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피타이저에서 메인 디시를 거쳐 디저트로 이어지는 파인 다이닝의 코스 방식은 19세기 초 프랑스 파리의 귀족 계급과 고급 레스토랑에 도입되어, 19세기 중후반 기본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시선을 조선(1392~1910) 왕실의 연회로 돌리면 뜻밖의 사실과 마주치게 된다. 조선 왕실은 이미 15세기 이래 코스 방식으로 음식을 제공하고, 전국에서 최고의 식재료를 조달하며, 전문 요리사 조직을 운영하는 정교한 연회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무신년진찬도병>. 1848. 종이에 채색. 141.5 × 49.5 cm(한 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848년 당시 임금이었던 헌종(재위 1834~1849)이 할머니 순원왕후의 육순(60세)과 어머니 신정왕후의 망오(41세)를 경축하기 위해 개최한 궁중 연회의 모습을 담은 8폭 병풍 그림이다. 그중 이 장면은 창덕궁에서 헌종이 주관하여 거행한 의례를 묘사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왕실에서는 규모가 큰 연회를 ‘진연’ 또는 ‘진찬’이라 불렀다. 이는 왕과 왕대비(선왕의 비)·왕비의 생일 전후에 열리는 잔치인데, 진연이 진찬에 비해 상대적으로 스케일이 컸다. 18세기 이후에는 규모와 관계없이 모든 연회를 진찬이라고 지칭했다. 진연 혹은 진찬이 왕과 왕대비, 왕비의 매해 생일마다 열린 것은 아니었다. 왕의 경우에는 즉위 20·30·40주년에, 생일은 20·30·40·50·60세가 되었을 때 치렀다. 또한 70세까지 장수한 남성 관료 출신들이 입회했던 기로소에 왕이 들어가면 이를 축하하는 연회도 열렸다. 기로소는 연로한 고위 관료들의 친목을 위해 설치된 기관으로, 조선 시대 관리들은 이곳에 들어가는 것을 영예롭게 여겼다.
성대하게 거행된 행사였기에 진연과 진찬에는 수많은 인원과 물자가 동원되었고, 경비도 매우 많이 들었다. 그래서 왕은 신하들의 요청을 거부하다가 세 번째 요청이 들어오면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 행사가 자신과 관련될 경우, 두 번은 거절하고 세 번째에 허락하는 관행이 있었다. 왕의 윤허가 떨어지면, 행사 주관자는 잔치 전반을 준비하고 진행할 각 부서의 관원들로 임시 조직을 꾸렸다. 이 조직을 통해 일정, 참석자, 규모, 상차림 등 세세한 내용이 확정됐다.
왕실 연회의 기획과 준비
국립고궁박물관 상설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조선 왕실의 연회 상차림 재현 모습이다. 잔치의 주인공 뒤에는 일월오봉도나 십장생도 같은 병풍을 세우고, 앞에는 잔치의 규모와 주인공의 신분에 맞게 음식상을 차렸다. 또한 꽃으로 장식한 항아리와 촛대 등을 배치해 잔치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문제는 적어도 10년에 한 번은 열리는 왕실 잔치를 준비할 대형 부엌이 궁궐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저장 음식을 마련하는 소주방, 떡과 과자를 주로 만드는 생과방이 궐내에 있긴 했지만, 연회 음식을 장만하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이처럼 큰 부엌이 없었던 이유는 유학 이념이 왕과 왕비에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부부라 할지라도 서로의 역할에 엄격한 구별이 있어야 하며, 생활도 따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과 왕비는 각자의 공간에서 따로 살았으며, 평소 식사도 혼자했다. 각각의 처소 근처에 작은 부엌이 마련돼 있었기에 큰 부엌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왕실 연회를 앞두었을 때는 행사장 근처에 야외 임시 주방이 설치됐다.
잔치 음식을 담당한 사람들은 물품 공급 부서인 사옹원에 속해 있던 남성 요리사 숙수였다. 숙수들의 직급과 직무는 다섯 가지로 나뉜다. 재부는 왕실 식사를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였고, 선부는 왕의 일상식을 책임지는 요리사였다. 조부는 음식의 간을 맞추는 일을, 임부는 밥이나 죽 같은 요리를, 팽부는 고기나 채소 삶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이들 아래에 구이, 밥과 국, 술과 음료, 떡과 과자를 각각 담당하는 실무자들이 있었다.음식을 만드는 전 과정이 분업화돼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연회 장소였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에는 수백 명이 참석할 수 있는 실내 연회장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왕실 잔치는 왕의 업무 공간인 정전이나 대비와 왕비의 침전인 내전에서 열리곤 했다. 하지만 이 전각들도 규모가 작아, 대청에서 앞마당 전체에 이르는 공간에 마루를 깔아 연회장을 만들었다. 이 임시 연회장은 참석자들의 안전을 위해 왕실의 목수들이 대거 동원되었으며, 행사 반년 전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열구자탕’이라고도 불리는 신선로는 왕실 잔치에 빠지지 않았던 화려한 궁중 음식이다. 굽 부분에 숯불을 넣을 수 있는 화로가 있어, 어육과 채소 등 여러 가지 재료를 넣은 뒤 육수를 붓고 끓여 먹는 음식이다. 사진은 국가유산진흥원이 운영하는 궁중 음식 다이닝 한국의집이 올해 봄에 선보인 신선로 요리이다.
국가유산진흥원 한국의집 제공
코스로 제공된 음식
왕실 연회가 개최되면 보통 다섯 번에 걸쳐 진행됐다. 남성 관료들만 참석하는 연회, 왕실 여성들이 참여하는 연회, 왕실의 남녀 친인척만 참석하며 밤에 이루어지는 연회, 그리고 행사 주관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과 마지막으로 뒤풀이에 해당하는 야연이 있다. 이 다섯 종류의 연회에서 중심 행사는 참석자들이 연회의 주인공에게 술이나 음료를 바치는 단계이다. 이것을 ‘진작’이라 한다. 진작을 몇 번이나 하는가는 연회의 규모와 직결됐다. 진작의 횟수는 홀수로 시행됐는데, 아홉 번이 최대치였다. 하지만 조선 시대 왕들은 검소함을 내세웠으므로 보통 다섯 번이나 일곱 번으로 한정했다.
한편 진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공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참석자들 중에서는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 제일 먼저 주인공 앞으로 나와 축하의 말과 함께 술이나 음료를 올렸다. 그러면 시중을 드는 여자 나인이 안주상을 주인공 앞으로 옮겼다. 이때 음식은 술과 음료에 맞춰 어울리는 것으로 준비됐으며, 몇 종류의 음식이 오르느냐 또한 연회의 규모에 따라 달랐다.
아랫사람에게 잔과 안주상을 받은 주인공은 참석자들을 격려하며 고마움을 표현하고, 그들에게 마실 거리와 먹을거리를 나눠 주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연회장 남쪽에 자리 잡은 악대가 곡을 연주했고, 무대 가운데에서는 무용수들이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춤을 췄다.
이후 주인공과 참석자들에게 차, 과일, 과자가 놓인 상을 제공하면서 연회가 마무리되었다. 주로 다식(쌀, 밤, 콩 등의 곡물을 가루 내어 꿀이나 조청에 반죽해서 만드는 과자)·정과(과일, 생강, 연근, 인삼 등을 꿀에 조려 만든 음식)·유밀과(밀가루나 쌀가루 반죽을 모양 내 말린 다음 기름에 튀겨 꿀을 발라 만든 과자)와 함께 전복이나 꿩고기, 문어를 말려서 만든 포가 상에 놓였다. 이 단계에서 연회의 주인공은 참석자들을 비롯해 이번 잔치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데 참여한 모든 관리와 일꾼들에게 음식과 선물을 내렸다. 주인공이 자리를 떠나면 비로소 연회가 끝났다.
궁궐에서 사용했던 수저집들이다. 수저를 보관하는 기능적 용도 외에도 붉은 비단에 장수와 건강을 상징하는 문양이나 글귀를 수놓아 사용자의 안녕을 기원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왕실 잔치나 제사에 사용되었던 은제 주전자이며, 18~19세기 궁중 연회를 기록한 문헌들에도 등장한다. 몸체의 한쪽 면에는 상상 속의 동물인 삼족오가, 다른 쪽 면에는 달에서 절구를 찧는 토끼 모습이 선각으로 묘사되었다. 높이 29 ㎝, 바닥 지름 9.5 ㎝.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등급과 품격의 시각화
1892년 고종(재위 1863~1907)의 생일을 기념해 열린 잔치에서는 고종에게 9번의 안주상이 차례로 바쳐졌다. 사진은 당시의 안주상을 궁중음식문화재단이 모형으로 재현한 것으로, 은행과 홍합, 전복 등으로 만든 음식을 상에 올렸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파인 다이닝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음식의 품격을 상차림과 기물로 시각화하는 것이다. 조선 왕실의 연회는 이 원리를 식탁 위에 정교하게 구현했다. 진작마다 올리는 안주상과는 별도로, 연회의 주인공과 주요 참석자들 앞에는 큰 식탁에 음식이 차려졌다. 가령 순조(재위 1800~1834)의 탄생 40주년과 재위 30주년을 기념하여 1829년 창덕궁에서 열린 잔치에서 순조는 46그릇의 음식이 차려진 큰 상을 받았다. 왕후에게는 34그릇, 세자와 세자빈에게는 각 31그릇, 공주에게는 25그릇의 음식이 제공되었다. 식탁에 오른 음식의 가짓수는 왕정 사회의 신분 질서에 따른 것이다.
메뉴는 육류·어류·채소가 고루 배치된 균형 잡힌 구성이었다. 가령 1902년 고종 황제(재위 1863~1907)의 기로소 입소를 축하하며 열린 잔치에서 황제의 식탁에는 63가지의 음식이 차려졌는데, 그중에서 재료와 요리법이 겹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왕실 연회의 음식 재료와 분량은 연회가 끝나면 낱낱이 기록되어 서너 권의 의궤로 만들어졌다. 의궤란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자세하게 적은 책이다. 이 기록은 조선 왕실 연회 음식의 매뉴얼이자, 훗날 다시 재현할 수 있는 레시피 구실을 했다.
조선 왕실의 연회는 최상급 식재료, 전문 요리사 조직, 코스 방식, 신분에 따라 차등화된 격식, 그리고 음악과 무용이 어우러져 오늘날 파인 다이닝의 모든 핵심 요소를 이미 갖추고 있었다. 물론 조선 왕실의 연회와 서구의 파인 다이닝을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전자는 유학적 예법과 왕실의 정치적 권위를 실현하는 의례적 장치인 반면 후자는 상업적 미식 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아름답고 정교한 왕실 연회는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단절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파인 다이닝이 서구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거두면, 조선 왕실의 연회 속에서 한국 음식 문화의 긴 계보와 수준 높은 경지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연회의 술과 음료, 그리고 다양한 음식은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음식 문화가 오래전부터 세계 여느 왕실 못지않은 품격과 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역사적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