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는 경상북도 동쪽 해상에 있는 화산섬이다.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 투명한 바다가 어우러져 한반도 내 다른 지역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을 지닌다. 2012년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섬 내 23곳이 지질 명소로 보호되고 있다.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역사적으로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지역이기도 하다.
해발 약 450m인 송곳산은 울릉도 중앙에 자리한 성인봉 줄기의 최북단부에 있다. 바다에 인접해 있어 해상에서 더욱 웅장하게 보이며, 전문 산악인들에게 명소로 알려져 있다.
해심이 깊은 동해상에 위치한 울릉도는 신생대에 일어난 화산 폭발로 용암이 분출돼 형성된 섬이다. 우리나라 가장 동쪽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의미가 큰 섬이다. 독도를 비롯해 죽도, 관음도 등 크고 작은 수십 개의 부속 섬을 거느리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며 섬 가운데 솟아 있는 해발 986.5m의 성인봉을 기준으로 울릉읍, 서면, 북면으로 나뉘어 있다.
이 섬의 인구는 현재 9천 명이 약간 넘는다. 1970년대까지는 약 3만 명 정도 살고 있었지만, 2000년대 들어 약 1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후에도 감소 추세를 보이다가 2021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늘고 있다. 뭍으로 나간 사람들이 돌아오거나 울릉도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관음도는 원시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야생 식물의 천국이라 불린다. 2012년 보행교가 설치되어 울릉도 부속 섬 중 유일하게 도보로 이동할 수 있다.
고대의 흔적
울릉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첫 고고학적 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서 이뤄졌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1957년과 1963년 두 차례 유적 발굴에 나섰는데, 상당수 고분이 이미 도굴되고 파괴된 상태였다. 당시 발견된 고분은 모두 87기로, 대부분 통일신라(676~935) 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확인됐다. 산의 경사지에 위치한 이 고분들은 시신을 넣은 석곽 위에 흙을 덮지 않고 돌을 쌓아 올린 적석총 형태이다. 정면에는 입구가 뚫려 있다. 이는 섬의 지형과 재료를 최대한 이용한 것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울릉도만의 고유한 묘제 양식이다.
그로부터 30여 년 만에 울릉도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다시 이루어졌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은 1997년부터 이듬해까지 정밀 지표 조사를 실시해 울릉도 내 산재한 고분군과 유물들을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조사단은 고인돌로 추정되는 3기의 유적을 새롭게 발견했으며, 토기 파편과 마제 석기도 발굴했다.
울릉도의 대표적 관문인 도동항은 포항과 묵호에서 출발한 여행자들이 도착하는 곳이다. 주요 관공서와 학교들이 밀집해 있어 섬 내에서 가장 번화하다.
© 한국관광공사
이 발견은 울릉도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제공했다. 우리나라에서 울릉도에 대한 기록은 12세기에 간행된 『삼국사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역사서에는 6세기 초 신라(B.C 57~A.D 935)가 울릉도에 있던 우산국이라는 나라를 정벌하였으며, 해마다 우산국이 신라에 토산물을 바치기로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를 통해 우산국이 신라 문화권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데, 학계에서는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울릉도의 역사가 시작된 시점을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된 6세기 초반으로 보았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은 출토된 유물들을 검증한 결과 울릉도의 역사가 6세기 이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현재는 이후 조사에서 관련 유물이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는 등 시기를 확신하기 어렵고, 보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며 조심스럽게 유보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내용이 허구가 아니라면 6세기 이전 울릉도 원주민들의 흔적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15세기에 편찬된 역사서 『고려사』에 의하면 우산국은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여진의 침략을 받아 패망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고려의 관리들이 울릉도에 수시로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1018년 11월 8일 자 기록에는 여진의 침략으로 울릉도 백성들이 농사일을 못 하게 되자 나라에서 농기구를 하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조정에서 백성들을 육지로 이주시키자는 논의가 있었고, 실제 이주를 시도한 기록을 근거로 우산국 패망 이후 울릉도가 상당히 황폐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울릉도에서 유일한 평야 지대인 나리분지에는 옛날 사람들의 주거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집들이 남아 있다. 사진은 1940년대 건립된 너와집으로, 지붕을 너와(얇은 나뭇조각)로 이은 일자형 건축물이다.
이주 정책
조선 태종(재위 1400~1418년) 때도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탓에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고 섬을 비우는 정책을 폈다. 대신 2~3년에 한 번씩 섬의 현황을 파악하고 관리하기 위해 지방군 지휘관을 파견했다. 거친 동해를 건너야 하는 울릉도행 뱃길은 녹록하지 않았다. 1613년, 삼척 지역의 지휘관 김연성은 군사 180여 명을 이끌고 울릉도 뱃길에 올랐으나 거친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군사들과 함께 익사했다. 1694년에는 이준명이라는 관리에게 울릉도 순찰이 맡겨졌으나, 배를 타기가 두려워 임무를 회피했다는 기록이 있다. 1760년에는 비슷한 이유로 자신을 차라리 파직해 달라는 문서를 조정에 올린 이도 있었다.
울릉도 남쪽의 통구미마을은 깊고 좁은 골짜기 사이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서쪽 절벽은 향나무 자생지로, 향나무 원종이 자라고 있어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그러던 중 1882년 고종(재위 1863~1907)은 울릉도를 계속 비워 둬선 안 된다는 생각에 이규원을 현지로 보내 섬의 상황을 낱낱이 보고하도록 했다. 그 시기 이규원은 지금으로 치자면 군 사단장급 장성에 해당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는 10여 일 동안 울릉도 전역과 해안을 검찰한 뒤 보고서와 지도를 작성해 올렸다. 당시 그가 남긴 보고서가 『울릉도 검찰일기(鬱陵島檢察日記)』다. 이규원은 고종에게 하직 인사를 한 뒤 출발해 울릉도를 조사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2개월의 여정을 일기에 담았다. 울릉도 체류 당시의 기록엔 매일의 날씨와 지형, 식생, 만난 사람들, 느낀 점 등을 상세히 적었다. 이를 바탕으로 고종이 그해 12월 ‘울릉도 개척령’을 내렸고, 이듬해 16가구 54명을 섬으로 이주시키며 울릉도 재개척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규원은 울릉도에 머무는 동안 총 129명을 만났다. 이 가운데 전라도 출신이 103명으로 전체의 80% 수준이었다. 당시 섬에서 접촉한 전라도 사람들은 거문도를 비롯해 여러 지역 출신이었는데 이들은 울릉도에서 주로 배를 만들거나 미역, 전복 같은 해산물을 채취했다. 이들에게 울릉도행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집을 짓고 배를 만들기 위해선 목재가 필수였으나, 전라도에선 벌목이 금지돼 있었고 거문도 일대는 큰 나무가 잘 자랄 수 없는 환경이었다. 결국 그들은 울창한 숲과 해산물이 풍부한 울릉도를 찾게 됐고, 대대로 육지와 섬을 오가는 항해를 이어왔던 것이다. 특히 거문도 어민들에게 울릉도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거문도 뱃노래 중 < 술비소리 >는 밧줄을 꼬면서 부르는 노동요인데, 가사에 그들의 심경이 고스란히 담겼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 울릉도로 나는 간다 / (중략) 울릉도를 가서 보면 / 좋은 나무 탐진 미역 / 구석구석 가득 찼네.”
재개척 이후 섬으로 이주한 이들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자연에 순응하며 울릉도만의 독특한 문화를 일궈왔다. 섬사람들은 굶주림을 이기기 위해 옥수수와 감자를 주식으로 삼고 산나물로 끼니를 이으며, 울릉도만의 독특한 음식 문화를 만들었다. 1910년쯤부터는 이곳의 대표 특산물인 오징어를 잡기 시작했다. 오징어잡이와 함께 조선 산업도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해 왔다.
약 150m 높이의 대풍감 절벽 위에 세워진 향목(Hyangmok) 전망대에서는 울릉도 서쪽 바다가 장대하게 펼쳐진 광경을 볼 수 있다. 대풍감 왼쪽 절벽은 언론에서 우리나라 10대 비경 중 하나로 꼽은 곳이다.
© 한국관광공사
바다를 고즈넉하게 감싸 안고 있는 천부항은 과거에 목재를 운반하던 항구였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8월이면 오징어 축제가 열린다.
해안 절경
이규원이 일기에 기록한 ‘장작지포’는 사동의 옛 이름이다. 장작지포는 ‘자갈밭이 길게 펼쳐진 포구’란 의미다. 지금 여행자들이 울릉도에 가려면 포항, 묵호, 후포, 강릉에서 여객선을 타고 출발해야 하는데 사동은 그중 포항과 후포에서 도착한 배가 정박하는 곳이다. 북면 현포마을의 이름은 당시에 ‘흑작지’였다. 검은 자갈로 이뤄진 해변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울릉도에는 눈에 보이는 대로 이름을 붙인 정감 어린 지명이 많다. 울릉도 동쪽 절벽 아래 위치한 와달리도 마찬가지다. 경사가 심한 지역이라 돌이 ‘와달와달’ 굴러 내린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서면 구암마을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학포항 방면으로 가다 보면 수층교가 나온다. 복잡한 경사면 때문에 구불구불 만들어진 도로인데, 옛날엔 물이 층층이 흐른다고 해서 ‘물칭칭’으로 불렸다.
도동항에서 저동항 촛대바위까지는 행남해안산책로가 연결되어 있다. 울릉도 지질 명소 중 하나인 이곳에서는 해안 침식으로 만들어진 동굴과 절벽을 감상할 수 있다. CNN이 한국에 가면 꼭 들러야 하는 관광지로 선정한 바 있다.
한편 울릉도는 바닷속 화산 분출로 이뤄진 섬인 만큼 기암절벽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절경이 도처에 이어진다. 어딜 가더라도 허투루 지나칠 풍경이 없다. 그래도 해안 경관의 백미를 꼽으라면 단연 북면이다. 현포항에서 천부항을 지나 섬목까지 이어지는 북면 해안은 울릉도에서 가장 웅장하고 다채롭다. 수천 개 돌판을 쌓아놓은 듯한 노인봉과 하늘을 찌를 듯 뾰족이 솟은 송곳봉, 코끼리 모양의 공암, 세 선녀의 전설을 간직한 삼선암, 두 개의 해식동굴이 뚫려 있는 관음도 등 울릉도를 대표하는 해안 절경이 대부분 이곳에 있다. 바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빛깔을 가졌다.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천부항 인근 언덕에 서면 송곳봉과 공암이 바다와 함께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서북쪽 끝 태하리와 현포리를 잇는 고갯마루에서, 130㎞나 떨어진 한반도 동쪽 산줄기가 손에 잡힐 듯 성큼 다가오기도 한다. 130여 년 전 이규원의 울릉도 검찰 출발점이었던 경상북도 울진에서 강원도 삼척 쪽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다. 울릉도에서 육지를 볼 수 있는 날은 1년에 10일 정도에 불과하다. 주로 겨울철이나 태풍이 지나간 직후 해가 질 무렵 육안으로 볼 수 있다.

공암은 추산수력발전소 앞 해변에서 북쪽으로 약 1.5㎞ 정도 떨어진 바다에 있다. 10m 높이의 해식 터널은 소형 선박이 왕래할 수 있으며, 스킨스쿠버들에게 최고의 포인트로 인기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