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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WINTER
가족을 맞이하듯 손님을 맞이한다
낯선 도시에서 실패 없는 식사를 하려면 택시 기사에게 물어보라는 말도 있다. 어디로든 이동이 가능한 기사들은 곳곳에 위치한 가성비 좋은 음식점들을 훤히 꿰고 있을뿐더러 시간과 경험을 바탕으로 검증된 리스트이니 신뢰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위치한 ‘감나무집 기사식당’은 맛집에 밝은 기사들의 발길이 밤낮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감나무집 기사식당 주인 장윤수 씨가 손님상에 내 놓을 음식을 서빙하고 있다.
한국에서 기사식당은 말 그대로 기사, 그중에서도 택시 기사들을 위한 식당이다. 기사들을 주 고객으로 맞이하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우선 차를 댈 수 있는 넉넉한 주차 공간이 필요하다. 메뉴는 다양할수록 좋지만, 시간이 걸리면 곤란하다. 직업의 특성상, 새벽이나 밤중에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저렴한 가격, 푸짐한 양, 변함없는 맛이 더해져야 한다.
365일, 24시간 열려있는 식당
감나무집 기사식장의 주인인 장윤수(張倫秀) 씨의 하루의 시작은 매일 다르다.
“새벽부터 나올 때도 있고, 시장을 가는 날이면 좀 늦을 때도 있고. 시간을 정해두고 일을 하지는 않아요. 집에서 잠시 쉴 때도 모니터로 가게를 수시로 들여다봐요. 모니터링하다가 손님이 많다 싶으면 만사 제쳐두고 냅다 뛰어가죠.”
한국의 기사 식당은 주차장 구비, 푸짐한 한 상, 빠른 회전 등이 특징이다.
주차장, 식당, 살림집이 나란히 붙어 있는 구조다. 일과 휴식을 분리할 수 없는 이 구조는 장 씨에게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집이 가까워야 통제가 돼요. 바쁘다고 호출하면 금방 갈 수 있으니까. 24시간 전천후지.”
한 번에 70여 명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은 점심식간이면 순식간에 만석이 된다. 연중무휴, 24시간 영업 중인 감나무집이 문을 연 건 25년 전이다.
“다른 데서 한정식집도 하고, 갈빗집도 했는데 잘 안됐어요. 다 털어먹고 집으로 들어왔지. 여긴 우리 집이니까. 처음에는 함바집(건설 현장에 임시로 지어 놓은 식당)을 했어요. 일꾼들이 일을 일찍 시작하니까 우리도 새벽 장사를 했는데 그러다 보니 근처를 오가던 택시기 사들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 사람들이 더 늦게까지 장사하면 좋겠다고 해서 24시간 문을 열기 시작한 거죠.”
언제 찾아가도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데다 값은 저렴하고 음식은 맛있다. 국과 반찬도 매일 바뀐다. 당연히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근처에 기사식당이 많았는데 순댓국, 설렁탕 같은 단일 메뉴만 있었어요. 우리는 백반집이었지. 당시 기사들은 대부분 형편이 좋지 않고 맞벌이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일하다 보면 집에서 밥을 못 챙겨 먹으니까, 집밥이 그리웠겠죠. 사 먹는 음식은 혼자 먹기도 어렵고, 비싸기도 했으니까요. 여기 오면 미역국, 된장국, 콩나물국처럼 집에서 늘 먹는 국과 반찬이 있으니까 좋아하더라고요.”
집에서 먹던 음식 그대로
장윤수 씨의 고향은 충청도이다.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대가족 속에서 살았다. 농사를 크게 짓느라 집은 언제나 일꾼들과 가족들로 북적거렸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할머니와 어머니는 늘 주방에서 밥을 짓고, 김치를 담그고, 나물을 무쳤다.
“맨날 다듬고 무치고, 그거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어요. 친구들이 놀러 오면 배추 뽑고 오이 따서 잘라보고 무쳐보고 짜다, 싱겁다, 이거 넣어보자, 저거 넣어보자면서 놀았죠. 국물 내고 밀가루 반죽해서 칼국수도 만들고…. 어른들이 먹어보고 맛있다고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어요. 엄마가 가서 공부하라고 혼내면 도망 다니고…. 재미있는 게 따로 있는데 공부가 되겠어요? 나는 요리사하고 음식 장사 하련다, 그거 하면서 재미있게 살련다, 생각했죠.”
집에서 해 먹던 음식 그대로 만들어 손님에게 내놓는다. 강원도에서 농사지은 콩으로 된장도 직접 담근다.
감나무집의 인기 메뉴인 돼지불백과 오징어볶음
“기사들에게 빨리 내놓을 수 있는 음식, 그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 저렴하지만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뭘까 하고 연구 많이 했어요. 그래서 나온 게 돼지불백이죠.”
‘돼지불백’ 즉 ‘돼지불고기백반’은 이곳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이다. 메인 메뉴인 돼지불고기를 푸짐하게 쌈 싸 먹을 수 있게 상추, 배추같은 야채도 함께 낸다. 여기에 밑반찬 서너 가지와 계란프라이, 잔치 국수가 쟁반에 함께 나온다. 밥이 가득 담긴 밥솥이 식당 한쪽에 있어 추가로 주문하지 않아도 밥을 양껏 먹을 수 있다. 메인 메뉴인 돼지불고기를 제외한 나머지 반찬과 국 등도 리필할 수 있다. 식사 후에는 자판기의 무료 커피와 건빵으로 입가심도 할 수 있다. 연말에는 택시 안에 놓아둘 수 있는 작은 달력을 만들어 나눠준다.
“전에는 눈대중, 손대중으로 내가 간을 보면서 만들었는데, 우리 아들이 군대 가기 전에 내 레시피를 다 문서로 만들었어. 옛날 맛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거지.”
레시피와 일일 판매량은 ‘일급비밀’이다.
집 같은 식당, 가족 같은 손님
이전에는 감나무집을 찾는 손님은 단연 기사들이 많았는데, 요즘엔 일반인들의 비중이 훨씬 많다. 다양한 반찬을 맛볼 수 있는 백반집이 점점 사라져 있는 요즘, 집에서 해 먹는 것보다 가성비 있게 즐길 수 있어 젊은이들이나 아이가 있는 가족들도 많이 찾는다. 또 한국의 집밥을 체험해 보고자 하는 외국인 여행객들도 많이 찾는다.
장윤수 씨의 하루는 손님이 많은 때와 적은 때로 나뉜다. 매일 새벽 시장을 봐서 가게로 온다. 바쁜 아침 시간에는 식사를 거르고 손님이 뜸해지는 오후 두 시경에 점심을 먹는다. 세 시부터 일곱 시까지는 가능하면 휴식을 취한다. 휴대전화를 잠깐 들여다보고 모자란 잠을 보충한다.
주말 저녁 시간이 제일 바쁘다.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손님의 행렬이 새벽까지 이어진다. 주방과 홀을 오가며 손님들의 상을 살피면서 부족한 것은 채우고 필요한 것은 가져다준다. 어떤 걸 잘 먹는지, 무엇을 남기는지 체크하여 더하고 덜할 반찬을 정한다. 밤 열 시쯤 늦은 저녁 식사를 한다.
최근에는 택시기사뿐만 아니라 집밥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 한국의 집밥을 체험해보고자 하는 외국인 등 다양한 손님이 24시간 방문하고 있다.
평일에는 새벽 한 시쯤 식당을 나서지만 주말에는 새벽 서너 시가 되어서야 손을 털 수 있다. 남편은 함께 장을 보고 바쁜 시간이면 주차장도 관리한다. 엄마를 닮아 요리를 좋아하는 아들은 든든한 동지가 되어 함께 일한다. 일일 2교대 또는 3교대로 일하는 직원은 스무 명이 넘는데 십 년 넘게 일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모두가 가족이고 ‘한집에서 함께 살며 끼니를 같이하는’ 식구이다. 집밥을 먹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까지.
돼지불백, 순두부찌개, 생선구이 세 가지로 시작한 메뉴는 이제 열 가지로 늘었다. 다양한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기사들을 위해 줄기차게 연구한 결과물이다.
“후회는 안 해요. 지금도 요리하는 거 좋아하고,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 그렇게 행복해요. 여기에 밥 먹으러 오는 이들도 나한텐 식구나 다름없어요. 가족 밥 해 먹이는 일이 이렇게 좋아. 난 피곤한 줄도 모른다니까.”
“돼지불백 하나요!”
성미 급한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앉기도 전에 외친다. 장윤수 씨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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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WINTER
LP로 맺어진 인연
커티스 캄부는 모험심으로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대학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오게 되었다. 12년 후 그는 자신이 두 개의 음반 레이블을 운영하고, 한국의 유명 뮤지션 박지하와 결혼하여, 중고 레코드 가게 두 곳을 운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울 마포구 상수역 근처에 위치한 두 번째 빈티지 음반 가게 모자이크 웨스트에서 음반을 듣는 커티스 캄부.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에는 스포티파이, 애플뮤직, 유튜브 뮤직 등의 플랫폼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손쉽게 스트리밍할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LP 앨범이 다시 유행하고 있으며, 그 추세는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레코드산업협회에 따르면, 세계 최대 규모의 음악산업을 보유한 미국에서는 지난 해 LP 판매량이 CD 판매량을 앞섰다. 글로벌 팝 스타부터 한국 현대 음악가까지 많은 아티스트들이 LP로 앨범을 발매하고 있으며, 젊은 층이 LP 구매를 주도하고 있다.
서울에서 두 개의 빈티지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커티스 캄부 씨에게는 이러한 트렌드가 낯설지 않다.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난 그는 17살에 고향을 떠나 파리로 갔다. 이후 전 세계를 돌아다니기로 결심하면서 뉴욕, 도쿄 등을 제쳐놓고 가장 낯선 도시인 서울을 택했다. 캄부 씨는 2012년 한국에 도착해 교환학생 과정을 마친 후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그는 음악 덕분에 자신의 사업적 감각을 발견하게 되었다. 음악 애호가로서 몇 년 동안 중고 음반 업계 사람들과 인맥을 쌓으면서 그의 음반 컬렉션은 점점 늘어났다. 2020년에는 광희문 근처 신당동 뒷골목에 자신의 첫 번째 빈티지 레코드 숍인 모자이크를 오픈했다. 신당동 일대가 유명세를 타기도 전이었다. 첫 매장이 성공을 거두자 그는 온라인 판매 사업을 시작했고, 지난해 홍대 근처에 두 번째 오프라인 매장을 오픈했다. 재능은 있지만 해외에 판매 채널이 부족한 국내 아티스트들을 알리고 싶어서, 브레인댄스레코즈를 통해 한국 일렉트로닉 아티스트의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또한, 대한일렉트로닉스를 만들어 오래된 음반을 재발매하거나 국내 아티스트의 새 앨범을 발매했다. 그는 이 앨범에 대해 “세월의 흐름에 잊힐 뻔했다가 구해낸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매장도 관리하고, 벼룩시장에서 레코드를 찾고, 매주 사무실에 입고되는 수천 장의 레코드도 분류하느라 바쁘게 보내지만, 여유가 있을 때는 그의 오랜 취미인 디제잉을 즐기기도 한다.
음악은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나?
어렸을 때 어머니가 LP판과 CD를 가지고 계셔서 항상 음악을 찾았다. 어머니는 친구들이 준 믹스 테이프를 차 안에서 들으시곤 했다. 소울을 특히 좋아하셨고, 디페쉬 모드, 더 휴먼 리그 같은 영국 신스팝을 많이 들으셨다.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가 있는지?
젊었을 때는 힙합을 많이 들었다. 집에서는 주로 빅 웨더, 마빈 게이, 샤데이 등 정통 소울 음악을 즐겼다. 그러다 사이키델릭 록 장르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이것저것 다양하게 들었다. 6개월에서 1년 정도 한 장르만 듣다가 다른 장르로 넘어가곤 했다. 한국에 왔을 때는 아방가르드, 실험 음악, 일렉트로닉 음악 등 다소 특이한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에 머무르게 된 계기는?
콕 짚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사회에서 나의 역할을 찾았다랄까. 한국의 음악 산업은 블루오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름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돕고, 사람들은 나에게 도움을 준다. 나만의 방식으로 사회에 녹아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정착하게 되었다.
졸업 후에는 어떤 일을 했나?
현대카드에서 스페이스 마키팅팀에서 일했고, 이후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로 부서를 옮겨 부매니저로 일했습니다.
어떻게 음반 레이블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주변에 해외 발매를 할 만한 수준의 아티스트들이 있었지만, 인맥이 없어서 해외에서 음반을 발매하지 못하고 있었다. 메이저 회사에는 인맥이 있는 분들이었지만, 언더그라운드의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나는 배급사나 음반사 대표들을 꽤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음반을 발매 및 배급하기로 결정하고 진행하게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나에게 최고의 프로젝트는 퓨어디지탈사일런스(PDS)라는 밴드였다. 정말 실력이 좋은 친구들이었는데, 내가 그들을 만났을 때는 콘서트를 쉰 지 한참 됐을 때였다. 여전히 소음 실험을 하는 두 명의 남자들만 남아있었다. 그래서 밴드를 다시 모아 웰메이드 앨범을 발매하게 되었다. 앨범은 한 학생이 1990년대 후반 퓨어디지털사일런스 밴드에 대해 만든 아마추어 다큐멘터리를 리마스터링한 것이었다. 전부 영어로 번역하고 프로젝터를 구해 20년 만에 처음으로 라이브로 상영했다. 정말 많은 분이 찾아주셔서 전 좌석 매진을 기록했다. 큰 모험이었지만 나에게는 인생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다 .
해외에서의 반응은 어땠나?
많은 분들, 특히 재미교포들로부터 감사하다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한국어가 유창하진 않았지만, 반응은 한결같았다. 자신에게 한국적인 정체성이 있다고 느끼고 있지만, 한국에도 비주류 문화를 함께 즐기는 커뮤니티가 있기를 바랐다는 것이었다.
어떤 계기로 빈티지 레코드 샵을 운영하게 되었는지?
원래는 퓨어디지탈사일런스의 2집 앨범을 발매하려고 했지만, 당시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배송비가 문제였다. 배급사에 보내면 손해가 막심할 것 같았다. 현대카드에서 이직하고 사회통합프로그램을 통해 거주 비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소소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몇 백만 원씩 투자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비자가 나온 후에는 지금의 빈티지 레코드 숍인 모자이크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서울 중구 신당동의 오래된 주택가 골목에 있는 모자이크 서울 ⓒ 모자이크
매장 위치로 신당동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신당동에서 멀지 않은 창신동에서 산 적이 있다. 그리고 자리를 빨리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예산이 많이 부족했는데 아내는 광희문 일대가 좋다고 했다. 그래서 부동산 몇 군데를 찾아다니며 물어봤지만, 그들에게서 “없어, 없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나는 나이 드신 분들을 많이 만나봤고,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나만의 기술이 있었다. 그 후 몇 주 동안 비타민 병 음료를 사 들고 부동산에 여러 번 찾아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리가 났다는 연락이 왔다. 직접 가보니 아직 공개 매물로 나오지 않은 곳이었다. 가서 보자마자 느낌이 딱 왔다. 가격도 좋고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모자이크의 인기 비결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다양성과 퀄리티, 그리고 꾸준하게 새로운 앨범을 들여오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대량으로 레코드가 입고된다. 진짜 최고 중의 최고의 음반은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음반들만 들여오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객의 일반적인 연령대는 어떻게 되는지?
꽤 다양하지만, 20대~40대가 대부분이다. 40대는 40~49세까지 다양하다.
그와 직원들은 매장에 진열된 앨범과 책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손 글씨로 메모해 놓기도 한다.
두 매장은 어떻게 차별화되어 있는가?
1호점은 아프리카, 브라질, 레게, 희귀한 그루브(미국 1960~70년대, 소울, 펑크 등) 등 월드뮤직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재즈 음반도 많이 선보인다. 2호점은 좀 더 ‘길거리’ 음악에 가깝다. 힙합, 하우스, 테크노, 디스코, 1980년대 댄스 음악, 뉴욕에서 형성된 다양한 음악들과 얼터너티브 록, 인디, 뉴웨이브, 포스트 펑크, 펑크 메탈, 트래시, 하드록, 록 클래식도 다수 갖추고 있다.
매장을 찾는 손님들이 어떤 경험을 하기를 바라는지 궁금하다.
사람들이 레코드 매장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도서관과 비슷하다. 우리가 세심하게 나눠 놓은 다양한 장르별로 직접 음반을 찾아보고 들으면서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내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현재 함께 일하고 있는가.
5년 전에 만났다. 아내의 앨범을 발매하고 싶었지만 결국 발매하지는 않았다. 아내의 음반사에서 이미 역할을 잘하고 있더라. 아내는 그 분야에서는 꽤 유명인이다. 아마존 MGM 스튜디오에 개봉한
(2023)이라는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기도 했다. 많은 프로젝트에서 협업 제안을 받고 있어서, 해외 작업에서는 내가 영어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주고 있다.
그는 모자이크를 통해 많은 이들이 다양한 음악을 경험해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향후 계획이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
중고 음반 산업이 하나의 비즈니스로서 제대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한국에서는 아직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정식 사업으로 인정받고 국내에 더 많은 매장이 생겨서 젊은이들이 일하고 싶어 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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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WINTER
액션의 재구성
류승완(柳昇完) 감독의 2015년 블록버스터 < 베테랑 >의 후속작 < 베테랑2 >는 비질란테가 사적 제재를 가하는 과정에서 선과 악의 구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칸 영화제에서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류승완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류승완(Ryoo Seung-wan, 柳昇完)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과 인간 본성을 날카롭게 조명하면서도 대중성을 잃지 않는 연출 스타일을 보여 주는 감독이다. 특히 역동적인 액션 연출과 캐릭터 중심의 강렬한 서사가 돋보이며, 사회적 메시지와 오락성을 조화롭게 결합한다. CJ ENM 제공
류승완 감독은 20년 넘게 한국 영화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액션 영화로 유명한 그는 사회 문제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문제의식을 담아내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 흥행 돌풍을 일으킨 < 밀수 >에서는 평화롭던 바닷가 마을에 화학 공장이 들어서면서 생계를 잃게 된 해녀들이 겪는 사건을 다루기도 했다.
올해는 연쇄살인범을 쫓는 형사들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왔다. < 베테랑 2 >는 추석 연휴 직전인 9월 개봉해 15일 만에 6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한편 전작 < 베테랑 >은 국내 박스오피스에서 9천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리며, 한국 영화사상 다섯 번째로 높은 수익을 거둔 영화가 되었다. 그 인기는 국내를 넘어서, 2019년에는 유명 배우 살만 칸(Salman Khan) 주연으로 인도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미국 영화감독 마이클 만(Miachel Mann)이 또 다른 리메이크작을 준비 중이며, 많은 이들이 기다리는 < 히트 2 > 가 완성되는 대로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 베테랑 >은 2015년 토론토 국제 영화제(TIFF)를 통해 처음으로 해외에 선보였고, < 베테랑 2 >는 올해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에 초청받아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그동안 칸 영화제에는 다수의 한국 영화가 공식 초청된 바 있다. 김지운(金知雲) 감독의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 한재림(韓在林) 감독의 < 비상선언 >, 나홍진(羅泓軫) 감독의 < 황해 >, 박찬욱(朴贊郁) 감독의 < 아가씨 >, 윤종빈(尹鍾彬) 감독의 < 공작 >,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2019년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봉준호(奉俊昊) 감독의 < 기생충 >이 있다. 류승완 감독은 2005년 권투 영화 < 주먹이 운다 >로 감독주간에 초청받아 칸 영화제에 데뷔했다. 지금은 유명 스타가 된 동생 류승범(柳昇範), 그리고 2004년 칸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인 박찬욱 감독의 < 올드보이 >로 전 세계 관객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한국 영화의 아이콘 최민식(崔岷植)이 함께 출연한 작품이다.
류승완 감독의 초기작 중 하나인 < 주먹이 운다(Crying Fist) >(2005)는 왕년의 복싱 스타이자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였던 주인공이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세련된 테크닉과 액션을 배제하고, 인물들의 내면과 감정에 중점을 둔 영화이다. 용필름(Yong Film) 제공
전편 < 베테랑 >에서는 황정민(黃晸玟)이 거침없고 화끈한 형사 역을 맡아, 부패하고 사디스트적인 재벌 3세를 잡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아인(劉亞仁)이 재벌 3세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유머와 강렬한 액션, 사회적 불평등과 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관객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 베테랑 2 >에서는 오달수(吳達秀), 장윤주(張允柱) 등 전편에서 감칠맛 나는 연기를 펼쳤던 배우들과 황정민이 다시 호흡을 맞췄다. 여기에 정해인(丁海寅)이 강력 범죄 수사대에 새로운 멤버로 합류한다. SNS에서 범인의 정체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전 국민을 혼란으로 몰아넣는 가운데, 주인공 형사와 그의 팀원들은 수사 방법과 논리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류승완의 최신작
의 한 장면. 2024년 9월 개봉한 이 영화는 전국적으로 750만 명이 넘는 누적 관객수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CJ ENM 제공
2005년과 비교해 이번 칸 영화제 경험은 어땠는가?
19년 전에는 뤼미에르 대극장을 멀리서 바라보는 아웃사이더였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때는 훨씬 더 어렸고, 모든 것이 신선하고 새롭고 재미있고 흥미롭게 다가왔다. ‘나도 언젠가는 여기에서 내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인사이더가 되어, 내 영화가 상영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또 다른 의미 있는 변화는 한국 영화에 대한 인식이다. 19년 전만 해도 한국 영화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객석이 꽉 차지도 않았고, 인터뷰 요청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액션 영화에 매료된 계기는 무엇인가?
학교에 다니기 전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나는 충청남도 아산(牙山)이 고향인데, 대도시는 아니지만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부터 홍콩 영화 등 아시아 작품까지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었다. 특히 그 시절 나는 홍콩 무술 영화와 멋진 배우들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액션 배우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뼛속까지 영향을 주었고, 동작과 제스처를 포착하는 예술로서의 영화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액션에 대한 나의 접근법도 진화했다. 지금의 나에게 ‘액션’은 단순한 신체 동작이나 바디 랭귀지가 아니다. 캐릭터의 진화, 심리, 사건의 전개, 스토리에 따라 바뀌는 관객의 생각과 기분까지 담고 있는, 그 이상의 것이다.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
(2006)는 무술 감독이자 액션 배우인 정두홍(Jung Doo-hong, 鄭斗洪)과 함께 감독 자신이 주연으로 직접 출연한 영화다. 와이어에 의존하지 않은 맨몸 액션의 효과가 극대화된 작품이다.
ⓒ 씨네21
< 베테랑 >의 성공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9년이 지나 < 베테랑 >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든 이유가 궁금하다.
1편의 성공은 정말 기대 이상이었고, 솔직히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처음에는 내 스타일에 충실한 장르 영화를 만들어 국내 관객들에게 탈출구 같은 재미있는 영화를 선보이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영화 속 사건과 유사한 사회적 논란이 불거지면서 흥행에 성공했다. < 베테랑 >을 촬영하면서 인물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펼쳐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사실 1편의 성공 때문에 같은 소재로 바로 뛰어들기가 쉽지 않았다. 1편에서는 선과 악에 대한 묘사가 너무 도식화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명료한 구분이 성공 요인이었을 수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피상적으로만 다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의 정의 실현 방식은 복잡한 현실의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 현실에서는 선과 악의 경계가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다. < 베테랑 >의 흥행 이후 그 뒤를 잇는 다양한 국내 영화와 드라마가 나오고 성공을 거두면서, 나는 전작을 답습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간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그중에는 2021년 아카데미 영화상에 한국 영화 출품작으로 선정된 정치 스릴러 < 모가디슈 >도 있었다. 9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새로운 방식으로 < 베테랑 >을 다시 선보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3년 개봉작 < 베를린(The Berlin File) >은 국제적인 음모에 휘말려 서로를 쫓은 이들의 추격전을 그린 영화다. 완벽한 캐스팅과 창의적 액션, 밀도 높은 스토리 등으로 한국 액션 영화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류승완의 동생이기도 한 배우 류승범(Ryoo Seung-bum, 柳昇範)은 류 감독의 페르소나로 불린다. ⓒ 씨네21
속편에서 논란이 된 ‘박선우’는 어떤 인물인가?
의도적으로 캐릭터와 스토리에 논란의 여지를 두었다. 어떤 반응이든 관객들이 그들 자신의 반응을 보여주길 바랐다. 관객들이 어떤 논란에 대해 개인적인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은 관객이 그 논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의도한 바가 바로 그것이다. 홍콩의 대표적인 영화 감독 조니 토에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몰입감 있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굵고 짧게 대답했다. “주인공이 실수를 해야 한다”는 아주 마음에 드는 답변이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사적 제재를 가하는 사람은 결국 벌을 받는다. 류승완의 영화에서는 이것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닌 듯하다.
흥미로운 지적이다. 내 영화에서 실제 주인공은 박선우가 아닌 서도철 형사다. 서도철이라는 인물의 장점이자 박선우와의 차이점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 있더라도 자신의 임무에는 충실하다는 점이다. 범죄자라도 일단 목숨은 살리고 보는 인물이고, 그것이 서도철에게는 진정한 정의다.
박선우를 전통적인 빌런으로 묘사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정의에 대한 두 가지 다른 개념, 그리고 그사이의 갈등을 탐색하고자 했을 뿐이다. 정의(正義)는 관점과 역사적 맥락, 적용 방식에 따라 다르게 정의(定義)된다. 따라서 절대적인 정의나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본다. 감독이 관객에게 특정한 메시지를 강요하는 것보다는 관객 스스로 자신의 가치관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2편의 스토리는 어떻게 달라졌나?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옛날이 더 편하고 쉬웠고 현재가 제일 힘들다는 인식이 항상 있다. 자신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나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인생은 수월하고 다른 곳이 더 편안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결국 누구나 똑같다.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발전의 속도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 베테랑 > 1편이 개인보다는 사회와 시스템 전체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2편은 사회 전체적인 구조에서 벗어나 개인의 이야기를 주로 다뤘다. 예를 들어, 서도철의 아내가 베트남 여성과 아이들을 돕는 장면이 있다. 공무원이 아닌 일반인의 모습이다. 아무리 절망적인 사회에서도 한 사람만이라도 깨어 있고 자각하고 있다면, 희망의 씨앗은 이미 거기에 있다. 인류를 구하겠다며 말만 거창하게 늘어놓는 정치인보다는 가족, 친구, 동료를 돌보며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더 큰 희망이 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여론의 영향력이 바뀌었다고 보는가?
한국 사회에는 연대감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한국만의 독특한 지리적 여건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육로를 통해 다른 나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반면,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다소 단절된 느낌이다. 한국인이 해외로 여행하려면 비행기나 배를 타야 하고, 육로로 국경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게다가 남과 북이 분단되어 있어, 섬나라나 다름없이 고립되어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함께 뭉쳐야 했기 때문에 강한 연대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상황이 다르다. 인터넷과 SNS 덕분에 기성 세대에 비해 전 세계와 훨씬 더 많이 연결되어 있다. 해외에 있는 사람들과 쉽고 빠르게 소통할 수 있어 뛰어난 글로벌 감각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 세대에서는 공동체 의식이 강했지만, 이제는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유대감은 여전히 강한 편이지만, 젊은 세대들의 글로벌 커뮤니티 참여가 확대되면서 변화하고 있다.
< 베테랑 3 > 제작 가능성은?
현재 첩보 액션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러시아 국경 근처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파헤치는 남북한 비밀 요원들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 베테랑 3 >에 대해서는 배우들과 논의 중이다. < 베테랑 2 >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에 따라 후속편 제작을 검토할 예정이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 밀수(Smugglers) >(2023)는 밀수의 세계에 빠진 해녀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영화다. 몰입감 높은 연출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시대 배경을 잘 살린 미술이 호평을 이끌어 냈다.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NEW)
Lifestyle
2024 AUTUMN
누구나 그리고 즐기는 민화의 즐거움
과거 민화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민화 수집가나 연구가들이 등장하고 민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화가들의 작품이 주목 받으며 관심이 높아졌다. 최근에는 취미로 민화를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고, 공모전, 아트페어, 갤러리를 중심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민화 강사 신상미 씨는 취미로 시작했던 민화의 매력에 빠져 지금은 민화를 배우고 싶어 하는 이들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다.
직장인에서 민화 강사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신상미 씨.
열의에 가득 찬 수강생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이 공간의 이름은 모리화(毷離畫)이다. 번민 모, 떠날 리, 그림 화 즉 ‘일상의 근심을 떠나 보내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민화’를 배운다.
민화는 조선시대 때 집안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한 실용화이다.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을 위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이라는 의미에서 ‘민화’로 불린다.
한 겹 한 겹 색을 쌓다
신상미(申湘媄) 씨에게는 두 종류의 ‘날’이 있다. 수업이 있는 날과 수업이 없는 날. 일주일 중 사흘은 수업이 있고, 사흘은 없다. 나머지 하루는 ‘배우는 날’이다.
수업이 있는 날에는 7시쯤 일어나 중학생인 딸을 학교에 보낸 후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작업실로 간다. 경복궁 근처에 있는 21평짜리(69m²) 오피스텔로,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처음에는 집에서 동네 분들 모아놓고, 돈도 안 받고 가르쳤어요. 본격적으로 수업을 해보자 마음먹고 일 년 전쯤 작업실을 얻었어요. 경복궁 근처라 임대료는 비싸지만, 그 덕분인지 전국에서 배우러 와요.”
작업실에 도착하면 전기차를 충전시켜 놓고 강아지들과 산책을 한다. 이후 작업실로 돌아와 작업용 앞치마를 메고 화분에 물을 준 다음 수업 준비를 한다. 첫 수업은 오전 10시 30분에 시작해 3시간을 꽉 채우고 끝이 난다.
“처음에는 책상 다섯 개를 놓고 시작했어요. 지금은 여덟 개가 되었죠. 한 클래스에 8명 정도 들어오시고, 총 여섯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어요. 자리가 나면 들어오려고 대기하고 있는 분들도 많아요.”
민화는 전공자, 비전공자의 차이가 별로 없다. 밑그림이 있어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골라 채색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추어도 쉽게 시작할 수 있고 결과물도 좋은 편이다.
신 씨의 수강생들이 그린 작품들. 같은 밑그림이라도 그리는 이의 취향과 선호하는 색 등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로 완성된다.
“민화는 가루 물감을 아교로 개어 한 겹 한 겹 색을 계속 쌓아가는 작업이에요. 한 작품 완성하는 데 몇 개월씩 걸리는데, 명상하듯이 천천히 하다 보면 계속하고 싶어지는 매력이 있어요.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문화죠. 다들 재미있게 다니세요.”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이 없어도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난다. 일상의 소소한 근심을 까맣게 잊고 온전히 몰두하는 시간이다.
밥 먹고 그림만 그렸다
민화 강사가 되기 전, 신상미 씨는 20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다. 대기업에서 벽지, 바닥재, 가구 필름 등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였다.
“2000년 초반, 컬러와 패턴 등 디자인이 다양한 장판(壯版 한국의 주택에서 방바닥에 까는 PVC로 된 시트) 시장이 어마어마했어요. 장판에 민화 나비를 넣어보고 싶어서 민화 작가를 소개받았어요.”
그것이 처음 만난 민화였다.
“직장을 정말 열심히 다녔어요.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일요일에도 일을 했죠. 그러다가 4년 전쯤 아이가 아파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어요. 수십 년 동안 매일 하던 일을 갑자기 안 하게 되니 스트레스가 컸어요. 몸도 마음도 엉망이었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어디 가서 꽃이라도 그리자’ 하고 집 앞 공방을 찾아갔어요. 그때부터 민화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재미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정말 밥 먹고 그림만 그린 나날이었다. 한 곳에서 그릴 수 있는 민화가 한계가 있다 보니 화실을 서너 군데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그렸다. 그러다 보니 실력이 늘어갔다. 남들이 10년 걸려 배울 걸 2~3년 만에 익혔다. 어느 순간 병풍 하나 정도는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병풍 그리기를 시작했다. 1년쯤 걸리는 작업을 3개월 만에 끝냈다. 그때 그린 병풍으로 ‘제 15회 대한민국 민화공모대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 정도면 화실을 차려도 될 것 같아 작업실을 열고 수강생을 받기 시작했다.
“저는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안 맞는 사람이더라고요. 뭔가를 시작하면 몸이 상할 정도로 몰두해요. 칭찬받고 싶고, 잘하고 싶고. 그림을 시작하면서 활력이 생기고 아이를 돌볼 시간도 생겨서 아이도 저도 건강해졌어요.”
빠른 시간 안에 민화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힌 이유 중 하나는 직장생활 때의 경험이었다. 벽지, 바닥재, 가구 필름 등을 디자인하면서 빨강, 노랑, 파랑으로 색을 조합하는 작업만 20년을 했다.
“제가 색을 만드는 데 특화되어 있었던 거죠. 민화는 정해진 색이 없어요. 같은 그림이라도 작가마다, 공방마다 색이 다르죠. 여러 색을 실험해 보고 칠해보면서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는 거예요. 오방색(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청색, 흰색, 적색, 흑색, 황색)을 화려하게 써야 민화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간색’이라고 불리는 중간색을 적극적으로 쓰는편이죠. 오방색은 한옥에는 어울리지만, 현대적인 인테리어와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제가 출품한 병풍도도 출품작 중 제일 어두운 그림이었어요. 요즘은 톤 다운된 노란색, 겨자색에 꽂혀 있어요.”
매주 화요일은 민화 명장 스승님께 전통 민화 그림을 배우러 간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1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듣는다.
“시상식 날 원로 선생님들께서 앞 줄에 앉아 계셨는데, 아빠랑 너무 비슷하게 생기신 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분한테 가서 ‘저 좀 받아주세요’ 했어요. 그림 속 꽃 하나, 나비 하나에도 다 의미가 있거든요. 그리다 보면 알고 싶어져요. 그래서 책도 많이 읽고 수업도 듣는 거죠. 수업 중간에 밥도 먹고 막걸리도 한잔하면서 선생님께 수업을 받고 있어요.”
어설픔도 맛이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작업실에 나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여기서 제 작업도 해야지 싶었는데, 점점 회사처럼 되다 보니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져요. 그래서 개인 작업은 집에서 해요. 그런데 이제는 화실 이름도 걸려 있고, 제가 가르치는 사람이 되니 그림에 힘이 들어가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그림 그리는 것이 예전만큼은 재미가 없어요. 회원들 그림 봐 드리고, 그 그림들이 점점 나아지는 걸 보는 게 훨씬 좋아요.”
수강생은 주로 40~50대 여성들이다. 작업대에 그림과 재료를 잔뜩 펼쳐놓고 수다를 떨며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인다. 그렇게 세 시간 동안 스트레스를 날린다.
민화는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나오는 그림이다. 그래서 전공자, 비전공자 할 것 없이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문화라고 말한다.
“혼자서 작업을 하면 그야말로 무념무상이에요. 쉬는 날에 종일 미적거리다가 저녁에 시작할 때가 많은데 정신차려보면 새벽이에요. 저희 엄마가 70대인데 엄마도 제 수강생이에요.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고, 아마추어의 어설픔도 민화의 맛이에요. 저희 화실은 아직 회원전을 연 적은 없지만, 회원전을 열면 작품도 절 팔린다고 하더라고요.”
수강생들의 즐거움이 신 씨의 보람이자, 회사 다닐 때는 몰랐던 기쁨이 된다. 새벽 서너 시까지 그리고, 서너 시간 자고, 하루 아홉 시간 수업이 있는 날에는 한 끼 챙겨 먹기도 힘들지만, 모든 게 감사하다. 열정을 쏟았던 직장생활의 끝에 새롭게 찾은 길이 감사하고, 경력이 짧은 자신에게 배우기 위해 먼 길을 오는 사람들이 감사하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최근 아버지를 위한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겨자색, 그리고 파란색으로요.”
Lifestyle
2024 AUTUMN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미용실
일본인 나카야시키 겐타(NAKAYASHIKI KENTA, 中屋敷) 씨에게 미용사는 다양한 사람들과 따뜻하게 소통하는 직업이다. 그가 한국에서 활동한 지는 이제 6년 조금 지났지만, 이 나라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오래도록 같이 나이 들어가길 꿈꾼다.
나카야시키 겐타(NAKAYASHIKI KENTA, 中屋敷 健太) 씨에게 오는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그는 한 번에 한 명의 손님 만을 받는다. 오롯이 그 사람에게 집중하기 위해서다.
겐타 씨의 미용실에선 누구나 주인공이 된다. 동시에 여러 손님을 받는 대신 한 사람씩 예약제로 고객을 맞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두 사람이다. 가족이 함께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는 극소수의 손님에게 자신의 시간을 오롯이 내어준다. 미용실 창밖엔 나무들이 울창하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서울 강남구(江南邱)에 자리하고 있지만, 바깥에 작은 공원이 있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철마다 누릴 수 있다. 고객과 마음을 나누기에 더없이 좋다.
“미용사는 누군가와 만나서 가까워지는 직업이에요. 미용실 운영으로 큰돈을 벌기보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좋은 사람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서
한국에 오기 전엔 일본 도쿄의 번화가인 오모테산도(Omotesando 表参道)에서 미용사로 일했다. 그가 고용된 미용실엔 손님이 아주 많았다. 한 시간에 무려 14명이나 커트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밀려드는 고객들을 상대하기 바빠 그는 손님의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게 너무 부끄러웠다. 그가 미용사가 된 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어서였다. 그랬던 첫 마음과 너무 멀어져 있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했어요. 잠을 거의 못 잤죠. 그렇게 6년쯤 일하다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 겨우 스물일곱 살에요. 계속 이렇게 살다 간 죽을 수도 있겠다 싶던 차에 새로운 기회가 생겼어요. 제가 일했던 미용실 부사장님이 한국에서 미용실을 차려보라고 권하셨거든요. 때마침 한국에 관심이 생겼던 터라 별 망설임 없이 날아왔어요.”
한국으로 이끈 한정판 운동화 한 켤레
그게 2018년이었다. 사실 그전까지 그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런 그가 한국에 관심을 품게 된 건 한정판 운동화를 사러 도쿄의 한 매장에 들렀을 때였다. 어느 젊은 남성과 같은 신발을 동시에 집으면서 눈이 마주쳤는데, 머리부터 신발까지 일본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남성이 누구인지는 얼마 뒤 TV를 보다 알게 됐다. K-팝스타 지드래곤(G-Dragon 보이그룹 ‘빅뱅’의 리더이자 싱어송라이터)이 바로 그였다. 미디어에 비친 그는 음악도 패션도 기존의 틀을 모두 뛰어넘고 있었다. 그런 아티스트가 존재하는 나라에 문득 깊은 호기심이 생겼다.
“도쿄 오모테산도가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라 여겨왔는데, 그보다 더 앞서나가는 곳이 한국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이후로 우리 미용실에 오는 한국인 손님들을 유심히 봤어요. 일본으로 유학 온 손님도, 일 때문에 건너온 손님도, 하나같이 자기 삶을 멋지게 가꾸는 분들이더라고요. 이런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면 몇 년 안에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겠구나 싶었어요. 직접 가보고 싶어졌죠.”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는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인사말도 모르고 온 그에게 가장 큰 언어 선생님은 다름 아닌 고객이었다. 어학원을 찾아가는 대신 혼자 한국어 교재를 사서 공부하길 선택했지만, 손님들과의 대화 덕분에 그의 한국어 실력은 금세 늘어났다.
서울의 몇몇 동네에서 일하다 3년 전 이곳 도곡동(道谷洞 Dogok-dong)에 미용실을 냈다. 별도의 홍보를 하지 않고도 이전 미용실의 고객이 또 다른 고객을 소개해 줘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이곳의 고객들은 열 살이 안 되는 어린이부터 칠십 대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직업도 제각각이다. 그 덕분에 미용실에 가만히 있어도 드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그를 처음 만난 손님에겐 세번쯤 와줄 것을 권한다. 헤어 스타일, 모발 상태 등에 따라 처음부터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스타일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연을 이어가며 손님과의 합을 맞춰나가는 것이 그에겐 중요한 작업 중 하나다.
한국인의 정(情)에 빠지다
“일본 사람들은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아요. 진심을 알기가 어렵죠. 하지만 제가 만난 한국인들은 거의 모두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더라고요. 그래서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서 편할 때가 더 많아요. 제가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으니까요.”
그는 한국인들을 흥(興) 많고 정(情) 많고 화(火) 많은 사람으로 표현한다. 그 가운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한국인 특유의 정(情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이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는 한국인들이 자기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에 매우 놀랐다. 일본에선 누군가를 함부로 돕는 것이 큰 실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한국인들의 넓은 오지랖(이 일 저 일에 관심도 많고 참견도 많이 한다는 뜻)이 아주 좋다. 따뜻한 마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잘 아는 까닭이다.
“일본에선 미용사와 고객이 평생을 함께하는 경우가 많아요. 근데 한국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 문화만큼은 일본의 것을 옮겨 오고 싶어요. 저는 우리 미용실에 처음 오는 고객들에게 지금 당장 손님 마음에 들게 해드릴 순 없다고 이야기해요. 손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함께 만들어갈 테니, 속는 셈 치고 세 번만 와 달라고 부탁하죠. 거의 모든 고객이 그 이야기를 따라줘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대신 그는 손님들이 건네 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매번 최선을 다해 들어준다. 미용사의 자질에는 고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절한 순간에 알맞은 공감을 표시하는 게 그만의 무기다. 고객의 머리를 예쁘게 해 주는 것만큼 고객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에서 그는 큰 보람을 느낀다.
차분하면서도 정돈된 나카야시키 겐타 씨의 성격을 닮은 듯한 미용실
일본에 있을 때보다 훨씬 적은 수의 고객을 만나는데도 그의 수면시간은 여전히 짧다. 새벽 네다섯 시에 잠들고 아침 여덟 시 반쯤 눈을 뜬다. 침대에서 벗어나면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패션 또는 헤어 관련 유튜브를 본다. 업계의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열 시쯤 미용실로 출근해 열한 시에 영업을 시작하지만, 퇴근 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손님들의 예약 시간이 제 각각이라서다. 별도의 휴일이 없는데도 그는 별 불만이 없다. 오늘은 또 어떤 만남을 갖게 될지 기대하는 마음이 그보다 늘 더 크다.
손님들과 같이 나이 들어가는 꿈
그의 고향은 일본 도호쿠 지방에 자리한 이와테현(岩手県 Iwate-ken)이다. 지방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도 일찌감치 대도시에서의 삶을 꿈꿨다. 이왕이면 ‘멋’을 삶의 중심에 두고 싶었고, 만 18세에 도쿄 하라주쿠의 한 미용학교에 입학해 꿈을 향해 출발했다. 그 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는 동안 이자카야 서빙, 콜센터 상담원, 옷 가게 판매원 등 10여 개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그 경험들이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지금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선배에게 물려 받아 17년 째 사용하고 있는 그의 가위
“일본에서도 아직 활동해요. 세 명의 유명 아티스트와 한 팀의 아이돌 그룹을 담당하고 있어서 요즘도 틈틈이 일본에 가요. 그래도 한국에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요. 손님들과 같이 나이 들어가는 게 꿈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한국에서 계속 살게 될 것 같아요.”
그는 선배한테 물려받은 가위를 17년째 쓰고 있다. 모든 것들이 점점 빨라지는 시대에 오래된 가위를 손에 쥐고 오래가는 인연을 꿈꾸며 산다. 자기만의 속도를 지키는 그의 얼굴에 자기다운 행복이 흐르고 있다.
Lifestyle
2024 AUTUMN
우리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즐거움
세이수미(Say Sue Me)는 2012년 결성된 4인조 록 밴드이다. 부산 광안리에서 출발한 이들의 음악은 동시대 한국 록 밴드 음악의 최전선에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제 지역과 국경을 넘어 전 세계 무대를 향하고 있다.
세이수미는 2023년 10월 < 타이니 데스크 코리아(Tiny Desk Korea) >에 출연해 < Old Town > 등 대표곡들을 불렀다. 지난해 8월 출항한 이 프로그램은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NPR 뮤직이 진행하는 <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Tiny Desk Concerts) >의 한국판 버전이다. ⓒ 타이니 데스크 코리아
한반도 남동쪽 끝에 자리한 부산은 서울에서 약 400㎞ 떨어져 있는 국내 최대의 항구 도시이다. 이곳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백화점이라 일컬어지는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Shinsegae Centum City)가 우뚝 솟아 있는가 하면 서민들의 발걸음이 분주한 수산 시장도 있다. 수십만 원대의 코스 요리로 유명한 5성급 호텔이 서울과 제주 다음으로 많은 곳이지만, 저렴한 시장 음식이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 말투와 달리 억양에 높낮이가 약간 있는 부산 말씨를 쓰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록 밴드 세이수미가 있다.
보컬과 기타의 최수미(Sumi Choi, 崔守美), 리드 기타의 김병규(Byungkyu Kim, 金秉奎), 베이스의 김재영(Jaeyoung Kim, 金才永), 드럼의 임성완(Sungwan Lim, 林性完). 네 명의 멤버들은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화요미식회’를 진행한다. 리처드 오스먼의 범죄 소설 『목요일 살인 클럽(The Thursday Murder Club)』에 등장하는 네 명의 주인공들만큼은 아니지만, 이날은 멤버들 사이에 긴장감이 꽤 흐른다. 화요미식회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인기 먹방(mukbang) 프로그램
(2015~2019)에서 따온 이름이다. 저녁 식사로 먹고 싶은 메뉴를 각자 정한 뒤 가위바위보를 통해 결정된 최종 승자가 결정권을 갖는 일종의 회식 배틀이다. 이들은 때로 신경전을 펼치기도 하지만, 모두를 평화로 인도하는 공통적인 선호 메뉴가 있다. 다름 아닌 돼지국밥이다.
세이수미(Say Sue Me)는 부산 출신의 4인조 인디 록 밴드로,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독자적 음악 세계를 펼쳐 보인다. 2012년 팀을 결성해 2년 후 1집 < We’ve Sobered Up >을 발매했다. 그로부터 3년 후에는 영국 레이블 댐나블리(Damnably)와 계약을 맺고 첫 해외 투어를 성공리에 마쳤다.
광안리 서프 록
해운대(海雲臺)와 함께 부산이 자랑하는 대표적 휴양지인 광안리(廣安里) 해수욕장에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작은 동네 골목. 한 건물의 지하 계단을 내려가면 100㎡쯤 되는 작은 공간이 나타난다. 이곳은 세이수미의 아지트이자 연습실, 녹음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DIY 방식으로 운영하는 비치 타운 뮤직(Beach Town Music) 레이블의 사무실이기도 하다. 2012년 결성 이래 세이수미는 지금껏 이 자리를 지켰다. 멤버들은 음악 연습을 하다가 지치거나 뭔가 잘 풀리지 않으면 3분쯤 내리막길을 걸어 바닷가로 향한다. 그러고는 함께 맥주를 마시곤 한다.
그룹명 세이수미는 보컬 최수미의 이름에서 따왔다. 초기에 그들은 주로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펍에서 공연하며 한 명씩, 두 명씩 팬을 늘려 갔다. 그룹명 중 ‘수미(Sue Me)’를 “Sue me”로 읽은 이방인들에게 이들은 꽤 흥미롭게 다가왔을 것이다. 최수미가 쓰는 영어 가사는 문법적으로는 어색했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귀엽게, 한국인들에게는 힙하게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 광안리 밤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조금 지글거리면서도 몽환적이고 청량하기도 한 사운드가 이 밴드의 매력이었다. 누군가는 광안리 앞바다에 ‘서식’하는 이 그룹의 음악에 ‘서프 록(surf rock)’이란 장르명을 붙여 줬다. 하지만 1960년대 미국의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나 딕 데일(Dick Dale)이 구사한 대서양 연안의 서프 록과는 확실히 다르다. 드림 팝(dream pop)이나 슈게이즈(shoegaze)의 꿈결 같은 소릿결, 인디 팝(indie pop)의 속삭이는 듯한 수줍은 태도, 때로는 펑크 록(punk rock)의 무모한 질주감까지 오가는 세이수미의 음악은 한두 가지 장르로 못 박기 힘들다.
터닝 포인트
“2014년 발표한 1집 < We’ve Sobered Up>은 광안리 출신 록 밴드나 서프 록 밴드라는 외부 시선을 어느 정도 의식하며 제작한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는 그때그때 와닿는 메시지와 사운드에 집중하면서 우리만의 음악을 만들고 있어요.”
김병규의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2018년 발매한 2집 < Where We Were Together >는 세이수미의 커리어에 터닝 포인트가 됐다. 수록곡 중 하나인 < Old Town >은 영국의 전설적 싱어송라이터 엘턴 존이 자신의 팟캐스트 ‘엘턴 존의 로켓 아워(Elton John’s Rocket Hour)’에서 극찬해 화제가 됐다. 그리고 세이수미는 그해 월드 투어‘Busan Calling!’을 시작했다. 또한 같은 해에 이들은 미국의 유명 콘서트 프로그램 < Live on KEXP >에 한국 음악가 최초로 출연해 공연했다. KEXP는 워싱턴주 시애틀의 유서 깊은 공영 라디오 방송이다.
이듬해 세이수미는 이 음반으로, 한국의 그래미 어워즈라 불리는 한국대중음악상(Korean Music Awards)에서 인디 밴드로는 이례적으로 무려 5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그중 최우수 모던 록 음반, 최우수 모던 록 노래 부문에서 두 개의 트로피를 수상했다.
올해 6월, 인천 파라다이스시티(PARADISE CITY)에서 펼쳐진 아시안 팝 페스티벌(Asian Pop Festival) 무대에 오른 세이수미. 파라다이스 문화재단(Paradise Cultural Foundation)이 주관한 이 행사는 아시아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뮤지션들 가운데 라이브 공연이 특히 뛰어난 아티스트들로 라인업이 꾸려진다. ⓒ 아시안 팝 페스티벌
해외 음악 팬들
몇 년 전부터 보수동쿨러(Bosudong Cooler)나 해서웨이(Hathaw9y) 같은 부산 지역 밴드들이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세이수미와 함께 합동 공연 무대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부산 신(scene)은 크지 않다는 게 세이수미의 진단이다. 김병규는 이렇게 말한다.
“대구가 그렇듯이 부산도 명맥을 유지하는 대표적인 라이브 클럽이 하나 정도 있을 뿐이에요. 서울 홍대 앞처럼 왕성하진 않죠.”
대신에 요즘은 지역과 국경을 넘어 해외 음악 팬들 사이에서 세이수미의 음악이 편견 없이 확산되고 있다. 최수미는 “일본, 중국은 물론이고 멀리 북중미에서도 젊은 팬들이 느는 걸 체감한다”고 전했다. 지난해 투어 마지막 일정으로 찾은 멕시코시티에서는 전체 관객의 약 90%가 20대 젊은 층이었다.
K-팝, K-드라마 덕도 있다고 한다. tvN에서 방영된 TV 드라마 < 유미의 세포들(Yumi’s Cells, 柔美的细胞小将) >(2021~2022)이나 JTBC의 < 알고 있지만(Nevertheless, 无法抗拒的他) >(2021) 등에 이들의 음악이 삽입된 것도 해외 팬들을 더 매혹한 계기가 됐다. 최수미는 “영어 작사에 대한 고민이 늘 깊은데, 해외 팬들은 갈수록 한국어 가사에 더 열광하는 분위기여서 놀랍다”고 말했다.
2022년 발매된 정규 3집 < The Last Thing Left >의 컴팩트 디스크.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10개의 곡들이 트랙을 채우고 있다. 최수미가 모국어로 부른 타이틀곡 < 꿈에(To Dream) >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통해 응원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세이수미 제공
2022년 결성 10주년을 기념해 공개한 EP < 10 >의 리미티드 에디션 카세트테이프. 기존 대표곡들을 편곡한 작품들과 함께 요 라 탱고(Yo La Tango), 페이브먼트(Pavement) 등 세이수미가 평소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노래를 커버한 트랙들이 담겼다. 세이수미 제공
수년간 투어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묻자 네 가지 답이 나온다. 김병규는 2018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공연을, 임성완은 2019년 영국 웨일스의 그린 맨 페스티벌(Green Man Festival)을 꼽았다. 김재영에겐 지난해 일본 가고시마의 그레이트 사츠마니안 헤스티벌(The Great Satsumanian Hestival)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최수미는 2018년 첫 유럽 투어 당시 프랑스 소도시 콜마르(Colmar)의 가정집 뒷마당에서 했던 공연을 잊을 수 없다고.
“아, 맞다. 폴란드 크라쿠프(Krakow)에서 술고래 아저씨랑 진탕 마셨단 것도요!”
최수미가 기억을 끄집어내자 다른 멤버들이 손뼉을 치며 웃는다. 이들은 폴란드식 만두 피에로기(pierogi)와 함께 그곳의 술 문화를 제대로 체험했다고 한다.
이들의 월드 투어는 일일이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우여곡절이 많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곳은 하나다. 지금 이 자리, 부산 수영구 남천바다로의 비치 타운 뮤직. 인터뷰 말미에 최수미가 이런 말을 던진다.
“어떤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을 내놓는 것도 좋겠지만, 그런 것보다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즐거움을 최대한 담아내고 싶어요. 그게 바로 밴드 하면서 사는 거죠.”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보컬과 기타의 최수미(Sumi Choi, 崔守美), 리드 기타의 김병규(Byungkyu Kim, 金秉奎), 드럼의 임성완(Sungwan Lim, 林性完), 베이스의 김재영(Jaeyoung Kim, 金才永). 이들은 자신들의 음악적 정체성이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솔직담백함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Lifestyle
2024 SUMMER
동네 사랑방이 되어가는 약국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 그늘처럼 아무 때나 잠시 쉬어가거나 이웃끼리 마음을 나누는 장소를 일컬어 한국인들은 ‘동네 사랑방’이라고 표현한다. 동네 사랑방은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오가며 안부를 묻고 정을 쌓아가기 때문이다. 정초롱(丁초롱 Jeong Cho-rong) 약사가 고향 영월에 차린 그녀의 약국은 도시화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영월에서 작은 약국을 운영하는 정초롱 약사. 그녀의 약국은 약을 구입하려는 손님뿐만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할머니,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 짐을 맡겨놓는 사람들도 오가며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한다.
그녀의 하루는 단순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매우 바쁘다. 휴일인 주말을 제외하면 아침 9시에 출근해서 퇴근하는 오후 6시까지 약국에서 손님들을 만난다. 조금 한가할 때면 틈틈이 피로회복제 같은 상품 스티커나 약국에 붙일 포스터 디자인 작업을 한다.
오며 가며 쉬어가는 곳
약국 안에서 늘 정신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기 일쑤지만 그녀는 안에 있어도 사계절을 오롯이 느낀다. 약국 안 커다란 통유리 바깥으로 나무들이 철마다 옷을 갈아입기 때문이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건 자연만이 아니다. 이 약국에는 잠시 짐을 맡기고 가는 고객들이 꽤 있다. 근처 시장이며 마트에서 장 본 것을 이곳에 둔 뒤 병원, 은행, 군청 등에서 볼일을 보고 오는 단골손님들이다. 그들이 맡겨 둔 장바구니 안에는 지금의 계절을 알 수 있는 채소며 과일이 들어있다.
“이것 좀 맡아달라고 말씀하실 때 어머님들 표정이 참 귀여우세요. 이 공간을 편하게 생각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한 마음이에요. 제가 꿈꿨던 모습이거든요.”
약국에는 손님들을 위한 휴식 테이블이 있다. 간식도 비치되어 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쌍화탕(雙和湯 피로 해소와 감기 완화에 좋은 한방 드링크제)과 약과(藥果 한국의 전통 과자), 비타민이나 자일리톨이 함유된 캔디 같은 것들이다.
약이 나올 때까지 잠시 앉아 기다리는 테이블이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손님들도 많다. 근처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를 기다리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갈 버스가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亭子나무, 집 근처에 있는 큰 나무) 그늘처럼, 손님들이 아무 때나 쉬어가며 오가는 이들과 마음을 나눈다. 약사세요 악국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동네 ‘사랑방(舍廊房)’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복약 상담
“단골손님이 대부분이라 방문하시는 손님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 건강도 상담하기도 해요. 되도록 자세하게 설명해 드려서, 우리 약국을 이용하는 분과 그 가족이 좀 더 건강한 삶을 사시도록 돕고 싶어요.”
한국에선 약국과 약사의 역할이 크다. ‘약은 약사에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약국에서 약사의 설명을 듣고 약을 구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병원이나 의원이 많지 않은 시골에선 당장 병원을 가야 할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약국의 역할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숙취 해소, 피로회복제 등 증상에 따라 필요한 약을 묶은 패키지에 직접 디자인한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정초롱 약사.
특히 이곳 영월군(寧越郡)에는 젊은이들보다 노인 인구가 많아 약사의 복약지도도 아주 중요하다. 정초롱 약사는 그 임무에 충실한 약사다. 평소 어떤 불편을 겪는지, 어떤 음식을 즐겨 먹고 어떤 약들을 복용 중인지 꼼꼼히 묻고 답한다. 손님이 잘못 알아들을까 봐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일이 그녀에겐 전혀 번거롭지 않다. 정확한 상담으로 환자의 건강 상태가 좋아질 때마다,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잊지 못할 일들이 많아요. 어느 날은 모자를 쓰고 오신 중년 여성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분이 항암 치료 중인 걸 알게 됐어요. 잘 이겨낼 수 있다는 용기를 드리고 싶어 손을 꼭 잡아 드렸는데 왈칵 눈물이 나더라고요. 당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거라곤 손을 잡아 드리는 것이 전부였는데도, 그분이 정말 고마워하셨던 기억이 나요. 지금은 완치하셔서 건강한 모습으로 약국을 찾아오시고 있어요. 뵐 때마다 애틋해요.”
치매 관련 영양제를 사러 왔던 중년의 여성분도 기억에 남는다. 약을 추천하기 위해 그녀가 이런저런 질문을 건넸더니, 손님의 어머니가 치매를 앓아 곧 요양원에 가신다고 했다. 그날도 그 손님과 같이 울었다. 건넬 수 있는 위로의 말이 없어 마음 아팠지만, 속상한 마음을 나누며 함께 울고 난 뒤 손님이 보여준 미소가 여태 기억에 남아 있다.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같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병을 치료할 순 없지만, 상대방이 다시 힘낼 수 있는 마음을 건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가 경청과 공감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이유다.
고향에서 누리는 행복
영월군은 그녀가 나고 자란 곳이다. 강원도 남부에 자리한 작은 도시로 산과 계곡, 강과 호수가 수려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 눈부신 땅에서 그는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도시의 약학대학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났다가, 2019년 4월 이곳에 약국 문을 열면서 다시 왔다.
“대학 졸업 후엔 도시의 약국에서 근무 약사로 2년 반 정도 일했어요. 처방전을 받아 약을 짓는 게 주된 업무였는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밀려드는 처방전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손님들께 약에 대한 설명조차 제대로 해드리지 못했거든요. 어느 날 문득 기계처럼 약을 짓는 것 말고 약 하나를 드리더라도 손님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만의 약국을 열기로 결심한 거죠.”
처음엔 일하고 있던 충주시(忠州市)에 약국을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땅한 자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고심이 깊어 가던 어느 날 영월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30년 넘게 옷 가게였던 지금의 약국 자리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이었다. 시골 약사로 지내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먹었다. 따뜻하게 소통하는 약국을 만들기에 고향처럼 적합한 곳은 없을 것 같았다. 그 예감은 적중했다. 어느 집 딸인지 잘 아는 손님들은 자식 같고 조카 같은 그녀를 진심으로 반겼다.
“개업한 뒤 1년이 채 안 돼 코로나19로 난리였어요. 마스크 대란이나 진통제 품절 같은 일들을 차례로 겪으며 힘들었지만, 그 시간을 손님들과 함께 견뎌내면서 더 단단한 유대감이 생긴 것 같아요.”
일상으로 돌아온 요즘, 지난 몇 년과는 다르게 약국에서도 잘 팔리는 약이 달라졌다. 전에는 질병을 치료하는 약이 주로 팔렸다면, 요즘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약의 판매가 크게 늘었다. 면역력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커진 것이다.
그는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건강정보를 기억하고 고객별로 기록도 해둔다. 아는 만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옆집의 수저 개수도 안다’는 우리의 옛말처럼,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웃들의 정보가 쌓여간다.
웃음이 또 하나의 치료제가 되다
약사세요 약국에는 익살스러운 풍경이 곳곳에 있다. 뇌, 눈, 간, 위 등의 장기가 그려진 캐릭터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 캐릭터는 도시에서 근무 약사로 일할 때 SNS(www.instagram.com/yaksaseyo_pharmacy)에 재미 삼아 연재하기 시작한 웹툰 속 주인공이다. 손님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방법을 고민하다, 단발머리 시절의 본인 모습을 캐릭터로 만들어 몸속 장기와 해당 약품을 벽면에 부착했다. 직접 디자인한 스티커도 퍽 재치 있다. 숙취해소제나 피로해소제 등에 손수 그린 캐릭터 스티커를 붙여 판매하니 손님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
그녀는 직접 만든 캐릭터로 SNS에 웹툰을 연재하고 있다. 약국을 열게 된 이야기부터 약국 손님 유형, 약의 사용법 등 다양한 스토리가 있다. © yaksaseyo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영월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에 만화를 연재하고 있어요. 약국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만화에 담고 있죠. 독자들이 제 만화를 보며 잠시라도 웃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다. 손님들과 따뜻한 마음과 공간을 나누고, 그녀를 닮은 캐릭터로 위트를 전하며, 복약상담으로 건강을 책임진 그녀가 약국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 낮에 틈틈이 구상한 디자인 작업과 만화 작업 마무리를 하다 보면 어느새 영월의 하늘이 별빛으로 가득 차 그녀의 밤을 예쁘게 물들인다.
Lifestyle
2024 SUMMER
한국 재료로 즐기는 파인 다이닝
셰프인 조셉 리저우드는 한국의 식재료를 사랑한다. 여러 상을 받은 그의 레스토랑은 한식 메뉴의 가능성을 재정의하며, 기억에 남는 경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식의 매력에 빠져 한국에 정착한 뒤 퓨전 한식 레스토랑 에빗을 운영 중인 조셉 리저우드(Joseph Lidgerwood). 그는 전국 각지를 돌며 재료를 채집하고, 새로운 식재료를 탐색하는 일에 진심이다.
14개월 가까이 안정적인 수입이나 일상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한 조셉 리저우드는 제주도 해변에 앉아 있었다. 산소통도 없이 해산물을 채취하는 제주 해녀들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제가 해녀에게 질문을 할 때마다 그녀는 제 입에 성게를 넣어 주셨어요. 그래서 그냥 거기에 앉아 먹기만 했죠. 해녀들이 물질을 끝내고 잠수복을 입은 채로 스쿠터에 올라타 휑하고 가버리는 장면은 제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라며 애정 어린 마음으로 당시를 회상했다.
호주 태즈매니아 섬에서 자란 리저우드는 집 안의 냉동실을 가득 채울 만큼 해산물을 잡을 수 있는 곳에서의 가족 여행을 즐겼다. 그렇지만 냉동실을 가득 채운 해산물과는 달리 그가 평소에 주로 먹는 음식은 고기와 삶은 야채 그리고 으깬 감자였다. “외식은 약 5~6달러를 내고 펍(Pub) 음식을 먹는 것이었고, 그것이 그 당시 저에게는 최고의 ‘파인 다이닝 경험’이었어요.”
햄버거 뒤집기부터 시작해 실력 있는 셰프가 되기까지
리저우드가 십대가 되었을 때, 그는 어머니를 도와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호주 정부에서는청소년들에게 진로 결정을 위한 교류 프로그램을 장려했는데, 그는 여느 친구들처럼 전기기사나 정비사가 되는 것보다 요리사가 되는 것이 멋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첫 직장은 강가에 있는 도시 프랭클린의 고급 카페였고, 그곳에서 햄버거를 굽는 일을했다. 그 후 그는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일했다. 주로 ‘중간에 블루치즈가 들어간 스테이크’ 같은 음식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이전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 직장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스테이크하우스의 셰프 중 한 명이 당시 막 영국에서 돌아왔는데 그에게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은 “지옥 같았지만 보람 있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리저우드가 영국으로 갈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런던에서 그의 첫 직장은 프랑스 요리를 다루는 곳이었고, 그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 필립 하워드가 공동 소유한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인 더스퀘어(The Square)에서의 일이 포함되었다. 그 다음에는 하워드가 공동으로 소유한 또 다른 런던의 아이콘인 레드버리(Ledbury) 레스토랑에서도 일했다.
“그 레스토랑의 주방 일은 완전 미쳤어요. 네 시간 자고 일하는 데 적응하느라 오래 걸렸어요. 어떤 사람들은 한달 만에 그만두기도 했어요. 그냥 레스토랑을 떠나는 게 아니라 아예 요리하는 걸 그만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36세인 리저우드는 여전히 당시 레스토랑에서의 경험이 그의 열정, 헌신, 집중력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엄청난 경험이긴 했지만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죠. 그때 사용한 레시피 중 어떤 것도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요. 다만 당시 배운 것 중 여전히 유효한 것은 어떻게 나의 하루를 더 잘 관리하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깨끗하고, 체계적이고, 빠르고, 정확하게 일하는 실력 있는 셰프가 될 것인가 하는 거죠.”
원스타 하우스 파티
2016년, 리저우드는 색다른 프라이빗 다이닝 서비스 론칭 계획을 하고 있는 친구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며 팝업 다이닝 경험을 제공하는 ‘원스타 하우스 파티(One Star House Party)’를 만들었다. 비교적 간단한 요리, 보통 서너 가지의 요리만 제공했으며, 미식계의 최상층을 목표로 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이들만의 방식은 빠르게 열렬한 팬들 만들어냈다. 이벤트가 매번 매진될 정도였다. 이들이 시도한 독특한 지역 중에는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손님이 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승객들이 이층침대에서 네 가지 코스 요리를 먹었던 베트남의 야간열차도 있었다.
한국의 첫 방문
서울에서 열릴 원스타 하우스 파티를 앞두고 그는 제주도를 방문했다. 이는 그가 경험한 첫 한국이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해녀들과 함께 조개를 채취하고 싶었지만, 해녀들은 경험 없는 그들을 데려가면 작업이 느려질 것이라며 거절했다. 그래서 리저우드는 결국 해변에 앉아 곧 다가오는 다이닝 이벤트를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그가 해녀들의 생활이나 한국 식재료에 관해 물어보려 할 때마다 해녀들은 그의 입에 성게를 넣어주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리저우드는 서울의 원스타 하우스 파티를 마치고 미국으로 갔다. 그런데 서울 행사에 참석했던 한 고객이 서울에 새로 지은 자신의 건물에 공간을 제공하겠다고 연락해왔다. 2019년에 아내 지니의 지지를 받아 리저우드는 레스토랑 에빗(EVETT)을 열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대부분은 푸아그라와 캐비어 같은 고급 재료에 의존하던 시기였는데, 에빗은 약간 색다른 것을 제시했다. 호주 출신 셰프가 한국 식재료를 중심으로 만든 메뉴를 선보인 것이었다.
한국 사람조차 잘 몰랐던 한국 식재료에 대한 탐구와 발효를 접목한 요리로 에빗은 오픈1년 만에 미쉐린 가이드 1스타에 이름을 올렸다.
“저희 요리는 퓨전이 아닙니다. ‘혁신적인 한국 요리’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은 놀라운 지역의 식재료의 가치입니다. 그 식재료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라고 그는 설명한다.
리저우드 셰프는 한국 음식 중 발효의 역할에 경의를 표한다. 또 그는 정기적으로 즐기는 채집활동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이 채집활동을 ‘산에서 훔치기’라고 표현한다.
그는 한국 고유의 식재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며 좀 더 자세히 말했다. “재료가 사용되는 방식이나 음식이 요리되는 방식, 그리고 층층이 쌓이는 맛을 경험하는 것, 바로 이곳 한국에서만 가능하죠. 모든 것이 너무나 역동적이에요. 그리고 사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할 수 없어요. 간장게장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호주에서 식품법상으로 가능하지 않아요. 막걸리 역시 다른 곳에서 만들어지기 어렵죠. 미생물들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어서 프랜차이즈를 내거나 과도하게 위생적으로 만들면 그 마법이 사라져 버려요. 기술적으로는 한국 음식일지 모르지만, 진짜 한국 음식은 아니게 되는 거죠.”
리저우드의 최근 요리 중에는 모과 동치미가 있는데, 일종의 물김치인 이 메뉴를 만들기 위해 그는 멍게, 제주 감귤, 염소젖, 그리고 당귀 뿌리를 사용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맛의 조합 중 하나라고 말한다.
가족 같은 에빗
에빗에는 9개의 테이블이 있고 한 번에 약 25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다. 메뉴는 코스요리로만 제공되는데, 리저우드는 “몇 가지 시그너처 요리를 더해 완성도를 높였다”라고 설명한다. 레스토랑에서는 15명의 셰프가 테이블에서 요리에 대해 직접 설명하고 마무리한다. 리저우드는 복잡하고 정교하게 정제된 음식은 그의 팀이 끊임없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최고의 메뉴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쓴 결과를 보여준다고 믿는다.
그는 외국인이 한국 음식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웠지만, 오픈 이후 그의 레스토랑은 음식비평가와 고객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이 우리가 한국의 식재료를 사랑하는 것을 아주 좋게 봤다는 것이었어요. 큰 동기부여가 되었죠. 저희 음식이 항상 멋지거나 놀랍지는 않지만, 고객들이 음식의 진가를 알아주죠.”
2020년 미쉐린 1스타를 비롯해 여러 가지 상과 찬사를 받은 레스토랑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한국의 파인 다이닝 요리 현장의 절정에 있다. 레스토랑을 리모델링하고, 최근에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으로 이전했는데. 올해 미쉐린 2스타를 받지 못한 것엔 실망했지만, 그는 레스토랑의 성공이 미슐랭 평가에 달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레스토랑의 현 상태와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합니다. 멋진 고객들을 모시고 있으며, 그들은 저희 음식을 정말 좋아합니다. 또 저는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식재료를 발견하고요.”
그의 수준 높은 한국 요리를 칭찬하는 긍정적인 리뷰가 넘쳐나지만, 가장 의미 있는 건 비평가들의 절제된 평가이다. 한 평론가는 에빗에서 식사하는 것이 가족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캐러맬라이즈 된 크림을 가득 채운 후 흑마늘 멸치와 수수떡을 올린 메주 도넛이다. 한국 발효의 핵심인 메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요리로, EVETT의 요리를 대표하는 디쉬가 되었다. ⓒ 에빗
특별한 경험
10코스 이상의 메뉴와 전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한국의 술을 곁들여 제공하는 메뉴는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요리사들은 끊임없이 창작의 압박을 받는다. 어떻게 하면 고객에게 기억 남는 식사를 제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끊임없이 그들을 따라다닌다.
모든 테이블의 고객들은 특별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지만, 모든 고객이 각 요리와 그 재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리저우드 셰프는 고객들이 좋아하고 가치 있게 여길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각 테이블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가장 좋은 사례는 에빗에서 식사를 한 근처 치킨집 가게 주인 이야기일 것이다. 리저우드 셰프는 맥주 몇 병을 마시며 그에게 레스토랑의 철학을 설명했다. 치킨집 주인은 왜 호주 출신 셰프가 한국 식재료를 이용해 요리하길 원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후 치킨집 사장은 그의 아내와 에빗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음식이 “나쁘지 않네”라고 말했다. 리저우드에게 이 평가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 말은 제 마음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는 말이었어요. 저희가 한국의 식재료가 얼마나 훌륭한지 보여주기 위한 원동력이 되어주는 말이었죠.”
Lifestyle
2024 SUMMER
레고 블록으로 재현한 문화유산
콜린 진[Collin Jin, 본명 소진호(So Jin-ho, 穌進鎬)]은 레고 아티스트이다. 일상적인 사물을 레고 블록으로 재치 있게 해석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문화유산을 주제로 한 작업을 시도하는 중이다. 지난해 첫 전시를 성공적으로 치른 데 이어 올해는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 10월까지 한국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작업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소진호 작가가 고증을 거쳐 재현한 종묘제례악. 기존 레고 부품만을 사용해 1년 반에 걸쳐 제작했다. 소진호 제공
2023년 10월, 서울 소공동에 자리한 모리함 전시관(Moryham gallery, 慕異函)에서 열린 전시가 언론에 보도되며 큰 화제를 모았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종묘제례악이 레고로 만들어져 전시되었기 때문이다. 종묘는 조선(1392~1910)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 무용을 통틀어 종묘제례악이라 한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으로 전통문화를 표현했다는 점도 이색적이었지만, 한국적인 조형 의식과 미감을 섬세하게 구현한 솜씨가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콜린 진의 첫 전시
이야기이다. 종묘제례악뿐만 아니라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을 소재로 한 다채로운 작품들이 전시되어 관람객들이 전통문화를 새로운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소재규(So Jae-gyu, 穌在圭) 회장은 아들이 태어나던 해인 1974년 장난감 회사 한립토이스(Hanlip Toys)를 차렸다.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신기한 장난감을 가장 먼저 갖고 놀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이십 대 중반부터는 자신만의 레고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고, 2007년부터는 장난감 박물관 한립토이뮤지엄을 운영해 오고 있다.
장난감 박물관 한립토이뮤지엄을 운영하는 소진호 작가는 이십 대 중반부터 자신만의 레고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일상적인 사물을 비롯해 문화유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지난해 첫 전시 < 콜린 진의 역사적인 레고 >는 어떻게 열게 되었나?
레고 아트는 취미로 시작한 작업이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작가로 여긴 적이 없었고, 전시회를 열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내 작품들을 집에만 그냥 두기는 아깝다고 전시회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으리으리한 작품들을 제작하는 레고 아티스트들이 많아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지인들의 격려로 용기를 냈다. 전시에 대한 반응이 좋아서 나도 깜짝 놀랐다.
전시에서 특히 종묘제례악이 큰 화제였다. 만들게 된 계기가 있었나?
영문학을 전공한 아내가 역사에 관심이 많아 틈틈이 공부한다. 어느 날 아내가 승무(僧舞)를 주제로 레고 작품을 만들어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승무로 끝내기에는 아쉬워서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종묘제례악까지 왔다. 기존 레고 부품만을 사용해 종묘제례악을 재현하는 데 1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전통문화를 작품으로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선 지식이 필요했다. 고증을 위해 자료 조사를 많이 했고, 『종묘의궤』 같은 책도 구입해 읽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춤 가운데 하나인 승무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작업이 이 작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소진호 제공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주로 레고 팬들이었나?
꼭 그렇지는 않았다. 전통문화 해설사, 국악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한국 무용 전공자들을 만났다. 그분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게 있었다. 전통을 계승한다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옛것을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주변 시선 때문에 종종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문화를 멋지게 표현한 작품을 만들어 줘 고맙다고 하더라. 그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뭉클했다.
전시장인 모리함 전시관 근처에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가 있는데, 그곳 직원분들이 점심시간에 방문한 게 인연이 되어 기획 전시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지난 5월 종묘에서 열린 이 전시를 위해 나는
를 재현한 작품을 제작했다. 이 그림은 궁중기록화 중에서 종묘제례악의 연행 현장을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유서 깊은 장소에서 진행되는 상설전에 참가하게 되어 무척 뜻깊다.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탈놀이 가면인 하회탈을 변형해 제작한 작품이다. 소진호 제공
레고 마니아들의 반응은 어땠나?
보통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전시회를 찾는 일이 많고, 대개는 작품을 보면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기 마련이다. 내 전시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벌어졌다. 아이가 원해서 부모가 함께 온 경우가 많았고, 기존에 출시된 레고 시리즈의 어떤 부품이 내 작품에서 어떻게 응용되었는지를 아이들이 부모에게 설명해 주고 있더라. 아이들이 신이 나서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또 내 작품을 보고 자신도 한번 도전해 보겠다는 아이들도 많았다. 동기 부여가 된 것 같아 흐뭇했다.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얻나?
일상생활에서 주로 아이디어를 얻는 편이다. 예를 들어 한번은
이라는 TV 교양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나주 소반(小盤)에 밥을 차려놓고 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소반도 레고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시도해 봤다.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가 어렸을 때는 아이가 필요하다고 하는 모든 것들을 레고로 만들어 주었다. 필통, 연필깎이, 책상 램프 같은 것들….
작가는 필통, 볼펜, 연필깎이, 스테이플러 등 딸아이가 필요로 하던 모든 것들을 레고로 만들어 주었다. 아이의 자랑이 되고 싶었던 그 마음이 작업의 원동력이 되었다. 소진호 제공
레고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나?
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아버지가 친구분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 나를 데려가셨는데, 친구분께서 레고 샘플을 보여 주셨다. 당시는 레고가 정식으로 수입되기 전이었다. 집에 너무 가져가고 싶은데 그냥 두고 올 수밖에 없어서 무척 아쉬웠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완구 매장에서 일을 도와드리다가 어느 날 스타워즈 레고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희열은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나는 스타워즈 마니아였기 때문에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구입해서 매뉴얼대로 만들며 학습 과정을 거쳤고, 결국엔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다는 단계로 나아갔다.
레고 아트는 기존 블록들만 사용해야 하므로 창의력을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지 않은가?
형태를 변형하거나 도색하지 않고 기존 부품을 그대로 쓰는 것이 레고 아트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철칙이다. 제한된 조건과 한정된 재료로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 점이 바로 레고 아트의 매력인 것 같다.
그리고 경험의 폭과 깊이가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것 같다. 나는 수많은 제품을 조립해 봤기 때문에 어떤 부품들을 어떤 방식으로 조립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끼워 보며 설계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도면을 따로 그리지 않아도 내 머릿속에서 이미 해리 포터의 빗자루가 선비의 붓이 되고, 동물 이빨이 버선코가 되며, 오리발이 관모(冠帽)가 된다.
다만 재료가 제한되어 있어 완전한 고증이 어렵기는 하다. 그럴 때는 내 나름대로 단순화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문가들은 그 차이점을 바로 알아보더라. 디테일을 완벽히 구현할 수는 없지만 알고는 있어야 하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공부를 많이 한다.
한립토이뮤지엄 내 마련된 작가의 작업실. 그는 작업에 필요한 부품들을 종류별로 따로 분류해서 보관한다
가족들이 작업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소통의 비결이 무엇인가?
우리 가족은 식사를 오래 하는 편이다.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 하다 보니 식탁에 머무르는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된다. 가족들이 모두 픽사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개봉하면 꼭 같이 보러 다니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가정생활과 작업이 분리되었으면 해서 집에서는 거의 작업을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완성하면 아내와 딸에게 보여 주기 위해 꼭 가져간다. 그때 의견을 많이 주는데 작업에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다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를 본 적이 있다. 정조(재위 1776~1800)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비롯해 여러 행사들을 치렀던 장면을 담은 기록화이다. “이걸 레고로 만들면 정말 멋지겠다”라고 혼잣말을 했더니,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이 해보라고 부추기더라. 이 그림에는 최소 2천 명의 인원에 말, 소, 가마 등이 무수하게 등장한다. 레고 부품들이 엄청나게 필요할 것이다. 언젠가 꼭 만들고 싶다. 그리고 나만의 디자인으로 레고 제품을 출시해 보고 싶은 꿈이 있다.
Lifestyle
2024 SPRING
수많은 작업이 집약된 푸드 스타일링 세계
푸드 스타일리스트는 음식과 식기 등으로 테이블 공간을 연출하는 일을 한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음식의 질감, 맛, 향 그리고 매무새까지 전달해야 한다. 노력과 창의력을 동시에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모니터로 레퍼런스를 꼼꼼히 확인하며 준비한 음식을 세팅하고 있는 푸드스타일리스트 보선(金甫宣) 씨. 클라이언트의 컨펌은 음식을 준비하고 스타일링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이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큰길에서 살짝 벗어난 골목 안쪽에 지은 지 오십여 년쯤 된 이층집이 있다. 대문은 없고 마당 한쪽에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근처 성미산에 사는 새들이 날아와 쉬어가는 곳이다. 감나무가 환히 내다보이는 통창 안쪽에는 새벽 세 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스튜디오가 있다. 사람들과 온갖 물품이 분주히 드나들고, 환한 조명이 켜졌다가 꺼지고,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호기심 많은 동네 강아지들과 고양이들이 기웃거리는 이곳은 푸드 스타일리스트 김보선 씨(金甫宣)의 작업실이다.
푸드 스타일리스트의 영역은 시대가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음식을 직접 하는 것은 물론이고 소비자 시장을 조사하거나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메뉴도 개발한다. 일의 영역이 넓으니 일과도 바쁘게 돌아간다. 이십 년 넘게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살아온 김보선 씨의 하루하루도 다양한 일들로 촘촘하게 채워진다.
뭐든 잘해야 하는 직업
김보선 씨는 작업실 근처에 있는 집에서 걸어서 출근한다. 보통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서 아홉 시에 작업실의 문을 여는데 외부 촬영이 있는 날은 예외다. 촬영 시작이 아홉 시라면 다섯 시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예전에는 잡지에 실릴 음식을 촬영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판도가 달라졌다.
“잡지가 많이 없어지고 광고 시장도 대부분 디지털로 옮겨갔어요. 요즘 들어오는 일은 브랜드SNS 작업, 전시 세팅, 행사 세팅 등이 주를 이루고 주방가전 신제품이 나오면 그 제품을 테스트하고 메뉴를 개발하고 소책자를 만드는 일도 해요.”
이전에는 요리 따로, 스타일링 따로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의뢰인 대부분이 요리까지 다 할 줄 아는 스타일리스트를 찾는다.
“요리를 알고 스타일링을 하느냐, 모르고 하느냐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달라져요. 요리가 받쳐 주지 않으면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어서 결국 요리를 배우게 되죠. 예를 들어 완성된 볶음요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기름칠을 할지 물엿을 바를지 결정해야 하는데, 그 판단을 하려면 요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해요. 또 고기 종류에 따라 가장 맛있어 보이는 온도가 몇 도인지도 알아야 하죠. 그래서 요리뿐만 아니라 식재료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해요.”
한식, 양식, 중식, 일식 등 요리의 장르도 다양하고 그에 따른 식재료도 무궁무진하다. 그중 특정한 분야만 잘해서는 일을 맡을 수가 없다.
“어떤 일이 들어올지 모르니까요. 전반적으로 다 할 줄 알아야 하고 잘해야 해요.”
잘해야 하는 건 요리만이 아니다. 촬영에 필요한 각종 소품도 준비해야 한다.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그릇부터 시작해 그와 어우러지는 테이블보, 냅킨, 수저, 양념통, 꽃 등….
“시안이 촬영 하루 전날 오는 경우도 많아서 뭘 사러 갈 시간도 없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평소 시간 날 때마다 준비해야죠.”
요리연구가, 플로리스트, 코디네이터, 디자이너를 모두 합한 직업이 푸드 스타일리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최고의 바게트 전문가를 가리는 ‘르빵 바게트 챔피언십 2023’의 공간을 연출한 모습. 8m에 달하는 대형 테이블은 수십 여 종류의 바게트와 각종 오브제로 채웠다. ⓒ김보선(金甫宣)
스물두 살에 찾은 꿈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우연히 본 TV 프로그램을 통해 푸드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원래 요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요리 관련 일을 하고 싶었는데 식당에서 일을 하면 같은 요리만 하잖아요. 매번 새로운 요리를 하고 더 맛있어 보이게 연출하고 또 화보로 작업물을 만들어 내는 푸드 스타일링이라는 일이 재미있어 보였어요.”
결심이 선 이후 앞만 보고 달렸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한 다음 본격적으로 꿈을 좇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는 푸드 스타일링을 위한 학교도 아카데미도 없었다.
“당시 요리연구가이자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던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하는 클래스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선생님 스케줄이 있으면 수업이 없어지거나 미뤄졌죠.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클래스였는데, 한 달에 겨우 한 번 할 때도 있었어요.”
푸드 스타일링을 배우다 보니 요리를 모르면 안 되겠다 싶어 신라호텔 조리 교육센터에 들어갔다.
“거기서 양식을 배운 이후 푸드 스타일리스트의 어시스턴트로 들어가 일을 더 배우려고 했어요. 그런데 배우려는 사람은 많고 자리는 없으니까 조리 경력이 있으면 남들보다 유리하겠다 싶어 파스타 전문점에 들어가서 일을 했어요.”
그 경력을 발판으로 어시스턴트가 되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수업을 일주일에 하루로 몰고 나머지 시간 내내 일을 했다. 졸업 후 다음 단계를 고민하던 그녀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요리 종류와 식재료가 다양했어요. 디저트, 와인 등 다루는 범위도 넓었고요. 견문을 넓힐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일본에서 생활비, 학비,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세 개를 하며 일을 배웠다. 2005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부모님이 계신 집 반지하에 조그마한 작업실을 차려 푸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독립생활을 시작했다.
“일은 없었어요. 삼 개월에 하나 들어올까 말까 했죠. 멍하니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도서관, 서점에 다니면서 공부를 계속했어요. 그러다 일이 하나라도 들어오면 연습을 엄청 많이 했어요.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여러 번 테스트하고, 한 컷을 찍는 촬영에도 플랜C까지 만들었어요. 한 번 일을 맡긴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고, 주위에 소개해 주고, 그럭저럭 자리를 잡기까지 5년 정도 걸렸어요.”
원물 자체가 싱싱하고 좋아야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늘 식재료 공수에 심혈을 기울인다. ⓒ김보선(金甫宣)
먹는 것도 일, 쉬는 것도 일
반지하에서 작업실을 시작한 이후 서너 번을 옮겼고, 지금의 작업실은 8년 전에 이사한 곳이다. 촬영은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잡힌다. 촬영이 없는 날에는 촬영 준비로 분주하다. 시안을 파악하고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고 스태프들에게 할 일을 지시한다. ‘북유럽의 삭힌 청어요리’처럼 생소한 음식을 만들어야 할 때면 식재료를 준비와 레시피 연구, 그리고 테스트도 해야 한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날에는 영수증과 세금계산서 등을 정리한다. 아침은 삶은 달걀이나 고구마로, 점심과 저녁은 거의 배달 음식으로 때운다.
“냉장고에 좋은 식재료들이 많지만, 저를 위해 요리하거나 정리할 시간도 여유도 없어요. 거의 매일 새벽에 일이 끝나거든요. 집에선 잠만 자요. 하루 네 시간 정도 자나 봐요.”
가끔 시간이 날 때면 사람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김보선 씨에게는 일의 연장이다. 맛깔스러운 음식을 보면 자동으로 몸이 반응한다. 요리조리 보며 조리법을 탐색하고 또 언제가 같은 음식의 스타일링을 제안 받게 되면 직접 만들어봐야 하니까 말이다.
“아이디어가 떠올라야 정리가 되고 실행할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한 일이에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을 한다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일을 분리하는 게 불가능해요. 좋아하지 않으면 못 하는 일이죠. 원래 뭐든 조금 하다 금방 포기하는 성격이었는데 이 일은 저한테 맞아요. 할수록 더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당의 감나무로 날아드는 새들을 바라보는 일이 김보선 씨에겐 짧은 휴식이고 위로이다. 아니 어쩌면 그 역시 또 다른 아이디어의 온상일 것이다.
Lifestyle
2024 SPRING
소셜미디어 인류학자
이야기와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 큰 키의 바트 반 그늑튼(Bart van Genugten) 씨는 2014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이후 그는 결혼하고 인기 많은 유튜브 채널 ‘아이고바트(iGoBart)’를 운영하고 있다. 채널에서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네덜란드 참전용사에 대해 알려주고 한국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들을 종종 소개한다.
유튜브 채널 아이고바트를 운영하는 바트 반 그늑튼 씨. 그는 유튜브 콘텐츠를 촬영할 때 주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며, 손에 쥐기 편한 작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다.
바트 반 그늑튼 씨의 첫 한국 여행은 생각보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2014년 스페인 말라가(Malaga)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동안 그는 한국인 여학생과 데이트하고 있었고, 이를 계기로 서울의 성균관대학교 한국어학당에 등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울에 사는 대신 인천의 부평구 서쪽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공공 표지판은 외국인 방문객을 특별히 고려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인구 8,500여 명인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그레이브(Grave)에서 자란 그에겐 도시 탐색의 기술이 필요치 않았다. “출구가 아주 많은 지하철역은 익숙해지기 어려웠어요. 한국어를 읽을 수 없으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죠”라고 반 그늑튼 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대도시의 젊은이가 되기 위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죠.” 그렇지만 한국은 지속해서 그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다.
다시 아시아로
석 달 후 반 그늑튼 씨는 네덜란드로 돌아갔고 일을 시작했다. 일 년이 지난 후 그는 자신이 직장 생활에 완전히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일을 그만두고 아시아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몇 주를 보낸 후 6개월 동안 중국, 대만, 미얀마, 베트남, 태국, 필리핀을 돌아보는 배낭여행을 했다. 하지만 그의 여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시아를 돌아보는 여행이 대체로 꽤 심심했어요. 늘 혼자 다녔죠. ‘이게 무슨 삶인가?’라고 자문했어요. 여전히 어딘가를 가고 싶었는데 한국이 가장 익숙했어요. 한국은 저에게 새롭고 완전히 낯설면서도 동시에 아주 편안한 느낌을 주는 묘한 곳이었어요. 서구와 아시아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룬 곳이죠.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었어요.”
결혼과 문화
반 그늑튼 씨는 2017년 초 한국에 되돌아오게 된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첫째로, 그는 나중에 그와 결혼하게 될 여성인 김휘아(金輝妸 Kim Hwi-a) 씨를 만났다.
“우리는 데이트 앱에서 만났어요. 그녀는 상수동에, 나는 합정동에 살고 있어서 거의 이웃이었죠. 우리는 서로 잘 맞았어요. 근데 그녀를 만났을 때가 네덜란드로 돌아가기 얼마 전이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좀 더 머물러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죠. 서로에 대한 모든 것을 좋아했기에 결혼을 안 할 이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혼했죠.”
2019년에 결혼을 한 후 반 그늑튼 씨와 그의 아내는 서울 마포구에 둥지를 틀었다. 그곳은 한강 옆으로 산책길과 자전거길이 있었고 주변에 여러 대학과 예쁜 가게들, 그리고 젊은이들이 밤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장소들이 있었다.
처음부터 한국의 급격한 변화는 반 그늑튼 씨에게 끊임없는 매력의 원천이었다. “일제강점기 억압과 한국전쟁을 겪은 나라가 경제적 성공과 민주화를 이루어낸 게 아주 흥미로웠어요. 그 후 아시아 경제위기를 맞고도 10년도 채 되지 않아 세계에 알려진 곳 중 하나가 된 것도요. 저는 인간과 환경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인문지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한국이 어떤 식으로든 더 커지게 될 거라고 느꼈어요.”
그는 한국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동네 고유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며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 귀 기울인다.
유튜브에 도전하다
2018년에 아내의 도움을 받아 반 그늑튼 씨는 ‘섹시그린(Sexy Green)’이라는 유튜브를 시작했다. 환경 이슈에 초점을 맞춰 원래는 친환경 물품을 파는 회사를 시작하는 게 목적이었고 채널의 콘텐츠를 통해 제품을 홍보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행과 다양한 문화에 대한 그의 열정과 관심이 곧 채널의 이름과 방향을 바꾸게 했다. 그렇게 해서 ‘아이고바트(iGoBart)’가 탄생했다. ‘아이고’는 새로운 곳을 방문하고 싶어 하는 반 그늑튼 씨의 욕구를 표현하는 동시에 언어유희이기도 하다. 한국어에서‘아이고’는 감탄사로 놀람과 공감 혹은 슬픔까지 표현한다.
300편이 넘는 유튜브 영상은 3,200만 뷰를 기록했다. 가장 인기 있는 영상 중에는 한국전쟁에서 싸운 네덜란드 참전용사의 인터뷰와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들이 있다. 이 시리즈는 그가 2018년에 북한을 방문한 후 만든 영상으로 시작한다.
그에게 이 시리즈는 네덜란드와 한국 사이의 가장 중요한 관계 중 하나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수천 명의 남자들이 이곳에 와서 싸웠고 그들 중 일부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이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생존하는 참전용사 대부분의 나이가 여든이거나 그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의 채널에 나왔던 이들 중 일부는 이후 돌아가셨다. 이제 살아 있는 네덜란드 참전용사가 100명이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마음은 다급하다. 이 시리즈는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기억을 끌어내는 것보다는 참전용사들에게 그들의 희생을 고맙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반 그늑튼 씨는 천생 이야기꾼이다. 혹자는 그를 인플루언서라고 부르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를 ‘기록자’, ‘영상 제작자’, 그리고 ‘유튜버’라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이들이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믿는다.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해요. 그것이 저에게 큰 영감을 줍니다. 제 아버지는 10형제 중 막내이고 이미 70세이세요. 아버지의 부모님은 15년 전에 97세로 돌아가셨어요. 그의 조부모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싸웠던 사람들을 알고 있었죠. 이제는 도달할 수 없는 역사죠.”
그가 작업 중인 ‘웰컴 투 마이 동(Welcome to my DONG)’은 서울의 467개 행정구역을 탐구하는 프로젝트다. 벽 한쪽에 그려놓은 지도에 다녀온 동네를 색칠하고 그가 느낀 동네의 특징을 적어놓는다.
발견의 2,000킬로미터
2021년, 반 그늑튼 씨는 번아웃이 왔다. 매주 콘텐츠를 올려야 하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결과물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영상들은 그가 만들고 싶어 하는 것들보다 뷰어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반영했다.
그의 아내는 “인생이 당신에게 뭘 주는지 가봐!”라는 영감을 주는 말과 함께 자전거 여행을 제안했다. 2021년 7월부터 10월까지 그는 약 2,000킬로미터를 해변을 따라 한국을 자전거를 타고 돌았다. 그는 외딴 지역의 풍경과 해안의 경치를 즐겼고, 시간이 멈춘 듯한 곳들을 방문했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시골 지역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여행은 자신의 삶과 자신이 선택한 제2의 고향에 대해 눈을 뜨게 만들었다. “제 아내가 최고라는 걸 배웠죠.” 반 그늑튼 씨는 또한 한국 문화에 대한 사랑을 더 깊이 깨닫는 경험을 했다. 어떤 것도 억지로 꾸며 말하거나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해 명쾌하게 표현하는 그는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은 외부 세계에 판매되고 있는 ‘완벽한 이미지’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인종주의와 차별이 있었어요”라고 그는 솔직하게 얘기했다. “저를 집으로 초대한 아주 친절한 분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여기 내 마을에서 뭐 하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러니까 모든 게 조금씩 다 있었어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하지만 그런 불완전함이 저를 매료시켜요.”
문화 차이
자신을 ‘시골 아이’라고 말하는 반 그늑튼 씨는 시골에서 자라서 이방인에게 인사하는 관습에 익숙했는데 한국의 대다수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저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걸 좋아해요. 젊은이들과 그렇게 하는 게 때때로 힘들지만, 나이 든 분들은 종종 시간을 내서 이야기를 나누죠”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네덜란드 사람들은 아주 솔직하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이라도 바로 친구가 되고 관계를 맺게 된다고 한다. 또 자신의 종교, 정치적 소속, 심지어 성생활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네덜란드와 한국의 문화 차이가 특히나 강하다.
“함께 저녁을 먹을 때 어느 순간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고, 대통령에 대해서 혹은 누구를 뽑을 것인지 묻고 싶어요. 네덜란드에서는 이런 이슈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아마도 격렬할 수는 있겠지만요. 서로 반대 입장이어도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여전히 친구로 남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게 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반면에 그가 네덜란드로 돌아갔을 때는 대화 하는 상대방을 배려하여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는 한국의 예절이 그에게 영향을 미친다. “제가 한국 사람이 된 느낌이에요. 사람들의 감정을 좀 더 배려하게 되었죠. 한국에 살면서 나 자신을 좀 더 인식하게 되었어요. 두 나라의 좋은 점들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런데도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이 그저 “네덜란드 사람으로 이곳에 살면서 이 나라에 대해 배우고 있다”라고 말한다. 정말 한국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이 나라의 행복한 이방인이에요. 사람들이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이웃으로 환영하다
작년에 반 그늑튼 씨는 서울 서대문구 가좌동에 있는 전통 시장에 간 적이 있었다. 시장은 특별히 매력이 있거나 깨끗하진 않았지만 그를 끌어당겼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니!’하고 생각했어요. 덜 알려졌지만, 주목할 만한 장소들이 아주 많고 이곳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배울 기회가 많다고 느꼈어요.”
그의 가장 야심적인 유튜브 프로젝트가 뒤따랐다. 서울의 467개 행정 구역인 동에 대한 영상 시리즈가 그것이다. 이미 약 40개 동을 찍었다. “지역들이 모두 자기만의 이야기와 역사가 있어요. 각 지역을 흥미롭게 만드는 이 작은 조각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매력적이에요”라고 그는 말한다.
지금까지 만든 동 콘텐츠 중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뽑아 달라고 하자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포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곳은 한국에서의 제 고향입니다. 제가 자란 곳 같은 곳이죠. 길들을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잘 알아요. 그래서 고향 같고 그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아요.”
그는 궁극적으로는 전문가나 지역 주민들과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하며, 유튜브 시리즈를 보완해 책으로 내기를 바란다.
많은 한국 시청자가 댓글로 반 그늑튼 씨는 외국인이지만 한국에 대해 자신들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부인한다. “아마 그렇지 않을 거예요. 저는 그저 계속해서 배우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 있는 교수가 아니에요. 저는 그저 소셜미디어 인류학자라고나 할까요.”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의 열정과 배움의 여정을 공유하길 원한다. “저의 목표는 구독자를 모으는 것이었지만, 그건 아주 표면적인 것일 뿐이에요. 왜냐하면 그다음엔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세요?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에게 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지 묻지 않아요. 우리는 그저 시청하고 즐길 뿐이죠. 사람들이 제 채널에서도 그러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Daniel Bright 에디터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Lifestyle
2024 SPRING
오랫동안 기억될 ‘홍텐 프리즈(freeze)’
중학생 시절 브레이킹에 입문한 홍텐(Hong 10)은 2001년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출전해 비보이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어느덧 30대 후반이 된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창의적 퍼포먼스를 바탕으로 여전히 정상급 기량을 선보인다.
2021년 11월, 폴란드 그단스크(Gdańsk)에 있는 셰익스피어 극장에서 열린 ‘레드불 비씨 원 캠프(Red Bull BC One Camp)’ 장면. 홍텐의 시그니처 동작에 다른 참여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그는 ‘홍텐 프리즈’를 비롯해 독창적인 시그니처 기술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 Lukasz Nazdraczew, Red Bull Content Pool
2023년 9월 23일부터 10월 8일까지 중국 항저우에서 열렸던 제19회 아시안게임에는 45개국에서 온 1만 1,907명의 선수들이 총 40개 종목, 482개 경기에 참가해 실력을 겨루었다. 그중 브레이킹은 항저우 아시안게임부터 정식으로 채택된 신규 종목으로, 한국에서는 홍텐이 은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최초로 메달리스트가 됐다.
그의 본명은 김홍열(Kim Hong-yul, 金洪烈)이다. 이름 마지막 자(字) ‘열’을 외국 비보이들이 발음하기 어려워하자, 이를 동음이의어인 숫자 ‘10’으로 바꾼 것이 그의 활동명이 되었다. 그가 선보이는 창의적인 기술들은 이른바 ‘홍텐 프리즈((Hong 10 freeze)’라 불리며 전 세계 비보이 마니아들을 열광시킨다. 그는 에너지 드링크 브랜드 레드불이 2004년부터 개최하기 시작한 ‘레드불 비씨 원(Red Bull BC One)’ 월드 파이널에서 2006년, 2013년, 2023년 통산 세 번의 우승 벨트를 차지했다. 이로써 그는 세계 최정상급 비보이들만 참가할 수 있는 이 대회에서 네덜란드의 멘노 판 고르프(Menno van Gorp)와 함께 최다 우승의 주인공으로 기록되었다. 사실상 세계 최고의 비보이 반열에 오른 셈이다.
홍텐은 브레이킹 댄서에서 국가대표 선수,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 그리고 이제 올림피언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레드불 비씨 원에서 세 번이나 우승했다. 소감이 어떤가?
레드불 비씨 원은 브레이킹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이다. 나는 2005년 처음 참가했고, 2006년과 2013년에 우승했다. 2016년에는 2위에 그쳤는데, 그때 ‘앞으로는 우승하기 어렵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출전을 포기했다. 그러다가 2022년에 다시 초청받았는데,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도저히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지난해 오랜만에 참가하게 됐을 때는 그곳에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았고, 우승까지 하게 되어 무척 기뻤다.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홍텐은 같은 해 레드불 비씨원 월드 파이널도 제패했다. 이로써 그는 네덜란드의 비보이 멘노 판 고르프(Menno van Gorp)와 함께 레드불 비씨원 월드 파이널의 최다 우승 기록을 갖게 되었다.
지난해 레드불 비씨 원 월드 파이널에서는 컨디션이 어땠나?
그때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대회 전에 무릎 부상이 있었고, 직전에 아시안게임을 치렀기 때문에 피로도 쌓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내 기분이 좋았고 전혀 긴장도 되지 않았다. 결승 상대였던 필 위자드(Phil Wizard)는 같은 레드불(Red Bull BC One All Stars) 소속이고 친한 사이다. 그와 즐겁게 겨뤘는데 그것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춤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이 하는 걸 보고 흥미를 느껴 시작하게 됐다. 브레이킹은 어려워 보이는 기술을 시도해서 성공시켰을 때 오는 쾌감이 있다. 초기에는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에서 큰 기쁨을 느꼈고, 시그니처 기술이 필요한 시기가 오면서는 나만의 무브를 만드는 게 재미있어서 계속하게 됐다.
움직임 개발은 창의성이 필요해서 쉽지 않을 것 같다.
자기만의 무브를 만든다는 건 도전의 연속이다. 어떻게 해야 뭘 만들 수 있다는 확실한 방법론이 있는 게 아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걸 창안하기도 어렵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내 몸이 해낼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래서 일 년에 한두 개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나는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무작정 다 적어 놓고 실험해 보는 편인데, 거의 다 실패한다. 되든 안 되든 계속 시도해 보는 근성이 필요하고, 창작하는 걸 좋아해야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슬럼프를 겪은 적은 없나?
2003년쯤 춤을 잠깐 그만둔 적이 있다. 2002년에 ‘Battle of the Year’, ‘UK B-Boy Championships’ 등 그동안 영상으로만 접했던 유명한 국제대회에 나가 우승했다. 그러고 나니까 꿈을 이뤘다는 생각에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춤을 그만두고 6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아는 형들이 찾아와서 팀 배틀에 나가자고 권유했다. 대회 준비를 하면서 내가 춤을 정말 좋아한다는 걸 새삼스레 느꼈다. 그 뒤로 슬럼프에 빠지면 브레이킹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잘 출 수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며 파고들었다.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최초의 메달리스트가 됐다.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아시안게임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 가늠하기 어려워서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가면서도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대회가 시작되고 보니까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기대감과 부담감이 동시에 커졌다. 운이 나쁘게도 대회를 2주 정도 남기고 무릎을 크게 다쳤다. 어떤 처치를 해도 회복이 되지 않아서 진통제를 먹으며 견뎌야 했다.
경기가 이틀에 나뉘어 진행됐는데 첫날에는 어떻게든 살아남자는 생각으로 간신히 버텼다. 둘째 날엔 처음 붙은 상대가 우승 후보 중 한 명인 카자흐스탄의 아미르(Amir, 본명 Amir Zakirov)였다. 이길 생각 말고 준비한 것만 잘하자고 마음을 비웠더니 오히려 자신감이 더 붙었다. 결승에서는 일본의 시게킥스(Shigekix, 본명 Nakarai Shigeyuki)를 만났는데 한 표 차이로 준우승을 해서 좀 아쉬웠다.
서울 홍대 입구에 위치한 연습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비보이 홍텐. 플로우엑셀(FLOWXL) 크루 소속인 홍텐은 10대 중반 브레이킹에 입문하여 20년 넘게 정상급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올림픽에 나가려면 5월과 6월에 열리는 예선전을 잘 치러야 한다. 거기서 10위 안에 들어야 출전권이 주어진다. 그래서 당장은 예선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목표다.
춤을 언제까지 출 것 같나?
브레이킹은 배틀이라는 문화가 바탕에 깔려 있다. 춤을 그만둔다는 것은 배틀에 나오는가 아닌가가 기준이 된다. 심사위원 같은 다른 활동을 계속하더라도 배틀을 중단하면 그것이 곧 은퇴이다. 우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배틀에 나서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은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언제까지 배틀에 참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출 수 있는 한 오래 추고 싶다. 다만 지금까지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에 올림픽을 기점으로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있다.
후배들에게 어떤 댄서로 기억되고 싶나?
국내 브레이킹 신을 바꾸려고 노력했던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다. 우리나라는 외국에 비해 어린 나이의 비보이들이 적은 편이다. 내게는 어린 친구들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유입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홍텐 프리즈’처럼 내 이름이 붙은 기술들이 있다. 훗날 브레이킹에 입문한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은 모르더라도 내 이름이 붙은 기술은 알게 될 거다. 그거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