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영은 영상,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 등을 아우르며 다양한 서사를 연결하고 확장하는 미디어 아티스트다. 작가는 현실과 허구, 기록과 상상을 교차시켜 불가항력에 저항하거나 그로부터 빗나가고 이탈하는 존재와 사건들을 탐구한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2월까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개최된 < ACC 미래상 2024: 김아영 -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 >. 근대화 이후 사라져가는 여러 문화권의 전통적 우주론과 시간 체계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혁신적인 미래 가치와 가능성을 확장한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ACC 미래상’을 받았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사진 홍철기
김아영의 작업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지난해 내가 목격한 광경을 떠올려 본다. 2024년 9월 7일, 나는 제15회 광주비엔날레를 취재하기 위해 외신 기자들과 프레스 투어 버스를 타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향했다. 그날 전시관의 중심에는 대형 스크린 세 개가 삼각형 구조를 이루며 공중에 들린 채 설치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지난해 ‘ACC 미래상’을 수상한 김아영의 신작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가 세 개 채널 영상으로 상영 중이었다.
나는 관람객을 위해 설치된 스크린 앞 슬로프에 누워,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떠올리게 하는 테크노 오리엔탈리즘적 도시에서 사이버펑크의 전사 같은 여성 라이더 둘이 함께 질주하고, 싸우고, 뒤엉키는 장면을 보며 한동안 넋이 나가 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참 지나 버스로 다시 돌아왔을 때 외신 기자들도 “김아영이 누구냐?”며 서로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어떤 기자는 그 작품을 두고 “페미니즘적 자아 혹은 성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사회 소외 계층으로서 라이더들을 영웅화하는 계급 투쟁적 이야기”라고도 말했다.
바로 그 전시에서 김아영의 작품을 접한 외신 기자들과 해외 미술 관계자들이 그녀가 지금의 국제적 명성을 얻는 데 직간접적으로 일조했음은 자명하다. 이후 작가는 2025년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수상했고,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과 뉴욕현대미술관 PS1의 개인전 초대를 받았으며, 홍콩 M+ 뮤지엄의 파사드 커미션 작업을 의뢰받았다. 그녀의 작품이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의 마음을 짧은 시간에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나는 김아영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사변적 픽션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김아영은 자본주의나 이데올로기 같은 거시적 서사를 고고학, 미래주의, SF적 상상력이 가득한 중첩적 서사로 재구성한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의 독특한 작업 세계에 최근 국내외 미술계가 주목하고 있다. 2023년 골든 니카상, 2025년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수상했다.
에르메스재단 제공, 사진 김상태
딜리버리 댄서의 사변적 세계
<딜리버리 댄서의 구>(2022), <딜리버리 댄서 시뮬레이션>(2022), <딜리버리 댄서의 선: 0°의 리시버>(2024),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2024)로 이어지는 ‘딜리버리 댄서’ 연작은 작가가 마치 전도사처럼 주창해 온 사변적 픽션의 작동 원리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시다. 이 연작은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비롯되었다. 김아영은 당시 여러 앱으로 배달 음식을 시키면서도 막상 그 음식을 배달하는 이들과 직접 만나 본 적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누군가의 저녁 식사를 나르는 그들은 누구일까? 김아영의 사변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철저하게 리서치 중심적인 그녀의 사변은 취재를 통해 획득한 인식과 세상사의 원리를 나름의 방식으로 유추하거나 재정의하고, 이를 다른 사건이나 상황에 적용해 보는 실험의 과정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 방정식을 도출한 뒤, 그 식을 활용해 야구 선수가 힘껏 던진 공의 낙하지점을 유추하는 과정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은 더 나아가 상수에 변화를 준 인력의 공식을 대입해 화성이나 달 세계의 중력을 가상의 영상 이미지로 표현하는 단계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김아영은 ‘Monster’의 애너그램(철자의 순서를 바꾸는 것)인 ‘에른스트 모(Ernst Mo)’라는 여성 라이더를 창조하고, 바이크를 타고 달리는 라이딩을 ‘댄싱’으로 표현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묻는다. “만약 통행인이 사라진 세상에서 무언가를 정해진 시간 안에 배달하기 위해 빛의 속도로 달리는 ‘딜리버리 댄서’가 있다면, 그녀에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에른스트 모는 빛의 속도로 달리기 위해 접히거나 끊어진,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공간을 달릴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뒤틀린 곳을 달리다 보면 결국 다른 우주와 섞여버릴 것이며, 그렇게 두 우주가 만나는 지점(작품에서는 이를 ‘누수 지점’이라 말한다)에서 도플갱어와 맞닥뜨릴 것이다. 작품에서 에른스트 모는 그렇게 다른 우주의 자아인 ‘엔 스톰(En storm)’을 만난다. 그녀가 나타날 때면, 즉 두 세계가 교차할 때면 시간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라 느리게 흐르고, 급기야 느리게 흐른 시간 탓에 배달 콜을 제때 수행해 내지 못한 에른스트 모의 등급이 점점 낮아져 새로운 임무를 배정받지 못하기에 이른다.
이 매력적인 이야기는 마치 파사칼리아처럼 악장을 달리하며 변주한다.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에선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이 가상의 도시 ‘노바리아’에서 ‘우연히 소멸된 것으로 알려진 과거의 시간관이 담긴 유물들’을 배달하며,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24시간 365일’이란 서구의 시간관에 질문을 던진다. <딜리버리 댄서의 선: 0°의 리시버>에선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이 시간을 되찾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들은 ‘사막과 도시와 차원이 교차하는 공간을 가로지르며’ 시간을 운반하고, 미래에서 온 주시관들의 눈을 피하고 싸운다. 변주는 애니메이션과 실사 그리고 퍼포먼스를 아우르며 계속될 것이다.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이 만나 서로 대립하지 않고 생존하는 세계가 나타날 때까지.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부상한 플랫폼 노동의 문제를 그려낸 작품이다. 디지털 기술과 복합적인 스토리텔링을 통해 작가의 주제 의식을 성공적으로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작가 제공
사변의 시작: 다공성 계곡
사변의 변주를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은 ‘다공성 계곡’ 연작이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2017)에서 다공성 계곡은 ‘플롯 구멍’이 많은 계곡, 즉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들이 살아가는 곳을 뜻한다. 이 개연성 떨어지는 가상의 공간에 사는 ‘페트라 제네시트릭스’는 암벽 밖으로 튀어나온 거대하고 기이한 암석 결정에 깃들어 사는 광물이자 데이터 클러스터다.
어느 날 다공성 계곡의 폭파로, 페트라는 다른 암석 플랫폼으로 이주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면서 당황스러운 실질적 문제에 직면한다. 이 이야기 역시 변주한다.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은 페트라가 크립토밸리라 불리는 섬의 해안가에서 눈을 뜨며 시작한다. 이 섬에서 페트라는 이주 당국에 붙들려 바이러스 취급을 당하고, 이주 심사에서 떨어져 ‘스마트 그리드’라는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어는 순간 환청과 환영을 듣고 그에 따라 탈출을 감행한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따라 동굴로 들어간 페트라는 그곳에서 ‘어머니 바위’라는 초월적 존재를 만나고, 이 어머니 바위와 결합한다. 마치 신화 혹은 우화와도 같은 이 일련의 이야기들은 감상자가 이주, 난민, 국가, 경계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김아영은 2025년 11월 뉴욕 캐년에서 열린 ‘퍼포마 비엔날레 2025’에서 퍼포먼스 신작 〈 Body^n 〉을 공개했다. 도플갱어의 개념과 신체 재현 문제를 탐구한 작품이다. <오징어 게임>으로 에미상을 수상한 바 있는 김차이 무술 감독과 스턴트 배우들의 동작을 실시간 라이브 모션 캡처를 통해 디지털화했다. 사진은 < Body^n >의 프로덕션 스틸.
작가 제공
석유, 기억 그리고 기계
김아영의 작품 목록에서 가장 무쌍하게 변모하는 또 다른 주제는 ‘석유’다. 그리고 이 주제는 ‘리서치 프로젝트’라는 작가의 또 다른 작업 양식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석유에 대한 관심은 작가의 가족사에서 시작한다. 한양건설 부장이었던 작가의 부친은 1979년 작가가 태어난 지 세 달 만에 쿠웨이트로 파견되었다가 1982년에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1984년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 걸프전이 발발한 1991년에 돌아왔으며, 그 기간 매년 두 번씩 휴가로 한국을 찾았다. 작가는 어린 시절 느꼈던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아버지가 선물로 들고 온 신문물이 가져다준 기쁨을 기억한다.
1979년 OPEC 중동 국가들이 석유 수출을 제한하며 제2차 석유 파동이 벌어졌으며, 외화를 확보해 유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 주도로 국내 건설 업체들이 중동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작가가 알게 된 건 성장한 후다. 석유 자본의 전 지구적 이동이 대한민국에 사는 한 어린아이, 즉 자신의 성장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작가 자신을 매혹했다. 이것이 ‘석유 자본의 이동과 중동 특수에 관한 리서치 프로젝트’의 발단이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첫 작품은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 연작으로, ‘제페트’는 역청을 뜻한다.
글로 읽어도, 영상으로 봐도 무척이나 난해한 이 작품에서 작가는 석유와 중동 특수에 대한 방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대본을 쓰고, 이 대본을 ‘논리 정연하면서도 혼돈스러운 규칙’을 통해 재생성할 기계 장치(컴퓨팅 장치)를 만든다. 참고로 작가는 이 장치에 ‘기계 장치의 신’을 뜻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극작 용어를 이름으로 붙였다. 작가는 자신이 쓴 대본과 이 대본을 기계 장치에 넣어 얻은 결과물에 각각 기계 알고리듬을 통해 만들어진 음률과 인간 작곡가의 음률을 붙이고 이를 합창 형식으로 공연했다.
최근작 ‹알 마터 플롯 1991›(2025)은 석유에 관한 이 방대한 리서치 프로젝트의 집약판이다. 작가는 아버지가 다니던 한양건설이 1979년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대규모 거주 단지 ‘알 마터 아파트’를 추적하며, 석유 자본의 형성과 이동의 거시사가 작가의 삶과 그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미시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사한다. 현장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주변인들이 그 호화 주택 단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들을 수집해 생성형 AI와 CGI, 라이다 스캐닝 등의 새로운 기술들을 활용해 미래적 에세이 필름 형태로 완성했다.
김아영의 초기작은 몽타주 사진 작업이었다. 이후 자신의 변화에 관해 김아영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최근에는 몽타주를 포함하는 상위 개념으로 ‘합성’이라는 용어를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매끈한 합성이 아니라, 비뚤비뚤하고 거칠거칠한 이음매가 모두 드러나는 합성이요.”
김아영이 현실과 픽션을 거칠게 섞은 모습은 마치 관절이 다 드러난 사이보그 같다. 올해 3월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개인전 <플롯, 블롭, 플롭> 오프닝에서 작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앞으로는 ‘딜리버리 댄서’와 리서치 중심의 작품들을 투 트랙으로 진행하려 한다”고 말했다. ‘딜리버리 댄서’의 사변적 픽션이 현실의 핍진성을 떨쳐버리고, 그 작동 원리만을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인공 팔을 떠올리게 하는 반면, 리서치 프로젝트의 방법론은 작가의 해석이 담긴 현실 이야기를 매우 핍진하게 담아낸다는 점에서 육체적이다. 흡사 전자 의수를 단 사이보그, 강력한 기계 팔을 가진 아시안 퓨처리즘적 모습의 김아영이 합성의 이야기꾼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알 마터 플롯 1991〉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중 하나인 알 마터 주택단지가 배경이다. 개인적 경험을 근현대사로 확장한 작품이며, 석유를 매개로 경제 성장과 지정학적 분쟁 등 다층적 서사가 담겼다. 2025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개인전 <플롯, 블롭, 플롭>에서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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