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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WINTER

책의 도시에서 문화예술의 도시로

파주출판도시는 1980년대 후반 한국 출판 산업의 발전과 혁신을 꿈꾸던 출판인들에 의해 기획됐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 이곳은 내로라하는 출판사와 인쇄소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며, 국내 최대의 출판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있다. 나아가 책과 출판을 넘어 건축과 생태, 축제가 결합한 문화예술의 집합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1층에 자리한 ‘지혜의숲’은 누구나 자유롭게 방문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개방된 공간이다. 출판도시문화재단이 2014년부터 운영하고 있으며 학술 기관, 연구소, 출판사, 미술관 등에서 기증받은 다양한 분야의 도서들이 소장되어 있다.
ⓒ 이민희

자유로를 달려 임진각을 향하다 보면 파주 초입에 이르러 만날 수 있는 곳, 바로 파주출판도시다. 정식 명칭은 ‘파주출판문화정보국가산업단지’이지만, 이곳에 터 잡은 사람들은 간단히 ‘파주출판도시’라 부른다.

파주출판도시가 자리한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은 2011년 행정 구역이 개편되기 전까지 ‘문발리’였다. ‘글이 퍼지는 동네’라는 뜻이다. 이 명칭의 연원은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전기의 이름난 문신 황희(1363~1452)가 세상을 떠나자, 당시 임금이었던 문종(재위 1450∼1452)은 파주까지 행차해 그의 장례를 지켜봤다. 환궁 길에 “황희의 높은 학덕과 지혜를 널리 알리라”는 의미로 이 동네에 ‘문발리’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곳이 출판도시가 될 운명은 어쩌면 조선 시대에 이미 정해진 게 아니었을까?

열화당이 2012년 사옥 내 개관한 열화당책박물관은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고서들을 비롯해 동시대 출간된 전 세계의 특색 있는 책들 4만여 권이 갖춰져 있다. 열화당은 1971년 설립 이래 미술 및 전통문화와 관련된 전문 서적을 발행하며, 50년 넘게 한국 출판계에서 독보적 영역을 구축해 온 유서 깊은 출판사다.
ⓒ 이민희

민간 주도의 출판 클러스터

파주출판도시는 국가 산업 단지다. 그러나 그 시작은 ‘책을 위한 도시’, ‘좋은 책을 만드는 도시’를 조성하겠다는 출판인들의 자발적 발상과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이른바 ‘북한산 결의’라고 불리는 일이 그 출발점이었다. 1988년 어느 날, 고 박맹호(1933~2017, 민음사), 고 윤형두(1935~2023, 범우사), 고 전병석(1937~2018, 문예출판사), 김경희(지식산업사), 김언호(한길사), 이기웅(열화당), 허창성(평화출판사) 등의 출판인들이 북한산 등반에 나섰다. 이 일곱 명의 출판계 거장들은 그곳에서 출판 정신을 쇄신할 ‘출판인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기획과 편집, 디자인과 인쇄, 물류와 유통을 집적한 출판 단지를 만들자고 결의한다. 출판 공동체에 대한 이들의 꿈은 마침내 현실화되었고, 민간 주도로 조성된 세계 최초이자 세계 유일의 출판도시가 탄생했다. 현재 파주출판도시는 950여 개 업체, 2만 명에 이르는 직원들의 일터가 되었다.

출판 공동체의 뜻을 세운 출판인들이 초창기부터 지켜온 정신은 절제, 균형, 조화, 인간애, 네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무분별한 자기 탐욕을 억제하고 공동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며, 그리하여 새로운 인간성이 발현되는 것이 파주출판도시의 오랜 염원이다. 이곳은 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꾸며 30년 넘게 그 역할에 매진해 왔다. 파주출판도시가 추구하는 이 네 가지 가치를 동시대에 맞게 새롭게 되살려내는 일은 이제,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후배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책과 건축, 생태의 도시

파주출판도시는 책과 출판 중심의 1단계 사업에 이어, 2단계 사업에서는 책과 영상·영화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지금은 음악과 미술을 포함한 거의 모든 영역의 예술가들이 포진해 명실상부한 책과 예술의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이곳에는 다산북스, 동녘, 들녘, 돌베개, 뜨인돌, 문학동네, 사계절, 열화당, 창비, 한길사 등 국내 최고의 출판사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상지사 등의 인쇄 업체들과 국내 최대 물류센터인 북센 등은 파주출판도시를 지탱하는 구심점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과 중국은 물론 전 세계 출판인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파주출판도시는 ‘건축 도시’이기도 하다. 이곳은 저마다 이야기가 있는 독특한 건축물로 채워진 커다란 건축 전시장이다. 47만 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250여 개의 건축물들은 태양의 궤적을 느끼고, 비와 바람 그리고 구름을 느끼고 볼 수 있는 구조로 지어졌다. 건물이 자연과 순응하며,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듬는다. 우리 시대 대표 건축가들의 ‘지식을 기반으로 한 지혜’의 결과물인 하나하나의 건축물들은 그 자체로 파주출판도시가 건축 도시임을 말없이 웅변한다.

파주출판도시의 모든 건축물들은 자연환경과 건물의 조화를 고려해 설계됐다. 사진은 도서출판 들녘의 사옥으로, 국내 건축가 김영준이 스페인 출신의 건축가 알레한드로 자에라 폴로와 공동 설계한 작품이다. 2006년 영국 왕립 건축가 협회로부터 건축상을 받았다.
ⓒ 한국저작권위원회

흥미로운 점은 파주출판도시의 구성원이 될 출판인들과 그들의 보금자리를 세울 건축가들이 ‘건축 설계 지침’을 함께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도시 건축의 지침이 된 이 ‘설계 헌장’은 1단계 사업에서는 ‘위대한 계약’으로, 2단계에서는 ‘선한 계약’으로 명명되었다. 파주출판도시 설계에는 ‘빈자의 미학’을 추구하는 승효상을 비롯해 김병윤, 김영준, 김인철, 김헌, 민현식 등 국내 최고의 건축가들이 참여했다. 또한 플로리안 베이겔(영국), 세지마 가즈요(일본), 알바로 시자(포르투갈) 등 세계적 거장들도 동참했다. 봄과 가을이 되면 국내외 건축학도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가 하면 파주출판도시는 ‘생태 도시’를 지향한다. 최근 생태와 환경이 전 세계적 이슈가 되고 있지만, 이곳은 기획 단계부터 일찌감치 생태 도시를 추구했다. 애초 토지 조성 당시의 계획은 부지 내 갈대 샛강과 유수지를 모두 메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배 출판인들은 그곳을 살림으로써 도시 환경을 개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책의 도시를 구현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강하게 고수했다. 결과적으로 갈대 샛강과 유수지를 매립하지 않고 보존함으로써 900여 종의 야생 동식물은 물론 멸종위기종, 천연기념물이 살아 숨 쉬는 자연의 보고로 가꿔지고 있다. 파주출판도시 내에 ‘생태위원회’를 구성해 답사와 탐조를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기도 하다. 파주출판도시는 인간과 책 문화가 상생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방식을 배우는 공간이기도 하다.

파주출판도시에 자리 잡은 명필름아트센터 내부. 영화관, 카페, 쇼룸, 아카이브 룸, 스크리닝 룸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2025년 창립 30주년을 맞은 명필름은 PC 통신을 소재로 새로운 세대의 감성을 보여준 <접속>(1997)을 시작으로, 남북 관계에 대한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 <공동경비구역 JSA>(2000) 등 한국 영화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50여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명필름아트센터 제공

문화예술의 중심지

파주출판도시의 또 다른 정체성은 ‘교육 도시’라는 점이다. 이곳은 거대한 캠퍼스와 같다. 디자인과 영상 창작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PaTI), 영화인들의 창작 의욕을 고취하는 명필름랩은 물론 출판인 재교육의 산실 파주에디터스쿨, 인문예술 대중화에 기여하는 출판도시 인문학당, 출판체험학교, 출판도시 ‘북드림 꿈의 학교’ 등을 통해 남녀노소 누구나 배우고 익히며 그 즐거움을 나눌 수 있다.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이 작업한 ‘출판도시 인문학당’ 행사 포스터가 벽에 걸려 있다. 이 프로그램은 출판도시문화재단이 2014년부터 운영해 왔으며 낭독극, 강연회, 체험 클래스 등 인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 일상의실천

한편 파주출판도시에서는 다양한 문화예술 콘텐츠의 향연이 연중 펼쳐진다. 봄과 가을에 각각 열리는 어린이책잔치와 파주북소리를 중심으로 다양한 북카페와 갤러리, 공연장과 박물관에서 상시 다양한 문화 공연과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린다. 2024년 가을부터는 ‘파주페어 북앤컬처’를 개최하고 있다. 이 축제는 책에서 비롯된 다양한 문화예술 창작 콘텐츠를 국내외 시장에 소개하고 교류하는 글로벌 콘텐츠 마켓이자, 시민들과 함께 축제의 기쁨을 누리는 복합 문화 페어이다. 파주출판도시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책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갈라 콘서트와 연극, 프린지 쇼케이스 무대가 펼쳐진다. 2025년 10월 24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제2회 행사에는 5만여 명의 관람객들이 일상을 벗어난 일탈의 즐거움을 누렸다.

파주출판도시는 공동성의 정신에 기반하여 책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는 곳이다. 아울러 책에서 발현된 다양한 문화예술 콘텐츠가 날마다 태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책의 울타리를 넘어, 책이 찾아내고자 했던 인간성의 가치를 오늘에 되살리는 곳이 바로 파주출판도시이다. 앞으로 파주출판도시는 책은 물론 문화예술 복합도시의 면모를 다듬어가며,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든든한 못자리로 성장해 갈 것이다.

장동석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 출판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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