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파주는 토양이 비옥하고, 일교차가 크며, 물이 맑아 작물의 생육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 연유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조선 시대 왕실에 진상될 정도로 품질이 뛰어났다. 쌀과 함께 인삼과 장단콩도 파주의 청정 자연이 선사하는 건강한 먹거리다.
메주는 간장, 된장, 고추장을 담글 때 사용하는 재료다. 전통적인 메주 제조는 콩을 삶은 후 뭉쳐서 네모난 덩어리를 만들고, 이를 볏짚으로 묶어 선반에 매달아 자연 발효되는 시간을 장기간 거친다. 1960년대 이후 메주를 좀 더 간편하게 만들기 위해 배양 균주를 인위적으로 첨가해 발효시키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파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메주는 재래 방식으로 만들어져 풍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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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 K-팝 스타 BTS와 블랙핑크 등으로 대변되는 K-콘텐츠의 열풍이 한식으로 확산된 지 오래다. 불고기, 비빔밥, 치킨 등 외국에 익히 알려진 한식 말고도 지방 향토 음식 여행에 나선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둘이 아니다. 2023년엔 돼지곰탕 전문점 ‘옥동식’ 뉴욕점이 그해 뉴욕 타임스 선정 ‘뉴욕시 최고 요리 8선’에 올랐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글로벌 인기로, 한식의 한 갈래인 분식마저 주목받고 있다. 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김밥, 라면, 떡볶이 등을 다룬 ‘먹방’이 전 세계 SNS에 차고 넘친다. 그야말로 한식이 대세인 것처럼 보인다.
한식의 근간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지만, 그중에서 밥이 으뜸이다. 한국에 유독 밥과 관련된 인사말이 많은 이유다. “밥은 잘 먹고 다니니?”는 안부를 묻는 말이고, “언제 밥이나 먹자”는 다음에 또 만나자는 약속이며, “나중에 밥 한번 살게”는 고마움의 표현이다. 밥은 벼의 낟알에서 껍질을 벗겨 낸 알곡인 쌀로 짓는다. 조리법도 중요하지만, 쌀의 품질이 밥맛의 8할을 결정한다.
품종 교배로 만들어진 고급 토종 벼
파주는 쌀농사 짓기에 더없이 비옥한 땅과 깨끗한 물, 맑은 공기가 어우러진 지역이다. 공주의 고맛나루쌀, 예천의 미소진미, 철원의 오대쌀, 횡성의 어사진미 등 지역마다 셀 수 없이 많은 쌀 브랜드가 전국에 있지만, 파주 지역을 대표하는 쌀 브랜드 한수위는 특별하다. 한수위 쌀의 품종인 ‘참드림’ 때문이다.
파주 북서쪽을 관통해 한강으로 유입되는 임진강은 이 지역이 농업 중심지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임진강의 범람과 퇴적 작용은 농경에 필수적인 비옥한 토양을 제공해 왔으며, 농업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해 대규모 벼농사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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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드림은 경기도농업기술원이 자체 개발한 고급 토종 품종이다. 토종 벼 중 하나인 조정도와 다른 품종을 교배해 긴 시간 공들여 개발했다. 2014년 참드림 종자 육성 개발을 완료하고, 2016년 국립종자원에 신품종 등록을 마쳤다. 참드림 개발엔 주역이 있다. 경기도농업기술원 작물연구과 작물육종팀장이자 밥소믈리에인 장정희 씨다. 그는 20년 남짓 벼 육종 연구에 매달려 왔다. 그는 “한 품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대략 10~12년 걸리는데, 여기에 3~4년 걸리는 농가 보급 기간까지 합치면 신품종 탄생 과정은 그야말로 인내와 땀이 촘촘히 박힌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파주가 속해 있는 경기도 일대는 과거에 쌀 농가의 80%가 외래종을 쓰고 있었기에 우리 종자를 개발하고 육성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고로 ‘신토불이’라고 했다. 자신이 사는 땅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체질에 맞는다는 뜻이다. 비단 한국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미식이 발달한 국가일수록 자국 생산물의 자체 소비가 웰빙에 중요하다.
참드림은 찰지고 식감이 부드럽다. 단백질과 아밀로스(다당류) 함량이 다른 쌀 품종에 견줘 비교적 낮은 편이다. 밥맛이 좋은 이유다. 쌀은 단백질 함량이 낮을수록 찰지고 은은한 단맛을 낸다. 참드림 품종으로 지은 밥은 밥맛도 오래 유지된다. 장 팀장은 파주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일대 생태 환경이 참드림 탄생에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위도가 높은 이 지역의 가을 기상을 보면 밤과 낮의 일교차가 큽니다. 수확기인 가을에 쌀의 질과 당도가 올라가지요.”
올해 8월엔 파주를 대표하는 쌀 브랜드가 하나 더 세상에 나왔다. 농촌진흥청이 남한 벼 종자 ‘진부 19호’와 북한 벼 종자 ‘삼지연 4호’를 교배해 육성한 품종 ‘평원 벼’가 그것이다. 국내 최초 남북 교배종이다. 그래서 이 벼의 이름에는 ‘평화를 원하는 벼’란 뜻이 담겼다. 평원 벼는 찰기가 좋고 고소한 맛이 느껴지는 고품질 품종이다. 본래 강원도 철원에서 개발되었는데, 여러 차례 시험 재배 결과 철원 땅과는 맞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에 파주 땅에선 마치 제짝을 만난 듯 잘 잘랐다. 평원 벼는 DMZ 내 유일한 민간인 거주 지역인 대성동 마을 일대에서 재배된다. 이 벼를 탈곡해 만든 쌀 브랜드는 ‘평화미소’라는 이름이 붙었다.
개성 인삼의 맥
쌀이 재료가 되는 술이 있다. 막걸리다. 파주 지역에는 유명한 막걸리 양조장이 몇 군데 있다. 우선 8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막걸리 제조 업체 파주탁주는 몇 년 전부터 한수위 쌀을 주원료로 하는 막걸리를 생산하고 있다. 양조장 도반주조가 생산하는 ‘더 파주막걸리’도 한수위 쌀로 빚어낸다. 이 막걸리의 알코올 도수는 9도로, 옅은 탄산과 산미가 어우러져 맛이 고급스럽다. 운정양조장도 파주 쌀로 막걸리를 만든다. 과거 집집마다 술을 빚었던 우리네 가양주 문화를 제대로 잇겠다는 포부로 설립된 양조장이다. 이곳에서는 일반 막걸리보다 쌀 함량을 높여 단맛을 끌어올린다. 대표 제품으로는 ‘운정막걸리’와 ‘파주개성인삼막걸리’가 있다. 양조장 역사는 약 8년 정도로 길지 않지만, 국내 주류 평가 대회에서 주요 상을 휩쓸었을 정도로 질이 좋은 술이다.
운정양조장의 ‘파주개성인삼막걸리’란 제품에서 ‘개성 인삼’이란 글자가 눈에 띈다. 인삼은 약용 작물이다. 고려 시대 때 우리 인삼의 우수성이 주변 국가에 널리 알려지면서 이후부터 한반도에서 재배되는 인삼을 통틀어 ‘고려 인삼’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 시대엔 중국과 일본 등에 수출할 정도로 국제적 인정을 받았다. 고려 인삼의 주 재배지가 지금은 북한 땅인 개성이었다. 다른 지역의 인삼보다 효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개성 인삼의 명맥을 잇는 곳이 바로 파주다. 개성과 바로 이웃해 있는 파주는 예로부터 개성과 함께 고려 인삼의 주요 생산지로 통했다. 그래서 지금도 파주의 인삼을 ‘파주 개성 인삼’이라 부른다. 운정양조장이 인삼을 막걸리 재료로 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파주에선 매년 10월 파주개성인삼축제가 열리는데, 올해 20회를 맞았을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 다른 특산품, 장단콩
파주를 대표하는 또 다른 먹거리 축제로 매년 11월 열리는 ‘파주장단콩축제’가 있다. 콩은 채식주의자들이 열광하는 먹거리다. 육식을 하지 않고도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는 식품이다. 파주는 장단콩 생산지인데, 장단콩은 콩 품종이 아니라 파주 장단 지역에서 재배되는 토종 재래종 콩의 명칭이다. 장단 지역은 배수가 잘되는 마사토에 일교차마저 커 농산물이 잘 자라는 최적의 환경을 갖췄다. 장단콩 재배는 한국전쟁 당시 사라졌다가 1970년대 부활했다. 지금은 장단 지역을 비롯해 파주에서 생산되는 콩 대부분을 장단콩이라 부른다.
예부터 장단콩은 파주 임진강 쌀, 개성 인삼과 함께 왕의 수라상에 올랐다. 이런 이유로 이들 세 가지 식품은 ‘장단삼백’이라 불렸다. 장단 지역의 세 가지 희고 깨끗한 농산물이란 뜻이다. 장단콩은 콩알이 굵다. 단백질뿐만 아니라 식물성 지방, 칼슘, 철분 등도 풍부한 작물이다. 한국식품연구원 자료를 보면 노화 방지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안토시아닌 함량도 높다.
파주 일대엔 장단콩으로 맛을 내는 식당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 2001년 문을 연 ‘통일동산두부마을’이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콩비지 찌개, 청국장, 두부전골 등 메뉴 모두가 장단콩으로 만들어졌다. 주인 차국제 씨는 “장단콩은 우리 콩의 효시”라며 파주가 최적의 기후 조건을 갖췄다고 말한다. 차 씨가 가게를 열 때만 해도 파주에는 장단콩 전문 식당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손님들이 우리 가게에 와서 먹어보니 맛이 좋고, 맛이 좋으니 찾는 이가 많아져 주변에 장단콩 전문 식당들이 하나둘 생겨났다”고 말한다. 손바닥만 한 이 집의 찐 두부는 씹을수록 고소하고 담백하다. ‘담박하다’는 형용사가 저절로 떠오르는 풍미다. ‘담박하다’는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다’란 뜻이다.
파주 장단 지역은 배수가 잘되는 토양에 물이 맑고 늦서리 피해가 없어 콩 농사에 최적화된 환경을 갖추고 있다. 파주 특산품인 장단콩은 다른 콩보다 이소플라본 함량이 높으며, 고소하면서 진한 맛이 난다. 알이 굵고 선명한 것도 장단콩의 특징이다. 현재 1,100㏊에서 700여 농가가 장단콩 농사를 짓고 있다.
파주시 제공, 사진 김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