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는 한국전쟁 직후 금단의 냉전 공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정치, 평화, 생태 담론이 응축된 매우 복합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예술가들은 다양한 개념이 교차하는 복합적 공간으로 DMZ를 해석한다. DMZ를 미학적 공간으로 탈바꿈하려는 예술적 시도가 전개되면서 이제 이곳은 분단의 흔적을 넘어 예술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다.
2024년 하반기, 임진각 일대에서는 경기관광공사가 주관한 ‘DMZ OPEN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 DMZ OPEN 전시: 통로 >가 열렸다. 이 전시에는 국내외 12명의 작가들이 참여해 DMZ를 새롭게 해석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사진은 평화누리에 설치된 사진작가 노순택의 작품들. 중국 여행 중 압록강과 두만강 변 북한 국경 지대를 촬영한 사진들이다.
ⓒ 경기관광공사
한국전쟁 발발 후 1953년 발효된 정전 협정에 따라 한반도 허리에는 군사분계선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남북으로 각각 2㎞ 범위에 남한과 북한의 군사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 지대를 두었다. 그것이 바로 비무장지대(DMZ)다. 한반도 서쪽 임진강 하구의 경기도 파주시 정동리에서 동해안인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까지 총 248km 길이로 이어져 있다.
DMZ는 분단의 상징이면서 역설적으로 평화의 가능성을 품은 장소다. 사람은 살 수 없는 땅이지만, 멸종 위기 동식물은 서식하는 모순의 지대다. 총성이 멎은 지 70여 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이곳은 천혜의 생태 환경을 지닌 지역이 되었다. 또한 ‘무장된 평화 지대’로 불리며 예술가들의 상상력이 깨어나는 실험장이 되었다.
< DMZ 전시: 체크포인트 > 전시작 중 하나인 토모코 요네다의 < 지뢰-DMZ Ⅰ >.
이 전시는 2023년 8월 31일부터 9월 23일까지 도라전망대, 캠프 그리브스, 평화누리 등지에서 열렸으며, 국내외 작가 27명이 참여했다. 원로, 중견뿐 아니라 젊은 작가들도 다수 참여해 세대별로 DMZ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보여줬다.
ⓒ 경기관광공사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DMZ는 오랫동안 정치·군사의 언어로만 다뤄졌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이곳을 상처와 치유, 경계와 공존을 사유하는 미학적 공간으로 바라보는 예술가들의 작업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DMZ를 동시대의 예술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들은 DMZ를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닌 ‘새로운 상상력의 토대’로 전환했고, 이로써 DMZ는 미술·건축·생태·사운드·미디어가 교차하는 복합적 예술 플랫폼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그 중심에는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가 있다. DMZ와 그 접경 지역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동시대 미술 프로젝트다. 2012년 첫 전시에는 국내외 작가 11팀이 참여했으며, 강원도 철원의 대표적 안보 관광 코스인 제2땅굴, 노동당사, 평화전망대, 월정리역 등을 전시장으로 활용했다. 그 이전에도 DMZ와 관련된 전시가 간헐적으로 열렸지만,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는 사회·인문·환경·건축·생태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과 협업하며, DMZ에 대한 학문적·과학적 리서치를 예술적 관점으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전시뿐 아니라 학술 포럼, 지역 리서치, 인문학 토크 등으로 프로젝트를 확장했다는 점도 특징이다.
2024년 빈 제체시온(Secession)에서 열린 <그림자의 형상들(Forms of the Shadow)> 전시에 출품된 이불의 <오바드 V>. 이 작품은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의 2019년 전시에서 처음 선보였으며, 철거된 DMZ 감시 초소에서 수거한 폐자재를 타워 형태의 구조물로 재구성했다.
작가 및 BB&M 갤러리 제공
이 프로젝트는 해가 거듭될수록 전시 장소는 물론 주제도 더욱 심화되었다. 예술가들이 민간인 통제 구역 내에 있는 마을을 레지던시로 활용해 장기간 머물기도 했는데, 이를 통해 지역민의 삶과 동시대 예술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모색하기도 했다. 2015년부터는 미국, 덴마크, 영국, 프랑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독일, 호주 등 해외 전시로 이어지며 한국 현대미술의 담론을 국제적으로 확장했다. DMZ가 ‘한국의 기억’에 머물지 않고, ‘인류 보편의 경계’에 대한 질문으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캠프 그리브스는 DMZ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 내 위치한다. 미군이 1953년부터 2004년까지 50여 년간 주둔했던 곳이다. 2007년 우리나라로 반환된 이후, 경기도가 2013년부터 역사·문화 체험 시설로 개방했으며 일부는 미술 전시장으로 활용된다.
ⓒ 경기관광공사
파주, 냉전의 땅에서 예술의 장으로
2023년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는 그동안 주된 무대였던 강원도 철원에서 벗어나 경기도 파주와 연천으로 장소를 옮겼다. 2023년은 정전 70주년을 맞은 해였기에 DMZ의 의미와 현재성이 다시금 부각되었다. 특히 서울과 DMZ 사이에 위치한 도시 파주는 분단의 기억과 출판문화, 예술이 공존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주목받았다. < DMZ 전시: 체크포인트 >라는 제목으로 열린 제목으로 열린 이 해의 전시는 남쪽의 최북단 전망대인 도라전망대, 과거 미군 기지였던 캠프 그리브스, 전쟁 중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을 위해 세워진 임진각 등지에서 열렸다. 이를 통해 전쟁의 흔적으로 생긴 건물들이 예술 언어로 재해석된 장소로 탈바꿈했다. 2024년에는 파주에서만 단독으로 < DMZ OPEN 전시: 통로 >가 열렸다. ‘통로’라는 개념을 통해 DMZ의 의미를 살피고 그 공간성을 확장하는 전시였다.
2025년에는 경기도가 주최하는 ‘DMZ OPEN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파주에서 <언두 디엠지>전시가 열렸다. 그동안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의 예술감독을 맡아온 아트선재센터 김선정 관장이 기획한 전시다. 파주 민간인 통제 구역 내 통일촌, 캠프 그리브스를 리모델링한 갤러리 그리브스, 임진각 평화누리 일대에서 국내외 작가 10명이 회화·설치·사운드·드로잉 26점을 선보였고, 인간이 비운 자리에서 자연이 회복한 시간을 시각 언어로 선보였다. 김선정 예술감독은 “DMZ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는 감각의 지대”라며 “예술은 경계의 언어를 다시 쓰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녀에게 DMZ는 더 이상 ‘금단의 땅’이 아니라 예술과 사회가 만나는 실험실이다.
양혜규의 2020년 작 <디엠지 비행>은 DMZ 이면에 존재하는 인간과 자연의 가시적이면서도 비가시적인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양혜규는 2020년대에 들어서 DMZ를 매개로 한 일련의 작업들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공존의 상상
DMZ를 매개로 펼쳐지는 프로젝트들은 미술 작품을 통해 개인과 사회를 옥죄는 분단 체제를 온몸으로 실감하게 만든다. 막연하던 분단 현실은 무장 군인들의 초소, 지뢰밭, 철조망 등의 풍경 속에서 가시적 체험으로 다가온다. 접경 지역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까지 작품 속에 스며들며, DMZ는 더 이상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감각의 현장’으로 변모한다.
특히 최근에는 작가들이 DMZ의 생태적 회복력과 평화적 상징성을 조명한다. 다양한 동식물, 그리고 시간이 만든 침묵은 작품의 소재이자 주제가 된다. 이들은 DMZ의 풍경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한 시간과 감정, 상처와 치유의 층위를 시각화한다. 지워진 지도, 닫힌 길, 경계의 언어를 새로 쓰며 예술가들은 DMZ를 ‘보이지 않는 평화의 아틀리에’로 전환시킨다. 그들의 작업은 냉전의 언어를 치유의 언어로, 경계의 풍경을 사유의 장면으로 변환시킨다. DMZ를 매개로 한 예술의 핵심은 ‘보이지 않음’을 ‘보이게 하는 일’이다. 과거 감시의 상징이던 초소와 철책은 이제 빛과 소리, 바람, 식물의 흔적으로 재구성된다. 예술은 폭력의 흔적을 감각의 언어로 치환하며 단절된 세계를 잇는 ‘사유의 다리’를 놓는다.
2022년 경기문화재단이 평화누리 일대에서 개최한 전시 < Let’s DMZ Art project 평화공존지대 >의 출품작 중 하나인 패트릭 션의< Vision in Motion Korea >. 가로 250m, 세로 3.5m의 파노라마 대형 설치물에 12만 개의 색 띠를 매달아 사람들이 소원을 적을 수 있도록 한 공공 예술 작품이다.
경기문화재단 제공
예술가들이 DMZ에 끌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곳에는 아직 ‘미지의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멈춘 자리를 대신 채운 자연의 리듬, 그 속에서 예술은 가장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간다. ‘경계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넘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술은 DMZ를 통해 분단의 서사를 ‘공존의 상상’으로 전환한다. 정치가 풀지 못한 갈등의 언어를 예술은 감각과 이미지로 다시 말한다.
DMZ는 여전히 민간인 통제 구역에 해당한다. 전시가 열리는 장소는 사전 허가와 검문 절차를 거쳐야만 방문할 수 있다. 그럼에도 DMZ 예술은 더 이상 과거의 상흔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질문이 되었다. 전쟁의 땅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금단의 경계에서 예술의 플랫폼으로. DMZ는 지금, 예술을 통해 다시 태어나고 있다. 총구가 사라진 자리, 풀잎이 흔들리고 새들이 노래하는 그곳에서 예술은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평화를 말한다.
통일부가 2021년 파주 일원에서 개최한 < DMZ Art & Peace Platform > 전시작 중 하나인 백남준의 <코끼리 수레>. 작품이 놓인 곳은 주 전시장인 유니(Uni)마루이며, 과거 개성공단 조성 당시 남북출입사무소로 사용됐던 건물을 건축가 민현준이 예술 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
2021 DMZ Art & Peace Platform 제공, 사진 김산
경기도가 올해 8월부터 11월까지 3개월 동안 개최했던 <언두 디엠지>의 전시장 중 하나인 갤러리 그리브스 전시 전경. 캠프 그리브스 끝자락에 위치한 갤러리 그리브스는 과거 미군이 사용하던 볼링장을 전시장으로 리모델링한 공간이다.
경기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