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의 두 번째 장편 소설인 이 책의 주인공은 ‘김지혜’다. 1988년생 여자 이름 중 가장 흔한 이름이기에, 그녀는 수많은 ‘김지혜들’ 속에 파묻힌다. 하지만 그녀에게 익명성은 오히려 편안하다. 무대에 선 사람들을 객석에서 지켜보면서, 조용히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다.
서른 살이 된 김지혜는 대기업 DM그룹의 교육 계열사인 DM아카데미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자신이 원했던 인생은 아니었다. 꿈도 희망도 이루지 못했고, 미래는 불확실하기만 하다. 그런데 마치 맑은 하늘에 번개가 치듯 그녀의 일상에 한 남자가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바뀐다. 두 번째 인턴으로 채용된 이규옥이다. 물 같은 지혜에 비해 그는 불과 같은 성향이지만, 둘은 의외의 동지가 된다. 우쿨렐레 수강생 남은주와 고무인까지 합류하면서, 세상의 권위에 맞서고 정의를 구현하는 4인조가 탄생한다. 이들의 목표는 거창하지 않고, 방식도 유쾌하다. 갑질하는 상사를 상대로 협박문 느낌의 쪽지를 남기거나, 다리 밑에 낙서하고, 싫어하는 정치인에게 달걀을 던지는 정도의 소소한 장난이다.
처음엔 이 장난들이 나름대로 효과를 보인다. 체제가 전복되거나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의 일상은 조금 더 나아진다. 그런데 지혜는 점점 마음이 무거워진다. 진정한 변화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마침내 사상 최대의 계획을 실행할 기회가 찾아온다. 과연 4인조는 지혜가 바랐던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니면, 세상과 맞서 싸우기보다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이 현명하다는 현실주의자들의 말이 옳았음을 깨닫게 될 것인가?
지혜의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서른을 넘긴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10대에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변화가 너무 많아 스스로를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다. 그 시기가 지나고 20대가 되면,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디디며 가능한 많은 경험을 쌓아가게 된다. 그러나 30대에 접어들면, 사회는 ‘이제 진지하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하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사회가 정해 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틀에 맞서서, 자신이 원하는 꿈을 좇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혜는 둘 중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최소한 모두에게 맞는 답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각자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자신만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읽고 얻은 메시지다. 독자마다 서로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손원평의 작품이 탁월한 이유는 모두에게 똑같은 해답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받아들인다. 앞으로도 분명 그녀의 인생에는 수많은 시련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녀는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