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한(본명 한지혜)의 작업은 매끈하고 꿈결 같은 형광 팔레트 속에서 그로테스크와 아름다움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스크린의 질감을 회화적 경험으로 옮기며,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시각 언어를 제시하는 그녀의 작업은 젊은 세대를 사로잡는다.
< Case_01_01(toxin) >. 2020. 디지털 프린트, 라이트 패널. 100 × 100cm.
2020 부산비엔날레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커미션.
© 람한, 휘슬갤러리
람한은 자신을 디지털 페인터라 소개한다. 작업 과정에서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는 미술가를 통상 ‘디지털 아티스트’라 부르지만, ‘디지털 페인터’는 그리 흔한 용어가 아니다. 그녀는 붓과 물감 대신 태블릿 펜과 픽셀로 그림을 그린다. 떠오른 생각과 일상의 풍경을 스마트폰으로 기록하고, 이를 바탕으로 액정 태블릿에서 스케치와 채색을 거쳐 작품을 완성한다. 스케치부터 마감까지 즉흥성이 크고, 디지털 파일의 기록성을 활용해 끊임없이 수정·갱신한다. 화면 위에 색을 찍고 선을 긋는 작업 과정을 분명한 회화 행위로 인식하는 그녀는 관람객이 작업의 ‘회화성’에 집중하길 바란다. 디지털이 일상화된 오늘날, ‘디지털 페인터’라는 명명은 회화의 정의가 갱신되어야 함을 환기한다.
블로그에서 미술관으로
디지털 환경을 바탕으로 한 람한의 작업은 가상과 현실, 기억과 환상이 뒤섞인 독특한 세계관을 선보인다. 서브컬처의 요소들이 작품에 녹아 있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열성적인 팬덤이 형성되었다.
© 람한, 휘슬갤러리
작가의 이름 ‘람한’은 활동명이다. 학창 시절 별명 ‘람쥐’에서 딴 ‘람’에 본래 성 ‘한’을 붙여 만든 이름이다. 람한은 10대 후반부터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블로그에 만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을 게재해 왔다. 디지털의 가상 세계는 그녀에게 일찍부터 활동의 장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과에 재학하면서는 인스타그램(@ram__han)으로 개인 작업을 꾸준히 공개했으며, 출판사의 책 표지 의뢰를 비롯해 애플·LG OLED·빅히트·SM 엔터테인먼트 등과 협업을 병행했다. 2017년 첫 개인전 《나이트캡》을 열고, 일러스트레이션 화집 『Let’s meet at 7pm』을 발간하는 등 소규모 전시와 출판물을 통해 차츰 활동 반경을 넓혔다.
2018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이 개최한 단체전 《유령팔》에 참여하게 되면서 람한은 비로소 제도권 미술계에 본격 진입했다. 이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는 SNS를 통해 람한의 작업을 발견하고, 디지털 기반의 가상 세계를 창작 거점으로 삼아 매체와 형식을 실험하는 작가로 그녀를 주목했다. 그동안 온라인에서 작업을 선보여 온 그녀는 이 전시에서 처음으로 대형 설치 연작을 전시장에 구현했다. 가로·세로 3미터 규모의 디지털 페인팅 연작은 ‘컴퓨터 안’의 작업을 ‘컴퓨터 밖’으로 어떻게 구현할지에 대한 고민을 본격화한 계기였다.
디지털 질감을 오프라인에서 충실히 재현하기 위해 그녀는 조명용 필름(백라이트 필름)에 아카이벌 프린트를 한 뒤 뒤쪽의 LED 광원으로 비추는 라이트 패널 방식을 고안·적용했다. 호텔 객실을 모티프 삼은 이 연작에는 어항이 나란히 들어선 벽장, 침대 위에 뛰어오른 흰토끼, 원형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비행기 등이 배치되어 있다. 공간의 기능을 의도적으로 제거해 판타지만을 부각시킨 이 연작의 향수 어린 색감과 구성은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속 러브호텔 장면, 그 화려하면서도 쓸쓸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1989년생의 세계관
< Save our souls_05 >. 2022. 디지털 프린트. 14 x 28cm.
© 람한, 휘슬갤러리
< Room type 02 >. 2018. 디지털 프린트, 라이트 패널. 300 × 300cm.
2018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유령팔》 커미션.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소장.
© 람한, 휘슬갤러리
휘슬 갤러리 이경민 대표는 “세대론으로만 환원하면 비평의 여지를 좁힐 수 있으나, 작가가 소재를 선택하고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에 동세대의 관심사가 강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1989년생인 람한의 미감은 만화·애니메이션·게임 등 서브컬처에 깊게 닿아 있다. 그녀는 ‘아니메’의 세계에서 성장했으며, 일본 만화 특유의 아름다우면서도 잔혹한 미학과 조형미에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1999년 발매된 넥슨의 롤플레잉 게임 일랜시아가 주는 자유도 높은 세계관과 동서양 미감의 결합은 람한이 펼쳐내는 상상력의 지층을 이룬다. 그녀는 지금도 새로운 게임을 발견하면 그 세계관을 직접 체험해 보는 편이다.
그런가 하면 <인터스텔라> 같은 SF 영화와 피겨 문화 또한 주요한 참조 목록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상징하는 가수 엄정화의 <몰라>와 이정현의 <바꿔>로 대표되는 사이버 감성의 대중음악 비주얼은 밀레니얼 기억과 결합해 화면에서 재조합되고, 인터넷 대중화 초기에 검열 없이 접한 자극적인 이미지들이 남긴 시각·정서적 흔적은 형광 계열 팔레트의 질감으로 응결된다.
람한은 《유령팔》 이후 2020년 부산비엔날레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 《게임사회》, 2024년 예술경영지원센터 우수 전속 작가 기획전 《다이얼로그: 경계인간》 등 국내 주요 기관 전시와 아트페어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의뢰 작업도 활발하다. 특히 책 표지 작업에서 람한은 SF·판타지 서사를 색감과 구성으로 충실히 시각화하는 발군의 기량을 선보인다. 정세랑의 장편소설 『보건교사 안은영』 리커버 특별판(2020)은 퇴마 판타지의 공기를 유니크한 팔레트로 포착함으로써 독자들의 소장 욕구를 자극했다. 김보영의 『사바삼사라 서』(2024), 정보라의 『너의 유토피아』(2025) 등의 표지 작업은 각 작품의 정서를 관통하는 시각적 입구로 기능했다.
2023년 아트바젤 홍콩 설치 전경.
© 람한, 휘슬갤러리
디지털 텍스처의 회화적 전환
< Expectancy >. 2019. 디지털 프린트, 라이트 패널. 150 × 150㎝.
2019년 시청각에서 열린 람한, 박혜인 2인전 《Ghost Shotgun》 설치 전경.
© 람한, 휘슬갤러리
2022년과 2024년 휘슬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Spawning Scenery》와 《Inaudible Garden》은 디지털 페인터로서 람한의 야심과 고민을 집약해 보여준 자리였다. 우선 《Spawning Scenery》에서 그녀는 매끈한 디지털 화면의 특성을 극대화하고자 색과 표면의 감각을 밀도 있게 탐구했다. 에서는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사이키델릭한 색채의 끈적하고 반짝이는 덩어리들이 뒤엉키고 폭발하며 화면을 채운다. 인간과 동식물이 결합된 크리처 드로잉 연작과 가상현실 작업 등 이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대중 매체와 서브컬처에 축적된 기억과 감각을 재조합해 판타지를 덧입히고, 이를 관람자의 체험으로 전환하려는 목표를 드러냈다.
한편 《Inaudible Garden》에서는 ‘정원’이라는 주제 아래 식물과 여성 이미지를 다루며 표현 방식을 한층 응축했다. 연작은 제목으로 ‘튤립’을 명시하지만, 백라이트 필름에 아카이벌 프린트된 이미지는 단번에 꽃으로 읽히지 않는다. 온전한 튤립 원본을 그린 뒤 일부를 확대·복제·재조합하고 그 위에 드로잉을 더해 활자처럼 배열한 결과다. 보다 추상화된 이미지를 통해 디지털 회화의 고유성을 드러내려는 의도다.
람한은 모니터에서만 포착되는 결, 빛의 번짐, 픽셀과 브러시가 만드는 미세한 차이를 관람자가 그대로 감각하도록 출력과 재현의 여러 단계를 실험한다. 람한의 회화는 도구의 전환을 넘어 지각의 확장에 가깝다. 붓 대신 펜, 안료 대신 픽셀을 들었을 뿐 여전히 회화의 본질을 수행하며, ‘디지털 페인터’라는 명명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굳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