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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마음을 끌어당기는 간판

People 2022 SUMMER 710

마음을 끌어당기는 간판 박근철(Park Guen-chul 朴根哲) 대표는 2005년 간판을 제작하는 종합 광고 기획사 ‘DISIGN M’을 창업해 지금까지 일해 오고 있다. 그는 튀지 않으면서도 눈길을 사로잡는 품위 있는 디자인으로 고객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다. 2005년부터 간판 제작하는 ‘DESIGN M’을 운영하는 박근철 씨는 고객의 마음을 빠르게 읽고 원하는 디자인을 만들어 신뢰를 얻고 있다. 낯선 곳에 가면 길가에 줄줄이 늘어선 간판들을 비교하며 식당을 선택하게 된다. 비슷비슷한 음식을 파는 가게들 사이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간판이 있다면 음식 맛이 남다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간판은 가게의 얼굴이자 가게 안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 간판은 가게의 첫인상에 불과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문을 하게 만드는 마법, 딱 거기까지다. 손님의 두 번째, 세 번째 발걸음은 주방장의 손맛과 고객을 대하는 태도, 청결, 분위기 같은 요소들이 좌우한다. 이처럼 간판은 첫걸음을 이끌 뿐이지만, 그 힘이 없이는 아무리 뛰어난 손맛도 세상에 알려질 수 없으니 고객의 물꼬를 트는 마중물이라 할 수 있다. 박근철 대표는 그런 마중물을 붓는 사람이다. 직장 생활 건물 입구에 세워진 DISIGN M의 간판은 간결하지만 강한 인상을 준다. 열린 출입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게 정돈된 사무실이 고요하다. 좌우를 살펴도 인기척을 느낄 수 없다. 크기로 봐서는 열 명 정도는 너끈하게 일할 공간이다. “계십니까?” 그제야 출입문 맞은쪽 책상에 놓인 두 개의 모니터 사이로 얼굴이 올라온다. 박 대표다. 주문받은 간판 디자인에 열중한 나머지 사람이 들어서는 줄도 모른다. 박 대표의 고향은 강원도 인제군으로 깊고 높은 한계령 초입에 있다. 1등급 물에서만 산다는 쉬리가 살 만큼 깨끗한 개울이흐르는 곳이다. 초등학교를 나와서는 이웃 마을의 중‧고등학교로 통학했고, 한계령 너머 고성에 있는 경동대학교 건축공학부에 입학했다. 삼남매인 그는 위로는 형이, 아래로는 여동생이 있다.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집안 살림살이라 대학에 입학은 했지만 학비는 스스로 벌어야 했다. 그러던 차에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닥쳤다. 직업 군인이 되려고 부사관 지원을 했는데 경제 위기 탓에 경쟁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결국 자원 입대해서 군 복무를 마쳤다. 전역 후 춘천으로 간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여러 곳에서 일하다가 2002년 우연찮게 간판 제작 시공 업체에 취업을 하게 됐다. 그곳에서간판 디자인과 제작, 시공을 배웠다. 간판 일이라는 게 한 가지 기술만 익혀서는 안 된다. 자그마한 간판 하나를 시공하려 해도 철공, 조명, 전기 같은 다양한 기술이 필요하다. 용접, 그라인더, 드릴 작업은 필수고 커팅, 전기 배선그리고 다양한 소재의 특성도 익혀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시는 사람의 힘만으로 무게가 수백 킬로그램이나 되는 간판을 끌어올리고 밧줄에 매달려 설치해야 했다. 육체 노동 강도가 대단히 셌고 위험성도 컸다. “그때는 너무 무서웠어요. 지금처럼 사다리차나 스카이 같은 장비가 없었거든요. 건물 4~5층 옥상에서 간판을 끌어올린 다음 안전 달비계에 몸을 의지해 작업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평균적으로 한 사람이 100kg 정도를 당겨야 했다. 간판 무게가 400kg이면 4명이 위에서 당기는 식이다. 때때로 사고도 일어났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가로 30m 길이의 간판을 옥상에서는 8명이 당기고, 아래에서는 한 명이 사다리에 올라가 밀어 올렸다. 그때 갑자기 아래에서 밀고 있던 동료가 사다리 아래로 추락한 거다. 3층 높이였다. “2단 사다리의 걸쇠가 풀려 미끄러졌어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친구였는데……. 당시 사고로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다녀요.” 박 대표도 왼쪽 엄지를 들어 보인다. “저도 엄지손가락이 안 구부러져요. 드릴 작업을 하다가 손가락 인대가 끊어졌어요.” 가운뎃손가락에도 드릴 날에 장갑이 말리면서 생긴 상처가 또렷하다. 홀로서기 간판 업체 직원 시절 월급은 85~90만 원이었다. 2003년께 그 월급을 받으며 달세 방에서 살았다. 보증금 50만 원에 달세가 30만 원이었다. 학비를 마련하려고 일을 시작했는데, 달세를 내고 나면 통장이 휑하니 비었다. 대학에 복학한다고 장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빨리 기술을 익혀 독립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직원 시절 디자인 편집 작업도 어깨너머로 배웠다. 부족한 부분은 책을 사서 독학으로 익혔다. 20년 전 그가 했던 첫 디자인은 닭발 집 간판이었다. 이 간판은 지금도 춘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 가게가 번창해 춘천에만 스무 개가량 체인점이 생겼기 때문이다.“지금 보면 폰트나 그림이 촌스럽다는 생각도 들어요.하지만 제 첫 디자인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시공할 수 있다는 것이 뿌듯해요.”지금의 회사는 2005년 창업했다. 월급쟁이 직원으로는 장래가 막막해 작은 사무실을 얻고 다이어리 한 권을 무기로 간판 업계에 들어섰다. 박 대표의 어깨 뒤로 보이는 책꽂이에는 제각각의 다이어리가 빼곡히 꽂혀 있다. 그의 간판 업력과 엇비슷한 권수다. 고객의 요구 사항을 비롯해 결제 내역까지 꼼꼼하게 기록돼 있다. 몇 쪽을 넘기다 보니 과거 그의 발자국을 따라 동행하는 듯하다. 십수 년 동안 그의 손을 거친 간판들, 그리고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담겼다.그는 직관적인 사람이다. 디자인에서도 느낄 수 있다. 현장에서 익힌 감각으로 고객의 요구를 빠르게 읽고 디자인 콘셉트를 뽑아낸다. 회사 이름인 ‘M’도 그렇다. 거창하게 의미를 담고, 고민을 해 짓지 않았다. ‘업체 명을 뭘로 하지?’ 궁리할 때 신용카드에 찍힌 브랜드 로고가 보였다. ‘아, 이거다!’ 그건 바로 알파벳 M이었다. 간판 제작엔 철공, 조명, 전기 같은 다양한 기술이 접목된다. 여기에 배선, 사다리 작업 등 위험한 순간이 뒤따른다. 늘 안전에 유의해야 하는 이유다. 직관과 열린 마음 작가가 글을 쓰거나 디자이너가 책 표지를 작업할 때, 거듭 고치고 바꾸다가 첫 콘셉트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인이 시를 쓸 때도 그렇다. 시를 쓰도록 마음을 흔든 첫 감성이 중요하다. 탈고를 거듭하다 감성을 놓치면 구겨 버려야 한다. 처음 그 순간의 직관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타고난 광고쟁이다. 논리나 지식, 이성을 뛰어넘는 직관의 소유자다. 회사가 십오 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빛바랜 느낌이 들지 않고 여름날 햇빛처럼 쨍하고 빛나는 이유도 그의 직관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고객의 요청이 들어오면 현장 답사를 간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지는 간판을 구상하면서 어디에 포인트를 줘 돋보이게 할까를 고민한다. 튀지 않으면서 눈길을 사로잡는 품위. 그것이 그가 추구하는 디자인이다. 자신의 디자인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고집하지 않는다. 고객의 마음을 빠르게 읽어 내 다시 작업에 들어간다. 열린 마음을 지닌 기획자다. 직관과 열린 마음은 회사가 지속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처음엔 알음알음 고향 사람들 인맥으로 시작한 사업인데, 이제는 영업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될 만큼 자리를 잡았다. 따로 영업 사원을 고용할 필요도 없다. 이미 스무 해 가까이 직접 디자인하고 시공한 간판들이 천군만마의 몫을 해내고 있다. 여기에 한번 맺은 고객과 쌓은 무한한 신뢰 관계도 한몫한다. ‘왜 그런 신뢰가 쌓였을까?’ 그도 모른다. 자신은 그저 고향 강원도 산골의 나무와 집 앞의 개울물처럼 소소하고 맑게 살아왔을 뿐이다. 때론 가슴 아픈 주문도 있다. 장사를 접으며 ‘상가 임대’ 현수막을 걸어 달라는 요구다. 이런 광고에는 돈을 받을 수 없어 시공을 하고 조용히 돌아온다. 박 대표는 큰 욕심 없이 일한다. 사업을 더 키울 계획도 없다. 지난 20년처럼 자신을 믿고 찾아 주는 고객들에게 진심을 담아 디자인하고, 정성껏 시공하며 살아가겠다는 다짐뿐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주꾸미 식당 간판 시공 현장으로 가는 박 대표와 동행했다. 묵직한 공구 벨트를 차고 스카이 고소 작업대에 고민 없이 올라선다. 간판 배선을 마무리하며 글자 캡을 씌우는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똑 떨어진다. 땀방울 떨군 자리, 오늘도 그와 고객 간의 신뢰가 피어난다. 20년 전 처음 간판 디자인을 맡은 닭발 집은 번창해 춘천에만 스무 개가 넘는 체인점이 생겼다. 새로운 체인점이 생길 때면 지금도 직접 간판을 제작한다.

기회가 이끄는 대로

People 2022 SUMMER 632

기회가 이끄는 대로 한국에 오는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다른 일을 하기 위한 과정에서 짧게 머무르는 정류장과도 같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매슬론 씨는 이 일을 지속하고 있고, 원래 하고 싶었던 예술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또 좋아하는 일을 시도해 보는 걸 주저하지 않기에 다른 영역에도 손을 대본다. 네오팝 작가이자 영어 교수, 그리고 보디빌더까지 다양한 역할을 해내는 크리스토퍼 매슬론(Christopher Maslon)은 좋아하는 일을 시도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파란 셔츠와 넥타이를 맨 크리스토퍼 매슬론 씨는 누가 봐도 여느 영어 교수처럼 보인다. 하지만 스프라이프 넥타이가 생기를 더하면서 교수 이상의 무언가가 기대된다. 소셜 미디어에서 그를 찾아보면 그의 페이스북은 온통 예술과 관련되어 있고 반면에 인스타그램은 보디빌딩 사진으로 가득하고 가끔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계정이 혹시 해킹당한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저는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아는 걸 원하지 않아요. 각각 다른 일은 다른 카테고리로 구별하는 걸 좋아해요”라고 매슬론 씨는 말한다. 교수라는 직업 외에도 그는 예술가이고 보디빌더이기도 하다. 코스프레를 사이드잡으로 하면서 가끔 모델이나 공연, 혹은 빅토리아 고딕 예술과 패션 관련 일을 한다. 그의 삶의 태도는 기회가 주어지면 이를 좇아가고, 그것이 낯선 영역이라면 배우면서 해보는 식이다. “제게 주어진 일이 엄청나게 거대해 보이면 저는 완전히 그 일에 몸을 던집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도 한국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바로 뛰어든 건 아니다. 기회를 잡아라 미술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거주하고 있을 당시 한국인 이웃이 보낸 장문의 이메일을 받았을 때 매슬론 씨는 이를 무시했다. 메일은 “한국에서 영어 가르치기”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매슬론 씨는 메일을 받고 바로 삭제했는데 며칠 간 메일이 신경 쓰였다. 컴퓨터공학 교수였던 그 이웃에게 메일에 대해 묻자“당신이 적임자예요!”라고 말했다. 당황한 매슬론 씨는 이를 부인했지만, 곧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공짜 비행기표가 제공됐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주일 후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믿고 말이다. “2002년 3월 31일에 한국에 왔어요. 이날을 저의 ‘한국 생일’이라고 불러요. 그게 20년 전이고, 이후 돌아가지 않았죠.” 그때는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었던 해였다. 매슬론 씨는 축구팬은 아니었지만 월드컵 열기에 사로잡혔다. 한번은 저녁 식사에 참석해 한 중년 네델란드인 옆에 앉은 적이 있는데 나중에 뉴스를 보고 그가 한국 대표팀을 이끈 히딩크 감독임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한국에 있었던 게 너무 좋았어요. 마법에 걸린 것 같았죠. 저 자신이 역사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어요”라고 그는 회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매슬론 씨는 한국인의 근면성을 존경하게 되었고 한국 음식과 사극드라마를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 왕과 양반에게 특별한 친밀감을 느꼈다. 그리고 한국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교회에서 알게 된 언어학 학생 권선애 씨와 사랑에 빠졌다. 3년 후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기억을 되살리며 매슬론 씨는 웃었는데, 오하이오의 집주인이었던 한국인의 충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만나는 첫 여성과 결혼할 생각은 하지마!” 매슬론 씨 부부의 딸 엘리자베스는 2006년에 태어났다. 생각지 않게 매슬론 씨는 영어를 가르치는 일도 좋아하게 되었다. 대전에 있는 동아기술고등학교에서 아홉 달을 가르치기로 계약하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직업을 찾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저는 뭔가 설명하고, 나누고, 묘사하는 걸 좋아하는 거 같아요. 가르치는 일은 제게 너무나 잘 맞아요.” 3년 후에 그는 대전보건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현재까지 영어뿐만 아니라 예술사, 그리고 디자인과 사진을 가르치고 있다. 자신의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TESOL 석사학위도 받았다. 앤디 워홀의 영향 매슬론 씨에게 가르치는 일은 예상치 못했다. 왜냐하면 학교를 싫어한 걸 차치하더라도 자신은 예술가로 태어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네 살 때인 어느 날 혼자 놀게 되었을 때 그는 크레용이 담긴 박스를 찾아내 벽 전면에 그림을 그렸다. 대부분 검정과 보라색으로 칠한 나무와 동물들 그림이었다. 매슬론 씨의 주 작업은 실크스크린 판화인데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처음 본 앤디 워홀의 아이콘 작 <100개의 캠벨 수프 깡통>에서 영감을 받았다. “내 머리 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어요. 그날 이후 판화 작업에 매료되고 앤디 워홀이 마릴린 먼로와 캠벨 수프 깡통 만들 때 사용한 작업 과정을 배우는 데에 몰두했어요.” 자신이 삶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된 그는 장학금을 받고 오하이오의 콜럼버스미술디자인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실크스크린 예술에 몰입했다. 그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 직지심체요절 』을 포함해 한국이 유서 깊은 인쇄술 전통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어 기뻤다. 다행이도 그는 가르치는 일 외에 남은 시간을 예술 작업에 쓸 수 있었고 곧 외국인 예술가 집단인 대전국제미술가모임(DJAC)에 합류하게 되었다. “Lucky Numbers” 2015. Silkscreen on vinyl. 30 x 42 cm. “Telephone Series #1 (3)” 2015. Silkscreen on vinyl. 30 x 42 cm. 네오팝 정체성 2015년 DJAC 봄 전시회에 출품한 1940년대 미국 냉장고를 보여주는 그의 실크스크린 작품이 한 갤러리 대표의 눈에 띄었고 이 만남은 그의 예술 커리어에 돌파구가 되었다. 갤러리 대표는 매슬론 씨를 한국판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스튜디오로 안내했다. “건물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음각인쇄잉크 냄새를 맡을 수 있었어요. 판화가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죠. 니르바나에 온 것 같았어요. 저에게 두 달 간 체류가 제공되었어요.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음껏 날개를 펴고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었죠.” 두 달 동안 그는 60여 점의 작품을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자신을 네오팝 예술가로 정체화했으며 플라스틱 판화로 영역을 확장했다. 이란 제목이 붙은 시리즈는 레이디 가가의 동명 노래에서 영감을 받았고 2019년 대전의 갤러리 이안에서 단독 전시회에 발표했다. 이 시리즈의 작품 중 네 점은 현재 미국 나사(NASA)의 필립 메츠거 물리학박사 연구실에 걸려있다. 두 사람은 해안모래채취그룹 회원으로 온라인에서 만났다. 그의 작품에서 좀 더 깊은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매슬론 씨는 “제 작품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라고 말한다. 그는 세탁기, 건조기, 전화기, 타자기, 축음기, 그리고 동물 또는 식물 같은 것들을 좋아한다. 보디빌딩을 축소 인화한 사진도 있다. “저의 네오팝 판화들은 수집품 같은 거예요. 현대와 빈티지 이미지를 섞어 놓은 흥미로운 합성체죠. 작품들은 어떤 특정한 느낌이나 복합적인 느낌을 표현합니다. 흐릿한 집합체이거나 종종 불분명한 이미지들을 겹쳐놓은 것들이죠.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기 어렵죠.”라고 그는 설명한다. “저는 개별적인 대상물을 만들어내 사람들이 흠모하고 경건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자극을 줍니다. 사람들이 공부하고 감탄하도록요. 저는 언제나 개별적으로 표시하는 것, 개별성을 갖는 것, 어떤 것이 정체화되어 적절한 이름을 갖도록 하는 것, 그것이 무엇과 관계 있고, 어디에서 왔는지 역사성을 부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크리스토퍼 매슬론은 일과 예술 외에도 보디빌딩을 즐긴다. 그는 운동을 통해 변화된 몸이 자신감은 물론 여러 가지 기회도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다. © Christopher Maslon 보디빌딩 & 고딕 상상력 그가 좋아하는 두 가지, 즉 가르치는 일과 예술 외에도 매슬론 씨에게 보디빌딩은 그가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이다. 2004년에 그는 몸이 너무 약해진 걸 깨달았다. 영어를 가르쳤던 고등학교의 계단을 오르는 게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운동을 시작했고 3년 동안 개인 트레이너와 거래를 했다. 한 시간 영어를 가르쳐주는 대신 한 시간 운동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보디빌딩 쇼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이걸 할 거야”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일 년 후에 그 쇼의 무대에 섰고 자신의 체급에서 3등을 했다. 2014년에는 서울 머슬마니아 대회 남성 클래식 부문에서 3등을 했다. 대부분의 영어 교수들 이력에는 없는 일이다. 과거에 몸이 너무 말라서 해변에서 셔츠를 벗기 싫어했던 소년이었던 매슬론 씨는 “보디빌딩은 제 몸을 바꿨을 뿐 아니라 저의 자신감도 바꿔놨어요. 제 삶에 정말 큰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해요. 왜냐하면 제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거든요”라고 말한다. 보디빌딩과 자신의 페이스북 사진들은 ‘놀라운 기회들’로 연결되었다. 한 모델 에이전시가 전설의 영화배우 이순재 씨가 광고한 영어 앱 ‘산타 토익’을 텔레비전에 광고하기 위해 근육질의 외국인을 찾고 있다가 그에게 연락을 했다. 또 영화 에서는 미국 과학자 역을 맡아서 3초 정도 등장하기도 했다. 때때로 코스튬 플레이를 즐기기도 하는데 슈퍼 히어로나 빅토리아 시대 복장을 하는 걸 즐긴다. 빅토리아 시대와 고딕 문화를 좋아하는 그의 취향은 1960년대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였던 와 매사추세츠 몬손에서 거의 200년 된 집에서 성장했던 그의 경험을 상기시킨다. 대전에 거주하는 알라 포노마레바(Alla Ponomareva) 씨와 함께 작업한 판타지 사진 프로젝트 이후 매슬론 씨는 요즘 소품을 많이 만들고 있다. 뼈대, 해골, 고딕 시대 관, 티파니 스타일 등잔 등이 그런 것들이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거라면 그는 뭐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 거의 완벽한 매슬론 씨가 말을 할 때면 표정에서 마치 축제가 벌어지는 듯하다. 대화의 주제에 따라 표정을 바꿀 때면 눈이 반짝거리고 얼굴 근육이 움찔거린다. 그는 손으로도 여러 제스처를 취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의 오하이오 한국인 이웃이 매슬론 씨가 좋은 선생님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게 분명하다. “놀랍게도, 내가 카리스마가 있다고 그가 말했어요. 저는 쉴 새 없이 말하고 손을 써가며 말을 해요. 저는 시각적 인간이에요.” 하지만 미국을 떠난 후의 경험을 묘사하면서 그는 가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저는 예민한 사람입니다. 감정이 격해질 때는 눈을 감아야 해요.”라고 그는 설명했다. “한국은 제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어요.” 그는 머릿속으로 지난 20년을 떠올리고 그려보고 있었다. 자신의 여정이 지금까지 97%는 좋았다고 그는 말한다. 사실 그는 이걸 혼자 간직하고 싶어 했다. “여기엔 누구도 초대하고 싶지 않아요. 아주 사적인 일이니까요.”라고 말하며 그는 다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기발하고 유쾌하면서도 진중한 시선

People 2022 SUMMER 623

기발하고 유쾌하면서도 진중한 시선 2003년 등단한 소설가 윤고은(Yun Ko-eun 尹高恩)은 지금까지 네 권의 소설집과 네 권의 장편 소설을 펴냈다. 독특하고 참신한 발상, 은유와 알레고리를 통한 통찰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같은 평가에 부응하듯 지난해에는 영국 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대거상 번역 추리 소설 부문에서 수상했다. 라디오 DJ로도 살고 있는 그를 방송국 스튜디오가 있는 경기도 일산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윤고은(Yun Ko-eun)의 두 번째 장편 소설 『밤의 여행자들(The Disaster Tourist)』은 자본주의 사회를 풍자한 작품으로, 지난해 영국 추리작가협회(The Crime Writers’ Association)가 주관하는 대거상(The CWA Dagger) 번역 추리 소설 부문에서 수상했다. 윤고은 제공 윤고은의 두 번째 장편 소설 『밤의 여행자들(The Disaster Tourist)』은 재난으로 폐허가 된 지역을 관광하며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는 사람들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냉정한 시스템을 풍자한 작품이다. 2013년 출판된 이 소설이 지난해 영국 추리작가협회(The Crime Writers’ Association)가 주관하는 대거상(The CWA Dagger) 번역 추리 소설 부문에서 수상했다. 아시아 작가로 이 상을 받은 사람은 윤 작가가 처음이다. 영국 추리작가협회는“한국에서 온 매우 흥미로운 에코 스릴러로, 비대해진 자본주의의 위험을 신랄한 유머로 고발하는 작품(A wildly entertaining eco-thriller from South Korea that lays bare, with mordant humour, the perils of overdeveloped capitalism.)”이라고 평가했다. 1980년생인 윤고은은 동국대학교 재학 시절인 2003년, 대산문화재단이 대학생들에게 수여하는 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이후 첫 번째 장편 『무중력증후군』(2008)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펼쳐 왔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재기발랄한 설정과 흥미로운 인물들을 내세워 자본주의 사회의 불안한 일상을 예리하게 풍자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의 한가운데에서 재난 여행이라는 소재로 상을 받았다.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었나? 약 10년 전 이 소설을 쓸 때는 이렇게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돌고 백신을 맞는 사태가 일어날 거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 당시 다크 투어리즘에 관심이 있었는데, 전 세계적으로 자연재해가 없고 테러나 분쟁 지역이 아닌 곳이 드물었다. 대부분 어떤 종류든지 재난을 제각각 안고 있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에는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나 쓰나미가 덮치는 것을 보면서 ‘재난’이 자꾸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재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정리해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았다. 충격에서 동정과 연민 혹은 불편함으로, 그리고 내 삶에 대한 감사, 책임감과 교훈 혹은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는 우월감이 그것이다. 재난 여행 자체가 자본주의 질서이자 법칙을 드러내는 한 편의 시나리오라는 시각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나? 그렇다. 내가 써 온 소설들은 데뷔작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부품으로 전락한 것 같다는 인식이 늘 따라다녔다. 내가 중요한 사람인 것 같지만 실상은 없어져도 상관없는 존재, 마치 칫솔이나 텀블러처럼 교체될 수도 있는 존재라는 측면은 분명히 자본주의 세계의 속성이다. 해외에서 이 소설을 ‘페미니즘 에코 스릴러’로 평가하고 분류한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 재미있었다. 나는 원래 순수 문학이니 장르 문학이니 하는 구분을 좋아하지도 않고 그런 용어를 잘 쓰지도 않는다. 그런 분류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장르를 의식하고 쓰지도 않거니와 작품을 발표하고 난 뒤 뭐라고 분류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작품의 어떤 측면이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 냈다고 보는가? 독자분들이 소설에서 자본주의의 잔혹한 뼈대, 어떤 분들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과도 비슷한 맥락을 느낀 것 같다.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할 뿐인데도 파국을 막을 수 없다는 공포감이 가장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두려움은 소설을 썼던 10년 전보다 지금 훨씬 더 커졌을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을 망라해 한국에서 생산된 콘텐츠들의 서사에서 공통점을 찾는다면 무엇일까? 키워드는 ‘생존’인 것 같다. 지금 각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우선순위의 가치들보다 이 사회에서 누락되거나 고립되지 않고 제 역할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느냐에 대한 강박감이 더 큰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나 아카데미상을 받은 과 내 작품을 함께 블랙코미디 스타일로 언급하는 것 같다. 2021년 발표한 장편소설 『도서관 런웨이』(왼쪽)와 2019년 발간된 네 번째 소설집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 현대문학, 문학동네 지난해에 펴낸 장편 『도서관 런웨이』는 도서관 서가 사이를 산책하듯 걷다가 남녀가 만나는 장면을 설정했다. 도서관을 배경으로 설정하게 된 이유는? 도서관에서 가서 서가 사이를 걸어갈 때 기분이 아주 좋다. 수많은 책들이 런웨이를 걷는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다. 그 책들은 접혀 있을 때는 부피가 작지만 펼치면 수많은 생각들이 담겨 있다. 그것들이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썩 괜찮은 모델이 된 듯하다. 이 작품은 ‘안심 결혼 보험’이라는 아이디어를 동원해 이 시대 결혼의 조건을 탐색한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각자 생존할 수 있는 두 사람이 굳이 함께 살면서 같이 가기로 하는 행위의 핵심은 무엇인지 짚어 보았다. 결혼을 통해서 사회를 지탱한다는 이야기는 너무 거창한 거고, 결혼의 핵심은 두 사람이 모험을 함께해 보기로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알아서 그 ‘모험’의 조건에 무엇을 넣을 것인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분위기가 돼야 된다. 당신의 소설들은 기발한 상상력이 뒷받침되는 점이 특징이다. 흥미로운 설정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건가? ‘불안한 구조’인 것 같다. 불안한 우리 발밑을 들여다보는 거다. 호기심을 부르는 기발한 요소들은 내가 재밌어 하는 것이긴 하지만, 사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그렇게 화사하고 재밌는 게 아니다. 지금 땅이 단단하게 우리를 받쳐 주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언제든 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게 나의 한쪽 세계이다. 이 생각을 진지한 톤으로 얘기할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내 스타일을 입히는 거다. 최근에는 여러 작가들과 공동으로 여행을 테마로 한 소설집도 출간했다. 여행을 많이 다니는가? 짧더라도 자주 다니는 편이다. 여행 자체도 좋지만 계획하는 것도 좋아한다. 특히 숙소를 고를 때 제일 좋다. 인터넷 사이트를 너무 많이 검색해 봐서 실제로 어느 장소에서 호텔들을 둘러보면 그 안의 구조가 눈에 선하게 그려질 정도다. 단편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에도 숙소를 예약하는 해프닝이 나온다.   여행이 소설에 영향을 미치는가? 영향을 많이 준다. 꼭 해외 여행이 아니더라도 국내 여행이나 하다못해 옆 동네에만 가도 보이는 게 있다. 늘 보던 횡단보도랑 간판이 아닌, 무언가 새로 보는 게 있다는 것 자체가 다 자극이다. 아무래도 여행지가 멀면 멀수록 더 낯설고 위험해지니 자극에 노출될 기회가 많아진다. EBS 채널에서 라디오 DJ로 매일 생방송을 하고 있다. 소설 쓰기에 도움을 주는가?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어서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접할 수 있어 좋다. 내 취향을 넘어 폭넓게 접하다 보니 의도하지 않은 자극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여행과도 닮았다. 청취자들과는 실시간 댓글을 통해 소통한다. 라디오 스튜디오가 우주 정거장 같은 느낌도 있다. 이중문을 닫고 그 안에 혼자 있으면, 음악이 흘러가고 라디오 전파는 우주를 떠도는 느낌이다. 지금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는가? 『불타는 작품』이라는 소설을 한 잡지에 연재하는 중이다. 화가인 주인공이 ‘로버트’라는 강아지가 이사장인 재단의 창작 지원을 받는 이야기다. 로버트는 엄청난 예술성을 가진 천재견이어서 백만장자의 유산까지 상속받았다. 그 개가 인간들의 허울을 비판하면서 진짜와 가짜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개가 갑이고 사람이 을인 계약을 설정해 예술을 둘러싼 관념과 구조를 풍자하고 싶었다. 내년 상반기에 출간할 예정이다. 글로벌 독자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은? 인스타그램 같은 공간에 리뷰를 올려 주거나 해시태그로 나를 선택하기도 하고, 직접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동네 서점에 꽂혀 있는 책을 찍어서 사진을 보내 주기도 한다. 이렇게 직접 소통하는 게 무척 좋다. 자주 말을 걸어 주시면 좋겠다.

탈북민의 오늘을 기록하는 영화

People 2022 SUMMER 648

탈북민의 오늘을 기록하는 영화 2000년대 초반부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윤재호(尹载皓, Yun Je-ho [프랑스 Jero Yun]) 감독은 전형성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오늘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조명하려고 한다. 그가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동시에 작업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윤재호 감독은 그의 영화를 통해 경계에 선 사람들, 그중에서도 탈북민의 삶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한다. 윤재호 감독은 2021년 한 해에만 극영화 와 다큐멘터리 두 편의 장편 영화를 개봉시켰다. 는 탈북민들을 위한 정착 지원 시설 하나원(Hanawon)을 이제 막 퇴소하고 체육관 청소로 돈을 벌게 된 여성 진아(Jin-a, 吉娜)의 이야기이다. 에는 지금은 북한 땅인 황해도 출신 가수이자 KBS TV의 장수 오디션 프로그램 의 MC 송해(Song Hae, 宋海)가 등장한다. 영화가 보여 주는 건 우리가 몰랐던 그들의 속내이다. 진아는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한국에 정착하고자 복싱 스텝을 밟기 시작하고, 송해는 과거에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초상을 솔직하게 꺼내 보인다. 탈북민의 삶 윤 감독은 경계에 선 사람들, 그중에서도 탈북민의 삶을 지속적으로 들여다보며 영화를 만들어 왔다. 그의 영화는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가 담담하게 그 실체를 목격한다.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들도 이러한 그의 영화들을 주목했다. 우선 그는 헤어진 아들을 만날 희망을 품고 사는 조선족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2010)으로 2011년 제9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생계를 위해 중국으로 간 북한 여성의 삶을 담은 장편 다큐멘터리 (2016)로 제38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Moscow International Film Festival) 베스트 다큐멘터리상(The Best Film of the Documentary)과 제12회 취리히 영화제(Zurich Film Festival) 국제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배우 이나영(Lee Na-young, 李奈映)이 주연한 윤재호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 (2017)와도 연결된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개막작으로 상영된 이 작품은 조선족 대학생 젠첸(Zhenchen, 镇镇)이 바라보는 탈북민 어머니 이야기다. 이후에도 감독은 단편 (2016)로 제69회 칸 국제 영화제 감독주간(The Directors’ Fortnight), 로 제71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Berli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제너레이션 부문에 초청받아 세계 영화인들에게 분단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소개했다. 유학 생활 윤 감독이 영화로 대중과 소통을 시도한 건 프랑스 유학 시절이었다. 익숙한 동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는 20대 초반 친구와 함께 한국을 떠났다. 20여 년 전인데도 아직까지 출국 날짜를 기억한다. 2001년 9월 12일, 9·11 테러 다음 날이었다. 미국행 항공편이 모두 멈춘 공항에서 삼엄한 경비를 뚫고 유럽행 비행기를 탔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세상의 혼란을 피부로 느낀 그가 향한 곳은 프랑스 북동부의 작은 마을 낭시다. 그곳에서 어학 연수와 여행을 병행하다 돌연 예술 학교 시험을 봤다. 한국에서 공부했던 미술 실력을 발휘해 실기 시험을 통과한 그는 계획에 없던 유학생이 되었다. “낯선 곳에서 혼자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재밌었어요. 나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 예술 학교에서 그림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비디오 아트, 설치 작업 등을 배우면서 시야를 넓혔다.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의 교류도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윤 감독을 영화의 세계로 안내한 것도 DVD 100개가 든 박스를 통째로 빌려준 벨기에 친구였다. 상자 안에는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임마르 베리만, 오손 웰즈 등의 1950~1960년대 클래식 영화가 빼곡했다. 때리고 부수는 영화만 보던 20대 청년이 지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를 접하게 된 것이다. “100편을 보고 또 봤어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만큼 매력적이었어요.” 그는 무엇보다 영화는 혼자서 만들 수 없는 작업이라는 점에 반했다고 말했다. 여러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었던 그는 함께 할 친구들을 모았고, 대화를 시작했다. 는 생계를 위해 중국으로 간 북한 여성의 삶을 담은 장편 다큐멘터리이다. © CINESOPA 조선족 대학생 젠첸(Zhenchen)이 바라보는 탈북민 어머니 이야기를 다룬 는 윤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다 © peppermint&company 는 탈북민들을 위한 정착 지원 시설에서 막 퇴소하고 체육관 청소로 돈을 벌게 된 진아(Jin-a)의 이야기이다. © INDIESTORY 오늘의 일상 2004년 친구들과 제작한 첫 영화는 프랑스에서 살아가는 한국 여성이 이방인으로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이야기였다. 그의 자전적인 질문들이 포함된 작품이었다. ‘나는 왜 여기에 살고 있을까? 왜 거기가 아닌 여기일까?’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에게 던지곤 했던 물음을 영화에 담았다. 부산에서 낭시로 온 청년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영화에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을 초대했다. 탈북민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윤 감독이 경계에 선 캐릭터를 창조할 때 가장 깊이 고민하는 건 그들의 시간이다. 거기에서 여기로 온 인물이 어떤 과거를 경험했는지 골몰하고, 그것이 어떻게 그들의 현재를 이루고 있는지를 살핀다.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지만 오늘은 결국 어제가 되죠.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내일의 내가 달라질 수 있어요. 그래서 인물의 과거 이야기를 배제하는 편이고 미래에도 집착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저 오늘 그들이 어떤 일상을 살고 있는지 보여 주고 싶어요. 오늘의 내가 바뀌면 내일의 나는 분명히 바뀌니까요. 그것이 제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예요.” 이 원칙은 그가 병행 중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 양쪽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는 를 찍는 3년간 마담 B의 출입국 경로에 동행했고, 첫 촬영 날에는 네 시간 넘게 송해와 인터뷰를 했다. 일상의 순간들을 관찰하며 얻는 사소한 느낌들을 영화에 담고자 한 것이다. ‘탈북민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한국에서 무엇을 느끼며 살까?’ 감독과 배우들은 묻고 또 물었다. 자신이 했던 경험을 엮어 보기도 하고, 실제로 북한을 떠나온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피하려고 한 건 미디어에 나오는 천편일률적인 탈북민의 이미지였다. 영화 는 한국 최고령 연예인으로서의 송해가 아닌 무대 뒤에 숨겨진 그의 인생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룬다. 해답보다 질문 윤재호 감독은 관객에게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만든다. 실제로 뚜렷한 결말을 내리기보다 인물 앞에 주어진 가능성을 비추며 막을 내리곤 한다. 에 등장하는 모자의 희망이 현실이 될 수 있을지, 의 진아가 복싱 경기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 관객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어제와는 다른 내일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귀띔한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그렇게 경계 위에서 존엄해진다. “행복의 정의는 개인마다 다르잖아요. 영화 속 인물들에게 최대한 열려 있는 마지막을 주려고 해요. 그래야 관객도 탈북민이 한국에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지 않을까요?” 영화를 본 실제 탈북민들은 어떤 반응일까? 사실적인 묘사에 민망했다는 이도 있었고,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줘서 반갑다는 이도 있었다. 오래전 겪었던 시간을 스크린을 통해 다시 본 이들의 의견은 각양각색이었다. 인권 단체의 활동가들, 분단 현실을 공부하는 학생들도 각자의 배경 지식에 따라 다른 시각으로 영화를 바라봤다. 북한과 남한이라는 특정 국가의 이야기 안에서 보편적인 경험을 찾아내고 공감했다는 외국인 관객들도 있었다. “제가 만든 작품이 한 명에게라도 가치 있었으면 해요. 그 한 명이 어디서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니까요.” 자신을 포함한 한 명 한 명의 영향력을 믿으며 영화를 만드는 중인 그에게 20년 가깝게 이 일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인지 묻자 그는 ‘사랑’이라고 답했다. “전쟁이든, 분단이든,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면 분명 그곳에 사랑이 결핍돼 있는 것 같아요. 사랑을 추구하기에 계속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영화 바깥에서 이루고픈 꿈이 있는지 물었다. “아주 먼 미래가 될지도 모르지만 버스 한 대를 타고 부산에서 출발해 평양과 함경북도를 거쳐 러시아를 횡단 후, 독일과 파리로 여행하고 싶어요. 그게 유일한 바람입니다.”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윤재호 감독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로드 무비를 찍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영화도, 분단된 한국도, 열린 결말에 놓여 있기에 그 작품이 기대된다.

마음을 안아주는 편의점

People 2022 SPRING 2754

마음을 안아주는 편의점 유동인구가 많은 도시의 여느 편의점과 달리 훤히 트인 논밭을 끼고 들어선 고층 아파트 동네 앞 편의점. 7년간 이곳을 지키는 마음씨 따뜻한 주인은 자신의 가게가 이웃 사람들의 포근한 사랑방이자, 다친 마음을 위로하는 든든한 쉼터가 되기를 바란다. 경기도 안성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이정심 씨의 일과 중 중요한 부분이 하루 두 번, 주문한 제품이 잘 배송되었는지 확인하고 진열하는 일이다. 인근에 경쟁 편의점이 생기거나 코로나 19의 타격으로 고객들의 발길이 줄어도 그는 항상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자신의 가게가 동네 주민들의 쉼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아직 들판에 봄기운이 돌기 전, 경기도안성시청을 지나 왕복 이차선 도로로 들어서니 양옆으로 펼쳐 진 논에 밑동만 남은 벼 포기들이 줄지어 있다. 저수지를 지나 토현리 마을로 들어섰다. 들판에 비닐하우스, 농기계수리소, 축사, 작은 공장들이 듬성듬성 눈에 띈다. 여기부터 목적지까지는 2Km, 하지만 약속시간은 50분이나 남았다. 날씨가 쌀쌀하니 뜨거운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가도 가도 카페는커녕 구멍가게도 보이지 않는다. 민가도 없이 논만 펼쳐진 벌판 저 멀리 아파트 몇 동이 우뚝 서있다. 저기다! 속도를 높인다. 도시에서는 익숙하지만 이곳에선 낯설어 보이는 편의점이 거기 있었다. 반갑다.   이정심 씨는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단순한 계약직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정직원으로 대우한다. 덕분에 직원들은 주인 의식을 가지고 꼼꼼하게 매장을 관리하고, 친절하게 손님을 응대한다. 한결 같은 마음 ‘딸랑’– 출입문을 밀자 종소리가 울린다. “어서 오세요!” 종소리보다 맑은 목소리가 나를 반긴다. 조금은 삭막해 보였던 겨울날 들판에 서 있다가 갑자기 고급호텔에 들어선 듯하다. 귤빛 조명이 은은하게 공간을 채우고 눈앞엔 정갈하게 정돈된 와인진열대가 있다. 따끈한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고 커다란 통유리 창을 마주한 시식대에 앉는다. 한적한 논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커피 때문일까? 봄을 기다리는 들판은 더 이상 휑하거나 추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난 해의 고된 노고를 위로하듯 평온하다. 이곳은 ‘이마트24 R안성유안점’이다. 시골동네 편의점이라면 먼지 앉은 상품이 듬성듬성 놓여 있는 초라한 진열대가 떠오르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곳은 뭔가 많이 다르다. 갖가지 일상에 필요한 상품들이 빠짐없이 빼곡하게 차있다. 과자, 즉석식품, 음료, 와인은 물론, 푸짐한 반찬을 갖춘 도시락뿐 아니라 신선식품을 비롯해 한 끼 밥상을 차리는데 부족함 없는 찬거리까지 풍성하다. 거기다 귀이개, 손톱깎이와 같은 자잘한 생활용품에 반려동물의 간식까지, 대형마트의 상품들을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동네 주민들이 시내 마트까지 차를 타고 물건을 사러 나갈 필요가 전혀 없어 보인다. “저는 무엇이든 꽉꽉 채우는 성격이에요.”이 곳의 경영주 이정심(李貞心) 씨는 말한다. “이웃들이 차를 몰고 멀리 나가지 않아도 집 가까이에서 편하고 빠르게 일상 용품을 살 수 있기를 바라요. 그래서 가능한 한 본사에서 취급하는 상품들을 종류 별로 빠짐없이 발주해요. 작은 편의점이지만 동네 이웃들에게 확실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이윤을 쫓기보다는 우선 편의를 제공하고 싶어요.” 1969년 경남 남해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정심 씨는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언니가 살던 수원으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우연하게도 첫 직장은 체인점을 거느린 중소규모 마트의 캐셔였다. 22살 이른 나이에 결혼해 1남 2녀를 둔 정심 씨는 2002년 가계에 도움이 되고자 교보생명에 보험설계사로 입사했다. 17년 공을 들여 영업소장까지 했고, 전국 1300여 영업소 가운데 100위 안에 들어 상도 받았다. “애들 키우며 주부로 살 때는 몰랐는데, 일을 하다 보니 저에게 고객을 대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보험 일을 처음 시작할 땐 두려웠지만, 차츰 남들만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업소장을 할 때도 뒤처지지 않았어요. 무조건 진실하고 한결같이 사람을 대했죠. 늘 고객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어요. 그게 편의점을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보험 고객을 찾아다니던 정심 씨는 이제 스스로 찾아오는 고객을 맞이한다. 그는 지금도 예전의 마음가짐 그대로 껌 한 통을 사러 들어온 손님에게도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넨다. 말 한마디에 정성을 담고, 사소한 것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는 마음 씀씀이로 이웃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진심과 배려 2016년 홈플러스가 운영하던 할인마트 겸 편의점 체인 ‘365플러스’를 인수한 것이 시작이었다. 오랜 보험업무로 몸과 마음이 방전됐을 즈음이었다. 지금의 절반 크기도 되지 않았던 매장의 원래 주인은 보험 고객 중 한 명이었는데, 정심 씨는 신기하게 처음부터 이 곳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운영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정심 씨가 인수하자 이전보다 매출이 오르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고된 나날이었지만 고객들을 만나면 힘이 생겼다. 그 기운이 삶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정심 씨의 매장이 활기를 띠어서인지 브랜드 이미지가 높은 편의점이 인근에 들어선 것이다. 고객이 드나들 때마다 울리던 종소리 간격이 갈수록 뜸해졌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좌절하지 않고 열과 성을 다했다. 그의 진심이 통했는지 멀어졌던 이웃들의 발길이 다시 정심 씨의 마트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새로 연 편의점이 브랜드 인지도가 높고, 물품도 다르니까 제가 고객에게 드릴 수 있는 것들의 한계가 있었죠. 저는 그저 하던 대로 열심히 하며 고객을 기다렸어요. 6개월쯤 지나니 대부분 다시 찾아오시더라고요.” 2021년, 홈플러스가 편의점 사업을 접자 정심 씨는 브랜드를 바꿔 이마트24 매장을 열었다. 마트와 나란히 있던 식당 자리까지 인수해 공간을 두 배 이상 넓혔다. 임대료도 그만큼 늘어났다. 농촌이라 고객은 한정되어 있다. 매출만 생각한다면 굳이 공간을 늘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정심 씨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했다. “매장이 작아서 아쉬웠던 게 있었어요. 손님들이 도시락을 사서는, 실내에 자리가 없으니 바깥에서 먹게 되는 거예요. 그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쾌적한, 겨울에는 따뜻하고 아늑한 실내에 앉아서 드시게 하고 싶었죠. 매장이 두 배가 됐다고 매출이 두 배가 되는 게 아니었지만, 그게 제 꿈이었어요.” 아늑한 조명 아래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실내에 대형 통유리로 시야가 확 트인 시식대는 휴양지의 전망 좋은 카페와 다르지 않다. 커피전문점에서나 볼 수 있는 커피머신이 눈길을 끈다. 컵을 올리고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커피가 내려지는 일반 편의점 기계와는 많이 다르다. “제가 만든 라떼 한 잔 드릴까요?” 정심 씨가 커피 머신 앞에 선다.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린다. 순간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김이 퍼진다. 밀크 스티밍이다. 하트가 그려진 찰진 라떼의 거품이 입술을 감싼다. 정심 씨는 1급 바리스타 자격증도 땄다. “스티밍을 하고 안 하고는 거품의 탄력이 달라요. 같은 가격이라도 좀 더 좋은 커피를 손님에게 서비스하고 싶어 열심히 배웠죠.” 정심 씨가 간절히 원하던 테이블을 마련한 뒤, 손님들은 이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며 음식을 먹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최근엔 코로나 19 때문에 취식이 제한되어 그를 안타깝게 한다. 카페 같은 편의점 이쯤 되면 정심 씨의 매장을 단순히 편의점이라 부를 수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작 그가 아끼는 보물은 따로 있다. 매장을 지키는 사람이다. 편의점 알바 구직 앱에 들어가면 주당 15시간 이내의 단기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주휴수당과 같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자영업자들의 고육지책이다. 하지만 정심 씨는 다른 길을 택했다. 비록 자그마한 편의점이지만 일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소중한 일터라 생각할 수 있도록 정직원 대우를 한다. 주휴수당, 4대 보험은 물론 명절마다 약소하지만 상여금을 주고, 근속에 따른 수당도 있다. 일터에 대한 자부심을 지닌 직원들은 경영주처럼 매장을 관리한다. 언제 오더라도 알바생이 아닌 경영주가 직접 고객을 맞이하는 셈이다.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니, 찾아오는 손님도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매장을 나선다. 매출이 오르는 비결이다. 때론 고객도 기꺼이 가게 일을 돕는다. 한 번은 편의점을 자주 찾던 손님의 얼굴이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기에 정심 씨가 “사는 게 힘드시죠?” 하고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손님이 자신의 어려움을 한없이 풀어놨다. 보증 때문에 어려움에 처했고, 이로 인해 가족들과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정심 씨는 자기 일처럼 공감하고 위로했다. 그 뒤로 손님은 물류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찾아와 말없이 일을 돕고 간다. 밭농사를 짓는 이웃은 채소를, 과수원을 하는 손님은 배를 한 소쿠리 들고 찾아온다. 이런 물건들은 직원들에게 나누어진다. 넉넉한 시골 인심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래서 정심 씨의 편의점은 동네 사랑방이자 마을 정자와 같은 곳이다. 몸이 불편한 남편을 시중하는 할머니, 아픈 아이를 돌보는 젊은 엄마, 거름을 내다가 온 농부, 기름때 절은 작업복의 이주노동자. ‘딸랑’하는 종소리와 함께 이들이 들어설 때, 정심 씨는 언니이자 누님이고, 딸이자 벗이 된다. 때론 아이들의 고모이자 큰엄마가 되어 한 가족으로 어우러진다. 돌아오는 길, 정심 씨의 마음이 담긴 라떼가 오래도록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소리와 시각적인 것을 실험하다

People 2022 SPRING 2364

소리와 시각적인 것을 실험하다 이 젊은 프랑스 남자가 하고 있는 일, 그의 예술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는 오랫동안 “소리와 시각 예술과 관련된 모든 것을 통합시켜” “이질적인 요소가 만나게 하는 일” 혹은 “두 세계를 함께 채집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한국을 자신의 스튜디오로 선택했다. 한국에 오랫동안 살고 있는 대부분의 외국인 체류자와 달리 해미 클레멘세비츠 씨의 여정은 어린 나이에 시작되었다.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자라면서 그는 예술대학 교수로 아시아에서 종종 전시회를 연 아버지를 통해 한국과 주변 국가에 대해 들었다. 마르세이유-지중해 미술학교(ESADM)에 입학할 즈음에 클레멘세비츠 씨는 아시아와 동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학교에서 한국 학생들과 친구가 되었고 그중 한 친구의 초대로 2009년에 독학한 한국어로 무장해 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그 첫 방문이 제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겼어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죠.”라고 그는 말한다. “이곳에 저랑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들이 있고 동시에 제게 익숙한 것들과 완전히 다름을 느꼈어요. 그리고 어쩐지 이 다른 것들이 제게 아주 잘 맞았어요.” 이후 몇 년 간 클레멘세비츠 씨는 방학 동안 한국에서 시간을 보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는 이 여행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한국어를 공부하고 문화를 흡수하는 동안 그는 서울의 실험적 예술 현장을 경험했다. 또한 한국인들이 자신의 예술 아이디어에 아주 수용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어 더욱 한국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의 대학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 중 하나가 외국에서의 인턴 경험이었고 클레멘세비츠 씨는 자연스럽게 다시 서울에 눈길을 돌렸다. 아버지의 한국인 친구 한 분의 도움으로 그는 2011년에 예술 컨설팅 회사에서 4개월 동안 일할 수 있었다. 그것이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체류한 경험이 되었고 한국을 자신의 새로운 고향으로 만들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졸업 후 그는 “한국에 가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2013년 그는 영구적으로 머물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소리 클레멘세비츠 씨는 종종 사운드 예술가, 혹은 인터미디어 예술가라고 불리지만 그 스스로는 자신을 단순히 “소리에 관심이 있는 예술가”라고 소개한다. 한국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그는 두 개의 영역을 오간다. 실험적 음악과 소리를 조합한 시각 예술이 그것이다. “소리는 제게 가장 중심적인 것입니다. 제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소리와 시각 예술 두 영역이 만나도록 하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 결과는 다양하게 표현된다. 한 주 동안 그는 음악 공연을 하고 그 다음 주에는 가장 최근에 만든 “소리 조각 작품” 또는 설치 작업을 선보이는 식이다. 이를 위해 작곡을 하고 안무가와 협업해 공연을 하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작품 중 어떤 것들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스피커 국기, 망가진 국기(Speaker Flag, Broken Flag)” 같이 많은 작품이 고장난 스피커를 보여주는데 이 작품은 태극기 중앙에 스피커가 있다. “통역을 위하여(For Interpreters)”는 수화를 사용하는 비디오인데 시청자는 소리를 스스로 상상해야 한다. 이 작품은 “소리 없이 소리를 표현한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지난 몇 년 간 클레멘세비츠 씨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백남준 아트센터, 국립한글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과 같은 주요 장소에서 전시를 하고 공연을 했다. 하지만 그는 처음 활동을 시작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홍대 근처의 작지만 실험적인 공간에서 작업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한국에서의 첫 프로젝트 중 하나인 “테이크아웃 드로잉”은 국제적 정취가 물씬한 서울 이태원 지역에 있는 데이크아웃 드로잉 카페에서 2014년에 작업했다. 두 달 동안 매일 그는 그곳에서 즉흥 솔로 콘서트나 초대 손님이 있는 공연을 하거나 더 많이는 그저 리허설을 했다. 확실한 틀이 없는 공연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건 제대로 된 콘서트와 리허설 사이의 경계에서 작업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죠.”라고 그는 말한다.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2013년 이후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는 Rémi Klemensiewiczs는 시각과 청각의 관계, 존재와 해석의 차이를 작품으로 옮긴다. 주로 소리를 소재로 하여 전시, 라이브 퍼포먼스, 무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탐구를 이어가고 있다. 수수께끼 클레멘세비츠 씨는 역설과 애매모호함을 즐기는 듯한데 이는 그의 작품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한국어와 한국문화의 특성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한국어의 존칭법은 보통 개인 간에 적절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클레멘세비츠 씨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느끼는데, 특히 학생과 선생의 관계에서 그렇다. “학생과 선생님이 함께 있을 때 학생이 언어뿐 아니라 몸짓이나 다른 미묘한 것들에서 예의를 갖추는 걸 볼 수 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관계의 룰이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는 거의 가족 같은 느낌을 받아요. 프랑스에서 제가 느끼는 것과 정반대죠. 프랑스에서는 선생님의 이름을 부르고 친구처럼 얘기 나누지만 선생님과 친하다고 느낀 적은 드물어요.” 그는 자신의 고국과 한국의 외적인 면모에서도 역설적인 것을 발견한다. 파리와 프랑스의 여러 지역들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지만 클레멘세비츠 씨는 전통과 영성이 사라졌다고 느낀다. 한국은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건물들이 좀 뒤죽박죽처럼 보였어요. 근데 시각적인 혼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정신에는 질서가 있다고 느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두 나라를 비교하자면 프랑스는 외부에는 질서가 있지만 내부엔 혼란이 있어요. 한국은 표면적으로는 혼란이 있지만 내면에는 질서가 있고, 전통과 과거와도 연결되어 있어요.” 그 같은 발견이 그를 설득하고 자극해서 한국에 눌러 앉게 만들었다. 하지만 비자 때문에 팬데믹 동안에 많은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내야 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시골에 머물렀고 최근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콘크리트와 자연의 모습이 얼마나 미묘하게 겹쳐져 있는지 새롭게 깨달았다. 지하철을 따면 주변의 산자락까지 이동할 수 있고 한강변 자전거길을 따라가면 거대한 아파트들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모습을 보인다. “이런 건 완전 짱이죠.”라고 말하며 그는 웃었다. 2019년 11월 19일 전라남도 순천의 예술공간 돈키호테(Artspace Donquixote)에서 Rémi Klemensiewicz가 중 ‘Handmixer’의 한 장면을 공연하고 있다. 생계 팬데믹 기간 동안 많은 시간을 프랑스 시골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프랑스 유튜브 사용자들을 위해 온라인 한국어 수업을 만들었다. 한 친구의 제안으로 기분전환으로 만든 것이 진지한 일로 변했다. 결국 한글을 자세히 소개하는 것을 포함해서 수업을 계획하고 작성하면서 몇 달을 보냈다. 수업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소리 작업을 하는 예술가로서 클레멘세비츠 씨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이 돈벌이가 되지 못함을 깨달았다. 한국어과 프랑스어를 오가는 언어 수업 덕분에 다행히 제대로 된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조언들을 무시할 수 있었다.가르치는 일이 균형을 잡는 데에도 좋지만 클레멘세비츠 씨는 진정 언어를 갖고 실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게다가 그는 한글의 시각적인 면도 높게 평가하고 자신의 작업에 녹여내기도 했다. 2018년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전시한 “소리 말 시리즈”는 스피커와 케이블로 만들어진 한글 단어를 선보인다. 전시회의 일부로 초대 뮤지션들과 함께 케이지 공간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피아노에서 네 음(G, A, G, E)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무음으로 해서 즉흥적으로 연주했다. 예술 수업 강의는 그에게 안정적 수입을 제공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중학생들과 예술 워크숍을 진행하는 걸 시작으로 이제 서울 성수동 헬로우뮤지엄에서 정기적으로 아이들에게 소리와 시각 자료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PATI)에서 “소리 디자인” 강의를 하게 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로 한국현대무용단과 협업도 하게 되었다. 2017년 10월 12월부터 28일까지 서울 소재 복합문화공간 탈영역우정국에서 진행된 전시 에서 Rémi Klemensiewic가 선보인 작품 ‘Interpreted Masks’이다. 종이마스크와 스피커, 케이블과 소리로 구성됐다. 과정 클레멘세비츠 씨의 작업은 규정하기 어렵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점이 있다. 그가 보고 듣는 것 모두가 그의 예술에 스며든다는 점이다. 이런 배경을 알면 계속해서 변하는 한국에 대한 그의 거의 본능적인 애착이 좀 더 잘 이해가 된다. 그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전형적으로 밀월기간이었다. “바닥에 자면서 행복했어요. 매일 자장면을 먹을 수 있는 게 행복했어요. 매일 비가 내려도 행복했어요.”라고 그는 회상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작업 리듬’이라고 부르는 것, 즉 일과 사적인 삶을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 - 예를 들어 밤에 전화를 해서 다음날까지 10페이지 번역을 요청하는 것 같은 - 조금씩 방해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일과 쉼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고 인정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모든 것과 관련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시회나 공연을 하는 동안에는 그 일이 너무 좋아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국에서 9년을 보낸 클레멘세비츠 씨의 삶은 실험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과 닮았는데, 그에게 영향을 준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강조한 것처럼 과정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제 안무가 노경애 씨와 프랑스의 모교와 함께 하는 교환 프로젝트에 그가 푹 빠져 있는 게 놀랍지 않다. 이 프로젝트에서 그는 청각장애인 댄서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고 공연하기로 되어 있다. 32살인 그는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전시회를 하자고 아무도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라고 자문한다. 제대로 된 직장을 얻으라는 조언을 기억하지만 그는 자신이 사무실에서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리스크가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서사를 확장시키는 프로덕션 디자인

People 2022 SPRING 2128

서사를 확장시키는 프로덕션 디자인 지난해 세계적 화제를 모았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은 생존 경쟁의 잔혹한 처절함이 동화 같은 비주얼을 배경으로 부각되어 시선을 끌었다. 이 독특한 공간 디자인을 만들어 낸 채경선(Chae Kyoung-sun 蔡炅宣) 미술 감독을 그의 다음 작품 촬영지인 경기도 고양시 아쿠아특수촬영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올 1월 의 극 중 1번 참가자, 일명 ‘깐부’를 연기한 배우 오영수(O Yeong-su 吳永洙)가 제79회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 시리즈는 작년 9월 개봉된 후 총 1억 4천 2백만 가구가 시청하며 연 46일 동안 넷플릭스 시청률 1위를 차지했고, 미국배우조합상(SAG)과 미국제작자조합상(PGA)의 주요 부문에도 후보로 올랐다. 이 드라마가 세계적 인기를 모은 비결에 대해 여러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초현실적 느낌의 스펙터클한 프로덕션 디자인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공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게 관건인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이 작품 속 공간은 현실과 판타지가 혼재된 구성이 강렬한 색조로 구현되어 있다. 그것이 캐릭터나 서사와 이질감 없이 조화를 이루며 극적 효과를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다. 이 시리즈의 채경선 미술 감독은 상명대 연극영화과에서 무대 미술을 전공한 뒤 2010년 다섯 커플의 사랑과 이별을 그린 김종관(Kim Jong-kwan 金宗寬) 감독의 영화 로 데뷔했다. 다음 해 를 시작으로 (2014)와 (2017)에서 황동혁(Hwang Dong-hyuk 黄東赫) 감독과 미술 감독으로 협업을 계속했고, 은 그와의 첫 드라마 시리즈 작품이었다. 그 밖에 (장준환(Jang Joon-hwan 張駿桓) 감독, 2013), (이원석(Lee Won-suk 李元錫) 감독, 2014), (이상근(Lee Sang-geun 李相槿) 감독, 2019) 등 여러 영화에 미술 감독으로 참여했다. 이처럼 소재도, 장르도, 호흡을 맞춘 감독도 제각각이지만 그의 작업이 이야기에 적합한 공간을 만들어 내 서사를 확장시켰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채경선(Chae Kyoung-sun 蔡炅宣) 미술 감독이 차기작인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의 세트가 지어지고 있는 경기도 고양시 아쿠아특수촬영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의 미술 감독으로 시선을 끌었던 그는 넉넉한 재정 지원과 감독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유재량으로 작업할 수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은 사실적인 공간을 구현해 왔던 황동혁 감독의 전작들과 큰 차이가 있다. 당신에게도 매우 도전적인 작업이었을 것 같다. 현실적인 공간이 아니어서 프로덕션 디자인에 대한 관객의 호불호가 크게 갈릴 거라고 예상했다. 부정적인 의견도 많을 듯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 반응을 보여 줬다. 미술 감독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세트 제작비를 넉넉하게 지원받은 덕분에 머릿속에서 구상했던 그림들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을 만난 것 자체가 큰 행운이었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 시나리오를 받기 전, 황 감독으로부터 큰 줄기에 대해 미리 들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놀았던 놀이들을 활용해 생존 게임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연출하려고 하는데, 새로운 비주얼을 시도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이처럼 내용을 대강 알고 있었지만, 막상 시나리오를 읽어 보니 막막했다. 이런저런 구상을 하다가 이전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디자인을 해야겠다는 승부욕이 생겨났다. 중년 세대들이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을 배경으로 잔혹 동화 한 편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다. 황 감독과 동의한 프로덕션 디자인의 전체 콘셉트는 무엇이었나?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세상을 너무 어둡게 그리지 말자. 둘째, 게임이 진행될 때마다 각 게임의 배경이 되는 공간에 고유한 성격을 부여하자. 이건 게임 참가자들이 각 공간에서 어떤 게임이 펼쳐질지 몰라 느끼는 혼란과 공포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매우 중요했다. 또한 시청자들도 다음 번에는 어떤 장소에서 어떤 게임이 진행되는지 궁금해하길 바랐다. 마지막으로 색깔을 과감하게 쓰자고 했다. 한국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에 비하면 색감 활용이 보수적이다. 우리는 그런 제한에서 벗어나 컬러를 과감하게 쓰고 싶었다. 하기는 최근 한국 영화도 SF 같은 새로운 장르를 다루면서 색감을 활용하는 폭이 전보다 넓어지고 있는 추세이기는 하다. 컬러를 선택한 기준은 무엇이었나? 처음에는 주요 컬러로 민트와 핑크 두 가지를 고려했다. 이 두 가지는 1970~80년대를 상징하는 레트로 컬러이다. 이 의견에 대해 조상경(Cho Sang-kyung 趙常景) 의상 감독이 “게임 참가자들을 감시하는 무리들을 과감하게 핑크로 설정하자”고 말했다. 게임 참가자들이 입는 체육복은 채도를 높여서 짙은 녹색으로 가기로 했다. 이 시리즈에서는 핑크색이 억압과 폭력을, 초록은 핍박과 루저를 상징한다. 그래서 게임 참가자들이 핑크빛 천장과 벽으로 둘러싸인 구조물 안을 이동하도록 설정하고, 감시자들이 숙소로 돌아가는 공간은 초록색으로 표현했다. 색을 통해 이야기의 세계관과 규칙을 정한 것이다. 에서 참가자들이 미로 같은 계단을 거쳐 숙소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잔인한 생존 경쟁과 대비되는 파스텔 컬러의 동화적인 비주얼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상징한다. 이 프로덕션 디자인은 네덜란드의 판화가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의 작품들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넷플릭스 첫 번째 게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공간은 어린 시절 놀던 학교 운동장을 모티브로 설계했다고 들었다. 이 게임의 콘셉트는 ‘진짜와 가짜’다. 첫 게임이 벌어지는 공간의 푸른 하늘과 영희 인형 뒤편의 벽은 가짜지만, 게임을 통과하지 못하면 진짜로 죽는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야기 속 게임 참가자들도, 시청자들도 혼돈을 일으킬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다. 진행 요원들이 게임 참가자를 감시하는 설정은 영화 (1998)에서 영향을 받았다. 영희 인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특수 분장팀 제페토(Geppetto)가 인형을 제작했다. 높이가 10m에 달해 상반신과 하반신을 따로 분리해 옮겼다. 황 감독은 원래 영희 인형을 10개나 만들어 줄 것을 미술팀에 주문했지만 그렇게까지 작업할 예산이 없었다. 또한 시나리오에선 영희 인형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등장하는 설정이었는데 도중에 바뀌었다. 드라마에서 첫 게임이 벌어지는 운동장은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모티브를 얻어,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혼돈을 일으키는 공간으로 제시되었다.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10m 높이의 영희 인형은 특수 분장팀 제페토(Geppetto)가 제작했다. ⓒ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초록과 핑크색은 각각 핍박과 루저, 억압과 폭력을 상징한다. ⓒ 넷플릭스 구슬치기 게임이 벌어지는 골목길 풍경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들었다. 골목길은 가장 많이 공들인 공간 중 하나다. 이곳 또한 진짜와 가짜가 공존한다. 황 감독이 이 장면에서 주문한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석양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신이 어린 시절, 저녁 내내 골목에서 뛰어놀다가 어머니가 이름을 불러 달려가면 집에서 밥 냄새가 났던 기억을 들려주며 ‘밥 냄새까지 느껴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오일남 할아버지의 집을 제외한 나머지 집들은 대문만 있는 것으로 설계했다. 문은 많지만 문 안으로 들어가면 ‘네 집이 아니니 들어갈 수 없다’는 상징성을 공간에 부여하고 싶었다. 대문은 문패, 연탄재, 화분 같은 여러 소품을 통해 진짜처럼 보여주되 패턴화해 표현했다. 즉, 구슬치기에서 지는 사람 쪽에 있는 공간에는 연탄재를 두었고, 산 사람 쪽에는 화분을 배치했다. 이전의 과거 얘기도 해 보자. 데뷔 이후 여러 명의 감독들과 다양한 성격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프로덕션 디자인을 통해 서사에 정서를 불어넣는다는 공통점이 보인다. 매 작품마다 각기 다른 접근을 해 왔다. 기본적으로 영화 미술은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와 캐릭터를 더 풍부하게 표현하도록 하는 영역이다. 미술이 혼자서 튀면 안 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시나리오를 감독보다도 더 치밀하게, 잘 분석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한다. 은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실제 역사를 재구성한 이야기인 만큼 고증이 관건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역사를 다룬 사극 중에서 고증을 가장 철저하게 한 작품으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에 사활을 걸고 작업했다. 눈과 추위, 그리고 적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성을 처절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보다 먼저 제작된 이원석 감독의 영화 도 사극이었는데. 이 영화에 참여했던 경험이 작업을 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나? 왕실의 옷을 짓는 상의원이 이야기의 주요 무대라서 이 공간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풀어갈까, 공간을 통해 인물을 어떻게 드러낼까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흥행이 저조해서 아쉽다. 황동혁(Hwang Dong-hyuk 黄東赫) 감독의 (2017)은 1636년 청나라의 침입으로 남한산성에 피신한 임금과 신하들이 겪은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채경선 미술 감독은 철저한 고증을 통해 눈과 추위, 적군에게 포위된 당시 상황을 실감 나게 전달했다. ⓒ CJ ENM 의 무대인 청각장애인 학교는 어두운 사건이 벌어지고 드러나는 곳인데, 이 공간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저예산 영화라 시도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새로 지은 세트는 교장실과 법원 두 개였다. 이 영화에서는 안개가 중요해서 소품을 비롯해 복도를 포함한 주요 공간을 회색 톤으로 설정했다. 이야기 전반에 걸쳐 색감을 드러내는 것보다 누르는 게 중요했다. 다만, 정유미(Jung Yu-mi 鄭裕美)가 연기한 주인공이 일하는 인권센터 공간만 올리브 색을 가미해 따뜻함을 부각시켰다. 미술 감독으로서의 욕심을 절제하고 최대한 이야기에 충실했다. 9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 는 옥상, 간판, 건물 등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공간들을 세세하게 표현해 낸 것이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재난 영화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근 감독과 대화하면서 ‘한국적인 공간’을 표현하는 게 관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국에 있는 건물 옥상들을 샅샅이 찾아다니며 특징을 조사했다. 특히 영화 후반부 남녀 주인공이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며 육교를 뛰어넘는 장면에서 두 배우 양쪽에 보이는 건물들이 중요했는데 의도대로 잘 표현됐다고 생각한다. 정말 짧은 순간이지만 말이다. 감독이 미술팀 의견을 많이 수용해 주었고, 미술팀 또한 감독이 던져 준 아이디어를 많이 활용했다. 서로 생각을 주고받으며 재미있게 작업한 영화다.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을 연기한 배우 김윤석(Kim Yun-seok 金允錫)이 강을 가로질러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장면이다. 실제로 강이 얼어붙어 얼음 두께가 30cm가 되는 곳에서 촬영되었다. ⓒ CJ ENM 이 영화에서는 신념이 다른 두 인물이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데 의상을 통해 두 인물의 특징을 담아냈다. 청나라의 공격에 맞서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상헌과 달리 이병헌(Lee Byung-hun 李炳憲)이 연기한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은 항복하여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 CJ ENM 현재 찍고 있는 은 어떤 작업인가? 박인제(Park In-jae 朴仁载) 감독의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인데 공개하기 전에 자세한 얘기를 할 수는 없지만, 인기 웹툰 작가 강풀(Kang Full)의 동명 원작을 영상으로 만드는 첫 시리즈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 작품 안에서 1980년대부터 2018년까지 변화하는 시대를 표현하는 것이 내게 큰 도전이다. 천부적인 패션 감각을 지닌 이공진 역의 고수(Go Soo 高洙)가 30년 동안 왕실 옷을 지어온 조돌석 역의 한석규(Han Seok-kyu 韓石圭)가 바느질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다. 이원석(Lee Won-suk 李元錫) 감독의 2014년작 은 조선 시대 왕실 의복을 만들던 상의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으며, 다양한 의상과 배경 공간이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 와우플래닛코리아(WOWPLANET KOREA)

고립과 자유, 세상에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

People 2022 SPRING 2313

고립과 자유, 세상에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 이름과 실제가 정반대인 비무장지대(DMZ)는 군사분계선 기준 남북 양방향 각 2km 폭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고 있는‘모순의 땅’ 이다. 남측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한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역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 두 예술가에 의해 묵직한 시대적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으로 재해석되어 주목을 끌었다. 한국 작가들에게 ‘분단’은 피하고 싶은 주제일 수도 있다. 너무 뻔하거나, 혹은 너무 거창하기 때문일 것이다. 분단국가의 시민이라는 태생적 조건을 예술 작업으로 끌어왔을 때 딜레마에 빠지기도 쉽다. 다른 나라 작가들이 말하기 힘든 주제인 만큼 해외에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목하지만, 국내에선 “쉬운 길을 택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분단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문경원(Moon Kyung-won 文敬媛) 과 전준호(Jeon Joon-ho 全浚晧)는 이 양날의 검을 호기롭고 영리하게 빼 들었다. 2021년 9월 3일 시작해 2022년 2월 2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MMCA 현대차 시리즈 2021: 문경원·전준호 – 미지에서 온 소식, 자유의 마을’(MMCA Hyundai Motor Series 2021: News from Nowhere – Freedom Village) 전시에서 이들은 분단이라는 이슈를 홈그라운드에 과감히 펼쳐 보였다. 두 작가는 한국 미술계에서 보기 드문 아티스트 듀오다. 이들은 따로 또 같이 활동하는데 이화여대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인 문경원은 서울에서, 전준호는 고향이자 작업 기반인 부산의 영도에서 각자의 개인 작업과 공동 프로젝트를 병행한다. 두 사람이 처음 의기투합한 2009년 이후 자본주의의 모순, 역사의 수레바퀴에 가려 희생된 개인, 기후 변화 등 여러 사회 담론과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을 다루며 예술의 역할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 왔다. 두 작가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돼 전시를 선보이면서 국제 무대에 데뷔했다. 문경원(왼쪽)과 전준호 작가가 자신들이 협업한 이 전시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포즈를 취했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1’ 로 채택된 이 작품은 영상, 설치, 아카이브, 사진, 대형 회화 그리고 연계 프로그램 진행을 위한 모바일 플랫폼으로 구성되었다. 비무장지대(DMZ) 안 대성동 마을을 주제로 하여“인류의 대립과 갈등으로 탄생한 기형적 세계를 조망하고, 팬데믹으로 단절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현재를 성찰했다”고 작가들은 설명한다. 미래에서 관찰한 현재 이번 전시 제목인 ‘미지에서 온 소식’은 이들이 공동으로 펼쳐온 장기 프로젝트이자, 다른 여러 예술가들과 함께 벌이는 협업 플랫폼이다. 이 플랫폼을 통해 두 작가는 영상, 설치, 아카이브, 출판물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통섭의 연작 전시를 진행해 왔다. 전시 제목은 19세기 후반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을 이끈 사상가이자 시인, 소설가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가 1890년 쓴 동명 소설에서 따왔다. 그는 꿈에서 200여 년 후의 런던을 닷새간 여행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당대의 현실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문경원과 전준호는 이 소설에서 제목뿐만 아니라 미래에 시선을 던져 놓고 그 시점에서 현재를 깊숙이 관찰하는 형식 또한 빌려왔다. 두 작가는 “우리의 미래 지향적인 설정은 미래를 진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아젠다를 논의하기 위한 설정”이라고 설명했다. 2012년 독일 카셀 지역에서 열린 5년제 현대 미술 미술 행사 ‘도쿠멘타(documenta 13)’에서 ‘세상의 저편’(The End of the World) 라는 부제로 처음 선보인 이 작품으로 두 작가는 그해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2’ 최종 수상 작가로 선정됐다. 이후 미국 시카고 예술대학 설리번 갤러리(2013), 스위스 미그로스 현대미술관(2015), 영국 테이트 리버풀(2018) 등 여러 도시에서 각기 다른 부제로 전시를 열어 화제를 모았다. 2021년 초 두 사람이 ‘MMCA 현대차 시리즈 2021’ 작가로 선정되면서 마침내 이 작품이 한국에서 대규모로 펼쳐지게 됐다. ‘MMCA 현대차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현대자동차의 후원으로 2014년부터 매년 한국을 대표하는 중진 작가한 사람을 초청해 개인전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2020년 양혜규에 이어 문경원·전준호 작가는 여덟 번째 주인공이 됐다. “이 프로젝트는 국가와 도시를 옮겨 다닐 때마다 그 지역의 정체성과 역사, 현안을 담아 왔어요. 한국이 무대가 되니 고민이 커졌습니다. 분단국가라는 클리셰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국 그것은 한국 작가라면 꼭 다뤄야 하는 사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만 머물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 역사를 끌어내는 체험으로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분단을 주제로 다루게 된 배경을 전 작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2021, 2채널 HD 영상설치, 컬러, 사운드, 14분 35초.서로 등을 맞댄 대형 화면 2개가 각기 다른 영상을 보여준다. 작품은 전시공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영상의 흐름에 따라 조명이 점멸하거나 음향이 흘러나오는 등의 연출이 관람객의 몰입을 돕는다. 화면 속 자유를 갈망하는 남자 A(배우 박정민)가 산을 다니며 채집할 자생 식물을 찾고 있다. 갈등이 만든 기형적 공간 작품의 배경으로 선택한 곳은 남측 비무장지대(DMZ) 내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인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었다. 한국의 마을 이름은 대부분 지형이나 그 마을에 깃든 전설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 마을은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A는 바깥 세상에 나가지 못하는 대신, 식물을 채집해서 연구하고 표본을 만든다. 이 표본에 풍선을 달아 하늘로 날려보내면 반대편 화면의 ‘B’가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모르는 바깥 세상에 누군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비게이션에서조차 표시되지 않는 이 마을은 1953년 한국전쟁 정전협정 이후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로 70년 가까이 바깥 세계와 단절된 채 시간이 멈춰 있는 곳이다. 1951년 시작된 정전 회담에서 남측의 대성동 마을과 북측의 기정동 마을은 각각 DMZ 내 위치한 양측의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로 남도록 인정받았다. 이후 대성동은 ‘자유의 마을’, 기정동은 ‘평화의 마을’이란 이름으로 냉전시대 남북한 사이 치열한 체제 경쟁을 위한 프로파간다의 무대가 되었다. 대성동엔 현재 49가구 약 200명이 살고 있다. 한국 영토 안에 있지만 한국 정부가 아닌 UN의 통제를 받으며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 마을 여성이 외부 남자와 결혼하면 마을을 떠나야 하지만, 외부 여성이 이 마을 남자와 결혼하면 거주권이 인정된다.두 작가는 이 마을을 한반도의 특수한 지정학적 상황이 빚어낸 독특한 장소로 한정하지 않고, 인류사 전반에서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탄생한 기형적 세계를 상징하는 곳으로 확장한다. “처음에는 좀 더 우리의 정체성이 담긴 도시를 배경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대성동‘자유의 마을’은 우리 자신에게조차 너무 비현실적인 공간이었기에 예술의 키워드가 될 수 있었습니다.”문 작가의 말에 전 작가가 동의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어쩌면 이 마을 사람들은 현재 팬데믹 상황에 있는 우리보다 훨씬 더 재난적 상황에서 고립되어 70년을 살아왔습니다. 인류가 바이러스와 2년 넘게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금, 이 마을의 고립은 평소와 달리 보편적인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키워드인 동시에 우리의 삶을 성찰하기 좋은 키워드라고 생각합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 전시는 영상, 설치, 아카이브, 사진, 대형 회화 그리고 연계 프로그램 진행을 위한 모바일 플랫폼으로 구성됐다. 전시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서로 등을 마주한 두 개의 대형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이다. 한쪽 면에선 영화배우 박정민(朴正民)이 서른두 살의 남성 A로 등장한다. A는 자유의 마을에서 태어나 한 번도 바깥세상에 나간 본 적이 없는 인물로, 비무장지대에 자생하는 식물을 연구하는 아마추어 식물학자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외부 세계에 알리고 싶어 연구한 내용으로 식물도감을 만든 뒤 비닐 풍선에 넣어 날려 보낸다. 풍선은 시공을 뛰어넘어 반대편 스크린 속 20대 초반의 남자 B에게 전달된다. 아이돌 그룹 갓세븐 멤버 진영(珍荣)이 연기하는 B 역시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 채 평생 감옥처럼 좁은 공간에 갇혀 살고 있다. 우주선을 닮은 공간에 고립된 B의 유일한 낙은 가끔 창밖을 내다보는 것뿐이다. 어느 날 어디선가 날아온 비닐 풍선은 B의 일상을 뒤흔든다. 깊은 혼란에 빠져 며칠 동안 그저 쳐다보기만 하던 B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내용물을 꺼내 본다. 이후 B는 계속 A로부터 풍선을 받는다. 무한대의 타임 루프처럼 A와 B의 이야기가 순환된다. 이 영상들을 지나면 자유의 마을을 담은 사진들이 걸려 있다. 작가들이 국가기록원에서 사용 허가를 받은 이미지를 포토샵으로 가공했다. 문 작가는 사진들을 바라보며 작업을 회상했다. “이미지 사용 허가는 받았지만 사진 속 인물들의 익명성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거나 여러 이미지를 조합해 만든 전혀 다른 얼굴을 입히기도 했어요. 또는 포토샵으로 사진 속 인물들에게 마스크를 씌우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지금의 팬데믹 상황을 상징이라도 하는 듯, 절묘한 결과물이 나왔지요.” 이 곳을 지나 마지막 전시실로 가면, A가 식물을 찾아 헤매던 눈 덮인 숲이 거대한 캔버스 위에 펼쳐진다. 문 작가가 6개월에 걸쳐 완성한 가로 4.25m 세로 2.92m 대형 풍경화다. 얼핏 보기에 사진처럼 보일 만큼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이 그림은 스크린과 현실을 이어주며 가상과 실재가 뒤섞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전시장 밖 오픈 스페이스인 서울 박스에 설치된 모바일 아고라는 이 프로젝트의 지향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고대 그리스 시대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던 광장 아고라의 개념을 현대적으로 확장해 다양한 분야의 다중 지성들이 모여 대담을 나누면서 연대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이번 전시에선 접으면 컨테이너 박스 형태가 되는 이동식 철 구조물로 제작됐다. 이곳에서 전시 기간 중 매달 한 차례 열린 대담에 배우 박정민을 비롯해 건축가 유현준(兪炫準), 생태학자 최재천(崔在天), 뇌과학자 정재승(鄭在勝) 등이 참여했다. 전시장을 나서기 직전 관객은 벽면에 적힌 영국의 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의 말을 만났다. “풍경이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라기보다는 그들의 고투와 성취와 사건들을 가리는 커튼처럼 느껴진다. 커튼에 가려진 이들에게 두드러진 지표는 그저 지리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기적이고 개인적이기도 하다(Sometimes a landscape seems to be less a setting for the life of its inhabitants than a curtain behind which their struggles, achievements and accidents take place. For those who are behind the curtain, landmarks are no longer only geographic but also biographical and personal).”전쟁의 끝에 70년간 고립되어 살아온 한 마을의 비극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자, 2022년 팬데믹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우리에게 두 작가가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였다. 전시장 옆 야외에 설치되었던 ‘모바일 아고라’는 조립과 변동, 이동이 가능한 큐브형 스테인리스 스틸 설치 구조물이다. 각 196 x 259 x 320 cm. 이 곳에서 전시 기간 중 매달 한 번씩 건축, 과학, 디자인, 인문학 등 분야별 전문가들이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문경원 작가가 6개월에 걸쳐 완성한 대형 회화 ‘풍경’이 영상에서 남자 ‘A’가 헤매던 어느 산속 배경을 재현했다. 캔버스에 아크릴릭과 유채, 292 x 425cm. 영상의 배경은 국가기록원이 제공한 자유의 마을 사진과 비슷한 풍경을 지닌 DMZ에 접경한 경기도 파주의 어느 지역이다.

추억을 떠올리는 맛

People 2021 WINTER 3097

추억을 떠올리는 맛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맛과 재료가 조금씩 변화해왔지만 떡볶이가 한국인의 소울 푸드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서울 떡볶이 맛집’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이 가게는 시어머니의 손맛을 이어 40년째 수많은 고객에게 정겨운 추억을 만들어주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추억 한 조각에 떡볶이가 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골목에서 풍겨 나오는 맛있는 냄새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오늘날 흔히 먹는 고추장 떡볶이는 마복림(马福林, 1920~2011) 할머니가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전에는 가래떡을 먹기 좋게 적당한 크기로 잘라 여러 가지 채소를 넣고 간장으로 양념해 볶은 음식이었다. 조선 말기 19세기에 편찬된 저자 미상의 조리서 에 의하면, ‘흰 가래떡과 등심, 참기름, 간장, 파, 버섯 등을 함께 볶아 만든 궁중음식’으로 ‘떡찜’, 또는‘떡잡채’ 라고 했다. 고급 재료들로 만들던 귀한 음식이 어떻게 대중적인 음식으로 바뀌었을까? 한국전쟁 직후였던 1953년, 마 씨는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중국 음식점을 찾았다. 마침 개업 직후여서 주인이 자축하는 떡을 테이블마다 돌렸고, 마 씨는 실수로 짜장면 그릇에 그 떡을 빠뜨렸는데 그게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비싼 춘장 대신 고추장에 떡을 버무려 매콤한 떡볶이를 만들었다. 그는 고추장과 춘장을 섞은 소스로 만든 떡볶이를 파는 가게를 서울 중구 신당동에 열었고, 1970년대에 들어 이것이 전 국민의 간식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이 동네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분식집이 성행했는데, 그 중에는 DJ가 신청곡을 틀어주는 가게도 있었다. 하교 길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떡볶이를 나눠 먹는 것이 그 시절 청소년들의 오락이었다. 한 가족의 생계 김진숙(金眞淑) 씨의 시어머니는 1980년대,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있는 시장에서 떡볶이 장사를 시작했다. 간판도 없는 노점상이었다. “올해 아흔 두 살이신 어머님은 당시 사십 대 중반이었고, 제 남편은 열한 살이었어요. 주위에 여자고등학교가 세 개나 있어서 학생들이 많았대요. 학교 급식이 없던 시절이라, 점심시간엔 나와서 떡볶이를 먹는 아이들도 많았고요. 그 아이들이 졸업한 후에도 찾아오고, 그래서 늘 손님들이 북적거렸대요. 시댁에 식구가 많았는데, 어머님이 그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셨어요.” 김 씨는 1992년에 시어머니의 넷째 아들인 김완용(金完用) 씨와 결혼했다. 십 년 전 시어머니가 고관절 수술을 받은 후 혼자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온 가족이 시간을 쪼개 짬나는 대로 왔다. 남편도 하던 일을 그만두고 가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김 씨에게 ‘같이 한 번 가볼래?’라며 제안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작은아이가 마침 여름방학이어서 손이 좀 덜 갈 때였다. 그렇게 따라가서 일주일쯤 일을 거들었는데 지켜보던 시어머니가 계속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멋도 모르고 덥석 하겠다고 대답했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2015년, 도시 재개발로 인해 시장이 없어진 후 시장 자리가 있던 곳에 새로 차린 것이 지금의 가게이다. ‘갈현시장 할머니 떡볶이’라는 간판도 그때 처음 달았다. “그때 어머님은 이미 팔십 살이 넘으셨는데도 할머니라고 불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셨어요.” 김 씨가 웃으며 당시를 돌이켰다. “그때부터 남편이랑 저랑 둘이서 가게를 하게 됐어요. 메뉴는 어머님이 시장에서 팔던 그대로예요. 떡볶이, 순대, 만두 두 종류, 삶은 달걀, 김말이.” 기본적인 조리법은 시어머니의 방식을 이어가지만, 소스의 비율이 조금 달라졌다. 자극적인 맛을 줄이고 지금은 부드러운 맛을 강조한다. 덜 달고 덜 짜고 덜 매운 맛이다. 식재료도 건강과 위생을 고려하여 좋은 것으로 세심하게 골라 쓴다. 남편은 아침 7시에 가게에 나온다. 전날 씻어 둔 조리기구들을 세팅하고 물을 올리고 순대를 찌고 달걀을 삶고 기본적인 준비를 하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 “떡볶이용 밀가루 떡이 뭉쳐 있는데, 하나하나 떼는 게 고된 일이에요. 하나씩 떨어져 있는 떡도 있지만 그런 떡은 맛이 떨어져요. 우리 손이 한 번 더 가면 손님들이 더 맛있는 걸 드실 수 있어요. 떡 한 판에 낱개로 324개 나오는데 하루 열 판 정도 나가요.” 두 시간 동안의 준비가 끝나고 9시가 되면 가게 문을 연다. 김 씨는 10시쯤 가게에 나온다. 부부 사이에 특별한 역할 분담은 없다. 두 사람 모두 조리를 하고 손님을 받는다.“둘 중 한 명이 없어도 장사를 해야 하니까 둘 다 뭐든지 할 줄 알아야 해요.” 서울 갈현동에 있는 ‘갈현시장 할머니 떡볶이’주인 김진숙, 김완용 씨 부부는 어머니가 40여 년 전에 시작한 가게를 이어받아 옛 맛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다. 전에는 3명의 직원을 데리고 가게를 운영했으나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작년부터는 시간제 직원 한 명만 두고 부부가 모든 일을 하고 있다. 비법을 지킨다 갈현동 할머니 떡볶이 가게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맛으로 떡볶이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김진숙 씨는 시어머니 진양근씨가 1980년대 가게를 내면서 개발한 소스의 비법을 아직도 소중하게 지키고 있는데, 그 맛이 뛰어나서 동네 손님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종종 있다. 조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벌 끓이기’이다. 손으로 하나씩 떼어놓은 떡은 끓는 물에 넣어 잠시 끓인 다음 조리용 판으로 옮겨진다. 이 과정이 제대로 안 되면 떡이 퍼지거나 질겨진다. 매일 조금씩 다른 떡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해 온도와 시간을 맞추는 것이 관건이다. “사람들은 농담처럼 ‘회사 때려치우고 떡볶이 장사나 할까’라고 말하지만, 사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장사죠.” 손님이 끊이질 않는 맛있는 떡볶이를 만드는 비법은 소스를 만드는 재료의 비율, 불의 온도, 그리고 조리 시간이다.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비율이 안 맞고 온도와 시간이 안 맞으면 소용없다. 이 과정은 모두 시어머니에게 배운 비법이고 때문에 영업비밀이다. 고춧가루, 고추장, 물엿 등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을 포함하여 열 가지 남짓한 재료가 소스에 들어간다. 이렇게 만든 떡볶이는 1인분에 3,500원이다. 지난 4월, 3,000원 하던 가격을 500원 올렸다. “해마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그게 반영돼 모든 식자재값이 오르기 때문에 가격을 안 올릴 수가 없어요. 하지만 떡볶이는 한끼 식사가 아니라 간식으로 먹는 음식이라 값을 올리기 쉽지 않아요. 계속 고민하다가 6년 반 만에 500원을 올렸어요.” 1인분의 양은 ‘고무줄’이라고 김 씨는 말한다. 보통 17~18개의 떡에 어묵을 섞어 1인분으로 담지만 학생이나 노동자에게는 늘 덤을 얹어 주기 때문이다. 열 평이 채 못 되는 가게의 테이블은 요즘 모두 한쪽으로 치워져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홀 손님을 받지 않은 지 일 년이 지났다. 가게 한 구석에 작은 전기밥통과 인덕션이 있는데 부부가 짬을 내어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는 곳이다. 늦은 오후에 군것질로 대충 허기를 채우고 저녁 8시에 문을 닫는다. 정리와 청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밤 10시.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부부의 하루 일과이다. “일주일에 하루, 월요일에 쉬어요. 이 가게를 연 이후 그 밖에 쉰 날이 딱 사흘인데 제가 수술받은 다음날, 아들 입대한 날, 그리고 퇴소한 날이었어요. 가끔 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손님들과의 약속이니까요. 이 지역에 사는 손님만 오는 게 아니라 전국 팔도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는데, 헛걸음하면 미안하잖아요. 쉬는 날에도 다른 거 없어요. 밀린 집안 일하고, 손목터널증후군 고치러 병원에 가요. 직업병이죠.” 손님이 끊이질 않는 맛있는 떡볶이를 만드는 비법은 소스를 만드는 재료의 비율, 불의 온도, 그리고 시간이다.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비율이 안 맞고 온도와 시간이 안 맞으면 소용없다. 연령을 초월한 많은 한국 사람들의 소울푸드인 떡볶이는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흰떡을 여러 가지 야채, 어묵과 함께 고추장 소스에 넣고 뭉근하게 끓여 만든다. 국물 떡볶이, 즉석 떡볶이, 간장 떡볶이, 로제 떡볶이 등 다양한 종류의 떡볶이가 있는데 그 중 국물이 자작한 국물 떡볶이가 가장 대중적이다. 최선을 다하는 하루하루 시어머니를 도와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김 씨는 호된 경험을 했다. “제대로 된 포장용기가 없어서 비닐 봉지를 사용하던 시절이었어요. 떡볶이를 포장해간 손님이 조금 있다가 다시 왔어요. 국물이 새서 청바지에 묻었다면서 떡볶이가 든 봉지를 그대로 던졌어요. 놀라고 당황해서 덜덜 떨었어요.” 이처럼 가끔 부부를 힘들게 한 손님들이 있었다. 달걀 하나를 빠뜨렸다고 전화로 삼십 분 동안 항의한 손님도 있었다. 알아보니 다른 손님과 봉지가 바뀌었던 것인데 값을 물어주겠다고 해도 계속 화를 냈다. 자신이 원하는 만두가 아닌 다른 만두를 줬다고 접시를 던진 손님도 있었다. 가게에 와 있던 친척이 말리다가 싸움이 붙어 경찰까지 오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일을 겪고 부부는 ‘손님이 뭐라고 하면 무조건 인정하자’고 다짐했다. 물론 대부분의 손님들은 따뜻하고 다정하다. 더운 날 마시고 일하라며 음료를 사오기도 하고, 텃밭에서 딴 채소를 가져오는 이들도 있다. “어머님을 기억하는 분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도 하고, 초등학교 동창회하고 다같이 오시기도 해요. 그분들은 떡볶이가 아니라 추억을 먹으러 오는 거죠. 이런 손님들을 보며 따뜻한 마음과 베푸는 방법을 배워요. 이런 게 세상 사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김 씨는 언젠가 이 가게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쉽다. 앞으로 십 년만 더 하고 가게를 접을 계획이기 때문이다. 서운하긴 하지만, 이 힘든 일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도 않다. 아이들이 직장에도 다녀보고 원하는 것을 다 해보고도 떡볶이 장사를 하고 싶어 한다면 몰라도. 새벽부터 재료 하나하나를 정성껏 준비하여 뜨거운 불판 위에서 조리하고, 먼 길을 찾아온 손님에게 푸짐하게 담아주는 떡볶이는 허기뿐만 아니라 추억을 채워주고 마음을 데워주는 음식 이상의 무엇이다. 김 씨 부부는 그 옛날,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팔았던 추억의 맛을 이어가기 위해 고단하지만 날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기적이 일군 삶

People 2021 WINTER 1729

기적이 일군 삶 이탈리아 피아나소에서 태어난, 본명이 빈첸시오 보르도인 김하종 신부는 1990년에 한국에 왔고 이후 빈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해 왔다.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도 그가 운영하는 복지센터는 매일 수백 명의 배고픈 노숙자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나눠주고 있다. 김하종 신부는 30년째 매일 신부복 대신 앞치마를 입고 있다. 신부복보다 앞치마가 본인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성남시 안나의 집에 있는 그의 소박한 사무실에는 김수환 추기경(Stephen Cardinal Kim Sou-hwan, 金壽煥, 1922~2009)의 사진이 걸려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여전히 세상을 위협하고 있지만 김하종 신부는 조용히 다른 종류의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다. 그에게 ‘나눔’은 전염력 높은 행복감으로 사람들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다. 성남에서 그가 운영하는 사회복지센터 ‘안나의 집’에서 나눔은 여러 형태를 갖는다.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초 이래로 가장 눈에 띄는 나눔의 형태는 매일 가난한 노숙자들을 위해 수 백 개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는 일이다. 김 신부가 이 무료급식소를 연 건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기 오래 전이다. 팬데믹으로 실내 음식 섭취가 제한되자 대부분의 무료급식소는 문을 닫았지만 김 신부는 그렇게 하길 거부했다. “무료급식소를 문 닫을 수 없어요. 위장은 쉬지 않으니까요. 이곳을 찾는 70퍼센트의 사람들이 하루에 한 끼를 먹습니다. 우리가 급식을 하지 않으면 이들은 굶어야 해요.”라고 그는 말한다. 무료 점심 도시락 급식을 도시락으로 전환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는 다른 운영 체제를 요구했고 포장재 때문에 비용도 오르고 종사자들의 건강에 대한 위협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2020년 1월 이후 시 당국의 허가를 받아 안나의 집은 매일 650에서 750개의 도시락을 큰 문제없이 제공해오고 있다. 김 신부는 가난한 이들에게 매일 급식을 하는 게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언젠가 한번 쌀이 거의 다 떨어졌던 때를 떠올렸다. “매일 160킬로그램의 쌀이 필요해요. 근데 이틀 분밖에 남지 않았죠. 제가 걱정을 했더니 주방장이 ‘예수님이 보내주실 거예요’라고 하더군요. 다음날 쌀 100포대가 문밖에 놓여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음식과 돈, 옷과 마스크 등 여러 물품을 기부한다. 많은 이들은 시간을 내서 음식 준비, 포장, 청소, 도시락을 받기 위해 줄 선 사람들 안내하는 일 등을 돕는다. 자원봉사자들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찾아온다. 천주교인뿐 아니라 스님과 회교도도 포함하며 유명인사도 회사원과 학생들도 있다. 심지어 루이 뷔통이라는 이름의 개도 있어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빈민들은 성남의 곳곳에서 찾아오고 3시에 배급되는 도시락을 받으러 심지어 서울에서도 찾아온다. 김 신부와 자원봉사자들은 이들을 환영하며 “어서 오세요.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팬데믹 때문에 어려운 상황인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여기에서는 사랑과 나눔의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팬데믹의 또 다른 경험인데 정말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요.”라고 그는 말한다. 빈민을 위한 헌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미래의 김 신부가 될 빈첸시오 보르도는 이미 신부가 되기로 작정했다. 대학에서 동양 철학과 종교를 공부한 후 그는 빈민을 돕는 데 집중하는 오블리티 선교수도회에 가담했다. 아시아에 대한 관심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고 1990년 5월 한국에 도착하고 얼마 있지 않아 빈곤 가정을 돌보는 수녀님과 함께 일하기 시작한다. 2020년에 출간된 그의 책 에서 김 신부는 1992년 변곡점이 된 사건을 기억한다. 그는 곰팡이가 핀 지하방에서 어떤 날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기도 하면서 이웃이 가져다주는 음식에 의존하며 홀로 사는 50대 반신 불구의 남자를 만났다. 그와 얘길 나누고 방을 청소한 후 김 신부는 허락을 받고 그를 안아주는데 냄새가 너무나 고약해서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형용할 수 없는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복지체계 밖에 남겨진 걸 깨달은 김 신부는 다음 해 빈민을 위한 급식소를 시작한다. 그 당시 한국은 지금과는 달랐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사람들이 저에게 왜 노숙자를 돕느냐고 묻곤 했어요. 노숙자는 문제를 일으키는 알코올 중독자니 도와서는 안 된다고 했죠.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진 않아요. 한국 사회가 많이 변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여파로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노숙자가 되었다. 이듬해 김 신부는 어머니의 세례명이 ‘안나’인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무료급식소를 시작했고, 그렇게 ‘안나의 집’이 탄생했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모든 요일에 무료 급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무료급식소는 성남성당이 제공한 공간에서 운영되었다. 하지만 2018년에 그곳을 비워야 했다.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김 신부의 걱정이 커졌다. 성남시 직원들은 길 건너 그린벨트로 묶였던 땅이 해제될 테니 그곳에 새로운 공간을 지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실행가능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땅을 살 돈이 없었다. “이제 정말 끝인 걸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제 정말 이 일을 끝내고 퇴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라고 그는 말한다. 새로운 둥지 도움은 인터뷰 요청의 형태로 찾아왔다. 김 신부는 주저했지만 지역신문이라고 착각하고 인터뷰를 하기로 동의하고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인터뷰는 KBS방송과 하는 거였고, ‘인간극장’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김 신부에 대한 방송이 나가자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다.” 후원이 밀려들어왔고 빠르게 12억에 도달한 후원금은 땅을 사기에 충분했다. 김 신부는 오랜 기간 타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자신의 에너지를 ‘사랑’으로 꼽았다. 힘들고 포기할 뻔한 상황마다 누군가가 나타나 도움을 주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안나의 집을 꾸릴 수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사람들이 가진 사랑의 힘이라고 믿는다. 안나의 집은 2018년 새 건물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무료급식이 주된 업무이지만 김 신부의 노력으로 더 많은 일에 봉사를 하게 되었다. 현재 의료봉사, 재활, 법률 서비스, 인문학 강좌 등이 주 단위로 제공된다. 또한 노숙자와 노인들, 가출청소년들을 위한 쉼터, 젊은이를 위한 셰어하우스, 가출청소년과 도움이 필요한 젊은이들을 위한 모바일 봉사활동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코로나 이전에 봉사활동 프로그램 ‘아지트’(아이들을 지켜주는 트럭)는 매일 밤거리를 배회하는 수십 명의 소년 소녀들을 만났다. 팬데믹으로 인해 많은 활동이 중지되었지만 김신부는 여전히 지금은 소형차인 아지트를 끌고 거리로 나간다. 아지트는 한국어로 ‘집합소’ 혹은 ‘안전한 집’을 의미한다. “희망을 주려고 해요. 사람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는 거죠. 씨앗이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하고 또 실패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가능한 무엇이든 하도록 부름 받았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무료급식소를 문 닫을 수 없어요. 위장은 쉬지 않으니까요. 이곳을 찾는 70퍼센트의 사람들이 하루에 한 끼를 먹습니다. 우리가 급식을 하지 않으면 이들은 굶어야 해요.” 하느님의 종 지난 30년 동안 김 신부는 거의 매일 앞치마를 몸에 걸쳤다. 하지만 일요일에는 자전거를 타기 위한 채비를 하고 한강 둑을 따라 자전거를 타러 간다. 귀중한 휴식의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좋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긴 하지만 매일 같이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육체적으로 힘든 건 말할 것 없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뛰는 걸 알아차렸을 때 그는 의사를 찾아갔고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분간 그가 유일하게 지켜온 이탈리아 습관인 모닝 에스프레소를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힘들고 베푸는 삶에서 그가 보상으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빈민들을 위해 일하는 게 절 행복하게 합니다. 저에게는 일이 아니예요. 저의 사명이고 이곳에서 저의 삶은 이들을 환영하고 사랑하고 돕는 겁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 사명은 ‘하느님의 종’을 의미하는 그의 한국 이름 ‘하종’에 반영되어 있다. 김이라는 성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성직자였던 앤드류 김대건 (1821-1864)에 헌사하는 의미로 따왔다. 김대건은 천주교를 탄압한 조선왕조 시기에 처형당했고 1984년에 다른 한국인 순교자들과 함께 성인으로 공표되었다. 김 신부의 업적이 알려지면서 그는 2014년 명망 있는 호암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받았다. 어떤 상이 가장 의미가 크냐는 질문에 김 신부는 표정이 환해지면서 최근에 손때 묻은 천 원짜리 지폐를 모아 그에게 선물한 유치원 어린이들을 언급했다. 그를 특별히 행복하게 만든 또 다른 상은 2015년 대통령령으로 주어진 한국 국적 취득이다. 한국인으로 귀화하기 오래 전에 그는 한국에 영원히 머물 것을 결심했다. 심지어 사후 장기 기증 서약까지 해 놓았다.“저는 외국인이 아니고 한국 사람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자원봉사자들은 매일 1시부터 안나의 집 지하에 있는 식당에 모여 도시락을 준비한다. 밥, 반찬, 국, 빵, 통조림 캔 등을 일사불란하게 담고 포장하는 손놀림이 무척 능숙하다. 김 신부(맨 오른쪽)도 항상 이들과 함께 일한다. 김 신부는 매일 3시부터 안나의 집 앞에 있는 성남동 성당의 너른 공터에서 노숙자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준다. 700여 개의 도시락은 2시간 정도면 모두 소진된다.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

People 2021 WINTER 1858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 남북한 주민의 가교 역할을 자처하는 ‘사부작’은 대학생들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이다. 익명으로 출연하는 라디오 방송이라는 매체의 특성이 탈북민 게스트들의 경계심을 낮추어 보다 솔직한 대화로 남한 사회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실 저는 북한에서 왔어요.”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이 이 말을 하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남한 사회에는 아직 대한 편견과 차별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북한이탈주민 신변보호제도 개선방안 실태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80% 이상이 ‘탈북민이라는 신분이 노출됐을 때 남한 주민이 경계심을 보이거나, 차별적으로 대하는 경험을 했다’고 답했다. ‘사부작’은 이런 편견과 차별을 깨기 위해 3년 전 남한의 대학생들이 모여 만든 인터넷 라디오 방송이다. 이 흔치 않은 방송 이름은 ‘사이좋게 북한친구와 함께 만드는 작은 수다’를 의미하는 한국어의 줄임말이다. 사부작에 출연하는 대부분의 게스트가 익명을 원하지만, 간혹 신분이나 얼굴을 공개하기도 한다. 통일코리아협동조합 박예영 이사장은 ‘김책 털게’라는 닉네임으로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3부로 나뉘어 출연했다. 왼쪽부터 사부작 스탭 박세아, 안혜수, 게스트 박예영 이사장. © 사부작 재미있는 닉네임 북한 출신 게스트를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는 이 팟캐스트 방송은 탈북민들의 삶을 ‘조미료 섞지 않고 담백하게’ 들려주는 것이 모토다. 솔직한 대화를 통해 탈북민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남북한 주민들 간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것이 목표다. “나 북한에서 왔어”라고 말하면 “그래? 난 대구에서 왔는데”라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이 방송은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 걱정 때문에 미디어 노출을 꺼리는 출연자들에게 별명을 만들어준다. 이를테면 ‘경성 송이버섯’, ‘혜산 감자밥’같은 이름인데, 전자는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 고향의 송이 버섯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감자밥을 즐겨 먹었던 양강도 혜산 출신이라는 뜻이다. 진행자 역시 ‘부산 돼지국밥’처럼 자신의 출신 지역과 좋아하는 음식의 이름을 붙여 만든 닉네임을 사용한다. 이는 게스트가 자신의 고향을 자연스럽게 밝히면서 보다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기 위해 고안한 장치다. 이 같은 배려는 게스트 섭외에도 도움이 된다. 탈북민들은 대부분 출연 전에는 자신의 고향을 밝히길 꺼리지만, 대화를 진행하는 동안 어느 덧 고향을 떠올리며 행복해한다. 뿐만 아니라 출연을 계기로 남한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자신감을 얻고, 이후 자연스럽게 출신 배경을 밝힐 수 있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녹음이 끝나면 게스트들이 ‘지금까지 북한에서의 기억을 잊고 부정하려는 노력을 해왔는데 오늘 이야기하며 그 시절의 나를 좀 더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씀하세요. 그럴 때면 우리 방송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해집니다.”스태프 박세아(朴細我) 씨의 말이다. 그는 연세대 교육학과 3학년 학생으로 고등학생 시절 탈북민 자녀를 멘토링한 이후 탈북민 문제에 관심을 가지다가 이 방송에 지원하게 됐다. 이 방송의 또 다른 목적은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게스트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다. 사회의 조명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더 나아가 북한 사회의 구성원들 역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려는 것이다. 대화의 주제는 정치적, 종교적 문제를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때때로 게스트가 원할 경우 가볍게 다루기도 한다. 이 방송을 처음 시작한 것은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이던 박병선(朴炳宣) 씨다. 그는 현재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으로 방송 활동을 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탈북민들의 얘기를 팟캐스트로 들려주면 남한 사람들이 이들을 친숙하게 대할 수 있게 되고 서로 거리를 느끼지 않고 어울려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고 있는 탈북민들이 차별과 편견을 받는 것을 알고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들의 얘기를 가감없이 진솔하게 들려주는 방송을 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사부작’은 인액터스(Enactus) 소속 연세대 동아리 프로젝트 ‘지음’(知音)이 다섯 달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18년 8월에 첫 방송을 내보냈다. 인액터스는 1975년 미국 리더십 연구소(National Leadership Institute)가 설립한 글로벌 비영리단체이고, ‘지음’은 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2020년 8월부터 참여 범위를 넓혀서 현재는 연세대뿐 아니라 가톨릭대, 서강대, 서울대, 성신여대, 이화여대, 중앙대생들이 함께하는 대학생 연합동아리로 운영한다. 이 팟캐스트 방송은 탈북민들의 삶을 ‘조미료 섞지 않고 담백하게’ 들려주는 것이 모토다. 솔직한 대화를 통해 탈북민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남북한 주민들 간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특별한 게스트들 현재 스태프는 총 9명으로 3명씩 팀을 이뤄 번갈아 방송을 진행한다. 팀원은 역할 구분 없이 섭외, MC, 편집, PD 업무 등을 두루 맡고, 녹음은 홍대 부근에 있는 ‘스튜디오 봄볕’에서 한다. 방학을 제외하고 거의 매주 한 명씩 게스트를 초청해서 팟캐스트를 제작하는데, 한 게스트의 얘기를 3회로 나눠 편집해 올린다. 첫날 방송에서는 고향 음식·북한에서의 삶, 둘째 날은 탈북 과정, 셋째 날은 남한 정착기와 생활 얘기를 듣는 방식이다. 초기에는 탈북민들의 ‘알려지지 않은 목소리’를 전하는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우리 공동체 이야기’를 전하고자 노력한다. 게스트가 정해지면 사전 인터뷰로 방송 흐름을 미리 설계하지만, 원고를 준비하지는 않는다.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위해 온라인 화상 채팅을 통해 게스트와 미리 친해지는 기간을 갖기도 한다. 초기 게스트는 주로 대학생들이었다. 제작진과 동년배로 섭외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게스트가 지인들에게 출연을 권하고 입소문도 나면서 다양한 연령층의 출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중 한 사업가 출연자가 스태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북한에서 15살 때부터 탈북 브로커 활동을 하다가 국가보위부의 전국수배를 받게 된 인물이었는데, 얼굴이 안 보이는 팟캐스트의 특성상 흥미로운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수 있었다. 또 다른 인상적인 게스트는 고등학생이던 ‘길주 완자’다. 풍계리 핵실험장이 있는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나고 자란 그는 14살 때인 2013년 북한을 탈출해 이듬해 한국에 들어왔다. 드물지만 실명을 밝히고 출연한 게스트들도 있었다. 북한 여군장교 출신 김정아(함경북도 청진 출신) 씨가 첫 번째 경우였다. 그는 양부모와의 갈등 끝에 꽃제비(일정한 거주지 없이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북한 어린아이를 지칭하는 말)로 지내다가 숨진 오빠 얘기를 하면서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 유럽에서 외화벌이 해외파견 근로자로 일하다가 한국에 입국한 나민희 씨도 드문 일화를 지닌 게스트였다. 그는 출신 성분이 아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풍요로운 생활을 했던 평양 상류층 자녀였다. 서울에 정착해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고 있는 주성하 씨가 출연한 적도 있다. ‘김책 털게’라는 별명과 함께 실명을 밝힌 박예영 통일코리아협동조합 대표도 특별한 게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제작진의 일원인 안혜수(安慧洙) 씨는 “박 대표가 남한 대학생들이 한민족과 통일에 관심을 갖고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것이 너무나 고맙다고 말해줘서 큰 힘이 됐다”고 회상했다. 할아버지가 북한 황해도 출신인 안 씨는 성신여대 법학부 4학년 학생으로 이 방송의 소문을 듣고 팀원으로 자원했다. 2019년 9월에 시작된 시즌 3부터는 탈북민 출신 학생들도 스태프로 참여하고 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재학중인 안성혁(安成奕) 씨와 서울대 체육교육학과 2학년 학생인 박범활(朴汎豁) 씨의 경우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살다가 부모님과 함께 탈북해 2011년 12월 한국에 들어온 안 씨는 현재 이 방송의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친구가 함께 활동하자고 제안하여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게스트들이 바쁜 일상 때문에 떠나온 고향 생각을 자주 못 하는데, 우리 방송에 출연해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고 말할 때 가장 뿌듯해요.” 대학생들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라디오 방송 사부작은 북한이탈주민들 각자의 삶에 담긴 특별한 이야기들을 자극적으로 과장하거나 획일화 시키지 않고 진솔하게 소개하려 노력한다. 주로 사전 녹음 방송을 하는데, 녹음은 홍대 부근의 ‘스튜디어 봄볕’에서 한다. 왼쪽부터 사부작 스탭 안성혁, 안혜수, 박세아. 생각의 변화를 위하여 2021년 8월부터는 시즌 7이 진행되고 있다. 시즌은 대학의 한 학기 기준이다. 우양재단, 남북통합문화센터, 연세대 고등교육혁신원 등의 기관으로부터 녹음실 대여비나 공개방송비용 등을 지원받고 있는데 그동안은 게스트에게 출연료를 주지 못했지만, 지원 덕분에 최근 들어 작은 액수의 사례비도 줄 수 있게 됐다. 탈북민들 사이에서 친숙하게 자리를 잡은 이 팟캐스트는 2021년 9월 기준으로 누적 조회 수가 20만 명에 이른다. 청취자들은 댓글로 피드백을 주기도 하고, 인스타그램으로 DM을 보내기도 한다. 많은 격려와 응원 덕분에 대가 없이 봉사하는 제작진이 열정과 용기를 얻는다. 이 팟캐스트 방송의 가장 중요한 소통 창구는 댓글이다. 인스타그램에는 매주 방송내용을 정리한 카드뉴스를 올리기도 한다. © 사부작 ‘사부작’은 지금까지 130여 명의 게스트와 이야기를 나눴다. 2021년 2월에는시즌 1과 시즌 2 게스트 중에서 12명의 이야기를 골라 담은 에세이집 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 책에는 탈북 계기, 탈북 이후 남한 정착 과정, 이후 어려웠던 이야기가 담겼다. 책을 통해 그동안 정형화되었던 북한에 대한 정보 외에도 북한사람들의 실제 정서, 문화와 먹거리, 탈북민들의 고민, 북한에서의 다양한 추억과 세시풍속, 한국과 비슷하면서 다른 점들을 보다 깊이 파악할 수 있다. ‘사부작’ 제작진은 게스트들과 대화를 나누며 남한 사람들이 탈북민을 일반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자신들 마저도 처음에는 ‘탈북민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지내겠지’, ‘그들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반면, 게스트들은 진행자들을 남한 사람이라고 일반화하지 않았다. 각자 개성과 특징을 지닌 개인으로 보았다. 제작진은 오히려 자신들이 다양한 게스트를 만나며 서서히 변화했고, 지금은 탈북민을 특정한 이미지가 아닌 개인으로서 표현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학교에서 남북통일에 관한 토론 수업을 할 때면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죠. 젊은 세대가 서로를 적이라고 부를 때 가장 가슴이 아파요. 우리 방송이 남북한 주민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더 오래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안성혁 대표의 말이다. 에세이집 에는 이색적인 북한음식이 삽화를 곁들인 레시피로 소개되는데, 책 속 12명의 게스트들은 각자 고향의 음식들을 소개하며 이와 관련된 경험, 추억을 이야기한다 © 프로젝트 지음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만 만드는 공예가

People 2021 WINTER 1382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만 만드는 공예가 온전한 수작업 끝에 완성되는 금속공예가 심현석(Sim Hyun-seok 沈鉉錫)의 작품들은 따뜻한 감성과 절제된 미감을 전달한다. 그는 손으로 직접 만드는 물건이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인 작업을 이어간다. 금속 공예가 심현석(Sim Hyun-seok 沈鉉錫)이 경기도 가평 작업실에서 카메라 앞에 섰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인데, 이는 스스로가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들어 본 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으면 비로소 작품화하기 때문이다. 금속 공예가 심현석은 몇 년 전 경기도 가평으로 작업실과 집을 옮겼다. 농사를 짓고 화초를 가꾸며 살고 싶다는 오랜 바람이 투영된 결정이었다. 그전까지는 서울 화곡동에 있는 스승의 작업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무려 26년에 걸친 도제식 수업이었다. 여유 시간과 사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는 요즘 젊은 세대는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일 것이다. 긴 세월 동안 하루하루를 ‘제자’로 살았던 작가에게는 모든 공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정직함과 무던함이 남았다. 작은 부품까지 모두 직접 만들어 완성하는 핀홀 카메라를 비롯해 장신구와 생활 도구 등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이다. 그는 건국대에서 공예를 전공한 후 캐나다 노바스코샤 예술디자인대학원(Nova Scotia College of Art and Design)에서 금속공예 심화 과정을 밟고 미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5년에는 한국 현대 금속공예의 선구자 유리지(劉里知) 교수를 기념하는 유리지공예관이 주최하고 고려아연주식회사가 후원하는 ‘올해의 금속공예가상’을 받았으며, 국내외 유수의 갤러리와 기관에서 전시를 열며 탄탄한 실력과 매력적인 작품 세계를 인정받고 있다. 소재로 은을 주로 사용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재료로서 은의 매력은 어떤 것인지요? 조선 왕실에서는 인체에 해로운 독극물을 확인하는 용도로 은수저를 사용하곤 했어요. 독이 있는 성분이 은에 닿으면 색이 검게 변하니까요. 그 얘기는 은이 나쁜 성분을 잘 받아들인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은 조각을 물통에 넣어 놔요. 신선도가 유지되고 수질도 좋아지기 때문이지요. 은기(銀器)가 비싸다 보니 장식장에 넣어만 두는 분들이 많은데 그러면 색이 변합니다. 매일 쓰면 변하지 않아요. 그리고 은은 성질이 물러 작업하기가 까다롭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도 않아요. 금속공예 작업에 사용하는 스털링 실버(sterling silver)는 은이 92.5%, 구리가 7.5% 함유되어 있고 강도가 아주 높습니다. 물론 가격도요. 최근에는 무슨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강아지 모양 브로치를 포함해서 장신구를 꾸준히 만들고 있고, 기하학적 형태의 작업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작업을 해야 정교하고 미학적인 작품도 만들 수 있거든요. 밸런스를 맞추는 거죠. 최근에는 스테인리스로 커틀러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스테인리스가 식기류를 만들 때는 무척 좋은 재료예요. 다른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은이나 황동, 적동과 달리 색도 변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다루기에는 어려운 재료예요. 땜이 아닌 용접을 해야 하고, 공방 수준을 넘어 공업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어 어떻게 하면 기존의 제 방식대로 할 수 있을지 고민 중입니다. 기하학 형태의 장신구들. 심현석은 강도가 높은 스털링 실버를 주로 사용하며, 최근에는 스테인리스도 활용하고 있다.© 심현석 귀엽고 재미있는 모양의 장신구들. 그는 작업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정교하고 미학적인 작품과 즐겁고 유쾌한 작품을 병행하여 만든다. 그를 대표하는 작업물은 은으로 만든 수제 핀홀 카메라다. 몸체는 물론 내부에 들어가는 모든 부품까지 직접 제작하기 때문에 최소 몇 개월의 작업 시간이 필요하다. 기존 방식이란 무엇인가요? 모든 공정을 제 두 손으로 직접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범위를 잘 알고 있고, 그 능력과 정도에서 잘하려고 하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보통은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물건을 만들기가 어려운데, 저는 그런 작품을 잘 만들고 또 더 잘하고 싶어요. 대표작 핀홀 카메라는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요? 핀홀 카메라가 제 이름을 세상에 알려준 작품이기는 하지만 안 만든 지 여러 해 되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운 좋게 라이카 카메라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한 적이 있었는데, 제 작업을 촬영하려면 다른 렌즈를 사야 했어요. 가격을 알아보니 900~1000달러 정도 되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막상 렌즈를 만들어 끼워 보니 사진이 찍히더라고요. 몸체도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지요. 그래서 내 손으로 온전한 카메라를 만들게 되었고, 사진을 찍어 현상을 해 보니 제대로 사진이 되어 나왔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작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내게 필요한 걸 만들어 보고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면 그때 비로소 작품을 시작하는…. 긴 세월에 걸쳐 도제식 교육을 받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대학 때 우연히 우진순(Woo Jin-soon 禹眞純) 선생님을 뵙게 됐어요. 학교에 강의 차 나오셨는데 이후 자연스럽게 인연이 됐지요. 은을 다루시는 방식이나 미감에서 끌리는 부분이 많았어요. 스웨덴 스톡홀름 국립디자인공예대학에서 공부를 하신 덕분에 북유럽 작가들이 어떤 작품을 어떻게 만드는지 배우는 것도 좋았고요. 1992년도부터 2018년까지 함께했는데, 가끔 토요일에 뵐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주말을 제외하고 아침 5~6시에 시작해 오후 3~4시까지 작업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작업실을 빼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제가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됐어요. 지금은 매일 아침 9시에 시작해서 저녁 6시까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오늘 하루를 잘 살자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 가야지 생각하기보다는 시냇물 위를 흘러가는 나뭇잎처럼 오늘 하루도 이상한 곳에 빠지지 말고 잘 흘러가자, 내 앞에 있는 길을 잘 헤쳐 나가자 생각합니다. 계획도 잘 세우지 않아요. 선생님과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성격 탓일 거예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범위를 잘 알고 있고, 그 능력과 정도에서 잘하려고 하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보통은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물건을 만들기가 어려운데, 저는 그런 작품을 잘 만들고 또 더 잘하고 싶어요.” 2009년 크래트프 아원에서 열린 그룹전 전에 심현석이 출품한 작품이다. 그는 고도의 집중력과 섬세함이 필요한 작은 크기의 작품에 강점을 보인다. © 심현석 도제 수업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사실은 제가 무척 덜렁대는데 선생님께 배우는 동안 꼼꼼하다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어요. 꼭 지켜야 할 과정을 건너뛰지 않으면서 그게 습관이 되고, 또 제 작업 태도가 된 것 같아요. 사포질을 예로 들면 240, 400, 600 등 사포의 방 숫자가 커질수록 금속 표면을 더 곱게 갈아내는데, 저는 단계를 건너뛰지 않고 각 과정에서 그에 맞는 사포로 연마 작업을 계속하거든요. 몇 단계를 건너뛴다고 해서 결과에 큰 차이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저는 꼭 그렇게 했어요. 하나 더 말씀드리면, 두 개의 판을 붙이는 땜 작업을 하려면 판 사이에 붕사라는 재료를 발라 줘야 해요. 그 재료가 땜이 잘 흐르게 하고 산화도 막아 주거든요. 그런데 그런 작업을 깨끗한 환경에서 하는 게 의외로 쉽지 않아요. 공방은 주변이 어수선해지기 십상이죠. 하지만 선생님이나 저나 깔끔한 성격이라 늘 주변을 정돈했고, 손도 깨끗이 씻은 다음에 작업을 했습니다. 제 작품을 매우 간결하다고 평가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런 작업 공정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나 계획이 있으신지요? 지금처럼 꾸준히 할 뿐이지요. 해외 전시 계획이 있어서 그 준비도 해야 하고요. 아, 그러고 보니 ‘공예수선소’를 해 보고 싶기는 합니다. 제가 금속을 다루는 사람이다 보니 주방 도구를 땜으로 고치거나 무언가를 덧대 다시 살리는 작업을 잘할 수 있거든요. 금속공예품의 장점은 깨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심하게 찌그러져도 반대쪽에서 힘을 가하면 어느 정도 원상 복구가 가능해요. 찢어진 가죽 소파를 바늘로 꿰매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렇게 망가진 물건을 살려내고 애초에 그걸 가졌던 사람이 오래오래 사용할 수 있다면 보람 있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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