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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SPRING

고전(古典)에서 걸어 나온 전위적 에너지

단편선은 ‘언어와 소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철학적 아티스트’라 불린다. 2004년 처음 무대에 서며 뮤지션으로서 첫걸음을 시작했다. 이후 실험적 음악 세계를 지속적으로 선보이며, 한국 인디 음악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국내 인디 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꼽힌다.

2024년 결성된 밴드 단편선 순간들의 리더 단편선은 독특한 발성을 지닌 싱어송라이터이다. 또한 특정 장르에 갇히지 않고 발군의 역량을 발휘하는 프로듀서이기도 하며, 편곡과 기획에도 참여하는 등 다방면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오소리웍스라는 인디 음악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당신은 <친절한 금자씨>나 <기생충> 같은 한국 영화의 기괴한 아름다움에 매혹돼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시각적 미학을 청각으로도 경험해 볼 준비가 돼 있는가? 그렇다면 이제 한국 인디 음악계를 대표하는 ‘미학자’ 단편선을 만나볼 차례다. 그의 본명은 박종윤이며, 1986년생이다.

2020년 말, 필자는 패션 잡지 『W Korea』의 연말 특집호에서 ‘올해의 프로듀서’를 선정하는 설문에 “단편선”이라고 답한 적 있다. 반면에 다른 두 명의 음악 평론가들은 K-팝 프로듀서를 지목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한 해를 결산하는 자리에서 대중은 잘 모를 수도 있는 인디 음악가 단편선을 꼽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무렵 나온 싱어송라이터 천용성과 전유동의 음반은 인디 팝의 풋풋함을 유지하면서도 통일성과 독자적 미학을 갖춘 쾌작이었다. 그리고 그 음반들의 크레딧 끝엔 “Produced by 단편선”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프로듀서로서 단편선은 미니멀한 포크 음악, 앰비언트적 음향 실험, 록적인 소용돌이를 오가면서 아티스트들이 그려놓은 스케치를 대담하게 채색했다. 호방하고 섬세한 그의 지휘봉은 예사롭지 않았다.

러시아 단편선

‘단편선’이라는 예명은 어디서 왔을까. 서울 홍익대학교 인근에 자리한 라이브 카페 ‘언플러그드 홍대’에서 만난 단편선은 이 질문과 관련해 러시아 작가들의 이야기부터 꺼냈다.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는데, 긴 소설보다는 짧은 소설이 좋았죠. 톨스토이나 체호프의 단편선처럼 말이죠. 조금 더 커서 음악을 하게 되면서, 저도 그들처럼 이야기를 잘 버무리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특히 그는 체호프의 작품들 가운데 「갈매기」와 「관리의 죽음」에 열광했다. 격조 있는 문어체를 통해 진행되는 스토리에는 엽기적이고 희한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부조리의 미학이 광채를 뿜는 보석 상자를, 단편선은 마음에 깊이 담아두었다.

2000년대 초는 한국에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온라인 취향 공동체가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당시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었던 단편선은 나이는 어려도 ‘입심’은 셌다. 그는 ‘웨이브’ 같은 유명 음악 웹진에서 논객으로 활동했다. 해학적이면서도 뼈를 때리는 구석이 있는 그의 유쾌한 미문은 꽤 인상적이었고, 당시 활동하던 음악 평론가들의 눈에도 띄게 되었다. 이후 대중음악 웹진 ‘보다’가 창간되었을 때 정식 필자로 영입되어 음악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사실 중학교 다닐 무렵 오락실에 있던 리듬 게임 DDR을 통해서였어요. 거기 나오는 음악들이 너무 좋았고, 미디가 보급되던 시기라서 그런 음악을 실제로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도 강했죠. DDR 같은 리듬 게임에 심취한 이들이 모이는 온라인 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당시 모임 대표였던 박장미(현재 밴드 ‘단편선 순간들’의 기타리스트)도 만났죠.”

단편소설을 좋아하고 리듬 게임에 심취했던 아이는 스무 살이 되면서 기타를 들었다. 2004년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한 그는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결성해 홍대 앞 라이브 클럽 ‘롤링스톤즈’에서 공연했다. 장르는 비교적 점잖은 모던 록이었다.

자립, 독립, 전위의 음악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프로듀싱 음반인 포크 듀오 선과영의 <밤과 낮>, 단편선의 첫 음반 <백 년>, 오소리웍스가 발매한 소음발광의 <기쁨, 꽃>, 프로듀싱 음반인 싱어송라이터 천용성의 <김일성이 죽던 해>, 프로듀싱 음반인 천용성의 <수몰>, 프로듀싱 음반인 싱어송라이터 전유동의 <관찰자로서의 숲>.
오소리웍스 제공

한국 인디 음악인들 사이에서 아직도 전설처럼 회자되는 하나의 투쟁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은 단편선이다. 2009년, 홍대 앞 작은 식당 ‘두리반’이 지역 재개발로 인해 강제로 철거될 위기에 놓였다. 대표적 서민 음식인 칼국수를 파는 식당을 지키기 위해 홍대 인근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이듬해 단편선도 그곳에 갔다. 아방가르드 활동가이자 음악가인 한받, 기획자 박다함, 블루스 음악가 하헌진 등을 만난 단편선은 그들과 함께 공연과 입담으로 유쾌함과 처절함이 교차하는 싸움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중 2010년 5월 1일, 120주년이 되는 노동절을 맞아 단편선을 비롯한 젊은 음악가들이 기획한 페스티벌 ‘51+’가 작은 돌풍을 일으켰다.

“기껏해야 20대 초반이던 저희가 무대의 취지를 설명하며 한 팀, 한 팀 섭외해 나갔고, 결국 그날 하루 동안 70여 팀이 공연에 합류할 수 있게 됐어요. 그 장소가 지금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홍대입구역 앞 AK 플라자 자리에요.”

단편선은 2012년 솔로 데뷔 앨범 <백 년>을 낸다. 당시 활동명은 ‘회기동 단편선’이었다. 모교인 경희대가 있었던 동네 ‘회기동’에, 자신이 즐겨 읽고 좋아했던 ‘단편선’을 결합한 이름이다. 2013년 싱글 <처녀>를 냈을 때는 홍대 앞 게릴라 이벤트에 여장을 하고 나타나 화제가 됐다. 단편선은 그렇게 뼛속까지 ‘자립’과 ‘독립’과 ‘전위’로 무장한 인물이었다.

이듬해 ‘단편선과 선원들’이라는 독특한 밴드가 등장했다. 통기타, 베이스기타, 바이올린, 퍼커션으로 구성된 이 밴드는 록 밴드의 전통적 편제에서 살짝 벗어나 있었다. 그들의 정규 앨범 <동물>(2014)과 <뿔>(2016)은 제목처럼 원시적이고 공격적이면서도 꿈결 같은 스토리텔링을 담은 수작이었다. <동물>은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앨범 트로피를 가져갔다. 그들의 노래에는 설화적 캐릭터가 등장하곤 한다. 사람들의 모든 것을 품어줬지만 정작 외톨이가 된 거인(‘거인’)이나 사람들을 홀리고 춤추게 하는 초현실적 가객(‘이상한 목’) 같은 기괴하고 아름다운 존재 말이다.

“사람들이 제 음악을 들었을 때 쾌적함을 느끼기보다는 뭔가 알 수 없는 곳에 빠져들어 간다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요. 환상적인 경험을 겪은 뒤 변화가 생기거나 성장하는 것처럼 제 음악을 듣기 전과 들은 후 사람들이 뭔가 달라지는 경험을 했으면 해요.”

2025년 열린 부산국제록페스티벌 무대에서 공연 중인 단편선 순간들. 이들은 원초적이면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무대를 만들어냈다. 2000년부터 시작된 부산국제록페스티벌은 국내 최초이자 최장수 록페스티벌이다.
부산문화관광축제조직위원회 제공

음악적 미학의 집대성

<리스닝룸: 음악만세>는 단편선 순간들이 2024년 신작 <음악만세>를 발표하기 전 진행했던 팝업 스토어 형식의 전시회다. 오디오 다큐멘터리 상영, 대담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오소리웍스 제공

단편선은 “내러티브가 명료하고 순차적으로 술술 풀리는 음악보다는 웃기고 재미난 아이디어가 있는 희한한 음악을 내 몸과 마음이 원한다”고 말했다. 음악에 홀수 박자와 변칙 박자를 자주 쓰는 것도 그런 시도의 일환이다. 현재 그가 몸담고 있는 밴드 ‘단편선 순간들’의 노래 중에도 5박, 6박, 7박을 오가는 ‘불’이나 ‘독립’ 같은 곡이 그러하다.

2025년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앨범 상을 받은 단편선 순간들의 <음악만세>는 단편선이 펼쳐 보이는 음악적 미학이 집대성된 결과물이었다. 총 10곡이 실린 이 음반의 첫 트랙은 영국 작곡가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록 음악의 미학으로 비튼 서곡 ‘Land of Hope and Glory (and The Things)’다. 그리고 마지막 트랙에는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곡을 몽환적인 연주곡으로 재해석한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가 놓여 있다. 즉, 클래식 명곡을 앞뒤에 배치한 구조다.

“클래식과 팝 음악 또는 인디 음악 사이에 있다고들 생각하는 위계질서를 파괴하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죠. 두 곡들은 대단히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론 팝 음악이 가진 말도 안 되게 캐치한 후크가 있는 곡들이잖아요.”

이 앨범의 타이틀곡 ‘음악만세’는 발표 1년이 채 되지 않아 한국 인디 신의 새로운 국가 같은 위상을 차지했다. 2025년 여름, 여러 대형 야외 페스티벌에서 수천, 수만의 관객들이 단편선 순간들과 함께 “음악 만세”를 외쳤다. 특히 후반부에 삽입된 실제 시위 현장의 외침은 청량감 넘치는 록의 생동하는 기운과 합쳐져 묘한 뉘앙스와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그는 2022년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구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퇴직 연설을 노래에 삽입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단편선은 여전하다. 그는 클래식을 탐미하되 인디를 지향한다. 톨스토이와 체호프의 작품이 지닌 고전성을 좇되 낯설고 날이 선 ‘뿔 달린’ 인디 록 음악을 엔진으로 삼아 전진한다.

“제 음악 인생을 <어벤져스> 시리즈로 비교하면, 2편의 결말 정도쯤 와 있는 것 같아요. 이제 마흔 살에 이르렀지만, 쉰 살까지 가는 여정에 뭔가 또 엄청난 게 기다리고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어벤져스로 치면 타노스가 등장하기 직전 정도의 긴장감이 있는 거죠. 음악에 관한 글을 쓰든, 제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든, 다른 사람의 음악을 제작하든 음악 일을 오래 하는 게 목표예요. 이제 AI가 뚝딱 음악을 만들어주는 시대가 왔어요. 저는 이럴 때일수록 자신의 취향, 관점, 태도에 더욱 솔직한 음악이 중요하다고 봐요. 사람들이 힘껏 용기를 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낯설고, 어둡고, 기괴한 세계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데뷔한 단편선은 이후 자신이 발표한 음반은 물론 프로듀싱한 앨범들에도 수상의 영예를 지속적으로 안기며, 한국 인디 음악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임희윤 음악 평론가
허동욱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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