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한국 무속을 모티프로 삼은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부쩍 늘었다.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이고, 예능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또한 무속인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상투적 묘사에서 탈피해 새로운 시각으로 이들을 그려낸다.
무속을 매개로 한 한국식 오컬트는 무속인들이 신의 중재자로서 귀신을 달래고 위로한다는 점에서 서구의 오컬트 장르와 차별화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이러한 한국 무속의 특성을 잘 담아내며, 한국식 오컬트가 하나의 장르적 계보를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오리지널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K-팝’과 ‘데몬 헌터스’의 결합이 절묘한 애니메이션이다. 일반적으로서구의 오컬트 장르에서 데몬 헌터스는 구마 사제를 가리키지만, 이 작품에는 무당이 등장한다. 각자의 신을 섬기는 무당은 무속 의식인 굿을 진행하는 동안 접신하고 신탁을 전달한다.
선악 구도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구마 사제는 악령들과 싸우고 이를 물리치는 존재로, 어찌 보면 ‘파이터’에 가깝다. 하지만 무당은 악령들(한국에서는 원귀들)과 싸우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고 맺힌 한을 풀어줌으로써 응당 가야 할 저승으로 고이 보내준다. 그런 점에서 무당은 파이터라기보다는 ‘카운슬러’에 가깝다. 영매자인 무당의 역할이 구마 사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얘기다. 이러한 차이점은 사후 세계와 귀신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관점이 서구와 다른 데서 연유한다. 한국에서는 귀신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는 무당의 후예인 헌트릭스 멤버들이 악령들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주인공 루미가 진우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이 싸움은 대결보다는 구원에 가깝다. 루미는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혼을 팔아 악령이 된 진우를 물리치는 게 아니라 구원해 주려 애쓴다. 루미의 태도는 무당의 본질적 역할과 맞닿아 있다.
조연에서 주연으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헌트릭스가 무대에서 팬들과 교감하는 과정은 무당이 굿을 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이 의식은 전통적으로 춤과 노래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로 그 점에서 굿은 K-팝 아티스트들의 공연과 유사하다. 무당들이 굿으로 원혼을 위로해 주는 것처럼 K-팝 아티스트들은 춤과 노래로 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
국내 대중문화에서 무당이 긍정적 역할로 묘사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무당은 대개 ‘신병’이라 불리는 원인 모를 병을 앓다가 내림굿을 받고 신을 받아들이는 혹독한 운명을 지녔다. 1970~8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는 무당의 영적인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미신으로 치부했다. 자연히 TV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무당도 대개는 무섭고 이질적인 존재로 그려졌다.
하지만 최근 K-콘텐츠 속에 나타나는 무당들은 훨씬 밝아졌고 당당해졌다. 영화 <파묘>에 등장하는 무당 화림(김고은)은 가죽 롱코트를 휘날리며 귀신과 맞서는 스타일리시한 모습을 선보인다. 화림 같은 젊은 세대 무당은 올해 상반기 방영된 SBS의 <귀궁>이나 tvN의 <견우와 선녀> 같은 TV 드라마에도 등장한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귀궁>의 여주인공 여리(김지연)는 첫사랑 윤갑(육성재)의 몸에 빙의한 이무기 강철과 함께 왕가의 저주를 풀어내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동안은 서사적 필요에 의해 조연이나 단역으로 등장했던 무당이 판타지 액션과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올라선 것이다. 이는 현재 무당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말해준다.
이런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잘 보여주는 작품이 <견우와 선녀>다.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이 작품은 대본집이 주요 온라인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을 정도로 화제성이 높았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성아(조이현)는 ‘천지선녀’로 불리는 고등학생 무당이며, 저주받은 존재인 첫사랑 견우(추영우)를 사랑의 힘으로 지켜내는 수호천사 같은 역할로 나온다. 견우를 구하기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당이 지니는 ‘힐러’로서의 면모를 강조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루미와 유사한 설정이다.
국내 OTT 플랫폼 티빙의 오리지널 시리즈 <샤먼: 귀신전>은 귀신 현상을 겪은 제보자들과 무속인들을 밀착 취재해 귀신과 무속이라는 주제를 다각도로 탐구한 다큐멘터리다.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국 샤머니즘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는 점에서 호평받았다.
티빙 제공
새로운 접근 방식
젊은 세대 무당이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 시대적 변화는 <신들린 연애>라는 매우 독특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탄생시켰다. 일정 기간 한 집에 머무르고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의 인연을 찾아간다는 포맷은 여타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무당과 점술가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자신의 영적 능력을 토대로 연애 상대를 선택한다는 신선한 발상은 시청자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성 출연자들이 태어난 일시만 보고, 그중에서 운명의 상대를 선택하는 오프닝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들은 자신이 모시는 신의 뜻이나 점괘를 통해 알게 된 운명의 상대와 자신이 본능적으로 끌리는 상대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다른 연애 프로그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재미를 제공했다. 출연자들의 수려한 외모와 언변 또한 젊은 세대 무당에게 호감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 프로그램은 2024년 첫 번째 시즌이 방영된 후 인기에 힘입어 올해 초 두 번째 시즌이 전파를 탔다.
장르적 분화
그렇다면 최근 몇 년 사이 무속인들이 호감의 대상이 된 이유는 뭘까. 우선 무속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달라진 데 있다. 한국인들은 이제 무속을 음습한 미신이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카운슬링으로 여기게 됐다. 한마디로 과거에 비해 무속을 훨씬 캐주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이제 사람들은 무속인이나 점술사들을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찾는다. 도시 변두리의 후미진 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던 무당집과 점집도 이제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에 자리를 잡은 경우가 많다.
한편 젊은 세대가 무속에 호감을 갖는 이유로,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꿈을 펼치기 어려워진 사회 현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은 이전 세대들이 젊은 시절 느꼈던 것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무속을 통해 보다 직관적인 조언을 듣고 그를 통해 위안을 느낀다. 무속에 관한 젊은 세대의 관심과 호감은 이 소재가 대중문화에서 다양한 장르로 분화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이제 무속을 매개로 한 콘텐츠들은 사극, 로맨스, 액션 판타지로 그 영역을 넓혔다. 또한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에 더해 <퇴마록> 같은 애니메이션, <샤먼: 귀신전> 같은 다큐멘터리의 소재로도 등장한다. 한국의 전통 무속 신앙이 지닌 문화적 요소들이 더욱 다채로운 형태로 새롭게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구아진의 네이버 웹툰 <미래의 골동품 가게>는 절대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무당들의 이야기다. 도서출판 들녘에서 단행본으로도 출간됐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인정받아 2022년 대한민국콘텐츠대상의 대통령상을 비롯해 다수의 상을 받았다.
ⓒ 구아진, 투니드 엔터테인먼트, 도서출판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