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Features > 상세화면

2025 AUTUMN

넓고 깊은 예술적 스펙트럼

목포는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의 고향이자 활동 무대였다. 문학, 무용, 미술, 국악, 대중음악 등 문화예술 전 장르에 걸쳐 목포가 배출해 낸 인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목포의 문화예술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곧 한국의 문화예술사를 들여다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김우진은 해박한 식견과 선구적 실험 정신으로 근대기 한국 연극계에 새바람을 일으킨 인물이다. 유달산 조각공원 아랫동네에는 목포에서 활동했던 극작가 김우진을 기념하는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사진은 그중 김우진을 테마로 지어진 ‘반딧불작은도서관’ 외부 전경.
© 이민희

“목포 길거리에서 어깨를 부딪치는 사람 네 명 중 한 명은 예술가”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목포는 예술적 소양이 넓고 깊은 지역이다. 대부분의 가정집은 물론 서민들이 애용하는 다방이나 식당, 술집, 숙박업소 등에도 서양화, 한국화, 서예 같은 작품들이 벽에 걸려 있다. 전문적 기량을 갖춘 국악인들만 부를 수 있는 고난도의 판소리와 남도민요, 육자배기도 목포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해낸다. 또한 어디선가 노랫가락이 들려오면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저절로 몸이 움직인다.

인구 약 21만 명의 작은 도시 목포는 한국에서 인구 대비 예술가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곳이다. 과거 전라남도의 행정 중심지였던 광주를 제치고 근현대 남도 문예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내재한 예술적 자양분을 토대로 서구 문물을 재빠르게 흡수한 결과였다.

서구 사조의 유입

김대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다방의 푸른 꿈>(2015) 포스터. 오늘날 목포를 상징하는 인물이 된 대중가수 이난영의 대표곡을 제목으로 삼은 이 영화는 이난영과 작곡가인 남편 김해송에서 시작해 이들의 자녀들로 구성된 걸그룹 김시스터즈의 음악 여정을 담았다.
인디라인 제공

‘산다이’는 서남해 연안의 도서 지역에서 전승되는 고유한 풍속이다. 청춘 남녀나 마을 주민들이 모여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는 역동적인 놀이판이다. 흥과 멋이 어우러진 이 길거리 문화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섬사람들이 육지로 떠나 인구가 줄면서 요즘은 보기 드문 광경이 되었다. 산다이는 고려와 조선 시대, 나라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열렸던 전통 연희 ‘산대희’에서 유래한 용어로 알려졌다. ‘산대’는 연희를 위해 세운 노천 무대를 가리킨다.

목포 인근에는 천여 개의 섬들이 산재하고 있다. 목포 사람들도 당연히 산다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근대화 시기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등 여러 나라의 문화가 유입되어 지역의 전통문화와 섞이면서 예술 창작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당시 목포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또한 근대기 목포에는 예술 창작과 소비를 위한 새로운 세력도 형성되었다. 여러 학교가 생겨나면서 근대식 교육을 받은 이들과 지식인 계층이 문화예술 활동의 주도층으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 남장로회가 파견한 선교사들의 영향력도 컸다. 1895년 한국에 파견된 유진 벨 선교사는 1903년 정명학교(현 정명여자중학교)와 영흥서당(현 영흥고등학교)을 설립해 근대식 교육의 단초를 마련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음악, 미술, 연극 등 서양식 문화 교육을 시켰다.

한편 항구 도시의 특성상 운송업, 무역업, 조선업, 물류업 등이 발달하면서 상업 자본이 형성되고 신흥 상인들이 주류 사회에 진입하게 됐는데, 이들은 신문, 잡지, 음악, 연극, 문학, 영화 등 문화예술 소비에 적극적이었다. 이렇게 부유층 자녀들이 일본이나 유럽 유학을 통해 모더니즘 문화를 접했던 것도 당시 목포의 문화예술이 풍성해질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다.

이쯤에서 언급할 수 있는 인물이 극작가 김우진(1897~1926)이다. 일본에 유학해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김우진은 유학 시절 연극 연구 단체인 극예술협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졸업 후 목포로 돌아와서는 약 50편의 시와 5편의 희곡, 20여 편의 평론을 발표했다. 서구 근대 사상에 매료된 그는 전통적 인습을 부정하고 급진적 개혁을 꿈꿨는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난파」와 「산돼지」에도 그러한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이 두 작품은 우리나라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으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신파극이 주류를 이루었던 당시 연극계에 내민 매우 전위적인 도전장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최고 인기 가수였던 윤심덕(1897~1926)과의 스캔들로도 유명하다.

목포 출생인 가수 이난영은 1934년 OK레코드사를 통해 가요계에 데뷔했으며, 이듬해 그녀의 대표작인 <목포의 눈물>로 크게 인기를 얻으며 일약 ‘국민 가수’ 반열에 올랐다. 사진은 이난영의 히트곡들을 모아 LKL레코드가 1960년대에 발매한 LP 음반이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서구 신문물은 음악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난영(1916~1965)은 한국인들의 ‘국민가요’라 할 수 있는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가수다. 이난영은 1935년 발표한 이 곡으로 크게 인기를 얻으며 가요계의 샛별로 등장했다. 이듬해에는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해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더 꽃피웠다. 이들 부부는 서양 대중음악에도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스윙 재즈와 블루스풍이 혼합된 <다방의 푸른 꿈>(1939)은 이난영을 한국 재즈사와 관련해 재평가하게 만든 명곡이다.

호남 화단의 구심점

프랑스 파리에 몽마르트르 언덕이 있다면 목포에는 오거리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목포역, 조선인 마을, 일본인 마을, 목포항 등으로 연결되는 다섯 갈래 길이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현대와 와서는 아틀리에, 화랑, 극장 등 문화 시설이 밀집해 있어 1950년 한국전쟁 이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사회, 문화, 경제의 거점으로서 목포의 중흥기를 이끌었다.또한 1950년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예술인이 목포로 피난해 왔고, 이에 따라 당시 한국의 주류 문화예술도 목포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한국 예술인들을 대표하는 단체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보다 4년 앞선 1958년에 목포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가 먼저 창립했다.

<강산무진도>. 허건. 1960년대 초반. 종이에 먹, 색. 101 × 285 ㎝.
허건은 수묵담채의 전통 산수화 기법으로 향토적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린 화가이다. 이 작품은 허건의 완숙한 화풍을 잘 보여주는 역작 중 하나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특히 이곳에 있던 다방을 중심으로 문인, 화가, 사진작가, 음악인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인들이 교류하며 문화의 꽃을 피웠다. 따라서 오거리에 출입한다는 것은 주류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거리 다방은 한국 화단을 이끈 화가들을 양산해 냈다. 대표적으로 남종화의 대가로 불리는 허건을 들 수 있다. 동양화의 한 갈래인 남종화는 흔히 문인 사대부화라고 부르는데,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 화가들의 내면세계가 투영된 관념적 양식의 산수화다. 허건은 조선 후기의 출중한 학자이자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던 허련(1809~1892)의 손자이다. 그는 화가 집안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나타냈다. 청소년기 목포에 정착한 허건은 오거리 다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평생 목포에서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또한 오거리 다방은 유학파 서양 화가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일찍부터 근대 미술이 뿌리내렸다. 한마디로 목포 오거리는 호남 화단의 구심점이었다.

한편, 오거리 다방은 지방 언론과 문학지 등이 활발히 발간되면서 문필 활동과 문예 비평의 공간으로도 활용되어 한국 문단의 발전에도 큰 흔적을 남긴 장소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극작가 김우진을 비롯해 소설가 박화성, 극작가 차범석, 문학평론가 김현 등 한국 문학사의 굵직한 이름들이 목포 오거리에 각인돼 있다.

사진은 차범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국립극단이 2024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인 <활화산> 중 한 장면. 1960년대 말 격변하는 농촌의 현실을 묘사한 작품이다. 목포 출생인 차범석은 한국 연극의 대중화에 앞장선 사실주의 극작가다.
국립극단 제공

K-컬처의 원류

그런가 하면 목포는 공연예술 문화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목포 지역의 국악적 자양분은 1962년 목포국악협회가 발족하면서 체계적으로 전수되었고, 판소리의 대가들이 목포에 머물며 국악 교육과 보급에 앞장섰다. 무용은 단연 이매방(1926~2015)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호남 춤의 명무’라 불리는 이매방은 1987년 승무, 1990년 살풀이춤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국내에서 유일하게 두 가지 종목의 국가무형유산 보유자로 기록된 인물이다. 승무는 불교 의식에서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춤이다. 하얀 수건을 들고 살풀이 가락에 맞춰 춤사위를 펼쳐내는 살풀이춤은 무당이 굿판에서 추었던 즉흥적인 춤에서 유래했다. 이매방은 승무와 살풀이춤 모두에서 ‘이매방류’라는 독자적인 유파를 형성할 정도로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줬다.

동춘서커스 단원들이 접시돌리기 묘기를 선보이고 있다. 1925년 창단한 동춘서커스단은 1927년 목포에서 첫 공연을 시작했으며, 1960~1970년대에 최대 호황을 누렸다. 현재는 경기도 안산시의 지원으로 대부도에서 서커스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동춘서커스 제공

1925년 목포에서 창단된 동춘서커스도 빠질 수 없는 목포의 자산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커스단이었던 이곳은 1960~70년대 국내 서커스 공연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현재는 경기도 안산에 자리를 잡고 국내 유일한 곡예 공연단으로서 서커스 문화를 계승 중이다. 이렇듯 목포는 한국의 전통과 문화예술이 응축된 압축파일 같은 곳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K-팝을 비롯한 한국 대중문화를 이끄는 주요한 인물들 중 상당수가 목포 출신이다.

김대호K-전통문화학술원 상임이사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