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전 세계 모든 연령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경이로운 영향력을 보여줬다.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중 하나인 <골든>이 제68회 그래미 어워즈 ‘베스트 송 리튼 포 비주얼 미디어’ 부문에서 수상하는가 하면, 가상 걸그룹 헌트릭스가 제79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축하 무대를 꾸몄을 정도로 이 영화의 인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올해 1월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튼호텔에서 열린 제83회 골든글로브 어워즈에서 매기 강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 2관왕을 차지했다. 수상 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오드리 누나, 이재, 레이 아미(왼쪽부터).
ⓒ 연합뉴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은 ‘성공’이라는 말로 부족하다. 가히 ‘현상’이라 할 만한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넷플릭스가 가지고 있던 기존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웠다. 우선 넷플릭스 최초로, 불과 공개 13주 차에 조회수 3억 회를 돌파했다. 이후 예정된 수순처럼 넷플릭스 역대 통합 조회수 1위에 올랐으며, 한번 탄력을 받은 누적 시청 그래프는 좀처럼 꺾일 줄 몰랐다. 아무리 늦어도 공개 3개월 정도가 지나면 상승세가 점차 둔화하는 일반적 흥행 패턴과는 차원이 다른 기세였다.
명확한 선과 악 구도, 빠른 이야기 전개, 매력적인 캐릭터 등 이 작품에는 대중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선호할 만한 요소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두를 한데 묶어 사람들을 모니터 앞에 오래 잡아둘 수 있게 만든 건 단언컨대 음악의 힘이었다. 그래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은 어쩌면 여타 애니메이션 영화보다 더핑크퐁컴퍼니의 대표 음원 ‘핑크퐁 아기 상어’와 비교하는 게 어울릴지도 모른다. <겨울왕국>의 를 비롯해 이런 노래들은 특히 10대 이하 어린이와 청소년 시청자의 마음을 빠르게 사로잡았다.
K-팝에 관한 진심
같은 노래나 영상을 반복 청취 및 시청하는 데 익숙한 시청자층의 열광은 오프라인으로 이어졌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계속해서 위기설에 시달리는 영화관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직접 등판한 것이다. 그것도 작품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싱어롱 상영’의 형태로 말이다. 2025년 8월 23일 북미에서만 1,700개가 넘는 극장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약 1,000개 상영관을 매진시켰고, 개봉하자마자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K-팝을 테마로 한 일종의 뮤지컬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싱어롱 이벤트가 이 작품과 궁합이 잘 맞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주인공 루미처럼 긴 보라색 머리를 하나로 땋고, 첫 곡 부터 영화의 하이라이트 <골든>까지 쉼 없이 고조된 분위기로 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의 모습을 전하는 외신이 하루가 멀다고 전해졌다.
결국 이 모든 것의 시작은 K-팝이었다. K-팝을 진심으로 좋아해 온 사람들 중 상당수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K-팝의 위력에 편승하려는 마케팅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K-팝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음악 자체보다는 K-팝이 보유한 팬덤의 폭발적 에너지를 탐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콧대 높은 영미권 미디어도, 긴 역사를 가진 유수의 음악 시상식도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던 그 힘은 아군과 적군을 전부 빨아들일 정도로 강력한 자기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K-팝 팬덤은 잿밥에만 관심 있는 이들에게 한두 번 당해본 게 아니었다.
하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그런 사례들과 확실히 달랐다. 작품을 보면 알았다. 사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단순하다. 비밀을 숨긴 히어로가 사연 있는 적을 만나 서로 교감하다 결국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한다는 이야기.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마음을 주었던 전형적인 히어로물의 공식이다. 다만 그 모두를 감싸는 포장지가 달랐다. 영화 곳곳에 나타난 K-팝과 한국 문화, 익숙한 서울 풍경까지 어디 하나 제작진의 진실된 마음이 어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상적 걸그룹의 재현
스토리만 보면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작품의 개성과 캐릭터의 독자성은 어디까지나 K-팝의 몫이었다. 영화 오프닝에 등장하는, 대대로 이어온 역사와 전통의 ‘데몬 헌터’ 3인조 그룹의 면면부터 보자. K-팝,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짧은 시간 스쳐가는 그들이 누구를 모티프로 삼았는지 단번에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한국 걸그룹의 원조격으로 불리는 김시스터즈, 국내 최초의 댄스 걸그룹 세또래 또는 3인조 1세대 걸그룹 S.E.S.를 지나 태어난 ‘헌트릭스’는 한 치의 오차 없이 K-팝 걸그룹의 이상적 모습을 재현했다. 영화를 보며 유쾌하면서도 감성적인, 소탈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가족과 다름없는 단단한 자매애로 똘똘 뭉친 그들을 좋아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
헌트릭스는 영화 내내 노래하고 춤춘다. 라이벌 그룹 사자보이즈도 마찬가지다. K-팝 아이돌 그룹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K-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하다. 에서 신인 보이 그룹의 필수 코스인 ‘청량 콘셉트’를, 에서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했다’ 선언하던 수많은 보이 그룹을, 에서 숨겨둔 카리스마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걸그룹을 떠올리지 않은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심지어 이 노래들 속에는 2020년대 들어 ‘케이팝 세계화’에 눈이 먼 ‘이지리스닝’ 유행 사이로 자취를 감춰 버린 K-팝의 그리운 원형이 하나씩 숨어 있었다. K-팝 팬들 사이에서 ‘교수님들의 조별 과제’라는 반응이 괜히 등장한 게 아니었다. 이 말은 ‘K-팝을 수십 년 연구한 전문가들이 팀을 이뤄 과제를 제출한 것 같은 수준’이라는 뜻으로, 그만큼 완성도가 높았음을 의미한다.
K-팝의 정수를 담은 OST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OST는 가상의 아이돌 그룹들이 부른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K-팝 스타들을 뛰어넘는 음악적 성과를 거두며 돌풍을 몰고 왔다.
ⓒ 넷플릭스
K-팝의 숨은 ‘오리지널리티’까지 놓치지 않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 OST의 주역은 더블랙레이블이다. 빅뱅, 2NE1, 블랙핑크를 프로듀싱하며 YG엔터테인먼트를 K-팝 3대 기획사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프로듀서 테디가 설립한 바로 그 레이블이다. 2021년부터 YG 산하에서 독립해 독자적 활동을 선언함과 동시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 프로젝트를 만난 셈이다. 앨범에 참여한 프로듀서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 영화가 무척이나 즐거운 프로젝트였다고 말한다. 서로의 문화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한 협업과 K-팝의 성공 공식, 그 가운데에서도 빅뱅, 2NE1 등을 통해 영미권을 중심으로 좋은 반응을 가장 빨리 얻어본 이들의 에너지가 모인 셈이었다. BTS나 블랙핑크 같은 대형 그룹이 아니면 좀처럼 흥행이 쉽지 않다고 하는 북미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 OST가 유독 좋은 반응을 이끈 이유이기도 했다.
K-팝 성공 공식을 꿰고 있는 이들을 등에 업은 프로젝트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현상’에 있어 OST의 인기는 작품 그 이상이었다. ‘빌보드 핫 100’ 싱글 차트 8주 1위를 자랑하는 타이틀 곡 <골든>을 중심으로 OST의 거의 전곡이 사랑받았다. 앨범 가운데 8곡의 수록곡이 빌보드 100위 권에 동시에 진입하는 진풍경 가운데 3곡은 무려 톱 10에 이름을 올렸다. 힘이 빠지려나 싶을 때마다 음악과 영화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화제성을 견인했다. 골든 글로브도, 아카데미 시상식도, 그래미 시상식도 모두 참지 못하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손을 들었다. 덕분에 2026년 상반기까지도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는 쉽게 식을 것 같지 않다.
K-팝은 지금까지 ‘특정 팬덤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쌓아 올린 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K-팝이 낯선 이들에게 팬덤은 어디까지나 경외의 대상이었다. 세상은 그들이 무엇을 사랑하는지보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까지 사랑하게 만드는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K-팝의 정수에서 뽑아낸 순정한 에너지가 그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손끝에서 영화가, 음악이 되어 더 먼 곳으로 뻗어가고 있다. 이해의 영역에만 존재하던 K-팝은 이제 서서히 수용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지금부터 시작될 K-팝의 이야기는 분명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