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차이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으로 제74회 에미상 스턴트 퍼포먼스 상을 받은 스턴트 배우이다. 그녀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누군가 대신할 수 없는 연기로 작품에 기여하며 성취감을 느낀다. 나이가 들어도 현장을 누비는 베테랑 배우가 되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스턴트 배우 김차이는 경기도 하남에 위치한 베스트 스턴트팀(Best Stunt Team) 연습실에 출퇴근할 때마다 오토바이를 애용한다. 그녀를 비롯해 베스트 스턴트팀 배우들은 < 오징어 게임 >으로 비영어권 최초 에미상 스턴트 퍼포먼스상을 받았다.
당신은 김차이를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그녀는 영화와 드라마 속 액션 장면에 숨을 불어넣는 스턴트 배우이다. 글로벌 히트작 <오징어 게임>(2021)에서 주인공들 중 하나인 새벽을 연기한 배우 정호연의 대역이 바로 그녀였다. 그리고 <오징어 게임>과 같은 해 11월 개봉한 영화 <유체이탈자(Spiritwalker)>에서는 여우 역으로 개성 있는 액션을 선보이며 얼굴을 알렸다. 이 영화는 제20회 뉴욕 아시안영화제에서 다니엘 A. 크래프트 우수 액션시네마 상을 받았다. 또한 <다음 소희(Next Sohee)>(2023), <콘크리트 유토피아(Concrete Utopia)>(2023) 등 국내외에서 주목받은 한국 영화의 무술팀으로 활약했다.
최근에는 한소희, 전종서 주연의 영화 <프로젝트 Y(Project Y)>와 전도연, 김고은 주연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자백의 대가(The Price of Confession)> 촬영으로 바빴다. <자백의 대가>는 김차이가 처음으로 참여한 영화 <협녀, 칼의 기억(Memories of the Sword)>(2015)에서 함께한 두 배우들과 재회한 작품이라 더욱 뜻깊었다. 지난 10년 동안 성장을 거듭한 결과, 이제 그녀는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들의 액션 연기를 대신하는 스턴트 배우로 우뚝 섰다.
나만의 무기
이 여정의 시작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소극적인 어린아이였던 김차이에게 숨겨진 끼가 있음을 직감한 어머니는 딸을 연기 학원에 보냈다. 덕분에 그녀는 초등학생 때부터 과자 광고를 찍고 아역 배우가 되었지만, 연이은 오디션에 지쳐 사춘기 시절 잠시 방황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예술고등학교와 대학 연기과에 진학하며 배우의 꿈을 놓지 않았다. 기회를 잡으려면 나만의 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깨달음도 일찍 얻었다.
아크로바틱에 자신 있었고, 몸 쓰는 일에 늘 뛰어났던 그녀는 액션에 눈을 돌렸다. 배우는 넘쳤지만, 액션 전문 배우는 흔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작품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그녀는 액션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어디서 액션 연기를 배울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남들보다 운동을 잘한다고 해서 감독의 부름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묵묵히 의지를 다지고 있었던 김차이는 대학 교양 과목으로 택한 호신술 강의를 듣던 중 인연을 만났다. 호신술을 가르치던 교수는 학생들 사이에서 유달리 돋보이는 그녀를 눈여겨봤고, “격투기 선수로 키워 보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그는 액션 배우가 되고 싶다는 그녀에게 당시 스턴트 배우로 활약하던 제자를 소개했다. 이들의 만남은 또 다른 스승을 모시는 기회로 연결되었고, 드디어 본격적으로 스턴트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대학에 다닌 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아역 배우로 데뷔한 김차이는 어린 시절 태권도, 검도, 스피드 스케이팅 등을 즐겨 했고 자신의 강점과 특기를 살려 스턴트 전문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일에 대한 자긍심
김차이는 스턴트 배우로 일하면서 복합적인 감정의 터널을 통과했다고 고백했다. 오래전 계획한 대로 액션이라는 강점을 키울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정극 연기에 대한 갈증도 깊어졌다.
“대역이 아닌 ‘진짜 배우’로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언제나 마음 한쪽에 있었어요. 꿈을 꿈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아 조급했던 적도 있었고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널리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서 작품에 기여한다는 만족감이 크다고 강조했다. 스턴트 배우로서 자긍심을 다지게 한 동력은 트로피였다. 김차이는 <오징어 게임>을 함께한 스턴트 팀원들과 같이 제74회 에미상 스턴트 퍼포먼스 상을 받았다. <호크 아이(Hawkeye)>, <문나이트(Moon Knight)>, <기묘한 이야기(Stranger Things)>와 같은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받은 상이라 더욱 놀라웠고 기뻤다. 쉽게 얻어진 상은 아니었다. 한여름엔 뙤약볕 아래에서 400여 명의 군중들과 호흡을 맞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시퀀스를 완성했다. 한겨울에는 살이 에이는 추위에도 맨살을 드러내야 했다.
그녀는 이 드라마에서 새벽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절박한 심경을 액션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호연 배우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살펴봤고, 신체적 특징과 습관을 면밀히 관찰해 액션 연기에 반영했다.
“내가 살면서 이런 상을 받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김차이는 수상 후 3년이 흘렀음에도 그때의 벅찬 감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스턴트 배우들을 대표해서 받는 상으로 여겼다”는 말을 덧붙였다.
액션 베테랑을 향해
김차이는 액션, 스릴러 장르에 주로 출연하지만 사실 로맨스 영화를 즐겨왔다고 한다. <클래식(The Classic)>(2003)처럼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보며 혼자 펑펑 운 적도 있었다. 촬영 현장에서는 모든 에너지를 뿜어내지만, MBTI가 ‘I’로 시작하는 내향형 인간인지라 집에 가만히 누워 있는 걸 낙으로 삼는다. 그런 김차이의 곁에는 특별한 친구가 있다. 그녀가 중국에서 촬영을 하던 시기에 만나게 된 중국인 친구다. 그녀는 연출을 전공하면서 한국 영상 산업에 관심이 생겨 서울에서 어학연수 중이다. 2016년부터 우정을 쌓아온 두 사람은 급기야 룸메이트가 되기에 이르렀다.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친구가 요리를 해줘요. 중국인답게 따뜻한 차도 자주 내주고요. 처음에는 영어로 소통했는데, 점차 서로의 모국어에 익숙해지고 있죠.”
친구가 한국어를 배우는 동안 그녀도 중국어를 조금씩 익힌 덕분에 이제는 제법 의사소통이 수월해졌다고 한다. 친구의 안내로 상하이 여행을 다녀온 김차이는 그녀에게 한국을 알려주고 싶어 얼마 전 강릉 여행을 함께하기도 했다.
“여행을 하면서 그동안 나 자신을 일에만 너무 가두고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찾아오는 여유로운 시간을 중히 여기며, 앞으로 더 많은 곳에 가볼 계획이에요. 소소한 것에서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도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 같아요.”
동료들과 풋살 팀을 꾸려 휴식하듯 운동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숨 고르기의 미덕을 깨우치자 목표를 대하는 자세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20대에는 “스턴트 연기의 특성상 30대 후반이면 은퇴해야 하는 게 아닐지 걱정이 많았다”던 그녀는 이제 환갑이 되어도 촬영장을 누비는 액션 베테랑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 꿈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배우로서 얼굴을 드러낸 자신을 상상하기도 한다. 다시 연기 공부를 열심히 해서 40대가 되기 전에 이름 있는 배역을 맡아보고 싶기도 하다. 그 바람을 전하는 김차이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세상은 넓어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해외에서도 일해 보고 싶어요. 언젠가 할리우드에서 활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의 앞길은 창창하니까요!”
김차이 씨가 동료와 함께 훈련 중인 모습. 촬영 현장은 항상 안전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평소 동료들과 합을 맞추는 연습에도 최선을 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