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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WINTER

‘어쩔 수가 없는’ 삶에 대한 박찬욱의 풍자

박찬욱 감독의 풍자적 스릴러 <어쩔 수가 없다>는 벼랑 끝에 내몰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일상의 불안정성을 탐구한다. 블랙 코미디와 도덕적 긴장감이 교차하는 이 작품은 사람들이 사회적·경제적 압박 속에서 어떻게 생존하고, 그들의 인간성을 시험하는 제도를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를 드러낸다. 박 감독은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이번 신작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2025년 8월 말 개막한 제8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이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장면. 그는 신작 <어쩔 수가 없다>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이 영화제에 참석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 제공, 사진 Jacopo Salvi

한국 영화계의 거장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강렬한 심리 묘사와 시각적 대담함을 이어가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각본, 제작, 연출을 모두 맡은 그는 이번 작품에서 불확실성, 자동화, 도덕성의 붕괴를 다룬 블랙 코미디 스릴러를 선보였다.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를 원작으로 했으며, 박 감독이 20여 년에 걸쳐 구상한 끝에 완성된 작품이다.

지난 8월, 제8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처음 공개된 뒤, 9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 관객에게도 소개됐다. 이 작품은 경제적 불안과 기술 발전이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 극 중에는 해고당한 가장 ‘만수(이병헌)’와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아내 ‘미리(손예진)’가 등장한다. <어쩔 수가 없다>는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사회의식이 가장 뚜렷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극단으로 내몰린 한 남자의 비극을 넘어, 진정한 선택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을 담아낸다.

이 이야기에 끌리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를 읽은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책을 다 읽고 난 순간, ‘이건 꼭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우선 작품의 핵심이었던 비극에 매료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어쩌면 원작보다 더 유머러스하게 표현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저에 깔린 비극에 약간의 유머를 더하면 훨씬 매혹적인 이야기가 될 거라는 직감이 있었다. 또한 한 인간의 내면 심리를 따라가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를 함께 탐구하는, 두 가지 층위를 담은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다.

<어쩔 수가 없다> 3차 포스터. 이 영화는 2025년 9월 17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선보였으며, 일주일 후 일반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국내 극장에서 개봉했다. 2025년 11월 말 기준, 전국적으로 약 300만 명의 누적 관객 수를 기록했다.
ⓒ CJ ENM

어떤 장르를 염두에 두었나?

이야기의 구조만 보면 추리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어릴 적에 추리소설을 즐겨 읽었지만, 그런 장르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추리소설은 대개 어떤 미스터리로 시작하는데, 그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되고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시작부터 범죄를 저지르려는 한 남자가 등장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미스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이 작품은 오히려 사회 제도 속에서 점점 범죄자로 내몰리게 되는 한 평범한 사람의 심리에 관한 이야기다.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다르다. 이 작품의 내러티브는 훨씬 더 강렬하고, 집요하며, 절망적이다. 기본적으로는 비극이지만, 그 속에 깃든 부조리한 유머 덕분에 나에게는 코미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가 영향을 주었나?

이 영화를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도끼〉 리메이크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처음부터 원작 소설에 매료된 것이었고,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는 그 이후에야 보게 되었다. 그의 버전은 톤과 정서가 완전히 달라서, 이 작품은 그 영화의 리메이크라기보다는 원작 소설의 또 다른 해석이라 보는 편이 맞다. 물론 당시 원작의 판권은 여전히 가브라스 감독이 가지고 있어서 제작 과정에서 약간의 조율이 필요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아내이자 프로듀서였던 미셸이 이번 영화의 제작에도 함께 참여하면서 원만히 진행되었다.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왜 그렇게 오래 걸렸나?

이 이야기를 이렇게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요즘 어떤 영화를 준비하고 있냐?”고 물으면, 나는 간단히 줄거리를 이야기해 주곤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20년 넘게, 전 세계 어디서나 반응은 늘 같았다.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미국 스튜디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작품이 만들어질 거라고 믿었다. 스튜디오들은 영화를 제대로 만드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적은 예산을 제시했다. 의견 차이를 좁히는 데 2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셈이다. 결국 오랜 기다림 끝에, 이 작품이 본래의 의도대로 구현될 수 있는 합의점을 찾게 되었다. 이 작품은 단지 현대 한국 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면 어디서든, 과거에도 미래에도 언제든 통할 이야기다.

<어쩔 수가 없다>는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가 원작이며, 박찬욱 감독이 연출과 공동 각본을 맡았다. 주인공이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당한 후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 CJ ENM

이번 영화에서 가장 다루고 싶었던 주제는 무엇이었나?

하나의 주제라기보다는, 서로 얽히고 겹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성과 중심의 노동, 과잉 생산성, 치열한 경쟁, 인공지능까지. 이건 한국적인 동시에 세계적인 문제다. 한국은 이 모든 글로벌 이슈가 한꺼번에, 그리고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그래서 나는 지금 한국이 겪는 문제들이 다른 나라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예를 들어 AI, 고용 불안, 중산층 붕괴, 남성성에 대한 고민 같은 것들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사회적 질문들을 던지면서 자본주의의 단면을 비판하고, 그 너머의 더 큰 의미를 탐색한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가 남기는 정서는 깊은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블랙 코미디의 요소들도 있지만, 마지막에는 공허함과 비극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이 드라마의 본질이다. 그래서 작품에서 의도대로,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정리되는 감정을 느끼길 바란다. 주인공은 가족을 위해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영화는 그 행동이 정말 가족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묻는다. 관객 각자가 이 가족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길 바란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를 것이다. 바로 그런 대화의 화두를 던지는 것이 내가 바랐던 부분이다.

이전 작품들에 비해 이번에는 폭력의 강도가 훨씬 절제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폭력을 묘사하는 이유는 공포와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폭력의 공포, 그 뒤에 따라오는 고통을 드러내려면 결국 폭력적인 장면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폭력은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까지도 파괴한다. 내 작품 속 폭력 장면이 유난히 아프게 느껴지고, 죄책감의 그림자를 동반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영화 속 폭력 묘사에 관해 내가 고민하는 부분이 두 가지 있다. 관객이 그 폭력 장면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 폭력을 아름답게 느끼게 되는가이다. 나는 최대한 이 두 가지를 피하려 한다. 물론 나도 다른 감독의 영화를 보다가 폭력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연출의 미학적 완성도에 감탄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내 작품에서 그런 방식으로 폭력을 사용한다면,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 것 같다.

이 영화의 코믹한 요소는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만수의 행동이 슬프면서도 동시에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모든 것을 합리화하지만, 그로 인해 가족은 오히려 무너진다. 우리는 도대체 이 모든 게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묻게 되고, 그것이 단지 어리석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코미디가 필요했다. 영화는 한여름의 절정에서 시작해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는 예보와 함께 막을 내린다. 식물을 사랑하는 만수는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지나간다. 그것이 내가 원했던 배경이었다. 이는 만수가 일하는 회사 이름(처음엔 ‘태양’, 그다음은 ‘문 제지’)에서도 드러난다. 원작에는 AI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각본을 다듬어 가는 동안 세상은 변하고 있었고, AI가 현실에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들어왔다. 만수는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을 여전히 습관적으로 한다. 기계가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의 ‘직관’만큼은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관객이 그와 함께 그 불확실한 미래를 상상하기를 바랐다.

이병헌과 손예진을 캐스팅한 이유가 궁금하다.

영화의 대부분을 이끌어가며 도덕적 갈등과 감정의 무게를 끝까지 견뎌낼 배우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병헌이 떠올랐다. 이번 작품에서 그의 연기는 남우주연상에 손색이 없을 만큼 강렬하다. 손예진의 경우, 아내 ‘미리’ 역할에는 낙관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생명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실직한 남편을 붙잡고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람, 그런 기운을 가진 배우가 바로 손예진이었다.

촬영 현장 중 배우 손예진의 모습을 담고 있는 비하인드 스틸. 손예진은 극 중에서 주인공 만수의 아내 미리 역할을 맡았다.
ⓒ CJ ENM

인상적인 사운드트랙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조용필의 열렬한 팬이었다. 언젠가 그의 노래를 영화에 쓰고 싶다고 늘 생각했고, 딱 맞는 순간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때가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음악을 한껏 키워 대사에 가려지지 않게,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흐르게 하고 싶었는데, 이번에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조용필의 명곡이 너무 많아서 어떤 곡을 써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고추잠자리〉가 가장 어울린다고 느꼈다. 장면에 따라 아이러니하게 들리기도 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영화의 장면과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곡을 정한 순간부터 편집은 몇 프레임씩 늘리고 줄이는 세밀한 조율 작업이 되었다. 기타 리프 하나, 가사 한 줄조차 배우의 움직임과 정확히 맞아떨어지게 만들고 싶었다. 영화 속 장면들은 바로 그 치열한 조율의 결과이다.

나는 어렸을 때 들었던 한국의 명곡들을 늘 영화 속에 담아냈다. 〈박쥐〉에서는 남인수의 노래들, 〈헤어질 결심〉에서는 정훈희의 〈안개〉가 그랬다. 내가 즐겨 들었던 노래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화 속에 다시 불러내고 싶다. 요즘 젊은 세대는 그런 노래들을 거의 모르는 게 아쉽다. 외국의 팝송은 지금도 어디서나 바로 알아듣지 않나. 우리 세대가 사랑했던 한국의 위대한 가수들, 작곡가들도 문화적 기억 속에 그만한 자리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사람들은 정말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에 묶인 채 살아가고 있는가?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사실 진정한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주인공은 영화 내내 그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진실이라기보다 비겁함이 만들어낸 일종의 자기변명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나약함과 취약함, 결점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자기 정당화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세상의 어두운 면을 마주할 때 유머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유머는 우리가 잠시 한걸음 물러서서 더 명확히 바라보고, 때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일조차 버틸 수 있게 해준다. 가장 끔찍한 순간에도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본인이 실직당하는 상황을 상상해본 적이 있나? 영화 산업 역시 늘 전망이 밝지는 않다.

일자리와 안정감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깊은 두려움은 누구나 안고 살아간다. 나는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형태는 달라질 수 있다. 사람들이 극장에 모여 함께 영화를 보는 문화는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런 시대가 오더라도, 내가 원하는 만큼의 투자를 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계속 영화를 만들 것이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다 하더라도…. 이미 그렇게 해본 적도 있다. 방식은 바뀔지 몰라도,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마음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만수가 자신의 제거 대상인 범모(이성민)와 대립하는 장면을 담은 비하인드 스틸. 캐릭터와 혼연일체가 된 배우들의 연기에서 현장의 열기가 느껴진다.
ⓒ CJ ENM

타티아나 로젠슈타인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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