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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SUMMER

새로운 얼굴의 한식, 익숙한 맛의 색다른 문법

국내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가파른 성장에는 한식이 있다. 미식업계의 권위 있는 주요 상을 수상한 레스토랑 대부분이 파인 다이닝에 한식을 접목한 곳들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미국 등 서양에서도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면 해외에서 굳이 한국 레스토랑에 시선을 둘 이유가 없다. 이 점은 한국 레스토랑의 장점이자 특별함이다.

‘숙수’는 조선 시대 궁중에서 음식을 담당하던 남성 요리사를 일컫는다. 권우중 셰프는 자신의 성씨인 ‘권’과 ‘숙수’를 합쳐 레스토랑 이름을 짓고, 한식의 본질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소반에 음식을 내는 상차림은 가장 한국적인 방식으로 한식의 품격을 경험하게 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이다.
권숙수 제공

서양식 고급 정찬인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문화가 한국에 정착한 지는 20여 년 됐다. 2000년대 초중반 소득 수준이 높아지며 미식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커졌고, 그 시기 서구의 파인 다이닝 문화를 학습한 셰프들이 하나둘 독립형 레스토랑을 차리면서 국내 파인 다이닝 문화가 본격화됐다. 서양이나 같은 아시아권인 일본에 견줘 역사가 짧은 편이다. 하지만 짧은 역사에도 성장 속도는 빨랐다. 100년 역사가 넘는 미식 안내서 ‘미슐랭 가이드’ 별점을 받은 레스토랑이 한국에 수두룩하다. 매년 순위를 발표하는 미식 행사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50’에도 이름을 올리는 레스토랑이 늘고 있다. 다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전 세계 레스토랑 순위를 발표해 권위를 확보한 프랑스 미식 가이드 ‘라 리스트’에도 한국 레스토랑 진입 속도가 빠르다.

정관 스님이 죽순을 손질하고 있다. 한국 사찰 음식의 대가로 통하는 정관 스님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셰프의 테이블>에 출연해 해외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국내외 정상급 셰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지난해에는 사찰 음식에 담긴 지혜와 레시피를 정리한 첫 에세이 『정관 스님 나의 음식』을 출판했다.
ⓒ 베로니크 회거, 윌북 제공

다시 쓰인 한식의 언어

파인 다이닝 식문화는 스타 셰프를 배출하기 마련이다. 국내에선 대표적인 인물이 강민구 셰프다. 그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한국에서 유일하게 미슐랭 가이드 별 3개를 받은 요리사다. 미국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잠시 일한 적 있지만 유학파는 아니다. 국내 대학의 조리학과를 졸업하고 현장에서 실력을 쌓았다.

그의 레스토랑 ‘밍글스’는 2014년 문을 열었다. 당시 한식 DNA를 심은 그의 메뉴에 식도락가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밍글스 이전에 한국 파인 다이닝의 시초가 된 정식당의 단품들과 차별성이 있을지 의문을 가졌다. 정식당의 임정식 셰프는 서양식 플레이팅에 비빔밥 같은 우리네 음식을 담아 한식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바 있다. 하지만 밍글스에 대한 식도락가들의 우려는 오산이었다. 한식의 기본인 장을 이용한 디저트 ‘장트리오’는 스테디셀러가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 디저트 크렘 브륄레에 우리네 장과 고춧가루 등을 섞어 만든 후식이었다. 이질적인 식재료인데 묘하게 맛의 궁합이 맞았다.

코스엔 한식의 향취가 넘실거렸다. 하지만 진한 한식 맛은 아니었다. 발걸음 겨우 뗀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컨템포러리 한식’ 세계로 진입한 맛이었다. 그는 기자와의 만남에서 “막상 한식을 하려니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다는 걸 절감했다”고 말했다. 배움에 목말랐던 그는 한식 스승을 간절히 찾아 나섰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는 셰프들의 스승으로 불리는 조희숙 선생과 사찰음식 명장 정관 스님을 만났다. 조희숙 선생은 대학 졸업 후 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서울 특급 호텔 주방장을 지낸 한식 전문가다. 한식이 세계적으로 부각되면서 명성이 더욱 높아진 실력자다. 2020년엔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50’에서 ‘아시아 최고 여성 셰프’로 선정되기도 했다.

강민구 셰프는 조희숙 선생에게 간청했다. 자신을 비롯해 요리사들을 위한 한식 수업 모임을 꾸려달라고 말이다. 그렇게 맺은 조희숙 선생과 강 셰프의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정관 스님과의 인연은 그의 실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정관 스님은 넷플릭스 시리즈 <셰프의 테이블>에 출연해 세계에 한식을 알린 사찰음식 대가다. 한국의 사찰음식은 다른 아시아권 사찰식과 달리 수행을 기본으로 하며, 극강의 식도락을 추구하지 않는다. 정신이 빠진 먹거리는 그저 허기를 채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인간의 역사가 표표히 흐르는 문화로서, 먹거리에는 생각과 철학이 깊이 스며 있다. 강민구 셰프는 정관 스님을 통해 한식의 정신 한 축을 깨우쳤다.

지금 밍글스는 더 깊어진 한식의 맛을 선보인다. 당도가 높고 향이 진한 제주도 구좌읍 당근, 외국인 관광객들이 열광하는 참기름, 한우, 매실 고추장, 오미자, 찹쌀 등 우리 땅에서 나는 식재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찹쌀밥에 잘 익힌 서해안 대하 구이를 곁들인다. 여기에 전통주인 막걸리로 만든 소스를 더한다. 한우 스테이크엔 전통 육류 요리 중 하나였으나 근래에는 길거리 음식으로 인기가 높은 순대가 함께한다. 초창기의 밍글스가 서양식에 한식을 살짝 가미한 음식을 선보였다면, 현재의 밍글스는 조연의 자리를 박찬 세련된 한식이 주인공이다. 그의 이런 행보는 다른 셰프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강민구 셰프의 밍글스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서로 다른 것들을 조화롭게 버무리는 데 무게중심을 둔다. 전통 한식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현대적인 테크닉을 유연하게 결합함으로써 한식 파인 다이닝의 지형을 바꾼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된다.
©HUBLOT

식탁에 오른 ‘지역’과 ‘전통’

권우중 셰프가 운영하는 ‘권숙수’는 부침이 심했던 고급 외식업계에서 용케 잘 버틴 컨템포러리 한식 레스토랑이다. 그는 초창기부터 반상을 코스에 내는 등 한식의 전통적 매력을 강조했다. 그는 종종 “진짜 한식 셰프이고 싶다”고 말한다. 유행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는 장도 직접 담근다. 그가 조부의 생가에서 장을 담그는 날이면 레스토랑 전 직원이 동원된다. 직원들은 흥이 난다. 한 해 레스토랑 영업의 승패는 장맛에 달렸다. 메주(콩을 삶아 절구에 찧은 다음 뭉쳐서 덩이로 만든 다음 발효·숙성시키는 것. 된장, 간장, 고추장의 재료) 양만 해도 80장이 넘는다고 한다. 메주는 한식의 근간인 장의 처음이자 끝이다.

김은희 셰프의 ‘더 그린 테이블’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국내 여성 셰프의 수는 과거에 견줘 늘었지만, 여전히 적다. 2010년대 말 이른바 스타 셰프로 명명되며 방송을 누빈 이들 대부분이 남성이었다. 그런 풍토에서 살아남은 여성 요리사가 바로 김 셰프다. 그녀는 본래 프렌치 레스토랑 셰프였다. 2007년 문을 연 그녀의 레스토랑은 미국 요리학교 CIA에서 자신이 갈고 닦은 프랑스 요리를 선보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김 셰프는 몇 년 전 화려한 번화가인 강남 지역에서 종로구 원서동으로 레스토랑을 옮기며 변신했다. 이곳에서는 창밖으로 고풍스러운 창경궁이 보인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고급 한식 뷰 맛집’으로 알려진 이유다. 그녀는 우리 땅에서 자란 제철 채소의 맛을 강조한 샐러드, 오래 끓여야만 감칠맛이 우러나는 국 스타일의 수프, 연근으로 만든 한 입 거리나 장아찌 등을 낸다. 그녀는 몇 년간 한식 수련에 매달렸다. 대한불교조계종이 운영하는 사찰음식 전문 교육 기관 향적세계의 전 과정을 마쳤다.

요즘 새롭게 조명되는 한식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엔 ‘솔밤’, ‘비움’, ‘주은’, ‘테이블 포포’, ‘이타닉 가든’ 등이 있다. 이곳들의 공통점은 각 지역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제철 식재료를 직접 공수해 오거나 사장됐던 지역 음식의 조리법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릇이나 실내 장식에도 한국적 미감을 담기 위해 신경 쓴다.

올해 미슐랭 가이드 별을 처음으로 획득한 레스토랑 주은은 박주은 셰프가 진두지휘한다. 우리 전통 도기와 한국 풍광을 미디어아트로 구현한 실내 장식이 돋보인다. ‘세븐스도어’를 통해 이미 여러 해 동안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순위에 오른 김대천 셰프는 몇 년 전 비건 콘셉트의 레스토랑 비움을 열어, 소박하고 절제된 한식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다. 비움에 들어서면 마치 궁을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엄태준 셰프가 이끄는 솔밤은 다른 요리사들도 메뉴를 경험해 보기 위해 예약 경쟁을 벌이는 곳이다. 누룩으로 숙성한 금태를 숯불에 구운 생선 요리, 합자장을 발라 구운 전복 요리 등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 순서대로 나온다. 합자장은 한국인들조차 생소하다. 토종 홍합을 삶고 졸이는 과정을 수십 번 반복해 만드는 통영의 전통 장이다. 농축된 맛이 일품이다.

이타닉 가든은 손종원 셰프가 총괄한다. 그는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두 번째 시즌과 JTBC의 요리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 등에 출연해 최근 인기가 급상승 중이다. 그도 전통 조리법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그 조리법에 자신만의 감성을 담는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잡채를 한입에 쏙 들어오는 둥근 크기로 빚어낸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 손 셰프와 함께 출연했던 김성운 셰프는 자신의 레스토랑 테이블포포에서 고향인 충청남도 태안의 식재료를 마음껏 펼쳐놓는다.

기하학적 형태의 그릇 위에 한 입 거리 요리가 정갈하게 놓여 있다. 스와니예의 이준 셰프는 기승전결이 있는 무대 공연처럼 한 끼 식사가 고객들에게 추억으로 남기를 바란다. 그가 그릇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다. 이 그릇은 하패리목공소의 이재하 작가와 협업하여 제작했다.
ⓒ 신동민

이타닉 가든의 손종원 셰프는 제철 식재료와 전통 식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집중한다. 이타닉 가든의 여름 메뉴 중 하나인 호박 잡채는 말린 애호박에 다양한 품종의 호박과 호박꽃을 버무려 전통 잡채를 새로운 감각으로 접시에 담았다.
ⓒ 조선팰리스 서울 강남, 럭셔리 컬렉션 호텔

음미해야 느낄 수 있는 맛

한식 파인 다이닝이 짧은 기간 다채로운 변화를 꾀하는 가운데 시류에 아랑곳하지 않고 굳건히 자신을 지켜온 레스토랑들도 있다. 이런 곳들은 외국인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예컨대 서울 서촌에 자리한 ‘온지음’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포함해 새롭고 개성 강한 문화를 좇는 힙스터들 사이에서 명소로 통한다. 경복궁 돌담을 마주하고 있는 온지음은 조은희·박성배 셰프가 이끈다. 이들의 한식은 한복의 우아함을 장착한 듯한 맛이다. 방풍죽, 탕평채, 진주식 갈비찜, 봄나물 비빔밥 등 이름만 들으면 언뜻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먹어 보면 깊은 맛이 일품이다. 이곳은 그럴 듯해 보이는 화려한 조어로 맛 자랑에 나서길 거부한다. 소박한 음식 이름 속에 한식의 진수가 있다고 믿는다.

메이필드호텔의 한식 레스토랑 ‘봉래헌’도 온지음 못지않게 정통 한식을 강조하는 곳이다. 이곳을 이끄는 이는 이금희 조리장이다. 그는 1980년대 말부터 국내 특급 호텔 한식당에서 일하며 실력을 쌓았다. 봉래헌의 구절판, 나물, 전 등은 한식의 원형을 경험해 보고 싶은 외국인들이 환호할 만한 맛이다. 지난 3월, 45년 만에 새로 단장한 ‘한국의집’은 앞서 언급한 조희숙 선생이 고문으로 있는 곳이다. 이곳 또한 기품이 있는 한식 맛을 선보인다.

한식은 천천히 음미할수록 맛의 정수가 드러난다. 장, 김치 등 재료 자체가 발효라는 시간의 힘이 작동해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련된 서비스까지 더해진 파인 다이닝 한식 레스토랑은 경험의 새로운 경지를 선물한다.

온지음의 다양한 메뉴들을 한 그릇에 담아본 모습이다. 온지음은 고조리서와 전통 조리법에서 영감을 받은 음식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테이블에 올린다. 재료 본연의 순수성을 지키면서 오랫동안 즐길 수 있는 담백한 맛을 추구하는 것이 이곳의 스타일이다.
ⓒ 온지음

비움은 채식 중심의 한식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며, 사람과 자연이 상생하는 음식을 지향한다. 김대천 셰프는 자연의 순리와 조화를 따르면서, 계절과 땅의 기운이 담긴 요리를 선보인다. 사진은 한식 도시락으로, 울릉도와 지리산, 제주 등 천혜의 자연환경에서 자란 식재료로 만든 나물 반찬과 몸에 좋은 잡곡밥이 담겨 있다.
비움 제공

박미향 음식 문화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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