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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SPRING

한지의 조형적 실험과 가능성

한지는 현대 공예와 디자인 분야에서도 중요한 표현 매체로 활용된다. 형태를 구현하고 디테일을 표현하는 데 있어 한계가 없으며, 작가의 메시지를 유연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한지는 고유의 문화유산을 넘어, 동시대 작가들의 재해석을 통해 현대인의 일상생활 속에 아름답게 스며들고 있다.

전통문화 연구소 온지음과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fnt가 협업하여 제작한 한지 제품들. 한국 전통 직물 문양을 디지털 패턴으로 만든 후 이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한지에 인쇄했다.
온지음 제공, 사진 김잔듸

최근 한지를 사용하는 공예 작가들이 예전과 비교해 훌쩍 많아진 것을 느낄 수 있다. 가장 확실한 이유는 한지 자체가 최고의 매체이자 소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지가 제작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세상에 이렇게 귀하고 정성스러운 소재가 또 있을까 싶다. 닥나무를 심고, 수시로 순을 솎아내고, 잿물을 만들기 위한 농사를 따로 짓고, 겨울이 가까워지면 마침내 닥나무를 찌고 말리고 삶고 세척해 한 장의 종이로 만들어낸다.

공예 작가들이 사용하는 모든 재료는 표면에 그 ‘물성의 영혼’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한지도 그러하다. 손과 눈으로 그 정연한 기품을 느끼다 보면, 이 소재로 쓰임이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는다.

무한한 가능성

라이프 에티켓 브랜드 희녹이 2026년을 맞아 섬유예술가 고소미와 협업하여 출시한 '새해 에디션'. 여러 장의 한지를 겹쳐 만든 ‘한지 패브릭 바구니’는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질감을 느끼게 하고, 한지를 변형해 만든 ‘소원 돌’은 돌을 쌓으며 행복과 건강을 빌던 풍속에서 착안해 만든 오브제다.
희녹 제공

한지를 주요 소재로 작업하는 고소미는 지금 이 순간 한지의 매력과 가능성을 가장 넓게 보여주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한지 가리개부터 조명, 오브제와 직물 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업을 선보인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무기는 그녀가 직접 개발한 한지사, 즉 한지로 만든 실이다. 한지를 떠올리면 반듯하게 떠 낸 평면의 종이가 연상되는데, 그녀는 한지를 섬유질 방향대로 길게 자른 후 물레에 걸고 조심조심 돌려가며 실로 잣는다. 처음에는 얼마 못 가 끊어져 버리곤 했지만, 자연 풀을 먹여가며 천천히 돌리다 보니 점차 튼튼한 실이 되었다. 이렇게 만든 실을 본인의 이름을 따 ‘소미사’라고 부른다.

이 실로 만드는 작품은 다채롭다. 우선 조명이 있다. 철사를 구부리고 꼬아가며 동그란 구 형태로 만들고, 그 안을 한지사로 촘촘하게 연결한 후 닥섬유를 풀어 헤친 나무통에 담갔다 꺼내면 철사와 한지실 사이사이로 종이죽이 묻는다.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 동그란 몸체 위로 제법 두꺼운 ‘종이 피부’가 올라가고, 그 안으로 전구를 넣어 불을 밝히면 은은한 빛이 매력적인 조명이 된다.

코바늘뜨기로 일일이 짠 커튼도 만들 수 있다. 황톳길이나 흙 같은 따스한 질감을 좋아하는 건축가 조병수는 이 커튼의 열렬한 팬으로, 많은 건축 프로젝트에 이 작품을 사용한다. 리넨이나 실크와 비교하면 확실히 두텁고 정겨운 느낌이며, 까슬까슬한 촉감도 매력적이다. 섬유 회화도 그녀의 시그너처 라인이다. 나무판 위에 두꺼운 한지 여러 장을 차곡차곡 올려 캔버스로 만든 다음 코바늘뜨기로 짠 한지 스웨터를 합치는 방식이다. 동양화에 쓰는 파란색 안료나 먹물로 스웨터 부분만 채색한 작품은 온화한 빛깔의 한지와 어우러지며 색다른 매력을 만들어낸다.

최근 그녀는 한지로 설치 미술 작품까지 만들고 있다. 한복에 자수를 넣을 때 사용하는 은실과 한지사를 한꺼번에 잡고 꼬아가며 춤추는 형상의 ‘섬유 외투’를 만든 다음 널찍한 장판지에 올린 작품으로, 2025년 청주공예비엔날레에서도 큰 호응을 얻었다.

“한지로 만들 수 있는 작품에 한계는 없어요. 나무처럼 세우는 것도 가능하고, 회화처럼 벽에 거는 것도 가능합니다. 은실을 사용하면 반짝이게 하는 것까지도 가능하지요. 무궁무진한 매력과 가능성의 재료입니다.”

고소미 작가의 말이다.

평면에서 입체로

한글을 모티프로 한 유남권의 지태칠기 작품이다. 근대 출판물 속 한글 서체의 특색을 칠기에 담아냈다. 지태칠기는 한지에 옻칠을 해서 만든 전통 그릇을 말하는데, 가볍고 물에 강한 특성이 있다.
유남권 제공

이정인은 평면적 재료인 한지가 얼마든지 입체도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작인 <부드러운 풍경>은 소파다. 언뜻 보면 흰색 대리석을 깎아 만든 것처럼 단단하고 볼륨감 넘치는 모습이다. 반듯한 한지를 작게 찢어 300여 개의 조각으로 만든 후 이를 다시 밀가루 풀로 겹쳐 붙이는 것이 1차 공정이다. 이렇게 완성한 큼직한 면의 종이를 100여 장 넘게 만들어 이를 다시 소파 형태로 쌓아 올리면, 거구의 운동선수가 앉아도 거뜬할 만큼 단단한 소파가 완성된다.

사극을 보면, 방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창호지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그래서 한지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명백한 오해다. 한지를 두세 장만 겹쳐도 강도가 세져 쉽게 찢어지지도, 흐느적거리지도 않는다. 한지의 강도가 우수한 것은 제작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일본 화지는 한 번에 2장을 뜰 수 있는 ‘쌍발뜨기’ 방식을 택하지만, 한지는 한 번에 한 장만 만들 수 있는 ‘외발뜨기’를 사용한다. 앞뒤 좌우를 모두 흔들며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섬유를 얹는 덕분에 어지간해서는 사용 시 손상되지 않는다.

홍익대학교에서 목조형가구학을 전공한 이정인은 이 작품으로 2025년 로에베 재단에서 시상하는 공예상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옻칠로 확장하는 미감

재단법인 예올이 주최하고 샤넬이 후원한 전시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함>의 전시작 중 하나인 박갑순 장인의 <호랑이 까치 향로>. 민화 속 까치와 호랑이에서 착안했으며, 호랑이 입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익살스러운 작품이다.
예올 제공

박갑순의 작품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 같은 영화에 소품으로 등장해도 될 만큼 사랑스럽다. 풀과 벌레를 주인공으로 그린 그림 ‘초충도’나 민화에서 봤음 직한 개구리와 호박, 풀벌레와 호랑이가 작은 캐릭터 인형으로 되살아난 느낌이다. 1999년 전통 한지 공예를 접한 그녀는 종이죽으로 다채로운 오브제를 만든 후 생생한 컬러로 마감한 작품을 통해 그녀만의 사랑스러운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중이다.

제작 방법은 우선 낡은 고서나 자투리 한지를 그러모아 밑재료로 준비한다. 이후 수집한 종이를 잿물에 삶고 깨끗이 씻어낸 후 삶은 종이를 잘게 찢거나 절구에 찧어 통밀 풀과 결합해 찰기가 있는 종이죽으로 만든다. 다음은 형태 잡기. 원하는 모양의 골격이나 틀 위에 종이죽을 겹겹이 바르며 두께와 모양을 잡아간다. 색을 내는 재료는 감물이나 우뭇가사리 같은 자연 소재들이다. 옻칠을 가미하는 때도 많다. 이런 작품들로, 그녀는 2025년 재단법인 예올과 패션 브랜드 샤넬이 함께하는 ‘올해의 장인, 올해의 젊은 공예인’ 시상에서 올해의 장인으로 선정됐다.

한지에 옻칠을 더하면 또 다른 미감과 기능이 만들어진다. 대표적인 이가 조명 디자이너 권중모다. 일정한 폭과 흐름으로 한지를 섬세하게 접거나 검은색으로 옻칠해 만든 작품들은 다양한 형태의 금속 지지대와 결합하며 저마다 빛의 투과율이 다른 조명 기구로 변신한다. 유남권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한지로 기물을 만든 뒤 옻칠로 마감하는 ‘지태칠기’ 작품을 만든다. 기물에 옻을 바르고 건조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기는 텍스처와 색감이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저마다 농담이 다른 그의 작품들은 현대 공예 컬렉터들에게 인기가 높다.

한옥 창호에서 영감을 얻은 권중모는 빛의 음영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소재인 한지로 조명 작품을 제작한다. 한지를 접어 주름 패턴을 만들거나 또는 한지를 겹쳐 붙임으로써 빛의 투과성에 변화를 주고 있다. 사진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 LF03_em (Layers Floor lamp03_Embroidered )>.
권중모 제공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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