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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마음을 안아주는 편의점

People 2022 SPRING 2035

마음을 안아주는 편의점 유동인구가 많은 도시의 여느 편의점과 달리 훤히 트인 논밭을 끼고 들어선 고층 아파트 동네 앞 편의점. 7년간 이곳을 지키는 마음씨 따뜻한 주인은 자신의 가게가 이웃 사람들의 포근한 사랑방이자, 다친 마음을 위로하는 든든한 쉼터가 되기를 바란다. 경기도 안성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이정심 씨의 일과 중 중요한 부분이 하루 두 번, 주문한 제품이 잘 배송되었는지 확인하고 진열하는 일이다. 인근에 경쟁 편의점이 생기거나 코로나 19의 타격으로 고객들의 발길이 줄어도 그는 항상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자신의 가게가 동네 주민들의 쉼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아직 들판에 봄기운이 돌기 전, 경기도안성시청을 지나 왕복 이차선 도로로 들어서니 양옆으로 펼쳐 진 논에 밑동만 남은 벼 포기들이 줄지어 있다. 저수지를 지나 토현리 마을로 들어섰다. 들판에 비닐하우스, 농기계수리소, 축사, 작은 공장들이 듬성듬성 눈에 띈다. 여기부터 목적지까지는 2Km, 하지만 약속시간은 50분이나 남았다. 날씨가 쌀쌀하니 뜨거운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가도 가도 카페는커녕 구멍가게도 보이지 않는다. 민가도 없이 논만 펼쳐진 벌판 저 멀리 아파트 몇 동이 우뚝 서있다. 저기다! 속도를 높인다. 도시에서는 익숙하지만 이곳에선 낯설어 보이는 편의점이 거기 있었다. 반갑다.   이정심 씨는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단순한 계약직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정직원으로 대우한다. 덕분에 직원들은 주인 의식을 가지고 꼼꼼하게 매장을 관리하고, 친절하게 손님을 응대한다. 한결 같은 마음 ‘딸랑’– 출입문을 밀자 종소리가 울린다. “어서 오세요!” 종소리보다 맑은 목소리가 나를 반긴다. 조금은 삭막해 보였던 겨울날 들판에 서 있다가 갑자기 고급호텔에 들어선 듯하다. 귤빛 조명이 은은하게 공간을 채우고 눈앞엔 정갈하게 정돈된 와인진열대가 있다. 따끈한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고 커다란 통유리 창을 마주한 시식대에 앉는다. 한적한 논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커피 때문일까? 봄을 기다리는 들판은 더 이상 휑하거나 추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난 해의 고된 노고를 위로하듯 평온하다. 이곳은 ‘이마트24 R안성유안점’이다. 시골동네 편의점이라면 먼지 앉은 상품이 듬성듬성 놓여 있는 초라한 진열대가 떠오르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곳은 뭔가 많이 다르다. 갖가지 일상에 필요한 상품들이 빠짐없이 빼곡하게 차있다. 과자, 즉석식품, 음료, 와인은 물론, 푸짐한 반찬을 갖춘 도시락뿐 아니라 신선식품을 비롯해 한 끼 밥상을 차리는데 부족함 없는 찬거리까지 풍성하다. 거기다 귀이개, 손톱깎이와 같은 자잘한 생활용품에 반려동물의 간식까지, 대형마트의 상품들을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동네 주민들이 시내 마트까지 차를 타고 물건을 사러 나갈 필요가 전혀 없어 보인다. “저는 무엇이든 꽉꽉 채우는 성격이에요.”이 곳의 경영주 이정심(李貞心) 씨는 말한다. “이웃들이 차를 몰고 멀리 나가지 않아도 집 가까이에서 편하고 빠르게 일상 용품을 살 수 있기를 바라요. 그래서 가능한 한 본사에서 취급하는 상품들을 종류 별로 빠짐없이 발주해요. 작은 편의점이지만 동네 이웃들에게 확실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이윤을 쫓기보다는 우선 편의를 제공하고 싶어요.” 1969년 경남 남해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정심 씨는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언니가 살던 수원으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우연하게도 첫 직장은 체인점을 거느린 중소규모 마트의 캐셔였다. 22살 이른 나이에 결혼해 1남 2녀를 둔 정심 씨는 2002년 가계에 도움이 되고자 교보생명에 보험설계사로 입사했다. 17년 공을 들여 영업소장까지 했고, 전국 1300여 영업소 가운데 100위 안에 들어 상도 받았다. “애들 키우며 주부로 살 때는 몰랐는데, 일을 하다 보니 저에게 고객을 대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보험 일을 처음 시작할 땐 두려웠지만, 차츰 남들만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업소장을 할 때도 뒤처지지 않았어요. 무조건 진실하고 한결같이 사람을 대했죠. 늘 고객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어요. 그게 편의점을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보험 고객을 찾아다니던 정심 씨는 이제 스스로 찾아오는 고객을 맞이한다. 그는 지금도 예전의 마음가짐 그대로 껌 한 통을 사러 들어온 손님에게도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넨다. 말 한마디에 정성을 담고, 사소한 것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는 마음 씀씀이로 이웃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진심과 배려 2016년 홈플러스가 운영하던 할인마트 겸 편의점 체인 ‘365플러스’를 인수한 것이 시작이었다. 오랜 보험업무로 몸과 마음이 방전됐을 즈음이었다. 지금의 절반 크기도 되지 않았던 매장의 원래 주인은 보험 고객 중 한 명이었는데, 정심 씨는 신기하게 처음부터 이 곳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운영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정심 씨가 인수하자 이전보다 매출이 오르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고된 나날이었지만 고객들을 만나면 힘이 생겼다. 그 기운이 삶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정심 씨의 매장이 활기를 띠어서인지 브랜드 이미지가 높은 편의점이 인근에 들어선 것이다. 고객이 드나들 때마다 울리던 종소리 간격이 갈수록 뜸해졌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좌절하지 않고 열과 성을 다했다. 그의 진심이 통했는지 멀어졌던 이웃들의 발길이 다시 정심 씨의 마트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새로 연 편의점이 브랜드 인지도가 높고, 물품도 다르니까 제가 고객에게 드릴 수 있는 것들의 한계가 있었죠. 저는 그저 하던 대로 열심히 하며 고객을 기다렸어요. 6개월쯤 지나니 대부분 다시 찾아오시더라고요.” 2021년, 홈플러스가 편의점 사업을 접자 정심 씨는 브랜드를 바꿔 이마트24 매장을 열었다. 마트와 나란히 있던 식당 자리까지 인수해 공간을 두 배 이상 넓혔다. 임대료도 그만큼 늘어났다. 농촌이라 고객은 한정되어 있다. 매출만 생각한다면 굳이 공간을 늘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정심 씨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했다. “매장이 작아서 아쉬웠던 게 있었어요. 손님들이 도시락을 사서는, 실내에 자리가 없으니 바깥에서 먹게 되는 거예요. 그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쾌적한, 겨울에는 따뜻하고 아늑한 실내에 앉아서 드시게 하고 싶었죠. 매장이 두 배가 됐다고 매출이 두 배가 되는 게 아니었지만, 그게 제 꿈이었어요.” 아늑한 조명 아래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실내에 대형 통유리로 시야가 확 트인 시식대는 휴양지의 전망 좋은 카페와 다르지 않다. 커피전문점에서나 볼 수 있는 커피머신이 눈길을 끈다. 컵을 올리고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커피가 내려지는 일반 편의점 기계와는 많이 다르다. “제가 만든 라떼 한 잔 드릴까요?” 정심 씨가 커피 머신 앞에 선다.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린다. 순간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김이 퍼진다. 밀크 스티밍이다. 하트가 그려진 찰진 라떼의 거품이 입술을 감싼다. 정심 씨는 1급 바리스타 자격증도 땄다. “스티밍을 하고 안 하고는 거품의 탄력이 달라요. 같은 가격이라도 좀 더 좋은 커피를 손님에게 서비스하고 싶어 열심히 배웠죠.” 정심 씨가 간절히 원하던 테이블을 마련한 뒤, 손님들은 이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며 음식을 먹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최근엔 코로나 19 때문에 취식이 제한되어 그를 안타깝게 한다. 카페 같은 편의점 이쯤 되면 정심 씨의 매장을 단순히 편의점이라 부를 수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작 그가 아끼는 보물은 따로 있다. 매장을 지키는 사람이다. 편의점 알바 구직 앱에 들어가면 주당 15시간 이내의 단기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주휴수당과 같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자영업자들의 고육지책이다. 하지만 정심 씨는 다른 길을 택했다. 비록 자그마한 편의점이지만 일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소중한 일터라 생각할 수 있도록 정직원 대우를 한다. 주휴수당, 4대 보험은 물론 명절마다 약소하지만 상여금을 주고, 근속에 따른 수당도 있다. 일터에 대한 자부심을 지닌 직원들은 경영주처럼 매장을 관리한다. 언제 오더라도 알바생이 아닌 경영주가 직접 고객을 맞이하는 셈이다.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니, 찾아오는 손님도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매장을 나선다. 매출이 오르는 비결이다. 때론 고객도 기꺼이 가게 일을 돕는다. 한 번은 편의점을 자주 찾던 손님의 얼굴이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기에 정심 씨가 “사는 게 힘드시죠?” 하고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손님이 자신의 어려움을 한없이 풀어놨다. 보증 때문에 어려움에 처했고, 이로 인해 가족들과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정심 씨는 자기 일처럼 공감하고 위로했다. 그 뒤로 손님은 물류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찾아와 말없이 일을 돕고 간다. 밭농사를 짓는 이웃은 채소를, 과수원을 하는 손님은 배를 한 소쿠리 들고 찾아온다. 이런 물건들은 직원들에게 나누어진다. 넉넉한 시골 인심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래서 정심 씨의 편의점은 동네 사랑방이자 마을 정자와 같은 곳이다. 몸이 불편한 남편을 시중하는 할머니, 아픈 아이를 돌보는 젊은 엄마, 거름을 내다가 온 농부, 기름때 절은 작업복의 이주노동자. ‘딸랑’하는 종소리와 함께 이들이 들어설 때, 정심 씨는 언니이자 누님이고, 딸이자 벗이 된다. 때론 아이들의 고모이자 큰엄마가 되어 한 가족으로 어우러진다. 돌아오는 길, 정심 씨의 마음이 담긴 라떼가 오래도록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소리와 시각적인 것을 실험하다

People 2022 SPRING 2042

소리와 시각적인 것을 실험하다 이 젊은 프랑스 남자가 하고 있는 일, 그의 예술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는 오랫동안 “소리와 시각 예술과 관련된 모든 것을 통합시켜” “이질적인 요소가 만나게 하는 일” 혹은 “두 세계를 함께 채집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한국을 자신의 스튜디오로 선택했다. 한국에 오랫동안 살고 있는 대부분의 외국인 체류자와 달리 해미 클레멘세비츠 씨의 여정은 어린 나이에 시작되었다.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자라면서 그는 예술대학 교수로 아시아에서 종종 전시회를 연 아버지를 통해 한국과 주변 국가에 대해 들었다. 마르세이유-지중해 미술학교(ESADM)에 입학할 즈음에 클레멘세비츠 씨는 아시아와 동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학교에서 한국 학생들과 친구가 되었고 그중 한 친구의 초대로 2009년에 독학한 한국어로 무장해 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그 첫 방문이 제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겼어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죠.”라고 그는 말한다. “이곳에 저랑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들이 있고 동시에 제게 익숙한 것들과 완전히 다름을 느꼈어요. 그리고 어쩐지 이 다른 것들이 제게 아주 잘 맞았어요.” 이후 몇 년 간 클레멘세비츠 씨는 방학 동안 한국에서 시간을 보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는 이 여행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한국어를 공부하고 문화를 흡수하는 동안 그는 서울의 실험적 예술 현장을 경험했다. 또한 한국인들이 자신의 예술 아이디어에 아주 수용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어 더욱 한국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의 대학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 중 하나가 외국에서의 인턴 경험이었고 클레멘세비츠 씨는 자연스럽게 다시 서울에 눈길을 돌렸다. 아버지의 한국인 친구 한 분의 도움으로 그는 2011년에 예술 컨설팅 회사에서 4개월 동안 일할 수 있었다. 그것이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체류한 경험이 되었고 한국을 자신의 새로운 고향으로 만들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졸업 후 그는 “한국에 가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2013년 그는 영구적으로 머물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소리 클레멘세비츠 씨는 종종 사운드 예술가, 혹은 인터미디어 예술가라고 불리지만 그 스스로는 자신을 단순히 “소리에 관심이 있는 예술가”라고 소개한다. 한국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그는 두 개의 영역을 오간다. 실험적 음악과 소리를 조합한 시각 예술이 그것이다. “소리는 제게 가장 중심적인 것입니다. 제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소리와 시각 예술 두 영역이 만나도록 하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 결과는 다양하게 표현된다. 한 주 동안 그는 음악 공연을 하고 그 다음 주에는 가장 최근에 만든 “소리 조각 작품” 또는 설치 작업을 선보이는 식이다. 이를 위해 작곡을 하고 안무가와 협업해 공연을 하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작품 중 어떤 것들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스피커 국기, 망가진 국기(Speaker Flag, Broken Flag)” 같이 많은 작품이 고장난 스피커를 보여주는데 이 작품은 태극기 중앙에 스피커가 있다. “통역을 위하여(For Interpreters)”는 수화를 사용하는 비디오인데 시청자는 소리를 스스로 상상해야 한다. 이 작품은 “소리 없이 소리를 표현한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지난 몇 년 간 클레멘세비츠 씨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백남준 아트센터, 국립한글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과 같은 주요 장소에서 전시를 하고 공연을 했다. 하지만 그는 처음 활동을 시작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홍대 근처의 작지만 실험적인 공간에서 작업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한국에서의 첫 프로젝트 중 하나인 “테이크아웃 드로잉”은 국제적 정취가 물씬한 서울 이태원 지역에 있는 데이크아웃 드로잉 카페에서 2014년에 작업했다. 두 달 동안 매일 그는 그곳에서 즉흥 솔로 콘서트나 초대 손님이 있는 공연을 하거나 더 많이는 그저 리허설을 했다. 확실한 틀이 없는 공연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건 제대로 된 콘서트와 리허설 사이의 경계에서 작업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죠.”라고 그는 말한다.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2013년 이후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는 Rémi Klemensiewiczs는 시각과 청각의 관계, 존재와 해석의 차이를 작품으로 옮긴다. 주로 소리를 소재로 하여 전시, 라이브 퍼포먼스, 무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탐구를 이어가고 있다. 수수께끼 클레멘세비츠 씨는 역설과 애매모호함을 즐기는 듯한데 이는 그의 작품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한국어와 한국문화의 특성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한국어의 존칭법은 보통 개인 간에 적절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클레멘세비츠 씨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느끼는데, 특히 학생과 선생의 관계에서 그렇다. “학생과 선생님이 함께 있을 때 학생이 언어뿐 아니라 몸짓이나 다른 미묘한 것들에서 예의를 갖추는 걸 볼 수 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관계의 룰이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는 거의 가족 같은 느낌을 받아요. 프랑스에서 제가 느끼는 것과 정반대죠. 프랑스에서는 선생님의 이름을 부르고 친구처럼 얘기 나누지만 선생님과 친하다고 느낀 적은 드물어요.” 그는 자신의 고국과 한국의 외적인 면모에서도 역설적인 것을 발견한다. 파리와 프랑스의 여러 지역들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지만 클레멘세비츠 씨는 전통과 영성이 사라졌다고 느낀다. 한국은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건물들이 좀 뒤죽박죽처럼 보였어요. 근데 시각적인 혼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정신에는 질서가 있다고 느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두 나라를 비교하자면 프랑스는 외부에는 질서가 있지만 내부엔 혼란이 있어요. 한국은 표면적으로는 혼란이 있지만 내면에는 질서가 있고, 전통과 과거와도 연결되어 있어요.” 그 같은 발견이 그를 설득하고 자극해서 한국에 눌러 앉게 만들었다. 하지만 비자 때문에 팬데믹 동안에 많은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내야 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시골에 머물렀고 최근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콘크리트와 자연의 모습이 얼마나 미묘하게 겹쳐져 있는지 새롭게 깨달았다. 지하철을 따면 주변의 산자락까지 이동할 수 있고 한강변 자전거길을 따라가면 거대한 아파트들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모습을 보인다. “이런 건 완전 짱이죠.”라고 말하며 그는 웃었다. 2019년 11월 19일 전라남도 순천의 예술공간 돈키호테(Artspace Donquixote)에서 Rémi Klemensiewicz가 중 ‘Handmixer’의 한 장면을 공연하고 있다. 생계 팬데믹 기간 동안 많은 시간을 프랑스 시골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프랑스 유튜브 사용자들을 위해 온라인 한국어 수업을 만들었다. 한 친구의 제안으로 기분전환으로 만든 것이 진지한 일로 변했다. 결국 한글을 자세히 소개하는 것을 포함해서 수업을 계획하고 작성하면서 몇 달을 보냈다. 수업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소리 작업을 하는 예술가로서 클레멘세비츠 씨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이 돈벌이가 되지 못함을 깨달았다. 한국어과 프랑스어를 오가는 언어 수업 덕분에 다행히 제대로 된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조언들을 무시할 수 있었다.가르치는 일이 균형을 잡는 데에도 좋지만 클레멘세비츠 씨는 진정 언어를 갖고 실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게다가 그는 한글의 시각적인 면도 높게 평가하고 자신의 작업에 녹여내기도 했다. 2018년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전시한 “소리 말 시리즈”는 스피커와 케이블로 만들어진 한글 단어를 선보인다. 전시회의 일부로 초대 뮤지션들과 함께 케이지 공간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피아노에서 네 음(G, A, G, E)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무음으로 해서 즉흥적으로 연주했다. 예술 수업 강의는 그에게 안정적 수입을 제공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중학생들과 예술 워크숍을 진행하는 걸 시작으로 이제 서울 성수동 헬로우뮤지엄에서 정기적으로 아이들에게 소리와 시각 자료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PATI)에서 “소리 디자인” 강의를 하게 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로 한국현대무용단과 협업도 하게 되었다. 2017년 10월 12월부터 28일까지 서울 소재 복합문화공간 탈영역우정국에서 진행된 전시 에서 Rémi Klemensiewic가 선보인 작품 ‘Interpreted Masks’이다. 종이마스크와 스피커, 케이블과 소리로 구성됐다. 과정 클레멘세비츠 씨의 작업은 규정하기 어렵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점이 있다. 그가 보고 듣는 것 모두가 그의 예술에 스며든다는 점이다. 이런 배경을 알면 계속해서 변하는 한국에 대한 그의 거의 본능적인 애착이 좀 더 잘 이해가 된다. 그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전형적으로 밀월기간이었다. “바닥에 자면서 행복했어요. 매일 자장면을 먹을 수 있는 게 행복했어요. 매일 비가 내려도 행복했어요.”라고 그는 회상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작업 리듬’이라고 부르는 것, 즉 일과 사적인 삶을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 - 예를 들어 밤에 전화를 해서 다음날까지 10페이지 번역을 요청하는 것 같은 - 조금씩 방해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일과 쉼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고 인정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모든 것과 관련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시회나 공연을 하는 동안에는 그 일이 너무 좋아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국에서 9년을 보낸 클레멘세비츠 씨의 삶은 실험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과 닮았는데, 그에게 영향을 준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강조한 것처럼 과정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제 안무가 노경애 씨와 프랑스의 모교와 함께 하는 교환 프로젝트에 그가 푹 빠져 있는 게 놀랍지 않다. 이 프로젝트에서 그는 청각장애인 댄서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고 공연하기로 되어 있다. 32살인 그는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전시회를 하자고 아무도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라고 자문한다. 제대로 된 직장을 얻으라는 조언을 기억하지만 그는 자신이 사무실에서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리스크가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서사를 확장시키는 프로덕션 디자인

People 2022 SPRING 1840

서사를 확장시키는 프로덕션 디자인 지난해 세계적 화제를 모았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은 생존 경쟁의 잔혹한 처절함이 동화 같은 비주얼을 배경으로 부각되어 시선을 끌었다. 이 독특한 공간 디자인을 만들어 낸 채경선(Chae Kyoung-sun 蔡炅宣) 미술 감독을 그의 다음 작품 촬영지인 경기도 고양시 아쿠아특수촬영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올 1월 의 극 중 1번 참가자, 일명 ‘깐부’를 연기한 배우 오영수(O Yeong-su 吳永洙)가 제79회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 시리즈는 작년 9월 개봉된 후 총 1억 4천 2백만 가구가 시청하며 연 46일 동안 넷플릭스 시청률 1위를 차지했고, 미국배우조합상(SAG)과 미국제작자조합상(PGA)의 주요 부문에도 후보로 올랐다. 이 드라마가 세계적 인기를 모은 비결에 대해 여러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초현실적 느낌의 스펙터클한 프로덕션 디자인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공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게 관건인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이 작품 속 공간은 현실과 판타지가 혼재된 구성이 강렬한 색조로 구현되어 있다. 그것이 캐릭터나 서사와 이질감 없이 조화를 이루며 극적 효과를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다. 이 시리즈의 채경선 미술 감독은 상명대 연극영화과에서 무대 미술을 전공한 뒤 2010년 다섯 커플의 사랑과 이별을 그린 김종관(Kim Jong-kwan 金宗寬) 감독의 영화 로 데뷔했다. 다음 해 를 시작으로 (2014)와 (2017)에서 황동혁(Hwang Dong-hyuk 黄東赫) 감독과 미술 감독으로 협업을 계속했고, 은 그와의 첫 드라마 시리즈 작품이었다. 그 밖에 (장준환(Jang Joon-hwan 張駿桓) 감독, 2013), (이원석(Lee Won-suk 李元錫) 감독, 2014), (이상근(Lee Sang-geun 李相槿) 감독, 2019) 등 여러 영화에 미술 감독으로 참여했다. 이처럼 소재도, 장르도, 호흡을 맞춘 감독도 제각각이지만 그의 작업이 이야기에 적합한 공간을 만들어 내 서사를 확장시켰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채경선(Chae Kyoung-sun 蔡炅宣) 미술 감독이 차기작인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의 세트가 지어지고 있는 경기도 고양시 아쿠아특수촬영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의 미술 감독으로 시선을 끌었던 그는 넉넉한 재정 지원과 감독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유재량으로 작업할 수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은 사실적인 공간을 구현해 왔던 황동혁 감독의 전작들과 큰 차이가 있다. 당신에게도 매우 도전적인 작업이었을 것 같다. 현실적인 공간이 아니어서 프로덕션 디자인에 대한 관객의 호불호가 크게 갈릴 거라고 예상했다. 부정적인 의견도 많을 듯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 반응을 보여 줬다. 미술 감독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세트 제작비를 넉넉하게 지원받은 덕분에 머릿속에서 구상했던 그림들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을 만난 것 자체가 큰 행운이었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 시나리오를 받기 전, 황 감독으로부터 큰 줄기에 대해 미리 들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놀았던 놀이들을 활용해 생존 게임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연출하려고 하는데, 새로운 비주얼을 시도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이처럼 내용을 대강 알고 있었지만, 막상 시나리오를 읽어 보니 막막했다. 이런저런 구상을 하다가 이전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디자인을 해야겠다는 승부욕이 생겨났다. 중년 세대들이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을 배경으로 잔혹 동화 한 편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다. 황 감독과 동의한 프로덕션 디자인의 전체 콘셉트는 무엇이었나?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세상을 너무 어둡게 그리지 말자. 둘째, 게임이 진행될 때마다 각 게임의 배경이 되는 공간에 고유한 성격을 부여하자. 이건 게임 참가자들이 각 공간에서 어떤 게임이 펼쳐질지 몰라 느끼는 혼란과 공포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매우 중요했다. 또한 시청자들도 다음 번에는 어떤 장소에서 어떤 게임이 진행되는지 궁금해하길 바랐다. 마지막으로 색깔을 과감하게 쓰자고 했다. 한국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에 비하면 색감 활용이 보수적이다. 우리는 그런 제한에서 벗어나 컬러를 과감하게 쓰고 싶었다. 하기는 최근 한국 영화도 SF 같은 새로운 장르를 다루면서 색감을 활용하는 폭이 전보다 넓어지고 있는 추세이기는 하다. 컬러를 선택한 기준은 무엇이었나? 처음에는 주요 컬러로 민트와 핑크 두 가지를 고려했다. 이 두 가지는 1970~80년대를 상징하는 레트로 컬러이다. 이 의견에 대해 조상경(Cho Sang-kyung 趙常景) 의상 감독이 “게임 참가자들을 감시하는 무리들을 과감하게 핑크로 설정하자”고 말했다. 게임 참가자들이 입는 체육복은 채도를 높여서 짙은 녹색으로 가기로 했다. 이 시리즈에서는 핑크색이 억압과 폭력을, 초록은 핍박과 루저를 상징한다. 그래서 게임 참가자들이 핑크빛 천장과 벽으로 둘러싸인 구조물 안을 이동하도록 설정하고, 감시자들이 숙소로 돌아가는 공간은 초록색으로 표현했다. 색을 통해 이야기의 세계관과 규칙을 정한 것이다. 에서 참가자들이 미로 같은 계단을 거쳐 숙소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잔인한 생존 경쟁과 대비되는 파스텔 컬러의 동화적인 비주얼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상징한다. 이 프로덕션 디자인은 네덜란드의 판화가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의 작품들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넷플릭스 첫 번째 게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공간은 어린 시절 놀던 학교 운동장을 모티브로 설계했다고 들었다. 이 게임의 콘셉트는 ‘진짜와 가짜’다. 첫 게임이 벌어지는 공간의 푸른 하늘과 영희 인형 뒤편의 벽은 가짜지만, 게임을 통과하지 못하면 진짜로 죽는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야기 속 게임 참가자들도, 시청자들도 혼돈을 일으킬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다. 진행 요원들이 게임 참가자를 감시하는 설정은 영화 (1998)에서 영향을 받았다. 영희 인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특수 분장팀 제페토(Geppetto)가 인형을 제작했다. 높이가 10m에 달해 상반신과 하반신을 따로 분리해 옮겼다. 황 감독은 원래 영희 인형을 10개나 만들어 줄 것을 미술팀에 주문했지만 그렇게까지 작업할 예산이 없었다. 또한 시나리오에선 영희 인형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등장하는 설정이었는데 도중에 바뀌었다. 드라마에서 첫 게임이 벌어지는 운동장은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모티브를 얻어,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혼돈을 일으키는 공간으로 제시되었다.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10m 높이의 영희 인형은 특수 분장팀 제페토(Geppetto)가 제작했다. ⓒ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초록과 핑크색은 각각 핍박과 루저, 억압과 폭력을 상징한다. ⓒ 넷플릭스 구슬치기 게임이 벌어지는 골목길 풍경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들었다. 골목길은 가장 많이 공들인 공간 중 하나다. 이곳 또한 진짜와 가짜가 공존한다. 황 감독이 이 장면에서 주문한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석양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신이 어린 시절, 저녁 내내 골목에서 뛰어놀다가 어머니가 이름을 불러 달려가면 집에서 밥 냄새가 났던 기억을 들려주며 ‘밥 냄새까지 느껴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오일남 할아버지의 집을 제외한 나머지 집들은 대문만 있는 것으로 설계했다. 문은 많지만 문 안으로 들어가면 ‘네 집이 아니니 들어갈 수 없다’는 상징성을 공간에 부여하고 싶었다. 대문은 문패, 연탄재, 화분 같은 여러 소품을 통해 진짜처럼 보여주되 패턴화해 표현했다. 즉, 구슬치기에서 지는 사람 쪽에 있는 공간에는 연탄재를 두었고, 산 사람 쪽에는 화분을 배치했다. 이전의 과거 얘기도 해 보자. 데뷔 이후 여러 명의 감독들과 다양한 성격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프로덕션 디자인을 통해 서사에 정서를 불어넣는다는 공통점이 보인다. 매 작품마다 각기 다른 접근을 해 왔다. 기본적으로 영화 미술은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와 캐릭터를 더 풍부하게 표현하도록 하는 영역이다. 미술이 혼자서 튀면 안 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시나리오를 감독보다도 더 치밀하게, 잘 분석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한다. 은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실제 역사를 재구성한 이야기인 만큼 고증이 관건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역사를 다룬 사극 중에서 고증을 가장 철저하게 한 작품으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에 사활을 걸고 작업했다. 눈과 추위, 그리고 적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성을 처절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보다 먼저 제작된 이원석 감독의 영화 도 사극이었는데. 이 영화에 참여했던 경험이 작업을 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나? 왕실의 옷을 짓는 상의원이 이야기의 주요 무대라서 이 공간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풀어갈까, 공간을 통해 인물을 어떻게 드러낼까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흥행이 저조해서 아쉽다. 황동혁(Hwang Dong-hyuk 黄東赫) 감독의 (2017)은 1636년 청나라의 침입으로 남한산성에 피신한 임금과 신하들이 겪은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채경선 미술 감독은 철저한 고증을 통해 눈과 추위, 적군에게 포위된 당시 상황을 실감 나게 전달했다. ⓒ CJ ENM 의 무대인 청각장애인 학교는 어두운 사건이 벌어지고 드러나는 곳인데, 이 공간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저예산 영화라 시도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새로 지은 세트는 교장실과 법원 두 개였다. 이 영화에서는 안개가 중요해서 소품을 비롯해 복도를 포함한 주요 공간을 회색 톤으로 설정했다. 이야기 전반에 걸쳐 색감을 드러내는 것보다 누르는 게 중요했다. 다만, 정유미(Jung Yu-mi 鄭裕美)가 연기한 주인공이 일하는 인권센터 공간만 올리브 색을 가미해 따뜻함을 부각시켰다. 미술 감독으로서의 욕심을 절제하고 최대한 이야기에 충실했다. 9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 는 옥상, 간판, 건물 등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공간들을 세세하게 표현해 낸 것이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재난 영화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근 감독과 대화하면서 ‘한국적인 공간’을 표현하는 게 관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국에 있는 건물 옥상들을 샅샅이 찾아다니며 특징을 조사했다. 특히 영화 후반부 남녀 주인공이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며 육교를 뛰어넘는 장면에서 두 배우 양쪽에 보이는 건물들이 중요했는데 의도대로 잘 표현됐다고 생각한다. 정말 짧은 순간이지만 말이다. 감독이 미술팀 의견을 많이 수용해 주었고, 미술팀 또한 감독이 던져 준 아이디어를 많이 활용했다. 서로 생각을 주고받으며 재미있게 작업한 영화다.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을 연기한 배우 김윤석(Kim Yun-seok 金允錫)이 강을 가로질러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장면이다. 실제로 강이 얼어붙어 얼음 두께가 30cm가 되는 곳에서 촬영되었다. ⓒ CJ ENM 이 영화에서는 신념이 다른 두 인물이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데 의상을 통해 두 인물의 특징을 담아냈다. 청나라의 공격에 맞서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상헌과 달리 이병헌(Lee Byung-hun 李炳憲)이 연기한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은 항복하여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 CJ ENM 현재 찍고 있는 은 어떤 작업인가? 박인제(Park In-jae 朴仁载) 감독의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인데 공개하기 전에 자세한 얘기를 할 수는 없지만, 인기 웹툰 작가 강풀(Kang Full)의 동명 원작을 영상으로 만드는 첫 시리즈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 작품 안에서 1980년대부터 2018년까지 변화하는 시대를 표현하는 것이 내게 큰 도전이다. 천부적인 패션 감각을 지닌 이공진 역의 고수(Go Soo 高洙)가 30년 동안 왕실 옷을 지어온 조돌석 역의 한석규(Han Seok-kyu 韓石圭)가 바느질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다. 이원석(Lee Won-suk 李元錫) 감독의 2014년작 은 조선 시대 왕실 의복을 만들던 상의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으며, 다양한 의상과 배경 공간이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 와우플래닛코리아(WOWPLANET KOREA)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공유오피스

People 2022 SPRING 2037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공유오피스 공유오피스가 뉴노멀 시대의 워킹 스타일을 방증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폭발적인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유연한 임대 공간의 규모와 계약의 형태가 1인 사업체나 소규모 창업자들의 수요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 성장의 주요인이다.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1분이면 도착할 수 있고, 세미나실과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어서 정말 편리해요.” “저렴한 이용료로 대기업 같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어서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1년간 서울의 다른 지역으로 출퇴근하다가 여기 새 건물에 문을 연 공유오피스가 집과 더 가까워 자리를 옮겼어요.” 온라인 커뮤니티에 다양한 호평이 쏟아진다. 마치 부동산 거래 후기를 보는 듯하다. 최근 몇 년 사이 공유오피스가 국내 부동산 시장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정착했다. 특히 1인 기업이나 스타트업을 비롯한 20~30명 정도의 소규모 인력으로 운영하는 회사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거미줄이 뻗치듯 서울의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공유오피스 밀집 지역이 빠르게 확산되는 가운데 새로 출발한 업체들은 ‘특가’, ‘할인 혜택’ ‘프리미엄 업무 서비스’ 등 을 내세우며 판촉전을 벌이고 있다. Most shared offices have enclosed rooms and an area with unassigned tables.The atmosphere is cozy like a café, but without the bustle.The lack of distraction and noise helps users focus on their tasks. © FASTFIVE FIVESPOT Hapjeong 따로 또 같이 공유오피스는 회의실이나 휴게실 등 공용 공간은 타 업체와 같이 쓰는 반면, 업무 공간은 독립적으로 사용해 공간 활용도를 높인 신개념 오피스다. 서울 용산구의 한 공유오피스에서 1인 기업을 꾸리는 30대 초반의 남성은 자신의 블로그에 1년간의 입주 후기를 남기면서 “근무에서 휴식까지 한 번에 가능하게 해주는 천국 같은 곳”이라고 정리했다.공유오피스의 뿌리는 ‘공유 경제’라는 게 중론이다. 2000년대 후반 미국 금융위기에서 시작한 세계적인 경기 침체는 공유 경제라는 새로운 경제 모델을 낳았고, 재화와 서비스에서 공간으로 공유의 범위가 확장하면서 공유오피스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공유오피스 업체가 서울 강남구 등 도심 상업지역의 고층 건물 일부 층을 임차해 공간을 나누어 이를 소규모 기업들에 재임대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건물 내 공간의 공유를 강조하는 ‘셰어드 오피스’, 여러 기업이 같은 공간에서 일한다는 뜻의 ‘코워킹 오피스’, 공유오피스 운영 업체와 입주 기업의 유연한 계약을 내세우는 ‘플렉시블 오피스’ 등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다. 국내 공유오피스 시장은 201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는 2021년 5월 발표한 연구 보고서‘포스트 코로나시대 공유오피스의 현재와 미래’에서 미국 공유오피스 업체인 위워크가 한국에 진출한 2016년을 기점으로 시장이 빠르게 커졌다고 분석했다. 동시에 2017년 600억 원 수준이던 국내 공유오피스 시장의 규모가 2022년에는 7700억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처럼 빠른 성장에는 2015년 출범한 국내 첫 공유오피스 브랜드 패스트파이브나 뒤이어 2016년에 설립된 스파크플러스도 큰 역할을 해 온 것으로 평가된다. 시장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지면서 2010년 서울에 20여 군데 있던 공유오피스는 2016년 무렵에 100군데를 넘겼고, 2019년 7월 기준으로 220군데에 달했다. KB 경영연구소는 보고서에서 공유오피스의 누적 면적이 같은 기간 5만㎡에서 60만㎡까지 넓어졌다고 설명했다. 패스트파이브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2021년 12월 기준 전국에 38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고, 스타트업에서 대기업까지 총 1만3290개 업체가 이용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용자의 86%가 높은 만족도를 보이면서 재계약 의사를 나타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대부분 고층 건물의 일부 공간을 임대해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심을 떠난 대기업의 빈자리에 공유오피스가 비집고 들어간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교통 인프라가 구축된 상업지구에 자리 잡고 싶은 소규모 기업의 수요가 공유오피스를 탄생시켰다는 분석도 있다. 대기업이 외곽으로 빠져나가면서 시장 변화에 빠른 대응이 필요한 신규 사업 프로젝트팀을 공유오피스에 입주시킴으로써 ‘거점 사무실’을 두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Most guests on Sabujak, a podcast produced by university students, want anonymity. But some guests allow their real name or face to be revealed. Park Ye-young, head of the Unified Korea Cooperative, appeared in a three-part program from October 11 to 13 this year, under the nickname “Kim Chaek Hairy Crab.” From left: Sabujak staff members Park Se-ah and Ahn Hye-soo, and Park Ye-young. © Sabujak 수요 증가의 요인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 있는 이용 후기나 사용 중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유오피스의 가장 큰 장점은 저렴한 임대료다. 새로 문을 연 공유오피스에 입주하면 할인 혜택을 받아 회사 운영비를 대폭 줄일 수도 있다. “고민은 입주를 늦출 뿐”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올 만큼 낮은 임대료는 공유오피스 시장의 폭풍 성장을 이끈 가장 큰 원동력이다. 공유오피스 운영업체도 경제성을 부각시킨다. 패스트파이브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초기 투자 비용부터 고정비용까지 확실하게 줄일 수 있다”며 “규모가 작은 회사도 초역세권의 고층 빌딩에 사무실을 구할 수 있다”는 설명으로 잠재적 이용자들의 관심을 유도한다. 인테리어 비용이나 사무용 가구 구매 비용 지출이 없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는 것은 거부하기 어려운 장점이다. 지하철 부근의 역세권에 위치한 고층 빌딩 입주도 소규모 기업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잦은 인력 변동과 경영의 불확실성은 소규모 기업에게 적잖은 부담이다. 사람이 늘면 느는 대로, 줄어들면 줄어드는 대로 공간의 변화도 뒤따라야 경영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데 이를 맞추기는 쉽지 않다. 사무실의 위치를 옮기고 싶어도 임대 기간이 끝나야 가능하다면 그동안 나가는 고정비용인 임대료가 손해로 여겨질 수 있다. 따라서 임차 면적이나 기간의 유동성은 공유오피스의 인기를 높이는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한다. 최소 1개월부터 공간을 빌릴 수 있고, 인원 증감에 따라 같은 공간 안에서 다른 면적의 사무실로 옮길 수도 있다. 당장 필요한 숫자만큼 사무실을 계약하고 추후 자유로운 확장이나 축소가 가능하다. 한 이용자는 “구성원 변화가 큰 기업, 사무실 임대 보증금보다 업무에 초기비용을 투자하고 싶은 기업에 공유오피스를 권한다”고 말했다. 또한 24시간 운영체제로 원하는 시간대에 자신의 사무실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점이 공유오피스와 일반 건물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이기도 하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탄력근무제와 재택근무가 확산한 상황에서 각자 필요한 시간에 사무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요긴한 방식으로 여겨진다. Several factors determine the rental price, including the number of users and the number of tables needed and whether the rented space has a window. But in most cases, essential office supplies, printing, coffee and snacks are included in the price. © WEWORK KOREA 위기와 대응 그러나 매력적인 요소가 한편으로는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사용자 평가를 종합하면 인테리어 투자로 인해 사무공간의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결론도 가능하다. 예컨대, 한 공간을 여러 사무실로 나누면서 밀폐공간이 생겨났고 이 때문에 환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한 사무실의 난방기가 가동될 때 다른 공간의 난방기도 동시에 돌아가게 되어 자체적인 실내 온도 조절도 쉽지 않다. 또한 입주 기업이 몰려들면서 회의실도 원하는 시간에 사용하기 어려워졌고, 공간을 좁게 나눠 여러 이용자에게 임대하다 보니 ‘방 쪼개기’라는 비판도 무시할 수 없어 보인다. 한편으로 공유오피스 운영업체의 수익 창출이 앞으로 불투명해질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건물 전대차로 수익을 내는 만큼 언젠가는 성장에 한계가 온다는 지적이다. 주로 도심 상업지역으로 공유오피스 입지가 제한되는 점도 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KB 경제연구소는 보고서에서 “(공유오피스 업체는) 건물을 장기 임차하므로 지출 비용은 고정인데, 입주 기업과는 단기 계약으로 운영되어 수입이 유동적”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임대료 상승 수준은 제한적인데 반해 기존 업체와 신생 업체 간의 경쟁 심화로 인해 입주 기업에 대한 서비스 지출 비용이 증가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지난 2년간 세계 보건 환경뿐만 아니라 경제 판도까지 뒤흔들어 온 코로나 19도 새로운 변수다. 여러 회사 직원들이 한 공간에서 뒤섞여 일하는 환경에서 코로나 19가 확산될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 때문이다. 이를 인식한 듯 공유오피스 업체들은 “전문 업체의 정기적인 방역을 실시한다”며 “공용 공간의 철저한 소독, 전체 스태프의 마스크 착용으로 안전한 업무 공간을 만들어가겠다”고 약속하며 이용자들을 안심시키고 있다. 다양한 장단점과 함께 우려 섞인 예측에도 불구하고 공유오피스가 전 세계적으로 업무 공간의 새로운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대형 브랜드들이 명확한 한계를 딛고 어떤 방향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발전시켜갈지 기대되는 것이 당연하다.

추억을 떠올리는 맛

People 2021 WINTER 2756

추억을 떠올리는 맛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맛과 재료가 조금씩 변화해왔지만 떡볶이가 한국인의 소울 푸드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서울 떡볶이 맛집’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이 가게는 시어머니의 손맛을 이어 40년째 수많은 고객에게 정겨운 추억을 만들어주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추억 한 조각에 떡볶이가 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골목에서 풍겨 나오는 맛있는 냄새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오늘날 흔히 먹는 고추장 떡볶이는 마복림(马福林, 1920~2011) 할머니가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전에는 가래떡을 먹기 좋게 적당한 크기로 잘라 여러 가지 채소를 넣고 간장으로 양념해 볶은 음식이었다. 조선 말기 19세기에 편찬된 저자 미상의 조리서 에 의하면, ‘흰 가래떡과 등심, 참기름, 간장, 파, 버섯 등을 함께 볶아 만든 궁중음식’으로 ‘떡찜’, 또는‘떡잡채’ 라고 했다. 고급 재료들로 만들던 귀한 음식이 어떻게 대중적인 음식으로 바뀌었을까? 한국전쟁 직후였던 1953년, 마 씨는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중국 음식점을 찾았다. 마침 개업 직후여서 주인이 자축하는 떡을 테이블마다 돌렸고, 마 씨는 실수로 짜장면 그릇에 그 떡을 빠뜨렸는데 그게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비싼 춘장 대신 고추장에 떡을 버무려 매콤한 떡볶이를 만들었다. 그는 고추장과 춘장을 섞은 소스로 만든 떡볶이를 파는 가게를 서울 중구 신당동에 열었고, 1970년대에 들어 이것이 전 국민의 간식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이 동네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분식집이 성행했는데, 그 중에는 DJ가 신청곡을 틀어주는 가게도 있었다. 하교 길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떡볶이를 나눠 먹는 것이 그 시절 청소년들의 오락이었다. 한 가족의 생계 김진숙(金眞淑) 씨의 시어머니는 1980년대,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있는 시장에서 떡볶이 장사를 시작했다. 간판도 없는 노점상이었다. “올해 아흔 두 살이신 어머님은 당시 사십 대 중반이었고, 제 남편은 열한 살이었어요. 주위에 여자고등학교가 세 개나 있어서 학생들이 많았대요. 학교 급식이 없던 시절이라, 점심시간엔 나와서 떡볶이를 먹는 아이들도 많았고요. 그 아이들이 졸업한 후에도 찾아오고, 그래서 늘 손님들이 북적거렸대요. 시댁에 식구가 많았는데, 어머님이 그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셨어요.” 김 씨는 1992년에 시어머니의 넷째 아들인 김완용(金完用) 씨와 결혼했다. 십 년 전 시어머니가 고관절 수술을 받은 후 혼자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온 가족이 시간을 쪼개 짬나는 대로 왔다. 남편도 하던 일을 그만두고 가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김 씨에게 ‘같이 한 번 가볼래?’라며 제안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작은아이가 마침 여름방학이어서 손이 좀 덜 갈 때였다. 그렇게 따라가서 일주일쯤 일을 거들었는데 지켜보던 시어머니가 계속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멋도 모르고 덥석 하겠다고 대답했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2015년, 도시 재개발로 인해 시장이 없어진 후 시장 자리가 있던 곳에 새로 차린 것이 지금의 가게이다. ‘갈현시장 할머니 떡볶이’라는 간판도 그때 처음 달았다. “그때 어머님은 이미 팔십 살이 넘으셨는데도 할머니라고 불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셨어요.” 김 씨가 웃으며 당시를 돌이켰다. “그때부터 남편이랑 저랑 둘이서 가게를 하게 됐어요. 메뉴는 어머님이 시장에서 팔던 그대로예요. 떡볶이, 순대, 만두 두 종류, 삶은 달걀, 김말이.” 기본적인 조리법은 시어머니의 방식을 이어가지만, 소스의 비율이 조금 달라졌다. 자극적인 맛을 줄이고 지금은 부드러운 맛을 강조한다. 덜 달고 덜 짜고 덜 매운 맛이다. 식재료도 건강과 위생을 고려하여 좋은 것으로 세심하게 골라 쓴다. 남편은 아침 7시에 가게에 나온다. 전날 씻어 둔 조리기구들을 세팅하고 물을 올리고 순대를 찌고 달걀을 삶고 기본적인 준비를 하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 “떡볶이용 밀가루 떡이 뭉쳐 있는데, 하나하나 떼는 게 고된 일이에요. 하나씩 떨어져 있는 떡도 있지만 그런 떡은 맛이 떨어져요. 우리 손이 한 번 더 가면 손님들이 더 맛있는 걸 드실 수 있어요. 떡 한 판에 낱개로 324개 나오는데 하루 열 판 정도 나가요.” 두 시간 동안의 준비가 끝나고 9시가 되면 가게 문을 연다. 김 씨는 10시쯤 가게에 나온다. 부부 사이에 특별한 역할 분담은 없다. 두 사람 모두 조리를 하고 손님을 받는다.“둘 중 한 명이 없어도 장사를 해야 하니까 둘 다 뭐든지 할 줄 알아야 해요.” 서울 갈현동에 있는 ‘갈현시장 할머니 떡볶이’주인 김진숙, 김완용 씨 부부는 어머니가 40여 년 전에 시작한 가게를 이어받아 옛 맛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다. 전에는 3명의 직원을 데리고 가게를 운영했으나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작년부터는 시간제 직원 한 명만 두고 부부가 모든 일을 하고 있다. 비법을 지킨다 갈현동 할머니 떡볶이 가게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맛으로 떡볶이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김진숙 씨는 시어머니 진양근씨가 1980년대 가게를 내면서 개발한 소스의 비법을 아직도 소중하게 지키고 있는데, 그 맛이 뛰어나서 동네 손님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종종 있다. 조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벌 끓이기’이다. 손으로 하나씩 떼어놓은 떡은 끓는 물에 넣어 잠시 끓인 다음 조리용 판으로 옮겨진다. 이 과정이 제대로 안 되면 떡이 퍼지거나 질겨진다. 매일 조금씩 다른 떡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해 온도와 시간을 맞추는 것이 관건이다. “사람들은 농담처럼 ‘회사 때려치우고 떡볶이 장사나 할까’라고 말하지만, 사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장사죠.” 손님이 끊이질 않는 맛있는 떡볶이를 만드는 비법은 소스를 만드는 재료의 비율, 불의 온도, 그리고 조리 시간이다.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비율이 안 맞고 온도와 시간이 안 맞으면 소용없다. 이 과정은 모두 시어머니에게 배운 비법이고 때문에 영업비밀이다. 고춧가루, 고추장, 물엿 등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을 포함하여 열 가지 남짓한 재료가 소스에 들어간다. 이렇게 만든 떡볶이는 1인분에 3,500원이다. 지난 4월, 3,000원 하던 가격을 500원 올렸다. “해마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그게 반영돼 모든 식자재값이 오르기 때문에 가격을 안 올릴 수가 없어요. 하지만 떡볶이는 한끼 식사가 아니라 간식으로 먹는 음식이라 값을 올리기 쉽지 않아요. 계속 고민하다가 6년 반 만에 500원을 올렸어요.” 1인분의 양은 ‘고무줄’이라고 김 씨는 말한다. 보통 17~18개의 떡에 어묵을 섞어 1인분으로 담지만 학생이나 노동자에게는 늘 덤을 얹어 주기 때문이다. 열 평이 채 못 되는 가게의 테이블은 요즘 모두 한쪽으로 치워져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홀 손님을 받지 않은 지 일 년이 지났다. 가게 한 구석에 작은 전기밥통과 인덕션이 있는데 부부가 짬을 내어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는 곳이다. 늦은 오후에 군것질로 대충 허기를 채우고 저녁 8시에 문을 닫는다. 정리와 청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밤 10시.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부부의 하루 일과이다. “일주일에 하루, 월요일에 쉬어요. 이 가게를 연 이후 그 밖에 쉰 날이 딱 사흘인데 제가 수술받은 다음날, 아들 입대한 날, 그리고 퇴소한 날이었어요. 가끔 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손님들과의 약속이니까요. 이 지역에 사는 손님만 오는 게 아니라 전국 팔도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는데, 헛걸음하면 미안하잖아요. 쉬는 날에도 다른 거 없어요. 밀린 집안 일하고, 손목터널증후군 고치러 병원에 가요. 직업병이죠.” 손님이 끊이질 않는 맛있는 떡볶이를 만드는 비법은 소스를 만드는 재료의 비율, 불의 온도, 그리고 시간이다.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비율이 안 맞고 온도와 시간이 안 맞으면 소용없다. 연령을 초월한 많은 한국 사람들의 소울푸드인 떡볶이는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흰떡을 여러 가지 야채, 어묵과 함께 고추장 소스에 넣고 뭉근하게 끓여 만든다. 국물 떡볶이, 즉석 떡볶이, 간장 떡볶이, 로제 떡볶이 등 다양한 종류의 떡볶이가 있는데 그 중 국물이 자작한 국물 떡볶이가 가장 대중적이다. 최선을 다하는 하루하루 시어머니를 도와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김 씨는 호된 경험을 했다. “제대로 된 포장용기가 없어서 비닐 봉지를 사용하던 시절이었어요. 떡볶이를 포장해간 손님이 조금 있다가 다시 왔어요. 국물이 새서 청바지에 묻었다면서 떡볶이가 든 봉지를 그대로 던졌어요. 놀라고 당황해서 덜덜 떨었어요.” 이처럼 가끔 부부를 힘들게 한 손님들이 있었다. 달걀 하나를 빠뜨렸다고 전화로 삼십 분 동안 항의한 손님도 있었다. 알아보니 다른 손님과 봉지가 바뀌었던 것인데 값을 물어주겠다고 해도 계속 화를 냈다. 자신이 원하는 만두가 아닌 다른 만두를 줬다고 접시를 던진 손님도 있었다. 가게에 와 있던 친척이 말리다가 싸움이 붙어 경찰까지 오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일을 겪고 부부는 ‘손님이 뭐라고 하면 무조건 인정하자’고 다짐했다. 물론 대부분의 손님들은 따뜻하고 다정하다. 더운 날 마시고 일하라며 음료를 사오기도 하고, 텃밭에서 딴 채소를 가져오는 이들도 있다. “어머님을 기억하는 분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도 하고, 초등학교 동창회하고 다같이 오시기도 해요. 그분들은 떡볶이가 아니라 추억을 먹으러 오는 거죠. 이런 손님들을 보며 따뜻한 마음과 베푸는 방법을 배워요. 이런 게 세상 사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김 씨는 언젠가 이 가게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쉽다. 앞으로 십 년만 더 하고 가게를 접을 계획이기 때문이다. 서운하긴 하지만, 이 힘든 일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도 않다. 아이들이 직장에도 다녀보고 원하는 것을 다 해보고도 떡볶이 장사를 하고 싶어 한다면 몰라도. 새벽부터 재료 하나하나를 정성껏 준비하여 뜨거운 불판 위에서 조리하고, 먼 길을 찾아온 손님에게 푸짐하게 담아주는 떡볶이는 허기뿐만 아니라 추억을 채워주고 마음을 데워주는 음식 이상의 무엇이다. 김 씨 부부는 그 옛날,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팔았던 추억의 맛을 이어가기 위해 고단하지만 날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공부의 새로운 방식

People 2021 WINTER 1839

공부의 새로운 방식 스터디 카페는 무료로 제공되는 음료나 간식을 먹으며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 혹은 여럿이 함께 이 곳에서 공부를 한다. 이런 장소들이 약 10년 전부터 생겨나기 시작했고 코로나 19로 더욱 성행 중이다. 스터디 카페는 어떤 사람들이 이용하거나 운영하고 있으며, 인기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약 10년 전부터 전국 대도시에 생기기 시작한 스터디 카페는 공부나 토론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상업시설이다. 대부분의 스터디 카페는 반투명한 가림막이 머리 높이까지 쳐져있어 고립된 느낌은 덜면서도 집중력을 높여주는 환경이다. 처음에는 중학생부터 대학생, 취업준비생까지 청년층이 주요 고객이었으나 점점 이용자의 연령층이 확대되고 있다. ©TRISYS 박정은 씨는 인천의 인하대학교에서 정치외교를 전공하는 4학년 학생이다. 박 씨는 학교 도서관 열람실을 자주 이용했는데, 멀리 갈 필요없이 자료를 찾기도 쉽고 학과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기도 좋았다. 하지만 코로나 19가 몰고 온 팬데믹으로 2020년부터 학교 도서관 열람실이 굳게 닫혔다. 이후 수업까지 온라인으로 대체되며 학교에 가는 날이 더욱 줄었다. 결국 공부 장소를 집 근처 스터디 카페로 옮겼지만, 조용한 독서실이나 도서관에 익숙했던 박 씨에게는 매우 낯선 분위기로 느껴졌다. 스터디 카페들은 대부분 무인 점포로 운영하고 각기 특징을 앞세워 경쟁력을 높이려 노력하는데, 음료와 디저트를 제공하는 스낵바 서비스가 잘 마련된 곳도 많이 있다. 또한 계절별로 자체 메뉴를 개발해 판매하기도 한다. © THENEWWAYS “처음엔 주변에서 들리는 작은 소음들이 낯설었어요. 일부러 소음을 만드는 백색 소음기나 자리를 오가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모습이 신기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행동의 제약이 적으면서도 공부하기에도 좋은 스터디 카페의 요소들에 적응했어요. 집중이 더 잘 돼서 요즘은 일부러 찾아와요. 코로나 19가 종식되고 학교 도서관 열람실을 다시 이용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좋겠지만, 그 때에도 친구들과 함께 올 것 같아요.” 서울 마포구에 사는 28세 이소미 씨는 외국계 회사의 콘텐츠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이 씨는 코로나 19 이후 재택 근무 시간이 확연히 늘어났는데, 가족과 함께 사는 집에서 일하는 것이 어색할 뿐만 아니라 공간이 좁아 효율도 늘지 않았다. 카페에서 몇 개월을 일하며 지내봤지만, 음료만 시켜 놓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눈치가 보일 뿐만 아니라 화상 회의가 있는 날에는 적당한 카페를 찾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던 이 씨에게 스터디 카페는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조용하게 일 할 수 있으면서도 화상 회의가 있을 때는 단독 사용이 가능한 룸에 들어가 마음 놓고 회의를 할 수 있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하루 단위로 결제할 수 있는 점도 출근이 불규칙적인 이 씨에게 장점으로 다가왔다. 급격한 증가 한국에는 요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도시 지역이라면 어디에나 편의점, 카페 그리고 스터디 카페가 있다. 스터디 카페가 처음 등장하던 시기에는 주로 중학생부터 대학생, 취업준비생까지 10~20대의 청년들이 이용했지만, 어딜가든 스터디 카페가 있는 요즘엔 이용자의 연령층도 넓어졌다. 특히 코로나 19로 인해 카페를 비롯한 상업시설들이 큰 타격을 입었지만, 공공 도서관과 대학 도서관 등이 문을 닫고 재택근무가 활성화되며 스터디 카페는 오히려 성행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공간의 제약이 심해지고 같은 공간에서 반복되는 일상이 사람들을 쉽게 지치게 하면서 그들을 스터디 카페로 불러들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스터디 카페는 무인 점포로 운영되며 키오스크를 통해 결제와 입, 퇴실 및 적립금 관리, 좌석 이동 등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 비대면 소비문화에도 부합한다. 입구에서 열체크와 입실 승인이 되면 자동으로 문이 열린다. 원하는 자리에서 결제한 시간만큼 이용할 수 있고 대부분 무료로 음료와 간식거리가 제공된다. 문서를 복사, 인쇄할 수 있는 복합기가 설치되어 있고 여러 사람이 모여 토론할 수 있는 공동 사용 공간 ‘스터디룸’이 있는 곳도 있다. 좌석의 대부분은 낮은 칸막이가 있는 개방적인 테이블에 마련돼 있다. 옆 사람의 책을 흘깃 쳐다보기는 어렵지만, 동시에 완전히 단절되지도 않은 형태다. 더러는 넓지 않은 테이블 하나를 혼자서 쓰도록 만들어 놓은 좌석도 있고, 카페의 창가처럼 폭이 좁은 테이블에 높은 의자가 놓인 좌석도 있는가 하면, 아예 사방이 벽으로 막혀 문을 닫고 혼자 공부할 수 있는 좌석도 있다. 노트북을 사용할 사람은 키보드 소음을 마음껏 내도 상관없는 ‘노트북 존’에 가면 된다. 이용 가격도 자유자재로 선정할 수 있어 편리하다. 적게는 2시간에서 최대 150시간까지 충전이 가능하고 한달 내내 이용할 수 있는 정액권도 있다. 수요가 급증하자 공급 역시 늘어났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기본스터디카페’를 운영하는 김신애 대표는 코로나가 한참이던 2021년 2월 개업했다. 당시만해도 동네에 스터디 카페는 김 대표의 점포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불과 반 년 사이에 5분 거리를 두고 우후죽순 생겨나 지금은 같은 동네에 열 개가 넘는 스터디 카페들이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 달에 최소한 하나씩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에요. 시장은 포화 상태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당분간 열풍은 계속될 것이라 예상해요. 심지어 팬데믹이 끝난다 하더라도 높은 이용률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공부하는 학생은 계속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스터디 카페는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니까요. 대신 앞으로는 점포마다 특성을 살려 경쟁력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김 대표는 서울시 마포구에서 16년 간 학원을 운영한 경험에 비추어 이같이 예측했다. 코로나 19가 터지고 학원 매출이 급격히 감소하며 폐업한 뒤, 심사숙고 끝에 시작한 스터디 카페는 주로 학생을 상대하고 공부하는 공간을 마련해준다는 면에서 학원과 비슷한 성격을 띄었다. “학원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운영해야 해서 정신적으로 힘들었다면, 스터디 카페는 육체적으로 힘들어요. 대신 대부분 고객 상대가 비대면으로 이뤄져서 스트레스가 훨씬 덜하죠. 10시 이후 영업금지가 되기 전까지는 24시간 운영이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나가서 청소를 하고 음료나 차를 비치하는 등 점포를 관리해요. 지금은 10시에 문을 닫아서 끝나고 바로 정리합니다. 요즘엔 위생이 화두인 만큼, 청결에도 신경을 많이 써야해요. 내부에서 이용자들이 엄격하게 개인 방역을 지키는지 CCTV를 통해 수시로 체크하죠. 아무리 무인으로 운영한다 하더라도, 관리자의 눈과 손이 얼만큼 가는지에 따라 점포의 질이 달라지니까요.” 비대면 시스템이 활성화되며 인건비가 적게 들고 관리가 편한 스터디 카페는 창업 시장의 새로운 아이템으로 급부상했다. ‘기본스터디카페’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회사 ‘트리시스’의 윤형준 대표는 “작년부터 업체 수에서 큰 증가폭을 보인 스터디 카페는 노동 강도가 낮고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는 데다, 수요가 꾸준히 유지돼 좋은 창업 아이템으로 꼽힌다. 특히 무인 운영 시스템을 적용한 결과 관리가 편리해 업주들 사이에 인기가 좋은 편이다”고 말했다.실제로 김신애 대표는 “지금은 10시에 문을 닫아서 매출이 많이 줄긴 했지만, 24시간 운영할 때와 비교하자면 학원 운영보다 매출이 좋았다. 업종을 바꾸길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스터디 카페는 무인 점포로 운영되며 키오스크를 통해 결제와 입, 퇴실 및 적립금 관리, 좌석 이동 등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 비대면 소비문화에도 부합한다. 입구에서 열체크와 입실 승인이 되면 자동으로 문이 열린다. 공부 문화의 변화 물론 스터디 카페가 성행하게 된 배경에 코로나 19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열풍은 오랜 세월을 두고 서서히 변화해 온 한국의 공부 문화와 함께 들여다보면 더욱 이해가 쉽다. 30대 이상의 한국사람이라면 학창시절 한 번쯤 다녀봤던 곳이 바로 독서실이다. 동네마다 있던 독서실이 개인이 운영하는 학습 공간이라면 도서관은 공공 학습 공간이다. 도서관의 열람실은 사설 독서실과 비슷하게 조용한 분위기여서 심지어 문 여닫는 소리마저 성가셔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2010년 전남대학교에서 12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학 내 도서관 열람실에서 발생하는 소음에 대한 반응을 살펴본 조사에 따르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한 사람은 전체의 1.7%에 불과했다. 3분의 1이 넘는 응답자들이 소음 때문에 혈압이 오르거나 소화불량, 수면장애까지 얻는다고 답했다. 이런 모습은 오랫동안 조용한 환경에서 암기 위주의 공부를 해 온 문화의 연장선이다. 조선시대(1392~1910)에는 젊은 선비들이 산 속 암자에 들어가 과거 급제를 위해 공부에 매진했고, 요즘에도 대학생, 공무원, 취업 준비생 등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장소를 찾아 공부를 한다. 소위 ‘고시촌’이라 불리는 동네로 주거지를 옮겨 공부에 집중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데 2010년대 들어 공부의 형태가 조금씩 변했다. 이를테면 대학에서는 중간·기말고사의 비중이 줄어들고 ‘조별과제’의 비중이 늘어났다. 단순히 문제를 읽고 푸는 것보다 과제를 설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조용한 곳에서 혼자 외우며 공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여럿이 어울려 이야기 나누고 토론하는 공부 공간이 필요해진 것이다. 학생들이 제약적인 분위기의 독서실이나 도서관에서 벗어나 소음과 자유가 허락된 스터디 카페로 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키오스크에서 대금 결제를 하고 입실하면 오픈 테이블이나 바 형식의 좌석 등을 자유롭게 선택하며 이용할 수 있다. 대부분의 테이블마다 콘센트가 내장돼 있어 태블릿 피씨나 노트북을 이용해 공부를 할 수도 있다. ©INGStroy Inc.   공부를 위한 최적의 장소 이런 흐름 속에 일반적인 카페도 성행했다. ‘카공족’ 뿐 아니라 카페에서 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코피스(coffee+office)’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그러나 매우 개방적인 분위기에 음료 판매 위주로 매상을 올리는 카페에 비해 스터디 카페는 일반 카페와 독서실 사이에서 적당히 균형을 이루는 장소다. 그런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백색소음기’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백색소음은 집중력을 높여 주면서도 자유로움을 부여하는 스터디 카페의 상징적인 장치다. 사실 스터디 카페는 청년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가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김신애 대표는 “물론 학생이나 직장인이 가장 많지만 나이 지긋한 분들도 많이 온다. 자기 계발에 집중하거나 여러 가지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하는 연령층이 다양해진 것 같다. 공부는 꼭 청년들이 한다는 예전의 인식도 스터디 카페를 운영하며 많이 버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체 개발한 메뉴를 판매하는 스터디 카페가 있는가 하면, 주 이용고객이 학생인 학교 근처에 위치한 스터디 카페에는 점주들이 무료 간식과 음료를 비치해 주는 경우도 많다. ©TRISYS

기적이 일군 삶

People 2021 WINTER 1460

기적이 일군 삶 이탈리아 피아나소에서 태어난, 본명이 빈첸시오 보르도인 김하종 신부는 1990년에 한국에 왔고 이후 빈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해 왔다.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도 그가 운영하는 복지센터는 매일 수백 명의 배고픈 노숙자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나눠주고 있다. 김하종 신부는 30년째 매일 신부복 대신 앞치마를 입고 있다. 신부복보다 앞치마가 본인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성남시 안나의 집에 있는 그의 소박한 사무실에는 김수환 추기경(Stephen Cardinal Kim Sou-hwan, 金壽煥, 1922~2009)의 사진이 걸려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여전히 세상을 위협하고 있지만 김하종 신부는 조용히 다른 종류의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다. 그에게 ‘나눔’은 전염력 높은 행복감으로 사람들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다. 성남에서 그가 운영하는 사회복지센터 ‘안나의 집’에서 나눔은 여러 형태를 갖는다.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초 이래로 가장 눈에 띄는 나눔의 형태는 매일 가난한 노숙자들을 위해 수 백 개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는 일이다. 김 신부가 이 무료급식소를 연 건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기 오래 전이다. 팬데믹으로 실내 음식 섭취가 제한되자 대부분의 무료급식소는 문을 닫았지만 김 신부는 그렇게 하길 거부했다. “무료급식소를 문 닫을 수 없어요. 위장은 쉬지 않으니까요. 이곳을 찾는 70퍼센트의 사람들이 하루에 한 끼를 먹습니다. 우리가 급식을 하지 않으면 이들은 굶어야 해요.”라고 그는 말한다. 무료 점심 도시락 급식을 도시락으로 전환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는 다른 운영 체제를 요구했고 포장재 때문에 비용도 오르고 종사자들의 건강에 대한 위협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2020년 1월 이후 시 당국의 허가를 받아 안나의 집은 매일 650에서 750개의 도시락을 큰 문제없이 제공해오고 있다. 김 신부는 가난한 이들에게 매일 급식을 하는 게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언젠가 한번 쌀이 거의 다 떨어졌던 때를 떠올렸다. “매일 160킬로그램의 쌀이 필요해요. 근데 이틀 분밖에 남지 않았죠. 제가 걱정을 했더니 주방장이 ‘예수님이 보내주실 거예요’라고 하더군요. 다음날 쌀 100포대가 문밖에 놓여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음식과 돈, 옷과 마스크 등 여러 물품을 기부한다. 많은 이들은 시간을 내서 음식 준비, 포장, 청소, 도시락을 받기 위해 줄 선 사람들 안내하는 일 등을 돕는다. 자원봉사자들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찾아온다. 천주교인뿐 아니라 스님과 회교도도 포함하며 유명인사도 회사원과 학생들도 있다. 심지어 루이 뷔통이라는 이름의 개도 있어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빈민들은 성남의 곳곳에서 찾아오고 3시에 배급되는 도시락을 받으러 심지어 서울에서도 찾아온다. 김 신부와 자원봉사자들은 이들을 환영하며 “어서 오세요.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팬데믹 때문에 어려운 상황인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여기에서는 사랑과 나눔의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팬데믹의 또 다른 경험인데 정말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요.”라고 그는 말한다. 빈민을 위한 헌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미래의 김 신부가 될 빈첸시오 보르도는 이미 신부가 되기로 작정했다. 대학에서 동양 철학과 종교를 공부한 후 그는 빈민을 돕는 데 집중하는 오블리티 선교수도회에 가담했다. 아시아에 대한 관심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고 1990년 5월 한국에 도착하고 얼마 있지 않아 빈곤 가정을 돌보는 수녀님과 함께 일하기 시작한다. 2020년에 출간된 그의 책 에서 김 신부는 1992년 변곡점이 된 사건을 기억한다. 그는 곰팡이가 핀 지하방에서 어떤 날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기도 하면서 이웃이 가져다주는 음식에 의존하며 홀로 사는 50대 반신 불구의 남자를 만났다. 그와 얘길 나누고 방을 청소한 후 김 신부는 허락을 받고 그를 안아주는데 냄새가 너무나 고약해서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형용할 수 없는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복지체계 밖에 남겨진 걸 깨달은 김 신부는 다음 해 빈민을 위한 급식소를 시작한다. 그 당시 한국은 지금과는 달랐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사람들이 저에게 왜 노숙자를 돕느냐고 묻곤 했어요. 노숙자는 문제를 일으키는 알코올 중독자니 도와서는 안 된다고 했죠.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진 않아요. 한국 사회가 많이 변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여파로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노숙자가 되었다. 이듬해 김 신부는 어머니의 세례명이 ‘안나’인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무료급식소를 시작했고, 그렇게 ‘안나의 집’이 탄생했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모든 요일에 무료 급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무료급식소는 성남성당이 제공한 공간에서 운영되었다. 하지만 2018년에 그곳을 비워야 했다.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김 신부의 걱정이 커졌다. 성남시 직원들은 길 건너 그린벨트로 묶였던 땅이 해제될 테니 그곳에 새로운 공간을 지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실행가능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땅을 살 돈이 없었다. “이제 정말 끝인 걸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제 정말 이 일을 끝내고 퇴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라고 그는 말한다. 새로운 둥지 도움은 인터뷰 요청의 형태로 찾아왔다. 김 신부는 주저했지만 지역신문이라고 착각하고 인터뷰를 하기로 동의하고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인터뷰는 KBS방송과 하는 거였고, ‘인간극장’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김 신부에 대한 방송이 나가자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다.” 후원이 밀려들어왔고 빠르게 12억에 도달한 후원금은 땅을 사기에 충분했다. 김 신부는 오랜 기간 타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자신의 에너지를 ‘사랑’으로 꼽았다. 힘들고 포기할 뻔한 상황마다 누군가가 나타나 도움을 주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안나의 집을 꾸릴 수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사람들이 가진 사랑의 힘이라고 믿는다. 안나의 집은 2018년 새 건물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무료급식이 주된 업무이지만 김 신부의 노력으로 더 많은 일에 봉사를 하게 되었다. 현재 의료봉사, 재활, 법률 서비스, 인문학 강좌 등이 주 단위로 제공된다. 또한 노숙자와 노인들, 가출청소년들을 위한 쉼터, 젊은이를 위한 셰어하우스, 가출청소년과 도움이 필요한 젊은이들을 위한 모바일 봉사활동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코로나 이전에 봉사활동 프로그램 ‘아지트’(아이들을 지켜주는 트럭)는 매일 밤거리를 배회하는 수십 명의 소년 소녀들을 만났다. 팬데믹으로 인해 많은 활동이 중지되었지만 김신부는 여전히 지금은 소형차인 아지트를 끌고 거리로 나간다. 아지트는 한국어로 ‘집합소’ 혹은 ‘안전한 집’을 의미한다. “희망을 주려고 해요. 사람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는 거죠. 씨앗이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하고 또 실패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가능한 무엇이든 하도록 부름 받았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무료급식소를 문 닫을 수 없어요. 위장은 쉬지 않으니까요. 이곳을 찾는 70퍼센트의 사람들이 하루에 한 끼를 먹습니다. 우리가 급식을 하지 않으면 이들은 굶어야 해요.” 하느님의 종 지난 30년 동안 김 신부는 거의 매일 앞치마를 몸에 걸쳤다. 하지만 일요일에는 자전거를 타기 위한 채비를 하고 한강 둑을 따라 자전거를 타러 간다. 귀중한 휴식의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좋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긴 하지만 매일 같이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육체적으로 힘든 건 말할 것 없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뛰는 걸 알아차렸을 때 그는 의사를 찾아갔고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분간 그가 유일하게 지켜온 이탈리아 습관인 모닝 에스프레소를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힘들고 베푸는 삶에서 그가 보상으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빈민들을 위해 일하는 게 절 행복하게 합니다. 저에게는 일이 아니예요. 저의 사명이고 이곳에서 저의 삶은 이들을 환영하고 사랑하고 돕는 겁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 사명은 ‘하느님의 종’을 의미하는 그의 한국 이름 ‘하종’에 반영되어 있다. 김이라는 성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성직자였던 앤드류 김대건 (1821-1864)에 헌사하는 의미로 따왔다. 김대건은 천주교를 탄압한 조선왕조 시기에 처형당했고 1984년에 다른 한국인 순교자들과 함께 성인으로 공표되었다. 김 신부의 업적이 알려지면서 그는 2014년 명망 있는 호암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받았다. 어떤 상이 가장 의미가 크냐는 질문에 김 신부는 표정이 환해지면서 최근에 손때 묻은 천 원짜리 지폐를 모아 그에게 선물한 유치원 어린이들을 언급했다. 그를 특별히 행복하게 만든 또 다른 상은 2015년 대통령령으로 주어진 한국 국적 취득이다. 한국인으로 귀화하기 오래 전에 그는 한국에 영원히 머물 것을 결심했다. 심지어 사후 장기 기증 서약까지 해 놓았다.“저는 외국인이 아니고 한국 사람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자원봉사자들은 매일 1시부터 안나의 집 지하에 있는 식당에 모여 도시락을 준비한다. 밥, 반찬, 국, 빵, 통조림 캔 등을 일사불란하게 담고 포장하는 손놀림이 무척 능숙하다. 김 신부(맨 오른쪽)도 항상 이들과 함께 일한다. 김 신부는 매일 3시부터 안나의 집 앞에 있는 성남동 성당의 너른 공터에서 노숙자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준다. 700여 개의 도시락은 2시간 정도면 모두 소진된다.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만 만드는 공예가

People 2021 WINTER 1156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만 만드는 공예가 온전한 수작업 끝에 완성되는 금속공예가 심현석(Sim Hyun-seok 沈鉉錫)의 작품들은 따뜻한 감성과 절제된 미감을 전달한다. 그는 손으로 직접 만드는 물건이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인 작업을 이어간다. 금속 공예가 심현석(Sim Hyun-seok 沈鉉錫)이 경기도 가평 작업실에서 카메라 앞에 섰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인데, 이는 스스로가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들어 본 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으면 비로소 작품화하기 때문이다. 금속 공예가 심현석은 몇 년 전 경기도 가평으로 작업실과 집을 옮겼다. 농사를 짓고 화초를 가꾸며 살고 싶다는 오랜 바람이 투영된 결정이었다. 그전까지는 서울 화곡동에 있는 스승의 작업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무려 26년에 걸친 도제식 수업이었다. 여유 시간과 사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는 요즘 젊은 세대는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일 것이다. 긴 세월 동안 하루하루를 ‘제자’로 살았던 작가에게는 모든 공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정직함과 무던함이 남았다. 작은 부품까지 모두 직접 만들어 완성하는 핀홀 카메라를 비롯해 장신구와 생활 도구 등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이다. 그는 건국대에서 공예를 전공한 후 캐나다 노바스코샤 예술디자인대학원(Nova Scotia College of Art and Design)에서 금속공예 심화 과정을 밟고 미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5년에는 한국 현대 금속공예의 선구자 유리지(劉里知) 교수를 기념하는 유리지공예관이 주최하고 고려아연주식회사가 후원하는 ‘올해의 금속공예가상’을 받았으며, 국내외 유수의 갤러리와 기관에서 전시를 열며 탄탄한 실력과 매력적인 작품 세계를 인정받고 있다. 소재로 은을 주로 사용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재료로서 은의 매력은 어떤 것인지요? 조선 왕실에서는 인체에 해로운 독극물을 확인하는 용도로 은수저를 사용하곤 했어요. 독이 있는 성분이 은에 닿으면 색이 검게 변하니까요. 그 얘기는 은이 나쁜 성분을 잘 받아들인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은 조각을 물통에 넣어 놔요. 신선도가 유지되고 수질도 좋아지기 때문이지요. 은기(銀器)가 비싸다 보니 장식장에 넣어만 두는 분들이 많은데 그러면 색이 변합니다. 매일 쓰면 변하지 않아요. 그리고 은은 성질이 물러 작업하기가 까다롭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도 않아요. 금속공예 작업에 사용하는 스털링 실버(sterling silver)는 은이 92.5%, 구리가 7.5% 함유되어 있고 강도가 아주 높습니다. 물론 가격도요. 최근에는 무슨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강아지 모양 브로치를 포함해서 장신구를 꾸준히 만들고 있고, 기하학적 형태의 작업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작업을 해야 정교하고 미학적인 작품도 만들 수 있거든요. 밸런스를 맞추는 거죠. 최근에는 스테인리스로 커틀러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스테인리스가 식기류를 만들 때는 무척 좋은 재료예요. 다른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은이나 황동, 적동과 달리 색도 변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다루기에는 어려운 재료예요. 땜이 아닌 용접을 해야 하고, 공방 수준을 넘어 공업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어 어떻게 하면 기존의 제 방식대로 할 수 있을지 고민 중입니다. 기하학 형태의 장신구들. 심현석은 강도가 높은 스털링 실버를 주로 사용하며, 최근에는 스테인리스도 활용하고 있다.© 심현석 귀엽고 재미있는 모양의 장신구들. 그는 작업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정교하고 미학적인 작품과 즐겁고 유쾌한 작품을 병행하여 만든다. 그를 대표하는 작업물은 은으로 만든 수제 핀홀 카메라다. 몸체는 물론 내부에 들어가는 모든 부품까지 직접 제작하기 때문에 최소 몇 개월의 작업 시간이 필요하다. 기존 방식이란 무엇인가요? 모든 공정을 제 두 손으로 직접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범위를 잘 알고 있고, 그 능력과 정도에서 잘하려고 하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보통은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물건을 만들기가 어려운데, 저는 그런 작품을 잘 만들고 또 더 잘하고 싶어요. 대표작 핀홀 카메라는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요? 핀홀 카메라가 제 이름을 세상에 알려준 작품이기는 하지만 안 만든 지 여러 해 되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운 좋게 라이카 카메라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한 적이 있었는데, 제 작업을 촬영하려면 다른 렌즈를 사야 했어요. 가격을 알아보니 900~1000달러 정도 되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막상 렌즈를 만들어 끼워 보니 사진이 찍히더라고요. 몸체도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지요. 그래서 내 손으로 온전한 카메라를 만들게 되었고, 사진을 찍어 현상을 해 보니 제대로 사진이 되어 나왔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작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내게 필요한 걸 만들어 보고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면 그때 비로소 작품을 시작하는…. 긴 세월에 걸쳐 도제식 교육을 받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대학 때 우연히 우진순(Woo Jin-soon 禹眞純) 선생님을 뵙게 됐어요. 학교에 강의 차 나오셨는데 이후 자연스럽게 인연이 됐지요. 은을 다루시는 방식이나 미감에서 끌리는 부분이 많았어요. 스웨덴 스톡홀름 국립디자인공예대학에서 공부를 하신 덕분에 북유럽 작가들이 어떤 작품을 어떻게 만드는지 배우는 것도 좋았고요. 1992년도부터 2018년까지 함께했는데, 가끔 토요일에 뵐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주말을 제외하고 아침 5~6시에 시작해 오후 3~4시까지 작업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작업실을 빼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제가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됐어요. 지금은 매일 아침 9시에 시작해서 저녁 6시까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오늘 하루를 잘 살자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 가야지 생각하기보다는 시냇물 위를 흘러가는 나뭇잎처럼 오늘 하루도 이상한 곳에 빠지지 말고 잘 흘러가자, 내 앞에 있는 길을 잘 헤쳐 나가자 생각합니다. 계획도 잘 세우지 않아요. 선생님과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성격 탓일 거예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범위를 잘 알고 있고, 그 능력과 정도에서 잘하려고 하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보통은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물건을 만들기가 어려운데, 저는 그런 작품을 잘 만들고 또 더 잘하고 싶어요.” 2009년 크래트프 아원에서 열린 그룹전 전에 심현석이 출품한 작품이다. 그는 고도의 집중력과 섬세함이 필요한 작은 크기의 작품에 강점을 보인다. © 심현석 도제 수업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사실은 제가 무척 덜렁대는데 선생님께 배우는 동안 꼼꼼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어요. 꼭 지켜야 할 과정을 건너뛰지 않으면서 그게 습관이 되고, 또 제 작업 태도가 된 것 같아요. 사포질을 예로 들면 240, 400, 600 등 사포의 방 숫자가 커질수록 금속 표면을 더 곱게 갈아내는데, 저는 단계를 건너뛰지 않고 각 과정에서 그에 맞는 사포로 연마 작업을 계속하거든요. 몇 단계를 건너뛴다고 해서 결과에 큰 차이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저는 꼭 그렇게 했어요. 하나 더 말씀드리면, 두 개의 판을 붙이는 땜 작업을 하려면 판 사이에 붕사라는 재료를 발라 줘야 해요. 그 재료가 땜이 잘 흐르게 하고 산화도 막아 주거든요. 그런데 그런 작업을 깨끗한 환경에서 하는 게 의외로 쉽지 않아요. 공방은 주변이 어수선해지기 십상이죠. 하지만 선생님이나 저나 깔끔한 성격이라 늘 주변을 정돈했고, 손도 깨끗이 씻은 다음에 작업을 했습니다. 제 작품을 매우 간결하다고 평가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런 작업 공정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나 계획이 있으신지요? 지금처럼 꾸준히 할 뿐이지요. 해외 전시 계획이 있어서 그 준비도 해야 하고요. 아, 그러고 보니 ‘공예수선소’를 해 보고 싶기는 합니다. 제가 금속을 다루는 사람이다 보니 주방 도구를 땜으로 고치거나 무언가를 덧대 다시 살리는 작업을 잘할 수 있거든요. 금속공예품의 장점은 깨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심하게 찌그러져도 반대쪽에서 힘을 가하면 어느 정도 원상 복구가 가능해요. 찢어진 가죽 소파를 바늘로 꿰매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렇게 망가진 물건을 살려내고 애초에 그걸 가졌던 사람이 오래오래 사용할 수 있다면 보람 있는 일이죠.

작은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

People 2021 AUTUMN 1952

작은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 통계청에 의하면 2019년 11월 현재 전국 1천 813만 호의 주택 가운데 62.3 퍼센트가 아파트였다. 이처럼 한국인의 대표적 주거 형태를 이루는 아파트에는 입주민의 안전을 돌보고, 분쟁이나 민원을 해결하며 건물을 관리해주는 등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관리소 직원들이 있다. 이상용(李相龍) 씨는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510세대로 구성된 아파트 단지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급한 민원이 들어와 인터뷰 시간을 30분 늦추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연락을 받고, 오후 네 시 반에 관리사무소에 들어섰다. 단지 옆 신축 건물 공사로 인해 소음이 발생한다는 것이 급한 민원이었고, 회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언쟁이 오가나 했더니 잠시 후 입주자 대표와 공사 현장 담당자 등이 일어나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마주한 이상용 씨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문제가 있거나 불만이 있는 분들이 저를 찾아오시니, 늘 이래요.” 민원을 해결하고 분쟁을 조정하는 것은 관리소장의 주요한 업무 중 하나이다. 이상용씨는 2009년 육군 예비역 대령으로 전역한 뒤 지금은 서울 마포구 강변힐스테이트 아파트 관리소장으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다양한 민원 “이야기가 잘 되면 괜찮은데 가끔 상식에 어긋나는 사람도 있죠. 지난봄에는 109동 사는 분이 민원을 계속 넣었는데, 그 동이 가라앉고 있다는 거예요. 모든 세대가 냉장고를 같은 자리에 놓아두고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우기 때문에 그 무게 때문에 침하한다, 베란다 뒤에 균열도 보인다고 주장해요.” “우리 아파트는 3년에 한 번씩 정밀 점검을 받고 있고, 2019년에도 점검을 받았지만 문제가 없었다”고 아무리 말해도 믿지를 않자 결국 입주자 대표회의에 안건을 올려서 세 군데 전문업체한테 문의를 했다. 결론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고, 이상용씨는 “내년에 또 정밀 점검을 하니 이상이 있으면 조치하겠다”고 겨우 설득에 성공했다. “아무리 황당한 민원이어도 모른 척할 수는 없고, 반드시 처리한 다음 결과를 이야기해주어야 해요.” 가장 빈번하고 골치 아픈 민원은 소음이다. 몇 주 전, 위층에서 아이들이 너무 뛰어서 잠을 못 자겠다는 민원이 밤 열 두 시쯤 들어왔다. 당직하던 경비원이 위층에 인터폰을 넣어서 사정을 말했지만, 밤 늦게 연락을 했다고 한참 욕을 먹었다. 이 사실을 다음날 아침에 보고 받은 이상용 씨는 무척 속이 상했다. “그분 입장도 이해가 되지만 경비원은 무슨 죄예요. 층간소음의 경우에는 솔직히 방법이 없을 때가 많아요. 바로 위층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하기도 해요. 아래층에서 민원이 들어왔다고 하면 나쁜 감정을 가질 수도 있으니 여러모로 조심스럽게 말하라고 직원들을 교육합니다.” 지하주차장에 드나드는 차소리가 시끄러우니 해결해달라는 주민도 있었다. 공용시설은 경비용역업체가 관리하고 개인시설은 입주자 각자가 관리해야 하는데, 경계가 불분명한 것도 있고 입주자 입장에서는 다 공용시설이라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상용 씨는 경비원과 미화원을 포함해 총 열 세명의 직원들을 통솔한다. 그는 입주민은 물론 직원들과의 소통 역시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의 하루 일과는 반복적이면서도 규칙적이다. 아파트 단지 전체에 안내방송을 하는 것도 그 중 하나인데, 요즘은 코로나 19로 인해 안내 방송이 더 잦아졌다. 입주민들은 매일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이상용씨를 찾아온다. 그는 민원을 꼼꼼하게 듣고, 입주민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도우려 노력한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하루 종일 조용할 틈이 없다. 직업군인에서 관리소장으로 이상용 씨가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딴 것은 2011년, 지금 아파트의 관리소장으로 온 것은 2019년이었다. 주택관리사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500세대 미만의 주택에서 3년 이상 경험을 쌓아야 500세대 이상주택의 관리를 맡을 수 있다. 그는 2012년에 250세대가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일을 시작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자격증 시험이 없었다. 아는 사람에게 맡겨 주먹구구식으로 관리했다. 지금은 해마다 주택관리사 자격증 시험이 있고 1,500~2,000명이 합격한다. 자격증을 딴다고 모두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서비스직이라서 적성이 맞아야 한다. 불만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대처를 잘못하면 쉽게 감정 싸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직업의 좋은 점은 정년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모두 다 오래 일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나이가 많다고 일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입주자들이 싫어할 수 있어요. 젊은 사람들은 아이디어가 많지만 경험이 부족하고, 나이 든 사람들은 기계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지만 뭘 바꾸려고 하지 않죠. 장단점이 있어요.” 주택관리사가 되기 전에 이상용 씨는 32년 간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다. 2009년 6월 중령으로 제대해 지인이 하는 군 관련 회사에서 잠깐 근무했다. 그러다 한 선배가 적성에 맞을 거라며 권유해 주택관리사 시험을 봤다.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군대에서의 경험이 일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많다. 지휘관으로 근무할 때 원칙 중 하나가‘1% 지시, 99퍼센트 확인’이라는 것이었다. ‘지시는 짧게 하고 확인은 철저하게 하라’는 군대의 지휘 체계가 관리 업무에도 잘 적용된다. 출근시간은 오전 9시지만 그의 하루는 8시 5분에 시작된다. 오전 6시에 기상했던 군대 시절의 습관 때문에 5시면 눈이 떠진다. “집에서 전철을 타고 여기 오면 정확하게 8시 5분이에요. 월, 화, 금요일에는 사무소로 바로 들어오지 않고 우선 단지 안을 한 바퀴 둘러봐요. 월요일에는 주말 동안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화요일에는 분리수거 업체가 오는 날이니까 수거 후 청소 상태 를 확인하고, 금요일에는 주말 동안 쉴 테니 여기저기 꼼꼼하게 둘러보죠.” 이해심과 참을성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는 없는지 묻자 “없다고는 못하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이 힘들기 보다는 상식을 벗어난 사람들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을 해달라고 하는 입주민은 으레 감정이 나빠지면 “우리가 봉급 주는데”라는 말을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비애감이 든다. 이상용 씨는 그럴 때 시간을 가지며 마음을 다스린다. 서로 마음이 풀린 다음에 이야기하면 대부분 해결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 일하는 아파트에는 심한 갑질이 없다. 대신 자랑할 것이 많다. 이 아파트 단지에는 매주 화요일마다 과일 행상이 온다. 그 행상에게 매주 경비원 6명, 미화원 5명의 과일 값 6만원을 지불하는 입주민이 있다. “1년은 52주인데 작년에 그 행상이 51번 왔어요. 1년이면 삼백만원이 넘죠. 제가 여기 오기 전부터 하신 일이라는데, 처음에는 부모님이 하다가 지금은 따님이 한대요. 인사를 드리러 찾아갔더니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말라고 하세요. 우리가 청소를 하거나 다른 작업을 하고 있으면 빵이나 음료수를 사주시는 분들도 많아요.” 오후 6시에 퇴근을 하고 6시 50분 전철로 귀가하여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TV 드라마를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저녁 10시 반에는 잠자리에 든다. 주말에는 맛있는 걸 먹으러 가거나 바둑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서울 외곽에 있는 친척집에 가서 텃밭을 가꾼다. 이상용 씨는 뭔가를 돌보고 가꾸는 것을 좋아한다.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지금도 텃밭에서 일을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관리소장에게 필요한 적성으로 그는 이해심과 참을성을 꼽았다. 사람과 부딪치는 일이니 이해하고 배려하고 참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아파트라는 공동체는 시계 바늘처럼 정확한 그의 일상과, 마을을 지키는 커다란 나무처럼 듬직한 그의 배려에 의해 오늘도 차곡차곡 돌아가고 있다. “작년에는 아파트 정문 쪽이 휑해 보여서 꽃을 심기로 했어요. 같이 꽃을 심을 분들은 나오시라고 방송을 했더니 아이들 데리고 여러 분이 오셨어요. 함께 꽃을 심고 나서 광장에서 막걸리 한잔 같이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어요. 애로사항이 있어도 얘기 못하는 분도 많거든요. 그럴 때 듣는 거죠. 순찰을 돌고 있으면 때로는 그에게 다가와 “소장님, 그때 고마웠어요, 도움을 받았어요, 수고하셨어요”라고 말해 주는 주민이 있다. “이분들이 내가 한 일을 알아주는구나. 이 일을 하기를 잘했구나.”그가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아파트라는 공동체는 시계 바늘처럼 정확한 그의 일상과, 마을을 지키는 커다란 나무처럼 듬직한 그의 배려에 의해 오늘도 차곡차곡 돌아가고 있다. 고즈넉한 한강변에 자리한 이 아파트 단지는 510세대의 비교적 아담한 규모지만, 주위에 다른 아파트 단지들과 함께 건축된 서울 도심 서쪽 주거지역의 일부이다.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하지권 사진작가

식물이 주는 힘, 홈가드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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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 주는 힘, 홈가드닝 식물이 주는 힘, 홈가드닝 한국인들은 급속한 경제개발과 도시화로 인해 마당에서 식물을 가꾸던 오랜 관습을 잃어버렸고, 젊은 세대일수록 땅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 세대의 정원문화는 이제 시간이 흘러 인테리어와 힐링이 결합하며 젊은 세대사이에 홈가드닝(interior gardening)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코로나 19로 인한 거리두기에 따라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며 실내에서 식물을 기르는 홈가드닝이 젊은 층에까지 확산되는 추세다. 온라인으로 들을 수 있는 식물 큐레이션 클래스도 다양하다. © CLASS 101 서울 마포구에 사는 직장인 박은진(36) 씨는 코로나 19 사태 이후 재택근무가 늘어나며 홈가드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무료한 집콕 생활에 작은 활력이 필요해 화분을 하나 샀던 것이, 이제는 베란다를 가득 초록 식물로 채웠다. 요즘 그는 식물들이 없던 집안에서 어떻게 생활했나 싶을 정도로 바뀐 분위기에 만족하고 있다. 그는 “코로나 19로 불안하고 우울했는데, 식물을 돌보며 마음이 편안해서 안정감이 든다”고 말한다. 서울 성동구의 워킹맘 김경선(39) 씨는 우연히 가드닝 원데이클래스를 듣고 식물에 빠졌다. 부모 세대가 정원에서 즐기던 가드닝만을 생각하던 그녀는 이토록 다양하고 트렌디한 실내 가드닝의 종류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고 한다. 집에서 함께 키우는 강아지와 고양이가 무작정 풀을 뜯어 씹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해한 식물들을 골라서 가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키울 수 있는 식물의 종류는 무척 많다. “요즘 주말 농장이나 유치원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베란다에서 작은 식물 키우기로 시작했는데 인테리어 효과에도 좋다”며 코로나가 끝나면 오프라인 클래스에 등록해서 본격적인 플랜테리어를 배울 예정이라고 한다. 10여 년 전 은퇴세대를 중심으로 불기 시작한 홈가드닝 붐이 점점 중장년층에서 젊은층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팜린이’라는 신조어도 이들을 일컫는 단어다. 농사를 뜻하는 영어‘farm’과 children의 한국어 ‘어린이’를 결합한 것으로 원래는 레알팜이라는 모바일 소셜 네트워크 게임의 입문자를 일컫는 용어였지만, 최근에는 홈가드닝을 시작하는 초보자를 뜻하는 애칭으로 더 널리 쓰이게 됐다. 국민 77.2%가 아파트를 포함한 공동주택에 사는 주거문화를 감안한다면, 마당 없는 콘크리트집에서 나고 자란 젊은 세대가 손에 흙을 묻히며 식물을 가꾸기 시작했다는 변화는 의미가 크다. 코로나블루를 겪는 많은 사람이 식물을 기르고 만지며 마음을 다스린다. 불안과 우울을 덜어주는 세로토닌 덕분이다. 최근 반려식물이 더욱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박희란 아이들은 집에서 화분을 돌보며 자연을 경험할 수 있다. 마당에 국한되던 정원의 개념이 주거 형식이 바뀌며 아파트 거실, 도심 속 옥상까지 확장됐다. ⓒ gettyimagekorea 보타닉 트렌드 2018년 10월 식물원과 공원을 결합한 서울 최초의 ‘보타닉 공원’ 서울식물원(Seoul Botanic Park)이 문을 열었고, 개장 2년반 만에 누적 관람객 1천만 명을 돌파했다. 코로나 시국을 감안하면 무척 높은 수치다. 나는 여기서 이 일대 상업시설들 명칭이 온통 ‘보타닉’ 일색이 된 현상에 주목했다. 인근의 아파트뿐 아니라, 호텔, 예식장, 식당, 커피숍, 복덕방, 당구장, 병원, 편의점까지 많은 시설들이 이 단어를 상호에 달고 있다. 올해 초 금융 중심가 여의도에는 서울에서 제일 큰 규모의 백화점 ‘더현대’가 문을 열었다. 이곳은 전체 영업면적 가운데 49%를 실내정원과 고객 휴식공간으로 채웠다. 상품이 빼곡한 진열대로 가득 찼던 기존의 백화점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백화점 인테리어의 새로운 경향을 제시했다. 실상은 롯데·신세계·현대가 각축을 벌이는 ‘빅3’ 백화점 업계가 몇 년 전부터 ‘가드닝 디스플레이’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해온 결과였다. 따라서 코로나 전부터 서서히 뿌리를 확장해온 보타닉 트렌드가 코로나와 만나 본격적인 홈가드닝 열풍을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 있다. 지난 1월, 국내 대형 쇼핑몰 롯데마트에 따르면 가드닝 상품군 매출은 코로나 시국에 따른 전체 매출의 급감에도 불구하고 2019년 17.6% 성장에 이어 2020년에도 18.7%로 상승세를 이어갔다. 특히 집콕 생활이 본격화된 2020년 한 해 동안 화분과 화병 매출은 각각 46.5%, 22.3% 증가했다. 온라인 쇼핑 플랫폼 인터파크에 따르면, 2020년 하반기 가드닝 관련 매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2% 신장했다. 이는 단순히 국내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의 설문조사기관 Advance Monthly Retail Trade Survey에 따르면 팬데믹 이후 미국 내 대부분의 소매판매 업종이 급격한 매출 감소세를 겪었으나, 홈가드닝 분야는 10% 가까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시장이 최근 몇 년간 5%내외의 증가율을 보였던 것에 비하면 눈에 띄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플랜테리어와 반려식물 홈가드닝 열기는 코로나 19가 낳은 또 다른 현상인 ‘플랜테리어’와도 연결된다. 플랜트(plant)와 인테리어(interior)의 합성어인 이 용어는 최근 인테리어 시장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고, 코로나 19와 맞물려 폭발적인 수요를 창출했다. 2020년 12월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農林水産食品敎育文化情報院, Korea Agency of Education, Promotion & Information Service in Food, Agriculture, Forestry & Fisheries)이 발표한 ‘화훼 소비 트렌드에 대한 빅데이터 분석 결과’를 보면 화훼산업 과 꽃 관련 온라인 관심도는 2019년 코로나 이전과 비교해 약 10.3% 증가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 이후 화훼 분야 소비 트렌드는 ‘반려식물 및 플랜테리어’로 나타났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지난 해 12월 카드 매출 데이터의 분석 결과를 담아 발표한‘코로나19가 가져온 소비 행태의 변화’ 보고서에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화원·화초의 2020년 1~2월 매출이 전년도에 견줘 각각 8%, 10% 줄었다가 3월부터 회복세로 돌아섰는데, 코로나의 위험성이 커지고 사회적 거리두기와 재택근무가 일상화되기 시작했던 시기와 맞물린다. 이후 매출은 4월부터 10월까지 매달 최소 4%에서 최대 30%까지 증가했다. 이 보고서는 말미에 “플랜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며 화원·화초의 매출이 늘었다”고 분석했다. 홈가드닝은 코로나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개인의 이슈와 맞물려 플랜테리어 문화를 본격적으로 확장시켰다. 이와 동시에 우리 삶에 익숙해진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반려식물’이다. BTS를 비롯한 여러 연예인들이 자신들이 기르는 식물을 SNS를 통해 공유하고 반려식물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대중의 관심도 증가했다. 이제는 단순히 1인 가구나 노령층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폭넓은 관심을 유발하고 있다. 관련 산업의 성장 해외에서도 여러 기업들이 기존에 없던 다양한 서비스와 제품들을 출시하며 적극적으로 홈가드닝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중국의 로봇 제조 스타트업인 빈크로스(Vincross)는 반려식물에 로봇 기술을 접목해 반려 동물처럼 움직이는 로봇 반려식물을 개발했다. 오스트리아의 스타트업인 하버트(Herbert)는 반려식물의 인테리어 기능을 강조한 수직공간에서 자라는 반려식물 시스템을 개발했는데, 포닉스 시스템(Ponix Systems)으로 불리는 이 방식은 액자와 같이 실내 벽면에서 수직으로 반려식물을 키울 수 있는 서비스다. 이 외에도 집을 비워야 할 때 반려식물을 맡길 수 있는 반려식물 전용 호텔 서비스나 반려식물을 치료해주는 병원이 등장했는가 하면, 반려식물의 각종 증상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도 있다. 국내에서는 집에서 직접 키워 먹을 수 있는 식물재배기 렌탈 사업이 호황이다. 발명진흥회 지식재산평가센터가 내놓은 '국내 식물재배기 시장 전망'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9년 100억원 수준이었던 식물재배기 시장 규모는 2023년 5000억원 규모로 확대될 전망이다. 관련 전시 산업도 활발하다. 올해 초 국립세종수목원에서는 특별전시회 ‘안녕, 나의 반려식물-Hello, My Houseplant’가 열렸고, 서울의 복합문화공간 피크닉의 전시장에서는 10월까지 ‘정원 만들기-Gardening’전시가 계속된다. 심리학자 스티븐 카플란(Stephen Kaplan)은 인간이 축적된 정식적 피로를 회복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자연을 찾는다는 ‘주의력 회복 이론(Attention Restoration Theory)’을 주장했다. 식물은 세로토닌을 분비해 불안과 우울감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다. 홈가드닝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은 식물이 주는 치유의 능력을 경험했다. 코로나 19사태가 끝난 후에도 홈가드닝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로 자리잡아 갈 것이라 예측된다. 홈가드닝은 코로나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개인의 이슈와 맞물려 플랜테리어 문화를 본격적으로 확장시켰다. 이와 동시에 우리 삶에 익숙해진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반려식물’이다. 온라인 홈가드닝 클래스는 단순히 화분에 흙을 넣고 식물을 심는 것에서 벗어나 벽걸이 액자 오브제 같은 트렌디한 작품을 손쉽게 배울 수 있는 것까지 다양한 과정이 있다. ⓒ CLASS 101 홈가드닝 클래스는 식물 큐레이션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식물을 화분에 심는 과정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 생활의 전반을 함께 고민하고 그동안 식물 생활에 실패한 이유, 식물로 공간을 꾸미는 방법 등을 알려준다. ⓒ CLASS 101 정대헌 (Jeong Dae-heon 鄭大憲) 사단법인 한국생활정원진흥회 회장 ( President, Korea Gardening Life Association), 월간 가드닝 기자(Reporter, Monthly Magazine Gardening)

색다른 지역 관광을 주도하다

People 2021 AUTUMN 1904

색다른 지역 관광을 주도하다 색다른 지역 관광을 주도하다 전라북도 농촌 도시인 순창에 사는 레아 모로 씨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구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길 원한다. 레아 모로는 매주 닷새동안 전라남도 순창군 투어 버스인 ‘풍경버스’에서 안내를 진행한다. 풍경버스는 강천산 군립공원, 전통고추장 민속마을, 채계산 등 순창의 주요 관광명소를 돈다. 프랑스 리옹 근처 인구 1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 이제롱(Yzeron) 출신인 레아 모로 씨는 자신이 ‘주류 여성’이 아니라고 소개한다. 케이팝 그룹 중 BTS와 블랙핑크에 감탄하긴 해도 그녀가 아주 좋아하는 가수는 인디밴드 새소년이다. 그리고 서울의 명소보다 소도시의 생활을 선호한다. 풍부한 전통 문화와 관습이 남아 있는 전라북도 시골 도시인 순창에서 레아 씨는 지역 공무원으로 관광 홍보 일을 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외국인이 지역의 관광 명소를 격찬하며 홍보하는 걸 보면 당연히 놀란다. 레아 씨의 한국어 발음은 완벽하지 않지만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전달할 때는 자연스럽게 기분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순창은 고추장과 많은 명승지로 유명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쉽게 닿지는 않는 곳이다. 더 많은 방문객을 유치하고 이들이 주변을 쉽게 둘러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순창군은 2019년에 버스 투어를 도입했고 이를 위한 가이드를 찾고 있었다. 재즈 카페를 운영하는 레아 씨의 친구가 그녀를 추천했다. “제가 불어, 영어, 한국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인과 외국인 관광객 모두 유치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친구가 설득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이미 유튜브 여행 채널을 운영하고 있었고 관광산업 관련 경험도 있었다. 순창군이 그녀를 위해 관광 홍보관 자리를 만들기로 결정했지만 외국인을 공무원으로 채용하기 위해서는 상부 기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6개월 후에 그녀는 홍보관으로 채용되었다. 지역 사람들은 그녀를 “프랑스 공무원”이라 부른다. 레아 씨는 군에서 인기가 많다. 그녀는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데 보관함에는 작업용 장갑, 아줌마 바지, 카메라와 한복이 들어 있다. 그녀의 일을 수행하면서 농부들에게 도움을 줘야 할 때도 있고 비디오 영상을 찍고 싶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KBS의 같은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는 것 역시 자신이 맡은 홍보 일의 일부라 생각한다. 그녀는 소도시에는 볼 게 별로 없다는 편견을 떨쳐버리고 한국에는 서울과 케이팝과 케이드라마 외에 훨씬 더 경험할 게 많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방랑벽 고향 마을 이제롱에서 순창까지 오게 된 건 여행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프랑스 시골에서 자란 레아 씨는 늘 바깥세상이 궁금했다. 그러다 어린 시절 가족이 발리에 배낭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오토바이를 탔어요. 부모님은 저와 제 여동생을 다리 사이에 태우셨죠. 이 여행이 제 삶의 모든 걸 바꿔놓았다고 생각해요.”라고 그녀는 회상한다. “여행을 통해 세상에는 다른 모습의 사람, 다른 문화, 다른 언어가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게 더 많은 기회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레아 씨는 호주에서 18개월 동안 일하고 영어를 배우고 때때로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Great Barrier Reef)에서 다이빙을 즐겼다. 이후 태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동남아시아 여행을 했다. 결국 여행 산업에 마음을 두고 온라인 수업을 듣고 관광경영 학사를 취득했다. 이 수업이 요구하는 것 중 하나가 한 나라에서 6개월간 인턴을 하는 거였다. 한국인 친구가 광주에 있는 페드로 하우스와 여행 카페를 추천했다. 2016년 그녀는 한국에 왔고 거의 2년 동안 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게 되었다. “광주를 사랑하게 되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역사를 좋아했던 할아버지로부터 한국 역사에 대해 배웠어요. 할아버지는 남한과 북한에 대해 알려주셨죠. 하지만 광주와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어요. 광주는 한국의 현대사와 한국사회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좋은 곳이었어요.” 광주에 사는 동안 그녀는 전라도 지역을 많이 여행했고 특히 인근 섬들을 포함해 외진 곳들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외국인을 위한 관광정보가 없었기 때문이 이 여행들은 외국인 배낭 여행자에게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페드로 하우스의 주인 페드로 김(본명 김현석)과 함께 가이드북을 쓰게 되었다. 책은 출간되지 않았지만 온라인에서 “전라 고 (Jeolla Go)"라는 이름의 채널로 재탄생되었다. 나중에 경상도 지역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그녀는 조선산업이 대부분의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거제도의 문화센터에서 한동안 일하기도 했다. 광주로 돌아왔을 때 순창에서의 일자리는 좀 더 지속적인 일을 추구했던 그녀에게 마침 좋은 기회가 되었다. 모로는 모국어인 프랑스어와 한국어는 물론 영어에도 능통해 주로 순창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최근에는 한국인을 더 많이안내한다. 한국인 관광객들은 그의 한국말 설명을 들으며 순창의 여러 장소를 흥미롭게 돌아본다. ⓒ Lea Moreau 아주 바쁜 가이드 관광 홍보관이자 경험 많은 배낭여행자로서 레아 씨는 다른 여행자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데 즐거움을 갖는다. 그녀는 소도시에는 볼 게 별로 없다는 편견을 떨쳐버리고 한국에는 서울과 케이팝과 케이 드라마 외에 훨씬 더 경험할 게 많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녀는 순창에는 한국에서 가장 긴 출렁다리 중 하나가 있다고 예를 든다. 또한 봄에는 벚꽃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곳 중 하나로 유명한 진해나 하동보다 덜 붐빈다. 가을에는 강천산국립공원의 단풍이 유혹적이다. 하지만 그녀가 새 일을 시작하고 얼마 있지 않아 코로나 팬데믹이 닥쳤고 관광은 사실 거의 정지된 상태다. 미소 짓는 얼굴 모습을 하고 오픈탑 형태를 갖추고 두 개의 버스를 합쳐 특별히 제작된 순창 시티투어버스는 현재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약 10명 정도 실어 나른다. 팬데믹 방침에 따라 모두 버스를 타기 전에 체온을 측정한다. 투어는 외국인 승객이 없을 때는 한국어로 진행된다. 대부분의 여행이 가상체험으로 이루어지는 이때 레아 씨의 홍보 일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지속된다. 매주 한 번 정도 그녀는 ‘전라 고’에 새로운 내용을 업로드하고 순창군의 공식 유튜브 채널인 ‘순창 튜브’에도 협업을 하고 있다. 이런 일을 그녀는 가장 좋아한다. “영상 촬영을 좋아해요. 고등학교 다닐 때 저희 반은 마다가스카로 여행을 갔고 그때 제가 촬영을 맡았어요. 물론 그때 찍은 영상의 질이 아주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촬영 기술이 좋아진 게 분명하다. 작년에 관광 비디오 컨테스트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150만원 상금으로 그녀는 파노라마 촬영을 위해 드론을 구입했다. 현지 이웃들 사이에 ‘프랑스 공무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모로는 현재 순창군 미생물산업사업소 미생물계 소속 직원이다. 순창은 고추장, 된장으로 유명하고 미생물산업사업소는 이런 발효 음식을 연구하고 홍보하는 일을 맡고 있다. 덕분에 모로는 고추장과 된장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매력에 관해 한국사람만큼 잘 안다. ⓒ Lea Moreau 꿈을 살다 레아 씨는 최근에 순창군과의 계약을 3년 연장했다. “제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일상을 공유함으로써 한국을 좀 더 잘 알게 되는 거예요.”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제가 한 곳에 머무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가 만나는 사람들과 사귄 친구들 때문이에요. 한국인은 정말 환대해 줘요. 외국인을 보면, 특히 시골에서는, 도움을 주려고 하죠. 제게는 그런 만남이 그 자체로 하나의 모험이 되고요.” 레아 씨는 자신의 한국어가 완벽하지 못함에도 동료 공무원들이 자신에게 행정 시스템과 일에 대해 알려주려고 애를 쓰는 걸 고맙게 생각한다. “저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저를 신뢰하는 걸 알고 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고마운 생각에 그녀는 일주일에 10시간 온라인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레아 씨의 개인적인 삶의 모토는 “인생을 꿈꾸지 말고 꿈을 살아라”이다. 그녀는 한국에서의 삶과 여행에 대한 책을 쓰는 것, 여행 TV쇼를 만드는 것, 지역 산업을 좀 더 홍보해서 지역공동체에 기여하는 것 등 미래에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좀 더 여행을 많이 하고 자신의 글로벌 여정을 공유하도록 영감을 주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그녀는 말한다. 조윤정 프리랜서 작가, 번역가 허동욱 사진작가

독특하고 이질적인 이야기에 대한 사랑

People 2021 AUTUMN 1598

독특하고 이질적인 이야기에 대한 사랑 독특하고 이질적인 이야기에 대한 사랑 전민희(Jeon Min-hee 全民熙)는 1990년대 PC통신망을 기반으로 등장한 판타지 소설의 1세대에 속하는 작가다. 1999년 연재를 시작한 『세월의 돌(The Stone of Days)』 이후 지금까지 수십 권의 작품을 펴냈으며, 그중 상당수가 일본·중국·태국·대만에서 출판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룬의 아이들’ 시리즈와 ‘아키에이지’ 시리즈는 게임의 밑바탕이 되었다. 경복궁 근처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판타지 소설가 전민희(Jeon Min-hee 全民熙)는 1999년 PC통신 나우누리에 『세월의 돌(The Stone of Days)』을 연재하며 데뷔했다. 그의 소설은 섬세한 묘사와 서정적인 문체로 국내외 수많은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소설가 전민희는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있고, 서울에서 가장 고즈넉한 동네인 대통령 관저 부근 마당 있는 집에 산다. 얼핏 평범한 가정주부나 커리어우먼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한국 판타지 소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 꼽힌다. 1999년 PC통신 나우누리에 연재하기 시작한 『세월의 돌』은 잡화점을 운영하는 18세 소년 파비안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목걸이의 네 가지 보석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인데 무려 400만 회 접속을 기록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판타지 소설 마니아들 사이에서 ‘전설’로 회자된다.작가 특유의 판타지 세계관은 게임 업계에서도 사랑받고 있다. 2003년 출시된 넥슨의 클래식 RPG 테일즈위버(Tales Weaver)와 2013년 출시된 엑스엘게임즈의 RPG 아키에이지(ArcheAge) 같은 인터넷 게임이 그녀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됐다. 올해로 데뷔 몇 년째인가? 1999년부터 연재하기 시작했으니 23년째다. 총 3부로 이루어진 ‘룬의 아이들(Children of the Rune)’ 1부 『룬의 아이들 – 윈터러(Winterer)』(2001~2019)가 2001년 처음 종이책으로 출간됐으니, ‘룬의 아이들’ 시리즈가 20주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룬의 아이들’ 시리즈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판매 부수는 얼마나 되는가? 7권으로 완결된 『룬의 아이들 - 윈터러』와 9권으로 끝을 맺은 『룬의 아이들 – 데모닉(Demonic)』(2003~2020)을 2018년 출판사를 바꿔 개정판을 냈다. 그때 추산해 보니 정확하지는 않지만 300만 부가량 팔린 것으로 파악됐다. 개정판을 계속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만큼 작품 퀄리티에 신경을 쓰기 때문인가? 판타지 소설가들은 대개 작품 고쳐 쓰는 걸 싫어한다. 나처럼 어떤 계기가 생겼을 때 글을 수정하는 작가는 소수에 불과하다. 이전 작품을 고칠 시간에 새 작품을 쓰는 편이 작업의 즐거움이나 명성, 수입 면에서 훨씬 낫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퇴고를 거듭해서 책을 내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다른 시점으로 다시 보면 보완하고 싶은 게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세월의 돌』은 2004년 출판사를 바꿔 다시 출간했는데, 첫 작품이라 애착이 크기는 했어도 미숙한 대목들이 빤히 보여 차마 그대로는 찍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때 고치지 않고 그냥 넘어갔더라면 이후 다른 작품들도 다시 손대지 않았을 것 같다. “흔히 판타지 소설은 주로 작가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방대한 자료 조사와 치밀한 연구가 밑바탕이 된다. 그런 사전 작업이 치밀한 구성과 섬세한 묘사를 가능케 한다.” 전 작가의 대표작 ‘룬의 아이들’ 시리즈는 1부 『룬의 아이들 – 윈터러(Winterer)』(2001~2019), 2부 『룬의 아이들 – 데모닉(Demonic)』(2003~2020)에 이어 3부 『룬의 아이들 – 블러디드(Blooded)』(2018~)가 현재 4권까지 출간되었다. 번성했던 고대 왕국이 갑자기 멸망한 지 천여 년 후 여러 국가와 세력이 끊임없이 충돌을 벌이는 가운데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싸워나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개정판에 대한 독자들 반응은 어떤가? 단순히 문장만 다듬는 수준이 아니라 새로운 에피소드를 집어넣기도 하다 보니 독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갈렸다. 개정판을 다시 사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아무래도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수정된 작품을 더 좋아해 주는 독자들이 차츰 늘어났고,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며 달라진 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공유하는 독자들도 있다. 작품이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나우누리에 처음 연재하던 20대 때는 독자들을 의식하지 않고 그냥 내가 쓰고 싶은 걸 썼다. 그런데 의외로 소설이 큰 인기를 얻게 되자, 세상에는 나랑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 취향을 오롯이 반영해도 될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를 척척 만들어 붙였다. 근본적으로는 판타지라는 장르에 내재해 있는 매력 때문이 아닌가 싶다. 판타지 소설은 한 시대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시대를 아우르는 보편성과 호소력이 있다. 거대한 세계를 조명하면서도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다는 평가를 듣는다. 어떻게 생각하나? 흔히 판타지 소설은 주로 작가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방대한 자료 조사와 치밀한 연구가 밑바탕이 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는 없는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도시 문화사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사전 작업이 치밀한 구성과 섬세한 묘사를 가능케 한다. 어떤 계기로 판타지 소설을 쓰게 됐나? 어린 시절부터 습작을 했다. 그때는 그저 쓰고 싶은 걸 썼을 뿐인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썼던 것들이 판타지에 속했다. 이 장르를 제대로 인지하게 된 건 나우누리의 판타지 동호회에서 활동하면서부터였고, 이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운이 좋았던 것 같다. 1990년대는 판타지 소설이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는데, 나와 시대적 코드가 맞았던 거다. 내 개인적인 취향이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공명함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나는 1994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4학년이던 1997년 한국이 IMF 구제금융 체제에 들어갔다. 대학 졸업 후 취직하려야 할 수도 없었고, 취직을 못 해도 하나도 창피하지 않은 시기였다. 내 입장에서는 어차피 돈을 못 벌게 됐으니 좋아하는 일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거였다. 판타지 취향은 어떻게 생기게 됐나? 아마도 어렸을 적 어린이용 세계 문학 전집을 읽으며 생긴 것 같다. 나는 독특하고 이질적인 이야기들을 좋아했는데, 이를테면 ‘삐삐 롱스타킹’ 시리즈로 유명한 스웨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 같은 작품을 정말 좋아했다. 『룬의 아이들 - 윈터러』가 그 작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을 나중에 깨닫게 됐다. 자신의 소설이 어떤 특징을 보인다고 생각하나? 그걸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닌 것 같다. 독자들이 내 소설 세계를 비평하는 글을 내놓을 때가 가끔 있다. 이를테면 어떤 독자들은 내 작품을 ‘청소년 소설’ 스타일로 규정한다.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한국 독서 시장에 청소년 문학이라는 영역이 정착되었지만, 내가 처음 소설을 쓸 때는 그런 카테고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청소년을 타깃 독자층으로 삼았던 이유는 전근대 시기에도 아이들은 성인식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쳤는데, 아이에서 어른으로 이행하는 연령대의 독자들을 위해 통과의례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룬의 아이들 - 윈터러』가 그런 구조라고 생각한다. 어떤 아이가 부모님을 비롯해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두려워서 도망쳤던 최초의 대상과 대면하게 되는 내용이다. 오래된 독자도 많을 것 같다. ‘룬의 아이들’ 시리즈 중 2부의 마지막 권이 나온 게 2007년인데, 3부 『룬의 아이들 – 블러디드(Blooded)』 1권을 2018년에 출간했다. 무려 10년도 넘어서 나온 거다. 그동안 내 소설을 잊어버린 독자도 있을 수 있고 취직을 하거나 결혼을 한 독자도 있을 텐데, 폭설이 내린 겨울 아침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열린 작가 사인회에 무려 500명이나 나타났다. 그때 정말 깜짝 놀랐다. 초등학생, 중학생 때 『룬의 아이들 - 윈터러』로 내 소설에 입문해 이제는 20~30대가 된 독자들이 나를 찾아준 것이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사실상 올해 스케줄이 꽉 차 있다. 손대고 있는 게임 시나리오 작업도 해야 하고, 『룬의 아이들 - 블러디드』도 계속 써야 한다. 신준봉(Shin June-bong 申迿奉) 『중앙일보』 기자 한상무(Han Sang-mooh 韓尙武)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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