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믹스는 뜨거운 물만 부으면 간편히 마실 수 있는 음료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점차 대중화됐고, 현재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들이 시장에 나와 있다. 사람들의 입맛과 인식이 변화하면서 2010년대 이후 소비량이 줄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커피믹스는 인스턴트커피와 설탕, 크림을 일정 비율로 한 봉지에 넣은 제품이다. 1976년 동서식품이 국내 최초로 커피믹스를 개발한 이래 현재는 맛과 건강을 고려한 다양한 종류의 커피믹스가 출시되고 있다.
© 뉴믹스커피
믹스 커피는 인스턴트커피에 크림과 설탕을 넣어 조제해 먹는 방식의 커피이다. 믹스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누군가에겐 취향의 표현이고, 또 누군가에겐 위로의 언어이다. 한때는 서열과 관계를 상징했으며, 여성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기도 했다. 그 믹스 커피를 한 봉지에 담아낸 제품, 커피믹스가 탄생했다. 모두가 표준화된 맛을 즐기게 된 순간,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커피믹스는 단지 빠르고 간편한 커피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로 감정을 포장한, 한국식 커뮤니케이션이다.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물 속에서 퍼지는 그 맛은 어떤 시대의 감성을 품고 있다.
우수한 발명품
2020년 개봉한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는 유니폼을 맞춰 입은 여직원들이 누가 먼저 믹스 커피를 타는지 속도를 겨루는 장면이 등장한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여성 사원들은 저마다 커리어 우먼을 꿈꾸지만, 8년을 일했음에도 여전히 믹스 커피 타는 일이 주요 업무이다. 영화는 코믹한 장면 뒤에 시대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런가 하면 인스턴트커피와 크림, 설탕의 비율로 범인을 추적하는 장면은 커피 취향이 곧 정체성이던 시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정체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치며 수많은 고졸 여성들이 가장 먼저 정리 해고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여성이고 고졸이라는 이유로 저부가가치 인력으로 분류된 그들이 사라지자, 믹스 커피를 타고 회의실을 정리하며 일상의 틈을 메우던 손길 또한 함께 없어졌다. 남은 직원들은 곧 그 공백을 체감했다. 특히 믹스 커피를 직접 타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바로 그 시점에 커피믹스가 해결사처럼 등장했다. 봉지를 뜯어 컵에 넣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누구나 일정한 맛을 낼 수 있는 이 표준화된 취향의 커피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효율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그 상징성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2017년 특허청이 설문 조사한 ‘한국을 빛낸 발명품 10선’에서 커피믹스가 5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보다 앞선 순위가 훈민정음, 거북선, 금속활자, 온돌 같은 역사적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작은 봉지가 지닌 사회적 파급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웃도어 아이템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왕실을 비롯한 일부 고위층만 즐기던 사치품이었다. 커피가 대중적인 기호 음료로 정착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였다. 미군 보급품을 통해 인스턴트커피가 암암리에 유통되고, 다방에서도 믹스 커피를 팔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퍼졌다.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커피를 물에 타 마시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다.
1970년에는 식품 제조 기업 동서식품이 국내 최초로 인스턴트커피를 선보였다. 그리고 6년 뒤인 1976년, 세계 최초로 커피, 크림, 설탕을 한 봉지에 담은 커피믹스를 출시했다. 낱개 포장된 이 발명품은 과거 ‘빨리빨리’ 문화로 상징되던 산업화 시대 한국의 성장 속도와 정서를 담은 생활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초창기엔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가정과 사무실에는 각각의 유리병에 담긴 ‘커피 삼총사(커피, 크림, 설탕)’가 갖춰져 있었고, 커피를 개인의 취향에 맞춰 타 줄 인력과 사회적 여유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커피믹스는 오히려 아웃도어 아이템이었다. 사람들은 믹스 커피를 만들어 먹기 어려운 야외에서 레저 활동 중 커피믹스를 마시며 당분을 충전했다. 1980년대 들어 등산과 낚시, 야유회 문화가 확산되면서 커피믹스 소비량도 점점 증가했다. 커피믹스가 그 편리성 덕분에 인기를 얻자, 이후 여러 기업들이 커피믹스를 생산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고, 전체 커피 시장에서 커피믹스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게 됐다.
상징의 스펙트럼
커피믹스가 야외에서 실내로 들어온 건 1997년 이후였다. 잉여 인력의 부재, 급박한 노동 환경, 그리고 정수기의 대중화는 커피믹스가 업무의 기본 세팅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예전처럼 누군가의 취향을 일일이 기억해 커피를 내어줄 필요 없이, 모두가 같은 봉지로 만족할 수 있었다. 이로써 커피는 더 이상 서열과 기호의 상징이 아니라, 생존과 자기 위로의 도구가 되었다.
해외에서의 인식 변화도 흥미롭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커피믹스는 한국만의 이상한 문화였다. 에스프레소, 블랙커피, 캔 커피 중심의 시장에서 커피믹스는 지나치게 달고, 아무런 감각도 감정도 없어 보였다. 커피는 예나 지금이나 취향의 영역이고 감성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 모든 걸 생략한 듯한 커피믹스가 환영받을 리 없었다.
최근에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믹스커피에 우유, 시나몬 가루, 바나나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제조하여 마시는 트렌드가 불고 있다. ‘달고나 커피’가 대표적이다. 그릇에 꿀을 넣고 색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거품기로 젓다가 커피믹스를 넣고 걸쭉해질 때까지 계속 저은 다음 우유에 부어서 마신다.
© 한국관광공사
하지만 2010년대 들어 한국 드라마를 비롯한 K-컬처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며, 외국인들은 커피믹스를 감성적인 음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이 달달한 커피 한 잔을 매개로 나누는 대화가 그들의 감성을 건드린 것이다. 지금은 러시아, 동유럽, 인도네시아, 베트남, 대만 등지에서 박스째 수입하는 K-푸드가 되었다. 2016년 국내 한 여행사가 외국인 관광객 약 천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과반이 넘는(53%) 외국인들이 커피믹스를 ‘가장 맛있는 한국 차’로 뽑기도 했다. 믹스 커피를 한국의 차로 보는 시선이 흥미롭다.
한편 커피믹스는 생존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2022년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는 한 광산이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 당시 무너진 갱도에 고립된 광부들이 221시간을 버티게 해준 것이 바로 커피믹스였다. 이들은 커피믹스를 식사 대용으로 조금씩 나눠 먹으며 생명을 이어갔고, 구조 후 스스로 걸어 나올 만큼 건강했다. 커피믹스에 함유된 당분과 열량, 카페인의 각성 효과가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유용했는지를 보여준 극적인 사례다.
젊은 세대의 변화
최근 커피믹스는 다시 한번 새로운 얼굴로 나타났다. 배달 서비스 플랫폼 배달의민족 창업자로 유명한 김봉진 그란데클립 대표가 선보인 ‘뉴믹스커피’는 커피믹스를 시대감각에 맞게 재해석한 브랜드다. “커피는 원래 타 먹는 것”이라는 슬로건 아래, 다방과 사무실을 오가던 옛 감성을 다시 불러냈다. 서울 성수동과 북촌의 쇼룸형 매장은 그 자체로 커피 문화의 회고적 감성을 재현한 공간이다.
이 브랜드의 등장은 단지 레트로 감성 때문만이 아니다. 원두커피가 처음 보편화됐을 때 사람들은 그 쓴맛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카페모카, 프라푸치노 같은 달콤한 음료가 인기를 끌었다. 이후 아메리카노의 깔끔한 쓴맛으로 점점 입맛이 이동했지만, 최근 들어 다시 달고 진한 커피가 돌아오고 있다. 크림 라테, 아인슈페너, 비엔나 라테 같은 음료의 유행은 젊은 세대의 기호 변화를 잘 보여준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뉴믹스커피 성수동 매장 앞에서 제품을 시음해 보고 있다. 2024년 론칭한 뉴믹스커피는 ‘기념품 커피’, ‘디저트 커피’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브랜드이다. 군밤 맛, 시나몬 약과 맛, 팥빙수 맛 등 획일화되었던 기존 커피믹스의 맛을 다양하게 변주함으로써 커피믹스 문화의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 뉴믹스커피
이러한 흐름 속에서 커피믹스는 다시 새로운 것이 되었다. 뉴믹스커피 매장을 찾는 외국인 비율이 높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SNS와 드라마에서 본 한국식 커피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그들을 뉴믹스커피로 이끈다. 발상의 전환 측면에서는 이보다 신선할 수 없는 뉴믹스커피가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커피 한 잔조차 부담스러운 요즘 젊은 세대에게 커피믹스는 새로운 감정의 언어일 수 있다.
최근에는 커피믹스를 활용한 다양한 영상 콘텐츠도 활발히 유통된다. 커피믹스로 카페라테, 칼루아, 크림커피 등을 만드는 레시피 영상이 유튜브에 쏟아진다. 커피믹스 시장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진화하고 있다. 건강과 다이어트를 중시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당분이 거의 없는 제로 슈거, 고단백, 무지방 제품 등 기능성을 더한 제품들이 등장하면서, 기존 원두커피와 스페셜티 시장 사이에서 꾸준한 수요를 견인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통계에 의하면 2022년 기준, 국내 커피 시장에서 액상 커피 판매 비중이 35.6%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커피믹스 판매량도 24.8%를 기록해 아직도 믹스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2024년에는 커피믹스 판매량이 10년 만에 증가세로 전환됐다. 2024년 기준, 동서식품이 출시하는 커피믹스의 대명사 ‘맥심 모카골드’는 연간 약 57억 개가 팔렸다. 초당 약 180개가 팔린 셈이다. 이처럼 커피믹스는 여전히 한국인의 일상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효율과 위로의 상징이던 커피믹스는 다시 한번 새로운 세대에 의해 감정의 매개체로 재해석되고 있다. 취향의 서열을 해체하고, 감정을 연결하는 한국식 커피. 그 중심에서 커피믹스는 여전히 한 모금의 여유를 내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