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무더운 어느 일요일 저녁, 정수는 담배를 피우러 집을 나선다. 모든 것이 평범해 보이던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색의 구가 나타나 사람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지르던 이들은 순식간에 새까만 덩어리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도시는 공포에 휩싸이고, 구는 천천히 그러나 끈질기게 사람들을 쫓아다닌다. 그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두려움은 극에 달한다. 정수는 부모님을 찾기 위해 남쪽으로 서둘러 나서지만, 곧 자신 또한 끝없이 위협하는 구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도망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는 과연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면 결국 굴복하고 절망에 빠지게 될까?
이것이 바로 김이환의 『절망의 구』 속 주인공이 처한 위기다. 이 작품은 2009년 처음 출간되었으나 최근에야 영어로 번역되었다. 10년이 훌쩍 지난 작품이지만, 마치 코로나19 팬데믹을 배경으로 한 것처럼 여전히 시의성을 지닌다. 좀비 영화에 익숙한 독자라면 좀비 영화와의 유사점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좀비처럼 구 또한 아무것도 개의치 않으며 거침없이, 살아 있는 자들을 집어삼키려 한다. 느리게 움직여 달아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공포는 그 압도적인 규모와 결코 멈출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위기가 확산되고 두려움이 고조되면, 좀비 영화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류 사회의 근간이라 믿었던 문명성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남는 것은 결국 각자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뿐이다. 더 나아가 『절망의 구』에서는 좀비 영화의 공통된 주제이기도 한 미디어의 불신 문제가 드러나며, 어떤 정보가 진실인지 가려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공포와 고통은 더욱 극대화된다
한편, 구는 좀비와 다르다. 인간과 괴물 사이 어디쯤에도 속하지 않는다. 또한 좀비로 인한 세상의 종말이 흔히 바이러스의 발병이나 초자연적 현상으로 설명되는 것과 달리, 구는 완전히 미스터리다. 그 어떤 논리나 동기로도 설명할 수 없는, 철저히 낯설고 불가해한 존재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무섭고, 현대 사회의 막연한 불안과 절망의 메타포로 기능한다. 저자가 말하듯, “무언가로부터 도망치지만 정작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지는 결코 알 수 없는” 바로 그러한 상태다.
『절망의 구』는 뛰어난 과학소설이 대개 그러하듯,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성찰과 비판을 담고 있다. 한국 작가가 한국을 배경으로 집필한 만큼, 의무 군복무 제도나 그로 인해 형성된 부정적 남성성 같은 한국 특유의 문화적 맥락도 담고 있다. 그러나 작품이 던지는 물음은 궁극적으로 인류 전체를 향한다. 위기 속에서 우리는 누구를 믿을 것인가? 모든 것이 붕괴되는 순간에도 우리는 품위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가? 놀라운 결말과 함께 『절망의 구』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관과 사회에 대한 인식을 되돌아보게 하며, 스스로에게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던지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