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1년 9월 유튜브 Imagine Your Korea 채널에 올라온 ‘Feel the Rhythm of Korea-Seosan’ 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영상 제목은 ‘머드 맥스(Mud Max)’였는데, 조지 밀러(George Miller) 감독의 2015년 작인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 > 를 패러디해 만든 것이었다. 영화에서는 사막을 달리는 트럭이 등장하나, 머드 맥스 영상에서는 경운기들이 갯벌을 질주하는 식이었다. 이 영상은 바다에 면해 있는 충남 서산(瑞山)의 풍경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을 정취 물씬 풍기는 서산으로 분노 대신 기대감을 머금고, 지금 달려보자.
ⓒ 서산시
서산을 포함한 주변 지역은 ‘내포(內浦)’라고 불릴 정도로 크고 작은 갯고랑들이 내륙 깊숙한 곳까지 발달해 있다. 그만큼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差)가 크다는 뜻이다. 실제로 서산 북쪽의 가로림만(加露林灣)은 평균 조차가 4.7미터나 되고, 최대 조차는 무려 8미터 안팎에 달한다. 서산 남쪽 천수만(淺水灣)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 최대의 조수간만 차가 내어준 보물
웅도(熊島)는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육지와 연결되기도 하고 섬이 되기도 한다. 웅도와 육지를 잇는 것은 유두교이다. 하루에 두 번 바닷물에 잠기는 신비로운 모습에 인기 여행지가 되었다. 해당 다리는 갯벌생태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25년 철거될 예정이다.
세계 수위권에 속할 정도로 큰 조수간만의 차는 다양한 수산자원을 제공해 주는 풍요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그중에서도 2016년 한국 최초의 ‘해양생물보호구역’이자 25번째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래 2019년 92.04제곱킬로미터 규모로 확대되었을 만큼,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고 깨끗한 바다가 바로 가로림만이다.
머드 맥스 영상에서 주민들이 경운기를 타고 내달리는 곳 역시 간조로 드러난 가로림만의 오지리(吾池里) 갯벌이다. 밀물 때는 전어(錢魚)와 우럭을 비롯한 다양한 생선들을 잡을 수 있다. 썰물 때면 끝없이 펼쳐진 갯벌에서 한국에서 생산되는 감태(甘苔)의 대부분이 여기서 채취되고, 바지락과 새조개를 포함한 다양한 저서성(底棲性) 해산물이 잡힌다. 요즈음 같은 가을에는 1454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 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낙지(絡蹄)가 제철이다. 2014년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식탁에 낙지죽이 오른 적이 있는데, 교황이 두 차례나 리필을 요청했을 정도로 호평받으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어민들이 낙지 잡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오지리 갯벌 남쪽에 위치한 중왕리(中旺里)에 가면 된다. 그들은 낙지가 개펄에 만들어 놓은 숨구멍을 찾은 뒤, 작은 삽처럼 생긴 가래를 이용해 최대 1미터까지 파 내려가 잡아 올린다. 원한다면 직접 낙지 잡이 체험도 해볼 수 있다. 낙지 제철인 가을에는 가로림만 곳곳에서 낙지잡기 체험이 가능하다.
특히 오지리와 중왕리 사이에 위치한 웅도(熊島)에서는 밀물과 썰물에 따라 섬이 600여 미터 거리에 있는 육지와 단절되었다가 다시 연결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다 갈라짐’이라 불리는 현상이다. 밀물과 썰물은 하루에 두 번씩 있으니 바다 갈라짐 역시 하루에 두 번씩 볼 수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유독 큰, 그래서 생물종이 더욱 다양하고 양도 넉넉한 가로림만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풍경이다. 다만 오는 2025년쯤이면 연륙교가 들어설 예정이라 이 풍경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채 2년도 남지 않았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면 서둘러야 한다.
풍요로움이 초래한 아픔, 그것을 견뎌내기 위한 노력
서산과 맞닿은 가로림만은 주민들에게 다양한 수산자원을 제공한다.
한편 바다로부터 얻은 풍요로움은 바다 밖으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불러왔다. 출몰하는 해적의 노략질로 인해 오랜 기간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서산은 동쪽의 산군(山群)과 바다 사이에 들판도 넓게 발달해 있기에 거기서 얻는 소출도 적지 않았던 탓이다.
선조들이 본격적인 대응에 나선 것은 조선 초인 1416년이었다. 천수만 북쪽의 도비산(島飛山)에서 군사훈련 겸 사냥대회를 하던 조선 3대왕 태종(재위 1401~1418)이 도비산 동쪽에 위치한 해미(海美) 지역이 서해안에 출몰하던 해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단은 곧 실행으로 이어졌다. 1417년에 축성 공사를 시작해 4년 만에 완공했다. 그러고는 한반도 중부지역을 관장하는 육군 최고지휘기관인 충청병마절도사영(忠淸兵馬節度使營)을 해미로 옮겨와 육상 외에 해상 방어까지 맡도록 했다. 서산이 한반도의 주요한 식재료 공급지로서만이 아니라 명실공히 공동체의 안녕을 지켜내기 위한 최전선임과 동시에 최후의 보루 역할까지 짊어지게 된 것이다.
해미읍성(海美邑城)은 현재 남아 있는 읍성 가운데 가장 보존된 곳으로,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현재 해미 한복판에서 웅장한 모습을 뽐내고 있는 약 1.8킬로미터 길이의 해미읍성(海美邑城) 이 그 증거다. 높이 5미터 안팎의 성벽이 빈틈 없이 둘러쳐져 있고 ‘치(雉)’ 도 2개나 되어, 당시의 삼엄했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치는 ‘꿩’을 뜻하는 한자인데, 꿩은 무언가 위험한 상황을 감지하면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대가리만 살짝 내놓고 동태를 살피곤 한다. 즉 ‘치’는 성벽 중간중간에 톱니처럼 바깥으로 툭 튀어나오도록 지은 구조물이다. 접근하는 적을 일찍 관측할 수 있도록 하고, 행여 전투가 벌어지면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면뿐만 아니라 양 측면에서도, 즉 3면에서 공격해 격퇴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해미읍성 안으로 들어가면 수령이 300년은 족히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를 중심으로 지방 관아인 동헌(東軒)과 출장을 온 관료들이 숙박하던 객사(客舍), 죄인들을 가두어 두었던 옥사(獄舍) 등도 재건되어 있다. 동헌을 왼쪽으로 끼고 야트막한 언덕 위로 올라가면 정상에 청허정(淸虛亭)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지금의 정자는 2011년에 재건한 것이기는 하나 해미읍성 일대를 한눈에 조망하기에 제격이며, 주변의 소나무 숲은 산책하기에 일품이다. 전북 고창읍성(高敞邑城) 및 전남 낙안읍성(樂安邑城)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온 읍성(邑城)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해미읍성이 제 역할을 했기에 내륙지방은 오래도록 안녕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협력과 상생의 역사가 갖는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기 위해 오는 10월 7일부터 사흘 동안 ‘제20회 서산해미읍성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코로나19로 중단된 이후 4년 만의 축제다. 긴 역사만큼이나 더욱 다채로운 행사들로 구성될 예정이다.
두 사찰과 한 개의 마애불에 녹아있는 염원
충남 서산은 문화유산 면에서도 두터운 역사를 자랑하는 고장이다. 자연과 조화로움도 인상적이다. 대표적인 곳으로 개심사(開心寺)와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 그리고 간월암(看月庵)이 있다.
보물 143호로 등재된 개심사(開心寺) 대웅전(大雄殿). 개심사에 가면 건축예술이 돋보이는 대웅전 외에 심검당(尋劍堂)도 둘러볼 것을 권한다. 심검당은 여러 절을 떠돌며 수행하던 행각승이 머물던 별채로, 자연이 깃든 아름다움을 뽐낸다.
먼저 상왕산(象王山)과 일락산(日樂山) 사이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개심사는 백제 말기인 서기 654년에 창건된 이래 1,4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써오고 있는 사찰이다. 오랜 역사와 미학적인 가치로 말미암아 충남 4대 사찰 가운데 하나로도 일컬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개심사는 사찰로 향하는 여정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사찰 주차장에 닿기 직전 지나는 신창(新昌) 저수지는 일대의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한 시설인데, 가을 아침 그곳을 지날 때면 상서로운 안개가 신비감을 더해준다. 잠시 차에서 내려 산책을 권한다. 이후 주차장에서 일주문(一柱門)을 지나면 사찰까지 500미터 남짓한 숲길이 이어진다. 그 끝에서 만나는 첫 풍광은 직사각형 연못 위에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걸쳐놓은 외나무다리다. 그 옆으로 거울 연못이라는 뜻의 ‘경지(鏡池)’라고 새겨놓은 표석이 있다. 스스로의 마음을 물에 비추어 돌아보고 성찰하라는 의미로, ‘마음을 열고 온갖 번뇌를 씻는 사찰’이라는 뜻을 가진 개심사의 이름과 일맥상통한다.
이렇듯 개심사는 화려하지 않아 오히려 돋보이는 사찰이다. 2004년 복장유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1280년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불(木佛)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佛坐像), 1484년에 고쳐 지은 이래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대웅전(大雄殿) 등 곳곳에 단아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시선을 끄는 것은 승려들의 거처인 심검당(尋劍堂)이다. 옆에 연결돼 있는 부엌 부분만 후에 덧대어졌을 뿐 대웅전과 비슷한 시기에 고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이 유독 이목을 끄는 까닭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 휘어진 통나무를 최소한만 다듬어 세운 기둥 때문이다. 단청도 칠하지 않아 미세하게 벌어진 나무 틈새들에서는 역사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사찰 안팎의 가을 단풍과 함께 어우러져 천년고찰의 중후함과 함께 소박하면서도 아늑한 운치를 더한다.
백제 말기의 화강석 불상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 긴 세월 수풀에 파묻혀 있다가 1958년 발견되었다. 빛의 각도에 따라 오묘하게 변하는 미소가 돋보인다.
개심사의 반대편 산자락에 거대한 암반을 캔버스 삼아 조각돼 있는 서산마애삼존불 역시도 꾸밈 없이 소박해 보이기는 매한가지다. 심지어 범접할 수 있는 저 너머의 누군가가 아니라 내 주변의 장난끼 많은 친구와 같은 익살스러운 느낌마저 풍긴다. 시간이 지남에 따른 분위기 변화도 예사롭지 않다. 벽면 부조이기는 하나 양감(量感)이 풍성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보니 시간 흐름에 따라 태양빛이 드리우는 각도가 달라져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닌가 싶다. 더욱이 1,500년 가까이 베일에 싸여 있다 1959년에야 세상에 알려져 국보로 지정된 문화유산이기에 특별함은 배가 된다. 서산마애삼존불이 괜히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게 아닌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서산에 간다면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이 있다. 머드 맥스 영상에도 등장하는 간월암이다. 천수만 위에 떠 있는 서산의 최남단 섬 간월도(看月島)에 있는 유일무이한 암자(庵子)이다. 이곳 역시 웅도처럼 하루에 두 번 바다 갈라짐이 나타날 때면 약 30미터 폭의 길이 드러나기에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웅도와 차이라면 밀물에 길이 잠긴다 해도 나룻배가 있어 들고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밀물에 잠겼을 때의 모습이 마치 연꽃 같다 해서 연화대(蓮花臺)라고도 불리는데, 실제로는 밀물 때든 썰물 때든 할 것 없이 한 폭의 그림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해 질 녘에 간월암에 간다면 그 그윽함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간척의 역사가 곧 한국의 역사
개심사를 비롯한 서산마애삼존불과 간월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이 질박한 역사 유산에서 느껴지는 공통된 감정은 옛사람들의 평화와 안녕을 바라는 깊은 염원이다. 바다가 많은 것을 제공해 주긴 했으나 해난사고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전근대 시대에는 해적의 노략질 탓에 공동체의 평화가 깨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옛 서산 사람들, 나아가 한국인들은 그와 같은 도전적 상황에 주눅 들지 않고 생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한시도 멈춘 적이 없었다. 한국전쟁으로 온 국토가 초토화되었음에도 다시 일어섰으며, 독재 시대를 물리치고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해 왔다. 그런 면에서 간월암 바로 동쪽에 있는 ‘서산 A지구 방조제(防潮堤)’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끝내 그 방조제를 쌓는 데 성공함으로써 착공 15년 3개월 만에 완공한 ‘서산 AB지구 간척지(干拓地)’는 좁게는 서산, 넓게는 한국과 한국인의 면면을 상징하는 바로미터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워낙 큰 바다답게 공사가 시작된 1980년 당시에는 간척지 조성을 위한 방조제를 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승용차 크기의 돌을 퍼부어도 초당 8미터가 넘는 거센 물살에 휩쓸려 가기 일쑤였다. 공사는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공사를 맡고 있던 정주영(鄭周永 1915~2001) 현대건설(現代建設) 회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고철로 이용하기 위해 스웨덴에서 들여온 23만 톤급 대형 유조선이 있었는데, 그것을 끝내 메우지 못하고 있던 마지막 물막이 공사 구간에 바짝 붙여 가라앉히라는 지시였다. 모두가 긴가민가하는 사이에 유조선을 가라앉히는 데 성공했고, 유속이 잦아든 틈을 타 공사는 순조롭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길이가 7.7킬로미터에 달하는 방조제가 완공되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당시 한국의 전체 농경지 면적의 1퍼센트에 해당하는 1만 헥타르가 넘는 농경지였다. 단일 농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서, 50만 명의 사람들이 1년 안팎을 먹을 수 있는 양의 쌀을 재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청정한 바다와 영양 풍부한 갯벌이 선사해 준 충분한 양식, 그리고 공동체의 평화를 지켜내는 데 그치지 않고 더욱 확대하기 위한 노력으로 대표되는 충남 서산. 그러고 보면 서산 여행은 단지 서산의 과거에서 멈추지 않고 오늘의 한국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주민들이 수산자원을 활용하는 한편 지속가능한 환경을 위해 보호를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는 점을, 해미읍성이나 불교 관련 문화유산으로부터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의 행복도 중시하는 문화를, 그리고 서산AB지구 간척지에서는 그런 역사가 낳은 한국인의 정신까지 말이다. 가을 정취 넘치는 서산은 과거를 통해 한국의 오늘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여행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