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는 유구한 내력을 지닌 역사의 도시이다. 대형 석기 같은 구석기 시대 유물을 비롯해 고인돌 유적지와 청동기 시대 주거지는 오래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말해준다. 또한 고대부터 한반도의 남북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흔적이 짙게 남아 지나간 이야기를 들려준다.
<임진서문>은 조선 후기 최고의 화가였던 김홍도의 아들 김양기가 그린 그림이다. 화폭 왼쪽 아래에 과거 교통의 요지였던 임진나루가 잘 묘사돼 있으며, 또한 한국전쟁 때 소실된 성문 ‘진서문’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파주’라는 지명이 역사서에 처음 등장한 건 『세조실록』에서다. 조선 제7대 임금이었던 세조(재위 1455~1468)가 1459년 왕비 정희왕후의 고향 ‘원평’을 파주로 이름을 바꾸고, 행정 구역 단위를 한 단계 격상시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광해군(재위 1608~1623) 때에는 풍수지리설(지형이나 방위를 길흉화복과 연결해 적합한 장소를 구하는 이론)에 입각해 수도를 파주로 옮기자는 논의도 있었다.
조선 시대에 의주대로는 한양(현재의 서울)에서 출발해 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향하는 중요한 도로였다. 의주대로의 주요 관문 중 하나였던 파주는 역사가 오래된 도시인 만큼 수많은 문화유적이 곳곳에 숨어 있다. 또한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을 기억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들도 다수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파주는 경기도 구리시, 고양시, 남양주시와 함께 조선 시대 왕릉이 다수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 같은 영화나 드라마에 곧잘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인 인조(재위 1623~1649)의 무덤 장릉을 비롯해 ‘파주 삼릉’으로 지칭되는 공릉, 순릉, 영릉, 그리고 소령원이나 수길원처럼 왕위를 계승할 왕자를 낳은 후궁들의 묘소도 조성되어 있다.
대학자의 고향
이이(1536~1584)는 이황(1501~1570)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외가인 강릉의 오죽헌에서 태어났지만, 본가가 있던 곳은 파주였다. 여섯 살 때 파주 율곡리 본집에 돌아와 생활했는데, 그의 호 ‘율곡’도 이 마을 이름에서 따왔다. 율곡은 ‘밤나무골’이란 뜻으로, 자신이 파주 밤나무골 출신임을 호에 드러내고 있다.
용암사 경내에 있는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거대한 천연 암벽에 새겨진 고려(918~1392) 시대의 불상이다. 왼쪽은 둥근 갓을, 오른쪽은 네모난 갓을 쓰고 있으며 토속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쌍미륵 석불 입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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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나루 바로 위쪽에 자리한 정자 화석정 안에는 이이가 여덟 살 때 지은 것으로 알려진 한시 「팔세부시」가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저녁 정자에서 바라본 임진강 풍경을 읊은 시로, 그의 천재성을 언급할 때 자주 인용되는 시다.
이이는 1584년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 파주의 선영이 있는 곳에 묻혔다. 1615년 파주 유림들의 공의로,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서원이 건립됐고, 이곳에 그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했다. 서원은 오늘날로 치면 지방에 위치한 사립 교육 기관이다. 1650년 이 서원은 ‘자운’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후대 학자들을 추가로 배향했다.
자운서원 좌측 능선에는 이이의 부모와 이이 부부를 비롯해 이 집안의 묘소 13기가 집결해 있다. 이이와 그의 아내 무덤은 묘역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다. 한 가문의 묘가 같은 지역에서 족분을 이루는 것은 관혼상제에 대한 내용을 담은 책 『주자가례』의 영향 때문이다. 당시 친족 공동묘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이는 조선 성리학의 큰 줄기를 형성한 대학자로, 성리학의 핵심을 간추린 『성학집요』, 아동 교육서인 『격몽요결』 등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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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와 반구정
파주는 조선 왕조를 통틀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황희(1363~1452)와도 큰 연고가 있다. 그는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했다고 한다. 또한 학식도 깊어 그가 모셨던 왕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재위 1418~1450) 대에는 최고 관직에 올라 임금을 보필했고, 세종이 성세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반구정은 ‘갈매기를 벗 삼는 정자’라는 뜻으로,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 곳이다. 이곳 역시 임진강이 보이는 기암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반구정은 황희 사후 폐허가 되었다가 17세기에 후손들에 의해 중수되었는데, 이때 조선 후기의 문신 허목(1595~1682)이 기문을 작성했다. 허목은 “반구정은 먼 옛날 태평 재상 황희의 정자이다”라고 운을 떼면서 “물러나 강호에서 여생을 보낼 적에는 자연스럽게 갈매기와 백로와 같이 세상을 잊고, 높은 벼슬을 뜬구름처럼 여겼으니, 대장부의 일로 그 탁월함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겠다. 정자는 파주에서 서쪽으로 15리 되는 임진강 가에 있는데, 썰물이 물러가고 갯벌이 드러날 때마다 갈매기들이 모여든다.”라고 해 이곳이 바다와 매우 가까운 곳임을 언급했다.
반구정에서는 맑은 날 파주 북쪽 개성의 송악산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개성이 고향이었지만, 일생 대부분을 한양에 머물며 관직 생활을 한 황희의 마음을 늘 어루만져 주는 장소였을 것이다.
반구정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명재상이었던 황희가 노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후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반구정 아래에는 황희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영당 건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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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장릉과 파주 삼릉
2009년 조선 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중 파주에는 4기의 왕릉이 있다. 우선 장릉은 인조의 무덤이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다음 왕위를 계승한 인조의 둘째 아들 효종(재위 1649~1659)은 아버지의 무덤인 장릉을 현재의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 대덕골에 조성했다. 인조보다 먼저 세상을 뜬 어머니 인열왕후의 무덤이 이미 파주에 있었고, ‘장릉’이라는 능호도 있었기에 효종은 어머니의 무덤 옆자리에 아버지의 무덤을 함께 만들었다. 사실 이곳은 인조가 살아생전 미리 봐둔 자신의 묏자리였다. 그래서 효종은 선왕이 정한 곳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왕릉 조성을 주관했다. 그러나 화재가 자주 일어나고, 뱀과 전갈의 무리가 석물 틈에 서식하니 좋지 않다고 여겨, 훗날 현재의 자리인 파주시 탄현면으로 장릉을 이전하게 됐다.
장릉은 봉분 하단에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 주변에 돌로 난간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 상석 2좌를 배치하여 무덤이 2위임을 나타냈다. 상석 중앙 정면에 장명등과 양쪽에 망주석 2기를 세웠고, 그 아래로 문인석과 무인석을 각각 1쌍씩 세웠다. 병풍석과 장명등에는 모란과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는 17세기 석물 문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파주의 대표적 관광지인 마장호수는 2001년 농업용 저수지로 조성되었다가 2018년 파주시가 도심형 테마파크로 개장했다. 길이 220m, 폭 1.5m의 출렁다리가 유명하다. 마장호수 주변은 과거 조선 시대에 군마 훈련장[馬場]이 있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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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파주 삼릉’은 공릉, 순릉, 영릉 3기의 능을 지칭하며, ‘공순영릉’이라고도 부른다. 먼저 공릉의 주인공은 장순왕후이다. 조선 제8대 왕인 예종(재위 1468~1469)의 첫 번째 왕비로, 예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산후병 때문에 세자빈의 신분으로 17세에 사망했다. 후에 예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로 추존되었다. 공릉은 장순왕후가 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일반적인 왕릉에 비하면 규모가 작고, 석물 장식도 생략됐다.
순릉은 예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성종(재위 1469~1494)의 정비 공혜왕후의 능이다. 성종이 왕이 된 후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불과 몇 년 후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순왕후의 공릉과 달리 이곳은 왕릉의 형식을 따라 만들어졌다. 그런데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는 둘 다 한명회(1415~1487)의 딸이다. 한명회는 조선 전기 고위직을 두루 역임한 문신으로, 두 명의 딸을 왕비로 만들어 권세와 부를 누렸던 인물이다. 자매가 나란히 왕비가 된 데에서 그의 권력이 당시 얼마나 막강했는지 알 수 있다. 두 딸의 능이 파주에 조성되면서 그도 파주와 인연을 맺게 됐다.
영릉은 조선 역대 임금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영조(재위 1724~1776)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무덤이다. 열 살 어린 나이에 세자의 신분으로 사망했지만, 훗날 진종으로 추존되면서 그의 무덤도 왕릉으로 승격했다. 37세의 나이로 승하한 부인 효순왕후가 그의 곁에 묻혀 있다. 영릉은 쌍릉 형식인데, 처음에는 세자 무덤의 예를 따라 만들어졌다가 훗날 왕릉 형식을 갖추게 됐다. 이 외에도 파주에는 왕을 낳은 후궁들의 무덤이 있다. 파주가 조선 왕실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장릉은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와 인열왕후의 무덤이다. 1635년 인열왕후의 무덤이 먼저 조성되었고, 인조 사후 쌍릉 형태로 만들어졌다가 이후 1731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되면서 합장릉이 되었다. 이에 따라 17세기와 18세기의 왕릉 석물 형태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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