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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WINTER

헤이리, 자연 위에 그린 예술의 지도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한 시간 남짓 자유로를 따라 달리면 도심의 풍경이 어느새 사라지고, 드넓은 한강 하구와 들판이 나타난다. 그 끝자락에 자리한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일대에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마을, 헤이리예술마을이 있다.

콩치노 콩크리트는 압도적 규모를 자랑하는 음악 감상실이다. 각 층 공간은 음악 감상에 최적화된 비례로 조성되었다. 창문을 통해 임진강 주변의 멋진 풍경도 감상할 수 있어, 젊은 세대들에게 한 번쯤은 꼭 방문해야 할 핫플레이스로 통한다.
© 김종오

헤이리예술마을이 자리한 곳은 원래 벼와 채소를 재배하던 농경지였다. 이곳의 변화는 199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작가와 건축가, 영화인, 음악인 등 여러 장르의 예술인들 300여 명이 뜻을 모았다. 이들은 자연 친화적 공간에서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고 창작에 전념하는 한편 서로 소통하는 예술인 공동체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1997년, 예술가들의 자발적 의지로부터 출발한 ‘헤이리 프로젝트’는 이듬해 창립총회가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헤이리’라는 이름은 파주 지역에 전해 내려오던 농요 ‘헤이리 소리’에서 비롯되었다. 농부들이 모를 심을 때 힘을 맞추기 위해 부르던 노래로, 리듬이 단순하면서도 강렬하다. 농요에서 마을 이름을 따온 데서 알 수 있듯 헤이리예술마을은 공동체의 협력과 조화를 중시한다. 예술가들은 이 이름을 빌려, 자신들의 새로운 마을을 상징하는 단어로 삼았다. ‘농경의 땅 위에 예술을 심는다’는 의지가 투영된 작명이었다.

한국전쟁 뒤 빠르게 산업화한 한국에서 ‘예술가 마을’이라는 발상은 무척 이례적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모인 예술가들은 경제 발전과 도시 개발이라는 당시의 시대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술가다운 삶의 구조’를 실험하고자 했다. 헤이리는 도시 계획이 아닌, 예술 기획으로 시작된 마을이었다.

요나루키는 명상과 스파를 위한 공간, 갤러리, 바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헤이리예술마을을 찾는 방문객들이 많아지면서 이들을 위한 편의시설로 마련되었으며, 건축가 조병수가 설계를 맡아 2011년 완성되었다.
© 황우섭

예술 마을의 탄생

헤이리를 처음 찾은 방문객들은 ‘무질서 속의 질서’에 놀라게 된다. 도로가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하고, 건물의 색과 재질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의 큰 원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가능한 한 본래의 자연과 지형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주거와 작업, 전시, 휴식이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있도록 ‘도시의 단위’를 버리고 ‘삶의 단위’를 기준으로 설계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을 전체 면적 약 15만 평 중 상당 부분을 녹지로 남겨 두었으며, 주변 산들의 흐름을 차단하지 않는 랜드 스케이프를 완성하고자 모든 건축물의 높이를 12m로 제한했다. 여느 도시처럼 하늘이 고층 건물로 막혀 있지 않다 보니, 고개만 들면 하늘을 볼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울타리 설치도 금지되었기에 대신 나무 등을 심어 경계를 대신한다. 한마디로 사람과 사람, 공간과 공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조다.

한편 이곳의 모든 건물은 면적의 60% 이상이 문화 시설로 설계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헤이리에 전시 공간과 창작 공간, 아트숍 등이 즐비한 이유다. 그래서 헤이리를 걷다 보면 마치 ‘야외 미술관’을 산책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헤이리에 자리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화예술 공간에서는 공연, 전시, 교육 프로그램, 강좌 등이 연중 끊이지 않는다. 그중 몇 곳은 최근 젊은 세대에게 입소문이 나면서 핫플레이스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2004년 개관한 테마파크 ‘딸기가 좋아’는 독특한 건축 디자인과 재미있는 전시 콘텐츠로 헤이리예술마을을 일반에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제9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 건축전 주제관 초청작이었던 이 건물은 아쉽게도 2024년 철거됐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헤이리 하면 가장 먼저 이곳을 떠올린다.
© 경기관광공사

우선 김정기뮤지엄은 드로잉 아티스트 김정기(1975~2022)의 작업 세계를 기리는 미술관이다. 그는 ‘기억 드로잉’으로 불리는 독창적 스타일로 유명했다. 실재하는 모델 없이 기억 속 이미지를 즉흥적으로 그려내며, 수십 미터의 캔버스를 한 호흡으로 완성하곤 했다. 미술관 내부에는 그의 생전 작업 도구, 벽면 가득한 대형 스케치, 인터뷰 영상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은 손이 아니라 머리로 그린다”는 그의 철학은 헤이리의 예술가들에게, 그리고 이곳을 찾는 방문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도예가 한향림이 세운 한향림도자미술관에서는 국내외 현대 도예 작품들의 다채로운 면모를 볼 수 있다. 그녀는 도자기를 “흙이 사람과 다시 만나는 형식”이라 표현한다. 이곳의 전시품들은 찻잔, 접시, 병 등 실생활용 기물들 속에도 예술적 감각이 깃들어 있다. 불에 구워진 도자기 표면의 미세한 갈라짐, 즉 유약의 ‘빙렬’은 인생사의 불완전함을 닮았다. 그 불완전함 속에서 오히려 따뜻함이 피어난다. 특히 언덕에 파묻힌 듯 자리한 이 건물은 2020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받았다. 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기도 한데, 헤이리에는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건물들이 꽤 많다.

음악 감상실이자 카페인 카메라타는 헤이리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오랜 세월 TV와 라디오를 넘나들며 많은 이들의 가슴에 따뜻함을 불어넣어 준 방송인 황인용 씨가 만든 공간이다. 그는 “음악을 늘 듣는다는 것은 기댈 데가 있고, 외로울 때 투정 부릴 데가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은 빈티지 아날로그 오디오와 LP, 클래식 음반이 빼곡히 꽂힌 벽면을 배경으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진공관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나아가 빛 대신 소리가 공간을 채우는 경험은 감각의 확장을 일으킨다. 예술이 눈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헤이리시네마는 한국의 독립·예술 영화를 상영하는 소극장이다. 작은 상영관 한쪽 벽에는 감독과 관객이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종종 상영이 끝난 뒤 토론이 이어지고, 때로는 즉석에서 새로운 프로젝트가 탄생하기도 한다. ‘관객이 곧 공동 창작자’라는 개념은 헤이리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예술이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상호작용과 교감의 결과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마을 밖으로 이어지는 실험

헤이리는 하루의 빛과 계절의 변화에 따라 표정이 바뀐다. 봄에는 철쭉과 벚꽃이, 여름에는 초록 덩굴과 수초가, 가을에는 은행나무와 억새가, 요즘 같은 겨울에는 소복이 쌓인 하얀 눈이 건물 윤곽을 부드럽게 감싼다. 이 마을에는 ‘조경’이라는 단어 대신 ‘식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조경은 인위적인 꾸밈이지만, 식생은 자연의 생태를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건물 지붕 위에는 풀과 나무가 자라고, 빗물은 인공 배수로가 아니라 땅으로 스며든다. 자연이 배경이 아니라, 건축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밤이 되면 가로등 대신 건물 내부의 조명이 골목을 밝힌다. 그 불빛들은 유리 벽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오며, 마을 전체를 은은하게 물들인다. 이곳에서 밤은 어둠이 아니라, 또 하나의 예술적 연출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마을의 풍경은 외부로 확장된다. 헤이리에서 차로 10분 거리, 파주출판도시 끝자락에 자리한 미메시스 아트뮤지엄은 ‘헤이리 정신의 확장판’으로 불린다.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이 미술관은 흰 콘크리트 곡면으로 이루어진 유려한 구조를 지녔다. 외벽에는 단 한 줄의 장식도 없지만,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이 건물의 표정을 바꾼다. 건물 내부는 사선의 빛이 천장에서 흘러내리며 관람객의 시선을 유도한다. 마치 자연광이 하나의 조명 장치처럼 작동한다. 전시는 회화, 조각, 건축, 사진, 디자인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 미메시스는 그리스어로 예술 창작의 기본 원리인 ‘모방’이나 ‘재현’을 뜻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모방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와 리듬을 배우는 과정이다.

방송인 황인용이 운영하는 카메라타는 콩치노 콩크리트와 함께 파주를 대표하는 음악 감상 공간이다. 실내는 공연장처럼 꾸며졌으며, 전면에 있는 그랜드피아노 뒤에 빈티지 스피커가 놓여 있다.
ⓒ 이민희

헤이리예술마을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위치한 콩치노 콩크리트는 최근 떠오르고 있는 클래식 음악 감상실이자 복합문화공간이다. 뻥 뚫린 높은 층고와 어우러진 육중한 콘크리트 공간이 감탄을 자아낸다. 특히 거대한 스피커 다섯 개가 들려주는 단단하고 장엄한 소리가 압도적이다. 그 사운드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1920~30년대로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공동체와 지속가능성

헤이리예술마을이 추구하는 진정한 가치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예술가들은 이곳에서 단지 창작만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함께 식사하고, 서로의 전시를 돕고, 함께 아이들을 돌본다. 공동체는 느슨하지만 따뜻하다. 이곳의 카페 주인은 전직 조각가이고, 서점 주인은 소설가이며, 도예가는 인근 농장에서 흙을 직접 구해온다. 모두가 예술가이자 주민인 것이다.

또 다른 중심에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있다. 모든 건물이 에너지 절약형으로 설계되었고, 빗물 재활용 시스템과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 건물이 많다. 최근에는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돼 아이들이 흙과 식물, 곤충과 물의 순환을 배우고 있다. 예술이 생태와 결합하며, 마을은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헤이리를 떠나는 길목에서 많은 방문객은 자문한다. “이곳은 미술관인가, 마을인가?” 아마 정답은 둘 모두일 것이다. 예술가들이 만든 헤이리는 도시 계획의 대안이며, 현대인의 삶의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이곳에서 예술은 소유나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 방식이다. 자연과 사람, 예술과 생활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며 공존하는 곳, 그것이 헤이리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낮에는 쇠기러기와 재두루미, 개리 등 다양한 겨울 철새들이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하늘을 날고, 저녁이면 붉은 석양을 배경으로 농경지로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 그 평화로운 순간, 예술과 자연, 인간과 시간의 경계가 사라진다. 헤이리는 그렇게, 여전히 자라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파주는 경기도 북부 지역에 개관한 첫 국립박물관이다. 유물과 아카이브 자료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동시에 전시 기법을 접목한 개방형 수장고가 운영된다. 총 15개 수장고에는 약 100만 점 이상의 소장품과 자료가 보관되고 있다.
ⓒ 파주시

권기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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