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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SPRING

‘젊은 거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2025년 10월 개봉한 영화 <세계의 주인>은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젊은 감독 윤가은이 6년 만에 선보인 신작이다. 한층 성숙해진 감독의 연출력과 등장인물들의 연기력에 호평이 쏟아지며, 평단과 관객들에게 두루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영화인들과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영화 관람을 독려하는 이례적인 일도 벌어졌다.

2025년 10월 개봉한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은 평단과 관객들에게 두루 호평을 받으며, 낭트 3대륙 영화제 대상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거머쥐었다.
ⓒ 바른손이엔에이

<세계의 주인>은 키스 장면을 상상하게 하면서 시작한다. 관객들은 검은 화면에서 들려오는 음향이 누군가가 키스하며 내는 소리라는 걸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비어 있던 스크린은 곧장 흥분한 연인의 얼굴로 채워진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두 남녀, 그중에서도 여자아이에게 맞춰진 초점은 이렇게 자신하는 듯하다. ‘이 영화는 이 소녀의 격정을 전부 받아낼 준비를 마쳤습니다.’라고.

이 선언은 윤가은 감독의 전작을 아는 이들에게 더 또렷하게, 마치 전작에 보내는 작별 인사처럼 들렸을 것이다. ‘키스’라는 행위는 과거 윤가은의 영화 속 풍경들과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이다. 윤가은 감독은 걸출한 데뷔작 <우리들>(2016)과 후속작 <우리 집>(2019)은 물론 그 이전에 제작한 <손님>(2011)이나 <콩나물>(2013) 같은 단편들에서도 아이들이 친구, 가족, 사회와 맺는 관계를 들여다보는 데 중점을 뒀다.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묘사한 적은 없었다. 순하게 웃고, 말갛게 울며, 자아를 키워가는 유년기에 집중한 것이다.

하지만 여러 인터뷰에서 윤가은 감독은 줄곧 청소년, 특히 여성 청소년의 성과 사랑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밝혔다. 언젠가 자신이 동경해 온 장르인 하이틴 로맨스를 찍을 줄 알았다며 말이다. 영화 전문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그런 풋풋한 작품도 구상해 봤으나 완성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성과 사랑은 어떤 두려움, 공포, 불안, 걱정, 그리고 사회에 만연한 사건들과 분리될 수 없는 무엇이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누가 누구와 입 맞추는 것만으로는 끝맺을 수 없는 이야기가 시나리오로 스며들었다는 뜻이다. <세계의 주인>은 그 당혹감에 대한 응답이다.

또 다른 폭력성

열정적인 키스를 마친 주인(서수빈)은 야한 만화를 그리는 친구와 장난친다.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는 아직 모르지만, 담임 교사와 진로 상담을 할 때도 능청스럽다. 집에서는 마술을 연마 중인 남동생, 약간의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이는 유치원 원장 어머니와 산다. 아버지의 부재가 이 가족의 흉터와 연관이 있어 보이지만, 세 사람은 주어진 일상을 살 뿐이다.

이처럼 영화는 여느 교실에 하나쯤 있을 법한 씩씩한 인물로 주인을 소개한다. 조금 울퉁불퉁한 면모마저 그 나이에 걸맞은 개성으로 받아들여지도록. 그런데 주인의 급우 수호(김정식)가 교내에서 아동 성범죄자 출소 반대 서명 운동을 벌이고, 주인이 거기에 연명하기를 거부하면서부터 캐릭터에 얽힌 미스터리가 발동한다. 언뜻 문제없이 비치는 이 운동을 향해 거부를 넘어 분노를 표출하는 주인을 보며 관객은 묻고 싶어진다. 주인은 왜 그러는 걸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주인을 날 세우게 한 것은 서명 운동에 쓰인 언어다. 성폭력 피해자의 삶이 ‘파괴된다’는 문장으로 가해자의 복귀를 막으려는 수호를, 주인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 자신이 친족 성폭력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서명하지 않음으로써 하고 싶은 말은 간명하다.

‘삼촌이 내게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했어도, 나의 삶은 파괴되지 않았고, 파괴되지 않을 것이다.’

피해자의 존엄을 분명히 하는 것을 넘어서 ‘피해자다움’을 해체하려는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주인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학생들 앞에서 고백한 뒤 오해, 의심, 소외의 시간이 따라붙는다. 주인이 받는 익명의 쪽지가 그 상징물이다.

윤가은 감독은 가려진 발신자의 자리에 관객을 초대한다. 피해자를 피해자라는 정체성만으로 이해하려 드는 오만을 지적하다가, 이 영화마저 주인의 진심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물러나기도 한다. 그런 태도를 응축하고 있는 장면이 세차장 시퀀스다. 주인 모녀가 탄 자동차가 거대하고 시끄러운 세차 기계를 통과하는 동안, 주인은 소리를 지른다. 자기를 지켜주지 못한 엄마를 원망하다가, 세상을 나무라다가, 결국 그 모든 혼란을 응축한 존재인 자신을 발산하듯이. 자동차가 깨끗해지는 동안 주인의 음성은 들릴 듯 말 듯 뭉개진다. 영화는 주인의 마음속 얼룩도 조금이나마 지워졌기를 바라며, 엄마의 입을 빌려 말할 따름이다. “한 바퀴 더 돌까?”

중층적 시선

<세계의 주인> 속 인물들은 성폭력이라는 사건을 각기 다른 형태로 통과한다. 누군가는 직접적으로 고통받았고, 누군가는 그의 가족으로서 죄책감을 느낀다. 또 다른 누군가는 비슷한 경험을 했음에도 당당하게 어깨를 펼 수 없어 두 번 괴롭다. 성폭력은 나와 무관한 타자의 일일 뿐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 모두가 이 영화를 마주한 관객의 속내를 차례로 대변하는 셈이다.

윤가은 감독은 그동안 어린아이들의 시선으로 인간관계와 사회를 그려내며 독자적 영화 세계를 구축해 왔다. 세 번째 장편영화인 <세계의 주인>은 이전 작품들에서 한 단계 나아가 친족 성폭력을 경험한 고등학교 여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감독의 주제 의식을 한층 확장하고 심화시켰다.
ⓒ 바른손이엔에이

윤가은 감독은 익명의 쪽지를 통해 그들 각자가 품을 수 있는 의문까지 재현한다. 주인에게 어찌 그리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느냐고 따지며 조용히 있어 달라고 경고하던 무례함은 영화 끝에서 또 다른 고백으로 이어진다. 나도 너와 같은 일을 겪었다고. 그러나 너와 같이 살 수 없었다고. 너처럼 바로 서기 위해 너를 잊지 않겠다고. 윤가은 감독은 수십 명의 목소리로 마지막 쪽지에 적힌 문장을 관객에게 들려준다. 한 사람으로 특정되지 않는 그 목소리는 다정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내뿜는다. 즉 주인을 위협하던 익명의 목소리는 실은 다른 피해자의 것이었다. 주인도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수호의 동생이자 엄마의 학생인 여자아이를 꼬집어 멍들게 한 적이 있다.

영화는 이 두 가지 사실로써 관객을 시험하는 것만 같다. 피해자가 무결할 때만 연대할 것인가? 성폭력 피해자도 다른 종류의 가해자가 될 수 있지 않나? 주인은 ‘사랑’이 꿈이라고 적었다. 우리는 그 사랑을 함께 이루기 위해 무얼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세계의 주인>의 탁월함은 여기에 있다.

포용과 지지

성폭력을 주제로 다룬 기존 영화들이 대체로 사회 고발적 성향을 드러냈던 데 반해 이 영화는 폭력의 순간을 재현하거나 절망의 깊이를 표현하는 대신 과거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 현재의 일상을 어떻게 영위해 가고 있는지 섬세하면서도 비전형적인 시선으로 그려냈다.
ⓒ 바른손이엔에이

2025년은 드물게 봉준호 감독과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 모두 나온 해였다. 매해 신작을 발표하는 홍상수 감독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거장의 반열에 오른 예술가들 사이에서, 윤가은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영화 <세계의 주인>은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한국 영화’로 거듭 호명되었다. 이 영화는 2026년 2월 초 기준, 누적 관객수 약 20만 명을 기록했다. 한국 독립·예술 영화로서는 달성하기 어려운 스코어다. 봉준호, 연상호 등 유명 감독들과 김혜수, 김태리 같은 배우들, 그리고 수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홍보하며 응원하고 지지한 까닭이다.

토론토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바르샤바국제영화제, BFI 런던영화제, 홍콩아시안영화제 등 해외에서도 주목받았다. 평단과 대중의 애정을 두루 얻은 배경에는 성폭력 생존자의 실존을 헤아린 포용력도 있지만, 어렵다는 이유로 지나쳐 온 이야기를 툭 꺼내놓은 용기를 향한 지지도 있을 것이다. 윤가은 감독도 회고했다.

“<세계의 주인>을 향한 환대도, 불편한 마음도 모두 감사하고 기적 같았다.”

이 영화를 통해 존재하지만 묻힌 생존자의 목소리를 드높인 윤가은 감독은 또 어떤 작품으로 우리의 눈을 번뜩 뜨이게 할까. 당장 2026년 공개될 단편 앤솔로지 <극장의 시간들> 속 그녀의 짧은 영화 <자연스럽게>를 기다리며 이 젊은 거장의 성장을 기대해 보자.

남선우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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