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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동네 사랑방이 되어가는 약국

Lifestyle 2024 SUMMER

동네 사랑방이 되어가는 약국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 그늘처럼 아무 때나 잠시 쉬어가거나 이웃끼리 마음을 나누는 장소를 일컬어 한국인들은 ‘동네 사랑방’이라고 표현한다. 동네 사랑방은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오가며 안부를 묻고 정을 쌓아가기 때문이다. 정초롱(丁초롱 Jeong Cho-rong) 약사가 고향 영월에 차린 그녀의 약국은 도시화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영월에서 작은 약국을 운영하는 정초롱 약사. 그녀의 약국은 약을 구입하려는 손님뿐만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할머니,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 짐을 맡겨놓는 사람들도 오가며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한다. 그녀의 하루는 단순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매우 바쁘다. 휴일인 주말을 제외하면 아침 9시에 출근해서 퇴근하는 오후 6시까지 약국에서 손님들을 만난다. 조금 한가할 때면 틈틈이 피로회복제 같은 상품 스티커나 약국에 붙일 포스터 디자인 작업을 한다. 오며 가며 쉬어가는 곳 약국 안에서 늘 정신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기 일쑤지만 그녀는 안에 있어도 사계절을 오롯이 느낀다. 약국 안 커다란 통유리 바깥으로 나무들이 철마다 옷을 갈아입기 때문이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건 자연만이 아니다. 이 약국에는 잠시 짐을 맡기고 가는 고객들이 꽤 있다. 근처 시장이며 마트에서 장 본 것을 이곳에 둔 뒤 병원, 은행, 군청 등에서 볼일을 보고 오는 단골손님들이다. 그들이 맡겨 둔 장바구니 안에는 지금의 계절을 알 수 있는 채소며 과일이 들어있다. “이것 좀 맡아달라고 말씀하실 때 어머님들 표정이 참 귀여우세요. 이 공간을 편하게 생각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한 마음이에요. 제가 꿈꿨던 모습이거든요.” 약국에는 손님들을 위한 휴식 테이블이 있다. 간식도 비치되어 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쌍화탕(雙和湯 피로 해소와 감기 완화에 좋은 한방 드링크제)과 약과(藥果 한국의 전통 과자), 비타민이나 자일리톨이 함유된 캔디 같은 것들이다. 약이 나올 때까지 잠시 앉아 기다리는 테이블이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손님들도 많다. 근처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를 기다리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갈 버스가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亭子나무, 집 근처에 있는 큰 나무) 그늘처럼, 손님들이 아무 때나 쉬어가며 오가는 이들과 마음을 나눈다. 약사세요 악국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동네 ‘사랑방(舍廊房)’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복약 상담 “단골손님이 대부분이라 방문하시는 손님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 건강도 상담하기도 해요. 되도록 자세하게 설명해 드려서, 우리 약국을 이용하는 분과 그 가족이 좀 더 건강한 삶을 사시도록 돕고 싶어요.” 한국에선 약국과 약사의 역할이 크다. ‘약은 약사에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약국에서 약사의 설명을 듣고 약을 구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병원이나 의원이 많지 않은 시골에선 당장 병원을 가야 할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약국의 역할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숙취 해소, 피로회복제 등 증상에 따라 필요한 약을 묶은 패키지에 직접 디자인한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정초롱 약사. 특히 이곳 영월군(寧越郡)에는 젊은이들보다 노인 인구가 많아 약사의 복약지도도 아주 중요하다. 정초롱 약사는 그 임무에 충실한 약사다. 평소 어떤 불편을 겪는지, 어떤 음식을 즐겨 먹고 어떤 약들을 복용 중인지 꼼꼼히 묻고 답한다. 손님이 잘못 알아들을까 봐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일이 그녀에겐 전혀 번거롭지 않다. 정확한 상담으로 환자의 건강 상태가 좋아질 때마다,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잊지 못할 일들이 많아요. 어느 날은 모자를 쓰고 오신 중년 여성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분이 항암 치료 중인 걸 알게 됐어요. 잘 이겨낼 수 있다는 용기를 드리고 싶어 손을 꼭 잡아 드렸는데 왈칵 눈물이 나더라고요. 당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거라곤 손을 잡아 드리는 것이 전부였는데도, 그분이 정말 고마워하셨던 기억이 나요. 지금은 완치하셔서 건강한 모습으로 약국을 찾아오시고 있어요. 뵐 때마다 애틋해요.” 치매 관련 영양제를 사러 왔던 중년의 여성분도 기억에 남는다. 약을 추천하기 위해 그녀가 이런저런 질문을 건넸더니, 손님의 어머니가 치매를 앓아 곧 요양원에 가신다고 했다. 그날도 그 손님과 같이 울었다. 건넬 수 있는 위로의 말이 없어 마음 아팠지만, 속상한 마음을 나누며 함께 울고 난 뒤 손님이 보여준 미소가 여태 기억에 남아 있다.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같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병을 치료할 순 없지만, 상대방이 다시 힘낼 수 있는 마음을 건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가 경청과 공감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이유다. 고향에서 누리는 행복 영월군은 그녀가 나고 자란 곳이다. 강원도 남부에 자리한 작은 도시로 산과 계곡, 강과 호수가 수려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 눈부신 땅에서 그는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도시의 약학대학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났다가, 2019년 4월 이곳에 약국 문을 열면서 다시 왔다. “대학 졸업 후엔 도시의 약국에서 근무 약사로 2년 반 정도 일했어요. 처방전을 받아 약을 짓는 게 주된 업무였는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밀려드는 처방전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손님들께 약에 대한 설명조차 제대로 해드리지 못했거든요. 어느 날 문득 기계처럼 약을 짓는 것 말고 약 하나를 드리더라도 손님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만의 약국을 열기로 결심한 거죠.” 처음엔 일하고 있던 충주시(忠州市)에 약국을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땅한 자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고심이 깊어 가던 어느 날 영월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30년 넘게 옷 가게였던 지금의 약국 자리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이었다. 시골 약사로 지내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먹었다. 따뜻하게 소통하는 약국을 만들기에 고향처럼 적합한 곳은 없을 것 같았다. 그 예감은 적중했다. 어느 집 딸인지 잘 아는 손님들은 자식 같고 조카 같은 그녀를 진심으로 반겼다. “개업한 뒤 1년이 채 안 돼 코로나19로 난리였어요. 마스크 대란이나 진통제 품절 같은 일들을 차례로 겪으며 힘들었지만, 그 시간을 손님들과 함께 견뎌내면서 더 단단한 유대감이 생긴 것 같아요.” 일상으로 돌아온 요즘, 지난 몇 년과는 다르게 약국에서도 잘 팔리는 약이 달라졌다. 전에는 질병을 치료하는 약이 주로 팔렸다면, 요즘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약의 판매가 크게 늘었다. 면역력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커진 것이다. 그는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건강정보를 기억하고 고객별로 기록도 해둔다. 아는 만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옆집의 수저 개수도 안다’는 우리의 옛말처럼,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웃들의 정보가 쌓여간다. 웃음이 또 하나의 치료제가 되다 약사세요 약국에는 익살스러운 풍경이 곳곳에 있다. 뇌, 눈, 간, 위 등의 장기가 그려진 캐릭터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 캐릭터는 도시에서 근무 약사로 일할 때 SNS(www.instagram.com/yaksaseyo_pharmacy)에 재미 삼아 연재하기 시작한 웹툰 속 주인공이다. 손님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방법을 고민하다, 단발머리 시절의 본인 모습을 캐릭터로 만들어 몸속 장기와 해당 약품을 벽면에 부착했다. 직접 디자인한 스티커도 퍽 재치 있다. 숙취해소제나 피로해소제 등에 손수 그린 캐릭터 스티커를 붙여 판매하니 손님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 그녀는 직접 만든 캐릭터로 SNS에 웹툰을 연재하고 있다. 약국을 열게 된 이야기부터 약국 손님 유형, 약의 사용법 등 다양한 스토리가 있다. © yaksaseyo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영월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에 만화를 연재하고 있어요. 약국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만화에 담고 있죠. 독자들이 제 만화를 보며 잠시라도 웃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다. 손님들과 따뜻한 마음과 공간을 나누고, 그녀를 닮은 캐릭터로 위트를 전하며, 복약상담으로 건강을 책임진 그녀가 약국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 낮에 틈틈이 구상한 디자인 작업과 만화 작업 마무리를 하다 보면 어느새 영월의 하늘이 별빛으로 가득 차 그녀의 밤을 예쁘게 물들인다.

한국 재료로 즐기는 파인 다이닝

Lifestyle 2024 SUMMER

한국 재료로 즐기는 파인 다이닝 셰프인 조셉 리저우드는 한국의 식재료를 사랑한다. 여러 상을 받은 그의 레스토랑은 한식 메뉴의 가능성을 재정의하며, 기억에 남는 경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식의 매력에 빠져 한국에 정착한 뒤 퓨전 한식 레스토랑 에빗을 운영 중인 조섭 리저우드(Joseph Lidgerwood). 그는 전국 각지를 돌며 재료를 채집하고, 새로운 식재료를 탐색하는 일에 진심이다. 14개월 가까이 안정적인 수입이나 일상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한 조셉 리저우드는 제주도 해변에 앉아 있었다. 산소통도 없이 해산물을 채취하는 제주 해녀들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제가 해녀에게 질문을 할 때마다 그녀는 제 입에 성게를 넣어 주셨어요. 그래서 그냥 거기에 앉아 먹기만 했죠. 해녀들이 물질을 끝내고 잠수복을 입은 채로 스쿠터에 올라타 휑하고 가버리는 장면은 제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라며 애정 어린 마음으로 당시를 회상했다. 호주 태즈매니아 섬에서 자란 리저우드는 집 안의 냉동실을 가득 채울 만큼 해산물을 잡을 수 있는 곳에서의 가족 여행을 즐겼다. 그렇지만 냉동실을 가득 채운 해산물과는 달리 그가 평소에 주로 먹는 음식은 고기와 삶은 야채 그리고 으깬 감자였다. “외식은 약 5~6달러를 내고 펍(Pub) 음식을 먹는 것이었고, 그것이 그 당시 저에게는 최고의 ‘파인 다이닝 경험’이었어요.” 햄버거 뒤집기부터 시작해 실력 있는 셰프가 되기까지 리저우드가 십대가 되었을 때, 그는 어머니를 도와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호주 정부에서는청소년들에게 진로 결정을 위한 교류 프로그램을 장려했는데, 그는 여느 친구들처럼 전기기사나 정비사가 되는 것보다 요리사가 되는 것이 멋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첫 직장은 강가에 있는 도시 프랭클린의 고급 카페였고, 그곳에서 햄버거를 굽는 일을했다. 그 후 그는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일했다. 주로 ‘중간에 블루치즈가 들어간 스테이크’ 같은 음식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이전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 직장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스테이크하우스의 셰프 중 한 명이 당시 막 영국에서 돌아왔는데 그에게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은 “지옥 같았지만 보람 있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리저우드가 영국으로 갈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런던에서 그의 첫 직장은 프랑스 요리를 다루는 곳이었고, 그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 필립 하워드가 공동 소유한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인 더스퀘어(The Square)에서의 일이 포함되었다. 그 다음에는 하워드가 공동으로 소유한 또 다른 런던의 아이콘인 레드버리(Ledbury) 레스토랑에서도 일했다. “그 레스토랑의 주방 일은 완전 미쳤어요. 네 시간 자고 일하는 데 적응하느라 오래 걸렸어요. 어떤 사람들은 한달 만에 그만두기도 했어요. 그냥 레스토랑을 떠나는 게 아니라 아예 요리하는 걸 그만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36세인 리저우드는 여전히 당시 레스토랑에서의 경험이 그의 열정, 헌신, 집중력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엄청난 경험이긴 했지만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죠. 그때 사용한 레시피 중 어떤 것도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요. 다만 당시 배운 것 중 여전히 유효한 것은 어떻게 나의 하루를 더 잘 관리하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깨끗하고, 체계적이고, 빠르고, 정확하게 일하는 실력 있는 셰프가 될 것인가 하는 거죠.” 원스타 하우스 파티 2016년, 리저우드는 색다른 프라이빗 다이닝 서비스 론칭 계획을 하고 있는 친구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며 팝업 다이닝 경험을 제공하는 ‘원스타 하우스 파티(One Star House Party)’를 만들었다. 비교적 간단한 요리, 보통 서너 가지의 요리만 제공했으며, 미식계의 최상층을 목표로 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이들만의 방식은 빠르게 열렬한 팬들 만들어냈다. 이벤트가 매번 매진될 정도였다. 이들이 시도한 독특한 지역 중에는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손님이 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승객들이 이층침대에서 네 가지 코스 요리를 먹었던 베트남의 야간열차도 있었다. 한국의 첫 방문 서울에서 열릴 원스타 하우스 파티를 앞두고 그는 제주도를 방문했다. 이는 그가 경험한 첫 한국이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해녀들과 함께 조개를 채취하고 싶었지만, 해녀들은 경험 없는 그들을 데려가면 작업이 느려질 것이라며 거절했다. 그래서 리저우드는 결국 해변에 앉아 곧 다가오는 다이닝 이벤트를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그가 해녀들의 생활이나 한국 식재료에 관해 물어보려 할 때마다 해녀들은 그의 입에 성게를 넣어주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리저우드는 서울의 원스타 하우스 파티를 마치고 미국으로 갔다. 그런데 서울 행사에 참석했던 한 고객이 서울에 새로 지은 자신의 건물에 공간을 제공하겠다고 연락해왔다. 2019년에 아내 지니의 지지를 받아 리저우드는 레스토랑 에빗(EVETT)을 열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대부분은 푸아그라와 캐비어 같은 고급 재료에 의존하던 시기였는데, 에빗은 약간 색다른 것을 제시했다. 호주 출신 셰프가 한국 식재료를 중심으로 만든 메뉴를 선보인 것이었다. 한국 사람조차 잘 몰랐던 한국 식재료에 대한 탐구와 발효를 접목한 요리로 에빗은 오픈1년 만에 미쉐린 가이드 1스타에 이름을 올렸다. “저희 요리는 퓨전이 아닙니다. ‘혁신적인 한국 요리’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은 놀라운 지역의 식재료의 가치입니다. 그 식재료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라고 그는 설명한다. 리저우드 셰프는 한국 음식 중 발효의 역할에 경의를 표한다. 또 그는 정기적으로 즐기는 채집활동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이 채집활동을 ‘산에서 훔치기’라고 표현한다. 그는 한국 고유의 식재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며 좀 더 자세히 말했다. “재료가 사용되는 방식이나 음식이 요리되는 방식, 그리고 층층이 쌓이는 맛을 경험하는 것, 바로 이곳 한국에서만 가능하죠. 모든 것이 너무나 역동적이에요. 그리고 사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할 수 없어요. 간장게장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호주에서 식품법상으로 가능하지 않아요. 막걸리 역시 다른 곳에서 만들어지기 어렵죠. 미생물들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어서 프랜차이즈를 내거나 과도하게 위생적으로 만들면 그 마법이 사라져 버려요. 기술적으로는 한국 음식일지 모르지만, 진짜 한국 음식은 아니게 되는 거죠.” 리저우드의 최근 요리 중에는 모과 동치미가 있는데, 일종의 물김치인 이 메뉴를 만들기 위해 그는 멍게, 제주 감귤, 염소젖, 그리고 당귀 뿌리를 사용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맛의 조합 중 하나라고 말한다. 가족 같은 에빗 에빗에는 9개의 테이블이 있고 한 번에 약 25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다. 메뉴는 코스요리로만 제공되는데, 리저우드는 “몇 가지 시그너처 요리를 더해 완성도를 높였다”라고 설명한다. 레스토랑에서는 15명의 셰프가 테이블에서 요리에 대해 직접 설명하고 마무리한다. 리저우드는 복잡하고 정교하게 정제된 음식은 그의 팀이 끊임없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최고의 메뉴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쓴 결과를 보여준다고 믿는다. 그는 외국인이 한국 음식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웠지만, 오픈 이후 그의 레스토랑은 음식비평가와 고객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이 우리가 한국의 식재료를 사랑하는 것을 아주 좋게 봤다는 것이었어요. 큰 동기부여가 되었죠. 저희 음식이 항상 멋지거나 놀랍지는 않지만, 고객들이 음식의 진가를 알아주죠.” 2020년 미쉐린 1스타를 비롯해 여러 가지 상과 찬사를 받은 레스토랑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한국의 파인 다이닝 요리 현장의 절정에 있다. 레스토랑을 리모델링하고, 최근에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으로 이전했는데. 올해 미쉐린 2스타를 받지 못한 것엔 실망했지만, 그는 레스토랑의 성공이 미슐랭 평가에 달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레스토랑의 현 상태와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합니다. 멋진 고객들을 모시고 있으며, 그들은 저희 음식을 정말 좋아합니다. 또 저는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식재료를 발견하고요.” 그의 수준 높은 한국 요리를 칭찬하는 긍정적인 리뷰가 넘쳐나지만, 가장 의미 있는 건 비평가들의 절제된 평가이다. 한 평론가는 에빗에서 식사하는 것이 가족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캐러맬라이즈 된 크림을 가득 채운 후 흑마늘 멸치와 수수떡을 올린 메주 도넛이다. 한국 발효의 핵심인 메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요리로, EVETT의 요리를 대표하는 디쉬가 되었다. © 에빗 특별한 경험 10코스 이상의 메뉴와 전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한국의 술을 곁들여 제공하는 메뉴는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요리사들은 끊임없이 창작의 압박을 받는다. 어떻게 하면 고객에게 기억 남는 식사를 제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끊임없이 그들을 따라다닌다. 모든 테이블의 고객들은 특별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지만, 모든 고객이 각 요리와 그 재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리저우드 셰프는 고객들이 좋아하고 가치 있게 여길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각 테이블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가장 좋은 사례는 에빗에서 식사를 한 근처 치킨집 가게 주인 이야기일 것이다. 리저우드 셰프는 맥주 몇 병을 마시며 그에게 레스토랑의 철학을 설명했다. 치킨집 주인은 왜 호주 출신 셰프가 한국 식재료를 이용해 요리하길 원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후 치킨집 사장은 그의 아내와 에빗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음식이 “나쁘지 않네”라고 말했다. 리저우드에게 이 평가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 말은 제 마음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는 말이었어요. 저희가 한국의 식재료가 얼마나 훌륭한지 보여주기 위한 원동력이 되어주는 말이었죠.”

레고 블록으로 재현한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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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 블록으로 재현한 문화유산 콜린 진[Collin Jin, 본명 소진호(So Jin-ho, 穌進鎬)]은 레고 아티스트이다. 일상적인 사물을 레고 블록으로 재치 있게 해석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문화유산을 주제로 한 작업을 시도하는 중이다. 지난해 첫 전시를 성공적으로 치른 데 이어 올해는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 10월까지 한국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작업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소진호 작가가 고증을 거쳐 재현한 종묘제례악. 기존 레고 부품만을 사용해 1년 반에 걸쳐 제작했다. 소진호 제공 2023년 10월, 서울 소공동에 자리한 모리함 전시관(Moryham gallery, 慕異函)에서 열린 전시가 언론에 보도되며 큰 화제를 모았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종묘제례악이 레고로 만들어져 전시되었기 때문이다. 종묘는 조선(1392~1910)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 무용을 통틀어 종묘제례악이라 한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으로 전통문화를 표현했다는 점도 이색적이었지만, 한국적인 조형 의식과 미감을 섬세하게 구현한 솜씨가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콜린 진의 첫 전시 이야기이다. 종묘제례악뿐만 아니라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을 소재로 한 다채로운 작품들이 전시되어 관람객들이 전통문화를 새로운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소재규(So Jae-gyu, 穌在圭) 회장은 아들이 태어나던 해인 1974년 장난감 회사 한립토이스(Hanlip Toys)를 차렸다.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신기한 장난감을 가장 먼저 갖고 놀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이십 대 중반부터는 자신만의 레고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고, 2007년부터는 장난감 박물관 한립토이뮤지엄을 운영해 오고 있다. 장난감 박물관 한립토이뮤지엄을 운영하는 소진호 작가는 이십 대 중반부터 자신만의 레고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일상적인 사물을 비롯해 문화유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지난해 첫 전시 < 콜린 진의 역사적인 레고 >는 어떻게 열게 되었나? 레고 아트는 취미로 시작한 작업이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작가로 여긴 적이 없었고, 전시회를 열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내 작품들을 집에만 그냥 두기는 아깝다고 전시회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으리으리한 작품들을 제작하는 레고 아티스트들이 많아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지인들의 격려로 용기를 냈다. 전시에 대한 반응이 좋아서 나도 깜짝 놀랐다. 전시에서 특히 종묘제례악이 큰 화제였다. 만들게 된 계기가 있었나? 영문학을 전공한 아내가 역사에 관심이 많아 틈틈이 공부한다. 어느 날 아내가 승무(僧舞)를 주제로 레고 작품을 만들어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승무로 끝내기에는 아쉬워서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종묘제례악까지 왔다. 기존 레고 부품만을 사용해 종묘제례악을 재현하는 데 1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전통문화를 작품으로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선 지식이 필요했다. 고증을 위해 자료 조사를 많이 했고, 『종묘의궤』 같은 책도 구입해 읽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춤 가운데 하나인 승무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작업이 이 작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소진호 제공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주로 레고 팬들이었나? 꼭 그렇지는 않았다. 전통문화 해설사, 국악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한국 무용 전공자들을 만났다. 그분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게 있었다. 전통을 계승한다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옛것을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주변 시선 때문에 종종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문화를 멋지게 표현한 작품을 만들어 줘 고맙다고 하더라. 그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뭉클했다. 전시장인 모리함 전시관 근처에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가 있는데, 그곳 직원분들이 점심시간에 방문한 게 인연이 되어 기획 전시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지난 5월 종묘에서 열린 이 전시를 위해 나는 를 재현한 작품을 제작했다. 이 그림은 궁중기록화 중에서 종묘제례악의 연행 현장을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유서 깊은 장소에서 진행되는 상설전에 참가하게 되어 무척 뜻깊다.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탈놀이 가면인 하회탈을 변형해 제작한 작품이다. 소진호 제공 레고 마니아들의 반응은 어땠나? 보통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전시회를 찾는 일이 많고, 대개는 작품을 보면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기 마련이다. 내 전시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벌어졌다. 아이가 원해서 부모가 함께 온 경우가 많았고, 기존에 출시된 레고 시리즈의 어떤 부품이 내 작품에서 어떻게 응용되었는지를 아이들이 부모에게 설명해 주고 있더라. 아이들이 신이 나서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또 내 작품을 보고 자신도 한번 도전해 보겠다는 아이들도 많았다. 동기 부여가 된 것 같아 흐뭇했다.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얻나? 일상생활에서 주로 아이디어를 얻는 편이다. 예를 들어 한번은 이라는 TV 교양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나주 소반(小盤)에 밥을 차려놓고 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소반도 레고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시도해 봤다.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가 어렸을 때는 아이가 필요하다고 하는 모든 것들을 레고로 만들어 주었다. 필통, 연필깎이, 책상 램프 같은 것들…. 작가는 필통, 볼펜, 연필깎이, 스테이플러 등 딸아이가 필요로 하던 모든 것들을 레고로 만들어 주었다. 아이의 자랑이 되고 싶었던 그 마음이 작업의 원동력이 되었다. 소진호 제공 레고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나? 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아버지가 친구분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 나를 데려가셨는데, 친구분께서 레고 샘플을 보여 주셨다. 당시는 레고가 정식으로 수입되기 전이었다. 집에 너무 가져가고 싶은데 그냥 두고 올 수밖에 없어서 무척 아쉬웠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완구 매장에서 일을 도와드리다가 어느 날 스타워즈 레고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희열은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나는 스타워즈 마니아였기 때문에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구입해서 매뉴얼대로 만들며 학습 과정을 거쳤고, 결국엔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다는 단계로 나아갔다. 레고 아트는 기존 블록들만 사용해야 하므로 창의력을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지 않은가? 형태를 변형하거나 도색하지 않고 기존 부품을 그대로 쓰는 것이 레고 아트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철칙이다. 제한된 조건과 한정된 재료로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 점이 바로 레고 아트의 매력인 것 같다. 그리고 경험의 폭과 깊이가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것 같다. 나는 수많은 제품을 조립해 봤기 때문에 어떤 부품들을 어떤 방식으로 조립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끼워 보며 설계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도면을 따로 그리지 않아도 내 머릿속에서 이미 해리 포터의 빗자루가 선비의 붓이 되고, 동물 이빨이 버선코가 되며, 오리발이 관모(冠帽)가 된다. 다만 재료가 제한되어 있어 완전한 고증이 어렵기는 하다. 그럴 때는 내 나름대로 단순화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문가들은 그 차이점을 바로 알아보더라. 디테일을 완벽히 구현할 수는 없지만 알고는 있어야 하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공부를 많이 한다. 한립토이뮤지엄 내 마련된 작가의 작업실. 그는 작업에 필요한 부품들을 종류별로 따로 분류해서 보관한다 가족들이 작업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소통의 비결이 무엇인가? 우리 가족은 식사를 오래 하는 편이다.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 하다 보니 식탁에 머무르는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된다. 가족들이 모두 픽사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개봉하면 꼭 같이 보러 다니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가정생활과 작업이 분리되었으면 해서 집에서는 거의 작업을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완성하면 아내와 딸에게 보여 주기 위해 꼭 가져간다. 그때 의견을 많이 주는데 작업에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다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를 본 적이 있다. 정조(재위 1776~1800)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비롯해 여러 행사들을 치렀던 장면을 담은 기록화이다. “이걸 레고로 만들면 정말 멋지겠다”라고 혼잣말을 했더니,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이 해보라고 부추기더라. 이 그림에는 최소 2천 명의 인원에 말, 소, 가마 등이 무수하게 등장한다. 레고 부품들이 엄청나게 필요할 것이다. 언젠가 꼭 만들고 싶다. 그리고 나만의 디자인으로 레고 제품을 출시해 보고 싶은 꿈이 있다.

수많은 작업이 집약된 푸드 스타일링 세계

Lifestyle 2024 SPRING

수많은 작업이 집약된 푸드 스타일링 세계 푸드 스타일리스트는 음식과 식기 등으로 테이블 공간을 연출하는 일을 한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음식의 질감, 맛, 향 그리고 매무새까지 전달해야 한다. 노력과 창의력을 동시에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모니터로 레퍼런스를 꼼꼼히 확인하며 준비한 음식을 세팅하고 있는 푸드스타일리스트 보선(金甫宣) 씨. 클라이언트의 컨펌은 음식을 준비하고 스타일링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이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큰길에서 살짝 벗어난 골목 안쪽에 지은 지 오십여 년쯤 된 이층집이 있다. 대문은 없고 마당 한쪽에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근처 성미산에 사는 새들이 날아와 쉬어가는 곳이다. 감나무가 환히 내다보이는 통창 안쪽에는 새벽 세 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스튜디오가 있다. 사람들과 온갖 물품이 분주히 드나들고, 환한 조명이 켜졌다가 꺼지고,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호기심 많은 동네 강아지들과 고양이들이 기웃거리는 이곳은 푸드 스타일리스트 김보선 씨(金甫宣)의 작업실이다. 푸드 스타일리스트의 영역은 시대가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음식을 직접 하는 것은 물론이고 소비자 시장을 조사하거나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메뉴도 개발한다. 일의 영역이 넓으니 일과도 바쁘게 돌아간다. 이십 년 넘게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살아온 김보선 씨의 하루하루도 다양한 일들로 촘촘하게 채워진다. 뭐든 잘해야 하는 직업 김보선 씨는 작업실 근처에 있는 집에서 걸어서 출근한다. 보통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서 아홉 시에 작업실의 문을 여는데 외부 촬영이 있는 날은 예외다. 촬영 시작이 아홉 시라면 다섯 시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예전에는 잡지에 실릴 음식을 촬영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판도가 달라졌다. “잡지가 많이 없어지고 광고 시장도 대부분 디지털로 옮겨갔어요. 요즘 들어오는 일은 브랜드SNS 작업, 전시 세팅, 행사 세팅 등이 주를 이루고 주방가전 신제품이 나오면 그 제품을 테스트하고 메뉴를 개발하고 소책자를 만드는 일도 해요.” 이전에는 요리 따로, 스타일링 따로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의뢰인 대부분이 요리까지 다 할 줄 아는 스타일리스트를 찾는다. “요리를 알고 스타일링을 하느냐, 모르고 하느냐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달라져요. 요리가 받쳐 주지 않으면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어서 결국 요리를 배우게 되죠. 예를 들어 완성된 볶음요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기름칠을 할지 물엿을 바를지 결정해야 하는데, 그 판단을 하려면 요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해요. 또 고기 종류에 따라 가장 맛있어 보이는 온도가 몇 도인지도 알아야 하죠. 그래서 요리뿐만 아니라 식재료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해요.” 한식, 양식, 중식, 일식 등 요리의 장르도 다양하고 그에 따른 식재료도 무궁무진하다. 그중 특정한 분야만 잘해서는 일을 맡을 수가 없다. “어떤 일이 들어올지 모르니까요. 전반적으로 다 할 줄 알아야 하고 잘해야 해요.” 잘해야 하는 건 요리만이 아니다. 촬영에 필요한 각종 소품도 준비해야 한다.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그릇부터 시작해 그와 어우러지는 테이블보, 냅킨, 수저, 양념통, 꽃 등…. “시안이 촬영 하루 전날 오는 경우도 많아서 뭘 사러 갈 시간도 없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평소 시간 날 때마다 준비해야죠.” 요리연구가, 플로리스트, 코디네이터, 디자이너를 모두 합한 직업이 푸드 스타일리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최고의 바게트 전문가를 가리는 ‘르빵 바게트 챔피언십 2023’의 공간을 연출한 모습. 8m에 달하는 대형 테이블은 수십 여 종류의 바게트와 각종 오브제로 채웠다. ⓒ 김보선(金甫宣) 스물두 살에 찾은 꿈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우연히 본 TV 프로그램을 통해 푸드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원래 요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요리 관련 일을 하고 싶었는데 식당에서 일을 하면 같은 요리만 하잖아요. 매번 새로운 요리를 하고 더 맛있어 보이게 연출하고 또 화보로 작업물을 만들어 내는 푸드 스타일링이라는 일이 재미있어 보였어요.” 결심이 선 이후 앞만 보고 달렸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한 다음 본격적으로 꿈을 좇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는 푸드 스타일링을 위한 학교도 아카데미도 없었다. “당시 요리연구가이자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던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하는 클래스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선생님 스케줄이 있으면 수업이 없어지거나 미뤄졌죠.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클래스였는데, 한 달에 겨우 한 번 할 때도 있었어요.” 푸드 스타일링을 배우다 보니 요리를 모르면 안 되겠다 싶어 신라호텔 조리 교육센터에 들어갔다. “거기서 양식을 배운 이후 푸드 스타일리스트의 어시스턴트로 들어가 일을 더 배우려고 했어요. 그런데 배우려는 사람은 많고 자리는 없으니까 조리 경력이 있으면 남들보다 유리하겠다 싶어 파스타 전문점에 들어가서 일을 했어요.” 그 경력을 발판으로 어시스턴트가 되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수업을 일주일에 하루로 몰고 나머지 시간 내내 일을 했다. 졸업 후 다음 단계를 고민하던 그녀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요리 종류와 식재료가 다양했어요. 디저트, 와인 등 다루는 범위도 넓었고요. 견문을 넓힐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일본에서 생활비, 학비,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세 개를 하며 일을 배웠다. 2005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부모님이 계신 집 반지하에 조그마한 작업실을 차려 푸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독립생활을 시작했다. “일은 없었어요. 삼 개월에 하나 들어올까 말까 했죠. 멍하니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도서관, 서점에 다니면서 공부를 계속했어요. 그러다 일이 하나라도 들어오면 연습을 엄청 많이 했어요.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여러 번 테스트하고, 한 컷을 찍는 촬영에도 플랜C까지 만들었어요. 한 번 일을 맡긴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고, 주위에 소개해 주고, 그럭저럭 자리를 잡기까지 5년 정도 걸렸어요.” 원물 자체가 싱싱하고 좋아야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늘 식재료 공수에 심혈을 기울인다. ⓒ 김보선(金甫宣) 먹는 것도 일, 쉬는 것도 일 반지하에서 작업실을 시작한 이후 서너 번을 옮겼고, 지금의 작업실은 8년 전에 이사한 곳이다. 촬영은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잡힌다. 촬영이 없는 날에는 촬영 준비로 분주하다. 시안을 파악하고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고 스태프들에게 할 일을 지시한다. ‘북유럽의 삭힌 청어요리’처럼 생소한 음식을 만들어야 할 때면 식재료를 준비와 레시피 연구, 그리고 테스트도 해야 한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날에는 영수증과 세금계산서 등을 정리한다. 아침은 삶은 달걀이나 고구마로, 점심과 저녁은 거의 배달 음식으로 때운다. “냉장고에 좋은 식재료들이 많지만, 저를 위해 요리하거나 정리할 시간도 여유도 없어요. 거의 매일 새벽에 일이 끝나거든요. 집에선 잠만 자요. 하루 네 시간 정도 자나 봐요.” 가끔 시간이 날 때면 사람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김보선 씨에게는 일의 연장이다. 맛깔스러운 음식을 보면 자동으로 몸이 반응한다. 요리조리 보며 조리법을 탐색하고 또 언제가 같은 음식의 스타일링을 제안 받게 되면 직접 만들어봐야 하니까 말이다. “아이디어가 떠올라야 정리가 되고 실행할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한 일이에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을 한다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일을 분리하는 게 불가능해요. 좋아하지 않으면 못 하는 일이죠. 원래 뭐든 조금 하다 금방 포기하는 성격이었는데 이 일은 저한테 맞아요. 할수록 더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당의 감나무로 날아드는 새들을 바라보는 일이 김보선 씨에겐 짧은 휴식이고 위로이다. 아니 어쩌면 그 역시 또 다른 아이디어의 온상일 것이다.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소셜미디어 인류학자

Lifestyle 2024 SPRING

소셜미디어 인류학자 이야기와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 큰 키의 바트 반 그늑튼(Bart van Genugten) 씨는 2014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이후 그는 결혼하고 인기 많은 유튜브 채널 ‘아이고바트(iGoBart)’를 운영하고 있다. 채널에서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네덜란드 참전용사에 대해 알려주고 한국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들을 종종 소개한다. 유튜브 채널 아이고바트를 운영하는 바트 반 그늑튼 씨. 그는 유튜브 콘텐츠를 촬영할 때 주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며, 손에 쥐기 편한 작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다. 바트 반 그늑튼 씨의 첫 한국 여행은 생각보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2014년 스페인 말라가(Malaga)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동안 그는 한국인 여학생과 데이트하고 있었고, 이를 계기로 서울의 성균관대학교 한국어학당에 등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울에 사는 대신 인천의 부평구 서쪽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공공 표지판은 외국인 방문객을 특별히 고려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인구 8,500여 명인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그레이브(Grave)에서 자란 그에겐 도시 탐색의 기술이 필요치 않았다. “출구가 아주 많은 지하철역은 익숙해지기 어려웠어요. 한국어를 읽을 수 없으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죠”라고 반 그늑튼 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대도시의 젊은이가 되기 위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죠.” 그렇지만 한국은 지속해서 그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다. 다시 아시아로 석 달 후 반 그늑튼 씨는 네덜란드로 돌아갔고 일을 시작했다. 일 년이 지난 후 그는 자신이 직장 생활에 완전히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일을 그만두고 아시아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몇 주를 보낸 후 6개월 동안 중국, 대만, 미얀마, 베트남, 태국, 필리핀을 돌아보는 배낭여행을 했다. 하지만 그의 여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시아를 돌아보는 여행이 대체로 꽤 심심했어요. 늘 혼자 다녔죠. ‘이게 무슨 삶인가?’라고 자문했어요. 여전히 어딘가를 가고 싶었는데 한국이 가장 익숙했어요. 한국은 저에게 새롭고 완전히 낯설면서도 동시에 아주 편안한 느낌을 주는 묘한 곳이었어요. 서구와 아시아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룬 곳이죠.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었어요.” 결혼과 문화 반 그늑튼 씨는 2017년 초 한국에 되돌아오게 된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첫째로, 그는 나중에 그와 결혼하게 될 여성인 김휘아(金輝妸 Kim Hwi-a) 씨를 만났다. “우리는 데이트 앱에서 만났어요. 그녀는 상수동에, 나는 합정동에 살고 있어서 거의 이웃이었죠. 우리는 서로 잘 맞았어요. 근데 그녀를 만났을 때가 네덜란드로 돌아가기 얼마 전이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좀 더 머물러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죠. 서로에 대한 모든 것을 좋아했기에 결혼을 안 할 이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혼했죠.” 2019년에 결혼을 한 후 반 그늑튼 씨와 그의 아내는 서울 마포구에 둥지를 틀었다. 그곳은 한강 옆으로 산책길과 자전거길이 있었고 주변에 여러 대학과 예쁜 가게들, 그리고 젊은이들이 밤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장소들이 있었다. 처음부터 한국의 급격한 변화는 반 그늑튼 씨에게 끊임없는 매력의 원천이었다. “일제강점기 억압과 한국전쟁을 겪은 나라가 경제적 성공과 민주화를 이루어낸 게 아주 흥미로웠어요. 그 후 아시아 경제위기를 맞고도 10년도 채 되지 않아 세계에 알려진 곳 중 하나가 된 것도요. 저는 인간과 환경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인문지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한국이 어떤 식으로든 더 커지게 될 거라고 느꼈어요.” 그는 한국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동네 고유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며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 귀 기울인다. 유튜브에 도전하다 2018년에 아내의 도움을 받아 반 그늑튼 씨는 ‘섹시그린(Sexy Green)’이라는 유튜브를 시작했다. 환경 이슈에 초점을 맞춰 원래는 친환경 물품을 파는 회사를 시작하는 게 목적이었고 채널의 콘텐츠를 통해 제품을 홍보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행과 다양한 문화에 대한 그의 열정과 관심이 곧 채널의 이름과 방향을 바꾸게 했다. 그렇게 해서 ‘아이고바트(iGoBart)’가 탄생했다. ‘아이고’는 새로운 곳을 방문하고 싶어 하는 반 그늑튼 씨의 욕구를 표현하는 동시에 언어유희이기도 하다. 한국어에서‘아이고’는 감탄사로 놀람과 공감 혹은 슬픔까지 표현한다. 300편이 넘는 유튜브 영상은 3,200만 뷰를 기록했다. 가장 인기 있는 영상 중에는 한국전쟁에서 싸운 네덜란드 참전용사의 인터뷰와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들이 있다. 이 시리즈는 그가 2018년에 북한을 방문한 후 만든 영상으로 시작한다. 그에게 이 시리즈는 네덜란드와 한국 사이의 가장 중요한 관계 중 하나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수천 명의 남자들이 이곳에 와서 싸웠고 그들 중 일부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이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생존하는 참전용사 대부분의 나이가 여든이거나 그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의 채널에 나왔던 이들 중 일부는 이후 돌아가셨다. 이제 살아 있는 네덜란드 참전용사가 100명이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마음은 다급하다. 이 시리즈는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기억을 끌어내는 것보다는 참전용사들에게 그들의 희생을 고맙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반 그늑튼 씨는 천생 이야기꾼이다. 혹자는 그를 인플루언서라고 부르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를 ‘기록자’, ‘영상 제작자’, 그리고 ‘유튜버’라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이들이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믿는다.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해요. 그것이 저에게 큰 영감을 줍니다. 제 아버지는 10형제 중 막내이고 이미 70세이세요. 아버지의 부모님은 15년 전에 97세로 돌아가셨어요. 그의 조부모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싸웠던 사람들을 알고 있었죠. 이제는 도달할 수 없는 역사죠.” 그가 작업 중인 ‘웰컴 투 마이 동(Welcome to my DONG)’은 서울의 467개 행정구역을 탐구하는 프로젝트다. 벽 한쪽에 그려놓은 지도에 다녀온 동네를 색칠하고 그가 느낀 동네의 특징을 적어놓는다. 발견의 2,000킬로미터 2021년, 반 그늑튼 씨는 번아웃이 왔다. 매주 콘텐츠를 올려야 하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결과물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영상들은 그가 만들고 싶어 하는 것들보다 뷰어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반영했다. 그의 아내는 “인생이 당신에게 뭘 주는지 가봐!”라는 영감을 주는 말과 함께 자전거 여행을 제안했다. 2021년 7월부터 10월까지 그는 약 2,000킬로미터를 해변을 따라 한국을 자전거를 타고 돌았다. 그는 외딴 지역의 풍경과 해안의 경치를 즐겼고, 시간이 멈춘 듯한 곳들을 방문했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시골 지역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여행은 자신의 삶과 자신이 선택한 제2의 고향에 대해 눈을 뜨게 만들었다. “제 아내가 최고라는 걸 배웠죠.” 반 그늑튼 씨는 또한 한국 문화에 대한 사랑을 더 깊이 깨닫는 경험을 했다. 어떤 것도 억지로 꾸며 말하거나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해 명쾌하게 표현하는 그는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은 외부 세계에 판매되고 있는 ‘완벽한 이미지’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인종주의와 차별이 있었어요”라고 그는 솔직하게 얘기했다. “저를 집으로 초대한 아주 친절한 분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여기 내 마을에서 뭐 하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러니까 모든 게 조금씩 다 있었어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하지만 그런 불완전함이 저를 매료시켜요.” 문화 차이 자신을 ‘시골 아이’라고 말하는 반 그늑튼 씨는 시골에서 자라서 이방인에게 인사하는 관습에 익숙했는데 한국의 대다수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저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걸 좋아해요. 젊은이들과 그렇게 하는 게 때때로 힘들지만, 나이 든 분들은 종종 시간을 내서 이야기를 나누죠”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네덜란드 사람들은 아주 솔직하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이라도 바로 친구가 되고 관계를 맺게 된다고 한다. 또 자신의 종교, 정치적 소속, 심지어 성생활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네덜란드와 한국의 문화 차이가 특히나 강하다. “함께 저녁을 먹을 때 어느 순간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고, 대통령에 대해서 혹은 누구를 뽑을 것인지 묻고 싶어요. 네덜란드에서는 이런 이슈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아마도 격렬할 수는 있겠지만요. 서로 반대 입장이어도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여전히 친구로 남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게 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반면에 그가 네덜란드로 돌아갔을 때는 대화 하는 상대방을 배려하여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는 한국의 예절이 그에게 영향을 미친다. “제가 한국 사람이 된 느낌이에요. 사람들의 감정을 좀 더 배려하게 되었죠. 한국에 살면서 나 자신을 좀 더 인식하게 되었어요. 두 나라의 좋은 점들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런데도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이 그저 “네덜란드 사람으로 이곳에 살면서 이 나라에 대해 배우고 있다”라고 말한다. 정말 한국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이 나라의 행복한 이방인이에요. 사람들이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이웃으로 환영하다 작년에 반 그늑튼 씨는 서울 서대문구 가좌동에 있는 전통 시장에 간 적이 있었다. 시장은 특별히 매력이 있거나 깨끗하진 않았지만 그를 끌어당겼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니!’하고 생각했어요. 덜 알려졌지만, 주목할 만한 장소들이 아주 많고 이곳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배울 기회가 많다고 느꼈어요.” 그의 가장 야심적인 유튜브 프로젝트가 뒤따랐다. 서울의 467개 행정 구역인 동에 대한 영상 시리즈가 그것이다. 이미 약 40개 동을 찍었다. “지역들이 모두 자기만의 이야기와 역사가 있어요. 각 지역을 흥미롭게 만드는 이 작은 조각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매력적이에요”라고 그는 말한다. 지금까지 만든 동 콘텐츠 중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뽑아 달라고 하자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포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곳은 한국에서의 제 고향입니다. 제가 자란 곳 같은 곳이죠. 길들을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잘 알아요. 그래서 고향 같고 그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아요.” 그는 궁극적으로는 전문가나 지역 주민들과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하며, 유튜브 시리즈를 보완해 책으로 내기를 바란다. 많은 한국 시청자가 댓글로 반 그늑튼 씨는 외국인이지만 한국에 대해 자신들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부인한다. “아마 그렇지 않을 거예요. 저는 그저 계속해서 배우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 있는 교수가 아니에요. 저는 그저 소셜미디어 인류학자라고나 할까요.”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의 열정과 배움의 여정을 공유하길 원한다. “저의 목표는 구독자를 모으는 것이었지만, 그건 아주 표면적인 것일 뿐이에요. 왜냐하면 그다음엔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세요?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에게 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지 묻지 않아요. 우리는 그저 시청하고 즐길 뿐이죠. 사람들이 제 채널에서도 그러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Daniel Bright 에디터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오랫동안 기억될 ‘홍텐 프리즈(freeze)’

Lifestyle 2024 SPRING

오랫동안 기억될 ‘홍텐 프리즈(freeze)’ 중학생 시절 브레이킹에 입문한 홍텐(Hong 10)은 2001년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출전해 비보이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어느덧 30대 후반이 된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창의적 퍼포먼스를 바탕으로 여전히 정상급 기량을 선보인다. 2021년 11월, 폴란드 그단스크(Gdańsk)에 있는 셰익스피어 극장에서 열린 ‘레드불 비씨 원 캠프(Red Bull BC One Camp)’ 장면. 홍텐의 시그니처 동작에 다른 참여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그는 ‘홍텐 프리즈’를 비롯해 독창적인 시그니처 기술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 Lukasz Nazdraczew, Red Bull Content Pool 2023년 9월 23일부터 10월 8일까지 중국 항저우에서 열렸던 제19회 아시안게임에는 45개국에서 온 1만 1,907명의 선수들이 총 40개 종목, 482개 경기에 참가해 실력을 겨루었다. 그중 브레이킹은 항저우 아시안게임부터 정식으로 채택된 신규 종목으로, 한국에서는 홍텐이 은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최초로 메달리스트가 됐다. 그의 본명은 김홍열(Kim Hong-yul, 金洪烈)이다. 이름 마지막 자(字) ‘열’을 외국 비보이들이 발음하기 어려워하자, 이를 동음이의어인 숫자 ‘10’으로 바꾼 것이 그의 활동명이 되었다. 그가 선보이는 창의적인 기술들은 이른바 ‘홍텐 프리즈((Hong 10 freeze)’라 불리며 전 세계 비보이 마니아들을 열광시킨다. 그는 에너지 드링크 브랜드 레드불이 2004년부터 개최하기 시작한 ‘레드불 비씨 원(Red Bull BC One)’ 월드 파이널에서 2006년, 2013년, 2023년 통산 세 번의 우승 벨트를 차지했다. 이로써 그는 세계 최정상급 비보이들만 참가할 수 있는 이 대회에서 네덜란드의 멘노 판 고르프(Menno van Gorp)와 함께 최다 우승의 주인공으로 기록되었다. 사실상 세계 최고의 비보이 반열에 오른 셈이다. 홍텐은 브레이킹 댄서에서 국가대표 선수,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 그리고 이제 올림피언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레드불 비씨 원에서 세 번이나 우승했다. 소감이 어떤가? 레드불 비씨 원은 브레이킹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이다. 나는 2005년 처음 참가했고, 2006년과 2013년에 우승했다. 2016년에는 2위에 그쳤는데, 그때 ‘앞으로는 우승하기 어렵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출전을 포기했다. 그러다가 2022년에 다시 초청받았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도저히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지난해 오랜만에 참가하게 됐을 때는 그곳에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았고, 우승까지 하게 되어 무척 기뻤다.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홍텐은 같은 해 레드불 비씨원 월드 파이널도 제패했다. 이로써 그는 네덜란드의 비보이 멘노 판 고르프(Menno van Gorp)와 함께 레드불 비씨원 월드 파이널의 최다 우승 기록을 갖게 되었다. 지난해 레드불 비씨 원 월드 파이널에서는 컨디션이 어땠나? 그때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대회 전에 무릎 부상이 있었고, 직전에 아시안게임을 치렀기 때문에 피로도 쌓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내 기분이 좋았고 전혀 긴장도 되지 않았다. 결승 상대였던 필 위자드(Phil Wizard)는 같은 레드불(Red Bull BC One All Stars) 소속이고 친한 사이다. 그와 즐겁게 겨뤘는데 그것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춤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이 하는 걸 보고 흥미를 느껴 시작하게 됐다. 브레이킹은 어려워 보이는 기술을 시도해서 성공시켰을 때 오는 쾌감이 있다. 초기에는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에서 큰 기쁨을 느꼈고, 시그니처 기술이 필요한 시기가 오면서는 나만의 무브를 만드는 게 재미있어서 계속하게 됐다. 움직임 개발은 창의성이 필요해서 쉽지 않을 것 같다. 자기만의 무브를 만든다는 건 도전의 연속이다. 어떻게 해야 뭘 만들 수 있다는 확실한 방법론이 있는 게 아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걸 창안하기도 어렵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내 몸이 해낼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래서 일 년에 한두 개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나는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무작정 다 적어 놓고 실험해 보는 편인데, 거의 다 실패한다. 되든 안 되든 계속 시도해 보는 근성이 필요하고, 창작하는 걸 좋아해야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슬럼프를 겪은 적은 없나? 2003년쯤 춤을 잠깐 그만둔 적이 있다. 2002년에 ‘Battle of the Year’, ‘UK B-Boy Championships’ 등 그동안 영상으로만 접했던 유명한 국제대회에 나가 우승했다. 그러고 나니까 꿈을 이뤘다는 생각에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춤을 그만두고 6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아는 형들이 찾아와서 팀 배틀에 나가자고 권유했다. 대회 준비를 하면서 내가 춤을 정말 좋아한다는 걸 새삼스레 느꼈다. 그 뒤로 슬럼프에 빠지면 브레이킹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잘 출 수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며 파고들었다.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최초의 메달리스트가 됐다.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아시안게임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 가늠하기 어려워서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가면서도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대회가 시작되고 보니까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기대감과 부담감이 동시에 커졌다. 운이 나쁘게도 대회를 2주 정도 남기고 무릎을 크게 다쳤다. 어떤 처치를 해도 회복이 되지 않아서 진통제를 먹으며 견뎌야 했다. 경기가 이틀에 나뉘어 진행됐는데 첫날에는 어떻게든 살아남자는 생각으로 간신히 버텼다. 둘째 날엔 처음 붙은 상대가 우승 후보 중 한 명인 카자흐스탄의 아미르(Amir, 본명 Amir Zakirov)였다. 이길 생각 말고 준비한 것만 잘하자고 마음을 비웠더니 오히려 자신감이 더 붙었다. 결승에서는 일본의 시게킥스(Shigekix, 본명 Nakarai Shigeyuki)를 만났는데 한 표 차이로 준우승을 해서 좀 아쉬웠다. 서울 홍대 입구에 위치한 연습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비보이 홍텐. 플로우엑셀(FLOWXL) 크루 소속인 홍텐은 10대 중반 브레이킹에 입문하여 20년 넘게 정상급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올림픽에 나가려면 5월과 6월에 열리는 예선전을 잘 치러야 한다. 거기서 10위 안에 들어야 출전권이 주어진다. 그래서 당장은 예선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목표다. 춤을 언제까지 출 것 같나? 브레이킹은 배틀이라는 문화가 바탕에 깔려 있다. 춤을 그만둔다는 것은 배틀에 나오는가 아닌가가 기준이 된다. 심사위원 같은 다른 활동을 계속하더라도 배틀을 중단하면 그것이 곧 은퇴이다. 우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배틀에 나서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은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언제까지 배틀에 참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출 수 있는 한 오래 추고 싶다. 다만 지금까지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에 올림픽을 기점으로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있다. 후배들에게 어떤 댄서로 기억되고 싶나? 국내 브레이킹 신을 바꾸려고 노력했던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다. 우리나라는 외국에 비해 어린 나이의 비보이들이 적은 편이다. 내게는 어린 친구들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유입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홍텐 프리즈’처럼 내 이름이 붙은 기술들이 있다. 훗날 브레이킹에 입문한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은 모르더라도 내 이름이 붙은 기술은 알게 될 거다. 그거면 족하다. 윤단우(Yun Danwoo, 尹煓友) 무용 평론가 허동욱 포토그래퍼

문구 취향의 발견

Lifestyle 2023 WINTER

문구 취향의 발견 인간 문명의 역사 속에서 문구는 빼놓을 수 없는 도구다. 안료를 쓴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 무중력 상태 우주에서 기록 수단인 된 우주 볼펜…. 특히 한국은 예부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쓰는 문구를 ‘문방사우(文房四友)’라 하여 친구로 표현하기도 했다. 역사를 거듭하며 발달해 온 문구는 오늘날 ‘취향의 도구’로 자리하고 있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연필은 누군가에겐 창작의 연료였고, 누군가에겐 추억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역사 속에서 연필을 비롯한 ‘문구’는 수많은 발명품 옆에 항상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종이와 펜 대신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찾는다. 메모장 애플리케이션을 켜서 기록하고, 사진을 찍거나, 녹음하기도 한다. 그림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 태블릿PC나 패드로 스케치는 물론 다양한 색과 질감으로 색칠까지 가능하니 훨씬 간편해졌다. 그렇다면 종이와 펜을 비롯한 문구는 미래에 사라질 것인가? 그 답은 ‘아니오’라 확신할 수 있다. ‘디깅(Digging)’ 트렌드와 결합된 문구 문구 마니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건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다. 모두가 똑같이 스마트폰을 들고, 키보드 자판을 치고 있는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인 디지털 사회에서 문구는 개인의 ‘취향의 도구’가 되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제품별로 다양한 탄생 일화가 있고, 사용자의 수많은 취향을 맞추기에 이만큼 풍성한 아이템이 있을까. 연필만 하더라도 주로 사용하는 손(오른손잡이, 왼손잡이), 무게, 색, 나무 종류, 촉감, 흑심 진하기 등 각종 조건에 따라 선택지는 무궁무진하다. 유통업계는 이렇게 자신에게 맞는 취향에 집중하고 파고드는 행위를 ‘디깅(Digging)’이란 단어로 표현한다. 한 해 소비 트렌드를 분석하는 도서< 트렌드 코리아 2023 > 에는 ‘디깅 모멘텀(Digging Momentum)’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이는 자신이 좋아하고 선호하는 분야에 더 깊게 파고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국내 최대 만년필 동호회 펜후드(PENHOOD)는 디깅 트렌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만년필, 필기구, 손 글씨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이곳은 약 4만 6,000명에 달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펜후드가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오프라인 행사인 펜쇼에서는 몇십 개의 부스에서 다양한 만년필 컬렉션을 선보인다. 다양한 아이템으로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표현하기 좋은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는 누구나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취미 활동으로 손꼽힌다. ⓒ 모나미 국내 대표 문구 브랜드인 모나미는 서울 성수동에 오프라인 매장인 모나미 팩토리를 오픈했다. 이곳에서는 물건 구매뿐만 아니라, 모나미의 역사와 제품 소개, 체험 등을 통해 브랜드 경험을 제공한다. ⓒ 모나미   팬데믹과 함께 커진 ‘다이어리 꾸미기’ 문구 시장 특히 최근의 문구 취향은 더욱 다양해지고 세분되고 있다. 이는 지난 2~3년 동안 이어진 팬데믹 기간의 트렌드 변화다. 사람들은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아날로그 활동에 대한 갈증을 풀기 위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취미 활동을 찾아갔다. 그 중에서도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는 특별한 기술이나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취미 활동으로 꼽힌다. 특히 다꾸는 큰돈이 드는 취미가 아니다. 500~3,000원 사이면 새로운 문구 아이템을 구매하기에 충분하다 보니 진입장벽 또한 낮다. 다양한 아이템으로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표현하는 데 익숙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다꾸 문화가 확산하면서 온〮오프라라인 매장에서 문구 아이템 역시 매출 효자 품목이 되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에 익숙한 세대에게 ‘다꾸’는 색다른 레트로 문화이기도 했다. 빈 노트에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손 글씨를 쓰며, 스티커와 각종 패턴이 인쇄된 마스킹 테이프, 종이 등을 붙이는 다이어리 꾸미기는 킬링타임용으로도 제격이었다.   문구 마니아들을 위한 이곳 작은연필가게 흑심은 추억의 도구로 전락한 연필의 가치에 대해 알리는 공간이다. 단종된 제품부터 컬렉션 제품까지 다양하고 아름다운 연필을 큐레이션하고 있다. ⓒ 이승연(李承姸) 동네 문방구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지난 7월 15일 방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 > 에서는 폐업을 앞둔 문방구의 정리를 돕고자, 일일 영업 사원으로 변신한 출연진들의 모습을 비춘 적 있다. 이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동네의 오래된 문방구, 문구점 수는 점차 줄어가고, 이 자리를 생활용품점, 무인 문구점 등이 대체하고 있다. 사람들의 아쉬움 때문일까. 역으로 사람 냄새, 추억을 담은 문구 공간들은 주목받고 있다. ‘문구’라는 상품에 더욱 집중한 공간들로, 서울의 성수동, 홍대 입구, 종로구, 이태원 등 소위 핫플레이스에 위치해 눈길을 끈다. 국내 문구 기업 모나미(monami)의 오프라인 공간 ‘모나미 스토어’ 역시 젊은 세대들이 꼽는 핫플레이스다. 지난해 성수동에 오픈한 모나미 스토어 성수점은 1963년 출시된 국내 최초의 볼펜인 모나미 153이 만들어진 성수동 공장을 모티브로 하여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이다. ‘모나미 팩토리(Monami Factory)’를 주제로 한 이곳에선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는 스토어뿐만이 아니라, 모나미의 역사와 제품을 통해 새로운 브랜드 경험을 제공한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체험형 특화 공간에서 내가 원하는 펜을 DIY 해서 만들어 볼 수 있다는 것. ‘DIY 153 시리즈’ 볼펜 만들기, 프러스펜 만들기부터 잉크 랩(Ink LAB) 공간에서는 다양한 색상의 잉크를 조합해 나만의 만년필 잉크 DIY 체험 등이 가능하다. 이 밖에도 다양한 수요를 가진 고객들을 겨냥한 문구 상품들이 즐비하다. 연남동 골목에 있는 ‘작은연필가게 흑심(Black Heart)’은 문구 마니아들에게 입소문 난 공간이다. 흑심은 오래된 연필과 그에 담긴 이야기를 수집하는 공간이다. 주인의 취향과 기준으로 직접 수집한 연필과 그에 관련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곳은 젊은 세대들뿐만 아니라 40~50대 손님들도 심심치 않게 만나볼 수 있다. 단종된 브랜드 또는 과거 디자인의 연필들도 있어 이용객들 역시 흥미로워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듯한 모양새다. 그 밖에도 성수동의 ‘포인트 오브 뷰 서울’, 홍대 ‘호미화방’, 종로 ‘파피어프로스트’ 등은 문구 마니아들이 좋아할만한 창작을 위한 도구를 판매한다.문구 탐험과 여행을 겸하고 싶은 문구 여행자들이라면, 강원도 동해시에 있는 연필뮤지엄(pencil museum)으로 향하는 것도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영국의 ‘더웬트 연필박물관’을 벤치마킹한 이곳은, 연필뮤지엄 대표가 30여 년간 100여 개 국가를 다니며 수집한 나라별 다양한 테마의 연필 3,000여 점을 전시한다. 각종 세계적인 브랜드의 연필과 함께 ‘흑연이 연필로 탄생하기까지의 제작 과정’, ‘역사에 남은 연필의 기록’ 등 연필 관련 역사와 오브제를 한눈에 살펴보기 충분하다.   문구, 스토리를 담다 문구는 없어지지 않겠지만, 해당 시장은 여전히 어렵다. 세대가 어려질수록 문구 소비 행태가 줄어든 것은 물론, 저가상품이 많아지며 경쟁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시장엔 변화가 필요했다. 마치 전기·전구가 확산하면서 양초의 쓰임이 변화한 것처럼, 문구의 용도를 확대하고 디테일한 변화로 차별성을 주기 시작했다. 모나미는 자사의 상품에 스토리를 입히며 주목받았다. 지난해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 에디션 제품 ‘153 ID 8.15’를 출시해 한국 광복군을 알리기도 하고 최근엔 탄생화, 탄생석, 별자리 3가지 의미를 담은 펜 등을 출시하기도 했다. 또한 일회용 폐플라스틱, 코코아 껍질 등을 활용해 친환경 제품을 출시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제품을 업사이클 굿즈로 제작하는 등 지속가능성 측면까지 고려하고 있다. 이처럼 문구는 변화를 거듭해 가며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역할,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채 소비자들의 오랜 ‘친구’로서 남아 있을 것이다.   이승연(Lee Seung-yeon) 매일경제 주간국 시티라이프

맨손으로 고치는 만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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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으로 고치는 만년필 손으로 글씨를 쓸 일이 도통 없는 이 시대에, 여러모로 불편한 만년필을 사랑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 만년필 한 자루가 그들에겐 작은 행복이고 사치다. 만약 아끼는 만년필이 고장 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의 금이 간 행복을 고쳐줄, 만년필 수리를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여기 있다. 손으로 글씨 쓸 일이 별로 없는 요즘 시대에 만년필을 수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김덕래(金德來) 씨. 그는 이 일이 단순히 펜을 수리하는 것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잇는 일이라고 말한다. ‘만년필의 미덕, 만년필의 고집을 절반이라도 지닌 사람은 우리 중에 없다’라고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말했다. ‘잉크가 샘물처럼 솟아난다’는 의미의 파운틴 펜을 우리나라에서는 만년필이라고 부른다. ‘천년만년’, 즉 영원히 사용할 수 있는 펜이라는 뜻이다. 물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만년필도 예외는 아니다. 펜촉은 마모되고 자칫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고장 난다. 오래 방치하면 잉크가 말라붙어 제 기능을 상실한다. 수리한 만년필로 쓰는 손 편지 그의 아지트이자 작업실은 방에 딸린 작은 드레스룸이다. 이곳에는 수리를 맡긴 고객들의 만년필, 수리 도구와 색색의 잉크, 그리고 고객들이 보내온 편지와 선물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는 도구 대신 맨손과 손톱으로 만년필을 수리한다. 손끝만큼 예민하고 또 정밀한 도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년필을 구입하기는 쉽지만, 고장이 난 만년필을 수리하는 일은 불편하고 때론 어렵다. 국산 브랜드인 모나미를 제외한 대부분의 만년필은 수입품이다. 국내에서 구입한 수입 만년필이 고장 나면 구입처로 접수 가능하지만, 병행수입 제품을 구입했거나 해외에서 구입한 경우 등은 사실상 수리를 맡길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구입한 제품이라도 손상의 정도가 심각하면 애지중지 아껴온 펜일지라도 수리불가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 또 부모님의 유품이거나 오래된 빈티지 만년필 등이 손상된 경우는 더더욱 맡길 곳이 없다. 이 때문에 만년필 사용자들에게 김덕래(金德來) 씨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만년필 수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이가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아니라 중학생과 고등학생인 두 아이를 둔 1974년생 아버지이다. 경기도 김포시의 아파트, 그 안에서도 방에 딸린 한 평 남짓한 드레스룸이 그의 작업실이다. 갖가지 만년필들과 색색의 잉크병들, 벽에 붙은 메모지들, 작업대와 컴퓨터, 앙증맞은 냉장고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한쪽 벽에 있는 창문으로 손바닥만 한 햇빛이 들어온다. 좁지만 아늑한 공간이다. 그의 하루는 아침 일곱 시 무렵 시작된다.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있으니 늦잠 잘 여유는 없다. “아내와 교대로 아이들 아침밥을 차려주거든요. 아이들을 깨워서 간단한 시리얼 등으로 아침을 챙기고 학교 보내고 나면 아홉 시쯤 되요. 그때부터 제 일과가 시작됩니다.” 그의 손에 맡겨지는 만년필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떨어뜨려 펜촉이 완전히 손상된 경우,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필기감이 이전과 달라진 경우, 실제로는 멀쩡한 상태지만 사용하는 사람이 ‘정상 컨디션인지 모르겠다’라고 느끼는 경우이다. 즉 심각, 경미, 정상, 세 가지로 나뉜다. ‘심각’으로 분류된 만년필의 대부분은 펜촉이 망가진 케이스다. 펜촉은 만년필의 심장이자 가장 비싸고 예민한 부품이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휘어진 부분을 펜촉보다 강한 도구로 펴면 되레 더 심하게 꺾이는 경우가 많아요. 수리할 때 손톱으로 조금씩 펴주는 게 저는 가장 좋더라고요” 도구 대신 맨손을 사용하는 이유이다. 손끝만큼 예민한 도구, 손톱만큼 정밀한 도구는 없다. 펜을 분해해서 펜촉을 반듯하게 잡고, 내부를 세척하고, 다시 결합하여 잉크를 주입하면 일이 끝나는 것 같지만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은 그 후부터다. 수리된만년필을 직접 사용하며 테스트해야 한다. “만년필을 반나절 눕혀두었다가 사용해 보고, 그다음 날엔 하루 동안 세워두었다가 사용해 보기도 해요. 뒤집어서 놔두기도 하고요. 어떤 경우에도 잘 쓰여야 하니까요.” ‘심각’의 경우보다 까다로운 것은 ‘경미’의 경우다. 사용하는 사람이 그만큼 예민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작업할 때도 예민해진다. 사용하다 생길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고 반복적으로 테스트하여 완벽한 상태로 만들지 않으면 안심할 수가 없다. 하루 안에 작업이 마무리될 때도 있지만 길게는 열흘쯤 걸리기도 한다. 작업이 끝나면 수리한 만년필로 손 편지를 쓴다. “펜을 다 수리하면 그 펜으로 편지를 써서 함께 보내요. 편지에는 ‘내가 의뢰한 펜이 이런 과정을 겪었구나’라고 이해하실 수 있는 내용들을 적어요. 왜 문제가 생겼는지, 어떤 조치를 했는지, 어떤 테스트를 거쳤는지 알려드리고 앞으로 사용할 때 도움이 될 내용도 적어요. 편지는 만년필이 이제 이렇게 잘 써진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고, 손 편지가 귀한 시대에 펜으로 쓴 편지를 받는 기쁨을 전하기 위함이기도 해요.” 그 시간에 펜 하나 더 수리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이도 있지만 김덕래 씨에게는 의미 있는 과정이다. 물건을 고치는 일이 마음과 마음을 잇는 일로 바뀐다.   새로운 선택 손상 정도에 따라 적절하게 수리하면 작업이 끝난 것 같지만, 본격 작업은 그 이후부터이다.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하고 수없이 테스트를 반복한 후에야 고객에게 보낸다.   강릉이 고향인 김덕래 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삼척산업대학교 토목학과에 입학했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 복무 후 복학해 학교를 다니던 중 길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가 굉장히 재미있다며, 너도 한 번 우리 학교에 대해 알아보라던 친구의 말이 이상하리만큼 마음에 남았다. 친구의 권유로 학교를 그만두고 그 해에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전공과 관련 없는 의류매장 운영, 사회복지사, 해외배송업체, 일식조리사, 자동차 정비, 레저용품 생산회사 등을 전전하다가 2012년 수입 필기구 유통회사에 들어갔다. 내세울 경력이 없는 자신에게 마음을 써주는 사장님에게 보답하려고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열심히 일을 익혔다. 고객관리가 주 업무였는데 ‘고객의 만년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어느 날 들었다. 퇴근 후와 주말에 자신의 만년필을 일부러 고장 내고 고치면서 수리하는 방법을 스스로 익혔다. 고객들의 만년필을 고쳐주면서 만년필 사용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고, 지방의 한 대학교에서 강의해달라는 요청과 교내 웹진에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강의와 연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선택해야 할 시기가 왔어요. 안정된 직장에 다니느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냐. 아내는 어처구니없어 했지만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죠. 그게 2020년이었어요.”   수입은 줄어도 행복은 는다 고객은 초등학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다양하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 연재한 글을 보고 연락한 사람, 고객의 소개를 받은 사람, 인터넷 검색으로 그를 찾아낸 사람들이 의뢰인이다. 전화, 이메일, SNS 등으로 먼저 상담한 후 일이 진행되는 방식을 알려주고 택배로 만년필을 받는다.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경우에는 방법을 알려드려요. 수리가 필요할 경우에는 비용이 얼마 정도 드는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안내한 후 잘 생각해 보시고 보내라고 해요. 여러 변수가 있으니 느긋하게 기다리실 수 있는 분의 의뢰만 받아요.” 적게는 4~5만 원, 많게는 40~5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발생하고 수리 기간은 3개월에서 5개월 정도 걸린다고 미리 설명한다. 한 달에 20~30자루 정도 수리하는데 지금 수리 중이거나 대기 중인 만년필은 40자루 정도이다. “한 달에 20일은 만년필을 수리하는 것에 집중해요. 나머지 10일 중 일주일 정도는 글을 쓰고요. 그리고 2~3일 정도 강릉에 계신 부모님을 만나러 가요. 한 달에 한 번 강릉 가는 것, 2주에 한 번 헌혈하러 가는 것, 그리고 가끔 산책하는 것 외에 외출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주말도 휴일도 없어요. 이 공간이 일터이자 휴식처예요. 창문이 없었다면 밤낮도 몰랐을걸요. 끼니 챙기는 것도 종종 잊어버릴 정도니까요.” 아침 아홉 시에 시작한 작업은 저녁 아홉 시, 열두 시, 때로는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지기도 한다.수리, 테스트, 상담, 작업 과정 기록, 손 편지 쓰기, 고객들과 안부 주고받기 등으로 하루가 빼곡하게 채워진다. “한 달에 열 자루도 못 고칠 때도 있어요. 언젠가부터 속도가 오히려 느려졌어요. 전에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젠 만족이 안 되니까. 최상의 상태를 만들어 주는 게 저의 도리죠. 좁은 작업실에 있지만 전 세계의 펜을 만질 수 있는 직업이에요. 작업시간을 줄이면 수입이 나아질지 몰라도 저는 덜 행복할 것 같아요. 그리고 누구보다 진심으로 만년필을 대하는 수리공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는 고객들이 있어서 좋아요. 전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 제가 선택한 인생이니까요.”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 작가(Photographer)

삶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나누다

Lifestyle 2023 WINTER

삶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나누다 미국인 메건 문(Megan Moon) 씨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메건 문Megan Moon’을 통해 수십만 명의 구독자에게 한국을 소개하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꿈을 좇아갈 수 있도록 영감을 준다. 쌍둥이의 엄마이자 유튜버인 메건 모어(Megan Moore) 씨는 2012년 한국에 왔다. 다양한 인종이 섞인 미국에서 살다가 한민족으로 구성된 한국의 삶이 매우 흥미로웠다는 그녀는 한국 문화에 매료되어 계속 머물게 되었다. 메건 씨가 거실에 있는 넓은 감청색 소파에 앉아 있다. 거실 창가에는 아침 이슬이 반짝이는 잔디밭이 보인다. 파주에 있는 그녀의 집은 고요하고 편안하다. 그녀가 미국 남부에서 자랄 때의 환경도 이와 비슷했는데, 사슴이 가끔 정원에 들르곤 했었다. 지난 십 년 동안 서울에서 살다가 남편과 작년에 태어난 쌍둥이와 함께 이곳에 정착하는 중이다. 그녀의 남편은 한국의 유명 인사들을 위한 옷을 디자인하는 패턴 도안가이다. 이들의 삶은 메건 씨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유된다. 수십만 명 구독자들은 그들의 일상을 통해 한국 문화와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미국 문화의 장점을 잃지 않으면서 한국 문화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데 열중했다. 이제 메건 씨는 문화적으로 자신이 “미국과 한국 그 중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통 창구인 유튜브 메건 씨는 한국어 소리에 반해 한국어 공부에 푹 빠졌고, 이제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그녀는 능숙한 한국어 실력이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이는 그녀의 유튜브 영상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해 그 나라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법의 구조가 정말로 어떻게 사물을 생각하는지를 결정하는 것 같아요.” 유튜브 채널에 올릴 콘텐츠의 기획과 촬영, 편집 등에는 시간도 많이 투입되고 이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조율할 것도 많다. 그래서 전업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90만 명의 구독자를 달성하여 유료 광고 수입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주로 브이로그 형태로 제작하며, 한국 사람들의 일상과 좋아하는 곳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가 한국이 낯선 이들에게 전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는 음식이다. 한국 음식을 먹는 다는 것은 한국 문화 경험의 깊이를 더하는 일이다. 메건 씨의 경우 처음에는 뜨거운 찌개나 국을 먹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그래서 식을 때까지 10분을 기다린 적도 있다. 이제 그녀는 주저하지 않는다. “그냥 바로 먹어요. 적응되었고, 아주 뜨거운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지난번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식당의 음식들이 모두 너무 차가웠어요. 혼자‘온기가 어디로 간 거야?’라고 생각했죠.” 그녀가 또 한 가지 놀라웠던 것은 한국은 요리할 때 재료의 모든 부분을 사용해 아무것도 버리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에서는 식재료의 어떤 부분들이 그냥 버려지기 일쑤다. 예를 들면 고구마 줄기 같은 것이다. “고구마 줄기는 아주 맛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리고 마늘종도요. 미국에서 운전하고 있을 때였어요. 길가에 쑥이 있었어요. 하지만 미국인은 그걸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것들을 이용해 요리하죠.” 그녀의 유튜브 콘텐츠 중에서도 도전과 개인의 목표, 그리고 가족생활을 보여주는 콘텐츠에 구독자 코멘트가 더 많이 달린다. 그녀는 자신의 콘텐츠가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길을 걷다 외국인이 그녀에게 다가와 자신의 영상을 보고 한국에 왔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들은 ‘한국에 오는 게 꿈이었지만 겁이 났어요’라고 말해요.”라고 메건 씨는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콘텐츠를 통해 사람들이 사람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자 한다. “잘 안된 일들도 있어요. 예를 들어 온라인에서 옷을 파는 일 같은 거죠. 하지만 ‘좋아. 그건 나한테 맞지 않는 일이었어. 다른 걸로 해보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죠. 인생은 너무 짧아요. 시도해 보지 않으면 잘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깊은 인상들 그녀는 아이들이 어느 하나에 본인의 역할을 국한하지 않는다. 아내이자 부모, 고양이의 보호자이자 유튜브 운영자, 그리고 자신만을 위한 시간도 꼼꼼히 챙긴다. 메건 씨가 어떻게 한국으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에 다시 음식 이야기가 언급되었다. “미국에 있을 때 한국 음식점에 간 적이 있어요. 음식도 맛있고 반찬도 무료여서 대학 다니는 동안 자주 갔었죠”라며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국어를 들었는데 소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레스토랑 직원들이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어요.” 대학을 졸업한 후 메건 씨는 2012년에 영어 강사로 2년간 일하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한국을 이제 ‘고향’이라고 부르는 많은 외국인에게 한국의 첫인상은 완전히 새로운 것의 시작이었다. 메건 씨는 처음으로 단일 인종으로 이루어진 곳에 있게 되었고 그것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한국인들에만 둘러싸여 있는 경험은 완전히 새로웠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는 미국에서 온 저에게는 이상했어요.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그저 한 종류의 사람들만 보는 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그녀가 적응해야 했던 또 다른 경험은 사람과 쉽게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커뮤니티 특유의 여유로움 덕분에 서로 쉽게 친해지고 지속해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울은 집중적인 생활 방식과 회사 생활의 비중이 높아 사람들과의 교제가 쉽지 않았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국 체류를 기약 없이 연장하기로 했다. “한국이 고향 같은 느낌을 받아서 계속 머물기로 결심했어요. 한국이라는 나라와 문화가 저랑 잘 맞는 것 같아요.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국 사람들을 정말 좋아해요. 아주 친절하고 사람들을 잘 도와주죠.”   엄마가 되기 딸 루나와 아들 루빈이 태어난 이후 메건 씨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두 아이는 하루 종일 저를 필요로 하죠. 밥하고 청소하는 것이 다가 아니에요. 아이들이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는 데에 제 도움이 필요해요. 주의와 자극도 필요하고요. 또 아이들이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해요. 작은 일 하나하나를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하죠.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저는 완벽주의자예요. 모든 일을 다 잘하고 싶어 해요. 그래서 그냥 여기 앉아서 만화나 영상 등만 보여주지 않으려고 해요.” 그녀의 주요 목표는 아이들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도전을 극복하는 데에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성장 마인드를 갖기 바란다고 말할 수 있죠. 그렇게만 되면 잘 살아갈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편의점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고 해도 말이죠.” 유튜브 운영과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와중에 메건 씨는 자신만을 위한 시간도 잊지 않는다. 그 시간엔 주로 운동을 하는데, 이는 그녀가 정서적으로 충전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2021년에 비키니 모델 대회에 나가기 위해 도전한 적이 있다. 이와 관련된 영상을 유튜브 채널에 올렸고, 이것이 KBS 다큐 프로그램에 방영되기도 했다. 혼합된 유산과 정체성 그녀는 아이들이 미국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며 클 수 있도록 노력한다. “Q&A 내가 흑인이라는 걸 알게 된 한국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제목으로 2013년에 업로드된 영상은 13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 영상에서 메건 씨는 자신이 “흑인이지만 아주 밝은 피부를 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부모 사진을 보여줬다. 그녀의 어머니는 백인, 흑인, 인디언 원주민이 혼합된 사람이고, 아버지는 흑인이다. 그녀가 크면서 흑인이지만 밝은 피부색을 가졌다는 이유로 다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피부색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예를 들면 자신의 개성과 행동 등이다. 그녀는 그녀의 아이들이 이질감을 느낄 수 있는 어떠한 ‘딱지’도 붙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냥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로 살아가려고 해요. 너는 한국인이야. 너는 미국인이야. 너는 두 개의 언어를 할 수 있어. 우리는 크리스마스도 추석 명절도 축하하는 것처럼요.” 성인이 되었을 때 그녀는 다른 환경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저는 매우 추진력이 강하고 목표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도전하기를 좋아하고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그러한 태도가 아버지 덕분이라고 했다. 그녀가 여섯 살 때 치어리더를 하게 되었는데 축구장을 여러 번 도는 훈련을 해야 했다. 한 바퀴가 2.5킬로미터 정도였다. 그녀는 반복적인 그 훈련이 싫었고 그래서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안 돼, 그만둘 수 없어. 그걸 하면서 뭔가를 배울 수도 있잖아’라고 말했어요.” 그 후 메건 씨의 아버지는 그녀와 함께 매번 달리기를 완주했다. “그 일은 제게 아주 중요했어요.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죠. 아빠가 ‘그만두고 싶어? 그래, 그만둬’라고 말했다면 저는 지금 한국에 있지 않을 거예요. 아마도 삶에 대한 다른 태도와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아요.” 그녀의 다음 도전은 무엇일까?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이 길다고 말한다. 그중 하나는 특히 유별나고,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사실 저는 버스 운전 면허증을 따고 싶어요. 젊은 외국인 여자가 한국에서 버스 운전하는 것, 상상하실 수 있겠어요?” Daniel Bright 에디터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

Lifestyle 2023 WINTER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 정보라는 일상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초현실적으로 그려내는 소설가이다. 속도감 있게 읽히는 그녀의 소설은 독자들에게 재미와 더불어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작가는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해 최근에는 고통을 없애주는 신약이 개발된 세상을 배경으로 한 네 번째 장편 『고통에 관하여』를 발간했다.. (왼쪽부터) 갈매나무의 장르 문학 전문 브랜드 퍼플레인이 2023년 발간한 신작 소설집 『한밤의 시간표』, 알곤킨 북스(Algonquin Books)가 2022년 펴낸 『저주토끼』 미국판, 지식 콘텐츠 기업 인플루엔셜의 문학 전문 브랜드 래빗홀에서 2023년 출간된 『저주토끼』 개정판, 다산책방에서 2023년 발행된 신작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 2021년 혼포드 스타(Honford Star)가 발간한 『저주토끼』 영국판 표지. ⓒ 갈매나무 ⓒ Algonquin Books ⓒ 인플루엔셜 ⓒ 다산책방 ⓒ Honford Star Ltd. 2022년 5월 22일 런던 사우스뱅크센터 퀸엘리자베스홀에서 개최된 부커상 낭독회에 정보라 작가가 『저주토끼』의 번역가 안톤 허와 티셔츠를 맞춰 입고 참석했다. ⓒ 셔터스톡, 사진 Andrew Fosker 2022년, 정보라의 소설집 『저주토끼(Cursed Bunny)』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그런가 하면 올해는 미국판이 전미도서상 번역 부문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10편의 작품이 실린 이 소설집은 호러, 판타지, SF 같은 장르적 장치를 통해 일상에서 느끼는 공포와 압박을 오싹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출간된 지 5년이 지난 이 책은 국내 서점가에서도 뒤늦게 베스트셀러가 되며 큰 화제를 일으켰다.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보라는 연세대학교 졸업 후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러시아동유럽 지역학 석사 과정을 거쳤으며, 인디애나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과 폴란드 문학에 대한 논문을 써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여러 편의 장편과 단편집들을 출간했다. 최근에는 대학 강의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활발히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독일 베를린국제문학축제에 초청되어 글로벌 작가들과 토론을 마치고 귀국하던 9월 어느 날, 서울 홍대 입구의 한 카페에서 작가를 만났다. 지난해 『저주토끼』가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라 집중 조명을 받았다. 이후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글로벌 독자들이 SNS를 통해 나에게 직접 감상을 얘기해 주었다. 어느 나라 독자들이나 모두 화장실 가기가 무섭다고 하더라. 수록작 중 하나인 「머리(The Head)」에 변기에서 머리가 나오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는 그다지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다만 소재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당신의 소설에 나타나는 ‘환상성’을 글로벌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하다. 이번 베를린문학축제에서 호러와 마술적 리얼리즘, 두 세션에 참가했다. 둘 다 다른 작가들과 대담하는 세션이었는데, 나는 귀신 이야기를 많이 했다. 12~13세기에 편찬된 우리나라 역사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기이한 사건들과 신묘한 동물들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 사고방식은 비슷한 것 같다. 이런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시각이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행사에서도 귀신 얘기를 했는데 다들 열광했다. 그리고 질의응답 시간에 독자들이 아주 적극적이었다. 한국의 상황에 대해 관심도 많고 질문 수준도 높았다. 한국만의 독특한 환상성은 다른 나라와 무엇이 다른가? 소재나 내용이 다를 뿐이지 현실에서 초월적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전 세계가공통적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한국만의 색깔을 찾는다면 단지 배경이 한국이라는 점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글로벌 독자들이 내 소설에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외할머니, 그리고 귀신이 나오는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 > (1977~1989)을 보며 성장한 바탕이 작품에 영향을 끼쳤는가? 그렇다.< 전설의 고향 > 은 어딘가에서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귀신도 등장하는 드라마이다. 흥미진진해서 어렸을 때 즐겨 봤다. 올해 봄 출간한 소설 『호(狐)』는 여우에게 홀린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드라마처럼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상상 속 동물 구미호(九尾狐)가 등장하긴 하지만 현대를 배경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행동주의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쓰는 일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도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시위를 막 마쳤을 때 들었다. 나는 머릿속에 주저앉아 상상만 펼치는 삶을 경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편이다. 그리고 문학의 기능 중 하나가 독자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인데, 작가로서 욕심을 내본다면 그들이 내 작품을 읽고 복잡다기한 감정을 최대한 느꼈으면 좋겠다. 환상을 도구로 사용하지만, 사실주의 작가의 속성을 담고 있는 셈인가? 마술적 리얼리즘의 특징 중 하나가 기이한 사건에 대해서 굉장히 현실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거다. 사람에 대해서 쓰면 결국은 현실적인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에게 소설을 쓰는 행위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동안 러시아와 폴란드 작품들을 상당히 많이 번역했다. 번역 일이 소설 쓰는 데 도움이 되는가? 오랫동안 번역 일도 해 왔는데, 소설 쓰는 법을 많이 배웠다. 우선 문장을 한국어로 옮겨야 하니까 문장력 향상에 도움이 됐다. 또 이야기를 전개하거나 새로운 관점,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 같은 중요한 요소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특히 나는 모든 새로운 시도들이 각광받았던 시기의 슬라브 문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글로벌 독자들이 당신의 소설을 어떻게 읽기를 바라는가? 독자가 없으면 작가도 없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독자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작가가 되는 느낌이다. 무한히 감사드린다. 『저주토끼』가 많은 나라들에서 번역됐는데, 원작과의 차이점을 생각하지 말고 번역가를 전적으로 신뢰하면 좋겠다. 앞으로 어떤 작품들을 계획하고 있는가? 유토피아를 계속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떻게 해야 모두가 더 행복한 사회를,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계속 쓸 예정이고, 또 행동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귀신 이야기도 계속 쓰려고 한다. 정보라의 2017년 작 『저주토끼』는 번역가 안톤 허의 제안으로 2021년 영국 혼포드 스타에서 영어로 번역, 발간되었으며 이듬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정보라의 소설들은 대체로 기괴하고 비일상적이지만, 그 이야기들은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작가의 분노에서 출발한다. 조용호(Cho Yong-ho, 曺龍鎬) UPI뉴스 문학 전문 기자(Culture Desk Reporter, UPI News)

신나는 음악적 혁명

Lifestyle 2023 AUTUMN

신나는 음악적 혁명 2020년 결성한 얼터너티브 일렉트로닉 듀오 해파리(HAEPAARY)는 국악을 현대적 비트로 재해석한 음악을 선보인다. 이들의 독창성은 2022년 한국대중음악상(Korean Music Awards)에서 받은 최우수 일렉트로닉 음반상과 최우수 일렉트로닉 노래상이 입증한다. 서울 합정동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무대륙(Mudaeruk, Mu-大陸)에서 두 사람을 만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터너티브 일렉트로닉 듀오 해파리(HAEPAARY)는 노래하는 박민희(사진 왼쪽)와 연주하는 최혜원이 만나 2020년 결성했다. 이들은 대중음악과 국악을 재료로 삼아 자신들의 화법으로 새롭게 재구성하는 음악 작업을 선보이고 있으며, 한국 전자음악계에 새로운 신호탄을 던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2019년, 얼터너티브 팝 밴드 이날치(LEENALCHI)가 발표한 < 범 내려온다(Tiger is Coming) > 는 일대 돌풍을 일으켰다. 판소리 < 수궁가(水宮歌) > 를 포스트펑크 장르로 재해석한 이 곡에 매료된 대중은 이를 기점으로 국악적 요소와 팝 음악을 결합하는 다양한 음악적 시도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 소무-독경(A Shining Warrior - A Heartfelt Joy) > . 2021년 발매한 해파리의 첫 EP< Born By Gorgeousness > 의 수록곡 중 하나이다. 이 앨범은 2022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일렉트로닉 음반상을 받았다. 박민희(Minhee, 朴玟姬)와 최혜원(Hyewon, 崔惠媛)이 결성한 일렉트로닉 듀오 해파리(HAEPAARY)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차갑게 등장했다. 2021년 발표한 데뷔곡 < 소무-독경(A Shining Warrior - A Heartfelt Joy, 昭武-篤慶) > 은 앰비언트 뮤직에 가까운 차가운 비트 위로,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를 기리는 제사에 쓰였던 종묘제례악이 흐른다. 국악 타악기의 영롱한 사운드가 빛나는가 하면 후반부에는 나직한 내레이션이 삽입되어 마치 공포 영화의 사운드트랙처럼 들리기도 한다. 데뷔 때부터 독창적 음악 세계를 선보인 해파리는 날카로운 혁명가처럼 느껴진다. 수백 년 전 창작된 한국의 음악 전통을 끌어오되, 시대착오적 텍스트를 해체하거나 성 역할을 깨부순다. 예컨대 이들은 남성의 영역인 남창(男唱) 가곡을 부르기도 하고, 남성 위주였던 조선 시대의 풍류 문화를 여성적 관점으로 뒤엎어 해석한다. 고정관념과 보수적 음악에 환멸을 느끼던 젊은이들이 이들의 음악에 환호하는 이유다. 두 사람 모두 국악 전공자인데, 국악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혜원: 어렸을 때 김덕수(Kim Duk Soo, 金德洙) 사물놀이패에서 어린이 예술 단원으로 활동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다국적 재즈 그룹 레드 선(Red Sun)이 협업한 앨범에 심취하며, ‘전통 장단을 어떻게 이렇게 가지고 놀지?’ 하고 생각했다. 월드뮤직 그룹 훌(WHOOL)과 함께 공연도 했고, 뭔가 새로운 것을 계속 추구했다. 국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는 일렉트로닉 뮤직에 흠뻑 빠지게 됐다. 민희: 어린 시절,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시조와 가곡을 배우러 간 게 계기였다. 전통성악곡인 시조, 여창(女唱) 가곡, 가사를 익히면서 일반 고등학교에는 진학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때는 미국 래퍼 투팍(Tupac)을 좋아했고, 우리나라 펑크 록 1세대 밴드인 크라잉넛의 < 양귀비 >같은 노래를 들으며 열광했다. 오빠 친구들이 들려주던 영국 메탈 밴드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의 음악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국악 고등학교에 진학해 전통 기악곡인 < 수제천(壽祭天) > 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접했던 프로그레시브 록, 아트 록보다 훨씬 더 특이했기 때문이다.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Hwang Byung-ki, 黃秉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Nam June Paik, 白南準) 같은 혁명적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게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데뷔 후 지금까지 느낀 시장의 반응은 어떤가? 민희: 국악계로 수렴되지 않고 일렉트로닉 음악, 나아가 대중음악 시장에서 자리매김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자 숙제였다. 에스파 같은 K-pop 그룹과 함께 2022년 한국대중음악상 신인상 후보에 오르거나 우리 앨범이 음반 가게에서 앰비언트 뮤직 듀오 살라만다(Salamanda) 옆에 나란히 놓이는 일을 해낸 것이 일차적 성과라고 생각한다. 일렉트로닉 뮤직 신에서는 해파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혜원: 독특한 사운드를 많이 사용해서인지 악기 소스를 가장 먼저 물어본다. 국악 소스를 샘플링 하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전자음악가들이 사용하는 소스를 조금 변형하는 경우가 더 많다. 국악적 요소를 의도적으로 시도하지는 않는데, 아무래도 우리의 음악적 라이브러리에 대중음악과 국악이 둘 다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국악적인 뉘앙스가 풍기는 것 같다. 좀 전에 에스파를 언급했는데, K-pop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경포대로 가서(go to gpd and then) > . 전통적인 남창 가곡(男唱 歌曲, 남성들이 풍류를 즐기며 부르는 노래)을 비틀어서 재해석한 곡이며, 2022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일렉트로닉 노래상을 수상했다. 민희: 청중으로서 K-pop을 좋아한다. 하지만 창작자로서 그들과 우리의 길은 다르다. 그들은 매끄러움을 지향하지만, 우리는 다른 질감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평균율에서 벗어난 음, 정박에서 벗어난 박자, 뭐 그런 것들…. 에스파가 선보이는 아바타와 우리가 < 경포대로 가서(go to gpd and then) > 뮤직비디오에서 보여 준 아바타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 혜원: < 경포대로 가서 > 뮤직비디오는 네덜란드의 안무 그룹이 공공 지식재산 차원에서 무료로 배포한 아바타 소스를 활용해 우리의 춤을 얹었다. 민희: 지식재산권에 접근하는 태도를 비롯한 수많은 결에서 K-pop과 우리의 지향점이 상당히 다르다. 우리는 아이돌 그룹처럼 퍼포먼스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데, 그래서 의도를 읽히기도 전에 서툴고 지루한 퍼포먼스로 치부될까 봐 두렵다.   수백 년 전 음악과 현대 전자음악 두 가지를 동시에 펼쳐내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혜원: 앨범 녹음을 할 때도 그렇지만 특히 라이브를 할 때 늘 난관에 봉착한다. 민희의 전통적 가창과 발성이 무대 위에서 표출되는 전자 사운드와 잘 붙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사운드 믹스를 조율한다. 앨범 작업을 할 때 프랑스 전자음악 듀오 다프트 펑크(Daft Punk)처럼 사람의 음정을 기계음으로 바꿔 주는 보코더(vocoder)를 써 본 적도 있다. 하지만 효과적이지 않았다. 민희: 플라멩코의 클래식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스페인 뮤지션 로살리아(Rosalia), 예멘 전통음악과 힙합을 혼합하는 이스라엘 그룹 에이와(A-WA)가 좋은 본보기인 것 같다. 물론 그들과 우리는 처한 환경이 다르다. 그들의 경우 자신들이 가진 서구적 전통과 현대적 비트가 잘 맞아떨어지는 측면이 있는 반면에 우리는 아직도 한국 전통 가곡의 뉘앙스를 지금의 것과 결합하는 데 애를 먹는다. 힘들지만 풀어 나가는 보람은 있다. 혜원: 음악을 만들 때 서양 일렉트로닉 음악의 2박 체계와 국악의 3박 체계를 종종 혼용하는 편이다. 민희의 가창이 정박을 벗어나기 때문에 믹싱 엔지니어가 수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그런 상황이 재밌고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전통적 텍스트에 표출된 성 역할을 전복하는 재해석이 흥미롭다. 민희: 청개구리 기질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젠더적 관점에만 관심 있는 건 아니다. 일전에 어떤 공연에서 조선 시대의 문신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지은 유명한 시조 < 동창이 밝았느냐 > 를 풀어냈다. 그런데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라는 대목을 도저히 그냥 둘 수 없었다. 아동 인권 착취가 아닌가. 그리고 < 시작된 밤 > 이라는 곡에서는 성 소수자의 사랑을 다뤘다. 20세기까지 당연시해 왔던 여성 혐오, 약자 착취를 비롯한 사회적 불합리에 대해 질문하고 예술 안에서 각색해 보여 주는 것이 우리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올해 계획, 그리고 장기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혜원: 첫 정규 앨범을 준비 중이다. 10월에는 스페인에서 열리는 월드뮤직 페스티벌 워맥스(WOMAX)에 참여할 계획이다. 사실 월드뮤직 말고 일렉트로닉 뮤직 페스티벌 무대에 더 많이 서고 싶다. 민희: 정좌하고 앉아서 우리 음악을 감상하는 분들보다 ‘미치게 취한 사람들’ 앞에서 더 많이 공연을 하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는 신나는 음악을 많이 만들어 볼 작정이다. 2023년 5월 20일, 서울 합정동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무대륙(Mudaeruk)에서 공연 중인 해파리. 이들은 관객들이 흥에 취해 몸을 들썩일 수 있는 곡을 만들고 싶어 한다. 임희윤(Lim Hee-yun, 林熙潤) 음악평론가

완벽한 취향과 미래의 고민을 담아 만든 매거진

Lifestyle 2023 AUTUMN

완벽한 취향과 미래의 고민을 담아 만든 매거진 『어반라이크』는 일 년에 두 번 발행되는 잡지지만 실체는 무크 또는 단행본에 가깝다. 시작은 매달 발행하는 타블로이드 매거진으로, 도시 감성의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을 주로 다루었다. 김태경 편집장은 대학 시절 우연히 발을 들인 이 일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지나고 보니 선택의 순간마다 자신도 모르게 책을 만드는 일을 선택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김태경(金泰庚) 씨는 도시를 의미하는 ‘urban’에 ‘like’를 더한 만든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어반라이크』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새벽 다섯 시.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 ‘새벽에 하는 일’을 시작한다. 이를테면 차를 마시는 일, 음악을 듣는 일, 책을 읽는 일. 잠으로 충전된 몸과 마음이 차와 음악과 책을, 새로운 하루를 오롯이 받아들인다. 학생 기자에서 편집장이 되기까지 한 가지 주제를 다루는 『어반라이크』는 일 년에 두 번 발행된다. 소모성 잡지 보다는 아카이빙의 기능에 더 충실한 편이다. 도시를 의미하는 ‘urban’에 ‘like’를 더해 만든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어반라이크』의 편집장 김태경(金泰庚) 씨의 새벽시간은 오 년 전쯤 시작되었다. 그전까지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야행성 생활을 이어왔다. “몸이 좀 안 좋았어요. 건강을 위해 뭔가 하긴 해야겠는데 운동은 귀찮고 건강식을 챙겨 먹는 것도 번거로울 것 같아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보자’라고 마음먹었어요. 밤에 하던 일들을 새벽에 하는 거죠. 그랬더니 몸이 좋아졌어요. 삶의 질도 달라지고 풍성해진 기분이더라고요.” 그녀가 잡지계에 발을 디딘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각 신문사에서 패션 잡지를 만들 때였어요. 학생 기자를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엽서로 응모했어요. 친구들이 커피숍 같은 데서 아르바이트할 때, 저는 선배들 서포트하고, 스트리트 패션 취재했는데 그 일이 꽤 재미있었어요.” 전공인 경영학보다 잡지사 일이 신났지만 내심 간직하고 있던 꿈은 따로 있었다. “드라마 PD가 되고 싶었어요. 이 일은 재미있으니까 잠깐 해보는 거지, 그랬는데 제가 졸업하던 1998년도에 IMF가 터졌어요. 그때 어느 잡지사에서 제의가 왔고, 취직하기도 힘든데 잘됐다 싶어 입사했어요. 그때 시작한 이 일을 이 나이 되도록 이 일을 계속할 줄은 그땐 정말 몰랐죠.”   취향과 개성을 담은 잡지 매거진은 해당 호 주제에 따라 책의 페이지나 크기, 인쇄되는 용지와 표지의 모양새도 매번 달리한다. 늘 만들던 잡지지만, 늘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후 여러 잡지사를 섭렵하며 패션 에디터, 프리랜서 등으로 일하다가 2009년, 콘텐츠 전략회사 어반북스에 정착하고 2013년 『어반라이크』를 창간했다. 타블로이드판형의 잡지였던 『어반라이크』가 일 년에 두 번 발행하는 지금의 형태로 변화한 것은 2016년이었다. “패션 잡지사에서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당시 유행하던 타블로이드 판 형의 잡지를 내게 되었는데, 들어가는 에너지가 많았어요. 꾸역꾸역 매달 마감하다가 어느 순간 이게 맞나 싶더라고요. 독자들은 점점 책을 구입하지 않고, 광고주들은 지면광고에서 웹광고로 옮겨가고….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장용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 선택과 집중을 하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무크 형식으로 제작하면서 한 가지 주제를 다루게 되었어요. 일 년에 두 번 발행하는 잡지가 매체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걸 개성으로 봐주시고 다양성으로 봐주셔서 그때 잘 변화했다고 생각해요.” 이후 『어반라이크』는 ‘호텔’, ‘집에서 일하기’, ‘출판사’, ‘문구’, ‘식사’, ‘그릇’ 등 매 호 한 가지 이슈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무크 형식의 잡지로 변모했다. 볼륨과 판형, 인쇄되는 용지도 주제에 따라 매 호 바꿨다. 그 결과 독자들의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면서 한 번 발행한 책은 ‘과월호’가 아닌 ‘단행본’이 되어 꾸준히 팔리고 있다.   정형화되지 않은 시스템 ‘이게 되나?’ 했는데 ‘이게 되네’ 싶었던 게 또 있다. 출퇴근과 고정인력을 없앤 것이다. “3년 전 어느 날, 출근하는 것이 즐겁지 않았어요. 감시하려고 기자들을 책상 앞에 앉혀 놓은 것 같고, 매일 출근하는 게 비효율적인 것 같더라고요. 이러려고 조직을 만든 게 아닌데, 그래서 정리했어요. 직장이 없어진 후배들한테는 다른 직장을 주선해 주거나 프리랜서 일을 맡겼어요. 그 후부터는 책의 테마에 따라 그에 맞는 사람을 찾아 외부 팀을 꾸려 책을 만들었어요. 불필요한 인간관계에 신경 쓰지 않고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죠. 그렇게 2년 동안 자유롭게 지내다가 1년 전에 어시스턴트 두 명을 뽑았어요. 프로젝트가 커지면서 일이 많아졌거든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 아닌지 고민도 돼요. 그런데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지만 사람으로 인해 기운을 얻기도 하잖아요.”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요소들을 덜어낸 이후, 기획은 김태경 편집장의 몫이 되었다.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과 기획을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차피 아이덴티티는 제가 가지고 있는 거잖아요. 결국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거니까요. 아이템이 정해지면 그걸 토대로 해서 세부 기획안을 받고, 역할을 분담하고, 각자 취재해서 원고를 넘기면 제가 취합해서 디자이너에게 보내요. 아이템은 늘 정리하고 있고요." 프로젝트 에디터들은 매번 바뀌지만, 사진작가 한 명과 디자이너 두 명은 십 년째 함께 해오고 있다. 형식과 돈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해보자는 뜻이 통한 이들이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어반라이크』의 정체성은 탄탄해졌다. 틀 속에 갇힌 조직이 아니라 밖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시스템이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안주하지 않는 삶을 위한 질문 그녀의 라이프스타일 역시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공유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있다. 출근도 퇴근도 없고 회식도 야근도 없다. “회의는 화상으로 하고 다른 업무는 이메일 등으로 처리해요. 경기도에 『어반라이크』 사무실이 있어서 자료와 책들은 그곳에 보관하고, 서울에도 사무실이 하나 있어요. 사무실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나가고, 외부 미팅이 일주일에 두어 번 있어요. 주 4일 이상은 일을 하지 않아요. 장소가 어디가 됐든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돼요. 언제든지 일을 그만둘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요.” 이 말의 숨은 뜻은 ‘안주하지 않겠다, 언제든지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걸음을 멈추고 ‘나는 왜 아직 이 일을 하고 있을까,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도 종종 있다. “무리하지 않아요. 모든 걸 쏟아붓지는 않아요. 예전에 잡지사에서 일할 때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내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나 자신이 소진되지 않도록 몸을 사려 왔던 것 같아요. 솔직히 독자를 생각해서 만드는 건 아니에요. 너무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했나 싶지만 그래서 버틸 수 있었고 질리지 않고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좋은 편집장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얻었다. “저는 글을 특별히 잘 쓰는 것도 아니고 인터뷰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아는 게 많지도 않고 모든 게 중간이에요. ‘모든 걸 다 잘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잘하는 사람을 찾아서 일을 맡기면 되는 거라는 결론을 내렸죠. 그릇’에 대한 책을 만들기 위해 그릇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요.”   이루고 싶은 꿈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집중하며 살아온 그녀의 다음 스텝은 무엇일까? 그 즐거운 고민이 깊어지고 무르익는다. “한 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을 인터뷰해 보니, 그들의 마지막 정착지는 정원 아니면 서재였어요. 저는 식물 키우는 것엔 재능이 없으니, 정원은 아닌 것 같고, 책을 읽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궁극적으로는 도서관이에요. 얼마 전 출장에서 헬싱키에 있는 도서관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보드를 타고 놀고 있고 몇몇 사람들은 잔디밭에 누워서 책을 읽는 등 놀이터처럼 즐겁고 감각적인 공간이었어요. 저도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여행 갈 때마다 책을 엄청나게 사 오는데 혼자 갖고 있는 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서울과 가까운 곳에 그런 도서관을 만들어서 도서관 할머니로 살고 싶어요.” 『어반라이크』의 다음 스텝도 있다. “해외에 진출하는 게 목표예요. 그래서 해외 도서전 같은 데 참가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도 고민 중이에요. 책을 만드는 일은 컵 하나를 만드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해요. 그런데 가성비는 컵이 훨씬 높죠. 효율적인 방식을 찾아야 해요. 비즈니스로도 성공하고 싶어요. 잡지 업계에 예전 같은 의 호시절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뭔가 찾아보고 싶어요. ‘이것도 지겨운데’, ‘하다 보니 비슷해지는데’라는 느낌이 올 때, 거침없이 변화하기 위해 늘 생각하고 있는 거죠.” 『어반라이크』는 ‘어떻게 하면 도시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품고 태어났다. 그에 대한 답을 김태경 편집장은 갖고 있을까? “제가 지향하는 것은 중간이에요. 위와 아래 사이, 경계, 가운데에 있는 중간층에 대한 고민이 부재하다고 생각해요. 보편적인 것에 대한 콘텐츠, 메시지가 없어요. 그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선택지도 없어요. 그런 걸 찾아가고 있어요. 도 아니면 모가 아니라.” 중간을 탄탄하게 채우면 도시에서 잘 살 수 있다. 매일 새벽, 그녀는 오롯한 혼자의 시간 속에서 그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자신을 위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김태경 편집장이 찾아낸 방법은 또 어떻게 변주되고 확장될까? 마음에 품을 즐거운 기대가 하나 생겼다.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 작가(Photograp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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