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생인 조성룡은 한국 현대 건축에서 독자적 목소리를 내온 건축가다. 그는 공간에 내재한 역사와 공동체의 기억 등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축적되는 유무형의 가치를 존중하고 보존하며, 이를 현재와 연결하려 한다. 공동 주택이나 공공 건축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며 크고 작은 공동 주택과 미술관, 기념관, 공원 등을 꾸준히 설계했다.
서울 어린이대공원 내에 있는 꿈마루는 원래 골프장 클럽하우스로 지어진 건물이다. 노후화로 인해 철거 후 신축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었지만, 조성룡 건축가는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레노베이션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덕분에 이곳은 어린이대공원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낯설고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이 되었다.
ⓒ 김재경
“신축이나 증축만이 아니라, 오래된 장소와 건물을 재생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성룡의 이 말은 그의 건축 철학을 단적으로 웅변한다. 그의 작업은 형태의 완결을 궁극적 목표로 삼지 않는다. 대신 시간이 켜켜이 쌓이며 공간과 건물 표면에 남는 ‘흔적’을 통해 의미가 축적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흔적은 단순히 소멸이나 쇠퇴의 증거가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과 장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자원이기 때문이다. 조성룡의 건축은 그 자원을 어떻게 촉발하고 보살필 것인지를 묻는 지속적 실천이다.
한반도 남단에 자리한 작은 섬 소록도에 조성된 ‘국립소록도병원 100주년 기념 시설물’이 대표적 사례다. 2016년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기념 조형물 제작에 대한 의뢰가 들어왔지만, 그는 조형물 대신 소록도 마을의 역사를 보여주는 안내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한센병 환자들의 주거지인 이 섬의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기억할 것인지 고민한 끝에, 그는 1970년대 지어진 낡은 주택 한 채를 레노베이션하여, 이곳에 살았으며 또한 여전히 살고 있는 한센병 환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것이 소록도를 위해 건축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처럼 조성룡에게 건축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직결되는데, 건축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수많은 후배 건축가들에게 모범이 되고 자극을 주었다. 도시와 사람, 시간이 만나 만들어내는 서사를 보다 섬세하게 읽어내도록 만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조성룡의 업적은 완성된 건물 자체에 있기보다는 설계 과정에서 그가 제기했던 질문들이 쌓여 만들어낸 담론에 있다. 공공적 맥락을 중시하는 그의 시각은 설계 공모를 비롯해 교육·주거·문화 시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에 일관되게 드러난다.
조성룡은 건축의 사회적 역할과 공공적 가치를 끊임없이 탐구해 온 건축가이다. 건축물의 화려한 외관보다는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지닌 삶의 방식을 우선시한다. 특히 그는 공간에 내재한 역사의 흔적을 절제된 미학으로 되살려내는 건축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 한겨레신문
설계 공모에서 시작된 문제의식
설계 공모는 으레 제한된 프로그램과 규정, 촉박한 일정이라는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설계 공모는 건축가가 장소의 맥락을 압축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훈련의 장이 되기도 한다. 조성룡에게도 그것은 단순히 좋은 평면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설계 공모의 까다로운 조건들은 조성룡에게 대지가 지닌 역사성을 집중적으로 날카롭게 접근하도록 하는 장치로 작용했다. 초기 스케치와 다이어그램, 비교안들은 이후 실현 단계에서 형태와 기능을 검증하는 이론적·실무적 자산으로 남았다.
조성룡은 1983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선수촌 및 기념공원’ 국제 공모에 당선되면서 건축계에 등장했다. 서울 잠실에 있는 아시아선수촌아파트와 아시아공원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기념성과 일상성의 접점, 공공적 기억의 조직을 고민한 이 작업은 시설이 도시 경관과 시민 삶을 연결하는 장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파트의 질서가 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입주자들이 자유롭게 보행할 수 있도록 각 동의 1층을 필로티 구조로 만들어 비웠으며, 주차장과 주거동 사이에 널찍한 마당을 설치했다. 이 경험은 공적 시설의 설계가 기념적 요소와 일상적 사용을 어떻게 조화시킬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어 주었고, 이후 공공 프로젝트에서 장소성·공공성과 관련된 판단들을 반복적으로 촉발시켰다. 그에게 설계 공모라는 장은 결국 완성된 건물 하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질문을 발화하고 검증하는 연습장이었다. 그 연습은 이후 작은 작업이나 큰 공공사업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이응노의 집’은 한국 현대 미술의 거장인 이응노를 기리기 위해 고향 홍성에 세워진 기념관으로, 그의 굴곡진 생애가 건축으로 형상화된 곳이다. 조성룡은 옛 문헌을 조사해 과거의 지형을 살려내고, 완만한 산기슭을 따라 황토색 건물들이 주변 풍경 속에 녹아들도록 소박하게 디자인했다. 그러나 공간 내부는 긴장감이 감돌게 설계하여 외부와 대비를 이루도록 했다.
ⓒ 김재경
품위 있게 늙어가는 건축물
국립소록도병원 100주년 기념 시설물은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사용되었던 옛 병사 한 동을 레노베이션한 공간이다. 섬 초입에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던 건물을 없애는 대신 소록도를 찾는 방문객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환영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 김재경
교육 시설은 건축의 사회적 역할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프로젝트 중 하나다. 이런 공간은 단지 기능을 모아 놓은 그릇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 만남과 공적인 행위가 만들어지는 배경이자 촉매다. 조성룡이 인하대학교 학생회관 설계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단순한 프로그램 충족이 아니라, 내부 공간이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공동의 행동 양식을 길러내느냐였다. 그는 계단과 라운지 같은 가변적 회합 공간을 통해 우연한 만남을 촉발하고, 토론과 자발적 활동이 가능해지도록 했다.
조성룡은 또한 건축 재료가 시간의 흐름을 수용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인다. 건물의 벽과 바닥, 손잡이와 계단의 마감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색되고 닳는다. 조성룡은 그것을 건축물의 ‘풍화’라 일컫는데, 이 풍화는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일상과 함께 진행된다. 시간이 흐르며 쌓인 손때와 자국이 곧 공동체의 서사가 되는 것이다.
그는 여러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품위 있게 늙어가는 건축’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어떤 건물이든 지어진 그 순간부터 서서히 낡아가기 마련이므로 건물의 노후화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수십 년 전 지어진 낡은 건물들을 무작정 철거한다고 해서 도시 문제가 전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는 건물이 자연스럽게, 품위 있게 풍화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도시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대안이자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조성룡이 재료와 디테일을 신중히 고려하는 이유다. 그가 지은 건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운치가 느껴지는데, 이는 치밀하게 계획된 결과이다.
이는 주거 설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주거 설계에서는 작은 결정들이 일상의 풍경을 바꾼다. 창의 위치, 중정의 크기, 마감재의 촉감 같은 미세한 선택들이 쌓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집이 개인의 기억과 삶의 흔적을 담는 그릇이 된다. 이러한 판단은 단기적 편의가 아니라 장기적 삶의 질을 염두에 둔 설계적 약속이다.
장소성에 대한 관심
어린이대공원 꿈마루의 본체는 한국 현대 건축 1세대인 건축가 나상진이 1968년 설계한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이다. 이 건물이 철거 대신 재생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설계자였던 나상진도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재조명받게 되었다.
ⓒ 김재경
한편 조성룡에게 전시와 문화 시설은 건축적 사유를 공개적으로 시험하는 장이다. 1989년 도쿄에서 열린 <마당의 사상, 신세대의 한국 건축 3인전>은 제24회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주목받은 한국 현대 건축을 소개하는 건축 전시였다. 이 전시에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중 하나로 참여한 조성룡은 관객들과의 직접적 만남을 통해 장소성에 대한 자신의 건축적 사유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읽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장소성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장소의 기후적·경관적 조건을 설계 장치로 전환한 경기도 용인의 근대미술관 계획과 해운대 빌리지 프로젝트 등으로 이어졌다.
최근의 작업들에서도 장소성에 대한 관심은 계속된다. 서울 어린이대공원의 부속 건물인 꿈마루는 공원의 이용성과 프로그램을 연결해 세대 간 경험을 매개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며, 선유도 공원 관련 작업에서는 기존 장소의 생태적·문화적 맥락을 재해석하고 회복하는 노력이 읽힌다. 특히 해운대 빌리지나 선유도 공원처럼 자연과 맞닿은 장소에서는 염분·습기·바람 같은 물리적 조건과 생태적 변화가 설계 시 고려 사항이 되고, 그것들이 표면과 형상을 통해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도록 구성된다. 그런가 하면 미술관 같은 문화 공간은 단지 전시물을 담는 그릇을 넘어서 관객의 경험을 매개하고 도시적 기억을 생산하는 능동적 장치로 작용한다.
조성룡의 작업에서 개념적 스케치와 실천적 건축은 분리될 수 없는 관계다. 드로잉과 모형은 현실적 제약을 넘어서는 상상을 촉발하고, 당선된 공모안이나 실현된 건물은 그 상상을 검증하고 재정의한다. 대한주택공사의 초고층 아파트 당선 사례는 밀도와 수직성, 공동체 형성 문제를 재검토하게 만들었고, ‘바로크’로 불린 설계는 표면의 리듬과 형식적 실험을 통해 시간성과 경험의 중첩을 묻는 시도였다. 조성룡의 개념적 실험은 실현 가능한 전략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현장에서 마주하는 물리적·제도적 제약은 다시 개념을 숙성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 순환은 조성룡의 설계 언어를 다층적으로 만들어 주었고, 단일한 스타일이나 표면적 미학을 넘어 지속 가능한 설계 태도를 확립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