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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AUTUMN

근대 문화의 1번지

서남해안의 관문인 목포는 예로부터 바다와 영산강을 연결하는 길목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과거에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1897년 개항 이후 근대기에는 국내 4대 항구이자 6대 도시에 들어갈 만큼 크게 번성했다. 이런 연유로 목포는 ‘근대 문화의 요람’이라 불린다.

1900년 건립된 구 일본영사관은 도서관, 문화원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다가 2014년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개관하여 사용되고 있다. 유달산 기슭에 위치하며, 붉은 벽돌을 이용한 2층의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다.
© 이민희

목포는 한국의 4대강 중 하나인 영산강의 입구이자 출구에 해당하는 위치에 형성된 항구 도시이다. 강을 통해 내륙과 연결되고, 바다를 통해 목포 주변의 수많은 섬과도 연결이 가능한 지리적 이점이 있다. 그러한 장점을 살려 조선(1392~1910) 시대인 1439년부터 바다를 지키는 군사 기지가 공식적으로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이다. 1897년에는 국내에서 네 번째로 국제 무역이 가능한 항구로 지정되면서 근대 상업 도시로 발전했다. 전라도 지역에서 국제 무역항이 지정된 것은 목포가 처음이었다. 곡창 지대인 전라도에서 생산되는 쌀 등의 특산물을 수출하기 좋다는 점과 무역항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국제 항구로 지정됨과 동시에 외국인들의 거주가 가능해지면서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전라도에서 근대 문화가 가장 빨리 전파되는 지역이 되었다.

해안로 교차로 상가 주택은 근대기 목포에서 가장 번화했던 중심가에 세워진 2층 규모의 목조 건물이다. 대지 형태에 맞춰 다각형으로 지어졌으며, 벽체의 아치형 창문과 옥탑 장식 등 외관이 독특하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근대 문물의 보급

개항 후 목포 해안가에는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옛 군사 시설이었던 목포진 주변의 해안을 매립한 후 그 주변에 도로망과 건축을 조성하는 방식이었다. 이곳에 일본인·중국인·러시아인·영국인 등이 거주하였는데, 그중 일본인들의 숫자가 가장 많았다. 1900년에 일본인들은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위치에 대규모의 일본영사관을 건설했다. 이 건물은 현재도 보존되어 있으며, 목포근대역사관 본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무렵 한국인들도 새롭게 발전하는 이 항구 도시로 많이 이주해 왔다. 주로 유달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마을을 형성했다. 이렇게 목포는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공간과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구분되어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근대 교통망의 발달은 목포의 도시화를 촉진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1913년에 목포역이 설치되고, 이듬해에는 대전과 목포를 연결하는 호남선이 개통하면서 이곳은 철도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근대식 기선의 보급으로 목포항과 주변의 많은 섬들을 연결하는 해상 교통도 발달하게 되었다. 선박을 통한 목포항과 다도해 지역과의 긴밀한 연결은 이 지역의 도시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다. 이를 통해 섬 지역과 교류가 활발해졌고, 섬에서 목포로 이주해 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이렇게 해서 목포는 전라남도에서 근대 문물이 가장 빠르게 보급되고, 다른 지역으로 전파하는 거점 도시가 되었다. 1897년 이후 목포에 형성된 근대 문화 가운데 전라남도에서 최초이거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례들이 많다. 학교, 병원, 교회, 성당, 극장, 우체국, 경찰서, 법원, 소방서 등 근대 공공시설들이 이곳에 먼저 설치되고,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런가 하면 외국인 선교사들의 활동도 목포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목포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선교 거점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양인들이 운영하는 교육과 의료 시설이 설치되었다. 양동 지역에 교회를 세운 미국인 선교사들은 1903년부터 여성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였다. 이는 전라남도 최초의 여성을 위한 교육 기관이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진료소를 설치하여 서양식 의료를 보급하였다. 천주교는 산정동에 성당을 설치하고, 목포 주변과 섬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살아 있는 박물관

항구 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목포에는 수많은 근대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흔적들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부르고 있다. 국가유산청에서는 2018년도에 목포의 옛 개항장 일대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하였다. 등록 명칭은 ‘목포근대역사문화공간’이다. 이 일대에는 영사관, 은행, 학교, 백화점, 정원, 교회, 성당 등 다양한 근대 건축물이 바둑판 형태의 도로망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근대 건축이 지닌 역사적 의미가 강조되면서, 이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곳에서 영화나 드라마가 촬영되기도 하고, 근대문화유산을 활용한 역사 축제가 펼쳐지기도 한다.

항구 지역 외에 한국인들이 주로 살았던 유달산 자락에도 근대문화유산이 많다. 오늘날 목원동이라는 부르는 지역이다. 목원동은 목포역과 유달산 아래 지역을 총칭하는 행정 명칭이다. 이 일대에는 1924년 한국인들이 스스로 성금을 모아 만들었던 최초의 시민 회관인 목포 청년회관이 보존되어 있으며, 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힘을 모아 1911년에 완공한 양동교회 건물도 남아 있다. 목포는 걸어 다니면서 근대문화유산을 탐방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그래서 목포를 살아있는 근대사 박물관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목포는 ‘예술의 고향’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닌다. 목포를 ‘예향’이라 부르는 이유는 실제 목포가 배출한 유명 예술인들이 많고, 예술 활동을 즐기는 시민들의 문화 소양이 높기 때문이다. 개항 이후 목포에 근대 문화가 빠르게 전파된 것이 목포가 예술의 도시로 명성을 얻게 된 하나의 배경이다. 근대 문물이나 서구의 문화예술이 빠른 속도로 유입되면서 이 지역 사람들은 다른 도시보다 먼저 다양한 문화예술을 접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또한 일본으로 연결되는 국제 해로가 발달했다는 점도 한몫했다. 이를 기반으로 유학파 예술인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지금도 목포에는 시청에서 운영하는 시립예술단체가 6개나 있다. 그만큼 예술을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이다. 목포문학관, 대중음악의 전당, 목포문예역사관, 노적봉 예술공원 미술관 등이 조성되어 있다.

1897년 설립된 산정동 성당은 천주교 광주대교구 최초의 성당으로,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된 세 성직자의 순교 기념비가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전라남도 지역의 천주교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해양 관광 시대의 거점

조선내화 구 목포공장의 내부 시설물.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트러스가 건물 구조를 잘 드러내고 있다.
© 조선내화

목포는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이자 한국인 중에서 최초로 노벨상 수상자가 된 김대중을 배출한 도시이다. 태어난 고향은 신안군 하의도지만, 목포는 정치인 김대중을 길러낸 제2의 고향이다. 그는 목포에서 초등학교부터 상업고등학교까지 다녔다. 1963년과 1967년에는 목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1998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남북 관계 개선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목포 삼학도에 노벨평화상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어 연중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최근 목포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도시로 변화하고 있다. 신 해양 관광 시대의 거점으로서 목포가 주목받고 있고, 항구 도시에 남아 있는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2019년 유달산과 고하도를 잇는 해상 케이블카가 개통된 것도 관광객들이 증가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외지에서 목포로 이주해 오는 사례도 늘고 있으며, 청년들의 다채로운 활동도 그 어느 때보다 눈에 띄게 많아졌다. 목포는 한반도의 끝자락에 자리한 작은 도시이지만, 다도해를 품은 서남권의 중심 도시이다. 이 도시는 현재 항구의 멋과 맛, 근대문화유산과 예술을 토대로 재도약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최성환국립목포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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