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사는 유난히 압축적이었다. 한국전쟁의 상흔을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으며, 이제는 문화와 기술 분야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의 식문화 또한 역동적인 변화의 흐름 속에서 성장해 왔다. 특히 최근에는 소수 계층을 중심으로 향유되던 파인 다이닝이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며, 대중문화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안성재 셰프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경력을 시작해 현재 모수 서울과 모수 홍콩을 운영 중이다. 모수 서울은 2023년판 미슐랭 가이드 서울에서 별 3개를 획득했으며, 재료의 섬세한 뉘앙스를 감각적으로 표현해 낸다고 평가받는다. 사진은 한 입 거리 요리인 캐비아 쌀 타르트.
모수 제공
국내에서 파인 다이닝이 자리를 잡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업계 종사자를 제외하고는 용어 자체도 낯설었다.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서울에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 40곳이 넘고, 한국 셰프들은 글로벌 미식 무대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다.
국내 파인 다이닝 역사는 유럽이나 일본처럼 오랜 세월 다듬어진 미식 문화의 토대 위에 서있지는 않다. 하지만 응축된 서사를 써내려 가고 있는 셰프들의 노력과 시대의 흐름이 현재의 파인 다이닝 신을 재편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특급 호텔에서 태동한 미식 문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인테리어는 셰프가 추구하는 요리 철학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적 장치이자 미식 경험 설계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사진은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밍글스의 내부 모습이다.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강민구 셰프의 철학이 엿보이는 공간이다.
ⓒ 밍글스
우리나라 고급 미식의 역사는 특급 호텔에서 시작됐다. 한국 관광·호텔 산업의 본격적 태동기인 1970~80년대, 서울 호텔 신라와 조선호텔, 롯데호텔 등 이 시기의 특급 호텔 레스토랑은 프랑스 요리와 서양식 코스 다이닝을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각인시키며, 현대적 고급 외식 문화의 출발점이 됐다. 이곳들은 주로 비즈니스 접대나 외교 행사를 위한 공간이었고, 일반 대중은 좀처럼 가까이하기 어려운 세계였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경제 성장과 함께 해외 여행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미식 선진지의 고급 레스토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국내에서도 유사한 식사 문화를 찾기 시작했다. 또한 TV 매체와 잡지를 통해 서양 요리 문화와 유명 셰프의 이야기가 소개된 것도 이 무렵이다. 자연스레 고급 식사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고, 그 수요는 천천히, 꾸준히 쌓여 갔다.
유학파 셰프들의 등장
2000년대 초반, 결정적인 변화의 씨앗이 뿌려졌다. 미국 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 프랑스 르 꼬르동 블루, 일본 츠지조리사전문학교 등 세계 유명 요리학교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젊은 셰프들이 레스토랑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이 가져온 것은 요리 기술만이 아니었다. 제철 식재료를 선별하는 안목, 한 끼 식사를 하나의 서사로 설계하는 감각, 셰프가 예술가로 인정받는 문화까지 함께 들어왔다. 레스토랑의 입지도 달라졌다. 개인의 철학을 녹여내기 어려운 호텔을 벗어나 셰프의 이름을 내건 ‘오너 셰프’ 중심의 레스토랑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서울 청담동과 도산공원 일대는 국내 파인 다이닝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됐다.
유학파 셰프의 등장은 중요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고급 식사의 기준이 ‘어느 호텔에서 먹느냐’에서 ‘누구의 요리를 먹느냐’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셰프의 이름이 레스토랑의 브랜드가 되는 문화, 이른바 ‘셰프 중심 문화’가 이때 처음 싹텄다.
한편 미슐랭 가이드는 세계 공통의 기준으로 레스토랑을 평가하는 권위 있는 미식 평가서다. 2016년 11월, 세계적인 레스토랑 평가서 ‘미슐랭 가이드 서울 2017’이 처음 발간됐다. 이를 계기로 한국 파인 다이닝의 지형은 크게 달라졌다. 특히 셰프들에게는 요리의 완성도, 식재료 선별, 서비스 수준을 끌어올릴 구체적인 동기로 작용했다. 레스토랑에는 중요한 마케팅 수단이 되었으며,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믿고 가볼 수 있는 기준’이 주어졌다.
그렇게 미슐랭 가이드 도입 이후 국내의 파인 다이닝 생태계는 눈에 띄게 다양해졌다. 프렌치와 이탈리안, 일식 중심이던 미식 신에 모던 한식, 컨템퍼러리, 비건 파인 다이닝 등 다양한 장르가 뿌리를 내리며 질적 성장을 비롯해 양적 성장을 동반하게 됐다.
세계 무대에 선 셰프들
국내뿐 아니라 해외 무대에서도 한국인 셰프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 출발은 한국 파인 다이닝계의 걸출한 셰프 중 하나로 꼽히는 임정식 셰프이다. 그는 2009년 서울에 ‘정식당’을 열고 2011년 뉴욕으로 진출했다. 파인 다이닝은커녕 한식 자체가 세계 미식 지도 위에 제대로 올라 있지 않았던 때, 한국인 셰프가 뉴욕 파인 다이닝 현장에 정면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전례 없는 시도였다. ‘정식 뉴욕’은 2024년 미슐랭 3스타, 2025년 제임스 비어드 어워드 최우수 셰프상 부문까지 수상하며 한국 파인 다이닝의 세계적 가능성을 입증했다. 정식 뉴욕 출신인 박정현 셰프의 ‘아토믹스’ 또한 2018년 뉴욕 개업 후 미슐랭 2스타를 거쳐 2025년 ‘북미 베스트 레스토랑 50’ 1위를 차지했다.
한편 최근 K-팝과 K-드라마 등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로 확산되며, 한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자연스럽게 음식으로 이어졌다. 이 현상은 글로벌 미식 신에서 한식과 한국 셰프들의 입지를 넓히는 큰 동력이 됐다.
권숙수는 2016년 미슐랭 가이드 서울의 발간과 함께 별 두 개를 받았으며, 현재까지 매년 이 등급을 유지해 오고 있다. 미슐랭 가이드 서울은 한국 파인 다이닝의 수준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셰프와 레스토랑을 국제적인 미식 문화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촉매 역할을 했다.
권숙수 제공
대중문화의 영역이 된 파인 다이닝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주방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공간이 아니라, 셰프의 철학과 요리에 담긴 서사가 한 접시로 탄생하는 창작의 무대다. 이준 셰프가 이끄는 스와니예의 오픈 키친은 고객이 요리의 탄생 과정을 지켜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제철 식재료와 세련된 감성을 담은 코스 메뉴를 한 편의 이야기처럼 펼쳐내는 장소다.
ⓒ 홍기웅
2024년 OTT 플랫폼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된 요리 경연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은 국내 파인 다이닝의 대중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슐랭 스타 셰프와 무명 셰프가 함께 경쟁하는 이 프로그램은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간 일부 미식가들만 알던 셰프들의 이름과 서사가 대중에게 명확히 알려졌고, 출연 셰프들의 레스토랑은 단숨에 몇 달 치 예약이 꽉 찼다. 파인 다이닝 셰프들의 이름이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점은 매우 상징적인 변화였다.
현재 국내의 파인 다이닝은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인 축에 속한다. 프렌치, 이탈리안, 일식, 모던 아시안, 멕시칸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고급 요리 문화가 한 도시 안에서 공존하며 경쟁한다. 여기에 한국 고유의 식재료와 발효 문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한식 파인 다이닝이 더해지면서, 서울은 어디에도 없는 독자적인 미식 지형을 만들어가고 있다.
셰프들의 세대도 바뀌었다. 해외에서 배워온 것을 정교하게 재현하던 1세대를 지나, 지금의 젊은 셰프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이 땅의 이야기를 요리로 풀어낸다. 제철 식재료, 지역 생산자와의 직거래, 전통 조리법의 재해석이 하나의 흐름이 됐다. 이들이 만들어갈 국내 파인 다이닝의 다음 장이 기대되는 이유다.
서울 강남에 위치한 에빗은 호주 출신의 조셉 리저우드 셰프가 이끌고 있으며, 한국의 다양한 향토 음식과 식재료를 재해석한 코스 메뉴를 선보인다. 사진은 경상남도 함양의 전통주인 솔송주에 곁들인 방어 요리로, 숲의 향과 바다의 풍미가 어우러지는 조합이다.
에빗 제공
한국 파인 다이닝의 역사는 서울 중심부에 자리한 고급 호텔에서부터 시작됐다. 그중 호텔신라의 중식당 팔선은 1979년 호텔 개관과 함께 문을 연 국내 최고급 중식당 중 하나로, 한국 중식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미식 공간으로 명성이 높다. 사진은 팔선의 올해 여름 특선 메뉴이며, 정통 광둥식 요리를 현대적인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 호텔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