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Past Series

미래의 꿈, 현실과 만나다

Past Series 2025 SUMMER

미래의 꿈, 현실과 만나다 『네 이웃의 식탁』 구병모 작, 김지영 번역 와일드파이어, 2024 224쪽, 14.99 파운드 미래의 꿈, 현실과 만나다 구병모의 『네 이웃의 식탁』은 정부의 저출산 해결 프로젝트 사업에 참여한 네 커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녀 셋을 낳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서약을 하면 실험공동주택에 입주할 수 있게 해주는 사업이다. 요진과 남편 은오가 네 번째 입주 부부로 공동주택에 들어오면서, 독자들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이 커뮤니티의 모습을 처음 마주하게 된다.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이라는 희망적인 이름과 달리, 이곳 입주민들 사이에는 이미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공동주택 반장 역할을 자처하는 단희는 쾌활하고 적극적이지만, 이웃에 대한 관심이 간섭과 참견으로 이어질 때도 있다. 출산 직후 동화책 그림 그리는 일에 복귀한 효내는 남편이 출근한 사이 아이를 돌보며 마감에 시달리고 있다. 공동체 생활에 참여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여산과 교원 부부는 그들만의 문제가 있지만, 작은 공동체에서 비밀이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그 가운데 새로 합류한 요진과 은오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커플로, 요진은 ‘직장맘’이고 은오는 전업 아빠다. 단희의 남편 재강의 차가 고장 나자, 은오가 요진과의 카풀을 제안하면서 부담스러운 상황이 연출된다. 출퇴근길을 함께하게 된 재강은 요진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꾸 선을 넘으려 하고, 요진은 자신의 판단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서울의 높은 집값, 최저 수준의 출산율, 정부의 어설픈 대응 등 현대 한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을 조명한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사회적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인간적 질문들의 틀에 불과하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전통적인 성 역할에 따라 사회가 아버지 또는 어머니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아이를 낳은 후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요진의 친구들이 말하듯, 정말 아이를 낳아야만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며, 그 이전까지는 그저 ‘소꿉놀이’에 불과한 것인가? 생물학적 요인과 문화적 요인이 서로 얽히고설켜 인물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지만, 그 원인이 정확히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작품 속의 공동체는 마치 현미경 아래 놓인 페트리 접시와 같다.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이 고립된 공간에 모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리 좋은 의도로 시작했더라도, 곧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입주자들은 과연 그 균열을 메꿀 수 있을까? 아니면 균열이 점점 깊어져 그들이 섬세하게 쌓아올린, 취약한 세상을 뒤흔드는 단층선으로 변하게 될까? 중대한 사회 문제로 인해 아무리 상황이 심각하다 해도, 사회란 결국 개인과 개인이 함께 만들어가는 곳이다. 구병모 작가는 거시적인 한국 사회와 미시적인 공동체의 삶을 동시에 들여다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성인으로 산다는 것, 부모가 된다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무한화서』 이성복 작, 안톤 허 번역 앨런레인, 2023 176 쪽, 18.00 달러 시의 거장이 들려주는 시와 삶에 대한 성찰 이성복의 『무한화서』는 창작 수업 중 470개의 아포리즘을 학생들이 정리하여 담은 책이다. 깊은 성찰을 통해 얻은 지혜의 글을 통해 저자는 종교, 철학, 스포츠, 과학, 수학 등 다른 분야들을 인용하면서 은유와 비유를 통해 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은 언어, 사물, 시, 글쓰기, 삶이라는 다섯 주제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시에 대한 저자의 일관된 생각이 그 기저에 흐르고 있다. 즉, 시란 의도적 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 미묘한 사유가 드러나며, 저자는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도 매번 다른 관점과 시선을 보여준다. 각각의 아포리즘은 빗방울처럼 잠깐 스쳐 지나가지만, 쌓이고 쌓여 결국 바위를 뚫는 물방울처럼 깊은 울림을 남긴다. 특히 마지막 장에는 시와 무관해 보이는, 그러나 어쩌면 가장 시적인, 인생의 지혜들이 담겨 있다.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야 독자는 그 여정이 ‘언어’에서 ‘삶’으로 곧게 이어지는 직선이 아니라,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하나의 원형임을 깨닫게 된다. 한 번 읽으면 저자의 시 철학을 엿볼 수 있고, 차분히 여러 번 읽다 보면 더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 역성 > 이승윤, CD,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마름모, 2024 불합리한 세상을 향한 포효 이승윤은 2011년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이후 인디 음악계에서 활동했다. 그가 대중적 인지도를 얻게 된 건 JTBC가 2020년부터 방영하는 예능 프로그램 의 초대 우승자가 되면서부터다. 브릿팝, 하드록, 헤비메탈, 펑크 록에 이르기까지 날것의 재료들을 도마에 올려 난도질한 뒤 특유의 한국어 말맛을 뒤섞는 게 그의 음악적 레시피다. 2024년 발매한 정규 3집 은 싱어송라이터로서 그가 걸어온 여정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실존주의 철학 용어를 가져온 가사들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폭풍처럼 질주하는 록 템포에 올라타 활어처럼 펄떡인다. 그가 쓰는 가사는 대체로 호전적이다. 싸움의 대상은 자기 자신과 세계다. 그는 세상이 제시하는 진리와 삶의 방식, 성공 방정식에 대해 끝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고개를 흔든다. 15곡이 실려 있는 이 앨범은 64분에 이르는 대장정이다. 타이틀곡 은 사납게 포효하는 보컬과 밴드 사운드에 산뜻한 현악을 가미해 ‘처박혀 버린 얼’과 ‘짓밟힌 넋’을 되찾는 역성혁명을 이루겠다고 천명한다. 앨범은 중반부 어쿠스틱 팝 발라드에서 야성적 펑크 록을 지나 후반부쯤 6분이 넘게 몰아붙이는 에서 하이라이트에 도달한다. 부드럽게 시작해 광기 어린 드럼의 질주로 치닫는 마지막 곡까지 이 앨범은 이승윤이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물게 굵은 붓과 커다란 캔버스를 쓰는 아티스트임을 입증한다. 다양한 음악적 색깔을 자기 식대로 쌓아 올려 큰 그림을 그려 내는 앨범 지향형 음악가 말이다. 이승윤은 이 음반으로 2025년 열린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음악인, 최우수 록 노래, 최우수 모던록 노래 3개 부문의 트로피를 안으며 3관왕에 올랐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임희윤 음악평론가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내다

Past Series 2025 SUMMER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내다 구정아는 일상의 평범한 재료들을 깊은 감각적 경험으로 탈바꿈시킨다. 전통적인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을 통해,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탐색하고 예술이 공간 및 공동체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열린 전시 전경. 구정아의 세계관이 담긴 검은 형상의 작품 우스(OUSSS)가 2분에 한 번씩 입으로 향을 내뿜는다. Courtesy of Pilar Corrias, London, and PKM Gallery, Seoul, Photo Mark Blower. “그저 평범한 것은 없다.” 이것은 구정아 작가의 핵심적인 예술 철학이다. 일상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접근하며,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요소들을 천천히 관찰하면 깊은 연결성을 발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의식의 가장자리를 맴도는 듯한 그녀의 작업은 ‘부재’를 ‘존재’만큼 중시하는 한국 전통 미학과도 맞닿아 있다. 수묵산수화나 사찰 건축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원리다. 구정아는 빛, 공간, 향 등의 요소를 조용히 녹여내 인위적인 경계를 허물어 낸다. 평범함의 오케스트레이션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난 구정아는 경제학자인 아버지를 통해 가치와 교환의 개념을, 전업주부였던 어머니를 통해 일상 공간에 깃든 감성을 배웠다.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서 유학한 후, 서구 중심적 예술 담론을 넘어 한국 작가들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던 전환기에 예술계에 등장했다. 그녀가 주목받게 된 1996년 작품 은 파리의 한 아파트에 좀약을 전략적으로 배치한 설치 작품이었다. 관람객은 시각적으로 작품을 인지하기 전에, 먼저 할머니의 장롱을 연상케 하는 특유의 향을 통해 작품을 조우하게 된다. 같은 해 발표한 에서는 아스피린 가루에 푸른 빛을 비추어 미니어처 산봉우리와 계곡으로 변신시켰다. 이처럼 일상을 사유의 대상으로 전환하는 감각은 이후 구정아의 작업에서 대표적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초기 실험을 통해 구정아는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 언어를 확립했다.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찰나의 요소들을 활용해 공간을 살아나게 한다. 서구 미술에서 나타나는 시각 중심적 접근법에 도전하며, 미(美)가 명확함에서 비롯되기보다 예측 불가능한 구성 속에서 맺어지는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녀의 작업은 감각의 재조정을 유도하는 경험을 만들어 내며, 일상적인 재료와 순간들 속에 깃든 특별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만든다. 많은 현대 미술가들이 규모와 기술적 완성도로 관객을 압도하는 반면, 구정아의 의도적으로 절제된 미학은 빠르게 소비되는 오늘날의 시각문화 속에서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사색적인 몰입을 가능하게 한다. 그녀의 독창적인 예술 언어는 많은 미술관의 주목을 받았고, 2002년 구겐하임 미술관의 휴고 보스 상 최종 후보까지 올랐다. 같은 해 열린 전시 <3355>에서 그녀는 빈 제체시온 갤러리 안에 24시간 머물며 수백 개의 담배를 꼼꼼하게 쌓아 올렸다. 담배꽁초, 비닐 포장지, 개인 물건 등 그녀가 남긴 자취들은 차가운 흰 벽과 인간의 존재가 충돌하는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 냈다. 뉴욕 이봉 랑베르 갤러리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작업이 이어졌다. 텅 빈 듯한 공간 안에 미니어처 기념비처럼 정리된 동전 더미, 거의 느끼지 못할 속도로 회전하는 흰 원통, 불규칙하게 빛을 흩트리는 유리 결정들이 숨겨져 있었다. 이처럼 섬세한 작업들은 훗날 그녀가 빛과 물질을 정교하게 다루며 공공 공간을 변화시킨, 보다 대담한 작업들의 출발점이 되었다. ‘OUSSS’와 조명 구정아는 1998년부터 ‘Ousss’라는 개념을 탐구해 왔다.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장소이면서 장소가 아닌 곳, 세계이면서 세계가 아닌 곳,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존재”이다. 이 신조어는 그녀의 설치 작업, 드로잉, 텍스트 속에서 ‘Oussser’, ‘Ousssology’ 등 다양한 형태로 확장되어 왔다. 2007년에는 카리브 철학자 에두아르 글리상과 『Flammariousss』를 출간했는데, 표정 없는 여러 인물들을 통해 Ousss의 본질을 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Ousss는 2017년 아트선재센터 개인전 에서 다시 한번 진화했다. 이 전시에서는 와 라는 제목의 흑백 3D 애니메이션이 공개되었는데, 태아를 연상시키는 존재들이 우주를 유영하듯 헤엄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후 함께 전시된 2010년 작 < Dr. Vogt > 시리즈는 형광 핑크빛 조명이 비추는 바닥 위에 파란색 펜으로 그린 드로잉이 걸려 있는 작품이다. 관람객을 낯선 시각적·지각적 세계로 안내하며, 단순화된 캐릭터의 움직임과 외딴섬의 풍경이 몽환적이고 독창적인 서사를 만들어 낸다. 2020년 PKM 갤러리에서 열린 < 2020 > 전시 전경. 이 전시에서 선보인 인광 회화 시리즈 < 7개의 별들(Seven Stars) >은 조명이 사라지는 순간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3차원 공간을 연출한다. 화이트 큐브라는 제한된 공간 너머 낯선 세계를 감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한편 2020년 서울 PKM 갤러리에서 선보인 <7개의 별들(Seven Stars)> 시리즈는 구정아가 현실 자체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시장 조명 아래서는 흰 캔버스로 보이지만, 불을 끄는 순간 형광빛을 내는 초록색 별자리 패턴이 드러난다. 고정된 한순간이 아니라 다양한 시간의 변화 속에서 경험해 봐야 하는 작품이다. “별이 보이지 않는 낮에도 별은 존재하는 것일까?”라는 존재와 부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국 철학은 오래전부터 존재와 부재의 상호보완적 관계에 주목해 왔으며, 이러한 개념은 의도적인 빈 공간을 통해 주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여백’이라는 미학의 원칙으로 표현되고 있다. 2020년 부산비엔날레 참여 이후, 구정아는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 김혜순에게 예술적 영감을 받아 <7개의 별들> 시리즈를 발전시켰다. 김혜순의 추상적 은유들은 구정아의 표현에 의하면 “낯선 경험”을 더했고, 그녀의 작업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학제 간 교류는 구정아가 시각 예술의 경계를 넘어 끊임없이 작업의 영역을 확장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 Density >. Koo Jeong A. 2023. Polyamide, paint, wood, magnetic levitation device. 126.3 × 43.6 × 60.8 ㎝. 2023년 PKM 갤러리에서 열린 < 공중부양(Levitation) >전의 한 축을 이루는 작품 < Density >. 중력을 거스르며 부유하는 이 조각 작품은 관람객들에게 압도적인 시각적 경험을 제공했다. Courtesy of the artist & PKM Gallery 공공미술, 변화를 이끄는 촉매 구정아의 혁신적인 시선을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은 아마도 야광 스케이트 보드장일 것이다. 낮에는 평범한 콘크리트 구조물처럼 보이지만, 밤이 되면 빛을 내며 신비로운 풍경으로 바뀐다. 2008년 프랑스 외곽에 설치된 첫 번째 프로젝트 < ORTO >는 곡선형 콘크리트 구덩이와 경사로가 자연 지형에 일부 묻힌 형태로, 원래의 수평선을 보존하면서도 지역 주민들을 위한 실용적인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녀는 2015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이 작업은 망자를 빛으로 감싸는 일과 같다.” 고 설명했다. 한국의 장례 문화에서 빛은 ‘끝’이 아닌 ‘이행’을 상징함을 떠올리게 한다. 존재와 부재의 순환에 대한 전통적 지혜를 현대적으로 담아낸 시적인 해석을 통해, 새로운 여가 공간이 탄생하게 되었다. 리버풀의 에버튼 파크 설치 작업은 그녀의 작업이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 청소년들과 스케이트보더 커뮤니티와의 방대한 협업을 통해 진행되었으며, 약 3미터 깊이의 구덩이를 갖춘 영국 내 최대 규모 스케이트 보드장 중 하나가 완성되면서 한때 소외되었던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기억 구정아의 예술은 감각의 경계를 넘나든다. 특히 후각에 대한 탐구는 기억의 연결망을 탐색하는 데 완벽한 매개가 되었다. 뇌과학 연구에 의하면, 후각은 의식적인 사고를 거치지 않고 감정과 연결된 뇌 영역에 직접 작용한다. 냄새를 하나의 예술적 소재로 삼으려는 구정아의 관심은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2016년 작 는 동굴 같은 공간 안에 퍼지는 침향의 복합적인 향을 통해 잊힌 과거의 여행객들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폐쇄된 런던 지하철 플랫폼을 새로운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열린 < 구정아 – 오도라마 시티 > 전시 전경. 향을 주제로 한 이 전시는 후각과 시각의 공감각을 통해 감각적 경험의 확장을 제시했다. Courtesy of Pilar Corrias, London, and PKM Gallery, Seoul, Photo Mark Blower. 이러한 실험들은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을 위해 제작된 에서 완성된다. 집단적 기억을 탐구한 구정아의 프로젝트 중 최대 규모이다. 한국적 정체성을 하나의 서사로 규정하기보다는 한국인, 이민자, 입양인, 외국 방문객, 탈북민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향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600건 이상 담았다. 국내 향수 브랜드 논픽션(NONFICTION)과 협업하여 이 이야기들을 17가지 향으로 개발해 한국의 ‘향기 풍경’을 만들어 냈다. 미니멀한 전시관 공간 한가운데에는 뫼비우스의 띠 형태로 만든 나무 벤치가 놓였다. 관람객들은 그곳에 앉아 할머니의 집, 밤공기, 목욕탕의 냄새를 떠올리게 하는 향을 맡으며 작품에 빠져들었고, 비어 있는 듯했던 공간은 어느새 모두가 공유하는 문화적 기억이라는 보이지 않는 차원으로 바뀌었다. 경계를 넘어서 구정아는 국가 정체성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기보다는, 물질성과 인식에 대한 폭넓은 담론을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녀가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고유한 미학적 전통과의 연결성을 유지하면서도 특정 문화에 고정되지 않는 초월적인 경험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초상을 그리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에서 향기 풍경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었어요.” 그녀는 『아트리뷰(ArtReview)』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작업을 통해 국가 간 분열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대’와 ‘함께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국가 분단이라는 가슴 아픈 현실 속에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 구정아의 방식은 경직된 정치적 경계를 넘어서는 강력한 대안을 제시한다. 그녀의 작업은 정체성과 소속이라는 복잡한 문제들을 예술적으로 탐색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2024년 말 가 서울 아르코미술관에 소개되었을 때, 구정아는 전시장 곳곳에 아이보리 색 배너를 설치하고 개인적 서사에서 발췌한 문장들을 담았다. 집단적 기억을 시각적으로 구현함으로써, 향수를 자극하는 기억의 조각들을 지리적·정치적 분열을 넘어선 공동의 경험에 대한 깊은 사유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방식은 참여미술이 전통적인 작가성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현대 미술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서울 아르코미술관에서 2024년 12월부터 2025년 3월까지 열렸던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귀국전 < 구정아 - 오도라마 시티 > 설치 전경. 아르코미술관 제공, 사진 고정균 또한 구정아의 접근법은 유럽과 미국 미술관들이 비(非)서구 작가를 바라보는 방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전 세대의 한국 작가들이 종종 국가 정체성이라는 틀 속에서 해석되었다면, 그녀의 작업은 개념적 깊이와 감각적 경험 자체에 기반해 평가받고 있다. 최근 프로젝트에서는 과학적·철학적 탐구에 대한 더욱 깊은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2023년 서울 PKM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에서는 중력, 변성암, 물리 세계의 근원적인 힘 등을 주제로 삼았다. 88, 518, 625, 911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숫자를 제목으로 붙인 마그넷 조각 작품을 통해, 집단적 기억을 나타내는 이러한 숫자들이 물리적 배열에 따라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는지 관객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했다. 구정아는 이탈리아의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를 자주 인용한다. 로벨리는 양자중력 연구와 ‘시간’과 ‘실재’의 본질에 대한 대중적인 책들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로벨리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관계가 먼저입니다. 우주는 존재의 상태에서 관계의 구조로 변화했습니다.” 그녀는 현재 하우스 데어 쿤스트 뮌헨(2025), 아스펜 뮤지엄(2026), 리움 미술관(2026) 전시를 준비 중이며, 그녀의 작품에서는 여전히 에두아르 글리상(Édouard Glissant)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글리상이 말한 ‘관계의 시(poetry of relations)’, 즉 투명성과 보편성을 지양하고 불투명성과 다양성을 지향하는 세계관을 담고 있다. 구정아의 작업은 미(美)가 명확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구성 속에서 역동적으로 맺어지는 관계 속에서 탄생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온전함에 대한 고찰

Past Series 2025 SPRING

온전함에 대한 고찰 『희랍어 시간』 한강 작, 데보라 스미스, 원 에밀리 애 번역 펭귄북스, 2024 160쪽, 9.99 파운드 온전함에 대한 고찰 우리는 서로 대화하고 주변 세상을 보는 능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능력이 없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예를 들어,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과연 생각할 수 있을까?『희랍어 시간』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의 실어증으로 인해 ‘뿌연 침묵’에 휩싸인다. 말을 찾게 되었지만, 이후 부분적으로 다시 실어증을 앓게 된다. 듣고 읽을 수는 있지만, 말을 할 수는 없다. 주인공은 다시 한번 침묵이라는 껍질에 싸여 주변 세계와 단절된다. 여기에 한 젊은 남자의 이야기가 주인공의 이야기와 엮이며 전개된다. 그는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다가 17년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결국 앞이 안 보이게 될 운명이다. 가족들은 그의 귀국을 반대하고 걱정하지만, 그는 독일 유학 시절 배운 고대 희랍어를 가르치는 아카데미 강사로 생계를 이어간다. 말할 수 없는 여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언어를 통해 언어와 다시 연결되고자 남자의 수업을 듣는다. 서로와 온전히 소통하지 못한 채 이렇게 한 공간을 오가다가, 우연한 사고로 인해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가장 표면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희랍어 시간』은 상실에 대한 고찰이다. 주인공들은 그들의 신체적 능력을 잃어가는 것 외에도, 소중한 사람의 상실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낸다. 여자는 얼마 전 이혼하고 전 남편에게 양육권을 빼앗긴 후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괴로워한다. 남자는 독일에 있던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고,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폭력과 실연을 당한 기억에 시달린다. 이미 잃어버렸거나 약화되고 있는 그들의 능력(즉 주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은 산산조각난 관계를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의 기저에는 ‘온전함’에 대한 질문이 자리 잡고 있다. 이제는 죽고 없는, 남자의 친구 요아힘은 역시 신체적 아픔이 있었다. 그는 한때 “매 순간 죽음과 마주하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삶에 대해 가장 잘 성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온전함의 의미를 가장 잘 관조할 수 있는 이들은 자신의 중요한 일부를 상실한, 그리고 세상과의 연결을 잃어버린 사람들일지 모른다. 상실과 결핍이라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희랍어 시간』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오랫동안 서로를 맴돌던 여자와 남자가 마침내 함께하게 되었을 때, 미래는 가능성으로 가득 찬 듯 보인다. 주인공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손쉬운 해결책이나 간단한 해피엔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내일은 오늘보다 더 밝아 보인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김수현 작, 안톤 허 번역 펭귄북스, 2024 272쪽, 28.00 달러 “네 잘못이 아니야” 스스로를 위로하는 법 김수현은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 잘못이 아니라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떠난 여정 끝에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가 탄생했다. 부제는 ‘어른살이를 위한 체크리스트’라고 되어 있지만, 저자는 기존의 답답한 규칙 대신 또 다른 규칙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저자는 확실한 한국적 관점에서 한국 독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써내려가면서, 유교적이고 집단주의적인 한국 사회를 개인주의적인 서구 사회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얼핏 마치 외부인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다행히도 실제는 그렇지 않다. 외국인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사실 저자의 조언 대부분은 보편적인 내용이다. 문화적 차이는 존재하지만, 사람은 결국 사람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누구나 희망, 두려움, 꿈, 불안을 느낀다. 어떤 것도 단순한 흑백논리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집단주의나 개인주의 같은 꼬리표는 사회 전반에 대해 적용하기에는 편리한 표현일 수 있지만, 개개인에 대해서는 그 특징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가리는 결과를 낳는다. 분명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 매몰되어 그로 인한 신경증에 시달리는 이 시대를 위한 것이다. 독자들은 출신 국가에 상관없이 현대 사회의 부담감을 해소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 2 > 미역수염(Seaweed Mustache), CD, 김밥레코즈(Gimbab Records), 2024 창의적 콜라주 미역수염은 2014년 결성된 부산 출신의 4인조 록 밴드다. 2016년 발매한 미니 앨범 < The Whistle >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2022년 정규 1집 < Bombora >가 록 마니아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 무렵부터 한국의 헤비한 록 음악을 대표하는 밴드로 급부상했다. 두 번째 정규 음반 <2>는 1집에서 들려준 청각적 풍경을 확장시킨 명작이다. 음반 전체가 마치 성나게 덮쳐오는 파도 같다. 이 앨범의 주된 재료는 슈게이즈, 포스트메탈, 블랙게이즈 같은 장르들이다. 44분 동안 진행되는 여덟 곡에는 흉측한 불협화음과 황홀한 멜로디, 불분명한 노이즈와 선명한 속주(速奏)가 온통 뒤섞여 있다. 공존하기 힘들 듯한 이질적 요소들이 합체해 이율배반의 괴력을 뿜어낸다. 기타, 베이스, 드럼의 격렬한 총진격은 종종 가녀리게 끊어질 듯 미려한 곡선을 그려내는 보컬 멜로디를 만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포옹한다. 형이상학적 묘사, 서사, 나열로 점철된 불가사의한 영어와 한국어 가사도 흥미롭다. 첫 곡 < FALL >은 미역수염의 미학을 압축한 서곡이다. 광야를 울릴 듯한 공간감 속에서 베이스와 드럼의 느린 통타(痛打)로 시작되는 노래다. 남성과 여성의 보컬을 통해 전달되는 무기력한 멜로디가 분출하는 사운드 위로 황홀하게 짓이겨진다. 묵직한 리듬, 기타의 격정적인 트레몰로 연주, 한껏 증폭돼 지글거리는 노이즈가 멜로디 위로 불꽃놀이처럼 떨어진다. 이어지는 곡 < HEX >는 또 다르다. 듣는 이를 옥죄는 기타의 불협화음, 노랫말을 툭툭 랩처럼 뱉는 여성 보컬과 살벌하게 으르렁거리는 남성 보컬이 교차하며 새롭고 기이한 모자이크를 만든다. 후반부에 분출하는 고음의 기타 트레몰로 멜로디는 공포 영화의 기막힌 반전(反轉)처럼 기능한다. 극단적 음악을 구사하는 미역수염에게도 발라드 같은 노래가 있을까? 처연하기 이를 데 없는 여섯 번째 곡 < SWEETHOME >이 그 답이다. 판소리라는 소재에 한국적 한(限)의 정서를 버무린 임권택 감독의 1993년 개봉작 < 서편제 >가 만약 30여 년 만에 리메이크된다면? 그리고 그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이가 의 나홍진이나 < 파묘 >의 장재현 감독이라면? 그 주제가로 추천할 만한 트랙이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임희윤음악평론가

경계를 넘어: 여성 작가들, 동시대 미술을 다시 빚어내다

Past Series 2025 SPRING

경계를 넘어: 여성 작가들, 동시대 미술을 다시 빚어내다 한국 현대미술은 팬데믹 이후 국제 미술계에서 존재감을 크게 더해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새로운 세대에 속하는 한국 여성 작가들은 현재 전 세계 주요 미술기관과 갤러리로부터 전례 없는 관심을 받고 있다. 이들은 지리적 국경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각자의 시각으로 동시대의 화두를 살핀다. 기술과 인간 취약성의 관계, 디아스포라 상황에서 문화적 전통의 변화, 디지털 시대 정체성의 유동성과 같은 주제를 고유한 시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이미래, 제이디 차, 정금형은 이러한 보편적 주제들을 혁신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2024년 영국 테이트 모던 터빈홀에서 열린 이미래의 < Open Wound > 전시 전경. ⓒ Tate, Photo by Larina Fernandes 지금 한국 동시대 미술은 젊은 세대의 여성 작가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전 세계 미술계의 변화와도 맞물린다. 최근 주요 미술 기관들은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에 다양성을 더하고 있으며, 글로벌 미술 시장의 확장으로 젊은 목소리에 전에 없던 기회가 주어졌다. 한국의 문화 위상이 올라가면서, 이와 함께 젊은 세대의 한국 여성 작가들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마련된 셈이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작가들은 한국의 민주화와 개방의 혜택을 받으며 자났다. 따라서 이전 세대와는 뚜렷이 다른 청년기를 겪었고, 이러한 변화가 그들의 예술적 표현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세대의 젊은 작가들은 젠더, 환경, 문화 정체성과 같은 현대적 이슈를 혁신적으로 다루는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그들의 고유한 예술적 언어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 관객들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미래 지금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한국의 젊은 작가 중에는 유학 등 외부의 경험보다 한국 또는 현지의 문화적 환경이 빚어낸 인재들이 많다. 이미래는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폭넓은 국제적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녀가 모든 정규 미술 교육을 한국에서 이수했다는 점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이미래 작가가 맡은 2024년 테이트 모던 터빈홀 커미션은 한국 동시대 미술에 새로운 장을 써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래는 이 프로젝트에 선정된 첫 번째 한국인 작가이자 역대 최연소 작가이기도 하다. 터빈홀에 설치된 < Open Wound >는 기계 시스템과 유기적 형태가 융합되어 터빈홀이라는 기념비적 공간을 맥박이 뛰듯 강렬한 감각을 자극하는 환경으로 변모시킨다. 이 작품은 이미래 작가를 더욱 널리 알린 계기가 된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와 MMK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개인전 < 봐라, 나는 사랑에 미쳐 날뛰는 오물의 분수 >(2022)에서 전개한 주제를 확장한다. 산업 자재와 키네틱 요소로 구성된 이미래의 작품은 폭력, 취약성, 욕망을 탐구하며 강렬하고도 깊이 있는 환경을 창출한다. 흘러내리는 액체와 유기물이 두드러지는 이미래의 설치 작업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런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선 엄청난 기술적 정밀함이 요구된다. MMK 프랑크푸르트에서 선보인 작업은 차가운 콘크리트와 키네틱 요소로 강렬한 신체적 감각을 불러일으키면서 이러한 대조를 잘 보여준 바 있다. 테이트 모던에서는 과거 발전소였던 기념비적 공간을 변형하여 산업적 요소와 유기적 면모 사이의 긴장감을 한층 더 고조시킨다. 산업 시설로 쓰이던 크레인에 매달린 7미터 길이의 터빈은 촉수처럼 보이는 실리콘 튜브와 한 몸으로, 체액을 연상케 하는 끈적한 적갈색 액체가 흘러내린다. 터빈홀은 산업 건축과 유기적 형태가 결합된 하이브리드 환경이 된다. 이는 액체를 흡수하고 건조시킨 직물로 이뤄진 ‘스킨’을 통해 더욱 강조되며, 산업적으로 생산되는 동시에 살아있는 듯 계속해서 진화하는 설치를 만들어낸다. 이미래의 < Open Wound > 전시회장에 설치된 작품 일부. 이번 전시로 이미래는 터빈홀에서 작품을 선보인 역대 최연소이자 한국 첫 미술가가 됐다. ⓒ Tate, Photo by Oliver Cowling with Lucy Green 정금형 정금형은 국내외에서 동시에 경력을 쌓아가는 새로운 세대의 한국 작가들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들은 먼저 현지에서 입지를 다진 뒤 세계 미술계로 활동 범위를 넓히기보다, 두 영역을 병행하며 경력을 쌓아간다. 2018년 서울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연 정금형은 쿤스트할레 바젤(2019)과 이탈리아 모데나 시각예술재단(2020) 전시를 통해 단기간에 국제 미술계에서 존재감을 확고히 했다. ICA 런던에서 최근 열린 전시 < under construction >(2024)은 이처럼 동시적인 궤적의 또 다른 중요한 이정표를 남겼다. 작가는 기계 부품과 결합된 인체 골격 모델들을 선보이며 유기적 형태와 기술적 형태의 경계에 대한 탐구를 이어갔다. 의료용 마네킹, 산업용 로봇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인간과 기계 신체 사이에 기이한 관계가 창조되는 것이다. 2018년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정금형의 < 스파 & 뷰티 서울 > 전시 전경. Courtesy of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Photo by Kanghyuk Lee 정금형은 기계를 추상적 시스템으로 다루는 대신 전시를 확장하는 퍼포먼스를 펼침으로써 친밀하면서도 불안감을 자아내는 관계를 발전시킨다. ICA에서 선보인 설치는 퍼포먼스에서 남겨진 흔적, 재료들과 함께 전시 공간에 놓인 하이브리드 오브제들을 보여주었다. 전시 기간 중 일정에 맞춰 진행된 퍼포먼스는 이러한 오브제들을 단순한 대상이 아닌 공동 수행자로 활성화하며, 인간과 기계 사이의 육체적 관계에 대한 탐구를 더욱 심화시켰다. 정금형의 독특한 예술적 접근 방식은 미술계를 넘어 널리 주목받았다. 2023년, 작가는 미우치아 프라다의 초청으로 패션 하우스 미우미우의 런웨이 쇼를 퍼포먼스 작품의 무대로 변모시켰다.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탐구하는 그녀의 작업이 패션계에 진입한 순간이었다.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에 초청된 정금형의 < Toy Prototype > 전시 일부. Courtesy of La Biennale di Venezia, Photo by Andrea Avezzù 제이디 차 런던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제이디 차는 밴쿠버에서 태어난 한국계 캐나다인으로, 한국이라는 문화적 뿌리와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영감으로 삼는다. 그녀의 작업은 한인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정체성과 면모를 잘 드러낸다. 제이디 차가 국제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한 데는 20세기 중후반 미주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 이민자들이 정착하고, 그 후속 세대가 독립적으로 성장하며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해 동시대 예술 담론을 재구성하는 상황도 큰 영향을 미쳤다. 퍼포먼스, 텍스타일, 비디오, 사운드, 멀티미디어 설치를 아우르는 제이디 차의 작업은 한국의 무속 전통과 당대의 디아스포라 경험을 엮어내면서 문화적 특수성과 정체성, 소속과 같은 보편적 주제를 담아낸다. 2024년 타데우스 로팍 파리 마레에서 열린 제이디 차의 < Rough hands weave a knife > 전시 전경. Courtesy of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Paris, Salzburg, Milan, Seoul ⓒ Zadie Xa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 House Gods, Animal Guides and Five Ways 2 Forgiveness >(2022)는 정교한 의상과 멀티미디어 설치를 통해 문화적 혼성성과 유동적 정체성을 탐구했다. 이 전시는 한국의 전통 색채론과 현대적 감성을 융합한 정교한 텍스타일 작업을 선보였고, 퍼포먼스에서는 한국 무속 의식과 현대 클럽 문화의 요소를 결합했다. 작가는 이처럼 다층적인 작품을 통해 문화적 이분법에 도전하며 디아스포라 경험의 복잡성을 다루는 몰입적인 환경을 창출한다. 그녀의 작업이 전통 문화의 요소를 동시대 세계를 아우르는 담론으로 번역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에서 열린 작가의 첫 개인전이 런던 전시보다 다소 늦은 2023년 스페이스 K에서 열린 라는 것이다. 이는 한국 디아스포라 작가들이 고국에서 입지를 다지기 전에 국제적으로 먼저 인정받는 경향이 있음을 시사한다. 세계 미술계에서 부상하는 젊은 한국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한국성’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흥미로운 역설에 부딪힌다. 한국이라는 국가 정체성은 이들을 호명하는 참조점이 되지만, 그들이 창작하는 예술은 국경이나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는다. 이같은 복잡성은 한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들과 한인 디아스포라 작가들을 비교할 때 특히 두드러진다. 예컨대 제이디 차와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는 무속, 전통 색채, 민담 등 ‘한국적’ 요소가 두드러지며, 문화적 뿌리와 깊이 연결된 모습을 드러낸다.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탐구해야 할 필요성 자체가 한국 문화유산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키며, 이는 전 세계적으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재해석으로 이어진다. 2022년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린 제이디 차의 < House Gods, Animal Guides and Five Ways 2 Forgiveness > 전시 작품 중 일부. Photo by Andy Keate 지역적 특수성과 보편적 주제 이미래, 정금형과 같이 한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작가들은 동시대 한국 사회와 문화를 살아간 경험에 발을 딛고 작업하며, 은유적이고 개념적인 접근을 통해 문화적 정체성과 관계를 맺는다. 그들의 작품은 명시적으로 ‘한국성’을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산업화, 기술, 현대성과 얽히고 설킨 복잡한 (한국적) 관계를 체현한다. 기계적 형태와 유기적 형태의 강렬한 융합에선 급속한 도시 발전이 가져온 긴장이 떠오르기도 하고, 기계와 관계를 맺는 정금형의 퍼포먼스는 초연결 사회에서 점점 모호해지는 인간과 기술적 사물의 경계를 건드린다. 디아스포라 작가들과 한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접근 방식 차이는 ‘한국성’이 개인적 경험, 역사적 맥락, 세계적 영향력 사이에서 오가는 역동적 대화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은 한국 동시대 미술의 가능성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끈다. 이미래, 정금형, 제이디 차의 작업은 국가 정체성으로 작가를 바라보는 단순화된 관념을 넘어서, 현대 예술가들이 지역적 특수성과 보편적 주제를 어떻게 섬세하게 탐구하는지를 드러낸다. 각자의 고유한 예술 언어로 국제 미술계에서 부상하는 한국 미술가들을 대표하는 이 세 작가는 상호 연결된 오늘날의 세계에서 정체성, 소속감, 문화적 번역의 문제를 다루며 이를 한국 동시대 미술과 연결한다. 물론,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한국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다채로운 면모 가운데 일부에 불과할지 모른다. 문화적 유산을 존중하면서도 경계를 넘어서는 혁신적 시도로 깊은 전통과 끊임없는 변화의 긴장에서 의미 있는 예술적 혁신을 만들어내는 모습…. 세계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세 작가는 동시대 미술을 다시 빚어내고 있다.

세대를 거쳐 이어온 투쟁

Past Series 2024 WINTER

세대를 거쳐 이어온 투쟁 『 철도원 삼대 』 황석영 작, 김소라/배영재 번역, 486쪽, 16.99 파운드, 스크라이브 퍼블리케이션즈(2023) 세대를 거쳐 이어온 투쟁 『철도원 삼대』는 일제강점기의 철도처럼 한국 근대사를 꿰뚫고 있다. ‘기차’하면 떠오르는 낭만적인 감성과 달리, 철도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억은 쓰라린 비극으로 가득하다. 철도는 많은 것을 상징한다. 멈출 수 없는 근대 사회의 힘, 불과 철을 동력으로 삼아 밝은 미래로 질주하는 모습, 사람과 장소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 연결성의 시대 등이다. 하지만, 소설 속 한 인물의 표현처럼, 한국의 철도는 “조선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맹글어진”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철도 부지를 만드느라 집에서 쫓겨나야 했고, 선로 작업에 동원되어 노동 착취를 당했다. 영문본 제목(『Mater 2–10』)은 당시 사용된 전설적인 기관차의 모델명이다. 소설은 민족 분단이 상징이 된 기관차를 제목으로 삼음으로써, 또 다른 비극의 단면을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이진오가 공장 폐업에 항의하며 농성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물리적 세계는 우뚝 솟은 공장 굴뚝 꼭대기로 한정되어 있지만, 자신의 기억, 그리고 할머니와 친척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회상하며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이진오의 가족은 한반도 철도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증조부 이백만은 어릴 적에 기차를 보고 첫 눈에 반해, 아들의 이름을 각각 일철(한쇠), 이철(두쇠)로 지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은 기회와 착취라는 철도의 양면성을 상징하듯 서로 엇갈린 행보를 보인다. 형 일철은 철도 종사원이 되어 기관수 자리까지 올라, 경제적으로는 여유롭지만 일제의 억압에 시달리며 그들의 입맛대로 맞춰야 하는 삶을 살게 된다. 반면, 동생 이철은 공산당원을 만나 노동운동가가 되어, 끊임없이 경찰에 쫓기는 신세임에도 정직한 양심을 갖고 살아간다. 결말이 명쾌하게 정리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이진오가 사측에 맞서 농성을 벌이는 모습은 식민지 시대와 해방 후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국내 노동자들이 이어간 투쟁을 상기시킨다.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이래 투쟁의 역사는 계속되어 왔다. 이진오는 결국 자신도 무대에서 하나의 배역을 맡은 배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역할을 하기로 결심한다. 『철도원 삼대』는 과거를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발견해낸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한 가지 언급할 것이 있다. 문학 번역은 매끄럽고 튀지 않아야 (즉, 순화 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대표적이지만, 이 작품의 번역자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지워버리지 않기 위해 친족 호칭과 지위 등 원문의 특정 요소들을 그대로 살렸다. 결과적으로는 독자에게 너무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한국적인 용어의 사용으로 훨씬 더 풍부한 내러티브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작, 안선재/김지형 번역, 278쪽, 28달러, 하와이대출판부(2024) 전 세계의 노동자들을 위한 목소리 1984년 27세의 한 공장 노동자가 박노해라는 필명으로 시집을 출간했다(‘노해’는 문자 그대로 ‘노동자의 해방’을 뜻한다). 군사정권의 금서 조치와 저자를 밝히기 위한 경찰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100만 부 가까이 판매되었다. 『노동의 새벽』은 대한민국의 민주화 전에 발표된 매우 의미 있는 작품으로, 40년이 지나서 발표된 영문판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울림을 준다. 박노해의 시는 노동자의 글 답게 담백하고 소박하다. 화려한 기교 없이, 평범한 노동자의 담담한 언어가 시인의 감정과 경험을 빛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 권력자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고, 빈부 격차의 문제를 고발하며, 평화로운 삶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갖고, 절망에 굴복하지 않는 박노해 시인의 작품에 독자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대한민국 노동자들을 위한 밝은 새벽을 꿈꾸고 있다. 국내 독자들이 영문본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원문 전체가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에 실린 두 편의 글은 박노해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설명을 제공한다. 지금도 곳곳에서 투쟁하고 있는 억압받는 이들에게, 박노해 시인의 이번 영문본 작품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힘이 되어 주기를 기대한다. 한국의 문화 및 자연 유산을 만나다 국가유산진흥원 https://www.kh.or.kr/visit/en 한국의 문화 및 자연 유산을 만나다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은 한국의 유•무형 자연, 문화유산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코스를 소개한다. 홈페이지를 통해 북쪽의 강원도부터 남쪽의 제주도까지 전국의 75개 국가유산을 체험할 수 있는 10가지 방문 코스를 만날 수 있다. 선사시대, 민속 음악, 사찰, 유교 문화 등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방문 코스를 통해 일반적인 관광지를 넘어선 새로운 경험을 해보길 바란다. 홈페이지에서는 운영 시간, 입장료, 상세 길 안내 등 75개 국가유산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며, 가이드북과 지도도 다운로드 할 수 있다. 외국인 방문객은 각 코스 체험을 기록할 수 있는 ‘여권(스탬프북)’을 인천공항 여행자 센터에서 신청해 캠페인에 참여할 수 있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부서진 삶의 조각들을 다시 맞추다

Past Series 2024 AUTUMN

부서진 삶의 조각들을 다시 맞추다 『경청』 김혜진(金惠珍) 작, 장해니(張傑米) 번역, 200쪽, 18달러, 레스트리스 북스(2024) 부서진 삶의 조각들을 다시 맞추다 김혜진의 『경청』은 진정 이 시대를 위한 소설처럼 느껴진다. 이 작품은 주인공 해수가 자신을 비난한 기자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된다.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해수의 편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이 편지도 끝맺지 못한 채 남겨진다. 편지는 해수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기만을 위한 시도’에 가깝다. 심리 상담사이자 토크쇼 패널로도 잘 알려진 해수는 어느 날 무심코 대본에 적힌 대로 한 배우에 대한 평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발언을 했으니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배우의 자살로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뀐다. 네티즌들이 다른 여러 명과 함께 해수를 가해자로 지목하면서, 그녀는 배우의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해수는 자신이 언어의 힘을 잘 알고 있고 뛰어난 소통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했었지만, 아직 배울 점이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해수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욕할까봐 두려워하며, 타인과의 접촉을 줄이고 혼자 지낸다. 그러던 중 같은 동네에 사는 여학생 세이와 길고양이 순무를 만난다. 세이는 덩치가 크고 재빠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같은 피구팀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고 있고, 순무는 구조가 시급한 상황이다. 해수는 길거리에서 서서히 힘겹게 죽어가는 순무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따뜻한 공감을 통해 세이가 힘든 상황을 이겨내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해수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애초에 심리상담사가 되고 싶었던 목적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가일 것이다.   『경청』이라는 작품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중 하나는 바로 ‘도덕적 범주(도덕적으로 배려할 가치가 있는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의 구분)’이다.  길고양이를 잡기 위해 통 덫을 들고 돌아다니던 해수는 사람들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걱정하면서, ‘자신이 집중해야 하는 일과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의 구분에 대해 생각한다. 한때는 자신은 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배우의 자살 사건 이후로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해수는 이것이 자신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해수의 도덕적 범주 가 확장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인터넷과 SNS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연결성이 높아진 지금, 단편적인 사건들까지 모두 연결해서 살펴보지 않으면 현대 사회의 모순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한편으로 심각한 고립감을 느끼기도 한다. 온라인상의 타인을 인간이나 도덕적 존재가 아닌, 공터에서 우는 길고양이처럼 굳이 관심을 쏟을 필요가 없는 얼굴 없는 개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유사한 두 단어 ‘cancel’과 ‘counsel’을 활용한 재치 있는 영어 제목은 이야기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을 강조한다. 한국어 제목 『경청』에서 드러나듯이, 귀 기울여 듣는 것, 즉 나의 관점을 내세우고 싶은 욕심이 아니라, 듣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경청』은 배려심 깊은 독자들에게 귀 기울일만한 많은 이야기를 던져준다. 『이별 후의 이별』 장석원(張錫原) 작, 데보라 김(金) 번역, 83쪽, 10,000원, 아시아 퍼블리셔스(2023) 언어의 혁명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박상수는 장석 원의 시(이번 시집에는 영문 번역된 20여 편의 작품이 실려있다.)의 기원이 ‘혁명과 사랑’이며 그 기원이 지금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이 두 주제는 이번 시집에서도 잘 드러난다. 언뜻 보기에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노래하는 듯하지만, 여기에서 혁명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장석원은 언어의 혁명 없이는 어떤 혁명도 완성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시는 그러한 대대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노력을 담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탐색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트랜스 휴머니즘의 미래까지 나아가며, 그는 갈등과 투쟁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 사이로 사랑의 빛이 비추지만,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모습의 사랑은 아니다. 작가가 노래하는 사랑은 고통과 그리움, 때로는 야만적이고 죽음과 연결되는, 날것의 사랑이다. 새로 출간된 이번 시집은 시인의 세계관을 엿보고 독자 자신의 투영된 이미지를 관조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창문이 될 것이다. MMCA 리서치랩 한국 현대 미술의 세계를 탐색하다 www.mmcaresearch.kr MMCA(국립현대미술관) 리서치랩은 ‘한국 현대미술 연구에 관한 지식 및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온라인 플랫폼’이다. 1945년부터 1990년대 이후까지의 한국 미술에 대해 인명, 단체, 기관, 전시 등 미술과 관련된 방대한 정보, 그리고 한국 미술에 대한 학술적 에세이를 담고 있다. 한국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는 MMCA의 플랫폼답게, 리서치랩은 세련된 인터페이스 안에서 방문자들이 방대한 정보를 탐색할 수 있는 서로 연결된 다양한 경로를 제공한다. 첫 화면에서는 월별 연표를 통해 다양한 미술 용어를 시대별로 정리해 두었으며, 상단의 메뉴에서는 미술 용어와 학술적 에세이 (모든 컨텐츠는 훌륭한 영문 번역이 함께 제공된다.)를 시대별, 주제별, 알파벳순으로 확인할 수 있다. 페이지 가장 상단의 검색창을 통해 원하는 내용을 검색할 수도 있다. 근현대 한국 미술에 관심 있는 사용자에게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는 리서치랩이 앞으로도 발전을 거듭하기를 기대한다.

운명의 베틀로 짠 태피스트리

Past Series 2024 SUMMER

운명의 베틀로 짠 태피스트리 『고래』 천명관(千明官) 작, 김지영(金知暎) 번역, 365쪽, 22달러, 아키펠라고 북스(2023) 운명의 베틀로 짠 태피스트리 천명관의 『고래』는 세대를 넘나들며 운명의 실타래에 얽힌 두 엄마와 두 딸의 이야기다. 소설은 유난히 큰 체구로 태어난 금복의 딸인 소녀 춘희가 끔찍한 비극을 겪은 이 후 몇 녀 만에 집으로 돌아온 이야기, 그리고 같은 동네에서 춘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마을에 살았던, 자신에게 잔인했던 세상을 저주하는 노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후 소설은 일제 강점기와 춘희의 어머니인 금복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복은 어린 시절부터 남자들이 거부할 수 없는 외모와 암내를 타고났지만, 남자들의 욕망에 희생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원대한 꿈과 계획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녀가 손을 대는 일은 모두 성공을 거둔다. 해안 마을에서 건어물 사업을 시작하여 많은 돈을 번 그녀는 자신이 더 크고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이후 평대로 이사한 그녀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횡재하게 되면서 벽돌 공장을 열고 자신의 궁극적인 꿈을 이룬다. 그 꿈은 그녀가 해안 마을에서 처음 본 거대 생물인 고래 모양으로 영화관을 짓는 것이었다. 세상이 그녀의 발아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예언의 얽힘이 그녀를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그녀가 스스로 지은 무대에서 그녀의 최후 운명은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고래』는 깔끔하게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한 소설이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의 삶은 모두 기묘하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무대를 떠난 것처럼 보였던 캐릭터도 종종 변화한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여전히 운명에 얽매여 있다. 운명은 이 소설의 서사 전반에 시계추처럼 소설의 서사를 지배하는 주제이다. 즉 운명은 우리가 아무리 거부하려고 노력하더라도 결국 뜻대로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한다. 우선, 다양한 인물들에게 닥칠 사건에 대한 끊임없는 전조가 있다. 화자는 또한 사랑의 법칙, 반사의 법칙, 어리석음의 법칙, 이데올로기의 법칙, 자본주의의 법칙, 심지어 자만의 법칙과 같은 다양한 ‘법칙’의 관점에서 결과를 설명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모든 법칙은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게 연결된 이야기 세계, 즉 인간의 의도와 행동이 미리 정해진 결과를 갖는 세계를 확립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군사독재 시대까지 한국 역사의 가장 고통스러운 수십 년을 다루고 있지만, 작가의 이러한 전조와 법칙의 사용은 시대를 초월한 느낌을 준다. 마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태피스트리를 보는 것처럼 시간이 붕괴한다. 분명히 사건의 순서와 사건의 진행이 있지만,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장대한 이야기가 끝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심오한 신비를 엿본 듯한 느낌을 들게 된다. 『날개 환상통』 김혜순(金惠順) 작, 최돈미(崔燉美) 번역, 208쪽, 18.95달러, 뉴디렉션즈북스(2023) 복화술사가 하늘을 향해 노래하다 김혜순의 시집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종종 새를 보며 우아하게 날아다니거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연상하지만, 이 시에서는 새-시인(혹은 시인-새)은 하이힐을 신고 땅 위를 걷고, 자신의 커다란 날개를 부끄러워하고, 새장 같은 옷을 입는다. 새들은 종종 새장에 갇혀 사람들의 관찰 대상이 된다. 또한 많은 문화권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새로 나타난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삶의 비극을 경험하고 큰 슬픔에 빠지는 경우를 생각하면 적절해 보인다. 영문판에 추가된 시집 말미의 에세이에서 시인은 복화술의 기법을 재활용한다고 언급한다.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남성 시인들이 여성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자주 사용했던 기법이다. 복화술이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배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영적인 영감이나 홀림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특히나 적절해 보인다. 시인은 우리를 위로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에 홀린 무당처럼, 하늘의 숨결을 노래하는 시인처럼 우리를 고양시킨다. < The Gleam > 빛의 은유 박지하(朴智夏)의 < The Gleam >(2022)은 제목 그대로 어슴푸레한 빛의 잔상을 쫓는다. 상태이자 순간이고, 이미지이자 감정인 빛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가 이 음반에 담겨있다. 가장 먼저 뚜렷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한국의 전통 악기인 피리(觱篥), 생황(笙簧), 양금(洋琴)이다. 악기의 모양만큼이나 독특한 음색이 단숨에 귀를 사로잡는다. 악기 본연의 소리는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뻗어나가 산란하는 빛으로, 긴 잔향으로 아득한 시공간을 빚어낸다. 음을 길게 지속할 때 미세하게 변화하는 진동과 호흡,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섬광과도 같은 노이즈, 아스라이 멀어지는 잔향, 섣부르게 몸집을 키우지 않고 섬세하게 고안된 공간감은 깊은 고요, 내면의 침묵으로 우리를 이끈다. 박지하는 가야금 연주자 서정민(徐廷旼)과 함께 ‘숨(suːm)’이라는 듀오로 9년간 활동하며 한국 전통음악의 문법에 보다 깊게 천착한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솔로 음반을 발매한 이후 미니멀리즘(Minimalism), 엠비언트 뮤직(Ambient Music) 영토로 선회해 자신의 입지를 다져왔다. < The Gleam >도 넓게 보면 < Communion >(2016), < Philos >(2018)의 연장선에서 음악적 재료와 패턴을 반복하고 중첩시키는 방식을 채택해 왔다. 그는 양금의 현을 활로 연주하거나 손톱으로 긁어 예리한 음향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등 일반적인 연주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감의 소리를 적극적으로 탐색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도는 참신한 테크닉을 선보이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 악기로 구현할 수 있는 소리의 다이내믹을 확장해 이질적인 감각을 조형하는 데 방점이 찍혀있다. 이 음반을 이해하는 데 또 한 가지 유효한 키워드는 공간이다.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박물관인‘뮤지엄 산(Museum San)’은 이 음반을 구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Ando Tadado)가 설계한 이 공간에서 진행됐던 2020 The Art Spot Series ‘Temporary Inertia’ 공연의 일부를 발전시켜 음반으로 엮었다. 공간의 음향적 측면을 세심하게 고려해 개별 악기의 응축된 소리를 미니멀하게 배치한 흔적이 음악 도처에서 발견된다. 박지하에게 공간은 연주가 이루어지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음악의 방향을 결정하는 하나의 ‘요인’이자 음악을 구성하는 ‘재료’로 기능한다. 빛의 여러 형태와 잔상을 포착한 음악의 끝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다다를 것이다. 빛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사라질까.

사랑받은 소설을 다시 상상하다

Past Series 2024 SPRING

사랑받은 소설을 다시 상상하다 『나목』 김금숙 작, 자넷 홍 번역, 320쪽, 29.95달러, 드론 앤 쿼털리(2023) 사랑받은 소설을 다시 상상하다 크로스미디어의 각색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요즘에는 글이나 그림 작품, 즉 소설이나 만화가 영화나 TV 드라마로 각색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유명 작가인 고 박완서(1931-2011)의 데뷔 소설 『나목』을 각색한 김금숙 작가의 『나목』은 그래픽 소설이라는 시각적 매체를 통해 원작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박완서의 원작 소설 『나목』은 한국전쟁 동안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꾸렸던 화가 박수근(1914-1965)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그의 예술적 비전과 천재성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인정 받지 못했다. 박완서 작가의 분신인 경아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소설은 한국인과 주둔한 외국군 사이의 문화 충돌과 한국전쟁 동안 사회적 가치가 변화하는 신생국의 특징을 다루기도 한다. 그 격변의 시대 사회상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비판함으로써 호평을 받은 소설은 여성 작가에게 수여하는 여성동아 문학상을 받았다. 김금숙의 그래픽 소설은 이 유명한 작품의 역사에 또 다른 장을 추가한다. 그녀는 원작에 충실히 하고자 했지만, 점차 그녀만의 색을 넣어 새로운 서사를 끌어냈다. 핵심 서사는 동일하지만 그래픽 소설에서는 박완서와 그녀 남편의 분신으로 재탄생한 인물이 도입되면서 원작의 이야기에 맥락을 더한다. 김금숙은 박수근의 여러 작품을 모작하여 핵심 서사와 맥락 부분에 집어넣었다. 이는 이야기에 더 많은 층과 깊이를 더하면서 실제 인물들의 삶과 이들을 바탕으로 한 허구적 인물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원작 소설을 읽을 때는 독자 각각의 마음속에 이미지가 생성되지만, 그래픽 소설에서는 독자들이 예술가의 독특한 비전을 직접 보고 즐길 수 있다. 작가는 악몽 같고, 정신 없고, 고통스러우며, 아름다울 수도 있는 한국전쟁 기간의 서울을 흑백 드로잉으로 포착한다. 그러나 그녀는 단순한 그래픽 표현을 넘어 자신이 선택한 매체를 최대한 활용한다. 예를 들어 그녀는 만화 이론가 스콧 맥클라우드가 말하는 “출혈을 일으키고 시간을 초월한 공간으로 탈출하는” 것을 표현할 때 보통의 칸보다 확장된 칸을 활용한다. 확장된 칸은 때때로 시간의 확장을 암시하면서 서사에서의 전환을 예고한다. 또 다른 경우로는 한국전쟁의 외부적 혼란 혹은 인물들의 내적 혼란을 묘사한다. 작가는 그래픽 소설의 기본 구조를 형성하는 기본 적인 칸에서도 그것들을 기발하게 활용한다. 경아가 자신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릴 때 그녀 가족에 대한 묘사는 실제로 칸의 경계를 뚫고 나온다. 이는 그들이 과거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는 시각적 표현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인물들이 장면의 일부인 것처럼 칸 가장자리에 팔이나 손을 얹고 있다. 박수근의 작품 전시회를 묘사하는 장에서는 작품 자체만을 위해 칸이 이용되고 인물들은 그림 주변에서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활보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사랑 받은 소설을 새로운 매체를 통해 재창조하는 작가의 기교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직접 탐험해 볼 수 있는 즐거움을 독자에게 남겨둔다. 박완서의 소설을 다시 읽어보든 처음으로 접하게 되든 이 그래픽 소설은 작품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창이다. 『 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 』 최지인 작, 스텔라 김 번역, 142쪽, 10,000원, 아시아 출판사(2023) 한 시인의 쟁투 최지인의 새 시집은 ‘사건들’이 벌어진 세상의 장소들을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제주, 오키나와, 타이베이, 마닐라, 싱가포르, 스리랑카, 마다가스카르, 아이티, 홋카이도’.(‘커브’). 이 시집의 모든 라인에는 전쟁과 갈등이 엮여 기억과 역사의 태피스트리를 만들어낸다. 시인은 “쓰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커브’)라고 고백하면서 이를 통해 의미를 찾지만, 자신의 탐구가 희망이 없음을 인정하기도 한다.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요”(‘신세계’). “세상의 죄를 짊어진 지구의 고양(羔羊)이여”(‘성장의 끝’)와 같은 성경 주제에 대한 눈에 띄는 언급은 희망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공자의 가장 중요해 보이는 지혜를 뒤집는다. “감히 삶에 대하여 / 묻습니다 / 죽음을 모르는데 / 어찌 삶을 알겠습니까”(‘파종’). 하지만 시인은 이 모든 것을 통해 여전히 사랑을 선택한다. 어떤 희망을 품든지 간에 아마도 그 희망은 이 선택과 우리가 어디에서 실패했는지 잊지 않기 위해 계속 전달해야 하는 이야기 속에 있을지 모른다. 최지인 시인이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이 기억들이다. ‘다문화가족지원포털 다누리’ www.liveinkorea.kr 한 지붕 아래의 세상 ‘다문화가족지원포털 다누리’ 웹사이트는 한국 생활에 대한 정보를 13개의 언어로 제공한다. 영어와 러시아어도 포함되어 있지만 주로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언어들이다.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누리’는 ‘많은’ 혹은 ‘다수의’라는 한자어 ‘다(多)’와 ‘세계’를 의미하는 순수 한국어 ‘누리’의 조합이다. 이 사이트는 다문화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디자인되었고, 주 대상자는 한국에 사는 여성 결혼이민자이다. 하지만 다른 이민자들도 도움이 되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정보는 주로 다운로드할 수 있는 두 개의 파일, ‘결혼 이민자를 위한 웰컴북’과 ‘한국생활 가이드북’에서 찾을 수 있다. 전자는 한국에 쉽게 정착할 수 있도록 주요 정보를 요약한 짧은 이중 언어 책자이다. 후자는 각각의 언어 한 가지로 되어 있고 이민자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좀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은 책자이다. 이 역시 일차적으로는 다문화가족과 결혼이주민들을 위한 것이지만 내용의 많은 부분이 한국에 거주하는 어떤 외국인에게도 유용할 것이다. 이 사이트는 가끔 검색이 힘들기는 하지만 신중하게 준비되고 선별된 풍부한 콘텐츠를 제공한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바라본 우리

Past Series 2023 WINTER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바라본 우리 『다른 사람』 강화길(姜禾吉) 작, 클레어 리차드(Clare Richards) 번역, 304쪽, 14.99파운드, 푸쉬킨 프레스(2023)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바라본 우리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물론 어떤 주인공들은 문제가 있고, 또 다른 주인공들은 비극적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만약 세상을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모두 기껏해야 다른 사람들 이야기의 조연에 불과하며 때로는 악당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 말이다. 강화길 작가의 강렬한 첫 장편소설인 『다른 사람』에서 작가는 이 같은 생각을 탐구한다. 작가는 유동적 관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이야기를 제시하면서 독자에게 자신의 추측이나 가정을 매 단계에서 재검토하도록 유도한다. 소설은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젊은 여성인 김진아는 직장 내 팀장인 남자친구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한다. 그녀는 직장에서의 사내 연애가 알려질까 두려워 처음에는 침묵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폭력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결국 경찰에 신고한다. 그러나 그녀는 폭력 사건에 대응하는 법적 제도가 얼마나 느리고 비효율적인지 알지 못했다. 그 결과 남자 친구는 솜방망이 처벌에 불과한 삼백만 원의 벌금형만 받았을 뿐, 가택 연금이나 접근 금지 등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좌절한 진아는 인터넷 게시판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한다. 이제 그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판단하는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 진아의 이야기만 보면 독자는 쉽게 진아의 편에 설 것이다. 특히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주장하면서도, 문제가 있는 여성들은 얼굴이 좀 별로라는 코믹스러운 성차별적 언사로 그녀를 나무라는 본부장을 보면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수록 독자는 진아의 이야기 속 다른 인물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를 통해 독자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엿볼 수 있고 복잡하게 얽힌 퍼즐에서 빠진 조각들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상황을 불분명하게 만들고 진아의 믿음과 주장을 약화시키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일정한 패턴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성 인물들의 자기 회의와 자책, 남성 인물들의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 등의 대조가 그중 하나이다. 대학교 강사가 된 진아의 옛 남자친구 동희가 학교에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게끔 자신을 성추행했다고 신고한 여학생과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그를 부당한 방법으로 이용하는 여교수 등과 맞서 싸우면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 그를 동정하게 된다. 물론 그는 완벽하지 않다. 그런데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동시에 진아의 단짝이었던 수진이가 악의로 가득 차 진아를 증오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도 흑백처럼 선명하지 않고,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수많은 회색 지대가 있다. 그렇다고 옳고 그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누구도 완전히 옳고 그를 수 없음을 의미할 뿐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미묘하고 절묘하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서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면서 그로 인해 더 큰 효과를 갖게 된다. 이 소설은 독자를 하나의 여정으로 이끌 것이다.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어디에서 시작하든 독자는 결국 어딘가 다른 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면서 어떤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북촌』 신달자(慎達子) 작, 조영실(趙永實) 번역, 106쪽, 18.95달러, 호마 앤 세키 북스(2023) 유명한 동네 산책하기 북촌에 위치한 계동의 작은 집으로 이사한 신달자 시인은 새로운 환경으로 인한 신선한 경험과 감각이 익숙함으로 무뎌지기 전 시집을 한 권 쓰기로 결심했다. 말 그대로 ‘북쪽의 마을’인 북촌은 독특한 곳이다. 콘크리트와 유리로 이루어진 대도시 서울의 심장부에 위치한 북촌은 전통가옥인 한옥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어 전통과 과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현지인과 여행객 모두가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시인의 시들은 북촌의 내면을 그린다. 동네의 유명한 랜드마크를 소재로 하는 시들은 호기심 많은 방문객의 가이드가 될 수 있을 정도다. 또한 시는 한옥 주거지와의 강한 연결을 보여준다. 한옥에서는 현대식 건물에서 보기 힘든 자연환경은 물론 동네의 역사와 문화와의 긴밀한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시인은 삶의 현실을 숨기려 하지 않고 질병과 외로움, 그리고 노년에 관해 쓴다. 독자는 시집을 통해 북촌을 관광하는 것 이상으로 흥미로운 산책을 하게 될 것이다. ‘한국 고전 영화’ www.youtube.com/@KoreanFilm 한국 영화 애호가들을 위한 보물 창고 한국 영화의 블록버스터 시대는 1997년 < 타이타닉(Titanic) > (1997)이 세운 국내 흥행 기록을 경신한 1999년 액션 스릴러 < 쉬리 > 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거의 매년 새로운 블록버스터 영화가 나타나 왕좌를 차지했다. 곧 세계가 주목하게 되었고 봉준호 감독의 2019년 영화 < 기생충(Parasite) > (2019)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이제 한국 영화를 알지 못하면 스스로를 영화광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 영화가 20세기 말에 와서야 스크린을 점령하게 된 것은 아니다. 한국 영화는 이미 20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초보 영화 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유튜브 채널 ‘한국 고전 영화’에 시대와 장르를 아우르는 다양한 영화들이 제공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국 영화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이 자원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이 유튜브 채널에는 1910~1945년 일제 강점기부터 1990년대까지 영화들이 포함되어 있고, 정기적으로 새로운 영화들이 추가되고 있다. 더 좋은 점은 모든 영화에 영어 자막이 옵션으로 제공된다는 점이다. 이 채널의 오랜 구독자이자 팬으로서 ‘한국 고전 영화’ 유튜브 채널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앎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Past Series 2023 AUTUMN

앎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알제리의 유령들』 황여정(Hwang Yeo-jung 黃汝貞) 저,정예원(Jung Ye-won 鄭叡媛) 번역, 165쪽, 13.99파운드, 혼포드 스타: 스톡포트 (2023) 앎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1882년, 병든 칼 마르크스는 지중해 기후의 도움을 얻기 위해 알제리로 간다. 불행하게도 그가 바랐던 것보다 날씨는 그의 건강에 좋지 않았고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그래도 알제리에 머무는 동안 마르크스는 희곡 쓰기에 대한 열망을 되찾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유일한 극 작품인 『알제리의 유령들』을 썼다. 마르크스는 얼마 있지 않아 런던에서 숨을 거뒀다. 그리고 백 년이 더 지나 박선우가 파리의 헌책방에서 그 희곡을 발견하고 여전히 냉전 이데올로기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한국으로 가져온다. 그와 그의 친구들이 당국의 법에 저촉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알제리의 유령들』은 오랫동안 분실되었던 마르크스의 희곡이기도 하지만 전설적 극작가 탁오수가 은퇴를 선언하고 제주도에 ‘알제리’라는 바를 열기 전 마지막으로 연출한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황여정 작가가 문학상을 받으며 데뷔한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이렇게 겹치는 여러 층위는 소설 자체의 은유로 작용한다. 소설은 섬세하게 제작된 퍼즐 상자처럼 첫눈에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며, 독자들이 박스 안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박스를 찔러보며 이 다층적 서사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애쓰도록 만든다. 소설은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세 명의 화자가 이야기를 서술한다. ‘율의 이야기’는 희곡의 그늘 아래서 성장한 젊은 여성이 부모와 자신의 삶을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을 따라간다. ‘철수의 이야기’는 진실을 찾아가는 불안정한 한 청년의 여정을 기술한다. ‘오수의 이야기’는 서사의 흩어진 조각들을 가능한 해석으로 통합한다. 마지막 부분은 율에게로 되돌아가지만, 이야기는 또 다른 전환을 겪는다. 이 다양한 관점들은 서로 보완되어 일어났던 일을 더 완전한 그림으로 그려내지만, 어떤 면에서는 맹인들이 코끼리를 설명하려고 하는 우화와 같다. 모두가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고, 누구도 온전하게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수조차도 어떤 객관적인 사실보다 진실의 구도자인 철수의 믿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이야기는 진실과 거짓의 혼합물이다. 사람들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한다 해도, 그것을 각자 다르게 기억한다. 가끔은 실제로 당신이 직접 본 것과 들은 것, 경험한 것조차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율은 희곡 자체에 대해 누구보다도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결국 서사의 많은 실타래를 다시 모으는 것은 그녀이다. 하지만 결과는 여러 갈래의 끝마디를 모아두었을 뿐 깔끔하게 정돈된 매듭은 아니다. 이야기꾼으로서의 황여정 작가의 재능이 이 소설에서 확실하게 드러나는데, 독자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요소를 충분히 보여주면서도 카드를 모두 펼치지 않고 독자를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고, 결국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어 하지만 작가는 쉬운 답을 피해 간다. 모든 이야기에 사실과 거짓이 섞여 있는 것처럼 모든 이야기는 만화경과 같다. 그것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을 통해 굴절된 빛 조각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어떤 것의 ‘진실’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설사 진실에 근접한 것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알제리의 유령들』은 여정이 목적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격언을 재확인시킨다. 이 여정이 독자들에게는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만들 것이다.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 정우신(鄭佑信) 저, 수잔 케이(Susan K 金秀辰) 번역, 71쪽, 9,500원, 아시아 출판사: 파주(2022) 기억의 값 정우신 시인의 새 시집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는 상실과 애도, 그리고 이후 찾아오는 공허의 여정으로 독자를 이끈다. 그것은 한때 화려했던 도시의 폐허 속을 걷는 듯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여기서 도시는 시인이 많은 시에서 말을 거는 ‘너’라는 애인과 함께 지은 세상이다. 애인은 더 이상 산 자와 함께 있지 않지만, 시인의 기억 속에 새겨진 모든 것에 남아 있다. 애인이 머물렀던 장소, 시인과 애인이 함께 걸었던 길, 그리고 애인이 밖을 무심히 바라보던 창가에도. 하지만 늘 그렇듯이 꽃들은 여전히 피고 진다. 미용실이 문을 닫고 부동산이 그 자리에 문을 연다. 그대로 머물기를 고집스럽게 거절하는 세상에서 시인은 망각의 치유 대신 기억의 고통을 선택한다. 그 고통과 사랑하는 이를 추모하며 감동적인 시집을 만들었다. 이 산책길은 가치가 있고 기억할 만한 추억들로 가득하다. ‘Imagine Your Korea’ www.youtube.com/@imagineyourkorea 한국의 즐길 거리로 가득한 뷔페 상차림 한국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이 유튜브 채널은 한국의 도시를 새롭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소개하는 영상으로 넘쳐난다. ‘한국의 리듬을 느껴라(Feel the Rhythm of Korea)’ 시리즈는 전국의 인기 있는 여행지를 소개하는데, 한국의 예술인들이 만든 음악에 맞춰 시청자를 에너지 넘치는 투어로 이끈다. 초기 영상들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기발한 춤사위로 강조된 이날치의 중독성 있는 퓨전 음악을 보여주는 반면, 가장 최근의 영상들은 케이팝 돌풍의 주인공 BTS와 만들었다. 이 외에도 한류 팬들을 위한 영상이 가득하다. 예를 들면, 한류 장소 투어와 한류 경험에 대한 소개가 있다. 조금 다른 성격의 영상으로 ‘묘하게 만족감을 주는 한국(Oddly Satisfying Korea)’ 시리즈가 있는데 여기서는 눈과 귀로 즐길 수 있는 한국의 삶과 문화의 면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세계 축구 팬이라면 토트넘 홋스퍼팀의 공격수 손흥민과 함께하는 영상도 볼 수 있다. 누구라도 즐길 거리가 있으며, 대부분의 영상은 짧고 유혹적이어서 시청자들이 관심 영역을 빠르게 엿볼 수 있게 한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운명의 씨실과 날실로 엮이다

Past Series 2023 SUMMER

운명의 씨실과 날실로 엮이다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Kim Ju-hea 金宙慧) 저, 403쪽, 8.99파운드, 윈월드 출판사: 런던(2022) 운명의 씨실과 날실로 엮이다 김주혜의 첫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은 한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였던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시기를 관통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난했던 엄마는 딸 옥희를 평양에 있는 기생집 은실에게 집안일을 거두며 품삯을 받는 식모로 팔았다. 이후 옥희는 은실의 사촌이자 기녀 단이가 있는 경성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기녀로 자란다. 한편, 시골 출신인 고아 남정호는 비밀스러운 가보 두 개만 몸에 지닌 채 돈을 벌기 위해 평양에서 경성으로 왔지만, 길거리 패거리와 어울리게 된다. 옥희와 정호는 우연히 만나게 되고, 이들의 삶이 아주 다른 궤도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실은 세월이 흐르는 내내 계속해서 둘을 엮는다. 이 실들은 마치 태피스트리(다채로운 염색사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의 생생한 가닥처럼 이야기 전체에 짜여 있다. 한국에서 실은 사람이나 사물들이 엮여 생기는 관계인 ‘인연’을 상징한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책 속의 인물들이 인연이라는 그물망 속에 어떻게 통합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사랑과 배려는 인연이 운명론으로 빠지지 않게 하고 오히려 따스한 위로의 빛, 즉 결국 모든 것이 옳을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소설은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든 한국인의 조상인 단군신화든 정호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인 신화이든 작품 속에서 신화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은실의 딸이자 옥희의 동료인 기녀 월향은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자 단군 신화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대신, 신화에는 아이를 갖고자 하는 절박한 여성의 욕망에 대해서만 나오고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 여성에 대해서는 침묵하는지를 의아해한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신화를 문제시하는 그녀의 의문은 신화가 갖는 사회적 통제의 기능을 조명한다. 한편, 정호는 호랑이를 발견했지만,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던 말에 사냥을 포기한 그의 아버지와 호랑이에 대한 신화가 어느 정도는 상상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나중에 자신의 의심을 넘어서는 더 많은 진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장대한 역사적 서사와 많은 인물을 담은 소설은 감상주의로 빠질 수 있지만, 『작은 땅의 야수들』은 균형을 유지한다. 모든 인물은 진실하고 생생하게 묘사된다. 소설의 악인 중 가장 경멸을 받을 만한 인물조차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그 역시 자신을 타인과 묶는 인연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다. 소설 앞부분에 기억할 만한 장면이 있는데, 옥희가 기녀 은실의 집에 남아 기녀 견습생이 되고 나서이다. 옥희는 아마도 가장 뛰어난 노래꾼은 아니지만 - 그녀의 친구 연화만큼 재능이 있지 않음은 확실하다 - 오리가 물을 좋아하듯 옥희는 시를 좋아한다. 그녀는 기녀가 되기 위해 아름다운 시 구절을 읽고 암송하던 훈련 중에 동료 견습생들이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고 무덤덤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시가라는 경이로운 세계에 입문하고 본능적으로 이에 영향을 받는다. “옥희는 특정한 단어들을 특정한 순서로 나열하면 자기 내면의 모습도 마치 가구를 옮기듯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고 한 마리 춤추는 나비처럼 언어 속을 누볐다”라고 작가는 썼다. 여기서 옥희를 통해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작은 땅의 야수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본질은 특정한 단어들을 특정한 순서로 배열하기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 단어를 독자가 내면에서 재배열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음악적인 작품으로 만들었다. 『거의 모든 기쁨』 이소연(Lee So-youn 李昭延) 저, 채선이(Sunnie Chae 蔡仙伊) 번역, 89쪽, 9,500원, 아시아 출판사: 파주(2022) 시인이 경험한 세상 스무 편의 시를 모은 이소연의 시집에서 우리는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도록 초대된다. 이 세계에서는 지구와 모든 생명체, 그리고 모든 것에 깃든 생명의 잠재력과 연결되고픈 열망을 느끼게 한다. 이소연은 정원을 가꾸지는 않지만 여전히 씨앗을 믿는 시인으로, 씨앗처럼 땅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 시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여성들이 차별받는 세상에서 상처를 입은 그녀는 분노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사랑과 희망으로 포용하기로 선택한 것은 흥미로운 접근이다. 작가는 책의 뒤쪽 노트에 “작가들마다 힘겹게 자기 세계를 견디고 있다. 그 방식이 다를 뿐이다”라고 적었다. 이소연의 세계는 모든 것,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가 되는 세계이다. 그녀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시는 목적이 아니라 동력”일 뿐이다. 즉 시는 시인이 경험한 세상에서 생겨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시인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이다. 이 시집은 새로운 독자에게 그녀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그녀의 세계가 확장됨에 따라 우리의 세계도 확장된다. ‘스튜디오 기와’ www.youtube.com/@STIDOPLOWAPFFOCIAL 기품 있는 한옥에서 들리는 아름다운 선율 유니버설 뮤직 코리아가 적절하게 이름 붙인 ‘스튜디오 기와’는 국내외의 음악인들을 초대해 서울의 남산골 한옥 마을에 있는 민 씨 가옥과 같은 한옥에서 연주하도록 한다. ‘기와’는 한옥의 지붕을 장식하는 검은색 타일이고 이 지붕 아래에서 스튜디오 기와는 현대와 고전의 음악인들을 포함해 다양한 예술가들을 집합시킨다. 피아니스트가 공연장에서 연주하거나 인디밴드가 떠들썩한 관객 앞 안개가 자욱한 무대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지만, 신기하게도 한옥의 단순한 우아함이 둘 모두에게 완벽한 무대가 된다. 오래된 나무 바닥과 서까래의 온기일까, 아니면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의 잔잔한 아름다움 때문일까? 무슨 이유에서든 스튜디오 기와는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독특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현대를 위한 전통 시

Past Series 2023 SPRING

현대를 위한 전통 시 『시조 - 한국의 대표적 시 형태(Sijo: Korea’s Poetry Form)』 루시 박, 엘리자베스 요르겐센 저, 284쪽, 16,000원, 박영사: 서울(2022) 현대를 위한 전통 시 이 책의 필자 11명 중 한 명인 마크 피터슨(Mark Petersen)이 언급한 것처럼 사람들이 짧은 시를 애호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인 듯하다. 예를 들어, 영어로 쓰는 리머릭(limerick)은 익살스럽고 종종 외설스러운 내용에 운을 맞춘 시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짧은 시 형태는 일본의 하이쿠(俳句)일 것이다. 5, 7, 5의 3구 17자의 짧은 음절로 이루진 일본 특유의 단시인 하이쿠는 주로 자연에 대한 명상을 주제로 한다. 리머릭이 엄격한 운율 규칙과 리듬적인 음보의 병치를 통해 전통적이고 음악적 느낌을 주는 반면, 하이쿠는 극도의 간결함으로 시적 아이디어를 가장 순수하게 보여준다. 이같이 간결한 형태들이 왜 그렇게 인기 있는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암기(그리고 이를 통한 전달)가 쉬운 것도 한 가지 이유임은 확실하다. 한국에는 시조라는 고유의 짧은 시 형태가 있다. 리머릭이나 하이쿠처럼 서구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4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시조 역시 3행으로 이루어졌지만, 각 행이 일본의 하이쿠보다 훨씬 더 길고 행마다 구조도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엄격한 제한이 있는 하이쿠보다 더 많은 표현이 가능하며, 복잡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미국의 학생들(필자를 포함)은 하이쿠를 배우고 썼다. 하이쿠처럼 학교 교육 과정에서 시조를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 책은 “그렇다!”라고 답한다. 『시조 - 한국의 대표적 시 형태』는 시카고에 거점을 둔 세종문화회가 오랜 기간 공을 들인 결과물이다. 이 책은 교육자를 대상으로 발간했지만, 시조에 대해 알고 싶거나 시조를 직접 써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책의 1부는 시조를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하는 학자들의 글을 모았다. 데이비드 맥캔(David McCann)은 14세기부터 현재까지 시조의 역사와 발전을 추적하고, 마크 피터슨(Mark Petersen)은 시조를 중국의 절구(绝句)와 일본의 하이쿠 같은 동아시아의 다른 짧은 시 형태와 비교한다. 루시 박은 현재 한국과 북미에서 쓰인 시조와 독일어, 타갈로그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그리고 스왈리어로 쓰인 소수의 시조를 소개한다. 또한 그녀는 시조와 음악의 관계(시조는 원래 시가 아니라 노래로 구상되었다)를 짚어보고 시조 가사를 현대 뮤지컬에 도입하려는 당대의 시도를 다룬다. 김성곤은 시 번역의 어려움을 언급하면서 영어로 직접 쓴 시조에 대해 큰 기대를 건다. 마지막으로 작가 린다 수 박은 시조가 우리를 더 똑똑하게 만든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 책의 2부는 시조를 가르치기 위한 다양한 지도 계획을 담고 있어 교육자들에게 특히 흥미로울 것이다. 여기에 공동편집자인 엘리자베스 요르겐센이 그녀의 학생들과 함께 한 시조 쓰기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사례 연구는 특히 관심을 끈다. 서관호(徐官浩)의 아이들을 위한 시조 지도법은 시조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상세한 로드맵이 될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세종문화회에서 매년 주최하는 시조 쓰기 대회에서 상을 받은 참가자들의 시조를 모아두었다. 각각의 시에는 작가의 말과 시 애호가의 해설이 붙어 있다. 김성곤은 자신의 글에서 “사람들이 시적 미묘함과 섬세함을 멋지게 표현했던 시조로 서로 소통했던 시절이 그립다”라고 아쉬워한다. 이 책은 종종 산만하고 각박한 현대 사회를 시로 삶을 표현하고 풍류를 즐겼던 이전과 같은 시절로 되돌리기 위한 한걸음이다. 『 빙글빙글 우주군(Launch Something) 』 배명훈 저, 스텔라 김 번역, 363쪽, 11.99파운드, 혼포드 스타 출판사: 스톡포트(2022) 인류 최후의 개척지를 지키다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양이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오래된 아케이드 게임의 캐릭터 팩맨을 닮은 두 번째 태양이 나타난다면? 이것이 한국 우주군이 맞닥뜨린 긴급한 문제이다. 국제 연합우주군의 일부인 한국군의 임무는 다른 모든 위성들을 잠재적으로 쓸어버릴 수 있는 쓰레기장을 만들면서 지구 궤도에 있는 어떤 위성도 격추되지 않도록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임무를 맡은 단원들은 다채로운 캐릭터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에는 우주군에 남기 위해 민간업체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한 에이스 조종사 한섬민도 있다. 정보 장교 엄종현은 위성 궤도를 분석하는 자기만의 기술을 갖고 있다. 날씨 전문가인 서가을은 호의적인 바람을 기원하는 현대판 샤먼 같은 인물이다. 그리고 새로 영입된 이자운은 케이팝 스타로 색다른 스타를 꿈꾼다. 연락 담당관 김은경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똑똑한 사람들과 멍청한 시스템. 하지만 이들은 대단한 일을 하기 위해 그 멍청한 시스템을 정비해보려는 사람들”이다. 화성-지구 왕복선에서의 암살 음모가 밝혀지고 화성 식민지의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한 것으로 알려진 화성 총독이 갑자기 지구로 돌아오기로 결정되면서 단원들의 평화로운 일상이 뒤바뀐다. 좌절된 암살의 진짜 타깃은 누구였나? 이전 총독은 멀리 떨어진 연구센터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가? 그리고 우주군 참모총장 구예민과 그녀의 팀은 제때에 대응을 할 수 있을까? ‘K-friends’ kfriends.visitkorea.or.kr 모두 함께 모이자! K-friends는 한국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글로벌 커뮤니티로 모든 한류 팬을 연결해준다. 케이팝, 드라마, 영화, 음식, 여행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에 관심을 두고 있는 팬 모두를 아우른다. 회원 가입은 쉽다. K-friends 페이스북 그룹의 멤버가 되면 된다. 멤버가 되면 여러 이벤트에 참여해 ‘친구’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이 포인트는 나중에 한국 관련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모이자 시장’에서 사용할 수 있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으면 K-friends 홈페이지를 방문해 어떤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또 회원들이 작성한 한국에서 혹은 자신의 나라에서 경험한 한국 문화에 대해 이야기 한 인기 있는 포스팅을 읽어봐도 좋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