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수는 작가들의 언어를 사랑하는 연출가이다. 희곡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작가가 구현하려는 세계를 탐구하며 무대 위에 실현한다. 또한 그 과정을 함께하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창조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언제나 마음을 열어둔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연극은 모두가 함께 만드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인수는 최근 한국 연극계에서 주목받는 연출가 중 하나다. 그녀는 깊이 있는 텍스트 분석으로 희곡이 가진 본래의 언어적 힘을 드러내고, 섬세한 연출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그녀의 연출에는 “좋은 작품은 좋은 글에서 시작된다”는 두터운 믿음이 깔려 있다.
“너무 행복해요.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지요.”
2015년, 마틴 맥도나 원작의 <필로우맨>을 처음 연출한 이후 10년이 흐른 지금까지 쉼 없이 공연을 이어 온 이인수는 지금 행복하냐는 질문에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출한 작품들마다 대부분 호평 일색이었고, 무엇보다 그 과정이 행복한 작업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자신도 속해 있는 ‘글과 무대’라는 창작 집단의 든든한 동료들이 있다. ‘글과 무대’는 네 명의 극작가와 두 명의 프로듀서, 그리고 한 명의 연출가로 이루어진 단체이다. 이들은 각자 개인 작업을 하면서도 동시에 ‘글과 무대’라는 이름으로 함께 작업하는 여정을 수년째 이어오고 있다.
10년쯤 됐으면 번아웃이 올 법하건만, 그녀는 연극 작업이 마냥 즐겁다고만 했다. 한국에서 연극은 큰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OTT를 통해 전 세계적 명성을 얻는 드라마 감독들처럼 높은 인지도가 생기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즐거운지 우문을 던졌더니,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기쁨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연극은 이야기의 표현 방식이 무척 다양해요. 같은 이야기라도 정말 소소한 일상처럼 풀어낼 수도 있고, 응축해서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죠.”
2025년 7월 19일부터 8월 3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소극장 무대에서 상연되었던 <번아웃에 관한 농담> 중 한 장면. 창업 2년 차 스타트업을 배경으로 노동 환경 문제를 고발하는 블랙 코미디다. ‘글과무대’의 중장기 프로젝트 두 번째 작품이며 김윤영이 희곡을 썼다. 글과무대는 이인수 연출가가 속해 있는 창작 집단으로 극작가 김윤영, 진주, 최보영, 황정은이 함께 꾸려가고 있다.
글과무대 제공
새로운 세계
이인수가 매료된 ‘새로운 세계’는 무엇일까? 스포일러의 위험을 감수하고 살짝 이야기를 해보자면, 먼저 최근작인 <번아웃에 관한 농담>에 등장하는 천수관음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온라인 플랫폼을 운영하는 한 스타트업을 배경으로 갈수록 열악해지는 노동 환경을 고발하는 블랙 코미디다. 극 중에는 두 명, 세 명의 몫을 넘어 수십 수백 명의 일을 대신하는 느낌으로 살다 보니 손이 천 개가 된 인물이 등장한다. 기상천외한 일이지만, 천수관음으로 변신한 인물은 마치 카프카의 「변신」 속 주인공처럼 천연덕스럽게 사무실에서 일하며 사람들과 어울린다.
독특한 매력의 배우 황석정이 출연하는 <빛나는 버러지> 역시도 노숙자들이 죽어서 집의 일부가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황당무계한 설정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의 잔인무도한 면모를 너무나 잘 보여주었다. 연출을 하는 동안 이인수 자신도 마음이 아팠다는 <클래스> 또한 마찬가지다. 극작을 가르치는 예술대학 교수와 학생이 주고받는 대화로 구성된 이 작품은 극중극 형태로 한 자매의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진행된다. 내밀한 상처로 괴로워하는 여성들을 그려내는 데 있어 그 섬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몰입했다는 관객 평이 많았던 작품이었다.
2023년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상연되었던 윤미희 작가의 <보존과학자>는 ‘보존’이라는 주제 속에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액자소설처럼 뒤섞여 있는 작품이다. 소멸과 영원, 보존과 복원에 대해 추상적이고 우화적이지만 결코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보편적 서사가 전개된다. 이인수만의 심도 있는 해석으로 희곡에 숨결을 불어넣었다는 평을 받았다.
국립극단 제공
섬기는 연출
“20년 넘는 배우 경력에서 이렇게 다정한 연출가는 처음 봤어요. 연출가도 다정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죠.”
<테라피>는 암 병동에 함께 머무는 일곱 명의 여성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 연극에 출연했던 배우 중 하나는 이인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주로 50대 중후반의 남성 연출가들이 주도하고 있는 국내 연극계에서 여성 연출자가 무대를 지휘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다정한’ 연출로 배우들을 사로잡기는 더욱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인수는 보기 드문 연출가라 할 수 있다.
이인수는 연출이 “텍스트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작가의 의도와 구상을 되도록 충실하게 구현해 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연출”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작품을 연출가에게 넘기고 나서는 ‘더는 내 작품이 아니다’라고 생각해 연습실에도 일부러 잘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작가들이 많은 기존 관행으로 볼 때 이인수의 이 말은 참으로 신선하다.
사실 그녀는 극작에 문외한이 아니다. 이쯤에서 그녀의 길고도 긴 ‘가방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녀는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에 진학했으며, 이후 미국 마이애미대학과 피츠버그대학에서 연극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구자로서 커리어도 길지만 극작에 대한 열정도 뜨거워 몇 편의 작품을 썼고, 유학 뒤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녀의 희곡이 다른 연출가에 의해 공연되기도 했다.
“정말 힘들었어요. 연출가가 제 작품을 존중하지 않더라고요. 연출가는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마음대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더라고요.”
물론 그 상처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이후 그녀는 극작보다 연출에 집중했다. 다양한 연출 기회를 얻었고, 그때마다 작가에 대한 존중을 첫 번째로 생각하며 작업에 임했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의도적인 작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글과 무대’에도 ‘무대’보다 ‘글’이 앞서 있다. 서로 존중하는 그 하모니 덕분에 ‘글과 무대’는 그 어느 단체보다 풍성하고 역동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2023년 대학로예술극장에서 초연된 <열녀를 위한 장례식>은 관객과 평단의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 큰 화제를 모았다. 18세기 후반, 양반집 별당을 배경으로 당대 여성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흔적을 조명하는 이야기다. 글과무대의 진주 작가가 희곡을 썼다.
글과무대 제공
관객과의 싱크로나이즈
“PPT를 띄우고 강연할 때보다 PPT 없이 그냥 이야기할 때 듣는 이들의 집중도가 더 올라간다는 연구가 있대요. 저는 연극이 그런 매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 장소, 실물 소도구가 없어도 이야기만으로 장소와 도구를 상상하게 하는 게 연극이고, 그걸 보는 관객과 배우들의 뇌는 그 순간 싱크로나이즈드 되는 거죠. 저는 그게 연극의 대단한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관객들과의 교감에 대해 질문을 던지자 돌아온 답변이다. 7월 19일부터 8월 3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소극장 무대에 올랐던 <번아웃에 관한 농담> 공연 시 이런 일이 있었다. 직원들을 사정없이 몰아치는 대표 역할을 맡은 배우에게 객석에서 느닷없이 “미친놈”이라는 욕이 날아왔다고 한다. 그만큼 관객들이 몰입하고 공감했다는 말이겠다. 또 공연을 다 보고 나가면서 “과로하면 안 돼. 과로하면 죽어”라고 일행에게 속삭인 관객도 있었다. 이인수는 그런 순간이 제일 기쁘다고 했다.
“제 사촌 언니 딸이 과로사하겠다 싶은 곳에서 일하다가 이 연극을 보고 직장을 그만둔 뒤 새 직장에서 즐겁게 일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정말 좋더라고요”
고전 인문학의 재해석
이인수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고전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일이다. 지난 5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레퍼토리 공연으로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연출하기도 했거니와 필립 리들리의 <빈센트 리버>나 앨런 베넷의 <히스토리 보이즈>, 데이비드 그레이그의 <노란 달: 레일라와 리의 발라드> 등 굵직한 해외 작품들 여러 편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문학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디어 엘리자베스>라는 공연에서도 여실히 묻어난다. 미국의 두 남녀 작가 엘리자베스 비숍과 로버트 로웰이 일평생 주고받은 편지들을 묶은 이 작품은 네 명의 배우들이 한 공간에 앉아서 이렇다 할 동선 없이 편지를 읽는 형태로 공연되었다. 짧은 영상에 중독된 현대 사회에서 이런 진중한 작품을 매우 아날로그적 형태로 무대에 올리는 일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터. 그러나 그녀는 ‘관객에 대한 믿음’으로 이 작품을 연출했고, 2시간 가까운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뜨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한 사람이 다른 이성과 사랑에 빠져도, 각자의 삶이 어떤 굴곡을 거치든 서로에게 ‘저기 멀리 등불 하나 들고 기다려 주었던 존재’였던 두 사람의 우정의 결, 그 텍스처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인수의 이 변은 그녀의 예술 세계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이기도 한 듯하다. 작가의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결을 충실하게 구현해 관객들이 그 작품과 교감하게 하고, 그로 인해 마침내 사람들을 위로하는 등불 하나 켜는 일 말이다. 이인수가 보여줄 다음 등불이 어떤 색으로 빛날지 사뭇 기대된다.
진주 작가가 극을 쓴 <클래스>는 2021년 두산아트랩 공연에서 쇼케이스로 첫선을 보였고, 이듬해 두산아트센터 소극장 무대에 정식으로 오른 작품이다. 어느 예술대학의 극작 수업에서 교수와 학생이 일대일 수업을 진행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인수 연출가는 세대 간 동행과 연대를 중점적으로 표현했던 쇼케이스와 달리 2022년 공연에서는 등장인물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대면하고 극복해 가는지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두산아트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