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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서

Review 2022 SPRING 1756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서 최욱경(Choi Wook-kyung 崔郁卿 1940~1985)은 여성으로서 한계를 뛰어넘고 국제 화단의 신조류를 독자적으로 수용했던 한국 추상미술의 대표적 화가이다. 2021년 10월 27일부터 2022년 2월 13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 는 그의 예술이 위치한 좌표를 적극적으로 탐색한 전시다. 사실 최욱경은 일반에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2020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국립현대미술관이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던 박래현(Park Re-hyun 朴崃賢 1920~1976)도 그렇지만, 최욱경의 이름도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거의 잊히는 듯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살았던 시절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미술사가 주로 남성 위주로 쓰였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60~80년대에 회화와 문학,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능동적인 작가의 정체성을 쌓았던 그를 지금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공백으로 남아 있던 한국의 여성 미술사를, 더불어 한국의 미술사를 다시 쓰는 일이 될 것이다. . 1977. 캔버스에 아크릴릭. 225 × 195 ㎝. 리움미술관(Leeum Museum of Art) 소장. 최욱경(Choi Wook-kyung 崔郁卿)의 1970년대 중후반 작품들은 꽃과 산, 새, 동물을 떠올리게 하는 유기적 형태들이 뒤얽혀 생동감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 1976. 종이에 연필. 102 × 255 ㎝. 개인 소장. 미국의 현대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의 공연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거대한 연필화이다. 춤추는 듯, 날아오를 듯 날개를 펼친 흰 형체가 숭고한 서사적 느낌을 준다. 더 큰 세상으로 이번 전시는 연대별로 3개의 주제로 나누어 구성되었으며, 에필로그 섹션에는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화상들과 기록물을 소개하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이곳에서는 서울예술고등학교 시절 그가 배웠을 ‘입시 미술’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 그림들은 그의 작가적 개성보다는 식민지 시절부터 내려온 관습적인 기술을 더 부각시켜 보여 준다. 서울대 회화과 재학 중 몇몇 작품을 출품해 입상하면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지만,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 전까지 그의 작업은 대체로 대학 입시 준비의 연장선상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내로라하는 화가들에게 그림 수업을 받았는데, 당시 스승의 화풍을 답습하던 작업 방식은 위계적인 가부장제의 습성과 많이 닮아 있다. 1978년 『코리아 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 미술 교육은 개개인의 작품 정체성을 존중하는데, 이것이 한국 미술 교육과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전시에는 그가 쓴 시 「어머니의 옛날 이야기」(1972)도 소개되었다. 어머니는 숲에서 늑대를 만나면 쳐다보지 말고 대답하지 말라고, 산보하자고 해도 거절하라고 이야기해 주었지만, 자신은 기꺼이 늑대의 손을 잡고 친구처럼 걸었다는 내용의 시다. 늑대의 손을 잡은 것은 익숙한 세계의 금기를 깨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의미할 것이다. 1963년, 그렇게 시작한 크랜브룩 미술 아카데미(Cranbrook Academy of Art) 유학 생활은 그에게 작업 양식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큰 변화와 도약의 계기가 되었다. 정체성 탐구 1부 ‘미국이라는 원더랜드를 향하여(1963~1970)’는 화가의 크랜브룩 미술 아카데미 시절과 뉴햄프셔 프랭클린 피어스 대학 조교수 시절을 좇는다. 1960년대 미국은 추상표현주의에서 후기회화적 추상으로 이행하던 시기였다. 최욱경은 이러한 작품 경향을 보인 도널드 윌릿(Donald Willett 1928~1985)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강렬한 붓칠과 색상의 추상을 이루어 나갔다. 크랜브룩 미술관에서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마크 로스코(Mark Rothko), 잭슨 폴록(Jackson Pollock)과 같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접한 것도 그가 당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65년 크랜브룩 미술 아카데미 졸업 후 그는 브루클린미술관 소속 미술학교(Brooklyn Museum School of Art)에서 1년간 수학한 후 1966년 여름 메인주(州) 스코히건 회화∙조각학교(Skowhegan School of Painting & Sculpture) 작가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이 시기에 구상, 그래픽 미술, 판화, 팝아트 등 미국 동부의 다양한 양식과 매체를 접할 수 있었다. 그 영향으로 캔버스에 신문지를 찢어 붙여 색면과 병치하거나 잡지 이미지 위에 덧칠을 하는 등의 방식으로 작업을 했는데, 네오다다, 팝아트에서 나타나던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 전시 제목 ‘앨리스의 고양이’와 1부의 소제목 ‘원더랜드’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그의 작품 세계 한쪽에는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가 놓여 있다. 출간 100주년을 기념해 미국에서 관련 도서들의 발행이 활발했던 1965년에는 이라는 작품을 제작했으며, 1972년 출간한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에는 「앨리스의 고양이」라는 작품이 수록되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전유신(全宥信) 학예연구사는 ‘아시아에서 온 외국인 여성’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상황에서 문화적 정체성 혼란을 겪던 작가가 앨리스 이야기에 쉽게 공감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정체성 탐구를 (1966), (1968), (1968)와 같이 인종 차별과 전쟁을 반대하는 다수의 작품에 녹이며 미국 사회에 적응해 갔다. . 1965. 캔버스에 아크릴릭. 63 × 51 ㎝. 유족 소장. 작가가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한 관심을 처음으로 구체화한 작품이다. . 1966. 종이에 아크릴릭. 42.5 × 57.5 ㎝. 리움미술관 소장. 미국 유학 시절 최욱경은 아시아 출신의 여성으로만 규정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며, 스스로의 본질적 모습을 탐색하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독자적 경지 2부 ‘한국과 미국,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1971~1978)’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을 이어간 시기를 돌아보았다. 최욱경은 1971년 귀국해 1974년 초까지 한국에 체류하며 두 번의 개인전을 열고, 파리 비엔날레 참여 작가 선발전인 앙데팡당에 (1972) 등 입체 설치 작품 세 점을 출품했는데 이 작품들은 당시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 한편 단청과 민화, 서예 등에도 관심을 갖고 이를 반영한 양식 실험을 끊임없이 펼쳤다. 1976~1977년에는 뉴멕시코 로스웰미술관(Roswell Museum & Art Center)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이 시기는 그의 작업에 큰 영향을 끼치며 변곡점으로 작용했다. (1976)이나 (1977)처럼 산이나 새, 동물 등이 연상되는 유기적 형태들이 생동감 있게 표현된 대작들이 주로 제작되었다. 뉴멕시코의 이국적 풍경에 영감을 얻은 그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초현실주의적 꿈속 풍경을 뒤섞어 자신만의 회화적 어법을 만들어 냈다. 한국으로 돌아와 개최한 순회전 (1978~1979)은 주로 “미국적이다”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그의 작품은 그렇게만 규정하기 어려운 독자적인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 1981. 캔버스에 아크릴릭. 80 × 177 ㎝. 개인 소장. . 1984. 캔버스에 아크릴릭. 73.5 × 99 ㎝. 개인 소장 1979년 영구 귀국해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던 작가는 경상도 지역의 자연 풍광에서 영감을 받아 산과 섬의 조형성을 탐구하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생전,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최욱경의 모습이다.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963년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길에 올라 추상표현주의에서 후기회화적 추상으로 이행하던 당시 미국 미술계의 변화를 경험하며 치열한 탐구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이루어 나갔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3부 ‘한국의 산과 섬, 그림의 고향으로(1979~1985)’에는 1979년 영구 귀국 후 영남대와 덕성여대 재직 시절, 1985년 작고하기까지의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특히 영남대 교수 시절은 그의 작품 세계에 또다른 변화를 불러왔다. 경상도 지역의 산과 바다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1981), (1984)과 같은 작품에 나타난 중간색과 절제된 선∙구성은 그가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고 평화로운 ‘원더랜드’에 정착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산과 섬의 조형성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꽃잎의 형태와 질서, 강렬한 색상에도 관심이 더욱 깊어져 (1984) 같은 작품도 제작했다.   2021년 10월 27일부터 2022년 2월 1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전을 관람객들이 감상하고 있다. 한국 추상 미술의 대표적 여성 화가인 최욱경의 예술 세계 전반을 재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었다. © 지안 잃어버린 이름 최욱경은 시 「나의 이름은」에서 자신을 어린 시절엔 겁 많은 눈 큰 아이였고, 유학 시절엔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말을 잃은 벙어리 아이였고, 미국 생활에 적응해 가던 무렵에는 무지개 꿈을 좇다가 길을 잃은 아이였으며,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름마저 잃어버린 이름 없는 아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찾기 위해서 끈질기게 시와 그림으로 스스로를 조형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그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1970~80년대는 후기회화적 추상과 형식을 공유하는 단색조 회화가 이미 한국 미술계의 주류 양식으로 자리 잡은 때였다. 미술사학자 최열(崔烈)에 의하면 최욱경은 추상표현주의를 자신의 것으로 토착화시켰지만, 한국 미술계는 그것을 한물간 것으로 치부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추상표현주의 화가 리 크래스너를 ‘미세스 잭슨 폴록’이라 칭하던 당시 미술계의 성차별주의 또한 그를 곤혹스럽게 했을 것이다. 무엇이 그를 더 힘들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타깝게도 최욱경은 1985년,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2021년 파리 퐁피두센터는 추상미술에 기여한 세계 여러 나라 여성 작가 106명의 작품 500여 점을 모아 이라는 전시를 열었는데, 이 중에는 최욱경의 회화 세 점도 포함되었다. 그가 찾고자 했고 말하고자 했던 언어가 그 작품들만으로 제대로 소개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를 통해, 여기서부터 그의 역사를, 또는 여성의 미술사를 다시 써나가야 할 것이다.

『레몬』

Review 2022 SPRING 1927

『레몬』 『레몬』 권여선 작, 자네트 홍 역, 147쪽, 20달러, 뉴욕: 아더 프레스(2021) 손에서 뗄 수 없는 추리 소설 그 이상의 소설 영어권에서의 데뷔작인 권여선 작가의 장편소설 은 조사실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곳에서 한만우는 아름다운 소녀인 반 친구 해언의 살해에 대해 조사를 받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설은 해언의 여동생 다언의 머리속에서 시작한다. 다언은 2002년 경찰 조사실에서 일어났을 거라 믿는 일을 상상한다. 그녀는 만우가 좀 어둔한 걸 알고 있고 일관되지 못한 진술 때문에 경찰들이 그가 살인자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부잣집 아이로 인기 많은 신정준이 또 다른 용의자였지만 알리바이가 인정되어 빠르게 혐의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만우를 용의자로 볼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해서 “미모의 고등학생 살인 사건”으로 알려진 이 케이스는 미궁에 빠졌다. 다언은 해결점을 찾으리라는 희망으로 모든 디테일을 되살려 보느라 17년을 보냈다. 근데 이 짧은 시놉시스를 읽고 오해가 없길 바란다. 이 소설은 범죄 소설이 아니다. 적어도 단순한 추리소설은 아니다. 누가 해언을 죽였는가 하는 문제는 소설 전체를 통해 탐색되지만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은 다언이 첫 장에서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질문이다. “과연 삶에 의미 같은 것이 있나.” 언니가 죽은 후 겪은 감정의 대혼란이 서서히 잦아들지만 다언은 여전히 죄의식으로 고통 받는다. 정신과 의사는 ‘생존자의 죄의식’이라 이름 붙일지도 모르지만 다언에게 죄의식은 좀 더 뿌리 깊다. 그녀가 언니를 사랑하기라도 했는지 의혹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무엇보다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사건이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상관없이 다시 되돌아 갈 수 없고 이미 결정된 것을 바꿀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책의 절반 부분이 다언의 시점에서 서술되지만 그녀의 시점이 유일한 건 아니다. 두 챕터씩 각각 해언의 반친구인 상희와 태림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상희는 해언과 가깝지 않았지만 다언과 친했기 때문에 독자에게 다언의 다른 모습을 제시한다. 태림은 사건과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녀는 해언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만우와 함께 있었고, 나중에 정준과 결혼한다. 독자는 여자 인물들의 눈을 통해서만 만우와 정준을 보기에 이들의 이야기는 신비에 싸여 있는 듯하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눈에 띄는 건 해언의 부재다. 이야기의 목적을 부여하는 희생자로서 해언은 주인공이긴 하지만 자신을 위해 발언하지 않으며 독자는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독자는 그녀에 대한 다른 인물들의 생각을 통해 그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해언은 이들이 자신의 꿈과 욕망, 공포와 불안을 투사하는 하나의 암호이다. 작가는 유려한 스토리텔링으로 독자를 끌어들이고 조각들이 천천히, 하나씩 맞춰져 가는 동안 추리소설의 긴장을 유지시킨다. 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이 완성되면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상실과 비극과 슬픔을 다루는지가 진정한 미스터리임을 좀 더 자각하게 된다. 우리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시합이 한창이었던 여름 어느 날에 발생한 끔찍한 범죄를 잊지 않지만 매 챕터를 지나며 시간이 거침없이 흘러가 17년 후인 2019년에 끝날 때가 되면 우리는 미스터리의 어떤 ‘해결’도 생존자들에게는 아무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된다. 다언과 상희와 태림에게 이 여정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며, 적어도 그들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선의 저편에서 해언과 재회할 때까지는 그럴 것이다. 마지만 페이지를 넘기며 이야기는 독자의 마음속에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질문들은, 우리가 모두 찾아야 하는 해답들과 함께, 우리 뇌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호랑나비』 황규관 작, 전승희 역, 111쪽, 9500원, 파주: 도서출판 아시아(2021)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영혼을 위한 시 “어떻게 하면 시가 현실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 해왔다”라고 황규관은 그의 신작시집 말미의 에세이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단순히 삶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 성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차이를 만들기 위해 쓴다. 그는 세계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으며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가 축복이 아니라 골칫거리라고 본다. 그의 시에서 자본주의는 특히 자연과 철저히 대조적이며 적대적이다. 예를 들어, “숲을 놓아주자”에서 시인은 숲에서 인간의 문명을 제거해야 하고 최종적으로 숲을 “새로운 주인”, 우리 자신은 “아둔한 숲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위기에 처한 환경의 가장 다급한 이미지는 표제작의 첫 부분에서 볼 수 있다. “장마가 끝나지 않는다 바다는 끓고 / 빙하는 놀라 주저앉고 대륙은 탄다.” 하지만 시인은 절망과 자포자기에 빠져 있기를 거부하며 대신 급진적 방법을 찾아 나아가고자 한다. 길에 대한 두 편의 시에서 하나는 프로스트의 유명하지만 종종 잘못 인용되는 시 제목을 따오고(“아직 가지 않은 길”), 또 하나는 “새로 가는 길”을 노래하면서(“동트는 쪽으로”) 이 여정에 대해 얘기한다. 황규관의 시들은 다층적이어서 비밀스러운 의미를 쉽게 노출하지 않지만 세심한 독자와 새롭게 변화된 세상을 갈망하는 이들에게는 음미할 가치가 있다. Seoul 4K Walker (http://www.youtube.com/c/seoul4k) 완벽한 팬데믹 우울증 치료제 코로나 팬데믹이 이제 삼년 차에 접어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해외여행을 갈망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한국에 와 본적이 없지만 관심은 있을 것이다(이 잡지를 손에 들었다면 분명히!) 혹은 당신은 이전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고 다시 또 오고 싶어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어쩌면 이미 한국에 있을 수도 있지만 이전처럼 전국을 마음대로 여행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유튜브 채널은 바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2020년에 시작된 이 유튜브는 당신의 팬데믹 우울증을 해소해 줄 완벽한 해독제다. 여기에 제공되는 대부분의 산보는 서울에서 이루어지는데 시청자는 혼잡한 대도시의 일상적 거리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만약 ‘강남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면 특별히 강남 편을 추천한다. 하지만 서울 바깥 모습을 찍은 비디오도 꽤 많다. 부산의 해운대, 여수 항구의 낭만적 밤거리, 전주의 전통 한옥 마을, 수원의 화성은 많은 하이라이트 중 몇 군데이다. 말할 것도 없이 거의 모든 비디오는 4K 해상도로 만들었고 따라서 큰 스크린에서 보기에도 최적화되어 있다. 다채롭고 활기찬 서울과 한국의 곳곳을 체험해 보기 바란다.

밤의 여행자들

Review 2021 WINTER 2410

밤의 여행자들 “The Disaster Tourist”(원제: 밤의 여행자들) 윤고은 작, 리지 뷸러(Lizzie Buehler) 역 186쪽, 8.99 파운드, 영국 Serpent's Tale 출판사, 2020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에코 스릴러 지난 일 년 반 동안 코로나 19가 가져온 팬데믹으로 꼼짝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언젠가 뉴노멀로 돌아갔을 때 하게 될 여행을 꿈꾸고 있다. 그런데 다음 목적지가 열대 해안가나 유서 깊은 도시가 아니라 최근에 일어난 지진으로 파괴되거나 쓰나미로 덮쳐진 도시, 혹은 싱크홀에 빨려 들어간 곳이라면? 윤고은의 소설 “밤의 여행자들”은 바로 이 상황을 전제로 한다. 소설의 주인공 유나는 재난여행 패키지 상품을 제공하는 여행사 ‘정글’에서 일한다. 도대체 누가 재난 지역을 여행하고 싶어 할까? 정글의 고객은 특별히 섬뜩함을 즐기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즐기는 사람들도 아니다. 한 대학생 고객처럼 초토화된 재난 지역을 돕는 ‘윤리적 관광’의 기회로 삼는 이들도 있고, 다섯 살 된 딸과 함께 여행하는 한 초등학교 교사처럼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는 이들도 있다. 또는 단순히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요나가 알고 있는 것처럼 좀 더 내밀한 힘이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모든 게 산산조각 난 장소에 있으면 재난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음을 실감하고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재확인한다. 자연 재난 피해자 추첨에서 뽑히지 않음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여행 직전 진해에 닥친 쓰나미를 경험한 여행자들에겐 더욱 강렬하게 와 닿는다. 이들이 겪은 재난은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진 않지만 그 끔찍한 여파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며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살던 곳의 재난을 뒤로 하고 여행자들은 베트남 해안에서 떨어진 무이 섬 여행을 단행한다. 요나는 스스로 원해서 여행을 온 게 아니라는 점에서 남다르다. 회사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직장 동료들이 자신을 꺼린다는 걸 알게 된 후 그녀는 사직서를 낸다. 하지만 놀랍게도 퇴사 대신 한 달 휴가를 받고 회사의 패키지투어에 동행하게 된다. 고객으로서가 아니라 패키지 상품을 지속할만한지 평가하기 위해서이다. 유나는 그렇게 다른 여행자들과 무이 섬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오래된 씽크홀과 그저 그런 화산, 그리고 부족 간에 일어난 대학살의 재연을 보게 된다. 그녀는 희생자 부족의 한 가정에 머문다. 요나가 예정대로 한국으로 돌아와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했다면 그녀의 이야기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순간의 방심으로 그녀는 공항으로 가는 길에 그룹과 떨어지게 되고 베트남 시골 지역에 혼자 남겨진다. 또 한 번의 방심으로 그녀는 지갑과 여권을 소매치기 당한다. 평소 그토록 경멸하던 문제 많은 여행자가 된 것을 자책하며 그녀는 무이 섬을 다시 찾아 가고, 그 휴양지 섬에서 표면 아래 숨겨진 섬뜩한 현실을 마주한다. 소설은 긴장감과 반전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사회적 이슈에 대한 예리한 시선과 결합해 독자가 찜찜한 기분으로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특히 휴가를 해외에서 보낸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더욱. ‘진짜’를 경험하고자 할 때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가? 우리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정교하게 꾸며진 외관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입을 크게 벌린 싱크홀처럼 공동체 전체를 집어삼킬 듯 위협적인 산업에 온전히 의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야기는 여전히 심각성을 유지한 채 막판으로 치닫고 독자는 이야기를 겨우 따라갈 뿐이다. 마지막 장을 넘긴 후에도 소설과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강한 여운을 남길 것이다. Homo Maskus (원제: 호모 마스크스) 김수열 작, 브라더 앤소니 역 73쪽, 10달러, 서울, 아시아출판사, 2020 제주와 그 너머의 휴먼 프리즘 김수열 시인의 새 시를 모은 작은 시집이 영문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는 제주도 출신이다. 이 사실은 처음엔 중요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제주는 늘 한국에서 특별한 곳으로 손꼽힌다. 한국의 일부이지만 주변에 위치해 있고 종종 가장자리로 밀려나기도 한다. 제주는 김수열 시인의 시 속에서 살아 있다. ‘조화’, ‘데칼코마니’, ‘달보다 먼 곳’과 같은 시들은 섬에서의 삶과 죽음 그리고 역사를 엿보게 해준다. 하지만 그의 시는 거시사를 넘어선다. 미시적 역사 렌즈를 통해 훨씬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차원에서 1948년 제주 4.3 사건과 1980년 광주 항쟁 같은 비극적 사건을 조명한다. 시인의 세계는 또한 제주를 넘어 확장된다. ‘베를린의 아침’과 ‘코펜하겐의 하루’에 대해 쓰며 중국의 ‘고안촌에서’ 살고 있는 노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김수열의 시는 분명 아주 한국적이면서 제주스럽다. 그러나 동시에 보편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 노년이나 죽음과 같은 보편적 주제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시집의 마지막 두 편은 표제작인 ‘호모 마스크스’를 포함하는데, 이는 분명 팬데믹을 견디며 분투하는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반반 프로젝트, The Halfie Project 벡키 화이트와 반반 프로젝트 팀 www.thehalfieproject.com 하이브리드 문화 정체성을 공유하고 탐색하다 창시자 벡키 화이트의 말에 따르면 ‘반반 프로젝트’는 예술 작업인 동시에 연구 프로젝트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연습장이면서,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들을 탐색한다. 구체적으로는 혼혈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집중한다. 혼혈 한국인들은 종종 묘한 위치에 처한다. 화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이들은 “두 세계 모두에 속하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즉 이들은 다른 반쪽 문화에서는 한국인 또는 아시아인으로 여겨지고, 한국에 오면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반반 프로젝트는 이러한 공통된 경험과 의문에 집중한다. 그리고 다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정체성이나 소속감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공간을 제공하고자 한다. 프로젝트 팀의 웹사이트에서 ‘반반 프로젝트 팟캐스트’와 유튜브 채널, 인스타그램을 만나볼 수 있다. 다른 혼혈 한국인들과의 인터뷰가 주 콘텐츠이지만 ‘눈치’, ‘한’과 같이 설명하기 힘든 한국적인 문화 개념을 정의해보기도 하고, 정신 건강 같은 중요한 주제에 대해 통찰력 있는 문화적 해석을 제공한다. 만약 당신이 혼혈 한국인이거나 - 프로젝트 팀은 혼혈인이라면 누구라도 환영한다 - 혹은 다문화적 정체성 이슈에 관심이 있다면 이 프로젝트는 당신을 위한 것이다.

한국식 주크박스 뮤지컬의 도전

Review 2021 WINTER 1020

한국식 주크박스 뮤지컬의 도전 1980~90년대 젊은 세대의 감성을 흔들었던 이영훈(1960~2008 Lee Young-hoon 李永勳)의 팝 발라드는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애창곡으로 남아 있다. 이 노래들을 모아 엮은 뮤지컬 가 올 가을 시즌 세번째 무대에 올려져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 는 1980~90년대 젊은 세대에게 크게 사랑받았던 팝발라드 작곡가 이영훈(Lee Young-hoon 李永勳 1960~2008)의 명곡들을 바탕으로 한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서울의 광화문과 덕수궁 옆 정동길을 무대로 꾸몄다. © CJ ENM 요즘 흥행하는 뮤지컬은 두 가지 중 하나다. 왕년의 인기 영화를 활용한 무비컬(moviecal) 또는 흘러간 대중음악으로 꾸민 주크박스 뮤지컬(jukebox musical). 거대한 고릴라 인형이 무대에 등장하는 이나 로버트 스티븐슨 감독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가 가장 대표적인 무비컬이고, 미국 밴드 포 시즌스(Four Seasons)의 음악으로 꾸민 나 스웨덴 그룹 아바(ABBA)의 히트곡들이 연이어 펼쳐지는 가 흥행을 보증하는 주크박스 뮤지컬의 대명사다. 대중음악을 무대용 콘텐츠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주크박스 뮤지컬을 팝 뮤지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수많은 작품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주크박스 뮤지컬의 파고가 국내 시장에도 불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7~9월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무대를 꾸민 이후 지방 공연을 이어간 는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다. 싱어롱 커튼콜 이 작품은 소위 ‘트리뷰트 뮤지컬’ 계열에 속한다. 이영훈 작곡가가 만들고 가수 이문세(李文世)가 노래했던 음악들이 소재로 쓰였다. 사실 작곡가 이영훈을 빼고 1980~90년대 한국의 대중음악을 말하긴 힘들다. 손만 대면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는 그리스 신화의 미다스처럼 그는 수많은 히트곡들을 남겼다. 뮤지컬 제목으로 쓰인 (1988)를 비롯해 이 작품에 등장하는 (1987), (1988), (1991) 등은 모두 관객들이 흥얼거리며 따라부르게 되는 주옥같은 당대의 명곡들이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주크박스 뮤지컬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 역시 노스탤지어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 뮤지컬 마니아들뿐 아니라 이영훈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공연장으로 끌어들였다. 게다가 커튼콜에서 아이돌 그룹 빅뱅이 리메이크해 큰 인기를 누렸던 (1988)이 연주되면 관객들은 더 이상 객석에 앉아만 있기 힘들게 된다. 관객들이 목 놓아 노래를 따라부르며 환호하는 ‘싱어롱 커튼콜’은 이 무대가 만들어 낸 특별한 체험이자 감동이었다. 극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시간 여행 안내자 역을 맡은 뮤지컬 배우 차지연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분출해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극작가 겸 연출가 고선웅이 극본을 쓴 이 작품은 기억과 현실, 환상이 교차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세 가지 버전 독특하게도 는 여러 버전들이 있다. 이영훈의 곡들을 뮤지컬로 재구성한 첫 시도는 인기 뮤지컬 연출가 이지나가 2011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막을 올렸던 무대다. 세간에는 이영훈이 암 투병 말기에 기본적인 이야기의 골격을 만들었다는 후문도 있다. 세 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특히 중장년층으로부터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며 대형 무대에서 초연되는 창작 뮤지컬로서는 보기 드문 흥행을 기록했고, 이듬해 LG아트센터에서 재연되었다. 두 번째로 시도된 김규종 연출가의 는 전작의 스핀오프 작품이며, 소극장을 중심으로 라이브가 강조된 무대였다. 장기판 모양의 격자 무대 세트 안에 악기 연주자들이 각각 자리 잡고 한층 강화된 음악적 매력을 제공했다. 콘서트에 가까운 이 버전은 상하이, 항저우, 난창, 푸젠 등 중국의 여러 도시에서도 공연을 이어갔다. 올해 상연된 는 유명한 극작가 겸 연출가 고선웅이 극본을 새로 쓰고, 이지나가 복귀해 연출을 맡았다. 임종을 앞둔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참된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기억과 현실, 환상이 교차한다. 이 세 번째 버전은 2017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 초연과 2018년 재연에 이어 이번이 삼연째다. 이 작품은 스타일리시한 무대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아온 연출가의 작품답게 몽환적이면서도 애틋한 감성을 잘 담아낸 수작이었으며, 여전히 식지 않은 이영훈표 음악들의 매력을 효과적으로 구현해 냈다고 평가되었다. 특히 배우의 성별에 관계없이 배역을 정하는 젠더프리 캐스팅도 화제가 되었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가수와 배우들의 출연, 호흡이 잘 맞는 연출과 음악감독, 물오른 듯한 무대 디자인 등 솜씨 좋은 제작진의 조합을 비롯하여 적절한 마케팅 전략과 공연의 시기적 선택 등이 주요한 흥행 요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작곡가 이영훈 이영훈이 처음부터 대중음악계에 종사했던 것은 아니었다. 연극이나 방송, 무용 등에 사용되는 배경음악의 작곡가로 먼저 활동을 시작했고, 20대 중반 대중음악 분야로 영역을 넓혔다. 이 무렵 그는 1978년 가수 겸 MC로 데뷔한 이문세를 만나게 되는데, 당시 2집 음반까지 냈던 이문세는 가수보다는 라디오 DJ로 더 유명했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1985년 발표한 3집 앨범의 타이틀곡 가 TV 가요 프로그램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고, 이 노래뿐 아니라 음반에 수록되어 있던 곡들 대부분이 히트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 이영훈은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작사가이자 작곡가로 떠올랐다. 2년 후에 나온 이문세의 4집 은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드는 앨범으로, 당시 280만 장 이상의 경이로운 판매고를 올렸다. 이후 두 사람의 동행은 2001년 13집 까지 계속됐다. 그는 이문세와의 협업이 뜸해진 시기에는 드라마와 영화 음악을 만들거나 이문세에게 주었던 노래들을 편곡해 관현악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금도 서울 덕수궁 정동길에 세워진 그의 노래비는 그 시절을 추억하는 사람들에게 남다른 감회의 장소가 되고 있다. 1980년대 군부 독재에 맞선 젊은이들의 시위 현장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주인공 역을 맡은 가수 윤도현이 피아노를 연주하며 이영훈의 곡 (1988)를 부르고 있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주크박스 뮤지컬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역시 노스탤지어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 친숙함의 장점 한국에서는 가 주크박스 뮤지컬의 대명사이자 전부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이 장르를 세분화하면 할 이야기가 많아진다. 주크박스 뮤지컬은 그 특성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된다. 1980년대 히트한 록 음악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처럼 불특정 다수의 다양한 대중음악들을 시대나 주제, 형식에 따라 엮어내는 컴필레이션 뮤지컬 계열과 처럼 특정 뮤지션의 음악적 산물만을 활용하는 트리뷰트 뮤지컬 계열이 있다. 전자가 이야기의 주제에 따라 다양한 음악가들의 음악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면, 후자는 기존의 공연 애호가뿐 아니라 원래 그 음악을 좋아했던 팬들까지도 소구할 수 있는 매력을 지닌다. 물론 해당 뮤지션이 더 이상 활동을 하지 않거나 세상을 떠났다면 관심은 더욱 배가되게 마련이다. 무비컬이나 주크박스 뮤지컬이, 특히 후자가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관객들이 생소한 노래와 이야기를 한꺼번에 대하는 부담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 사실 두세 시간 남짓한 무대에서 새로운 노래들을 수십 곡이나 들어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작곡자는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총동원한 수려한 멜로디를 잔뜩 들려주고 싶겠지만, 관객은 소화불량을 일으킬 수도 있다. 주요한 멜로디를 반복적으로 변주하거나 공연 전 미리 콘셉트 음반을 만들어 대중에게 각인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주크박스 뮤지컬은 장점이 많은 공연 형식이다. 일단 무대에 등장하는 노래들이 이미 관객들과 친숙하다. 게다가 매번 현장에서 재연되는 만큼 그 생동감이나 역동성은 거실 오디오나 책상 위 조그마한 스피커로 들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주크박스 뮤지컬에 공연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원곡이나 해당 음악가를 추종하던 음악 팬들까지 몰려드는 이유가 여기 있다. 또한 이미 대중적 인지도를 갖고 있는 콘텐츠를 활용하기 때문에 제작자 입장에서도 흥행에 대한 부담과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한아름 가득 관계를 이해하다

Review 2021 AUTUMN 1911

한아름 가득 관계를 이해하다 한아름 가득 관계를 이해하다 “My Brilliant Life”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작, 김지영 역, 203쪽, 14달러, 뉴욕 Forge Books 출판사, 2020 2011년에 출간된 김애란의 이 소설은 주인공 소년 아름의 짧지만 빛나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조로증 환자로 16세에 이미 80세 노인의 몸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는 좀 더 의미심장하다.아름은 17세 생일 전에 한 가지 일을 끝내는 것에 집착한다. 그 일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부모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모아 그들이 처음 만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민한 관찰자인 그는 부모의 이야기가 세부적인 내용에서 서로 맞지 않음을 알아채지만 그 어느 편에 기울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럽다. 사실 그는 “이야기 편에 서 있다.” 마치 이야기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처럼. 어떤 이야기도 동기가 있다. 그 동기가 단순히 재미를 위한 것일지라도. 아름에게 이야기는 부모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다. 그는 오래 살아서 상을 받거나 대학 학위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열의에 찬 아이처럼 그 역시 부모에게 기쁨을 주고 싶고, 그들이 자신의 풍부한 어휘와 우아한 문장에 감탄하는 걸 상상한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동기일 뿐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 대해 알리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그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자신이 내면적으로 느끼는 것보다 텔레비전에서 나온 자신의 모습이 훨씬 더 나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어떻게 되는지를 알게 된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결과로 그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서하라는 십대 소녀로부터 이메일을 받게 된다. 주고받은 이메일에서 그녀가 자신의 꿈이 작가라고 밝히자 아름은 가족 이야기를 쓰고 싶어진다. 이때 그가 이야기를 쓰고 싶은 열망은 또 다른 차원의 의미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글을 씀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멋진 인상을 주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우리가 원하는 건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란 전 우주를 하나의 생명체로 이끄는 연결 조직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별개의 독립체이며 차가운 바다를 표류하는 섬이다. 하지만 이해를 하게 되면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우리 모두가 연결된다. 아름의 이야기가 어쩔 수 없이 슬프긴 해도 비극적이지는 않다. 아니 적어도, 아름과 그의 가족에 공감을 통해 연결됨으로써 이야기는 비극을 넘어선다. 아름이 맞닥뜨린 질문에 대한 쉬운 답은 없지만 답을 찾는 그의 여정에 함께 함께 하는 건 가치가 있다. 그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함으로써 우리는 그의 빛나는 삶이 온전함을 느낀다. 사실 그의 이름은 ‘한아름’으로 읽힐 수 있고 이는 소설에서 적절한 의미를 갖는다. 이 소설을 읽는다는 건 아름과 그의 가족을 껴안는 것이며 우리의 팔이 한아름 가득 찰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좀 더 꽉 껴안는 것뿐이다. 희망에 부치는 씁쓸한 애가 “Hope is Lonely” 『희망이 외롭다』, 김승희 작, 브라더 앤서니 역, 129쪽, 10.79파운드, 랭커셔 Arc Publications 출판사, 2021 브라더 앤서니에 의해 번역된 김승희의 시집은 읽기에 불편하고, 심지어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모든 훌륭한 시가 그렇듯 이 시들 역시 독자에게 강렬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이 마지막으로 발표한 와 두 시집에서 골라낸 시들을 묶은 이 영문 시집은 시 번역에 있어서 독특한 접근을 시도한다. 즉 한국어 원문과 영문 번역을 병행해서 실었다. 편집자의 말대로 번역된 시가 영어 시도, 외국어 시도 아닌 완전히 다른 무엇, 원문을 대체하지 않지만 그것에 거의 공생하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방식이다. 원문을 이해할 수 없는 독자에게도 이 시집은 많은 것을 제공한다. 시들이 첫눈에 어둡고 슬퍼 보이고, 심지어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또 다른 한편에는 희망과 치유가 있다. 표제작인 ‘희망이 외롭다’는 절망을 노래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꼼꼼하게 읽으면 희망에 부치는 씁쓸한 애가임을 알 수 있다. 절망은 쉽지만 희망은 어렵고 그렇지만 시인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희망을 “종신형”이라 부르면서. 김승희의 시를 번역으로 읽을지라도 그녀의 목소리는 우리의 감각을 흔들고 우리에게 빛을 가리키며 크게 울린다.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케이팝에 관한 유튜브 채널 “DKDKTV” 데이비드 김과 데니 김의 유튜브 유튜브 채널 DKDKTV는 2016년 크리에이터 데이비드 김과 데니 김이 케이팝과 리액션 비디오를 조합해 콘텐츠를 만들며 시작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원래 케이팝 팬이 아니었다. 하지만 BTS, 빅뱅, 엑소 같은 그룹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며 영어권 구독자에게 한국적인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인기 케이팝 비디오 리액션을 시작했다. 리액션 비디오가 관심을 끌면서 채널은 다른 시리즈로 확장했다. 이제 DKDKTV는 70만 명 이상의 구독자와 덕스(Ducks)라 자칭하는 열렬 팬 기반을 갖게 되었다. 데니와 데이비드, 그리고 정기적으로 출연하는 다른 초대손님 호스트들은 팬들에게 케이팝 세계의 최근 소식과 사건에 대해 알려준다. 주 단위로 진행되는 “DK 뉴스”는 케이팝에 처음 관심을 갖는 구독자들에게 좋은 프로그램이다. 좀 더 깊이 있는 토론을 위해서는 KSTea가 있다. 한 시간 동안 라이브스트림을 진행하며 케이팝 세계에 대해 “비밀을 까발린다”, 데이비드와 데니는 외국인 팬을 위해 설명하는 비디오를 만들기도 했는데 “한국인이 설명하는 케이팝”과 “케이팝 역사 설명하기” 두 시리즈가 그것이다. 채널은 케이팝에 초점을 맞추는 데 우선순위를 두지만 데니와 데이비드는 폭넓은 관심을 갖고 있어 종종 새로운 비디오 아이디어를 시도하기도 한다. 특별히 흥미로운 시리즈 하나는 “DK Asks"로 리포터가 중요한 이슈에 대한 한국 젊은이들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길거리 남녀“ 인터뷰를 진행한다. 질문은 케이팝을 중심으로 하지만 왕따나 흑인민권운동(BLM) 같은 중요한 사회적 이슈를 건드리기도 한다. 찰스 라 슈어(Charles La Shure)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미지와 텍스트로 소통하다

Review 2021 AUTUMN 1702

이미지와 텍스트로 소통하다 사회적 문제를 재치 있고 날카롭게 조명해 온 민중미술 작가 주재환(Joo Jae-hwan 周在煥 1941~)과 인기 웹툰 작가 주호민(Joo Ho-min 周浩旻 1981~)은 부자 관계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합을 활용한다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은 이런 공통점에 초점을 맞춘 전시다. (왼쪽). 주재환. 2020. 캔버스에 아크릴, 플라스틱 장난감. 53.2 × 45.5 ㎝. . 주호민. 2021. 디지털 드로잉. 화가 주재환(Joo Jae-hwan 周在煥)과 웹툰 작가 주호민(Joo Ho-min 周浩旻) 부자가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실에 나란히 걸린 서로가 그려준 초상화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주재환은 현대사의 주요 이슈들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조망해 왔으며, 아들 주호민은 한국의 신화를 기반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위트 있게 해석한 웹툰 로 널리 알려졌다. ⓒ 박홍순(朴弘淳), 월간미술 열심히 공부를 하고 가야 겨우 이해가 되는 난해한 미술 전시들이 있다. 하지만 가끔은 별다른 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싶을 때가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5월 18일부터 8월 1일까지 열린 이 바로 그런 전시다. 언뜻 가볍게 보이기도 하지만, 결코 얄팍하지 않다. 다양한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꼬집으면서도 마냥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진솔함과 유머가 두 작가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재환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을 통해 메시지가 전달되는 작품을 주로 창작해 왔다. 그의 작품에서 텍스트는 시적 메타포를 지니며, 보는 이의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주호민의 웹툰에서 텍스트는 대개 말풍선 속 대사로 표현되며 서술성이 강조되어 독자에게 영화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상이한 특성을 지니는 두 장르에서 이미지와 텍스트가 각각 어떤 방식으로 기능하는지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살펴보는 것도 이번 전시의 묘미이다. . 주재환. 2010. 캔버스에 아크릴. 193.7 × 130 ㎝. 1980년 ‘현실과 발언’ 그룹 창립전에 출품해 세상에 알려진 이 작품은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부조리와 압박에 대한 풍자로 마르셀 뒤샹의 를 패러디한 것이다. ‘현실과 발언’은 이후 10년 동안 민중 미술 운동을 통해 미술의 사회 참여를 이끌었다. 아버지 주재환 주재환은 1960년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집안 사정으로 중퇴를 결정한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마흔 즈음에야 작가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이에 대해 그는 “체질적으로, 자연 발생적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1980년 창립해 1990년 해체된 미술 그룹 ‘현실과 발언’은 민중미술 운동과 미술의 사회 참여를 이끌어 낸 모태였다. 이 단체의 창단 멤버였던 그는 창립전에 마르셀 뒤샹의 를 패러디한 작품 를 출품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변주되어 그려졌는데, 제목에 언급된 ‘봄비’는 사실 계단에 서 있는 남자들이 누는 오줌이다. 아래로 갈수록 굵어지는 오줌 줄기는 하층부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이 견뎌야 하는 부조리와 억압을 상징한다. 그의 작품 소재는 일상 곳곳에 뻗어 있다. 다 마신 음료수 병을 빨래 건조대에 매달아 환경 문제를 암시한 (2005)나 현대 사회에 부재하는 도덕 관념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 동네 목욕탕에서 가져온 수건을 재료로 삼은 (2012)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버려진 일상 사물을 재활용해 사회적 메시지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는데, 바로 이 점이 그의 작품 세계를 요약하는 가장 큰 특징이다. 최근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자유로운 예술 세계나 유머 감각이 “타동사가 아닌 자동사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이어서 그는 “관람객이 전시를 보다가 하품이 나오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세월이 지나며 깨달은 게 있다면 모든 작가에겐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시절 그는 사회적 불평등에, 군부 독재에, 정형화된 한국의 단색화 미술에 저항했지만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그의 마음도 예전보다 순해진 지금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깊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사회에는 희망의 노선과 절망의 노선이 늘 꽈배기처럼 얽혀서 함께 쭉 간다. 긍정과 부정이 섞여서 가는 게 인간의 운명”임을 자각한 그는 동시에 작가의 무기력함도 깨닫게 되었음을 고백했다. “작품이 전시장에 내걸리는 순간 작가는 무력해지고, 평가는 관람객에게 맡겨진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바를 발견하는 관람객을 볼 때 다시 또 배우게 된다.” . 주재환. 2005. 알루미늄 빨래대, 각종 음료수 제품, 드링크 제품. 가변 크기. . 대형 빨래 건조대에 각종 음료수를 담았던 빈 페트병과 빈 캔을 주렁주렁 매달아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작품이다. 또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일으키는 탄산음료를 통해 대량소비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의 욕망과 양면성도 담아냈다. . 주재환. 2010. 유리 액자에 냄비, 돌, 사진 복사. 70.8 × 53.7 ㎝. 배고픈 아이를 억지로 재워야 하는 브라질 빈민촌 엄마의 이야기와 백금을 입힌 두개골에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은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를 대비시켜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격차를 풍자한 작품이다. . 주재환. 2012. 캔버스에 아크릴, 수건 콜라주. 66 × 53 ㎝. 동네 목욕탕에서 수건을 훔치는 사람들의 도덕 관념을 꼬집은 작품이다. 주재환은 일상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소재를 유머를 담아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 주재환. 2008. 캔버스에 아크릴, 매직 잉크. 96.3 × 96.5 ㎝. 2008년 당시 재벌 기업의 비자금 사건에 연루된 리히텐슈타인의 을 패러디해 사회 양극화 현상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 아버지와 아들, 미술과 웹툰, 아날로그와 디지털, 이미지와 텍스트가 모두 한자리에 모인 은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신명 나는 한바탕 잔치이다. . 주호민. 2021. 후렉스에 디지털 출력. 740 × 220 ㎝. 주재환의 대표작 를 패러디한 주호민의 대형 설치물로 아버지의 저항 정신과 유머 감각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아들 주호민 바로 이 지점에서 주호민은 그의 아버지와 맞닿아 있다. 그에게도 독자들의 평가가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작업을 어깨너머로 보고 자랐다. 그림을 그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는지 중학생 때부터 만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친구들에게 보여 주면 재미있어 하는 모습이 좋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자신이 그린 만화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빠른 피드백에 ‘중독’되었다. ‘더 웃겨야지’ 하는 마음으로 2000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만화를 올리기 시작한 것으로 커리어가 시작됐다. 독자들의 평가가 그를 결국 웹툰 작가의 길로 이끈 것이다. 군대 생활을 소재로 한 공식 데뷔작 (2005)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2010~2012) 시리즈로 국가 대표 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2017)은 누적 관객수 1,400만 명을 기록하며 한국 영화 역대 3위에 오를 만큼 성공했으며, 후속작 (2018) 역시 누적 관객수 1,200만 명을 동원했다. 유튜버로도 활동하며 21만 명의 구독자를 가진 이 스타 작가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만화라는 게 미술관에 걸려고 만드는 게 아니라서 벽에 걸리는 게 영 어색하고, 관람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무척 부담스러웠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미술관 2층을 가득 메운 주재환 작가의 다양한 회화와 설치 작품들은 시각적으로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반면에 주호민 작가의 대표작들 중 주요 장면을 디지털 프린트한 전시물과 콘티가 그려져 있는 스케치북을 주로 전시한 3층 전시실은 언뜻 휑한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수많은 관람객들이 전시물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며 그가 창조해 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책의 행간이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듯 3층 공간의 여백은 매 장면을 곱씹으며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여유로 작용했다. 창작 당시 그가 참고했던 서적들 역시 일상적인 것들이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변신의 순간을 보여 준다. 3층 전시실의 관람객들이 한국인의 저승관이 담겨 있는 주호민의 웹툰 을 감상하고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신화와 설화적 요소로 전시 벽면을 구성했다. ⓒ 연합뉴스 컬래버레이션 이 전시의 가장 큰 특징은 각기 다른 영역에서 창작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컬래버레이션이라는 점이다. 전시장 입구에 나란히 걸린 두 사람의 초상 ― 아이스크림 모형과 선글라스를 활용한 주재환의 콜라주 작품 (2020)과 웹툰 스타일로 표현한 주호민의 디지털 드로잉 (2021) ―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반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초상화에 대해 담담한 평가를 내렸다. 아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이 “잘 늙었다”는 것을 느꼈다는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작품이 “그냥 너무 웃기다”는 아들…. 한편 아들은 아버지의 대표작 를 패러디한 대형 설치물 (2021)를 내놓았다. 전자가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하강하는 이미지를 보여 준다면 후자는 여러 캐릭터들이 서로를 끌어 주고 올려 주는 상승과 협업의 이미지를 가진다. 아버지의 저항 정신과 유머 감각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낸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가 작업하는 모습이 “그저 당연하게” 느껴졌다는 주호민은 자신이 막상 창작자가 되어 보니 “얼마나 어렵고 신기한 일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지금 아버지가 여든인데 여전히 작업하시는 게 대단하게 느껴진다. 나는 벌써 힘이 드는데…. 어떻게 계속 작품 활동을 이어오셨는지 불가사의할 정도”라며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드러냈다. 전시는 스트리머 주호민이 화가 아버지와 협업한 영상물로 끝을 맺는다. 두 명의 배우 중에서 더 좋아하는 사람을 고르고 골라 결국 최종적인 이상형을 선택하는 형식의 ‘이상형 올림픽’ 게임을 변형시켜, 아들은 아버지에게 본인의 작품 중 더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씩 고르게 했다. 더 애정이 가는 작품을 고르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각 작품에 얽힌 자신의 기억, 소회 그리고 아들과의 추억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전시 제목에 아들의 이름이 먼저 들어가서 서운하지 않냐는 필자의 우문에 주재환 작가는 “오히려 좋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회화니 만화니 하는 장르 구분도, 누가 먼저니 따지는 것도 전부 구시대적 사고방식”이라고. 아버지와 아들, 미술과 웹툰, 아날로그와 디지털, 이미지와 텍스트가 모두 한자리에 모인 은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신명 나는 한바탕 잔치이다.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Review 2021 SUMMER 2049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Bluebeard's First Wife 작가 하성란, 번역 자넷 홍, 229쪽, 15.95 달러, 뉴욕: 오픈 레터 (2020) 하성란 작가의 단편집 는 인간관계의 가장 어두운 심연으로 가는 여정이다. 상실과 고립, 절망을 서정적으로 그리는 소설은 종종 꿈 속 같다. 엄격한 서사적 구조를 피하고 소품처럼 작은 이야기들이 고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데 이는 무언가를 강하게 선언하기보다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적합하다. 그래서 독자는 그녀의 이야기들이 아주 깊은 감정의 수위를 건드린다고 느낀다. 소설 속 많은 인물들이 경험하는 고통과 비통함을 나누게 되는 것이다. 하성란 작가의 인물들은 주위 세계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세상은 단순히 잔인하고 비인격적인 힘이 개인을 무자비하게 망가뜨리는 게 아니다. 이 세상은 다른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에 존재의 커다란 공포가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거리를 둔 ‘타인들’, 예를 들어 아파트 위층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 혹은 작은 산마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도시 밀렵꾼, 혹은 약혼자의 이상한 친구들이다. 어떨 땐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들이기도 하다. 남편, 아내, 딸, 아들처럼. 이 ‘타자들’이 가깝든 멀든,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요한 주제는 우리가 누군가를 진실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어떤 알지 못할 비밀을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알려고 하지 않고 착각 속에 안전하게 머물기를 원할 수도 있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하는 행동을 봐서는 위의 해석이 가능하고 할 수 있다. 고립된 산마을로 서울에서 파견된 경찰은 마을사람들이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잔디밭이 깔린 전원풍의 삶을 원해 서울 외곽지역으로 이사한 부부는 걷지 못하는 장애인 아들보다 잔디밭에서 활개 치며 뛰어 다니는 개에게 더 신경을 쓴다. 이런 인물들에서 우리는 자신의 꿈과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을 피하려는 인간적 경향이 투영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이나 다른 주인공들이 공감력이 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들도 결국 인간일 뿐이라는 것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집을 관통하는 또 다른 주제는 ‘외곽’이다. 소설 대부분의 배경이 서울의 외곽이거나 더 멀리 떨어진 시골이다. 도시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라도 종종 도시의 경계를 넘어 이동한다. 주변으로의 이 같은 이주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도시의 번잡함에서 도망치고 싶은 욕망이나 어떤 임무를 수행해야 할 필요처럼. 어떤 경우에든 도시를 일단 떠나면 우리는 보통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불확실한 경계 공간에 있게 된다. 시골에 가면 밀렵꾼이 되는 도시 거주자가 어쩌면 이 같은 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하지만 이런 많은 이야기에서 그 현상은 다양한 차원에서 일어나는 걸 볼 수 있다. 하성란의 이야기는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 게 분명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이야기들이 하나의 문제점에 바로 도달하기를 (혹은 하나의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하기를 종종 거절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재독함으로써 책은 더욱 흥미로워진다. 한국 미술의 주요한 시기에 대한 연구서 한국 미술: 19세기부터 현재까지 저자 샬롯 홀릭, 264쪽, 60달러, 런던, 리액션 북스 (2017)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19세기말에서 21세기 초까지 100년 정도에 걸친 한국 미술을 “완벽하게, 백과사전처럼 읽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대신에 한국사에서 격동의 시기였던 이 기간 동안 이정표가 될 만한 중요한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전체적으로 홀릭은 미술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에 어떻게 관계하는지 파고든다. 첫 장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몇 년을 조명하는데 이때 한국은 근대 국가로 변모하고 미술은 점점 더 정치화된다. 두 번째 장은 식민시기에 관한 것으로 이때 미술에 대한 이해가 엘리트의 독점물에서 모두에게 속한 것으로 변한다. 세 번째 장은 2차 대전 후 북한에서 김일성 이데올로기에 의해 추진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미술이 발전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네 번째 장은 앞 장과 병행해서 이 시기 남한의 경우를 다루는데 남한에서는 추상 미술이 대두한다. 다섯 번째 장에서는 1970년대 민중 미술이 소개된다. 마지막 장인 여섯 번째 장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예술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 한국 예술가들의 변화를 밝힌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한국 미술사에서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시기에 대한 입문서로서 환영할 만하다. 또한 영어로 쓰인 드문 저서로도 인정을 받을 만 하다. 익숙함과 신선함이 섞인 파스텔 2020 JAZZ KOREA FESTIVAL LIVE at Boomiz 송하철 퀄텟, CD (27분), 서울: 게이트포 뮤직 앤 아트 Gatefor Music & Art 송하철(Song Ha-chul)은 자신의 길을 일찍 찾았다. 어린 시절 클라리넷을 불며 음악에 입문했고 15세 때 재즈 색소폰을 시작했다. 1년 만에 교육과정을 모두 마치고 17세에 경희대 포스트모던음악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그는 뮤지션을 향해 질주했다. 2015년 재즈 전문 매거진 의 ‘라이징 스타’로 선정됐고 ‘자라섬 국제 재즈 페스티벌’, EBS 프로그램 등 여러 무대에서 인정받는 프로페셔널 색소포니스트로 명성을 얻었다.송하철 퀄텟(Song Ha Chul Quartet)의 EP앨범 ‘2020 JAZZ KOREA FESTIVAL LIVE at Boomiz’는 2021년 2월에 발매되었으며 코로나 19로 인해 2020년 11월 온라인으로 진행된 앙카라의 주터키한국문화원 주최 ‘재즈 코리아 페스티벌’의 공연 실황이다.음반의 첫 곡은 2017년 발표한 데뷔앨범 의 타이틀곡이기도 한 ‘Straight Life’다. 위풍당당하고 펑키한 서수진(Suh Soo-jin)의 드럼 연주 뒤에 행크 모블리(Hank Mobley 1930~1986)를 연상시키는 송하철의 색소폰 연주가 굵직하고 뚜렷하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각인시킨다.‘Marionette’는 임채선(Yim Chae-sun)의 몽환적인 피아노 위에 깔리는 송하철의 색소폰이 유독 아름다운 곡이다. ‘카니발의 아침(Manha De Carnival; 1991)’에서 스탄 게츠(Stan Getz 1927~1991)가 자아냈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매일 낡아가는 익숙한 일상의 시간처럼, 곡은 쓸쓸하게 흘러가다 마친다.‘Going Up’에서는 이동민(Lee Dong-min)의 덤덤한 베이스가 포문을 열면 송하철의 솜사탕같이 부풀어 오른 음색의 색소폰이 뒤따른다. 이어지는‘Somebody's Gold Fishery’에서 송하철의 색소폰 음색은 민첩함과 포근함을 함께 지니며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연주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다.‘한국의 재즈’ 라기 보다는 재즈에 익숙한 모든 이에게 깨끗한 파스텔 톤으로 다가올 앨범이다. 재즈가 처음인 사람도 이끄는 힘을 가졌다. Charles La Shure Professor, Department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Seoul National University 류태형(Ryu Tae-hyung 柳泰衡)음악 칼럼니스트

어둠 속에 함께 빛나는 별들

Review 2021 SUMMER 1729

어둠 속에 함께 빛나는 별들 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올해 첫 기획전으로 1930~50년대 활발했던 예술가들을 조명한다. 특히 이 전시는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었던 불행한 시대에 화가와 문인들의 교류가 어떤 예술적 성취를 낳았는지에 초점을 맞춰 큰 화제가 되었다. 1. . 구본웅(具本雄 1906~1953). 1937. 캔버스에 유채. 71.4× 89.4 ㎝.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구본웅은 인상파 위주의 아카데미즘이 유행하던 시기에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화면에 그려진프랑스 미술 잡지 『Cahiers d’Art』를 통해 알 수 있듯 구본웅과 그의 지인들은 서구의 새로운 문화 예술 경향을 동시대적으로 향유했다. 1930년대는 일제 식민 통치가 더욱 혹독해진 암흑기였지만, 한편으로는 근대화가 진행되며 한국 사회에 그 어느 때보다 큰 변화가 일어난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경성(일제 강점기의 서울)은 신문물이 다른 지역보다 먼저 유입되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포장된 도로에는 전차와 자동차가 달리고, 화려한 고급 백화점들이들어섰다. 거리에는 새로운 유행을 앞서 받아들여 뾰족구두를 신은 모던 걸과 양복 차림의 모던 보이들이 가득했다. 현실에 대한 절망과 근대의 낭만이 혼재했던 경성은 예술가들의도시이기도 했다. 당시 경성의 예술가들은 너나없이 다방으로 모여들었다. 중심가 골목 곳곳에 즐비한 다방은 단순히 커피만 파는 가게가 아니었다. 예술가들은 이국적 실내 장식과 커피 향기속에 울려 퍼지는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의 노래를 들으며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해 이야기했다. 카루소와 아방가르드 예술 식민지 국민의 가난과 절망이 예술의 혼마저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고난 속에 피어난 창작의열정 뒤에는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갈 방도를 찾았던 예술가들의 우정과 협업이 있었다.이 ‘역설적 낭만’의 시대를 돌아보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전시는 연일 많은 관람객들을 불러 모았다. 근대를 대표하는 50여 명의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이 전시는 제목이 말해주듯 화가와 시인, 소설가들이 장르의 벽을 넘어 서로 어떻게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예술적 이상을 펼쳐냈는지 돌이켜본다. 전시는 4개의 주제로 요약된다. ‘전위와 융합’을 주제로 한 제1 전시실은 시인이며 소설가, 수필가이기도했던 이상(李箱 1910~1937)이 운영한 다방 ‘제비’와 그곳을 사랑했던 예술가들의 관계에 집중한다. 건축을 전공한 이상은 학교 졸업 후 한동안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일하기도했는데, 폐결핵으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고 다방을 차렸다. 단편소설 「날개」와 실험주의적 시 「오감도」 등 강렬한 초현실주의적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을개척한 대표적 작가로 평가받는다. 제비는 희멀건 벽에 이상의 자화상 한 점과 어릴 적부터의 친구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의 그림 몇 점만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별다른 실내 장식도 없는 초라한 공간이었지만 이곳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구본웅을 위시해 이상과 친분이 두터웠던 소설가 박태원(朴泰遠 1910~1986),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김기림(金起林 1908~?) 등이 이곳에 주로 드나들었다. 이들은 이 다방에 모여 앉아 문학과 미술뿐 아니라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최신 경향과 작품에 대해대화를 나누며 영감을 얻었다. 이들에게 제비는 단순한 사교 공간이 아니라 최첨단 사조를 흡수하며 예술적 자양분을 얻었던 창작의 산실이었다. 특히 장 콕토(Jean Cocteau)의 시와르네 클레르(René Clair)의 전위적인 영화는 이들에게 큰 관심사였다. 이상은 장 콕토의 경구들을 다방에 걸어두었으며, 박태원은 파시즘을 풍자하는 르네 클레르의 (1934)를 패러디해 식민지 현실을 위트 있게 꼬집은 작품 「영화에서 얻은 콩트: 최후의 억만장자」를 쓰기도 했다. 이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서로의 흔적과 친밀했던 관계가 매우 흥미롭다. 구본웅이 그린 (1935) 속 삐딱한 인상의 주인공은 이상이다. 둘은 네살의 나이 차이가 났지만, 학창 시절부터 항상 붙어 다니며 죽이 잘 맞았다. 김기림은 구본웅의 파격적인 야수파 화풍에 누구보다 찬사를 보낸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이상이 27살의 젊은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이를 안타까워하며 그의 작품을 모아 『이상 선집』(1949)을 냈는데, 이것이 이상의 첫 작품집이었다. 이상 역시 김기림의 첫 번째 시집『기상도(氣象圖)』(1936)의 장정을 맡았다. 그런가 하면 이상은 박태원의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될 때 삽화도 그렸다. 박태원의 독특한 문체와이상의 초현실적인 삽화는 독창적인 지면을 만들어 내며 큰 인기를 끌었다. . 황술조(黃述祚 1904~1939). 1939. 캔버스에유채. 31.5 × 23 ㎝. 개인 소장. 구본웅과 함께 같은 미술 단체에서 활동했던 황술조는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독특한 화풍을 이루었다. 이 작품은 35세 젊은 나이에 요절하던 해에 그린 것이다. 1920~40년대 인쇄 미술의 성과를 보여주는 제2 전시실. 이 시기 간행되었던 표지가 아름다운 책들을 비롯해 신문사들이 발행했던 각종 잡지와삽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청색지(靑色紙)』 제5집. 1939년 5월 발행. (왼쪽)『청색지(靑色紙)』 제8집. 1940년 2월 발행. ⓒ 아단(雅丹)문고(Adanmungo Foundation)ⓒ 근대서지연구소 1938년 6월창간되어 1940년 2월 통권 8집을 마지막으로 종간된 『청색지』는 구본웅이 발행과 편집을 맡은 예술 종합 잡지이다. 문학을 위주로 연극, 영화, 음악, 미술 분야를망라했으며 당대의 유명 필진들이 참여하여 수준 높은 기사를 제공했다. 시와 그림의 만남 소설에 삽화를 곁들이는 방식은 예술가들에게 한시적으로나마 일정한 수입을 만들어 주었다. 동시에 신문이대중적이면서도 예술적 감각을 보여 주는 매체로 인식되는 데 기여했다. 정갈한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제2 전시실은 1920~40년대 발행된 신문과 잡지, 책을 중심으로 당시 인쇄매체가 이뤄낸 이 같은 성과를 집대성했다. ‘지상(紙上)의 미술관’을 제목으로 한 이 전시는 안석주(安碩柱 1901~1950)를 필두로 대표적인 삽화가 12명의 작품을 곁들인 신문 연재소설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 있도록 구성해 색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당시 신문사들은 잡지도 발간했는데, 이를 통해 시에 삽화를 입힌 ‘화문(畵文)’이라는 장르가 본격등장했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로 시작하는 백석(白石 1912~1996)의 시 에 정현웅(鄭玄雄1911~1976)이 그림을 그린 1938년도 작품이 대표적이다. 주황색과 흰 여백이 인상적인 이 그림은 백석의 시를 닮아 아련한 정감 속에 묘한 공허감을 자아낸다. 이 작품은 두 사람이같이 만들었던 조선일보사 발행 문예잡지 『여성』에 실렸다. 세련된 언어 감각을 바탕으로 향토색 짙은 서정시들을 발표했던 백석과 삽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화가 정현웅은 신문사동료로 시작한 관계였음에도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현웅은 옆자리에 앉아 일하는 백석을 종종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열심히 일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 얼굴이‘조상(彫像)과 같이 아름답다’는 찬사를 쓴 짧은 글 「미스터 백석」(1939)을 『문장』이라는 잡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들의 우정은 직장을 떠나서도 이어졌다. 1940년 훌쩍 만주로떠나버린 백석은 「북방에서 – 정현웅에게」라는 시를 지어 보냈고, 남북 분단 이후 1950년 월북한 정현웅은 북에서 백석과 다시 만나 그의 시를 꾸려 시집으로 엮어냈다. 그 시집의뒤표지에는 ‘미스터 백석’보다 더 중후한 모습의 백석이 그려져 있다. 식민지 국민의 가난과 절망이 예술의 혼마저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고난 속에 피어난 창작의 열정 뒤에는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며 함께살아갈 방도를 찾았던 예술가들의 우정과 협업이 있었다. 2.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白石 1912~1996), 정현웅(鄭玄雄1911~1976). 아단문고 제공. 시인 백석이 조선일보사가 발행하던 잡지 『여성(女性)』 제3권 제3호(1938년 3월 발행)에 발표한 시에화가 정현웅이 그림을 곁들인 ‘화문(畵文)’이다. 당시에는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룬 화문이라는 장르를 통해 문인과 화가들이 서로 교류하는 일이 잦았다. 3. . 이중섭(李仲燮 1916~1956). 1955.종이에 연필, 유채. 32 × 49.5 ㎝. 개인 소장. 한국전쟁 직후 시인 구상의 집에서 기거하던 이중섭이 일본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그리워하며친구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1. 현대문학사에서 1955년 1월 창간한 문학 잡지 『현대문학』의 표지들. 장욱진(張旭鎭 1918~1990), 천경자(千鏡子1924~2015), 김환기(金煥基 1913~1974) 등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그림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화가의 글과그림 ‘이인행각(二人行脚)’을 주제로 한 제3 전시실은 1930~50년대로 시대적 배경을 확장해 예술가들의 개인적 관계에 더욱 초점을 맞췄다. 동시대의문인과 화가들은 물론 다음 세대 예술가들과의 인적 관계에서도 중심에 섰던 인물은 김기림이었다. 그는 신문 기자라는 위치를 십분 활용해 많은 예술가들을 발굴하는 데 앞장섰으며,평론을 통해 뛰어난 작품들을 소개했다. 그런 역할을 이어받았던 이로 김광균(金光均 1914~1993)을 들 수 있다. 시인인 동시에 사업가였던 그는 우수한 예술가들을 경제적으로지원했다. 그래서 이 전시실의 여러 작품들이 그의 소장품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곳에서 많은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림은 단연코이중섭(李仲燮 1916~1956)이 그린 (1955)일 것이다. 그림 속 이중섭은 구상(具常 1919~2004)의 가족을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다.한국전쟁 중 생활고로 인해 일본의 처가로 떠난 가족과 헤어져 지내던 시기, 이중섭은 작품을 팔아 돈을 벌어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렵게 개최한 전시회가계획했던 대로 돈을 마련하는 데 실패하자 자포자기했고, 당시 그런 심경이 이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일본인 아내가 남편의 소식을 궁금해하며 구상에게 보낸 편지가 나란히전시되어 있어 전쟁이 가져온 가난과 병고 속에서 일찍 세상을 떠난 천재 화가와 그 가족의 사연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화가의 글∙그림’을 보여 주는 마지막전시실에서는 일반적으로 화가로 알려져 있으나 글쓰기에도 남다른 경지에 이르렀던 6명의 예술가를 만날 수 있다. 단순하고 순수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던 장욱진(張旭鎭1918~1990), 평생 산을 사랑했던 박고석(朴古石 1917~2002), 독특한 화풍뿐 아니라 내면에 솔직한 글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천경자(千鏡子 1924~2015)가포함되었다. 그중 전시의 말미에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김환기(金煥基 1913~1974)의 ‘전면점화’ 네 작품이다. 가까이 다가가 수많은 작은 점들이 빼곡히 박힌 소우주를 바라보고있으면 앞서 지나온 문인과 화가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어두운 시대에 별처럼 빛났던 그들을 이제 비로소 한자리에 불러 모은 듯하다. 2. <18-II-72 #221>. 김환기. 1972. 코튼에 유채. 49 × 145 ㎝.ⓒ환기재단․환기미술관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화가 김환기는 여러 잡지에 삽화를 곁들인 수필을 발표했으며, 시인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말년의 김환기를 대표하는서정적인 추상화 ‘전면점화(全面點畵)’는 그가 뉴욕에 머무르던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데, 그 시기 시인 김광섭(金珖燮 1906~1977)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단초가발견된다.

‘위안부’ 진실에 대한 끔찍한 증언

Review 2021 SPRING 2160

‘위안부’ 진실에 대한 끔찍한 증언 ‘위안부’ 진실에 대한 끔찍한 증언 『한 명』 작가, 김 숨. 브루스 & 주찬 풀턴 번역, 224쪽, 19.95달러, 시애틀, 워싱턴 대학 출판부, 2020 이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제국주의 군대는 전쟁 기간의 강간율을 낮추기 위해 윤락업소 체제를 만들었다. “위안소”라 불린 곳에서 자발적으로 지원한 매춘부가 일하는 것처럼 했지만 그곳에서 일했던 대다수의 여성은 억지로 끌려오거나 보수가 좋은 공장일이라 약속 받거나 다른 계략에 빠져 성노예 일을 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희생된 여성들은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었다. 현대 한국문학에서 한국인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들이 있었지만 위안부 는 대체로 무시되어 왔다. 작가 김숨의 이 소설은 예외적이다. 이 작품은 자신의 경험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한 명의 생존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위안부의 경험을 날것 그대로 움츠려들지 않고 묘사한다. 생존하는 마지막 위안부로 알려진 여성의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공포와 침묵 속에서 삶을 이어갈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할지 결정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된다. 마음이 약하거나 예민한 영혼을 가진 이들에게 소설은 읽기 쉽지 않다. ‘위안부’라는 명칭과는 대조적으로 이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이 겪은 고통과 굴욕과 수모는 한 치의 미화 없이 그대로 묘사된다. 책 속에 언어로 표현된 묘사가 아무리 끔찍하고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이 여성들이 견뎌야했던 고통의 바다에 비하면 단지 물 한 방울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충격은 더 커진다. 소설은 재개발이 계획된 적막한 동네의 슬레이트지붕 집에 살고 있는 90세 할머니의 현재와 굶주리는 가족을 위해 달팽이를 줍던 13세 소녀가 일본인에 의해 성노예로 만주로 끌려가게 되는 과거를 오가며 전개된다. 하지만 곧 이 모든 게 단순히 회상에 머무르지 않음이 명백해진다. 주인공은 단순히 과거를 ‘되돌아보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과거를 ‘재체험’한다. 위안소에서 보낸 7년의 시간은 오래 전에 끝났지만 그 경험의 고통과 트라우마는 그녀를 떠난 적이 없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소설이 사실과 허구 사이의 균형을 잡는 방식이다. 작가의 창작품으로 소설이긴 하지만 300개 이상의 각주가 실제 생존했던 위안부의 증언을 출처로 밝히고 있다. 이로 인해 번역자가 후기에 밝히고 있듯이 소설은 장르적 구분을 짓기가 어려워 명확하게 하나의 범주로 마케팅 홍보를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독자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책은 허구적 소설인가 아니면 역사물인가? 사실 둘 다이며 그 자체로 책은 고통스러운 진실을 전달하는 픽션의 힘을 증언한다고 할 수 있다. 위안부의 고통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독자라도 이 책을 읽으면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진실을 직시하는 것이 치유를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조부모가 주는 아름다운 글과 그림으로 만들어진 선물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 마리나 할머니 (안경자) 글, 찬 할아버지(이찬재) 그림, 번역 소피 브라운, 304쪽, 20달러, 런던, 파티큘러북스, 2020 1960년대 대학에서 만난 찬 할아버지와 마리나 할머니의 이야기는 낭만적 사랑을 다룬 이야기책에서 볼 법하다. 그녀는 시화전을 위해 시를 썼고, 무작위로 정해진 대로 그는 그녀의 시에 삽화를 그렸다. 자신들의 예술을 통해 서로 연결이 되었고 이 씨앗은 사랑으로 꽃을 피워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들이 브라질에 정착해 살고 있던 중 2015년에 딸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뉴욕에 살고 있던 아들은 아버지에게 다시 그림을 그리라고 제안했다. 오래 전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되돌아보면서 마리나 할머니는 그림과 함께 할 글을 썼고, 이것을 자신들의 인스타그램 “나의 손주들을 위한 그림”에 올렸다. 인스타그램에서 화면으로 볼 수 있었던 이 부부의 그림과 글은 이제 책이 되었다. 책은 느슨하게 사계절로 나뉘어 있고 중간 중간에 내셔널지오그래픽 팀과 동행한 찬 할아버지의 갈라파고스섬 여행과 젊은 시절의 기억도 짧게 들어가 있다. 책은 손주들과 관련된 내용에서부터 공룡과 다른 동물들,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자연스럽게 나이듦과 죽음과 상실에 대한 생각들도 꽤 들어있다. 찬 할아버지 그림의 색이 다채롭고, 표현이 풍부하고 영감을 준다면 마리나 할머니의 글은 거의 아이 같은 천진함과 세월이 주는 지혜로움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 두 사람의 글과 그림이 함께 함으로써 그 합은 각 부분의 합보다 더 큼을 볼 수 있다. 초기 인쇄 역사에 대한 영어판 웹 사이트 ‘Jikji World’ http://www.cheongju.go.kr/app3/jikjiworld/content/eng_main/index.html 청주: 청주고인쇄박물관 이 웹 사이트는 일반적으로 ‘직지’로 알려진 책에 대한 정보를 주는 사이트의 새 영어 버전이다. 직지는 금속 활자로 인쇄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책이다. 구텐베르크 성경보다 78년 더 일찍 만들어진 이 책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사이트는 중세 불교서 자체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보고이며 서지정보와 인쇄에 사용된 기술에 대한 상세한 내용뿐 아니라 한국의 금속활자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과 청주 고인쇄박물관에 대한 소개도 담고 있다. 박물관 자체의 가상현실체험은 이 글을 쓰는 동안 유감스럽게도 작동이 되지 않았지만 “직지”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이 사이트의 정보는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것이다.

추상화시킨 일상

Review 2021 SPRING 1917

추상화시킨 일상 독일을 중심으로 국제적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설치미술가 양혜규(Yang Hae-gue [Haegue Yang] 梁慧圭)는 그간 일상 속 친숙한 소재를 활용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들을 연출해 왔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회에서는 이런 시도들이 더욱 다양하고 과감해지며 또 다른 화두에 대한 작가의 도전을 보여 줬다. 양혜규는 빨래 건조대, 블라인드, 전구 등 일상적 소재를 작품에 자주 활용한다. 대표적으로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관 작가로 참여해 철제 프레임과 선풍기, 뜨개실 등으로 부엌을 형상화한 작품 을 선보인 바 있다. 이후 카셀의 도큐멘타(Documenta in Kassel), 파리의 조르주 퐁피두센터 등 세계 여러 곳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일상 소재를 활용한 설치 작품을 다양한 형태로 변주시켜 왔으며, 여기에 그래픽 디자인을 활용한 벽지 설치 작업까지 더해졌다. 최근작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이미지들이 복잡하게 얽혀 다소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때로는 “이미지 밀도가 과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에 대해 그는 난해함을 본인 작품의 특징으로 설명한다. 2019년 1월, 타이베이 난강 전시 센터(Taipei Nangang Exhibition Center)에서 열린 제1회 타이베이 당다이(Taipei Dangdai 台北 當代) 아트페어에 참여한 양혜규(Haegue Yang 梁慧圭). 그는 특정한 역사적 인물이나 일상의 사물들을 설치, 조각, 영상, 사진,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추상적인 조형 언어로 표현한다. ⓒ Sebastiano Pellion Di Persano,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2017. 알루미늄 베니션 블라인드, 분체 도장 알루미늄 및 강철 천장 구조물, 강선, 회전 무대, LED 등, 전선. 1105 × 780 × 780 cm. 베를린 킨들 현대미술센터(KINDL – Centre for Contemporary Art)는 매년 작가 한 명을 선정해 20미터 층고에 달하는 보일러 하우스 공간에 단독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2017년 9월부터 2018년 5월까지 양혜규의 작품이 이곳에서 전시되었다. ⓒ Jens Ziehe, 작가 제공 동일한 대상, 다른 해석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2020. 9. 29.~2021. 2. 28.)도 예외가 아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대형 설치 작품 인데, 제목부터 난해한 이 작품은 베니션 블라인드와 조명 기구들을 활용한 11m 높이의 대형 모빌 형태를 하고 있다. 관람객들은 짙은 푸른색과 검은색의 베니션 블라인드가 서로 엇갈리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작품의 내외부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고, 거대한 규모와 색상이 연출해 내는 다채로운 공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 작품에 사용된 베니션 블라인드는 그의 대표작 의 상징과도 동일한 소재다. 전시장 내부로 이동하면 흰 블라인드를 활용한 연작을 볼 수 있는데, 제목에 언급된 미국의 개념미술가 솔 르윗의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미니멀리즘적 요소가 강하다. 이 연작들 앞에서 관람객들은 21세기에 과거의 미니멀리즘 양식을 되풀이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작가는 작품 소재로 활용하는 블라인드에 대해 “누군가는 서양적, 다른 이는 동양적이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보는 시각에 따라 어떤 이는 서구적인 오피스 공간을, 다른 이는 동양적인 대나무 발을 머릿속에 떠올릴 것이다. 이렇게 동일한 대상을 통해 각기 다른 맥락에 따라 의미가 변하는 현상을 보여 주려는 의도를 다른 작품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2017년 멕시코 시티 쿠리만주토(kurimanzutto)에서 열린 전시 전경. 이 전시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열린 양혜규의 첫 번째 개인전이다. ⓒ Omar Luis Olguín, 쿠리만주토 제공 . 2017. 인조 짚, 분체 도장 스테인리스강 천장 구조물, 분체 도장 스테인리스강 프레임, 강선, 너설, 부포. 580 × 750 × 60 cm. . 2017. 보안 무늬 편지 봉투, 모눈종이, 색종이, 사포, 액자, 접착 비닐 필름 11개. 86.2 × 86.2 cm; 57.2 × 57.2 cm; 29.2 × 29.2 cm. . 2017. 알루미늄 베니션 블라인드, 분체 도장 알루미늄 천장 구조물, 강선, 형광등, 전선. 878 × 563 × 1088 cm. 뒤섞인 경계 본격적인 전시가 펼쳐지는 제5전시실에 이르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연작이 설치되어 있다. 이들 작품은 인조 짚과 플라스틱 끈, 놋쇠 방울이 주된 재료로 금속 방울이 알알이 달려 있는 모습 때문에 첫눈에는 기괴한 생물체처럼 보인다. 조금씩 눈에 익숙해지면 이들 형태가 각각 다리미, 마우스, 헤어드라이어, 냄비임이 드러난다. 블라인드를 활용한 작품에서 동서양의 경계를 겨냥했다면,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무생물과 생물의 경계를 탐색한다. 헤어드라이어를 게로, 두 개의 마우스를 쌓아 곤충 같은 형체를 만든다. 또는 다리미를 맞붙여 가위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 이 작품들엔 바퀴가 달려 있어 움직일 때 소리가 나기도 한다. 작품 오른쪽 벽면에는 네 가지 유형의 문손잡이들을 달았는데, 구각형의 기하학적 형태로 배치되었다. 여기서 노리는 효과도 비슷하다. 손잡이는 문을 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것이 벽에 달리면서 기능을 잃어버린다. 이렇게 맥락에 따라 바뀌는 사물의 의미를 통해 작가는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려는 듯하다. 다만 이런 전략은 이미 100년 전 다다이즘 작가들이 보여준 바 있어 아쉽게 느껴진다. 양혜규가 다리미를 교차해 가위 형태를 만들기 훨씬 이전에 시각미술가 만 레이(Man Ray)는 다리미판에 압정을 박아 그 기능과 의미를 무화시킨 바 있다. 1921년 작품 이 바로 그것이다. 더 거슬러 오른다면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와 (1917)이라고 명명한 것과 연장선상에 있다. 물론 요즘엔 미술사에 나타난 특징적 요소들을 시대와 상관없이 작가가 마음껏 차용하는 경향이 국제 미술계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19세기 이전 회화를 차용해 추상화하는 영국 작가 세실리 브라운(Cecily Brown)은 물론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도 자신의 우상인 피카소의 작품을 대놓고 빗댄다. 그렇다면 개념미술을 빌린 양혜규만의 목소리는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다. 동양과 서양,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묻던 작가가 이제는 현실과 가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마저도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왼쪽) . 2020. 인공지능(타입 캐스트), 양혜규 목소리, 스피커. 가변 크기. 기술 제공 네오사피엔스. (오른쪽) . 2020. 폴리에스터 현수막 천에 수성 잉크젯 인쇄, 애드벌룬, 아일렛, 강선, 한지. 가변 크기. 그래픽 지원 유예나. 국립현대미술관의 (2020. 9. 29.~2021. 2. 28.) 전시에서 양혜규는 인공 지능으로 복제된 자신의 목소리를 삽입하거나 현수막에 디지털 이미지를 합성한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선보였다. ⓒ 홍철기(Cheolki Hong),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작가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다리미, 헤어드라이어, 마우스, 냄비 형태를 토대로 재료들을 서로 맞붙이거나 교차 결합하여 혼종 기물을 탄생시켰다. ⓒ 홍철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2020. 분체 도장 스테인리스강 프레임, 분체 도장 격자망, 분체 도장 손잡이, 바퀴, 검은색 놋쇠가 도금된 방울, 놋쇠가 도금된 방울, 빨간색 스테인리스강 방울, 스테인리스강 방울, 금속 고리, 플라스틱 끈. (왼쪽) . 208 x 151 x 86 cm. (왼쪽에서 두 번째) . 155 x 227 x 115 cm. (왼쪽에서 세 번째) . 291 x 111 x 97 cm. (오른쪽) . 224 x 176 x 122 cm. 현실과 추상 이번 전시에서 양혜규는 기존에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선보였다. 디지털 이미지를 합성한 현수막 작품 과 인공지능 목소리가 나오는 가 그것이다. 에 대해 작가는 “정치적 선전물을 닮은 강렬한 그래픽과 과장된 타이포그래피가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5개의 현수막에는 오방색(파랑, 빨강, 노랑, 하양, 검정)이 상징하는 다섯 가지 요소(나무, 불, 흙, 철, 물)의 이름이 적혀 있다. 현수막 아래쪽에는 한지로 만든 무구가 술처럼 달려 있다. 이 작품은 이번 전시의 제목 와 큰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작가는 일상에 존재하는 공기와 물이 ‘O2’와 ‘H2O’로 기호화되는 것에 주목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현실을 다섯 개의 요소로 추상화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설명으로 들린다. 그런가 하면 는 현수막 사이 사이에 스피커를 매단 작품이다. 스피커에서는 인공지능 기술로 복제된 작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동양과 서양,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묻던 작가가 이제는 현실과 가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마저도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베를린과 서울 사이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난 양혜규는 199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해 미술대학 슈테델슐레(Städelschule)를 졸업했다. 2005년부터는 베를린에 정착해 활동하고 있으며, 2014년에는 서울에도 스튜디오를 열고 두 곳을 오가며 작업 중이다. 2018년 아시아 여성 작가로는 처음으로 독일 볼프강 한 미술상(Wolfgang Hahn Prize)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팬데믹 상황인 2020년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뉴욕의 현대미술관 재개관을 기념한 (2019. 10.~2021. 2. 28.), 그리고 영국 콘월의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Tate St Ives)에서 대규모 전시 (2020. 10. 24.~2021. 5. 3.)가 열렸다. 2014년 이불(Lee Bul 李昢)로 시작한 ‘MMCA 현대차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중진 작가를 지원하기 위해 만든 연례전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이 미술관이 기획한 양혜규의 첫 번째 개인전으로 40여 점의 작품이 소개됐다.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Review 2020 WINTER 1910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저자 박성원, 장정화 & 앤드류 J. 키스트 공역, 188쪽, 16달러, 뉴욕 화이트 파인 프레스, 2019 소설가 박성원의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를 읽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 소설집의 각 단편들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작품일 수 있지만, 전체를 다 읽게 되면 훨씬 더 큰 그림이 그려진다. 단편집은 다양한 실이 서로 가로지르면서 연결되는, 조심스럽게 쳐진 거미줄 같다. 가장 눈에 띄는 연결고리는 앞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후반부에 다시 등장하는 경우이지만, 그밖에도 다른 실들이 엮여 있다. 거의 모든 이야기를 관통해 나타나는 건 장마 기간의 지속적인 비 혹은 태풍에 의해 발생하는 몰아치는 물줄기다. 칼 융은 물이 가장 보편적으로 무의식을 상징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의식이라는 표면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홍수처럼 터질 것 같은 위협 속에 있다. 어쩌면 그래서 진실은 손가락 끝에 닿을 듯하면서 늘 손 밖에 나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한 소설 속 불운한 인물이 주장하듯, 진짜 뜻은 말에서 찾을 수 없을지도, 말은 근본적으로 왜곡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또 다른 실은 글쓰기, 혹은 예술성 전반과 그것의 역량(혹은 그것의 부재)에 대한 작가의 성찰이다. 공공의 선을 위해 자신의 희생이 필요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두운 동화를 쓰는 악몽에 갇힌 어린 소녀. 19세기 소설가 에드워드 불워 리턴 식의 “폭풍우가 몰아친 밤하늘은 무척이나 어두웠다.”로 자신의 걸작을 시작하는 자칭 미래의 공상과학 작가. 비평가의 말에 혼자 동의하지 않지만 곧 예술 세계에서 잊히는 예술가. 러브스토리를 쓰려고 했지만 도망자에 대한 불편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 작가 등이 등장한다. 꿈과 자유도 주제로 나타나는데 이는 시간이 사람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 캐릭터들에 형상화되어 있다(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불행한 어린 소녀에도). 시간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진정한 자유로 가는 문을 열어줄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통념처럼, 그것은 단지 정신 이상이나 죽음을 의미하는가? 소설집을 읽고 나면 번개 빛 속에 풍경이 얼어붙은 것처럼 보이듯 단지 몇 개의 인상만 남는다. 몇 마디로 책 전체를 포착하는 건 불가능하고 다양한 플롯 라인을 요약하려는 시도 역시 마찬가지로 무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다. 때로는 한 이야기 안에서 여러 인물들의 시점을 보여주며 작가는 독자가 사람과 사건을 여러 관점에서 보도록 만든다. 이는 어떤 관점이 올바른 건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무엇이 진실 그대로를 우리에게 보여주는가? 이를 좀 더 성찰하게 되면 우리는 더 깊고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된다. 이 여러 관점 중 어떤 거라도 실로 “맞다”고 할 수 있는가? 혹은 관점들은 어둡고 절망적인 세상을 밝히는 다양한 빛줄기일 뿐인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너머의 어떤 목적지를 향해 우리의 길을 밝혀 주는? 한류를 탐구하는 색다른 접근 『팝 시티: 한국의 팝 문화와 장소의 상품화』 저자 오유정, 238쪽, 19.95달러, 뉴욕 코넬대학출판부 2018 이 책은 한류에 관해 쓰인 가장 최근작 중 하나이다. 하지만 독특한 접근과 관점으로 인해 지속되는 한국 팝 문화 열풍에 관해 쓰인 여느 책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간단히 요약하면, 책은 문화산업과 도시 관례 간 교차점과 상호작용이 어떻게 ‘장소의 상품화’, 즉 물질적인 장소에 효과적인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상품화하는지를 탐색한다. 저자는 한류의 원인을 캐내기보다 그것이 어떻게 한국의 지형을 재구조화하는지 밝힌다. 책은 한류를 두 부분으로 나눠 다룬다. 1부는 대략 20세기 초 10년간 한류가 텔레비전 드라마에 의해 추동되던 시기와 상응한다. 반면에 2부는 이후 10년 동안 팝뮤직, 즉 케이팝에 의해 주도된 시기를 다룬다. 1부에서 저자는 민주화의 발전으로 행정의 지방분권화가 어떻게 지방정부로 하여금 개발을 가속화하기 위해 각 지역을 상업적으로 홍보하는지를 살펴본다. 2부에서는 케이팝 아이돌이 생성되는 과정과 이들이 어떻게 서울의 강남이나 명동과 같은 지역을 핫스팟으로 만들어 상품화하는지를 보여준다. 한류에 대해 그동안 많은 글들이 쓰였지만 저자의 연구는 한류의 중심을 물질적인 지역에 둠으로써 남다르다. 당연히 한류 현상 자체에 대해 관심을 두지만, 이 현상이 이제 어떻게 한류를 태동시킨 지역적 토대를 변화시키는지를 조사한다. 이 책은 학문적 관점에서 한류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유용할 것이지만 한국 드라마와 대중음악의 팬이라면 자신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문화상품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동서양이 공유하는 근원적 기질 「카르마(Karma)」 블랙 스트링, CD €17.50, 뮌헨: 악트 레코드(ACT Records) [2019] 블랙 스트링은 거문고 명인 허윤정(Heo Yoon-jeong [Yoon Jeong Heo] 許胤晶)과 대금 연주자 이아람(Lee Aram [Aram Lee]), 타악 주자 황민왕(Hwang Min-wang [Min Wang Hwang]), 기타 연주자 오정수(Oh Jeong-su [Jean Oh]) 4명으로 이루어졌다. 밴드명은 ‘현금(玄琴)’이라고도 불리는 거문고의 의미를 담았다. 거문고는 한국 전통 악기 중에서 가장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특성을 지녔다. 국악기로서 그 특성이 매우 강해 개량이 어렵고, 서양 음계로 연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이 악기가 재즈 밴드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로운 변화를 상징한다. 리더 허윤정을 비롯한 국악 연주자 3명이 이 악단의 유일한 서양 음악 연주자 오정수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이유는 동서양이 공유하는 근원적 기질을 발견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즉흥성’이다. 2018년 영국 송라인즈 음악상(Songlines Music Awards)을 수상한 1집 「마스크 댄스(Mask Dance)」에 이어 2집 「카르마(Karma)」도 독일의 재즈 레이블 악트 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총 아홉 곡이 수록되어 있는 이 음반의 첫 곡 ‘수레냐(Sureña)’와 두 번째 곡 ‘바빌론의 공중정원(Hanging Garden of Babylon)’은 인상적인 리듬으로 몽환적인 이국 세계를 그리고 있다. 어지간한 유명 아티스트들이 리메이크한 바 있는 라디오헤드의 히트곡 ‘Exit Music’처럼 더 이상 새로울 여지가 없어 보이는 넘버조차도 독특하고도 전위적인 사운드를 선보인다. COVID-19 확산으로 물리적 국경이 더욱 높아지는 가운데 이들의 음악은 세상의 경계를 허물고 ‘위기 앞의 문화적 연대’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박래현의 삶과 예술

Review 2020 WINTER 1404

박래현의 삶과 예술 “곤두박질하듯 살며 사랑과 예술로 인간 승리를 이룬 삶”– 청각 장애 화가의 헌신적인 아내일뿐 아니라 자신도 그 못지않게 훌륭한 작가였던 박래현(Park Re-hyun 朴崃賢 1920~1976)은 스스로 인생을 이렇게 표현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설이 된 삶의 그늘에 가리워졌던 작가 박래현의 예술 세계를 돌아보는 기획전을 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2020년 9월 24일부터 2021년 1월 3일까지)은 데뷔 시절부터 1970년대 전반까지 약 30년간에 걸친 그의 작품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전시는 주로 여인들을 소재로 한 1940~50년대의 구상 작품, 남편 김기창(Kim ki-chang 金基昶)과 함께한 부부전 자료들과 박래현의 개인적 사유를 엿볼 수 있는 글들, 1960년대 추상화, 그리고 1970년대 판화 작품들을 소개한다. 전시 제목인 ‘삼중통역자’는 청각 장애를 가졌던 남편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한국어, 영어, 그리고 구화(口話)의 삼중통역자 역할을 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번 전시는 박래현의 치열한 삶과 예술을 향한 열정을 함께 볼 수 있는 기회이다. 양식의 변화 1920년에 태어난 박래현은 일제 식민 치하에서 미술을 시작했다. 경성사범학교(현재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재학 시절 일본인 미술 교사 에구치 게이시로(Eguchi Keishiro)에게 그림을 배웠고, 1940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의 화단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1943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한 이다. 붉은색 화장대와 마주하고 있는 검은색 기모노 차림의 일본 소녀를 단순하고 강렬한 색채 대비로 표현한 이 작품은 관습적인 일본화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이때부터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감각적이고 과감한 구성미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혼 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박래현의 가족은 친정이 있는 군산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까지 4년여 동안 부부는 전쟁 중이었음에도 오로지 작업에 열중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조형적 탐구를 시도했다. 그 결과 그는 (1956)과 (1956)으로 1956년 대한미협전과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영예로운 시간을 맞이했다. 이처럼 1950년대 중반 시기까지 그의 작품에서 꾸준히 발견되는 소재는 여인들인데, 피난 시절을 거치면서 그림 속 여인들은 점점 꾸밈없는 가난하고 평범한 모습을 하게 된다. 데뷔작 과 비교해 볼 때 그로부터 13년 후 그린 과 두 작품에서는 큰 변화가 느껴진다. 일본과 한국이라는 작가가 속한 지리적 위치, 그림을 대하는 태도, 결혼 후의 개인적인 환경, 국가의 정치적인 상황 모두 너무나 달라져 있었기 때문에 작품의 변화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중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양식적인 변화이다. “형태와 색채의 융합을 생각하게 되고 색의 변화가 이룩하는 고유한 형태의 화면 통일에 신경을 쓰게 되며 때로 특유한 선이 암시하는 입체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박래현이 1965년 한 월간 잡지에 기고한 「동양화의 추상화」라는 제목의 글에서 한 말이다. 이런 생각은 선과 색채의 적절한 융화를 통한 대상의 간결하고 입체적인 표현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화풍의 변화는 1955년도 작품 에서 이미 시작되었는데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단순하고 평범한 두 소녀의 모습이지만 언니의 살색과 저고리의 색이 같아 구분이 되지 않고 동생의 치마 또한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게 표현되어 있다.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먹선은 작품의 소재에 외곽선으로 쓰이는데, 박래현은 먹선과 채색을 하기 위한 붓터치를 혼용하여 자유롭게 그어 나갔다. 이 시기 그가 직접 언급한 ‘입체적’이라는 표현은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 화단에 수용된 큐비즘의 영향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그는 피카소를 “시시각각으로 변화가 무쌍하고 항상 싱싱한 젊음을 보여주는” 작가로 평가하는가 하면 1973년 4월에 사망한 피카소의 부고 기사와 그의 작품 이미지들을 콜라주하여 판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추상화와 판화 1950년대 후반까지 박래현의 그림에서 대상은 점점 더 단순해졌다. 1960년 1월, 그는 동양화의 새로운 모색을 함께하기 위해 결성된 그룹 백양회(White Sun Group 白陽會)의 일원으로 타이완을 방문하여 이라는 첫 해외전을 가졌다. 이 전시는 이듬해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도 이어졌는데 박래현은 이 시기의 해외 여행을 통해 동시대 동아시아 화가들이 전통적인 양식에 회의를 품고 새로운 형식을 갈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60년대 한국 화단에서는 앵포르멜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비정형’을 의미하는 앵포르멜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카데믹한 기하학적 추상에 반발하여 나타난 유럽 미술의 한 동향으로 추상의 서정적인 측면을 강조했고 두터운 유화 물감의 질감을 살려 표현했다. 박래현은 이 유행을 수용하면서도 동양화의 재료적 특성을 이용한 독자적인 화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새로운 변화는 1962년 12월에 열린 여섯 번째 부부전에 출품된 작품들에서 나타났다. 대상의 구체적인 형태가 사라지고 적갈색 계열의 색채 덩어리들로 구성된 작품들이 대거 출품된 것이다. 이 무렵 앵포르멜 양식을 실험하던 다른 동양화가들의 리드미컬한 선들로 가득 찬 화면과 비교했을 때 그의 작품은 확실히 독특했다. 그는 바탕 종이를 구겨서 생긴 결 위에 먹을 그어 자국을 만들기도 하고, 종이 위에 안료를 쏟아 흐르게 한 후 번지게 하여 먹과 물감이 서로 뒤섞이는 효과를 나타내기도 했다. 이러한 실험은 1961년부터 63년경까지 계속되다가 1966년부터 이른바 ‘맷방석 시리즈(straw mat series)’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에서 가늘고 수없이 반복되는 먹선이 더해져 보다 높은 완성도에 다다르게 된다. (1966~67)을 보면, 앵포르멜을 수용함에 있어서도 화려하고 힘찬 선으로 가득 찬 다른 동양화가들과 달리 얇고 질긴 한지에 가는 선을 그으면서 종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특유의 수공예적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여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1969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뉴욕 프랫 센터(Pratt Graphic Center)와 밥 블랙번 판화공방(Bob Blackburn Print Studio)에서 수학했는데, 같은 시기 그의 큰딸은 프랫 인스티튜트에 재학 중이었다. 초기에는 주로 에칭 기법을 사용하여 기존의 동양화 작품을 판화로 변환하는 데 주력했다. (1970~73) 이후 판화만의 속성을 탐구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동양화와 확연히 구분되는 입체적 질감 효과를 창출해 냈다. 판화는 회화와 달리 직접 작가가 손으로 그 물질성을 느낄 수 있는 매체이므로 그의 장기인 세밀한 터치가 물질에 그대로 드러나는 결과가 즉각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작업 과정은 작가 자신에게 더없는 기쁨을 줬을 것으로 생각된다. 앵포르멜 양식을 실험하던 다른 동양화가들의 리드미컬한 선들로 가득 찬 화면과 비교했을 때 그의 작품은 확실히 독특했다. 그 이유는 박래현이 앵포르멜의 ‘분위기’는 받아들이면서도 동양화의 재료적 특성을 살려 특유의 섬세한 기법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안식의 시간 박래현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늘 새로운 시도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대중에게는 ‘김기창의 아내’로 더 잘 알려졌던 것도 사실이다. 1943년 그는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번 특선을 차지하며 중견 작가로 자리를 굳히던 김기창과 만났고, 3년 뒤 결혼했다. 이들의 만남은 김기창의 표현대로 ‘귀먹고 가난하고 학벌도 없는 나와 지주의 맏딸로 최고학부를 나온 당신’의 결합이었는데 그해 한국 화단에 큰 이슈가 되었다. 평생의 반려자로 인해 자신의 예술 인생이 지속될 수 있을 것임을 감지했었기에 가능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그의 호를 지어 준 이도 남편이었다. 김기창은 자신의 호 ‘운보(雲甫)’에 어울리는 ‘우향(雨鄕)’이라는 호를 붙여주었는데, 이는 시골 고향(鄕)에 비(雨)를 내려 씨앗이 잘 자라도록 하고 열매를 거두어들인다는 의미이다. 박래현은 네 아이를 키우며 청각 장애 남편이 혼자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될 때까지 5년 동안 구화를 가르쳤다. 이러한 의지와 헌신이 그를 뛰어난 작가이기 이전에 ‘어진 아내, 좋은 어머니’의 표상으로 알려지게 만들었다. 1974년 한 여성단체로부터 이 점을 높이 평가받아 신사임당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일생에 대해 “곤두박질하듯 살아왔다”, “남편의 말문을 연 사랑과 예술이 인간 승리의 기록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시도 쉴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예술은 그에게 잠시 쉴 수 있는 소중한 틈새이자 마음껏 자신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갈 수 있는 안식처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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