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Guardians of Heritage > 상세화면

2017 AUTUMN

장구 소리, 그 삶을 오롯이 비추다

여섯 살부터 장구를 치기 시작한 이부산(Lee Bu-san 李部山)은 농악 장단에 춤 장단을 더하고, 영남과 호남의 전통을 아울러 자신만의 독특한 가락을 만들어 왔다. 60년 가까운 세월을 오로지 장구와 함께해 온 명인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장구로 인해 벼리어진다.

설장구 명인 이부산이 양손에 장구채를 들고 흥겨운 가락을 울린다. 설장구는 장구재비가 혼자서 솜씨를 보이는 놀이이다.

소년의 집에는 늘 객이 있었다. 장구를 메고 사랑방에 들어온 객들은 아버지 앞에서 어김없이 장구를 쳤다. 눈뜨면 아침 햇빛과 함께 밀려오는 장구 소리. 그래서 소년은 글보다 가락을 먼저 배웠다.

소리로만 들어 알던 장구의 물성을 처음 몸으로 경험한 것이 1961년, 소년이 여섯 살 되던 해였다. 머릿속에 맴도는 가락을 자신도 모르게 쳐 냈을 때 아버지는 그것을 들었다. 당시 전북무형문화재 제7-3호 호남우도 김제농악 보유자로‘인간문화재’였던 아버지는 그대로 한참을 서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장구 대면

그 시절 장구는 단순히 ‘악기’가 아니었다. 마을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흑백 TV에서 나오는 연속극을 먼발치에서 얻어 보는 것이 오락의 전부이던 시절, 장구, 꽹과리, 태평소 등 여러 악기와 갖은 춤이 걸판지게 어우러지는 농악단의 풍물 한 판은 서민들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대중에게 유희의 대상이었던 장구가 농악 단원에겐 밥벌이 수단이었다. 끼니도 잇기 어려워 허덕이던 시절에 장구를 치면 밥이 나왔고, ‘설장구’라는 솔로 장구놀음에서 관객의 숨이라도 몰아가는 날에는 허리춤에 꽂히는 지폐가 수북했다. 가난의 무게에 짓눌리던 민초들이 저마다 사연을 품은 채 농악단에 들어갔고, 전국을 유랑하며 기예를 팔아 허기를 메웠다.

그 돈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아는 아버지였지만, 대금, 아쟁, 소고 할 것 없이 악기란 악기는 모두 다 내치면서도 오직 장구에만 몰두하는 아들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았고, 둘은 모래판 위에 장구 두 대를 놓고 마주 앉았다. 그날은 농악단이 씨름 경기의 흥을 돋우던 날이었고, 그곳엔 모래 먼지 사이로 일어나는 여린 장구 소리와 그것을 감싸는 따스한 장구 소리가 함께 지나갔다. 이부산이 장구재비로 살아온 59년간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않은 소리였다.

 
춤사위 장단을 익히다

소년 이부산의 까맣고 보드랍던 머리가 하얗게 세어 가는 긴 시간 동안, 그저 아버지의 것이라고만 여겼던 장구가 서서히 아들에게 왔다. 설장구 명인으로 손꼽히는 이부산의 무대는 걸어온 세월의 방향이 보이는 자리 같았다.

공연이 시작되면 장구를 메고 걸어 나온 그가 양손의 채를 움직여 장구를 울렸다. 서로 다른 음고를 가진 장구의 두 마구리에서 낮고 두터운 소리, 높고 맑은 소리가 교차하며 퍼졌다. 그의 다리는 장단에 맞춰 부드럽게 흐름을 타고, 한 손이 장구를 치는 동안 다른 손은 채를 돌리기도 하고 잡기도 하며 흥을 냈다. 장구 소리를 담아내는 양 소리를 꼭 닮은 몸짓. 거기에는 그간 봐 왔던 다른 장구재비의 몸짓과는 분명 다른 구석이 있었다.

“1973년일 거야. 부산 공연에 갔는데, 당시 우리나라 무용계의 최고 명인이신 이매방(Lee Mae-bang 李梅芳) 선생님이 김진홍(Kim Jin-hong 金眞弘) 선생님, 이도근(Lee Do-geun 李道根) 선생님과 같이 오셔서 내 공연을 보셨어. 보시곤 좋구나, 무용하는 양반들이 설장구를 배우면 좋겠구나, 하셨지. 그래서 내가 무용하는 분들한테 장구를 가르치게 된 거야. 내내 농악만 하다가 거기서 무용 장단을 알게 됐어. 승무 장단도 하고, 살풀이춤 장단도 하고, 태평무 장단도 하고…. 똑같은 굿거리 장단을 친다 해도 농악의 굿거리와 무용의 굿거리는 다르거든.”

희대의 춤꾼들이 펼치는 춤사위 속에서 살았던 한 시절은 그의 몸에 저절로 녹아들었고, 낯선 장단을 경험하고 알아 가던 기억도 그의 장구 속에 고스란히 남았다.

“민속악은 악보가 없잖아. 정해진 시간 안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장단을 늘일 수도 있고 자를 수도 있단 말이지. 그건 경험에서 나오는 거고. 그래서 설장구의 멋은 말로 가르쳐 줄 수 없어. 본인이 느껴야 하는 거지.”그 시기를 지나는 동안 ‘장구’라는 단어 옆에 그의 이름 석 자가 나란히 올 때가 많았다. 풍물을 겨루는 대회라도 열라치면 주최 측은 이부산을 참가시키기 위해 애썼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깊은 감정의 골을 넘어 전라도 김제 출신의 그가 경상도 진주삼천포농악을 전수하는 장구재비(중요무형문화재 제11-1호 진주삼천포농악 전수 조교)가 될 정도였다.

“어릴 때 배운 호남우도농악은 화려하면서도 나긋나긋하지만, 진주삼천포농악은 선이 굵고 힘이 있어. 주변에서 말하길 내 설장구에 두 스타일이 다 녹아있대. 특이한 이력 덕분이지.”

“내 고향 김제는 평야가 발달된 곳이야. 평화로웠던 농촌 마을 모습이 음악에 그대로 나타났겠지. 그래서 장판에 콩 쏟아지는 소리, 가랑잎에 소낙비 닿는 소리까지 장구로 담아냈어. 난 그런 잔잔한 소리까지 표현하려 하는 편이야.”

가죽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의 변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그의 소리들이 궁금해졌다. 그가 만들어 내는 장구 소리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내 고향 김제는 평야가 발달된 곳이야. 평화로웠던 농촌 마을 모습이 음악에 그대로 나타났겠지. 그래서 장판에 콩 쏟아지는 소리, 가랑잎에 소낙비 닿는 소리까지 장구로 담아냈어. 난 그런 잔잔한 소리까지 표현하려 하는 편이야. 장구재비마다 자신이 표현하는 색깔, 그러니까 성음(聲音)이 비슷하거든. 이 장구를 치거나 저 장구를 치거나 한결같은 성음이 나오는 거지.”

그렇다고 모든 장구가 다 섬세한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죽 얘기를 시작했다. 장구채로 두드리는 장구통의 마구리는 가죽이고, 그 가죽의 종류와 상태에 따라서 장구 소리가 달라진다.

“잔잔한 소리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면 가죽이 얇아야 돼. 일반 소가죽은 두꺼워서 나한테 안 맞아. 소가죽은 정악이나 민요 장단을 치는 장구에는 쓰기도 하지만, 풍물용 장구에는 거의 안 써. 내 장구는 독일에서 수입한 송아지 가죽으로 제작한 거야. 소리가 부드러워.”

그가 어렸을 땐 개가죽을 벗겨 소금물에 담가 두던 풍경이 익숙했다. 그렇게 한두 달을 묵혀 털을 깨끗이 뺀 가죽은 못을 박아서 늘였고, 그것은 곧 아버지 장구에 붙어 소리가 되곤 했다. 농악이란 것은 말 그대로 농사 현장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던 민중음악이었고, 서민들은 고단한 삶에 음악으로나마 한 자락 위로를 얻고자 직접 악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마을에서 기르던 개는 장구 가죽이 되었고, 뒷산의 오동나무는 장구통이 되었다.

그럴 때면 삶과 음악이 스스로 악기를 만들고 두드리는 사람의 몸을 통해 하나가 되곤 했다. 농사일을 하는 짬짬이 오동나무를 고르고 베어 그 속을 손수 파고 깎으며 흘린 땀이 있었고, 좋아하는 소리를 생각하며 직접 장만한 가죽을 얇거나 두껍게 다듬던 정성스러운 손길도 있었으며, 찢어진 가죽을 꿰매 두드리며 달라진 소리를 가늠하던 조심스러운 마음도 있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렇게 정직한 삶의 소리를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직접 깎아 만들던 어릴 적 그 장구를 넘어서는 악기는 보지 못했다”는 그의 이야기는 멈추질 않는다.

“왼손에 쥐는 궁굴채는 대 뿌리로 만들거든. 그렇다고 아무 뿌리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야. 낭떠러지를 보면 반듯하게 튀어나온 뿌리가 있거든? 그걸 소금물에 담가서 진을 빼서 썼지. 그중에서도 마디가 일정하고 정확한 걸로 골라 써야 돼.”

악기를 자신에게 맞출 수 있다는 것은 악기를 온전히 장악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에게 유명 악기장이 만든 장구를 선호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고 잘라 말했다. 내가 원하는 소리를 구현할 수 있는 장구는 어디서든 찾아낼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내게 맞게 손보면 되니까.

경기도 수원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에서 공연이 펼쳐지고, 아이들이 설장구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바른 마음이 좋은 소리를 일으킨다

그에게 실력과 악기에 대해 물어도 얘기가 자꾸 돌아가는 곳은 마음자리다.

“날카로운 사람들은 장구를 쳐도 날카로운 소리를 내. 둥글둥글한 사람은 부드러운 소리를 내고. 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이 보이는 거지.”

장구재비의 됨됨이는 여럿이 어울리는 무대에서 더 잘 보이기 마련이라고 했다. ‘두레패 사물놀이’의 창단 멤버로 국내외 공연을 수천 회 이끌었던 그가 꽹과리, 장구, 징, 북 네 가지 리듬악기가 함께하는 사물놀이 속 장구에 대해 말했다.

“북이 박자를 잡아 준다고 하잖아. 그런데 가락이 빨라지거나 느려지거나 해서 뭐가 잘 안 맞을 때, 장구가 중심을 딱 잡아 주면 다른 악기들이 따라오더라고. 옛날엔 그걸 몰랐는데 한 해 한 해 하다 보니까 장구가 잘 받쳐 줘야 네 가지 소리가 무리 없이 흘러간다는 걸 알게 됐어.”

그의 이야기를 옆에서 듣던 제자 권준성(Kwon Jun-sung 權俊成)이 덧붙였다.

“장구 소리에 장구재비 성격이 이입되는 것처럼 사물놀이 공연에선 선생님의 배려심이 그대로 묻어나요. 거칠게 나가는 악기를 받쳐 주기도 하고, 흐름을 조율하면서 중심을 잡아 주시는 거죠. 실력과 성품이 겸비돼야 가능한 일이에요.”

제자의 이야기에 멋쩍어하던 그가 말했다. 경력이 10년이건 50년이건, 공연 30분 전에 도착해서 의상을 입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라고. 그 누가 어떤 예술을 일으키건 간에 사람이 바로 서는 것이 먼저라고도 했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를 꼽아 달라고 했을 때 내놓은 답도 과연 그다운 얘기였다.

“미국 11개주 순회공연을 할 때야. 호텔 청소해 주시는 부부가 동양인이었어. 그분들은 우리끼리 대화하는 걸 들으시고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어. 그런데 며칠 뒤에 보니까 두 분이 한국말로 말씀하고 계시는 거야. 본인들 처지를 창피하게 여겨서 한국인이라고 말씀을 못 하셨나 봐. 내가 말했지. 그런 생각 마시라고, 우리는 어디서건 하나 되는 한민족 아니냐고. 그래서 공연 좌석을 마련해 드렸지. 두 분이 내내 고생만 하고 살다 이런 구경 처음이라고 많이 고마워하셨지. 그게 그렇게 기뻤어.”

옛일을 떠올리던 그가 사진 촬영을 위해 옷을 갈아입으며 팸플릿을 슬며시 내밀었다. 본인이 의상과 고깔을 갖추고 장구를 치는 사진이었다.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냐고 거듭 묻던 그가 말했다. 이것이 내 등에도 있노라고, 일생을 건 이 길을 살아서나 죽어서나 품고 싶어서 몸에 새겼노라고. 과연 등에는 그 모습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고, 그 옆엔 ‘장지일타(杖地一打)’라는 한자어까지 보였다. ‘장구 메고 딛는 어느 땅에서건 평생 타악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직접 지은 말이라 했다.

“혼자 지니고 있다가 혼자 가지고 갈 뜻”이라며 웃는 그 앞에서 더는 장구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리고 장구 연주를 위해 매일같이 몸을 단련한다는 그의 말을 그제야 곱씹었다. 몸에 선명하기에 몸을 단련할 때마다 함께 벼려질 수밖에 없는 뜻, 그래서 곧고 단단하게 빛날 수밖에 없는 이부산의 뜻이 장구 너머로 천천히 지나간다.

강신재(Kang Shin-jae, 姜信哉) 자유기고가
안홍범(Ahn Hong-beom, 安洪範)사진가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