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이 처음으로 간행된 시기는 1970년대다. 이때부터 현대시가 널리 읽히며 차츰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국내 출판문화의 양대 산맥이었던 창비와 문학과지성사는 각각 '창비 시선'과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반백 년 동안 꾸준히 발간하며 한국 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1978년 첫 시집을 낸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현재 620권이 넘는다. 시인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는 표지는 이 시리즈의 시그니처이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전 세계에서 한국처럼 시집을 많이 읽는 나라는 거의 없다. 오랫동안 사랑받아 독자들 입에 꾸준히 오르내리거나,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만 즐기는 게 아니다. 한국 독자들은 이제 막 나온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을 꾸준히 읽고, 때때로 수십 권씩 책장에 모으곤 한다. 거의 매년 신작 시집이 종합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서점에서 수시로 열리는 시인들의 낭송 콘서트엔 독자들이 빼곡히 몰려든다. 이에 부응해 출판사들도 열심히 시집들을 출간한다. 2024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유통된 시집 숫자는 무려 1만 3,611종에 달한다.
한국의 시집 출판이 얼마나 활성화되어 있는지는 서점에 가면 금세 알 수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서점인 교보문고는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있다. 여기엔 걷는사람,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민음사, 아침달, 창비, 천년의시작 등의 출판사가 펴낸 시집 시리즈들이 모여 있다. 마치 음반 회사의 레이블처럼 시리즈 각각엔 신작 시집들이 수십 권에서 수백 권씩 같은 디자인을 입고 나와 있다. 한때 시집 시리즈를 내는 출판사 숫자가 100여 곳을 넘었을 때도 있었다.
독일의 문예 비평가 발터 베냐민은 어떤 이념의 존재 형식을 밤하늘의 별자리에 비유했다. 뭇별들이 모여 별자리 하나를 이룩하듯 한국에서 각 출판사가 꿈꾸는 시의 이상은 시리즈 아래 뭉쳐진 수많은 시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하나의 시집은 제각각 ‘잘 빚은 항아리’이지만, 그들은 또한 모여서 시의 장엄한 장독대를 이룬다. 한국어는 언어의 마당에 늘어선 시의 항아리들 속에서 불멸의 힘을 쌓아가고 있다.
시의 대중화
한국에서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이 본격적으로 묶여 나온 건 1970년에 출판된 ‘현대시인선집’에서부터다. 한국시인협회가 기획한 이 선집엔 김광림, 박남수, 박재삼, 신석정, 이형기, 조병화 등 주로 순수 서정 계통의 시인들이 참여했으나, 오래지 않아 맥이 끊겼다.
시집 시리즈가 대중들의 지속적 독서와 수집 대상이 된 건 민음사에서 1973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세계시인선’과 1974년부터 간행한 ‘오늘의 시인 총서’부터다. 고은 시인이 한국어로 옮긴 『당시선』을 시작으로 매년 10~15권 정도 출간된 ‘세계시인선’은 괴테, 보들레르, 랭보, 워즈워스, 바이런, 푸시킨, 휘트먼, 엘리엇, 타고르 등 세계적 시인들의 대표작을 가려 뽑아 원문과 함께 수록했다. 1978년까지 모두 80권이 차례로 간행되었다. 이 시인선은 1990년대와 2010년대에 각각 장정과 판형, 그리고 수록 시집의 구성을 바꾸면서 개정돼 현재에도 출판되고 있다. 살아 있는 시집 시리즈 중에서 가장 오래된 셈이다.
‘오늘의 시인 총서’는 자유와 저항의 시인 김수영의 유고 시집 『거대한 뿌리』를 내면서 시작됐다. 이 총서는 현대성, 혁신성, 실험성이 돋보이는 시집들을 잇달아 펴내, 한국 시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김수영을 비롯해 김춘수, 고은, 김종삼, 황동규, 오규원, 정호승, 최승호, 황지우 등 현대 한국 시에 큰 업적을 남긴 시인들이 참여했다.
‘세계 시인선’과 ‘오늘의 시인 총서’의 성공을 계기로 문학 출판에서 시집 비중이 늘었고, 시의 대중화 현상이 비로소 자리 잡았다. 이어서 기획돼 나온 ‘창비시선’(1975년)과 ‘문학과지성 시인선’(1978년)의 영향이 컸다. 두 시리즈는 1970년대 중후반 각각 첫 책이 나온 이래, 지난 50년 동안 한 해도 쉬지 않고 꾸준히 시집들을 더하면서 한국 현대시의 우람한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2025년 7월 서울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문학과지성사 팝업 스토어 전경. 종이 박스로 제작한 부스에 시집을 비롯해 신간들이 진열돼 있다. 팝업 스토어는 최근 출판사들의 주요 마케팅 전략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1978년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시작으로, 올해 7월에 621번째 시집이 나왔다. 국내에서 가장 큰 시집 시리즈이고, 전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이와 짝패를 이루는 ‘창비시선’의 규모도 만만치 않다. 이 시선은 1975년 신경림의 『농무』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모두 521권이 출간됐다. 두 시집 시리즈는 2000년대 초까지는 시적 경향에서도 서로 뚜렷이 대비되면서 한국 시의 지형을 풍성하게 만들어 왔다.
문학의 사회 참여
‘창비시선’은 현실 변혁 의지와 사회 비판 의식을 내세우면서 민중적 서정성을 담은 시집들을 주로 출판해 왔다. 예컨대 신경림의 『농무』는 한국 농촌의 척박한 현실과 고단한 삶, 농민들의 분노와 슬픔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로써 오랫동안 초월의 세계에 머무르던 한국 시의 언어가 현실적 구체성과 민중적 생동성을 회복했다.
초기에 이 시선에 참여한 시인들은 문학의 사회 참여를 내세우면서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 의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고취하는 한편, 민중의 아픔과 저항 의지를 소박하면서도 정감 넘치는 언어로 그려냈다. 『새벽길』(고은),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저문 강에 삽을 씻고』(정희성), 『사상의 거처』(김남주), 『섬진강』(김용택), 『참된 시작』(박노해), 『초혼제』(고정희)는 초기 ‘창비시선’을 대표하는 시집들이다.
‘문학동네 시인선’은 다른 출판사들에 비해 출발이 늦었지만, 대담하고 간결한 디자인으로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24년에는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문구 편집숍 포인트오브뷰와 함께 팝업 스토어를 열어, 스페셜 리커버 시집 3종을 선보였다.
포인트오브뷰 제공
1990년대 이후 ‘창비 시선’은 이념이 붕괴하고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노골화하는 시대 흐름에 맞추어 조금씩 변화해 갔다. 민중적 서정성의 영역을 도시 생활에까지 확장하고, 생태주의나 여성주의도 적극 수용했다. 『가만히 좋아하는』(김사인),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김선우), 『어두워진다는 것』(나희덕), 『맨발』(문태준), 『그리운 여우』(안도현),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정호승),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함민복) 등은 이 시기 창비를 대표하는 시집들이다.
실존에 대한 성찰
약 40년의 역사를 지닌 ‘민음의 시’는 민음사를 대표하는 브랜드 중 하나로, 실험적인 시 세계를 펼쳐 보이는 시인들의 시집을 출간하며 다른 출판사들과 구분되는 색깔을 견지해 왔다
민음사 제공
민중주의를 내세운 ‘창비시선’과 달리,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아방가르드 정신을 바탕으로 개인의 내면과 실존에 관한 성찰, 언어에 대한 탐구에 집중했다. 이 시리즈는 “시가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고 묻지 않고, “시는 무엇이며, 언어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초기 이 시인선에 참여한 시인들은 정치적∙사회적 폭력, 전통과 관습의 억압 등에 대한 성찰을 문법의 해체, 양식의 파괴 등 언어의 혁신을 통해 보여주는 한편, 산업화한 도시에서 새롭게 나타난 감각 세계를 시 안에 끌어들였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이성복), 『이 시대의 사랑』(최승자),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 『불쌍한 사랑 기계』(김혜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황인숙), 『잎 속의 검은 잎』(기형도) 등이 이 시기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대표하는 시집들이다.
2000년대 이후에도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그 정신을 잃지 않고, 한국 시의 언어적 혁신과 전위적 첨단을 개척해 왔다. 『수학자의 아침』(김소연), 『이별의 능력』(김행숙), 『생물성』(신해욱), 『슬픔이 없는 십오 초』(심보선),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이원),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진은영), 『혼자 가는 먼 집』(허수경), 『육체쇼와 전집』(황병승) 등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시집들이다.
새로운 서정의 언어
2010년 이후, 시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두 시리즈를 넘나드는 시인들이 늘어났다. 언어의 혁신이 감각의 혁신으로, 감각의 혁신이 인식의 혁신으로, 인식의 혁신이 현실의 혁신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두 시리즈 모두 자유롭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강조하고, 감각적 언어 실험과 새로운 서정의 언어를 결합한 시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창비 시선’에선 안미옥, 안희연, 최지은 등이, ‘문학과지성 시인선’에선 서윤후, 유희경, 임솔아, 이제니 등의 시집이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 밖에도 한국에는 시리즈 시집들이 넘쳐난다. 민음사에서 1987년부터 펴내기 시작한 ‘민음의 시’는 현재까지 334권이 나와 있다. 개성적이고 실험적인 시를 우선하는 이 시집 시리즈엔 김영승, 문보영, 성미정, 성동혁, 안미린, 양안다, 오은, 장정일, 최승호, 황인찬 등의 시인이 참여했다.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창비와 함께 한국 문학 출판을 주도하는 문학동네에서도 2011년부터 ‘문학동네 시인선’을 펴내면서 시집 출판에 뛰어들었다. 이 시인선은 현재까지 238권이 나와 있는데, 무엇보다 2010년대 이후 한국인의 일상과 감성을 새로운 서정의 언어로 담아내는 시도를 꾸준히 선보이는 게 특징이다. 김경주, 김현, 김민정, 박준, 신철규, 이원하 등이 이 시집에 참여했다. 이 외에 천년의시작이 내고 있는 ‘시작시인선’(539권), 걷는사람의 ‘걷는사람 시인선’(126권), 아침달의 ‘아침달 시집’(51권) 등도 한국 시라는 거대한 우주에서 중요한 별자리를 이루고 있다.
창비는 2024년 4월, ‘창비시선’ 500호 출간을 기념해 서울 망원동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었다. 시에 어울리는 향과 음악을 추천하고, 한정판 굿즈를 판매하는 등 독자들이 시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체험 공간을 제공해 큰 인기를 끌었다.
창비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