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과 영화, 드라마를 넘어 최근에는 한국의 창작 뮤지컬도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 2016년 초연한 <어쩌면 해피엔딩>이 있다. 이 작품은 제78회 토니상에서 6개 부문 상을 휩쓸면서, 한국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 외에도 ‘국내용’이었던 작품이 ‘해외용’으로 기획돼 글로벌 무대로 진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2025년 6월 8일 뉴욕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열린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어쩌면 해피엔딩>이 작품상·극본상·연출상·작사 작곡상·남우주연상·무대 디자인상 등 6개 부문을 휩쓸었다. 국내 초연의 창작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토니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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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트(EGOT)’는 미국 문화 산업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4개의 권위 있는 시상식을 가리키는 용어다. TV 프로그램에 주어지는 에미상, 음악 분야의 그래미상, 영화의 오스카상, 그리고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무대 예술 작품을 대상으로 한 토니상이 그것이다.
K-콘텐츠는 2020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받으며 파란을 일으켰고, 황동혁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2022년 에미상 6관왕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그래미상은 1993년 성악가 조수미가 오페라 부문에서 본상을 받았으며, BTS가 여러 차례 후보에 오른 바 있다. 여기에 더해 2025년 6월,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브로드웨이 버전이 토니상을 받으며 K-콘텐츠가 ‘이고트’라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게 됐다.
파격적 행보
<어쩌면 해피엔딩>은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서로 사랑을 느끼며 겪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2016년 한국에서 초연했고, 2024년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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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뮤지컬 사상 최초이자 최고의 기록을 세운 <어쩌면 해피엔딩>은 무대에 오르는 과정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 작품은 비영리 문화예술 지원 단체 우란문화재단이 작사가 박천휴와 작곡가 윌 애런슨이 만든 초안을 2014년 발굴해 기획했다. 이듬해 리딩 공연, 트라이 아웃 공연을 시도하는 등 콘텐츠 인큐베이팅 환경이 잘 갖춰지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며 구체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흥미로운 것은 2016년 뉴욕에서도 리딩 공연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크리에이티브 팀이 뉴욕대학교의 티쉬예술학교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하긴 했지만, 개발 단계부터 글로벌 시장을 겨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치밀한 개발 과정을 거쳐 토니상 수상까지 끌어낸 이 작품의 스토리는 무척 매력적이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에는 인간을 도와주는 로봇인 낡은 헬퍼봇들이 살고 있다. 어디로 갔는지 주인들은 사라지고, 헬퍼봇들은 이젠 단종이 된 탓에 고장 난 부품이나 소모품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매일 반복되는 비슷비슷한 일상 속 어느 날, 주인공인 5세대 헬퍼봇 올리버에게 이웃에 사는 6세대 헬퍼봇 클레어가 방문한다. 고장 난 충전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다. 이를 계기로 두 헬퍼봇들은 인간들 사이에서나 있을 법한 ‘관계’를 형성하며, ‘사랑’이라는 감정까지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두 헬퍼봇들은 결국 결별을 선택하게 되고, 열린 결말의 마지막 순간을 대면한다.
N차 관람 이끈 팬덤 문화
한국의 뮤지컬 시장에서는 두세 달 공연 후 다음 시즌에 앙코르 무대가 꾸며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뮤지컬 환경에서 <어쩌면 해피엔딩>은 10년 동안 무려 여섯 차례나 앙코르 공연 시즌을 거듭하며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심지어 그 과정 중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도 있었다. 뮤지컬의 본고장인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도 그 시기 셧다운을 피하기 어려웠지만, 국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은 효과적인 감염 확산 대응으로 총체적 셧다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래서 해외 유수의 언론에서는 한국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령’이 살아남은 나라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페라의 유령> 오리지널 내한 공연이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완벽한 방역 통제 아래 막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물리적으로 혹독한 제한이 공연장에 적용되던 시절, 옆 좌석을 비우고 한 자리씩 떨어져 앉은 관객들은 응원이라도 하듯 뜨거운 눈빛으로 무대를 응시했고, 마지막 커튼콜에 등장한 배우들은 감동에 겨워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인기는 같은 공연을 여러 번 관람하는 ‘N차 관람’으로 확인됐다. N차 관객들은 공연을 보러가기 전,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을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2020년 첫 공연을 펼친 <마리 퀴리>는 실존 인물인 폴란드의 과학자 마리 퀴리의 삶에 상상력을 더해 구성한 작품이다. 2024년, 한국 뮤지컬 최초로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현지 프로덕션으로 장기 공연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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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점과 공통점
<어쩌면 해피엔딩>은 한국과 브로드웨이 버전에 몇 가지 차이가 있다. 두 작품은 막을 올린 환경에 맞춰 각각 진화했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언어다. 한국어가 영어로 바뀌며 크고 작은 변화가 더해졌다. 국내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뮤지컬 넘버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브로드웨이 버전에서는 지워졌다. 개발 초기부터 관객들의 정서나 문화적 차이를 고려해 영어 버전과 한국어 버전이 각기 다르게 만들어졌다는 후문도 있는데, 덕분에 더욱 효과적으로 객석에서 공감을 이끌어내고 소구할 수 있는 매력이 완성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극장 규모도 다르다. 한국에서는 300석 남짓한 소극장 뮤지컬로 인기를 누렸지만, 브로드웨이는 1,000석 규모의 벨라스코 극장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브로드웨이 관객들은 소극장에서 느낄 수 있었던 아기자기한 맛 대신 대극장의 시원시원하고 생동감 넘치는 스케일을 통해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버전은 몇 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 작품에서 화분은 무대의 오브제이자 두 헬퍼봇의 관계와 감정을 상징하는 캐릭터 역할도 맡고 있는데, 이러한 장치와 메시지를 살리기 위해 영어 단어 ‘플랜트’로 번역하지 않고 한국어 단어 ‘화분’을 그대로 사용했다. 두 주인공이 제주도 여행에서 경험한 반딧불이 서사도 그대로 유지됐다. 숲속을 가득 채운 반짝이는 반딧불이는 두 헬퍼봇의 아름다운 한때와 소중한 추억을 상징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브로드웨이에서도 N차 관람의 열기가 뜨거웠다는 사실이다. N차 관람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현상인데, 이들은 여러 차례 반복해서 관람하는 자신들을 ‘반딧불이’라고 부른다.
극단 연우무대의 창작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가상의 섬에서 벌어지는 군인들의 이야기를 뭉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2011년 신인 창작자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CJ문화재단 크리에이티브 마인즈에서 처음 선보였고, 2013년 초연 후 한국뮤지컬대상에서 극본상을 받았다.
연우무대 제공
한국 창작 뮤지컬의 미래
<어쩌면 해피엔딩>의 성과로 인해 이제 한국 뮤지컬은 제2, 제3의 ‘해피 엔딩’을 꿈꾸는 시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원소 라듐을 발견해 남편과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마리 퀴리의 일생에 상상을 더한 팩션 뮤지컬 <마리 퀴리>는 그녀의 고국인 폴란드 무대로 진출할 예정이며, 푸치니의 오페라를 한국식으로 각색한 뮤지컬 <투란도트>는 슬로바키아로 악보와 대본이 팔려나갔다.
또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외딴 무인도에 남겨진 한국군과 북한 포로들의 해프닝을 그린 <여신님이 보고 계셔>도 영미권 시장 진출을 앞두고 있고, <스웨그 에이지 외쳐, 조선!>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쇼케이스 무대를 선보이며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국 뮤지컬의 엔딩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까? 희망 섞인 미소로 대답해 본다. “어쩌면.”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지만,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를 국가 이념으로 설정하는 등 참신한 스토리와 뛰어난 연출로 2019년 초연 이래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국악 장단에 현대 음악을 결합한 뮤지컬 넘버와 화려한 안무도 압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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