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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SUMMER

두 세계를 잇는 조각

1935년생인 김윤신은 1970년대 한국 조각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1세대 조각가이다. 198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로 이주하면서 국내 주류 모더니즘에서 단절된 채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각 문법을 구축했다. 동양의 음양 사상에 기반을 둔 작업 철학을 초기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견지해 오고 있다.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본 전시에 처음으로 초청, 국내외 갤러리들의 주목을 받으며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2024년 서울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김윤신 개인전 《Kim Yun Shin》 전경이다. 작가가 한국으로 거점을 옮긴 후 국내에서 처음 개최한 전시이며, 목조각 연작과 함께 회화 작품 등 총 50여 점의 작품이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국제갤러리 제공

나무를 깎고, 돌을 다듬는다. 어쩌면 예술의 가장 오래된 몸짓이 이런 것 아니었을까? 우리가 예술을 갈망하고 추앙하는 이유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최첨단 시대에 문득 아련히 떠오르는 근본에 대한 그리움. 김윤신의 작품 앞에서 그저 먹먹하게 한참을 서 있는 이유다.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용인의 호암미술관에서 최근 최대 규모의 김윤신 회고전이 열렸다. 소원을 비는 돌탑처럼 쌓아 올린 나무, 든든한 장승처럼 우뚝 선 나무, 껍질까지 고스란히 제 모습을 드러낸 나무까지. 1970년대부터 이어온 김윤신의 목조각이 숲처럼 펼쳐졌다. 그녀의 별명은 ‘전기톱을 든 90세의 할머니 조각가’. 그녀가 든 톱은 나무를 베어 숨을 끊어놓는 게 아니라 나무를 다듬어 숨통을 열어준다. 희한하게도 그녀의 작업은 차가운 돌조각에서도 나눠먹을 수 있는 빵 같은 온기가 감돈다.

예술로 다독인 역사의 상흔

김윤신은 나무 및 석재 조각, 석판화, 회화를 아우르며 고유의 예술 세계를 일구어 온 한국의 1세대 조각가이다. 재료와 기법을 탐구하는 실험을 통해 조각, 회화, 그리고 회화 조각이라는 영역으로 작업을 확장해가고 있다.
사진 전명은, 호암미술관 제공

김윤신은 잘 나가던 작가, 안정적인 교수 자리를 박차고 198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이유는 하나. 그곳의 나무가 좋아서다. 40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열린 2023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의 개인전은 방탄소년단의 RM을 비롯한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그 전시장을 다녀간 또 다른 중요 인물이 있었으니, 이듬해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 예술감독을 맡았던 아드리아노 페드로사였다. 이후 세계 최고 비엔날레의 초청, 글로벌 갤러리의 러브콜, 아트페어에서의 주목, 뉴욕·런던에서 열린 개인전…. 수십 년간 지구 반대편에서 묵묵히 작업만 하던 김윤신은 이렇게 재발굴됐다.

두 세기를 건너, 두 대륙을 가로지르며 오로지 예술 하나로만 사는 그녀에게 기자들이 만날 때마다 하는 질문이 있다.

“왜 당신 삶에는 작업밖에 없나요?”

김윤신의 답은 매번 똑같다.

“삶이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니까요. 왜 나무 조각이냐고? 어려서부터 나무는 내 친구였어요. 내가 나무이고, 나무가 곧 나예요.”

그 말을 이해하고, 그녀의 작품 앞에서 서성이게 하는 먹먹함의 뿌리를 찾기 위해 8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윤신 작가는 어린 시절을 강원도 북부 안변의 산골 마을에서 보냈다. 두 지역 모두 현재 북한 영토이다. 1남 5녀의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그녀의 언니들은 결혼해 출가했고, 열한 살 위 오빠는 독립운동을 위해 집을 떠났다. 아버지는 중국 만주에서 한의사로 일하고 있었으니 곁에는 어머니밖에 없었다. 어느 날 책 싼 보자기를 어깨에 메고, 산을 넘어 학교를 오가던 김윤신의 눈앞에 아름드리 소나무 수십 그루가 쓰러져 있었다.

“저 좋은 나무를 왜 베었을까. 아휴, 저걸 다 일으켜 세워야 하는데!”

그때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로, 일제는 전투기 연료 확보를 위해 소나무의 뿌리를 캐고 송진을 짜냈다. 또래 아이도 없는 산골 마을에서 김윤신의 친구는 나무뿐이었다. 꽃과 벌레가 말동무였으며, 수수깡과 진흙이 장난감이었다.

“어머니는 새벽마다 나를 데리고 산에 가셨어요. 3대 독자 외아들이 살아 돌아오길 바라는 기도를 매일 드렸어요. 내가 작은 돌 하나를 찾으면 어머니는 그 위에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시고, 촛불이 꺼지면 나는 또 다른 돌을 가져와 그 위에 얹고 또 촛불을 켰죠.”

김윤신은 1945년 여름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가 중국에서 해방을 맞았다. 어수선한 시기에 홀로 두만강을 건너야 했고,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도 여럿 봤다. 천신만고 끝에 집에 돌아온 그녀는 어머니와 재회했다. 몇 년 후에는 한국전쟁이 터졌다. 열다섯 살 김윤신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떠밀리듯 피난을 떠났다. 아흔이 넘은 지금도 그녀는 폭죽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버지와 언니들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렇게 트라우마가 됐을 법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김윤신은 예술혼으로 다졌다. 쓰러져 간 소나무와 죽어 간 생명들에 사랑과 정성을 담았다. 나무토막을 켜켜이 올린 1970년대 제작한 ‘기원 쌓기’ 연작의 출발 지점이다. 한옥 집 짓는 방식처럼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나무토막을 맞추며 쌓아올렸다. 그러다 보니 전시 후에 작품이 흩어지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원목을 중간중간 깎고 다듬어 쌓아 올린 형태의 작업이 탄생했다. 깎은 나무에서 새벽의 돌탑이 어른거린다. 원시 사회의 ‘토템’을 떠올리는 경우도 많다. 작가는 이것을 “삶이 매달린 생명의 나무”라고 부르곤 했다.

<내 영혼의 노래 2013-50>. 2013. 캔버스에 유채. 150 × 460 cm. 개인 소장.
© Kim Yun Shin
사진 김윤신조형예술연구소, 작가 제공

작가 정신의 탄생

<노래하는 나무 2013-16V1>. 2025. 알루미늄에 아크릴 물감. 135 × 202 × 56 cm. 김윤신조형예술연구소 소장.
© Kim Yun Shin
사진 전명은, 호암미술관 제공

김윤신은 1955년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했다. 단색화의 하종현, 전위예술(아방가르드)의 이승택 등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1964년 12월에는 파리 유학길에 올랐다. 전후 프랑스로 간 한국의 미술가 대부분은 중견 남성이었으니, 조각을 공부하러 파리로 간 여성 예술가는 김윤신이 처음이었다. 파리에서 그녀는 다양한 현대미술을 경험했고, 내면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추상미술에 눈을 떴다. 조각을 가르쳐 드리며 가깝게 지낸 이응노의 ‘동백림 사건’을 목격하기도 했지만, 68혁명의 자유로움도 체득했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1969년 봄, 급히 귀국했다.

귀국 후 그녀는 주목받는 조각가가 됐다. 1973년 제12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이우환·권영우·김창열과 함께 한국 대표로 초대됐다. 이듬해에는 최초의 여성 조각가 단체 ‘한국여류조각가회’ 발족에 참여했다.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1978년부터는 나무 껍질을 그대로 둔 채 속살을 다듬어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 시작됐다. 나무의 고유한 형태를 지키면서 그 안에 작가 정신을 불어넣는 방식이다. 마침내 김윤신은 자신의 작업에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 개체가 ‘합이(合二)’되어 ‘하나(合一)’로 만나며, 그 합이 다시 둘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인간 존재처럼 계속 무한대적으로 합과 분이 반복된다. 전기톱을 사용해 분(分)에 의하여 창조된 선과 면은 합(合)인 동시에 분(分)이다. 나의 정신, 나의 존재, 그리고 나의 영혼은 비로소 하나가 된다.”

김윤신의 작가 노트 ‘재료와 대화를 시도하다’ 중 한 대목이다.

두 세계의 합일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2026년 3월 17일부터 6월 28일까지 개최된 조각가 김윤신의 회고전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 1층 전시장 전경. 이곳에는 작가의 예술 세계가 형성되기 시작해 완성에 이르렀던 1990년대까지의 주요 작품들이 선보였다.
사진 전명은, 호암미술관 제공

작품은 우직하고 작가는 솔직하다. 김윤신은 이민 간 조카의 초청으로 방학을 틈타 아르헨티나를 방문했다. 뿌리를 내리게 된 이유는 단순하고 근원적이었다. 지평선이 아름다웠고, 사람들이 순했으며, 재료가 될 굵고 단단한 나무가 무성했다.

해방과 전쟁에서 살아남은 김윤신은 두려울 게 없었다. 길가에 쓰러진 가로수를 끌어다가 작품 두 점을 만들었다. 무작정 한국대사관을 찾아가 전시를 하고 싶다 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현대미술관 관장을 설득했다. 호평과 함께 1985년 현지 첫 개인전을 열었고 그렇게 40년이 흘렀다.

작가의 목조각은 ‘자연주의’다. 그녀는 작업에 맞춰 나무를 구하지 않는다. 일단 원목을 구해다 작업실에 펼쳐놓고 며칠 동안 관찰한다. 나무의 크기, 형태, 단단함, 향, 껍질, 옹이와 나이테까지 자세히 관찰해 특징을 파악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대화’라 부르는데, 소통하고 파악한 후에야 비로소 전기톱을 든다. 나무 그 자체에서 작업이 시작되고, 나무와 호흡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쉼없이 완성해 나간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뜻밖의 전환을 불러왔다. 원목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주변에 버려진 목재를 모아다 작업했다. 못 없이 나무를 잇는 방식으로 일으켜 세웠다. 각 면에 색을 입히니 풀 죽은 나무에 생기가 돌았다. ‘회화-조각’인 셈인데, 어차피 김윤신에게는 평면과 입체라는 장르의 경계도 없었다. 고립의 제약이 오히려 두 세계를 하나로 합일시켰다.

파블로 피카소는 이국적 문물로서 남미와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졌지만, 김윤신은 아예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한국에서 모더니즘이 한창일 때 스스로 낯선 땅의 이방인이 된 그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한국성을 구현했다. 서양에서 빌려온 문법을 다듬은 것이 아니라, 끊겼던 우리의 오래된 문법을 다시 찾아 이었다.

김윤신에게 작품은 닫힌 결말이 아니라 매 순간 다시 시작되는 열린 과정이다. 합쳐서 하나가 되고 다시 둘로 나뉘어 각각의 하나가 되는 무한한 순환 속에서 조각가의 소원은 여전히 단 하나다.

“내 소원은 작업하다가 죽는 거야. 예술이 삶이 되어야지.”

조상인 아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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