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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WINTER

공공 너머 미래를 향한 건축, 건축가 전숙희

건축가 전숙희는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건축이라는 매개를 통해 동시대의 주요 질문들을 탐구하며 대안을 제시해 왔다. 그녀에게 건축은 단순히 조형물을 구축하는 행위를 넘어, 사회적 맥락과 인간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실천적 사유를 담아내는 그릇과 같다.

경상남도 남해에는 농업용 창고로 사용하기 위해 화강암을 쌓아 만든 1920년대 건물들이 군데군데 있다. 전숙희 건축가는 한 도예가의 요청으로 그중 하나를 도예 공방으로 리모델링했다. 외관은 그대로 보존하되 아름다운 남해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도록 지붕에 전망대를 설치했다.
ⓒ 노경

전숙희는 건축이 개인의 공간을 넘어 사회 전체에 기여하는 공공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신념을 꾸준히 피력해 왔다. 그녀는 건축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건축 교육을 받았다. 특히 이화여대 건축학과 첫 입학생이었던 그녀는 선배들의 부재 속에서 자립적으로 모든 것을 찾아 해결해야 했던 경험이 독립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주었다고 회고한다. 이후 프린스턴 대학원에서는 소수 정예 교육 시스템 속에서 교수진과 학생들 간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깊이 있는 탐구를 할 수 있었다. 이는 그녀가 건축을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접근하게 된 토대가 되었다.

장영철 건축가와 함께 2008년 와이즈 건축사사무소를 공동 설립한 이래, 그녀의 작업들은 이러한 비판적이고 탐구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건축의 사회적 기능과 책임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95%의 건축

전숙희는 건축이 단순히 사적 소유물의 가치를 넘어, 사회 전체에 기여하는 공공성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녀에게 건축은 도시의 일부로서, 사람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사회적 자산이다. 따라서 건축가는 건물을 설계할 때 주변 환경과 조화로운지 고려하고, 지역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녀는 이러한 관점에서 ‘95%의 건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기존의 민간 영역에 집중된 5%의 특별한 건축을 넘어, 나머지 대다수의 건축물이 공공적 가치를 실현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은 아산나눔재단 프로젝트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녀는 비영리 재단의 사옥인 이 건물에서 ‘공공에 문턱이 낮은 집’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경험은 사적 소유물이라 할지라도 도시와 사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그리고 건축가로서 이러한 공공적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이후 참여했던 노무현시민센터 프로젝트는 이러한 철학을 실현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그녀는 조선 시대 궁궐인 창덕궁 인근이라는 특수한 장소성과 북촌 지구 단위 계획의 제약, 시민들의 의견 수렴 과정 등 여러 가지 큰 난관 속에서도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경험은 건축가가 단순히 도면을 그리는 것을 넘어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는 주체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노무현시민센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념하는 동시에 시민들을 위한 공공 공간으로 설계된 곳이다. 창덕궁 바로 옆에 위치한 이곳은 과거 나지막한 구릉지였는데, 이러한 지형적 특성을 건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바닥과 벽, 지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곡선을 활용했다.
ⓒ 노경

위안의 장소

전숙희는 건축가가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또한 그것을 잘 활용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건축가는 나무를 키우는 사람과 다르지 않으며, 나무가 숲을 이루기도 하고 정원이나 산책로가 되기도 하듯 결국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 건축가의 소임이라고 믿는다.
ⓒ 이민희

전숙희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지쳐 있으며, 위안과 휴식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녀는 개인이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소통하고 교류하며 정서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낯선 이들과 공존하는 공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공간, 역사적 의미를 내포한 공간 등이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녀는 절두산 순교 성지를 예로 들며,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선 비종교적 차원의 정서적 공간으로서 이곳이 많은 사람에게 휴식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언급한다.

또한 스웨덴 우드랜드 화장터를 방문했던 경험은 그녀에게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건축적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획일적인 현대의 장례 문화와 달리, 죽음을 엄숙하게 성찰하고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공간은 단순히 기능적 측면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슬픔을 치유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이처럼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건축적으로 섬세하게 다루는 것이 건축가의 중요한 역할임을 인식하고, 공간이 주는 위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피겨앤그라운드는 서울 강남 가로수길의 30여 년이 넘은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한 작업물이다. 폐쇄적이었던 저층부는 덜어내고, 상층부의 공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입면을 구성하는 벽돌 마감의 수평 띠는 발코니와 외부 계단인데, 각 층을 연결해 ‘길’을 형상화했다.
ⓒ 노경

건축가의 시각과 과제

서울 성산동 주택가 깊숙이 자리 잡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어디로 끌려가는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 부닥쳐 있었던, 과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을 재현한 공간이다. 큼직한 안내판이나 근사한 로비 대신 작은 문 하나만 외부로 열어둔 채 가이드가 방문자들과 동행하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선으로 설계됐다.
ⓒ 김두호

전숙희는 기후 변화와 인구 감소라는 두 가지 시대적 과제에 주목하며, 건축이 이러한 문제 해결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그녀는 인구 감소로 인해 발생하는 도시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며, 특히 한국 사회의 고유한 인구 구조적 특징에 대한 건축적 대응을 모색한다. 그녀는 서울의 인구가 800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인구학적 예측을 제시하며, 이에 따른 도시 공간의 재편과 기존 인프라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런가 하면 고령화 사회에 대비한 건축 설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노인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는 주거 환경 조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기술적인 해결을 넘어 사회 구조적 변화가 건축에 미치는 영향까지 통찰한다. 구도심의 쇠퇴와 신도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다양한 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간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건축가들이 반드시 직면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며, 그녀는 건축이 그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파주출판도시 내 자리 잡고 있는 뮤엠 사옥은 영어 교육 회사인 뮤엠교육의 부엉이 로고에서 착안해 그루터기 형태로 건물을 완성했다. 전체가 검은 벽돌로 이루어진 직사각형 형태의 건물에 율동감을 부여하기 위해 절개된 듯한 비틀린 형태의 출입구를 만들었다.
ⓒ 노경

중요한 것은 소통의 능력

전숙희는 건축이 단순히 설계 능력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건축 실현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과의 긴밀한 소통과 협력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건축주, 시공사, 그리고 여러 방면에서 경험을 쌓아 온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조율하며 최적의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설계도를 그리는 작업이 전체 프로세스의 일부에 불과하며, 실제 건물이 지어지기까지의 복잡한 과정에서 소통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건축은 결국 ‘관계’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나 혼자 20%를 잘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80%를 채워줄 수 있는 ‘관계’에 의해서 건물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 같아요. ‘관계’를 절차와 시스템, 심지어는 구현되지 않은 기술까지 아우르는 복합성을 띤 개념으로 확장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어둠 속의 대화>는 1988년 독일에서 시작된 글로벌 전시로, 암흑 속에서 시야가 차단된 채 다른 감각들을 일깨우며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묻는 프로그램이다. 어둠속의대화 북촌 전시장은 전통 대나무 발에서 모티프를 얻은 건물 외피를 통해 이 전시의 특징을 건축적으로 구현해 냈다.
ⓒ 김용관

뮤엠 사옥 프로젝트와 같은 벽돌 쌓기 작업은 그녀가 소통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 사례다. 초기 설계 의도와 현장 상황 간 불일치, 그리고 숙련공과의 소통 부족으로 인해 발생했던 어려움은 결국 현장에서 끊임없는 대화와 협의를 통해 해결될 수 있었다. 건축이 결코 건축가 한 명의 역량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소통, 그리고 때로는 고집과 자부심이 얽힌 결과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한 실패와 좌절의 경험을 공유하고 드러냄으로써 다음 세대가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선배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이는 건축계 전체의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과정이며, 건축이 단순한 기능 구현을 넘어선 사회적 역량을 발휘하는 토대가 된다.

"돌이켜보면, 건축이라는 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단순히 공간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 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만나고,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를 고민하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숙희의 건축은 단순히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 행위를 넘어, 우리 사회에 던지는 깊이 있는 질문이자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강력한 메시지다.

남해 돌창고의 내부는 곡식만 보관하면 됐던 단출한 공간을 현재의 용도에 맞게 바꾸기 위해 여러 방식의 보강이 필요했다. 오래된 목재 트러스를 철재로 바꿔 지붕을 떠받칠 수 있도록 했고, H빔을 설치해 기둥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 노경

박세미건축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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