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식민지 포로가 되어 비좁은 우주선에 몸을 싣고 다른 행성으로 가던 그녀는 한 소년 덕분에 힘을 얻는다. 담갈색 눈동자와 붉은 머리를 지닌 소년 또한 다른 식민지 출신이다. 이들이 마침내 도착한 낯설고 적대적인 하얀 행성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의 조건은 단 하나, ‘유령’이라 불리는 괴물 종족을 섬멸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주선의 문이 열리는 순간, 모든 희망은 하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지독한 안개는 포로들의 시야를 가리고, 소년이 갖고 있던 무기마저 무용지물로 만든다.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안개를 뚫고 날아온 날카로운 백색 광선이 소년의 몸을 어깨부터 허리까지 단숨에 두 동강 내버린다. 그녀는 절규하며 무릎을 꿇지만, 슬퍼할 여유조차 없다. 방금까지 그녀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또 다른 광선이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는 빛을 반사하는 붉은 칼집에 든 칼 한 자루다. 천운으로 칼집이 적의 살상 광선을 반사해 낸 덕분에 그녀는 가까스로 유령 외계인을 무찌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안개 속에는 살상 광선으로 무장한 외계인들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고, 등 뒤에는 퇴각하는 포로를 사살하려는 무자비한 제국 군인들이 서 있다. 사면초가의 이 행성에서 그녀는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베테랑 번역가 안톤 허를 통해 영미권에 소개된 정보라 작가의 잔혹한 SF 소설 『붉은 칼』은 이처럼 강렬한 흡입력이 있다. 무심한 죽음이 도사리는 곳에서 생의 끈을 놓지 않는 무명의 주인공을 집요하게 쫓아가는 작품이다. 작가는 주인공을 집어삼킬 듯 휘몰아치는 차갑고 기계적인 폭력을 가감 없이 묘사하며, 독자들을 그 절박한 현장으로 밀어 넣는다.
각 장 사이에 배치된 짧은 에피소드들은 이 죽음의 행성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실체를 조금씩 드러내는 퍼즐 조각과 같다. 독자들은 아마 주인공보다 먼저 그녀가 처한 상황을 눈치채게 될 것이며, 이러한 ‘비극적 아이러니’로 인해 더욱 충격적인 결말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제 지켜볼 부분은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깨닫게 된 그녀가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붉은 칼』은 여타 훌륭한 SF 소설들이 그러하듯, 긴장감 넘치는 서사 너머로 인간다움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포로들의 목숨을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며 소모품처럼 전장에 내모는 제국의 비인간성은 언뜻 허구처럼 보이지만, 우리 현실과 맞닿아 있지 않았다면 이토록 강렬한 울림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전선 너머 맞은편에서 미지의 타인을 ‘괴물’이나 ‘유령’으로 낙인찍는 것 또한 인류 역사에서 자주 보았던 전쟁 선동 방식과 닮아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정체성 형성에서 ‘기억’의 역할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결국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억이 이끄는 대로 그저 정해진 길을 따라 가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때로는 무력해 보일지라도,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나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우주선의 엔진 굉음과 처절한 전장의 소음이 잦아든 뒤에도, 이 작품은 당신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긴 여운을 남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