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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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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SUMMER 173

대만족의 삶이라 말하는 니코 대만족의 삶이라 말하는 니코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 (Kordonias Nikolaos) 셰프는 어린 시절 맛본 지중해 요리를 오랫동안 즐겁게 만들고 있다. 여러 해를 길 위에서, 다양한 부엌에서 보낸 후 정착한 서울에서 자신의 식당을 경영하며 요리하고 있다. 서울 중심지에 위치한 익선동에서 한 블록 떨어진 작은 골목길에 예상치 못한 그리스문화의 안식처가 손짓한다. 한옥에 들어선 ‘니코 키친’이 토착 그리스 요리를 선보이면서 단골손님을 만들어내고 있다. 식당 주인인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 셰프, ‘니코’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는 에게해에 있는 사모트라키섬에서 성장한 자신의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들려준다. 이 섬은 날개를 단 승리의 여신 니케를 비롯해 신화의 위대한 신들의 성소가 있는 곳이다. 자신의 고향인 이 고대의 섬을 니코는 목가적으로 묘사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얀색으로 칠해진 집들로 가득한 그리스의 섬을 떠올리게 한다. “아름답고 조용하고 사람들은 친절해요. 삶의 속도는 느리고요. 사람들은 느긋하고 여유롭죠. 걱정을 하지 않아요. 집이 있고 일이 있으니까요. 삶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아요. 하지만 원하는 대로 살고 있고 행복하죠.”물론 게다가 “아주 좋은 음식”도 있다. 대화에서는 유기농 생산품, 신선한 닭, 사모트라키섬 주위의 코발트 색 바다에서 잡은 맛있는 생선에 대해 풍부한 얘기가 오갔다. 성장기에 엄마와 할머니가 만든 음식이 그를 사로잡았다. “아마도 냄새였을 거예요.”라고 니코는 말한다.이 모든 게 현재의 그의 삶과 일에 대해 말해준다. 2004년 한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곧바로 다른 음식의 냄새를 알아차렸다. 곧 냄새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에서 요리하는 포장마차의 냄새였고, 아주 달랐어요. 고추, 김치 같은 냄새가 공기에 떠다녔죠.”라고 그는 기억을 되살린다. 그는 국제적 정취로 가득한 서울의 이태원에 있는, 지금은 문을 닫은 그리스 식당 산토리노에 일자리를 얻었다. 어린 시절 태권도 수업 외에는 한국에 대한 경험이 없는 그는 한국이 어떤 곳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한국행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이동은 그에게 자연스러웠다. 지중해와 카리브해 지역의 항구 사이를 운행하는 크루즈 배에서 일한 후 그는 뉴욕의 요리학원에서 공부했고 맨해튼에서 명망 있는 셰프들과 일했다. 그 후 지인이 식당을 여러 개 운영하는 캐나다에서 6년을 보냈다. 오너 셰프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는 아침마다 서울 익선동에 자리한 레스토랑 니코키친의 한옥 문을 직접 연다. 그는 자신의 식당을 찾는 손님들이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곁들인 휴식을 즐기며 아름다운 그리스를 상상하길 바란다. 한국에 정착하다 이태원에서 일하는 동안 니코 씨는 우연히 산토리노가 들어선 건물에서 일하는 서현경 씨를 만났다. 그들은 오가며 마주치다가 결국 결혼으로 골인했다. 니코는 그리스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서 씨는 이전에 여러 해를 살았던 일본으로 되돌아갈 계획을 보류하고 있었다. “어떤 일들은 그냥 운명적인 것 같아요.”라고 니코 씨는 서울에 완전히 정착하게 된 일에 대해 얘기했다. 2018년에 니코 씨와 그의 아내는 ‘니코 키친’을 열었다. 특별히 한옥을 찾아 나선 건 아니었지만 한옥의 건축 양식이 마음에 들었다. 이 집을 샀을 때 불을 먹는 신화적 동물인 해태상 두 개가 있었는데 이전에 이곳에 입점한 카페에 남아 있었던 거였다. 해태상은 꽃나무 화분으로 가득한 작지만 아름다운 정원을 지키고 있다. 니코 키친은 조선왕조의 군인들이 종묘 주위를 순찰할 때 사용한 순라길에서 연결된 골목길에 위치한다. 종묘와 이어진 곳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이 있다. 가까이에는 역사가 오래된 불교 사원이 있고 골목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한국의 전통적인 색동천을 전시하는 색동박물관이 있다. 식당은 매일 영업을 하며 니코 씨가 모든 요리를 한다. 그의 아내는 그가 일중독자라고 하지만 그는 아주 행복해 보인다. “이게 제 삶이고 저는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라고 그는 말한다. “저 자신이 음식을 좋아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제가 만든 음식을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또 방문하는 게 좋아요.” 점심과 저녁 사이에 니코 씨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다. 이때 그는 서울의 여러 곳을 걸어 다닌다. 궁궐이나 절, 서울 한복판을 흐르는 청계천에도 간다. 팬데믹 전에는 사우나에서 몸을 풀기도 했는데 지금은 참고 있다. 식당을 찾은 손님들이 여유 있게 식사하고 와인을 맛보고 긴장을 푼다. 바로 이것이 니코 씨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며 그가 원하는 식당의 분위기이다. 니코키친의 셰프는 오직 코르도니아스 니콜라오스 한 명이다. 그가 나고 자란 에개해의 작은 섬, 사모트라키섬의 맛과 가장 비슷한 맛을 내기위해 신선한 그리스식 재료와 레시피를 사용한다. 니코키친의 작은 공간 곳곳에는 그리스를 떠올리는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다. 냉장고의 한 면에는 그리스의 상징적인 지역 사진이 프린팅 된 귀여운 마그넷들이 붙어있다. 식도락가들이 발견한 곳 익선동에서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떨어진 조용한 골목에 위치한 니코 키친은 그냥 지나치다 들어오는 손님이 많지 않다. 그렇지만 이곳은 늘 예약이 꽉 차 있다. 요리 프로그램을 향한 한국인의 채워지지 않는 식욕이 이 식당으로 이어졌고, 니코 씨는 ‘여기GO’ ‘올리브쇼’(올리브 채널) 등 몇몇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손님으로도 심사위원으로도 출연했다. 미디어 노출이 많아지면서 아침 일찍부터 식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전화와 이메일 연락이 온종일 오게 되었다. 니코 씨는 텔레비전 출연의 혜택을 인정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요리에 집중하고 싶어 한다. 메뉴는 그리스 가정식을 바탕으로 한다. 가지와 다진 소고기로 만든 그리스 전통 음식인 무사카는 지속적으로 손님들이 찾는 요리다. 페타 치즈를 넣은 그리스 샐러드, 브라타 샐러드, 치킨 수블라키와 새우 사가나키도 인기 메뉴다. 그리스 음식이 아직 많은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하기 때문에 피자나 파스타도 메뉴로 제공된다. 하지만 니코 씨 자신만의 스타일로 직접 만든 사워 반죽을 사용해 만든다. 퓨전 메뉴를 선택한 건 좀 더 자유롭게 요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기분이 날 때면 스페인 요리나 이태리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자유로움을 좋아한다.하지만 그가 만드는 음식의 핵심은 항상 같다. 건강한 지중해 스타일의 음식으로 신선하고 자연의 재료로 만든 음식이다. 대부분 채식이고 무설탕에 튀김은 최소로 한다. 과거에는 그리스 식재료를 구입하기 어려웠는데 요즘은 원하는 것을 온라인으로 모두 구할 수 있다. 특정한 치즈나 다른 재료를 급하게 구해야 하면 출근길에 그가 아직 살고 있는 이태원의 가게에 들르면 된다. 대부분의 식당처럼 니코 키친 역시 코로나 팬데믹으로 경영이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리스 대사관의 직원들과 근처 절의 스님들을 포함해 많은 손님들이 단골이다. 불교 경전의 여러 장면을 묘사한 다채로운 색의 절 외관이 식당의 정문 위 너머로 보인다. 니코키친은 테이블 4~5개가 전부인 작은 레스토랑이고 모든 좌석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니콜라오스와 그의 아내는 이 곳을 찾는 모든 손님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니코키친은 테이블 4~5개가 전부인 작은 레스토랑이고 모든 좌석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니콜라오스와 그의 아내는 이 곳을 찾는 모든 손님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앞날들 자신이 선택한 제2의 고향인 한국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본 후 니코 씨는 잘 관리된 빌딩과 거리, 그래피티 같이 공공 지역의 흉물이 없는 것, 그리고 교양 있고 친절한 한국인에 대해 얘기했다. “여기는 천국 같아요. 완벽한 곳이에요. 그래서 이곳에 사는 게 행복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그리스를 많이 그리워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팬데믹이 지나가고 일상이 회복되면 사모트라키섬에 가보고 싶어 한다. 좀 쉬면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좋은 음식을 맛보고 바다낚시도 하고 싶다. 그는 자기 인생의 다음 단계를 그려보기도 한다. 그건 퓨전 음식 없이 온전히 그리스 요리만을 제공하는 좀 더 큰 식당을 여는 것이다. 그동안 상황을 살펴왔고 이제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한 곳에서 모두 실현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요. 물론 돈도 벌고요.”라고 그는 말한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 이것이 니코 씨의 간단한 철학이다. 그렇게 말하자 그의 아내가 끼어들어 응수하며 비밀을 폭로했다. 니코 씨가 햄버거를 좋아하고 가끔은 켄터키 프라이 치킨을 즐긴다고. 음식이 그를 한국으로 이끌었고, 그를 여기에 붙들어 두었으며 그를 행복하게 한다. “하루 일과가 끝날 때 만족스럽지 않으면 피곤해집니다. 하지만 만족스러워 미소 지을 수 있으면 모든 문제와 피로는 사라지죠.” 조윤정프리랜서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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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SUMMER 177

추억을 선물하는 가게 추억을 선물하는 가게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젊은층에게는 새로움을 안겨주는 ‘레트로’가 주요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서울의 옛 도심 종로의 레트로 열풍을 이끌고 있는 한 레코드 가게를 찾았다.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는 러시아의 문학 이론가이며 작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Victor Shklovsky 1893~1982)가 처음 사용한 문학용어이다. 익숙한 이야기 구조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친근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지루함을 줄 수도 있다. 반면 어려운 형식의 구조는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키고 흥미와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 세상은 쉽고 편리하고 간단한 것을 지향하고 있는 듯하지만, 인간의 심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곳을 꿈꾸고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기대한다. 레트로스펙트(retrospect), 또는 요즘 ‘레트로’라고 줄여서 쓰이는 말은 회상, 추억이라는 의미지만 ‘과거의 추억이나 전통 등을 그리워하며 그것을 본뜨려는 성향’이란 의미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새것은 헌것이 되고 헌것은 새로운 세대의 새로움이 된다. 노년은 젊음을 그리워하고 젊음은 노년이 누렸던 것을 동경한다. 역시 인간은 복잡하다. 레트로 감성이 한껏 풍기는 턴테이블이 돌고 LP판 위에 스타일러스를 올리는 순간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서울레코드를 채운다. 요즘처럼 깨끗한 음질은 아니지만 턴테이블이 주는 특유의 감성적인 사운드가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황승수 대표 역시 오프라인 레코드 시장이 부활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세대를 뛰어넘어 서울레코드를 찾는 손님들을 위해 클래식, 재즈, 국악, 트로트, 로큰롤, 올드팝, 뮤지컬, OST, K-팝 등 장르별로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새롭게 주목받는 LP 제2의 성황기를 맞은 서울레코드는 항상 손님으로 북적거린다. 이곳을 찾는 누군가는 추억에 젖고 누군가는 아날로그 감성이 주는 매력에 빠진다. 1980년대 CD가 보급되기 전까지 비닐은 20세기 음악 재생의 가장 중요한 매체였다. CD와 MP3, 음원 생산으로 쇠퇴기를 맞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비닐이 주는 따뜻한 감성을 찾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서울레코드의 내부는 리모델링을 통해 현대적으로 꾸며졌지만, 단층짜리 옛 건물은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종로3가 거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시 종로구 종로3가에 있는 ‘서울레코드’는 낯설고도 익숙하고, 오래된 동시에 새로운 공간이다. 1976년에 문을 열었고 지금의 황승수(黃昇洙) 대표는 이곳의 네 번째 주인이다. LP와 카세트테이프가 CD로 바뀌고, DVD가 반짝 성황을 누리다가 사라진 이후 스트리밍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음반업계의 전망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 와중에 45년을 한자리에서 버틴 40평 남짓한 레코드가게는 그 어떤 레코드보다 희귀할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사장님이 2000년까지 하다가 mp3가 나오면서 가격경쟁이 안 돼서 정리하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음반은 소유하는 것보다 듣기 위한 게 목적이었으니까 사람들이 더 이상 앨범을 사지 않을 것 같았죠. 당시 직원이었던 분이 가게를 인수하면서 두 번째 사장님이 됐어요. 처음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한류가 시작되면서 외국손님들이 많이 왔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운영을 하다가 세 번째 사장님에게 가게를 넘겼어요. 두 번째 사장님 밑에 있던 부장님이 가게를 계속 운영했는데 그때 제가 직원으로 들어왔어요. 제가 일을 시작하고 3년째 되었을 때 세 번째 사장님이 가게를 정리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갑자기 인수받게 되었어요.” 2015년의 일이었고 그는 40대 초반이었다.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으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서 돈을 벌 궁리를 해야 했다.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다가 ‘하고 싶은 일보다 잘 알고 있는 일’을 하게 되었다. “형이 비디오 유통업체에 있었어요. 비디오, CD, DVD 같은 것들은 유통구조가 다 연결되어 있거든요. 어릴 때는 아버지가 전축 시스템 가져오셔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10대 때는 형을 따라 레코드 회사에도 가봤어요. 그러면서 이쪽 세계를 잘 알게 되었어요.” 처음 직원으로 일하던 시기에는 손님의 연령대가 꽤 높았다. 가게 뒤에는 세운상가(1968년 완공된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 길 건너에는 종묘(宗廟 1394년에 착공한,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 옆에는 탑골공원(塔골公園 1897년, 영국인 브라운(J. M. Brown)의 설계로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내 공원)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젊은 세대들은 보기 힘든 동네이기도 하다. LP를 찾는 40, 50대가 그나마 젊은 쪽이었고 카세트테이프를 사려는 노인들이 주고객이었다. 그러다가 분위기가 바뀌었다. ‘힙(hip)’하다는 의미에서 ‘힙지로’로 불리게 된 을지로, 새로운 핫스팟으로 떠오른 한옥마을을 찾는 외국인과 젊은이들이 늘어났고, 음반업계에서 완전히 사라질 줄 알았던 LP가 신선한 아이템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손님들의 연령대가 낮아졌다. 어쩌면 손님들은 물건이 아니라 추억을 구하러 오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세상에서 익숙한 것을 구하고, 익숙한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다. 추억의 공유 “우리 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서 듣는 게 중요했어요. 지금은 스마트폰과 스트리밍 서비스가 있으니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어요. 그래서 음반업계는 소멸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제 듣는 것보다 소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긴 거예요. 스마트폰 화면에 음반 재킷 하나 떠 있는 걸로 성이 안 차는 거죠. 그래서 LP를 사는 게 아닐까요? 젊은 사람들이 와서 LP에 바늘이 타닥타닥 튀는 소리를 듣고 좋아하는 걸 보면서 저도 놀랐어요. 조금 더 깨끗한 소리를 위해 CD가 나온 거잖아요. 세상은 이렇게도 바뀌고 저렇게도 바뀌는구나 싶어요.” 이제는 특정 세대가 아니라 다양한 세대가 이곳을 찾는다. 딸들이 아버지를 데려오기도 하고, 부모가 아이들을 데려와서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고른다. “어릴 때 듣고 좋아하던 곡인데, 가사도 조금 알고 멜로디도 기억하는데 제목은 모른다며 물어보는 분들이 있어요. 나이가 들어 컴퓨터도 할 줄 모르고 혼자 사시는 분들이에요. 이렇게 저렇게 추리해서 찾아드리면 감동하시고, 그걸 보면 저도 기분이 좋죠.” 1960년대에 유명세를 떨쳤던 밴드의 곡이 혹시 있느냐고 물어본 사람이 있었다. 곡을 찾아서 틀었는데 놀랍게도 노래를 부른 사람과 손님의 목소리가 흡사했다. 혹시 본인이 부른 곡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음반을 찾아다녀도 없어서 듣고 싶어도 못 들었던 곡이라 했다. “어릴 때부터 이 동네에서 살던 분인데, 집안이 어려워서 학교를 못 다니고 영화 포스터 붙이는 일을 했다는 손님도 있었어요.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밥을 굶고 영화를 봤다는 거예요.” 길고도 복잡한 타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손님으로 왔다가 추억을 공유하게 된 사람들은 마음에 온기를 품고 돌아가고, 사탕이나 귤, 음료수 같은 걸 들고 다시 찾아와 정을 나눈다. 아름다운 배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침 아홉 시 반에서 열 시 사이에 서울레코드의 셔터가 올라간다. 문은 아내가 열고 황대표는 영두 시에서 한 시 사이에 나와서 교대한다. 저녁 일곱 시 반에 문을 닫는데, 장사가 안 되는 날은 더 늦게까지 열어두기도 한다. 저녁 일곱 시 반 이후, 셔터가 내려진 레코드가게 앞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이른바 ‘내일의 신청곡’ 시간이다. “가게 앞에 빨간 우체통이 있어요. 신청곡을 써서 넣으면 틀어드려요.” 하루 동안 들어온 신청곡을 비롯해 비슷한 분위기의 곡들을 더해서 파일을 만들고, 가게 문을 닫은 후 틀어 놓는다. 음악은 밤 열두 시까지 흘러나온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춤을 추기도 한다. 어둠이 내린 밤의 거리,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삶은 어떻게든 흘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이 안에서 놀거리를 찾는 거예요. 일주일에 일요일 하루 쉬는데, 그날도 음악 듣고 오디오 만지작거리고 영화 보고 그래요. 어떻게 보면 취미를 다 여기 가져다놓은 거예요. 아내가 그래요. ‘너 놀려고 이거 차린 거지?’” 옆에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사장님의 놀이터를 공유하고 있는 거예요”하고 한마디 거든다. “처음부터 크게 돈을 벌겠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어요. 그저 유지하면서 좋아하는 음악 듣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저는 여기서 놀고 손님들은 찾던 음악을 구해가고요.” 어쩌면 손님들은 물건이 아니라 추억을 구하러 오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세상에서 익숙한 것을 구하고, 익숙한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다. 그의 말처럼 세상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흘러간다. 그 흐름 안에 아름답고 정다운 음악이 있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Ahn Hong-beomPhotograp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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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SUMMER 173

아픔이 불러일으키는 보편적 공감 아픔이 불러일으키는 보편적 공감 그래픽노블 작가 김금숙(Keum Suk Gendry-Kim 金錦淑)은 역사적 소재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그려 왔다. 제주 4.3 항쟁의 비극을 그린 『지슬(Jiseul)』(2014),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다룬 『풀(Grass)』(2017), 조선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의 삶을 기록한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2020) 등 여러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해외에서 출판되었다. 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얘기를 다룬 김금숙(Keum Suk Gendry-Kim 金錦淑) 작가의 그래픽 노블 『풀』의 한 장면. 2. 그는 주로 굵직한 역사적 주제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화에 담는다. 지난해 10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유례없이 온라인 중계로 진행된 뉴욕 코믹콘(New York Comic Con)에서 하비상(Harvey Awards) 수상작들이 발표됐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그린 그래픽노블 『풀(Grass)』도 그중 하나였는데, 이 작품은 ‘최고의 국제도서(Best International Book)’ 부문에서 수상했다.2017년 국내에서 출판된 『풀』은 2019년 캐나다의 만화 전문 출판사 Drawn and Quarterly에서 영어판이 출간된 이래 지속적으로 반향을 일으켰고, 2019년 『뉴욕타임스』와 『더 가디언』이 각각 ‘The Best Comics of 2019’와 ‘The Best Graphic Novels of 2019’로 선정했다. 이듬해에도 크라우제 에세이상(The Krause Essay Prize), 카투니스트 스튜디오 최우수 출판만화상(Cartoonist Studio Prize)을 수상하는 등 10곳에서 상을 받았다.작가는 하비상 수상자로 발표된 뒤 두 달이 지난 2020년 12월에야 태평양을 건너 도착한 트로피를 받았다. 코로나19 때문에 실제 트로피를 받는 데도 우여곡절을 겪은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은 여러 언어로 번역돼 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풀』은 최근 포르투갈어와 아랍어로도 번역돼 출간됐고, 지난해 가을 나온 신작 『기다림(The Waiting)』은 프랑스어판이 출간되었으며 영어, 포르투갈어, 아랍어, 이탈리아어 출판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 4월 김 작가를 그가 살고 있는 강화도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회화와 설치미술을 전공했는데 그래픽노블 작가로 이름을 얻게 된 사연이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스트라스부르 고등장식미술학교(École supérieure des arts décoratifs de Strasbourg)에서 설치미술을 배웠어요. 생활고 때문에 한국 만화가들의 작품을 번역하는 일을 아르바이트 삼아 맡았는데,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받게 되어 그곳에 소개한 한국 만화 작품이 100권이 넘어요.그러던 어느 날 현지 한인 신문사로부터 만화를 그려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저 역시 만화 번역을 하면서 이 장르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참이었죠. 작가의 생각을 종이와 연필만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낀 거예요. 하나씩 그리다 보니 연재 작품 수도 여럿 늘어났죠. 만화를 처음 시작하면서부터 말풍선이나 대화 표현을 어떻게 해야 더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과 노력을 많이 했어요.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있나요? 스토리 면에서는 한국 작가들의 영향이 있었죠. 특히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만화로 잘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이희재(李喜宰), 오세영(吳世榮) 같은 작가들이 떠오르네요. 그림 쪽으로 보면 저는 구상보다는 추상, 그리고 설치나 조각 작업을 주로 했기 때문에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화풍에 있어서 제게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에드몽 보두앵(Edmond Baudoin)이나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그래픽노블로 그린 호세 뮈누즈(Jose Munoz)가 있어요. 특히 흑백의 붓터치를 강조한 부분에서요. 그밖에도 조 사코(Joe Sacco)나 타르디(Tardi)도 제게 여러모로 영향을 줬어요.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 많은 편인데, 초기작 중에서 가장 소개하고 싶은 작품을 꼽는다면요. 저는 자전적인 이야기, 일상을 겪으면서 느낀 점들, 또 제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두루 엮습니다.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소재들을 제가 겪은 일들과 연결시키면서 간절하게 와닿는 이야기들을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하죠. 그중 『아버지의 노래(Le Chant De Mon Pere)』(2013)는 한국의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평범한 가족이 경제적 이유 때문에 서울로 이주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았어요. 그 시절 힘들었던 가족사에 당시 한국 사회의 보편적인 모습을 투영했죠. 어린 시절의 추억도 담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판소리를 하셔서 어릴 적 마을에서 누가 돌아가시면 아버지가 상여 소리를 도맡곤 하셨죠. 하지만 서울에 와서는 동네 누가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아버지가 소리를 하실 일도 없었어요. 초기작에서 아버지를 다뤘다면 최근작에서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기다림』(2020)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작품이에요. 20년 전 파리 유학 당시 어머니가 오셨는데, 그때 진중한 이야기를 하셨어요. 어머니의 언니, 제게는 큰이모 되시는 분이 북한에 계시다고요. 외가댁 식구들이 고향인 전남 고흥을 떠나 만주로 가던 길에 평양에 머무른 적이 있는데, 그때 일이 생겨 어머니는 남쪽으로 내려오고 큰이모는 그곳에 남았던 거죠. 어머니가 말씀해 주시기 전까지 그런 가족사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어요. 어머니는 이산가족 상봉 사업이 진행될 때도 우선순위에서 밀려 안타까워하셨어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누군가 해야 하는데 내가 하자 마음먹었고, 어머니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가 됐죠. 그런데 이산가족 문제는 내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도 전쟁을 겪고 있는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인류 보편적인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궁극적으로 전쟁 때문에 약자들이 희생되고 난민이 되어 뿔뿔이 흩어지는 문제를 담고 싶었습니다. 『풀』 역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이 인류 모두의 비극이라는 시각에서 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구상한 시기를 따지고 올라가면, 1990년대 초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게 계기가 됐어요. 이후 프랑스에 가서도 위안부 문제에 관한 통역을 맡은 적이 있어서 자료를 읽으며 더 자세히 알게 됐고요. 그래서 2014년 앙굴렘 국제 만화페스티벌(Festival International de la Bande Dessinée d'Angoulême) 출품작으로 「비밀」이라는 단편을 냈어요. 위안부 피해자의 삶과 고통을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드러내고 싶어서요. 그런데 이 작품은 단편이라 무거운 주제를 다 담지 못해 아쉬웠어요. 그래서 꼬박 3년 동안 매달리며 더 많은 고민을 거쳐 장편으로 만들었어요. 위안부 피해자의 문제를 약자가 당하는 폭력, 그리고 제국주의와 계급적 문제로 접근했죠. 작품에 나오는 이옥선(李玉善) 할머니를 만나고 인터뷰하면서 안타까웠던 게 있어요. 할머니가 전쟁이라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희생자였는데, 전쟁 후에도 침묵하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작품이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풀』만 해도 14개 언어로 번역됐는데 이처럼 여러 문화권에 넓게 파급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제 작품들은 프랑스에서 번역돼 나온 책이 제일 많긴 해요. 『풀』의 경우 일본어판을 낼 때 그곳 분들이 앞장서 크라우드 펀딩으로 출간에 도움을 준 일이 놀라웠어요. 무엇보다 번역가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해요. 제 이야기가 독특하고 또 사람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내용인데 그런 점을 다른 문화권에 전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준 메리 루(Mary Lou), 영어로 번역해 준 미국의 한인 번역가 자넷 홍(Janet Hong), 일본어 번역을 맡은 스미에 스즈키(Sumie Suzuki) – 이런 분들의 도움으로 각 나라 독자들에게 의미가 잘 전달되었어요. 지금 계획하고 있는 다음 작품이 있나요? 키우는 개들을 매일 어김없이 산책시켜 주고 있어요.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강아지와 인간의 관계를 다룬 작품을 구상해 밑그림까지는 그려 놓았어요. 올해 여름 출판될 예정이고, 제목은 『개』로 정했어요. “위안부 피해자의 문제를 약자가 당하는 폭력, 그리고 제국주의와 계급적 문제로 접근했죠.” 1. 김 작가는 요즘 강아지와 인간의 관계를 다룬 작품 『개』를 준비하고 있다. 올 여름 서울에서 마음의숲(maumsup) 출판사에 의해 출간될 예정이며, 내년 초 프랑스 Futuropolis의 출간도 기다리고 있다. 2. 김 작가의 그래픽 노블(왼쪽부터 시계 방향): 2019년 캐나다 Drawn & Quarterly에서 출간된 『풀』 영어판, 지난해 국내 출판사 딸기책방(Ttalgibooks)에서 나온 신작 『기다림』, 지난해 국내 출판사 서해문집이 발간한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올해 5월 프랑스 Futuropolis에서 간행된 『기다림』 불어판, 올해 9월 Drawn and Quarterly가 출판할 예정인 『기다림』 영어판, 2017년 국내 보리 출판사에서 출판된 『풀』, 지난해 일본 Korocolor(ころから)가 발행한 『풀』 일어판, 지난해 브라질 Pipoca & Nanquim가 포르투갈어로 출간한 『풀』. 김태훈(Kim Tae-hun 金兌勳)『주간경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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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SUMMER 181

주식에 빠진 2030세대 주식에 빠진 2030세대 코로나19로 인한 우려와 혼돈의 시간이 금융 투자를 부추기는 강력한 바람이 됐다. 팬데믹의 초기에 증시가 급락하면서 평소 주식에 무관심하던 이들까지 대거 투자에 뛰어든 것이다. 이 중심에‘2030세대’ 가 있다. 올해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29세 임수빈(Im Su-bin 林秀賓)씨는 최근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30만원으로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 계속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면서 일자리를 찾고 있는데, 인턴 자리는 구할 수 있으나 정규직 취업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절박한 상황에 우선 작은 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주식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지난해 12월 예정됐던 결혼식을 올해 9월로 연기한 33세 프리랜서 번역가 김아람(Kim A-ram 金娥濫)씨도 얼마 전 주식에 입문했다. 계속되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결혼식 참석 인원이 50명 이하로 제한되어 꼭 참석할 가족, 친구들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결혼식을 미루게 되자, 신혼여행 때 쓰려고 모아둔 돈을 짧은 시간이지만 주식에 투자하기로 했다. 그는 “주식 시장이 호황이니 몇 십 만원이라도 벌어서 신혼살림에 보탤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주식 투자에 발을 들여놓은 2030세대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이런 현상을 나타내는 신조어도 잇달아 생겨났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동학개미운동’이다. 젊은 개인투자자들이 기관과 외국인 투자자에 맞서 급락한 국내 주식을 대거 사들인 상황을 말하는데, 1894년 외세에 대항해 일어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에 빗댄 말이다. 여기서 ‘개미’는 월급 받으며 매일 일하는 젊은 회사원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주린이’이도 요즘 새로 등장한 말이다. ‘주식’과 ‘어린이’를 합한 단어로, 주식에 대해 잘 모르며 거래를 시작한 초보자를 가리킨다. 이 같은 현상은 숫자로도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예탁결제원(Korea Securities Depository 韓國預託決濟院)이 4월 1일 발표한 ‘12월 결산 상장법인의 소유자 현황’분석 결과에 따르면, 2020년 말 개인의 주식 보유액은 총 662조원으로 2019년 말 419조원에서 243조원 증가했다. 전체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개인의 비중도 전년에 비해 3.6%포인트 증가한 28%였다. 새로 주식 투자를 시작한 개인은 약 300만명으로 전체 개인 투자자 914만명의 32.8%에 달했다. 특히 지난해 주식 투자를 처음 시작한 300만명 중 53.5%인 160만명이 30대 이하였다. 성별로는 남성의 보유 금액이 489조원으로 여성의 173조원보다 많았다. 그러나 증가율로 보면 여성의 보유액이 전년 대비 77%(97조원→173조원) 늘어나, 남성의 증가율 52%(321조원→489조원)보다 높았다. 젊은 여성들도 새로이 주식 투자에 눈을 뜬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주식 투자에 뛰어든 2030대가 급격히 늘어나며 다양한 모바일 주식 어플리케이션들이 등장했다. 증권사들은 이들 ‘개미군단’을 타깃으로 고객 확보를 위해 저마다 이벤트도 펼치고 있다. ©freepik 젊은 개인 투자자들 지난해 9월 미국 경제전문지 블룸버그(Bloomberg)가‘한국 밀레니얼 세대의 단타 투자 현상(Broke Millennials Turn to Day Trading to Strike It Rich in Korea)’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 젊은 세대의 절박한 투자 현상을 심층 분석했다. 즉 전년 대비 48% 증가한 개인 투자자의 거래가 코스피 시가총액의 65%를 차지하고 그 중의 대다수가 20대에서 30대 사이의 새내기 젊은 투자자들이며 이들 가운데 다수는 주식 투자를 위해 빚을 내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한국 2030세대는 왜 주식시장에 몰입하고 있을까. 첫 번째로는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해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주식 시장이 수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이다. 저금리가 굳어지면서 한동안 젊은 투자자들의 자금이 갈 곳을 잃었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상황 속에 가라 앉았던 주식시장으로 돈이 몰리면서 주가가 큰 폭으로 뛰었다. 이에 투자처를 고민하던 젊은층이 주식시장으로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 2020년 1월 2일, 코스피지수는 2175.17을 기록한 뒤 같은 해 3월까지 하락세를 기록했다. 그러다가 각국 정부가 긴급 재난지원을 위한 자금을 풀고 백신 개발 소식이 이어지며 경제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주식시장이 눈에 띄게 활기를 찾았다. 올 1월 4일 코스피지수가 3000선을 넘으며 현재도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이와 함께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는 심리가 청년세대 투자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의 저변에는 하락하고 있는 청년층의 취업률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더욱 얼어붙은 2020년의 한국 고용시장은 특히 젊은 세대에게 가혹했다. 통계청의 고용동향 자료에 따르면 2020년 12월 현재 20대 취업자는 351만명으로 2019년 동기 대비 3.9%p 하락했다. 코로나19 사태로 모든 연령층의 고용률이 감소했지만 10대가 1.5%p, 30대가 1.9%p, 40대가 1.6%p, 60대 이상이 0.1%p 감소한 것과 비교하면 20대의 감소율이 가장 크다. 고용률의 하락에 따라 실업률은 상승했다. 2020년 12월 20대의 실업률은 전년도 동기 대비 0.9%p 늘었다. 절박한 노력 취업난에 내몰린 젊은 세대를 더욱 절망케 하는 것은 급등하는 주택 가격이다. 정부의 잇따른 주택난 해결 대책에도 불구하고 한국 인구의 거의 절반이 모여 사는 서울의 아파트 시세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두 배까지 올랐다. 내 집 마련의 꿈이 멀어진 젊은 세대는 자연히 결혼도 미루게 된다. 실제 2020년 전국의 결혼 건수는 관련 통계가 시작된 1970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통계청 ‘2020년 혼인, 이혼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혼인 건수는 21만4000건으로 2019년보다 10.7% 감소했다. 온라인 서점 플랫폼 인터파크에 따르면 올 해 1월부터 3월까지 주식·투자·펀드 분야의 도서 판매량과 매출액이 전년 동기간 대비 각각 5배씩 증가했다. 열풍의 파장 주식을 주제로 하는 TV 예능 프로그램도 최근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전에는 주로 경제 채널에서만 주식 방송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연예 전문 채널 프로그램에서도 주식 이야기하는 장면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카카오TV가 지난해 9월 시작한 ‘개미는 오늘도 뚠뚠’이 있다. 인기 연예인 노홍철(Noh Hong-chul 卢弘喆)과 딘딘(DinDin)이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출연자가 실제로 자신들이 개설한 증권사 계좌로 출연료를 받고, 이를 투자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청자의 반응이 호의적이다. 특히 주식을 처음 시작하는 젊은층의 공감을 얻으며 방영 플랫폼을 확장해 넷플릭스를 통해서도 방영되고 있는데, 매회 평균 조회 수가 200 만회에 이른다. 지상파 방송국인 MBC도 올 3월 파일럿 형태로 주식 버라이어티 토크쇼 ‘개미의 꿈’을 선보였다. 2부작으로 편성된 이 프로그램에서는 경제 전문가와 연예인 패널들이 나와 주식 투자의 기본 지식을 자세히 설명했다. 한편 SBS의 오래 된 인기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은 올 2월, 특집으로 모의 주식투자 대회를 진행했고, 또 다른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는 3월 인기 호스트 유재석이 2030세대 주식 투자자 3명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여줬다. ‘주린이’들에게 주식에 대한 정보와 유머를 선사하는 예능 프로그램 이 시즌 4에 이를 정도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Kakao Entertainment) 취업 플랫폼 잡코리아의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10명 중 3명이 주식 투자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 절반은 주식 투자를 시작한 지 채 1년이 안 됐다고 답했다. ©동대신문 경주 전문가들은 젊은 세대의 주식 열풍이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분석한다. 박성희 (Park Sung-hee 朴性熙) 한국트렌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차곡차곡 월급을 모아 자동차를 사고, 내 집 마련하기를 바라던 이전 2030세대와 지금의 2030세대는 완전히 다르다. 요즘 2030세대에게 자동차는 빌리면 되는 것, 치솟은 부동산은 너무 먼 이야기가 됐다”며 “취업이 어렵고, 평생직장도 사라지고 있어 요즘 젊은 세대는 먼 미래를 위한 저축보다는 소액으로 지금 바로 투자해서 수익을 낼 기회를 노린다. 특히 코로나19이후로 이 같은 추세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해외여행도 갈 수 없는 상황에 이들은 비대면 투자처를 알아보게 되고, 이 같은 갈증에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할 수 있는 주식 투자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라예진(Ra Ye-jin 羅禮眞)중앙일보 S 이코노미스트 기자 (Reporter, Economist, JoongAng Ilbo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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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SPRING 467

온라인으로 즐기는 취미 생활 2019년 한국에는 취미로 뭉치는 소모임 활동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이 ‘살롱 문화’는 2020년,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온라인 활동으로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간편하게 배울 수 있는 자수 강좌는 온라인 클래스 플랫폼 ‘하비풀’의 인기 클래스다. 쉽게 배울 수 있고 집안 장식에도 도움이 되는 온라인 취미 클래스들이 늘고 있다. © HOBBYFUL 30대 직장인 이모씨는 와인을 좋아한다. 그는 와인의 향기와 맛을 음미하며 마음 맞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서 큰 즐거움을 느낀다. 홈베이킹도 온라인 취미 교실의 인기 종목이다. 그 밖에도 자수, 뜨개질, 언어, 음악, 요리 등 온라인 클래스의 영역이 점점 확장되는 추세다. © CLASS 101 2020년 9월 20일 군산월명체육관에서 열린 '2020 MG새마을금고 KBL 컵대회' 울산현대모비스와 창원LG의 경기에서 코로나 19로 경기장을 찾지 못한 '랜선 응원단'이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취미를 나누는 소모임 2019년 이씨는 와인을 더 깊이 알고자 한 작은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30대 남녀 10여 명으로 구성된 이 그룹은 매주 금요일 저녁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 장소에서 모임을 가졌다. 서로 안부를 묻고 가벼운 대화로 시작해 매주 다른 와인을 소재로 이야기를 나눈 뒤, 함께 맛보는 순서로 이어졌다. 한때 스위스에 가서 좋은 와인에 맛있는 치즈를 먹는 꿈을 꾸었던 이씨는 이 모임을 통해 작은 소망을 이루어 가는 기쁨을 느꼈다. 비록 알프스행 비행기를 타지는 못했지만. 같은 취미를 가진 또래의 남녀가 비슷한 성비로 만나 분위기도 화기애애해서 한 주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고, 궁금증과 설렘으로 한 주를 보내곤 했다. 회사 밖에서 만날 수 있는 또래들과의 새로운 세상이었다. “언제 다시 모임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어요. 지금의 생활이 꿈이라면 얼른 깨어나기를 바랄 뿐이에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이 모임은 이제 마치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요즘 그의 낙이라고는 늦은 밤 거실에 앉아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며, 혼자 와인을 홀짝거리는 게 전부다. 퇴근 후 그저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는 날도 있다. 비슷한 나날이 해를 넘겨 이어지고 있다. 당장은 서로의 대화 온도나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래도 “재밌다”거나 “유익하다”는 참여자들의 리뷰를 보면 온라인 활동에 큰 장애물은 없어 보인다. 만날 수 없다면 화상으로 “화상 채팅 프로그램 줌(Zoom)으로 모임을 진행합니다.” 전체 회원 수 67명인 서울의 한 독서 모임은 최근 ‘소모임(Somoim)’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온라인으로 활동을 계속한다고 공지했다. 지난 해 말 정부가 수도권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두 번째 가장 높은 2.5단계로 연장한다고 발표한 직후였다. 방역조치에 따라 서로가 읽은 책의 감상을 온라인 대화로 나누고 소통하자는 제안이었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회원들이 같은 테이블에 모여 앉아 떠오르는 영감을 공유했을 ‘글쓰기 모임’도 상황은 비슷하다. 전체 회원 234명인 서울의 한 글쓰기 모임은 비대면 화상회의를 제공하는 ‘구글 미트(Google Meet)’로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 처음에는 온라인으로 글쓰기 모임을 한다는 것이 낯설었던 회원들도 이내 서로의 글을 독서하듯 채팅으로 공유하는 방식으로 갈증을 풀게 되었다. 그 밖에도 ‘문토(Munto)’, ‘문래당(Moonraedang)’, ‘트레바리(Trevari)’, ‘프립(Frip)’ 등 국내에는 ‘소셜 살롱’을 표방하며 다양한 취미를 공유하는 커뮤니티 플랫폼들이 있다. 이들 중 ‘트레바리’는 독서에 특화한 플랫폼이다. 2015년 시작된 이 커뮤니티에서는 현재 400여 개의 독서 모임을 통해 6천 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 중이다. 이들은 대부분 한 달에 한 권 정도의 책을 읽으며, 매달 1회씩 총 4회 모임을 갖는다. 물론, 트레바리도 정부의 방역조치에 따라 현재는 오프라인 모임을 취소한 상태다. 원하는 회원들에게는 참가비의 일부를 돌려주고, 온라인 화상채팅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당장은 서로의 대화 온도나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래도 “재밌다”거나 “유익하다”는 참여자들의 리뷰를 보면 온라인 활동에 큰 장애물은 없어 보인다. 여가 활동 플랫폼 프립에서 살펴본 한 요리 모임은 마스크 착용과 손 소독제 비치, 발열 체크 등 철저히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이뤄지고 있다. 개인 별 조리도구, 장소와 재료 등이 필요해 대면활동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참가 인원 다섯 명을 넘지 않는 선에서 등산이나 트래킹 등을 하는 운동모임도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요리나 운동을 온라인 활동으로 병행하는 모임도 있다. 밀키트를 배송 받아 회원들이 각자의 집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등산’ ‘수영’ 등의 해시태그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남겨 수행 정도를 서로 공유하는 등 저마다 대책을 찾고 있다. 코로나 19로 휘트니스 센터에 갈 수 없어 스마트폰을 이용한 홈 트레이닝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유튜브 채널이나 온라인 클래스 플랫폼에는 실시간 새로운 홈 트레이닝 콘텐츠가 업로드된다. © LG유플러스 살롱 문화 2019년 4월,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Embrain Trend Monitor)가 전국의 만 19세~5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활동 중인 모임’을 조사했다. 이 중 정기적으로 모임활동을 한다는 906명에게 모임의 성격을 묻자, ‘취미와 관심사에 따른 불특정 다수와의 모임’이라는 응답자가 26.2% 였다. 학교와 회사 등 기존 인간관계에서 파생된 형태라는 답변(67.6%)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지만 새로운 경향임에는 틀림없다. 평소 모임이나 동호회 활동의 필요성을 느낀다는 응답자(749명) 중 38.9%가 ‘취미, 또는 관심사’에 집중하는 모임 참석이 필요하다고 한 점도 눈여겨 볼만 하다. 어쩌면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에서의 탈출구를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대답에는 30대의 비중이 가장 높았는데, 이들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소규모 취미활동 커뮤니티, 즉 ‘살롱 문화’의 주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전체 응답자의 73.5%에 이르는 735명이 향후 여행 동호회에 참석하고 싶다고 했으며, 운동•스포츠(18.1%), 외국어•언어(15.9%), 봉사활동(15%), 영화(14.3%), 책•글쓰기(14.1%) 등의 모임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이런 인식은 개인화된 사회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나’를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내 취향과 관심사가 누군가를 만나는데 중요한 조건이 된 것이다. 와인, 독서, 여행, 음악, 요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살롱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이유다. 작은 개인적 경험 오프라인 모임이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온라인의 형태로 변화하는중에 필자도 온라인 강좌를 체험해보기로 했다. 시작하기 전에는 자신감도 있었다. 프립에서 ‘티매트(tea mat)’ 뜨개질 키트를 주문했다. 호스트의 안내 페이지에서 본 것처럼 뚝딱 작품을 만들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생전 처음 뜨개용품을 만지면서 자신감은 이내 자괴감으로 변했다. 호스트가 보낸 URL에서 영상을 봤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호스트의 손과 달리 내 손은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아, 직접 앞에서 수업을 들었다면 더 쉽고 자세하게 요령을 알 수 있었을 텐데’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영상만 보고 처음으로 뜨개질을 하려니 대면 수업의 필요성을 절절하게 느꼈다. 몇 차례 털실뭉치와 바늘을 가지고 씨름하다가 ‘티매트는 사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손으로 짠 예쁜 매트로 찻잔을 받쳐 우아하게 커피 한 잔 하겠다던 계획도 뒤로 미뤘다. 무슨 취미 활동이나 초보들은 나처럼 온라인 클래스의 벽을 느낄 수 있을 터이다. 반면 작은 경험이라도 있는 사람들이라면 문턱이 그리 높지 않을 것도 같다. 내 뭉쳐진 털실뭉치는 곧 서랍장으로 들어갔다.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직접 수업을 들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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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SPRING 401

마음을 다려 드립니다 새하얗게 피어 오르는 김 사이를 요령 있게 움직이는 투박한 손. 김이 걷히면 구깃하던 옷은 어느새 반듯해져 있다. 온기를 머금은 깨끗한 옷을 손님에게 건네는 오기녕(吳基寧) 씨의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진다. 서울의 동네 한켠을 20년 간 지켜 온 작은 세탁소는 오늘도 따뜻한 김이 가득하다. 서울시 마포구 신수로 골목의 작은 세탁소 ‘현대 크리닝’을 운영하는 오기녕 씨는 8평 남짓한 공간에서 하루 열 네 시간을 일한다. 집집마다 봄옷을 꺼내고 겨울옷을 정리는 봄철이 그에게 일 년 중 가장 바쁜 계절이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쌓여 있을 때,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 쓸 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낀다’고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Haruki Murakami 村上春樹)가 말했다. 나라마다 이런 상태를 표현하는 말들이 있다. 덴마크에서는 ‘휘게(hygge)’, 스웨덴에서는 ‘라곰(lagom)’, 프랑스에서는 ‘오캄(au calme)’, 요즘 한국에서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줄인‘소확행(小確幸)’이라는 새로운 표현이 널리 쓰인다. 동네 골목에서 일 년 내내 하얀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세탁소는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따뜻함을 주는 장소 중의 하나일 것이다. 서울시 마포구 신수로의 골목 세탁소‘현대크리닝’을 운영하는 오기녕 씨의 하루는 오전 8시부터 시작된다. “출근하면 우선 세탁물을 정리해서 분류하고 종류별로 세탁합니다. 그 작업이 끝나면 수선 들어온 옷을 모아서 수선해요. 그 후에 다림질이 시작되죠. 밤 9시에는 배달을 나가야 해요. 근처 아파트 다섯 단지 정도 돌고 오면 밤 10시쯤 됩니다.” 일 년 중 가장 바쁜 계절은 봄이다. 집집마다 봄옷을 꺼내고 겨울옷을 정리하면서 세탁물이 쏟아진다. 그래서 봄철에는 출근시간도 퇴근시간도 없다. 새벽 한두 시까지 일하다 쓰러져 자고 다시 일어나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한다. 요즘은 일감도 많이 줄었다. 많을 때는 하루 40집에 배달을 했는데 지금은 많아봤자 10집 정도다. 그렇다 해도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일주일에 6일을 줄곧 서서 일 해야 한다. 한쪽 팔로 다림질을 하다보니 팔꿈치가 변형되기도 했다. 꾸준히 운동을 해도 완치 없는 직업병이다. 오기녕 씨는 모든 손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세탁물을 손질한다. 대부분 오래된 단골들이 찾는 그의 세탁소는 20년 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리를 잡기까지 그는 이십 대 초반에 옷과 인연을 맺었다. 옷 만드는 공장에서 빗질을 하고 실밥을 뜯으며 일을 배웠다. 그곳에서 재단사 업무까지 배운 뒤, 서른 살 무렵 공장을 차렸다. 5년 정도 운영하다가 1997년 외환위기를 만났다. “주문량이 급격히 줄어들어 일주일에 이틀, 사흘밖에 일을 못하니 직원들에게 월급을 줄 수 없었어요. 할 수 없이 공장을 접었습니다. 막내동생이 용인에서 세탁소를 하고 있어서 가봤다가 나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를 먹어도 체력이 닿는 데까지는 할 수 있는 일이니 먹고살 수 있겠구나 싶었죠.” 마침 아내의 친구가 세탁소를 운영했다. 아내와 함께 그곳에서 일을 해주며 필요한 기술을 배웠다. 3개월 간 보수 없이 종일 기계 다루는 법, 일하는 방식 등을 배웠다. 세탁 방법은 원단에 따라 달랐다. 공장에서 옷을 만들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마침내 세탁소를 차렸지만 안정된 운영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첫 번째 장소는 구로동이었다. 처음이라 기술이 부족해서 힘은 들고 돈도 많이 벌지 못했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직접 상대하며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았다. 몇 달 못 버티고 자리를 옮겼다. 새로 지은 아파트 상가였다. 당시 대부분 아파트 단지 상가에는 세탁소 하나가 들어서면 다른 세탁소는 못 들어간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1,300세대의 세탁물이 그의 세탁소로 몰려왔다. 이번에는 일이 너무 많아 반 년 만에 손을 들었다. 욕심 부리지 말자 생각하고 다시 터를 잡은 곳이 지금의 마포구 신수로다. “제 고향이 마포예요. 처음 세탁소 차리려고 했을 때에는 이 곳에 아파트가 없었어요. 두 번 째 가게 팔고 와보니 주변에 아파트도 많이 생겼고 마침 빈 가게가 있어서 들어왔습니다. 이 곳에 터를 잡은지 20년쯤 되었네요.” 노동의 양은 줄었지만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함께하던 아내가 건강악화로 쉬게 되면서 혼자 가게를 떠맡았다. 세탁물들이 층층이 쌓여 있고 각종 기계와 미싱 등이 빼곡하게 들어찬 가게는 8평 남짓. 잠시 짬이 나도 몸 눕힐 공간이 부족해 의자를 붙여두고 쉰다. 다양한 세탁 프랜차이즈와 첨단 어플리케이션이 쏟아지고 있지만, 오기녕 씨는 전통 방식 그대로를 고수한다. 매일 손수 세탁물에 붙일 태그를 정리하고 체크한다. 변화하는 환경 시대가 바뀌며 세탁업도 예전 같지 않아졌다. 젊은 세대들은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세탁앱을 사용하거나 상대적으로 저렴한 프랜차이즈에 옷을 맡긴다. 코로나19로 외출이 줄고 재택근무가 많아지면서 세탁물의 양도 더욱 줄었다. 힘들고 고된 일이라 배우겠다는 사람도 갈수록 찾기 힘들다. 동네 세탁소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주인이 나이가 들어 더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그대로 문을 닫는 것이다. 하지만 오기녕 씨는 손님 한명한명에게 최선을 다하는 장인(匠人)이다. 그의 가게를 찾는 고객의 대부분은 40대, 50대의 주부들이고 오래된 단골들이다. 새 옷처럼 깨끗해진 옷을 받아들고 솔직하게 기뻐하고, 어떤 이들은 빵이나 과일을 건네며 감사를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꺼려지는 손님도 있다. 없었던 얼룩을 묻혔다며 누명을 씌우는 사람도 있고, 다짜고짜 하대를 하는 사람도 있다. “깔보듯이, 천대하듯이 말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일을 하니까 험하게 말 해도 된다는 식이죠. 그런 사람이 제일 힘들어요. 마음에 안 드시면 안 오셔도 괜찮다고 분명하게 얘기해야 해요. 안 그러면 내가 스트레스 받거든요.” 오래 일하다 보니 기억에 남는 손님도 많다. 한 번은 40대 남자 손님이 망태기에 속옷부터 셔츠, 바지, 수건까지 모두 쑤셔 넣어 주기적으로 가져왔다. 젖은 수건까지 넣으니 당연히 악취도 심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가게가 잠깐 쉴 때 다른 세탁소로 가져갔더니 너무 비싸게 받더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제 알았습니까?”그가 한 대답이었다. 그는 이제 사람에게 상처받지 않는 방법을 배워 알고 있다. 나쁜 일은 마음에 두고 계속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나쁜 손님은 안 받으면 되고, 좋은 손님은 늘 주위에 있으니 괜찮다. 좋은 손님에게는 더 잘해주지 못하는 게 항상 미안함으로 남는다. 어려운 상황이 끝나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하며,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손님들에게 전하기 위해 그는 뜨겁고 무거운 다리미를 다시 들었다. 노력하는 장인 하루 종일 옷과 씨름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유행에도 민감해지기 마련이다. 새로 산 옷을 수선하러 들고 오는 손님이 많으면‘요즘은 이런 스타일이 유행이구나’하고 느낀다. 소재에 따라 세탁법도 변해야 하니 그에 따른 공부도 필수다. 주말에 시간이 날 때에는 아울렛을 돌아보며 옷을 구경한다. 옷의 상태나 가격을 직접 보고 알아두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드라이클리닝이 필요한 옷들을 많이 입었는데, 요즘엔 스포츠웨어 같은 기능성 옷이 많다. 옷의 기능을 유지하려면 단시간 안에, 중성세제만으로 세탁해야 한다. 요령을 모르면 옷이 망가진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6일 근무인데 일요일에 옷을 보러 간다니. 다른 취미는 없을까? 오 씨는 활짝 웃으며 작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자전거도로를 따라 국토종주를 하고 있어요. 코스마다 부스가 있어서, 통과하면 수첩에 스탬프를 찍어줘요. 한동안 일요일마다 갔어요. 새벽에 가서 자전거로 달리고, 버스 타고 돌아오고. 긴 코스를 조금씩 끊어서 달리는 거죠. 이제 딱 한 군데 남았어요. 쉬는 날 운동도 하고 힐링도 할 수 있고, 그게 제 낙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끝나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하며,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손님들에게 전하기 위해 그는 뜨겁고 무거운 다리미를 다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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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SPRING 435

판소리에 매혹되다 자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확실하게 아는 행운을 아무나 갖게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로르 마포 씨는 그 행운을 거머쥐었다. 자신의 천직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판소리를 한 번 듣는 것으로 족했다. 어떤 주저함도 없이 그녀는 서울에 오기로 결정했고 이제 한국의 전통 성악 장르인 판소리 기예를 연마하고 있다. 언젠가 세계 곳곳에서 공연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파리의 삼정전자에서 일하고 있을 때 로르 마포 씨가 갖고 있던 꿈은 집을 사서 아이들이 북적이는 탁아소를 운영하는 거였다. 적어도 판소리 공연을 보러 가기 전 까지는 그랬다.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첫눈에 반해버렸죠.” 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한국의 전통 사설 노래에 완전히 빠져든 그녀는 공연 내내 웃음 지으며 생각했다. “좋아. 정말 좋아. 이게 내가 하고 싶은 거야.” 공연이 끝난 후 마포 씨는 소리꾼 민혜성 씨에게 다가가서 판소리를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 물었다. 양반 계급의 남자와 평민 출신의 여자 사이에 벌어지는 유명한 사랑 이야기인 의 일부를 불렀던 민 씨는 판소리를 배우려면 한국에 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알려줬다. 회계학 전공자이자 케이팝 팬이기도 한 마포 씨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제가 한국에 가면 저에게 판소리를 가르쳐 주실래요?” 2년 동안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고 가족과 친구를 설득하고 준비를 한 후 2017년에 마포 씨는 서울에 왔다. 민 씨는 훈련을 하는 데에 적어도 10년은 걸릴 거라고 경고했었다. 하지만 마포 씨는 걱정하는 어머니께 “일 년만 해 볼게요.”라고 말했다. 마포 씨가 특별히 모험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느낌만 믿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약속대로 마포 씨는 판소리 다섯 편 중 하나이자 국가무형문화재인 이수자인 민 씨에게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배울 게 많았다. 판소리에서는 스토리텔링이 중심이기 때문에 가사를 이해하는 게 중요했다. 따라서 한국어와 한자를 배우는 게 먼저였다. 프랑스에서 우연히 를 듣고 판소리와 사랑에 빠진 로르 마포 씨는 판소리를 배우기 위해 2017년 한국으로 날아왔다. 그리곤 당시 공연을 했던 소리꾼 민혜성 씨의 제자로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판소리를 잘 배우기 위해 한국어부터 익혀야 했던 그는 전문적인 소리꾼이 되기 위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연습한다고 한다. 연습, 그리고 또 연습 코로나 사태 전에 마포 씨의 하루는 오전 11시에서 저녁 9시까지 수업과 연습, 그리고 때때로 공연이나 TV 출연으로 채워졌다. 그녀는 남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느꼈다. 가사를 이해하는 건 둘째 치고 발음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도 했다. 발음을 제대로 하기 위해 어떨 땐 일주일 간 펜을 입에 가로로 끼워 넣고 연습하기도 했다. “제가 한국 사람처럼 노래를 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전문적인 소리꾼이 되고 싶어요.”라고 깊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를 가진 36세 마포 씨는 말한다. 여전히 초보자였던 시절에 잊지 못할 순간이 찾아왔다. 2018년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프랑스 엠마누엘 마크롱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기념하기 위해 엘리제궁에서 그녀가 노래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카메룬 태생의 프랑스 국적을 가진 그녀는 2019년에 있었던 공연을 더 특별하게 생각한다.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스승과 다른 소리꾼들과 함께 한 공연이었다. 청중 속에는 그녀의 가족뿐 아니라 지역의 고위 관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제가 공연하는 걸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해요. 다른 청중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느라고요. 어머니는 정말 뿌듯해 하셨어요.”라고 마포 씨는 말한다. 각각의 노래와 그 메시지가 마포 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판소리는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한 동생과 욕심 많은 형의 민속 설화를 바탕으로 한 ‘흥부가’이다. “흥부가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예요. 모든 가족은 다르긴 해도 문제를 갖고 있죠. 저희 가족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흥부가가 전하는 메시지인 좋은 사람으로 살면 보상을 받게 된다는 걸 믿어요.” 그녀의 목표는 ‘흥부가’를 완벽하게 부르는 것을 넘어서 세 시간이 걸리는 전곡을 공연하는 것이고 세계 곳곳에서 그렇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또 아이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는 것도 꿈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처럼 아이들이 판소리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걸 도와주고 싶어 한다. “파리에서 저는 종종 우울했어요. 왜 그런지도 모르고 제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판소리를 부르면 제 마음이 아주 선명해지는 걸 느껴요. 언젠가 아이가 생기면 이 아름다운 음악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마포 씨는 매일 엄마와 얘길 나누는데 어머니는 매번 좋은 남자를 만났는지 묻는다. 그때마다 그녀는 “아직요.”라고 대답하고 있다. 때때로 한국어와 불어를 섞어 공연을 하는 마포 씨의 꿈은 언젠가 판소리를 불어로 완창하는 것이다. 한국 고유의 민속음악인 판소리를 불어로 노래하기가 쉽진 않지만 언젠가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 중이다. 팬데믹의 해 2020년은 마포 씨에게 특히 어려운 해였다. 공연은 허락되지 않았고 그녀의 비자로는 예술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현재 자신의 유튜브 채널 ‘로르랑 아리랑’과 스승의 수업을 불어로 번역해 내보내는 ‘봉주르 판소리’를 통해 청중을 만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공연을 하지 못하니 수입이 없다. 그럼에도 마포 씨는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살고 있는 하숙집 주인은 돈을 받지 않고 그녀가 필요한 것을 조달해 주면서 그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무대 공연을 위해 마포 씨에게 한복을 선물하기도 했다. 마포 씨는 그런 그녀를 언니라고 부른다. 마포 씨는 한국어의 존칭어나 관계어가 가끔 혼란스럽긴 하지만 사람들 덕분에 한국에서의 경험은 대체로 좋았다고 말한다. “파리의 한국 친구들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살 곳을 찾거나 은행 계좌를 만드는 것 같은 기본적인 일에 도움을 주었어요.” 라끌레트 치즈나 후식 케이크인 에클레어 같은 맛있는 프랑스 음식을 그리워하긴 하지만 이를 대체할 자기만의 한국 음식을 찾기도 했다. 한국인들이 숙취용으로 좋아하는 곰탕은 술을 마시지 않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2020년의 모든 것이 음울한 건 아니었다. 마포 씨는 명망 있는 한국예술종합대학교에 합격하게 되어 꿈을 이뤘다. “또 학생이 되고 모든 것을 번역해야 하는 일”이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녀는 아주 기뻤다. 진짜 걱정거리는 학비다. 살면서 처음으로 돈에 쪼들리게 되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무대에서 공연할 때 청중이 저를 판소리를 하는 외국인이 아니라 판소리 소리꾼으로 봐주기를 바라요,” 후회는 없다 하지만 마포 씨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단 한 번 자신의 선택을 의심한 적이 있다. 일 년에 두 번 하는 집중 판소리 훈련인 ‘산(山) 공부’를 처음 했을 때였다. “죽는 줄 알았어요.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훈련을 했어요. 연습하고 먹고, 연습하고 먹고.” 그녀는 당시를 떠올렸다. “스스로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라고 물었어요. 하지만 나중에는 ‘와, 내 판소리가 정말 좋아졌네’라고 했죠.” 산 훈련이 제대로 된 목소리와 복잡한 기술을 익히는 데에 필수적이었음을 그녀는 인정한다. 마포 씨는 또 다른 포부를 갖고 있다. 판소리를 불어로 부르는 것이다. 때때로 한국어와 불어를 섞어서 공연을 하기도 하는데 그게 더 어렵게 느껴진다. “한국어로 부를 때의 기술은 달라요.”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한국어로 노래할 때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요. 근데 불어로 노래하면 그냥 노래 같아요. 불어로 부를 때도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리게 하고 싶어요.” 어떤 언어로 노래를 하든지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다음 문장에 집약되어 있다. “무대에서 공연할 때 관중이 저를 판소리를 하는 외국인이 아니라 판소리 소리꾼으로 봐주기를 바라요.” 그녀는 올해 무대에서 다시 공연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흥부가’를 완전히 익힌 후에 좀 덜 알려진 ‘수경낭자가’로 넘어가는 것도 목표이다. 사랑 이야기인 ‘수경낭자가’는 오늘날에는 단지 몇 명의 소리꾼에 의해 이어지고 있는데 민혜성 씨도 그 중 한 명이다. “언젠가 한 사람만이라도 제가 스승님이 판소리하는 걸 들었을 때와 같은 느낌을 갖고 ‘와, 나도 판소리 배우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마포 씨는 기대에 차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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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1 SPRING 395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아리랑’ 나윤선(Nah Youn-sun [Youn Sun Nah] 羅玧宣)은 유럽에서 가장 인정받는 재즈 아티스트로 세계 무대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쳐 왔다.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해 국내에 머물게 된 그가 음악 감독을 맡고 여러 나라 뮤지션들이 협업으로 만든 앨범 이 지난 12월에 출시되었다. 전통 민요 ‘아리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의 음악감독을 맡은 나윤선(Nah Youn-sun [Youn Sun Nah] 羅玧宣 가운데)이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Heo Yoon-jeong [Yoon Jeong Heo] 許胤晶 왼쪽)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녹음 작업을 하고 있다. ⓒ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음반에 참여한 뮤지션들은 원격으로 진행된 이번 작업이 서로의 음악과 소리에 더 집중하고 탐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나윤선은 ‘아리랑’이 힘든 상황에서도 다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추동력을 지닌 음악이라고 말한다. 나윤선의 공연 무대를 보고 있으면 마치 그가 하나의‘악기’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 독보적인 악기가 들려주는 음률은 섬세하고 예리해서 듣는 이의 심장을 파고든다. , , , 같은 노래를 들으면 그가 목청으로 추는 눈물의 검무를 실감할 수 있다. 그는 유럽 최고의 재즈 보컬리스트로 평가받으며 세계 최정상급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서 왔으며,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두 차례 받았다. 2009년부터 독일의 ACT에서, 그리고 2019년부터는 미국의 워너뮤직그룹에서 음반을 내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알려 왔다. 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한 나윤선은 1994년 록 뮤지컬 의 배우로 무대에 데뷔했다. 이듬해 훌쩍 프랑스로 음악 유학을 떠났는데, 당시 그는 재즈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그저 노래를 배우고 싶었던 그는 불과 5년 만인 2000년 파리의 유수한 재즈학교 CIM에서 동양인 최초로 교수가 됐다. 나윤선에게 있어 음악적 대동맥은 미국의 블루스보다 한국의 아리랑과 근접해 있어 보인다. 3년 전 서울에서 만났을 때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슬픈 샹송을 부를 때 저는 원곡보다 훨씬 더 슬프게 부르게 돼요. 한국인들은 주변에서 누군가가 돌아가시면 세상이 끝난 듯 울잖아요. 지금껏 그 감성으로 노래를 불렀어요.” 그는 자신의 7집 과 8집 에 아리랑을 실었으며,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식 무대에서도 아리랑을 불렀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예 아리랑을 소재로 한 앨범 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35분짜리 이 음반에는 가야금 연주자 박경소(Park Kyung-so [Kyungso Park] 朴京素)와 영국인 색소포니스트 앤디 셰퍼드(Andy Sheppard), 거문고 주자 허윤정(Heo Yoon-jeong [Yoon Jeong Heo] 許胤晶)과 노르웨이 트럼펫 연주자 마티아스 에이크(Mathias Eick)의 협업 등 여러 나라 뮤지션들이 원격으로 호흡을 맞춰 만든 6곡의 새로운 아리랑이 담겼다. 지금까지 여러 음악가가 다채로운 색깔로 아리랑을 재해석했습니다. 이번 음반은 어떻게 다른가요? 지난해 우리 모두 코로나19로 특별히 힘든 한 해를 보냈잖아요. 음악가, 제작사, 에이전시 모두 무대가 사라지면서 대단히 어려운 상황을 맞았어요. 그래도 “이제 끝났어”라고 말하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어요. ‘Stay creative’나 ‘Keep creative’가 모두의 캐치프레이즈였죠. 그들의 긍정적인 태도에서 제가 많이 배웠어요. 그래서 기쁘고 밝은 아리랑으로 작위적인 희망을 노래하지는 말자고 생각했죠. 지금의 세상을 그대로 반영한,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아리랑을 만들어 보자고 음악가들을 독려했습니다. 모두 동감하며 제 뜻에 따라 줬고, 이번 음반에 참여한 음악가들이나 저나 작업 과정에서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음악가를 섭외할 때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협업에 열려 있는 뮤지션, 그리고 아리랑이 뭔지 알 만한 뮤지션을 골랐어요. 앤디 셰퍼드는 박경소 씨와 영국 ‘K-뮤직페스티벌(K-Music Festival)’에서 함께 공연한 적이 있어요. 마티아스 에이크는 저와 듀오로 순회 공연도 해 본 적이 있는데 다재다능한 연주자예요. 트럼펫, 콘트라베이스, 드럼, 건반, 전자음악을 섭렵했죠. (나윤선은 유럽 무대에서 활동하며 동료 음악인들 사이에 아리랑이 재즈 스탠더드처럼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핀란드의 이로 란탈라(Iiro Emil Rantala 피아노)와 스웨덴의 울프 바케니우스(Ulf Wakenius 기타)는 2017년 듀오 앨범 에 이란 곡을 담았는데 이는 의 멜로디를 변형한 것이다. 바케니우스는 2000년대 초반부터 나윤선과 활동하며 밀양, 진도, 정선의 아리랑을 깊숙이 익혔다.) 해외 음악가들은 아리랑을 음악적으로 어떻게 느끼나요? 일단은 아리랑의 멜로디 자체를 정말 좋아해요. 이번 앨범에서 듀오 ‘첼로가야금(CelloGayageum)’과 함께 라는 곡을 만든 트롬본 연주자 사무엘 블라제(Samuel Blaser 스위스)에게 제가 한국의 지역별 아리랑을 들려줬어요. 그랬더니 그 모든 아리랑에서 영감이 넘쳐흐른다면서 자신이 재해석한 곡들을 제게 수시로 보내줬어요. 아리랑의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기본적으로는 포크송, 즉 민요의 힘이라고 봅니다. 또 외국인에게는 새롭기도 하고요. 전에는 모르던 새로운 음악적 화두인 셈이니까 흥미가 강하게 생기는 거죠. 아리랑 자체가 뼈대는 심플하지만 리드미컬한 특성이 있어요. 그래서 음악가들이 각자 원하는 것을 시도해 볼 수 있죠. 특히 재즈 음악가들은 본인들이 느끼는 것이 백 가지면 백 가지를 모두 다르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 더욱 그렇고요. 5박, 7박 같은 변칙적인 박자에도 관심이 많아요. 이번 앨범을 원격으로 작업했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각자 서로 물리적으로 많이 떨어져 있는 데다 코로나19 상황 때문에 모일 수도 없는 처지였어요. 그래서 한국 음악가들이 먼저 아리랑을 기반으로 곡을 창작해 녹음했어요. 이것을 직접 또는 저를 통해 해외의 협업 음악가에게 이메일이나 인터넷 메신저, SNS 등을 통해 보냈죠. 해외 음악가들은 그 파일을 듣고 자신의 해석을 덧붙인 연주를 다시 보내 줬고요. 당연히 한 번에 되지는 않았어요. 모두가 만족해하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이런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다듬어 갔죠. 시차가 있지만 공동 작곡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부는 제가 직접 최종 편집을 하기도 했어요. 해마다 연주 여행 일정이 빼곡했는데, 2020년은 어땠나요? 부모님과 그처럼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근 20년 만에 처음이었어요. 전에는 한국의 집이 호텔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었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우울함과 불안감도 찾아왔어요. 느닷없이 ‘내가 지금 생의 어디까지 와 있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 제가 감수성이 예민해서인지 이런 상황이 너무 아프게 느껴졌어요. 주위에서 “이럴 때는 소셜미디어를 잘 활용하라”고 조언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팬데믹 초반에는 음악을 듣는 대신 청소하고 정리하며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는 데에만 집중했죠. 다시 음악을 듣기 시작했을 때는 유럽 음악을 재발견했어요. 어쩐지 모든 음반이 영화음악처럼 다가오더군요. 그동안 스티비 원더, 허비 행콕을 들으면서 짜릿함을 느꼈었지만 이렇게 집 안에서 느린 속도로 앨범을 통째로 듣게 되니 음악도 하나의 긴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일 수 있겠다는 깨달음이 들었어요. 물론 예전에도 음반의 곡 순서를 정할 때 기승전결에 신경 썼지만, 이번 기회에 그 중요성을 좀 더 깊이 깨닫게 됐죠. 예술과 음악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 시간이기도 했어요. 이번 음반을 지휘하면서 “곡을 짧게 쓰지 말라. 되도록 길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담아라” 하고 주문했어요. (첫째 줄 왼쪽부터) 허윤정의 거문고 연주, 드러머 미켈레 라비아(Michele Rabbia 이탈리아), 색소포니스트 앤디 셰파드(Andy Sheppard 영국), 경기민요 소리꾼 김보라(Kim Bo-ra [Bora Kim]); (둘째 줄 왼쪽부터) 아코디언 연주자 뱅상 페라니(Vincent Peirani 프랑스),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 플루티스트 조스 미에니엘(Joce Mienniel 프랑스), 대금 연주자 이아람(Lee Aram [Aram Lee]); (셋째 줄 왼쪽부터) 판소리 춘향가 소리꾼 김율희(Kim Yul-hee [Yulhee Kim]), 가야금 연주자 박경소(Park Kyung-so [Kyungso Park] 朴京素), 트럼펫 연주자 마티아스 에이크(Mathias Eick 노르웨이), 타악기 연주자 황민왕(Hwang Min-wang [Min Wang Hwang]). 이 외에도 듀오 그룹 첼로가야금(CelloGayageum)과 트롬본 연주자 사무엘 블레이저(Samuel Blaser 스위스)가 이번 앨범 작업에 참여했다. ⓒ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아리랑 자체가 뼈대는 심플하지만 리드미컬한 특성이 있어요. 그래서 음악가들이 각자 원하는 것을 시도해 볼 수 있죠. 특히 재즈 음악가들은 본인들이 느끼는 것이 백 가지면 백 가지를 모두 다르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 더욱 그렇고요. 5박, 7박 같은 변칙적인 박자에도 관심이 많아요.” 이번 아리랑 음반을 들으면서 홈트레이닝이나 요가의 배경 음악으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도 좋겠네요. 굳이 집중해서 들으시지 않아도 돼요. 설거지하거나 집안일을 할 때, 때론 아무것도 안 할 때 그냥 틀어 놓고 쓱 지나치는 음악으로도 좋아요.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깊이 집중해 감상해 보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2019년 발매한 열 번째 정규 앨범 이 최근작이었죠. 올해 계획이 궁금합니다. 워너뮤직과 계약 후 두 번째 앨범을 준비합니다. 제 앨범으로는 11번째인데, 1~2월에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초반 작업을 할 예정이에요. 4월에는 녹음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거고요. 다시 어쿠스틱 음악으로 가 볼까 하는 생각도 있는데, 아직 정해진 건 없습니다. 색다른 포맷의 음악을 기대하고 있어요. 그리고 코로나19 상황이 호전된다면 3월에 잡혀 있는 유럽 지역 10개 공연도 가능하겠죠. 올해는 모든 음악가, 예술인,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한 나날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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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0 WINTER 389

내 차에서 즐기는 여행 고가의 캠핑카를 구입하거나 렌트하지 않아도 자신의 차량으로 캠핑을 즐길 수 있는 ‘차박’이 새로운 레저 문화로 떠오르고 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며 한층 상승세를 타고 있는 비대면 야외 활동이다. “첫 번째로 1열의 의자를 앞쪽으로 최대한 당겨 주시고요. 그다음에는 2열의 의자도 같은 방향으로 접어 주세요.” 한 유튜버가 자신의 SUV 차량 내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30초도 되지 않아 내부 공간을 넓힌 그는 “이제 바닥에 매트를 깔 거예요”라며 “그 전에 제가 누울 수 있는지 의자를 치운 공간의 가로, 세로 길이를 재 보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곧 이어 차량 내부의 가로 길이는 약 1m, 세로는 1m 95㎝로 측정됐다. 그는 “이 정도면 일반 성인 남성도 편안히 누울 수 있다”며 “여러분이 커플이라면 오붓한 2인 캠핑을 즐길 수도 있겠다”고 미소 지었다. 지난해 7월 한 유튜브 계정에 올라온 차박 준비 과정을 다룬 이 영상은 올 10월 기준 조회수 10만 건을 넘겼다. ‘차박(車泊)’이란 차와 숙박을 합친 신조어로 ‘차에서 잔다’는 의미다. 여행을 떠나 차에서 잔다면 주방 시설에 침대도 있는 캠핑카를 떠올리기 쉽지만, 차박은 필수 장비 몇 가지만 갖춘 채 평소에 사용하던 자신의 차에서 자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 보니 대개 실내 공간이 넓은 SUV 차량을 이용하는데, 운전석 뒤의 의자를 눕혀 공간을 최대한 넓히면 그런대로 하룻밤 묵을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할 수 있다. 캠핑의 감성은 그대로 살리면서도 최소한의 짐만으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여행 형태이다. 차박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장소를 불문하고 숙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캠핑장이나 휴양림에 갇힐 필요 없이 마음에 드는 곳이면 어디든 머물 수 있다. 새로운 레저 문화 한국자동차산업협회 보고서에 의하면 트럭과 승용차의 장점을 섞은 픽업트럭 판매량이 2017년 2만 2000여 대에서 이듬해 4만 2000여 대로 90% 이상 증가했다. 또한 캠핑아웃도어진흥원은 같은 기간 국내 캠핑 산업 규모가 2조 원에서 2조 6000억 원대로 30% 이상 성장했다고 발표했다. 캠핑 용품 시장도 올해 폭발적인 성장을 보였다. 온라인 쇼핑몰 SSG닷컴이 지난 6~7월의 매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차 트렁크와 연결해서 쓰는 도킹텐트와 텐트 안에 까는 에어매트 매출이 직전의 두 달보다 각각 664%, 90% 늘었다. 캠핑 필수 아이템인 아이스박스 매출은 10배 이상 증가했다. 롯데마트도 같은 기간에 전년 대비 캠핑 용품 매출을 분석했는데 그 결과, “의자와 테이블 등을 포함한 캠핑 가구는 103.7%, 침낭•매트리스 등 캠핑 침구는 37.6%, 텐트는 55.4%, 캠핑 취사 용품은 75.5%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2018년 무렵부터 세간에 회자되며 성장세를 보인 차박은 TV 방송 프로그램의 소재로도 인기다. MBC TV의 대표적인 예능 프로그램 는 지난 3월 한 신인 남자 배우가 자신의 차량을 끌고 바닷가를 찾아 아이돌 가수와 함께 캠핑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차량 뒷좌석을 전면 개조했는데, 차 안에 전구를 달아 밤에는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 방송이 나간 뒤,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 차박이 등장했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는 차박을 해 보고 싶다는 반응이 폭발적으로 이어졌다.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로 ‘차박’을 검색하면 수십만 건의 게시물이 쏟아진다. 새로운 매력 이 새로운 레저 문화가 급격히 성장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크게 번거로운 준비 과정 없이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떠날 수 있다. 금요일 퇴근 후에 떠나 바닷가에서 지낼 수도 있고, 산림을 찾아 이튿날 아침 상쾌한 공기도 마실 수 있다. 영상 하나로 4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한 어느 여성 유튜버는 홀로 여유를 즐기는 데 그만이라고 말한다. 특별한 장비 없이 캠핑을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인기 요인이다. 끼니를 해결할 냉동 식품 몇 가지에 술 한 병만으로도 하룻밤의 캠핑이 완성된다. 캠핑장을 예약할 필요도 없다. 캠핑 인구가 늘면서 유명한 캠핑장들의 경우 오랫동안 기다려야 예약이 가능한데, 굳이 캠핑장이 아니라도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코로나19가 영향을 미친 측면도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대면 접촉이 제한되면서 혼자서 또는 가족끼리 오붓하게 자연 속에서 우울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탈출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기반하고 있는 국내 최대 차박 커뮤니티 ‘차박캠핑클럽’만 보더라도 올해 2월 말 8만 명이었던 회원수가 9월 초에는 17만여 명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차량에 까는 매트가 다소 불편하다. 차박용 매트를 사용한다 해도 잠자리에 예민한 사람에게는 불면의 밤이 될 수 있다. 올 2월 28일 자동차관리법이 개정되면서 승용차도 캠핑카로 개조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바닥을 고르게 하는 작업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반드시 세안이나 샤워를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쾌한 여행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건전한 문화 차박에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불편함도 따른다. 차 속에 오랫동안 에어컨이나 히터를 틀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기를 생산하는 파워뱅크와 무시동 히터 등의 장비를 갖춰야 더위와 추위를 막을 수 있다. 또 차 안에 들어오는 벌레도 귀찮은 문제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차박용 모기장을 따로 준비해야 한다. 필요한 장비를 하나씩 사다 보면 갈수록 더 비싼 물건을 찾게 된다. 안락한 차박을 추구하다 보면 자연스레 생기는 일이다. 한 남성 유튜버는 자신이 차박을 그만둔 이유가 이런 ‘장비병’ 때문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차박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장소를 불문하고 숙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캠핑장이나 휴양림에 갇힐 필요 없이 마음에 드는 곳이면 어디든 머물 수 있다. 물론 대다수 차박족은 화장실을 갖춘 공원이나 해변, 강가를 선호한다. 이런 추세에 힘입어 ‘차박 성지’로 떠오른 곳들도 많지만, 야영과 취사로 인해 불거질 수 있는 문제점 때문에 출입을 제한하는 곳들도 늘고 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자연을 훼손하고, 쓰레기를 무단으로 투기하기 때문이다. 건전한 문화를 정착시킬 수만 있다면, 차박은 코로나19 시대에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유익한 여행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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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0 WINTER 205

달인의 담백한 행복 주머니가 가벼운 서민들에게 싸고 맛난 길거리 군것질은 그 자체가 일상의 작은 위로다. 올해로 43년째 넉넉지 못한 이웃들이 즐겨 찾는 전통 시장에서 가족들과 함께 땀흘리며 서민 간식 꽈배기를 튀겨 팔고 있는 임춘식(林春植) 씨의 매일매일은 자신이 만드는 소박한 과자만큼이나 담백하다. 서울 도심의 한켠을 지키고 서 있는 독립문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모금 캠페인을 통해 1897년에 건립되었다.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국민의 뜻을 담아 세운 소박한 모습의 이 근대 유적은 조선(1392~1910)이 자주 국가임을 표방했다. 초기 서양식 근대 건축물의 하나이기도 한 이 문을 바라보고 있는 영천(靈泉)시장은 애초에 규모가 꽤 컸으나, 주변 지역의 재개발과 고가도로 건설 등으로 많이 축소되었다. 북적이던 오래된 재래시장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정겨운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알고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이 시장에는 소문난 맛집이 여러 곳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집은 ‘달인꽈배기’다. 시장 어귀 골목을 향해 시원하게 트인 가게에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주문을 받고 다음 손님을 부르는 씩씩한 목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순서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는 사람들, 받아든 꽈배기를 한입 베어문 사람들의 미소가 구경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환하게 번진다. 꽈배기는 반죽한 밀가루를 가늘고 길게 늘여 두 가닥으로 꺾은 다음, 새끼줄을 꼬듯이 꼬아 식용유에 튀겨낸 과자이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 한족의 오랜 전통 과자 ‘마화(麻花, mahua)’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텐진 지역의 특산물인 마화는 다소 딱딱한 질감인데, 연변 조선족들이 술이나 효모로 발효시켜 부드럽게 만들어 이를 ‘타래떡’이라 불렀다. 한국의 꽈배기는 여기에 설탕을 뿌려 단맛을 강조했다. 배배 꼬인 달콤한 꽈배기를 손가락으로 풀어 먹기도 하고, 통째로 베어 먹는 재미가 있다. 열세 살부터 시작한 노동 달인꽈배기의 직원은 다섯 명이다. 사장인 임춘식 씨와 그의 아내, 아들과 며느리, 그의 막냇동생까지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일한다. 간판에는 ‘42년 전통’이라 쓰여 있는데, 그 간판을 단 것이 작년이니 올해로 43년째이다. 남쪽 지방 도시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6학년인 열세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생계를 도맡아야 했던 어머니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고,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영천시장 안 튀김 가게에 있던 고향 선배 밑에서 일을 시작했다. “원래 여기가 떡 골목이었어요. 대부분 떡집 아니면 튀김집이었죠. 어느 날 누가 꽈배기를 가지고 와서, 이거 한번 해 보면 어떻겠냐 하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고향 선배와 같이 만들기 시작했어요. 당시엔 꽈배기집도 없었고, 사람들이 잘 먹지도 않을 때였어요. 먹어 본 사람들이 담백하다, 맛있다, 소화도 잘된다, 그러더라고요.” 가게를 차려 독립한 것은 36년 전이다. 주 거래처는 건설 현장에 임시로 차려 놓은 식당과 학교 안에 있는 매점이었다. 밤새도록 만들어 박스로 포장해 놓으면 새벽에 가져가는 도매 장사였다. 20kg짜리 밀가루를 하루에 20포대씩 소화해야 하는 중노동이었고, 밤낮이 뒤바뀌어 몸도 상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임시 식당과 학교 매점이 사라지면서 가게는 아침에 문을 열어 일반 손님들에게 판매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미리 만들어 둔 것을 파는 게 아니라 즉석에서 튀겨 팔게 되니, 손님들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단골이 생기고,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저는 매일 꽈배기 서너 개씩 먹어요. 일단 맛있으니까 먹고, 뭐가 잘됐는지 잘못됐는지 살피기 위해 먹어요. 소금의 양, 설탕의 양, 물의 양, 반죽하는 시간, 다 중요하죠.” 사람들이 그의 꽈배기를 먹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 그의 현란한 기술 때문일 것이다. 한 번 반죽할 때 들어가는 밀가루는 40kg, 여기에 설탕과 마가린과 따뜻한 물을 붓고, 생 이스트를 넣어 두 손으로 치대며 반죽한다. 발효한 반죽을 넓게 펴서 적당한 크기로 툭툭 자른 다음, 가느다란 줄 모양으로 만든다. 그것을 반으로 접어 공중으로 획 던지면 보기 좋게 꼬아져 툭 떨어진다. 굵기와 크기가 일정할 뿐만 아니라 속도가 엄청나다. 홀린 듯 그의 작업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그에게 ‘달인’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오후 세 시, 하루 일과를 마친 그는 작업복에 묻은 밀가루를 툭툭 털고 힘찬 걸음으로 가게를 나선다. 세상은 아직 한낮, 소박한 행복이 그의 앞에 활짝 펼쳐져 있다. 변함없는 맛 널리 소문이 퍼지고, 여러 매체에서 취재를 오고, 가게 앞에는 항상 사람들이 북적이는데 꽈배기 가격은 이상할 정도로 싸다. 웬만한 가게에서는 3개에 2천 원 정도는 받고 있는데, 4개에 천 원이다. 그것도 10여 년 전부터 같은 값이라니. 그 사이에 재료비도 올랐을 텐데, 이래서야 남는 게 있을까 싶다. “가족끼리 하니까 인건비가 안 들어요. 달걀, 우유를 넣지 않고 옛날 방식으로 만들어서 옛날 가격으로 팔아요. 올리고 싶은 마음이야 있지만, 요즘 경제도 안 좋고 제가 먹고살 만하니까 그냥 파는 거예요. 싸니까 손님들이 참 좋아해요.” 힘에 부칠 때도 있을 텐데, 손반죽을 고집하는 이유도 궁금하다. “기계를 써본 적이 있는데, 너무 맛이 없는 거야. 내가 맛없으면 손님도 그렇다는 거죠. 손님이 맛없다고 하면 우리도 기분이 안 좋고. 그래서 기계를 없애버렸어요. 힘이야 들지. 그런데 힘 안 들이고 돈 버는 일이 어디 있어요? 그래도 꽈배기는 고급스러운 일이에요. 준비하는 시간도 별로 안 걸리고, 반죽해서 튀기면 되고, 튀긴 다음에 기름 버리면 끝이죠. 재고도 없으니까요.” TV 방송을 탄 후에는 체인점을 내 보자는 제의도 받았다. 하지만 반죽을 직접 해야 하고, 바로 튀겨서 팔아야 하기 때문에 많은 매장을 관리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반죽을 해서 오래 놔두면 색깔도 안 나고 맛도 없어지기 때문에 세 시간 안에 튀겨서 팔아야 한다. 직접 와서 배워가면 모를까, 몸이 하나이니 체인점은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고집이 변함없는 맛을 만들었다. “먹고 돌아서면 또 먹고 싶어진대요. 한 자리에서 열 개 먹는 사람도 있어요.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프라이팬에 구워 먹거나 가스레인지에 돌려서 말랑해지면 설탕 뿌려 먹는대요. 할머니들은 밥통에 쪄서 드시고, 젊은 사람들은 에어프라이어에 돌려 먹고. 할머니 한 분이 잔뜩 사가시기에 ‘어떻게 드시려고 그래요’ 하니까, ‘걱정하지 말아,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 팔기나 해’ 그러더라고요.” 그의 하루는 새벽 다섯 시 반에 시작된다. 여섯 시면 가게문을 열고 반죽을 시작한다. 여섯 시 반쯤 첫 손님들이 온다.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는 청소하는 아주머니들, 학교나 병원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와요. 식사 대신 먹기도 하고, 포장해 가서 동료들과 나눠 먹기도 하고. 아침에 달달한 거 먹으면 기분이 좋잖아요.” 아침 장사가 끝나면 열 시쯤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그러고 나면 점심시간을 맞은 직장인들이 몰려온다. 미리 만들어 두면 맛이 없으니 그때그때 튀겨서 판다. 오후 두세 시면 꽈배기는 동이 난다. 하루 세 번 반죽하고, 다 팔고 나면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가게 정리를 하고 문을 닫고 나면, 열심히 일한 가족들은 각자의 생활을 누린다. 소박한 행복 “나는 어릴 때부터 가정 형편이 안 좋아서 일찍 일을 시작했잖아요. 아무것도 없이 밑바닥 생활부터 했어요. 오직 기술 배운 거, 성실한 거, 인심 안 잃은 거 가지고 여기까지 왔어요. 아들 하나 있는데, 대학 졸업하고 몇 년 직장을 다녔어요. 그러다 이 일을 하겠다고 해서, 처음에는 반대했어요. 세상 좋아지고 공부도 할 만큼 했으니 좀 편하게 살았으면 했어요. 아들만 힘들면 괜찮은데, 며느리까지 힘드니까. 이 일은 사람이 있으면 있는 대로 필요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힘 안 들겠어요. 우리 시대 살면서 고생 안 한 사람 어디 있어요. 지금 행복하고 만족하면 되는 거지. 나는 옛날에 힘들었던 얘기 별로예요. 지금 열심히 하는 거, 행복하게 일하는 거, 그게 중요하지.” 그가 삶에서 바라는 것 또한 대단하지 않다. “내 가족,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거. 그거밖에 없어요. 이날까지 살면서 주식 한 번 안 해 보고 복권 한 번 안 샀어요. 만 원 벌면 만 원 쓰고. 일 한참 많이 하고 돈 많이 벌어 봤을 때 친구들을 많이 잃어 봤어요. 다 돈 때문이에요. 어디 가면 나보다 돈 많은 사람들 있어도 내가 카드 꺼내서 밥값 내버려요. 나는 꽈배기 열심히 만들어서 팔면 되니까. 남들은 내가 부자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굳이 돈 없다고 설명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 내겐 아들도 있고, 손자도 있고, 그럼 부자 아닌가요? 행복하니까 부자라고 생각해요.” 그의 삶은 그가 만드는 꽈배기처럼 소박하고 담백하다. 오후 세 시, 하루 일과를 마친 그는 작업복에 묻은 밀가루를 툭툭 털고 힘찬 걸음으로 가게를 나선다. 세상은 아직 한낮, 소박한 행복이 그의 앞에 활짝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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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0 WINTER 284

두 개의 언어로 꿈꾸다 러시아 태생이지만 한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이에바 씨는 한국인들이 놀랄 정도로 한국어를 잘한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만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한국과 러시아의 문학을 양국에 소개하고 싶어 한다. 이에바 씨는 한국 사람보다 한국어를 더 잘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는다. 그녀가 나오는 유튜브 영상에는 그런 댓글이 몇 십 개 달린다. MBC 에브리원 퀴즈 예능 프로그램 , KBS 쿨FM 에 고정으로 출연하는 에바 씨는 사람들이 그녀가 러시아인임을 잊게 만든다. 하지만 두 개의 언어를 유창하게 한다는 게 가끔은 어떤 언어와도 편하지 않음을, 또 두 개의 문화에 익숙한 게 가끔은 어디에서도 고향을 갖지 못하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그걸 에바 씨가 순간적으로 깨닫게 된 건 2017년 외대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처음으로 3분짜리 텍스트를 통역하는 일을 하게 되었을 때 한국어도 러시아어도 모르는 것처럼 느낀 멘붕의 순간이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안 들렸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에바 씨는 피아노 강사로 한국에 초대된 어머니를 따라 처음 한국에 왔다. 에바 씨와 엄마가 살던 도시 카바로프스크의 한국인 선교사를 통해 일이 주선되었는데 한국인 교회를 다니던 외할머니를 통해 연결되었다. 그렇게 해서 에바 씨는 반에서 유일한 외국인으로 경기도 의왕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저는 외국인이라기보다 외계인이었어요.”라고 그녀는 기억을 되살렸다. 하지만 6년 후에 러시아로 돌아가게 되면서 일종의 문화 충격을 경험한다. 그리고 다시 6년이 지나서 국가 장학금을 받고 한국의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때 또다시 문화 충격을 경험한다. 쌍방향 문화 충격 문화와 언어의 교차 경험은 러시아 대학에서 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하면서 동시에 외대에서 미디어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할 때 정점에 달했다. “한국에서 넉 달을 지내고 러시아로 가서 한 달을 지내곤 했어요. 러시아에 가면 모든 것이 항상 그대로였어요. 근데 한국에 돌아오면 늘 무언가가 변해 있었고요.”라고 그녀는 기억한다. “한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한동안 힘들었어요. 하지만 점차 적응을 하게 되었어요. 이 경험을 통해 제가 좀 덜 예민해지고 새로운 것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이게 된 거 같아요.” 2015년에 학사 학위를 받은 후 에바 씨는 이전에 같은 반 학생이었던 남자와 결혼해 그의 성을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한 건 편의 때문이었다. 그녀의 원래 성은 코노노바였고 사람들이 의도적이 아니어도 이상하고 별난 이름으로 불러댈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한국 이름이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 잠시 얘길 나누다 보면 그녀가 옆집에 사는 젊은 여자 같기 때문이다. 에바 씨는 인기 있는 어린이 텔레비전 프로그램 를 보며 자랐고, 남자 친구가 2년간 군복무를 하는 동안 변함없이 기다린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 친구가 서울 외곽의 남양주에서 복무했다고 하면서, “사실 별로 어렵지 않았어요. 전화도 할 수 있었고 한 달에 한두 번 그를 만날 수 있었어요.”라고 했다. 많은 한국 여자들이 남편에 대해 말할 때 정색을 하며 장난스럽게 말하듯 그녀도 “그렇게 자주 보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근데 지금 우리는 너무 자주 보는 거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워낙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부부지만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에바 씨는 종종 남편에게 나가서 운동을 하든 뭐라도 하라고 잔소리를 한다고 한다. 팬데믹이 아니라면 에바 씨는 아마도 국제 교류와 관계된 일을 하면서 좀 더 바쁘게 지낼 것이다. 현재 국제 행사가 거의 치러지지 않아서 그녀는 번역일을 좀 더 하고 있다. 통역은 수정하거나 실수를 고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스트레스라고 느낀다. “끝나고 나면 기분은 좋지만 왠지 공허하기도 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번역할 때는 마감을 지키고 완벽하게 만족할 수 없는 게 스트레스고요. 나중에 내가 한 작업을 보면서 ‘왜 이렇게 썼지?’라고 생각하기도 하죠. 하지만 적어도 눈으로 볼 수 있는 최종 결과물이 있어 좋아요.” 궁극적으로 에바 씨는 문학 번역을 하고 싶다. 현재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고, 언젠가 박민규 작가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비롯해 여러 작품을 번역하고 러시아 소설도 한국에 소개하기를 원한다. 이 분야에서 그런 작업을 할 수 있기 위해서 두 개의 언어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에바 씨는 한국어와 러시아 둘 다 편하게 사용하고 있고 쌍방향으로 통역과 번역을 한다. 에바 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제 한국에서 좀 더 오래 살았으니 아마도 한국어가 더 편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누구를 상대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요.”라고 말한다. 언어 유창성 통역과 번역이 자신에게 성취감을 준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에바 씨를 대중에게 알린 건 방송이었다. 사실 그녀가 언어에 그토록 열심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원래 갖고 있던 꿈이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자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처음 TV에 얼굴을 알린 건 언어 퀴즈쇼인 에서였다. 다른 외국인과 겨루어 일등을 차지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TV조선의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로 일했다. 제목과 달리 그녀는 서울 시내를 탐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처음에는 지역 음식을 소개하고 나중에는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는 식이었다. “문어를 잡거나 빵집에서 밀가루 포대를 나르거나 하는 아주 힘든 노동을 했어요. 벼를 심는 것 같은 한국적인 경험도 했구요.”라고 에바 씨는 그 시간을 떠올렸다.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일들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상어와 함께 다이빙하기였다. 한국은 크기에 비해 다양한 특색의 지역들이 있으며, “우리가 늑대를 무서워하는 것보다 늑대가 사람을 더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 외에도 그녀는 텔레비전에서는 누구나 좀 더 활달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침 방송 리포터로서 명랑 쾌활하고 에너지를 뿜어내야 함을 알게 된 거였다. “제가 생각보다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인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필요할 때는 좀 더 ‘연기’를 해야 했죠”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런 경험과 자신의 언어 능력 때문에 에바 씨는 단순히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외국인이 한국 텔레비전에서 인기를 얻는 현상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러시아에서는 텔레비전에 외국인이 많이 나오지 않아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려면 시청자들의 언어를 할 줄 아는 거 외에 다른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한국에서는 한국어를 할 줄 알면 기회가 주어져요. 이곳만의 특별한 점이고 물론 고맙게 생각할 일이죠.” 하지만 그녀는 가끔 너무 유창하지 않은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귀여운데 실수를 하거나 사투리를 쓰거나 발음이 좀 별나거나 하면 사람들은 더 즐거워하는 거 같아요.” 결국 방송은 엔터테인먼트이기 때문이다. 에바 씨는 “방송에서 계속 일하려면 노력을 해서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에바 씨는 한국 사람처럼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지만 시청자들은 그녀를 하나의 ‘캐릭터’로 생각한다. 즉 한국 사람처럼 말하는 외국인 캐릭터인 것이다. 이게 짐을 덜어주긴 한다. “사람들은 제가 아주 머리가 좋다고 생각해요. 근데 말을 잘하는 거랑 머리가 좋은 건 서로 다른 거죠. 저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언어를 잘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역사나 전통에 관해서 모르는 게 많아요. 제가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 있을 뿐이죠. 그래서 좀 더 공부를 해서 저에게 부족한 면을 메워 나가려고 해요.”라고 그녀는 다짐한다. 틈을 메꾸다 에바 씨는 여전히 프로그램 진행자를 꿈꾸지만 지금은 진입 장벽이 낮고 제약이 적으면서 훨씬 더 다양한 콘텐츠를 가능하게 하는 유튜브를 고려해 보고 있다. 세상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건 이전처럼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다. 에바 씨는 결혼 후 “그래, 이제 여기서 영원히 사는 거야”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 지금은 여기에서 사는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남편은 언젠가 러시아에서도 살아보고 싶어 해요. 아니면 그냥 제3의 나라에서 살 수도 있고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가 아는 외국인들은 단순히 사람들이나 음식, 문화를 소개하면서 칭송하거나 비교하는 것 이상을 제공할 수 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학생들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요. 혹은 사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으로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고요.”라고 그녀는 바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얘기했다. 감사하게도 그녀는 한국인이나 타국인 둘 다와 똑같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언어 능력이 있다. 하지만 자신이 아직 어려서 필요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지 못했다고 느낀다. 그녀가 생각하는 또 다른 목표는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는 일이다. 올해는 두 나라가 외교 관계를 맺게 된 지 30년이 된 해다. 여러 가지 행사가 계획되었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모두 취소되었다. 지금 에바 씨는 관련된 인스타그램 데이터를 번역하거나 콜센터에서 통역 봉사를 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택시 잡는 법에서부터 공항 화장실에 갇힌 사람을 진정시키는 일까지 온갖 일을 하고 있다. 스물여덟인 그녀는 꿈을 꿀 수 있는 충분한 재능과 시간이 있다. 그것도 두 개의 언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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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20 WINTER 195

낮은 곳으로 임하는 예술 설치 작가 최정화(Choi Jeong-hwa 崔正化)는 자신이 작가로 불리는 것을 반갑게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이 ‘디자이너’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그는 미술관보다 전통 시장이나 벼룩시장이 더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9월 마지막 주, 추석 연휴를 앞두고 남쪽 지방 도시의 한 청과시장에 지름 2~8m의 거대한 과일 풍선들이 등장했다. 커다란 석류, 복숭아, 딸기 모양의 이 풍선들은 의 일환으로 선보인 최정화의 설치 작품이었다. 최정화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소재를 높이 쌓거나 커다랗게 확대해 공공장소에 내놓는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에서는 시민들이 기증한 식기 7,000여 개를 모아 높이 9m의 작품 를 만들었다. 올해는 대구미술관에 녹색과 빨간 플라스틱 소쿠리 5,376개를 쌓은 (2013년)를 전시하기도 했다. 이런 방법들은 앤디 워홀의 나 클래스 올덴버그의 거대한 조각을 떠올리게 한다. 다만 그 소재가 플라스틱 소쿠리나 냄비 등 한국인에게 익숙하다는 점이 다르다. 화려한 색과 친근한 소재는 누구나 한번쯤 눈길을 주게 만든다. 이 때문에 최정화라는 이름은 몰라도 그의 작품을 스치듯 본 사람은 적지 않다. ‘한국적 팝’으로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그를 서울 종로구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최정화 하면 ‘쌓기’가 떠오릅니다. 그 시작이 언제인가요? 1990년대 초반 개인전 를 열면서 초록색 소쿠리로 쌓은 탑 여러 개를 내놓았어요.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하려는 시도였어요. ‘플라스틱 소쿠리를 미술관 전시장에 가져다 놓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장난기 어린 생각으로 시도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어요. 왜 하필이면 플라스틱 소쿠리였을까요? 저는 원래는 그림을 그렸고, 대회에서 상도 탔었죠. 그런데 회의를 느끼고 있었어요. 그래서 전시 제안이 와도 거절하다가 3년 만에 응하려는 순간, 우리 집에 있는 빨간 소쿠리가 눈에 들어왔어요. 시장에 가도 쌓여 있고, 어느 집에나 소쿠리 하나쯤은 있잖아요. 누구나 있는 재료를 써보자는 생각에서 시작된 거죠. 예술적 재주를 부리지 않을 방법을 찾다가 생활 재료를 사용하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택하는 방법이나 주제는 대부분 바깥에서 놀고, 바깥에서 설치하는 거예요. 2015년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연 개인전 제목은 이었죠. 박물관 주변 폐가에서 가구를 모아 밥상 탑을 만들기도 했고요. 예술로만, 미술로만 놀지 않기를 시도하는 거죠. 자칫 잘못하면 ‘그들만의 리그’가 되니까요. 제 표현으로는 ‘삶이 예술이 되는 놀이터’를 만들려고 해요. 그러면 누구나 자신의 기억이나 추억을 떠올리며 즐거워할 수 있죠. 근본적으로 예술은 모두의 것인데 특정한 부류의 1%만 향유한다는 데 불만이 있었어요. ‘불만’은 평소 잘 쓰지 않는 표현인데요. 사실 지금도 저에겐 현대 미술이 어려워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아요. 하물며 일반 관람객들은 어떻겠어요. 굉장히 솔직한 말씀이시네요. 사실인걸요. 얼마 전 P21 갤러리에서 열렸던 개인전에서도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이 전시는 최정화의 예술 상품전, 부적전”이라고요. 예술가가 만드는 것이 결국은 상품 아니냐는 이야기에요. 저는 상품을 만들었고, 테스트를 해보았더니 관객의 호응이 있었던 거죠.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인가요? 결론적으로 보면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전문가를 겨냥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처음 전시할 때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보시더니 “소쿠리 예쁘네. 나도 하나 줘” 하고 말을 걸었어요. 제 나름대로의 소통 방법이 성공한 것 아닌가 생각해요. 영화나 무대 미술감독, 인테리어 디자이너로도 활발하게 활동하셨는데요. 패션숍이나 클럽, 바 인테리어를 했어요. 그러다 현대무용가 안은미(安恩美)를 만나 무대 미술을 하고, 시인 겸 소설가 장정일(蔣正一)의 작품을 영화화한 <301 302>(1995년)로 미술감독을 시작했어요. 이 영화는 거식증과 폭식증에 걸린 두 여성이 한 아파트에 이웃으로 살면서 생기는 일을 그렸죠. 처음엔 미술만 맡으려고 하다가 제가 총괄 감독을 하겠다고 제안해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일을 했어요. 사실 그 이전에 제가 1980년대 후반 인테리어 회사에서 일을 했고, 직접 회사를 만들기도 했죠. 그때 제가 했던 것은 ‘눈이 부시게 하찮은’ 것들이에요. 일반적인 패션숍에서는 쓰지 않는 재료를 쓰거나, 철거된 것들을 그대로 놔뒀죠. ‘치밀하게 엉성한’ 것이기도 하구요. 그때의 재료, 공간 경험이 지금을 만들었어요. 시리즈를 ‘부적’에 비유하는 것은 기복적인 의미인가요? 알케미가 말 그대로 연금술이니까요. 제가 만든 플라스틱 기둥이 그 이상의 것이 된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실제로 황금을 만들 수는 없지만, 물질이 정신이 되는 과정이에요. 시장 상인들이 물건을 쌓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감탄이 나오죠.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엄청난 내공이 느껴져요. 무수히 쌓인 플라스틱에서 숭고미를 느끼는 거죠. 기복을 왜 중요하게 생각하나요? 글쎄요. 어릴 때 못 살아서 그런 걸까요? 찢어지게 가난했고, 국민학교 6년 동안 여덟 번이나 전학을 다니는 바람에 한곳에 정착하지 못했죠. 그래서 유년 시절의 기억이 없어요. 완전한 암흑, 공백이에요. 기억이 없다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시절을 이용했다고 생각해요. 잦은 이사로 같이 놀 친구가 없다 보니, 혼자 쓰레기나 물건을 줍는 습관이 생겼어요. 대학생이 되어서는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에서 어마어마한 감동을 받곤 했죠. 고물상, 공사 현장이 있었거든요. 언젠가는 황금 덩어리도 주웠어요. 그러나 학교에 가면 먹먹하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지 저를 잘 아는 작가들은 제 작품이 슬프다고 해요. “‘모든 사람을 위한다’는 건 위험한 생각이지만, 저는 길바닥에서 예술을 했어요. 예술이 저 높은 곳에 있을 때 “내려와라, 놀자”, “예술은 당신 옆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죠.” 작품에 어머니의 영향이 있어 보여요. 제가 미대에 가는 걸 아버지가 반대하셨어요. 그림을 못 그리게 붓도 분질러서 경기공전(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디자인과를 갔죠. 그런데 어머니께서 몰래 미대 입시를 도와주셨어요. 화실비가 없으니 대신 화실에 김치를 갖다주기도 했고요. 홍익대 미대에 간 것은 다 어머니 덕분이죠. 어머니는 제게 창조주이자 여신이죠. 실제로 정말 재주가 많으시고요. 현재 진행 중인 경남도립미술관 개인전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청과물 시장에서 쓰던 50~70년된 리어카가 미술관으로 들어와 작품이 됩니다. 시장의 알록달록한 파라솔은 샹들리에로 바뀌고요. 바닷가에 버려진 배도 등장하죠. 더 중요한 것은 지역 재생 활동하는 분들을 작가로 초청해 그들의 프로젝트를 소개한다는 거예요. 앞으로의 활동은 어떻게 될까요? ‘모든 사람을 위한다’는 건 위험한 생각이지만, 저는 길바닥에서 예술을 했어요. 예술이 저 높은 곳에 있을 때 “내려와라, 놀자”, “예술은 당신 옆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죠. 지금은 ‘재생’에 관심이 많아요. 이제는 다시 근본, 근원에 대한 회귀를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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