 한국 전통 직물 연구의 기틀을 다지고 돌아가신 스승 민길자 선생을 빠뜨리지 않던 그의 얼굴에 많은 생각이 다녀간다. 그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인간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네가 있어서 학문을 하는 것이니 학문 때문에 너를 버리지 말아라” 하셨던 스승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상기한 것일까, “네가 이 책들을 욕심내지 않고 네 눈으로 직접 하나씩 알아간 것이 나는 고마웠다” 이르며 그 많은 손때 묻은 책들을 내어주시던 스승의 마지막 순간들을 기억하는 것일까. 사연으로 가득 찬 눈빛의 의미를 묻지 않고 떠나왔다. 스승과 제자의 짙은 이야기가 남아있는 그곳을, ‘직물과 사람’을 매개로 많은 것들을 피우고 돋우게 될 그곳을.

강신재 (Kang Shin-jae, 姜信哉)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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