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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숨 고르기의 미덕

Lifestyle 2025 SUMMER

숨 고르기의 미덕 김차이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으로 제74회 에미상 스턴트 퍼포먼스 상을 받은 스턴트 배우이다. 그녀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누군가 대신할 수 없는 연기로 작품에 기여하며 성취감을 느낀다. 나이가 들어도 현장을 누비는 베테랑 배우가 되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스턴트 배우 김차이는 경기도 하남에 위치한 베스트 스턴트팀(Best Stunt Team) 연습실에 출퇴근할 때마다 오토바이를 애용한다. 그녀를 비롯해 베스트 스턴트팀 배우들은 < 오징어 게임 >으로 비영어권 최초 에미상 스턴트 퍼포먼스상을 받았다. 당신은 김차이를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그녀는 영화와 드라마 속 액션 장면에 숨을 불어넣는 스턴트 배우이다. 글로벌 히트작 (2021)에서 주인공들 중 하나인 새벽을 연기한 배우 정호연의 대역이 바로 그녀였다. 그리고 과 같은 해 11월 개봉한 영화 에서는 여우 역으로 개성 있는 액션을 선보이며 얼굴을 알렸다. 이 영화는 제20회 뉴욕 아시안영화제에서 다니엘 A. 크래프트 우수 액션시네마 상을 받았다. 또한 (2023), (2023) 등 국내외에서 주목받은 한국 영화의 무술팀으로 활약했다. 최근에는 한소희, 전종서 주연의 영화 와 전도연, 김고은 주연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촬영으로 바빴다. 는 김차이가 처음으로 참여한 영화 (2015)에서 함께한 두 배우들과 재회한 작품이라 더욱 뜻깊었다. 지난 10년 동안 성장을 거듭한 결과, 이제 그녀는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들의 액션 연기를 대신하는 스턴트 배우로 우뚝 섰다. 나만의 무기 이 여정의 시작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소극적인 어린아이였던 김차이에게 숨겨진 끼가 있음을 직감한 어머니는 딸을 연기 학원에 보냈다. 덕분에 그녀는 초등학생 때부터 과자 광고를 찍고 아역 배우가 되었지만, 연이은 오디션에 지쳐 사춘기 시절 잠시 방황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예술고등학교와 대학 연기과에 진학하며 배우의 꿈을 놓지 않았다. 기회를 잡으려면 나만의 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깨달음도 일찍 얻었다. 아크로바틱에 자신 있었고, 몸 쓰는 일에 늘 뛰어났던 그녀는 액션에 눈을 돌렸다. 배우는 넘쳤지만, 액션 전문 배우는 흔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작품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그녀는 액션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어디서 액션 연기를 배울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남들보다 운동을 잘한다고 해서 감독의 부름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묵묵히 의지를 다지고 있었던 김차이는 대학 교양 과목으로 택한 호신술 강의를 듣던 중 인연을 만났다. 호신술을 가르치던 교수는 학생들 사이에서 유달리 돋보이는 그녀를 눈여겨봤고, “격투기 선수로 키워 보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그는 액션 배우가 되고 싶다는 그녀에게 당시 스턴트 배우로 활약하던 제자를 소개했다. 이들의 만남은 또 다른 스승을 모시는 기회로 연결되었고, 드디어 본격적으로 스턴트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대학에 다닌 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아역 배우로 데뷔한 김차이는 어린 시절 태권도, 검도, 스피드 스케이팅 등을 즐겨 했고 자신의 강점과 특기를 살려 스턴트 전문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일에 대한 자긍심 김차이는 스턴트 배우로 일하면서 복합적인 감정의 터널을 통과했다고 고백했다. 오래전 계획한 대로 액션이라는 강점을 키울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정극 연기에 대한 갈증도 깊어졌다. “대역이 아닌 ‘진짜 배우’로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언제나 마음 한쪽에 있었어요. 꿈을 꿈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아 조급했던 적도 있었고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널리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서 작품에 기여한다는 만족감이 크다고 강조했다. 스턴트 배우로서 자긍심을 다지게 한 동력은 트로피였다. 김차이는 을 함께한 스턴트 팀원들과 같이 제74회 에미상 스턴트 퍼포먼스 상을 받았다. , , 와 같은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받은 상이라 더욱 놀라웠고 기뻤다. 쉽게 얻어진 상은 아니었다. 한여름엔 뙤약볕 아래에서 400여 명의 군중들과 호흡을 맞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시퀀스를 완성했다. 한겨울에는 살이 에이는 추위에도 맨살을 드러내야 했다. 그녀는 이 드라마에서 새벽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절박한 심경을 액션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호연 배우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살펴봤고, 신체적 특징과 습관을 면밀히 관찰해 액션 연기에 반영했다. “내가 살면서 이런 상을 받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김차이는 수상 후 3년이 흘렀음에도 그때의 벅찬 감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스턴트 배우들을 대표해서 받는 상으로 여겼다”는 말을 덧붙였다. 액션 베테랑을 향해 김차이는 액션, 스릴러 장르에 주로 출연하지만 사실 로맨스 영화를 즐겨왔다고 한다. (2003)처럼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보며 혼자 펑펑 운 적도 있었다. 촬영 현장에서는 모든 에너지를 뿜어내지만, MBTI가 ‘I’로 시작하는 내향형 인간인지라 집에 가만히 누워 있는 걸 낙으로 삼는다. 그런 김차이의 곁에는 특별한 친구가 있다. 그녀가 중국에서 촬영을 하던 시기에 만나게 된 중국인 친구다. 그녀는 연출을 전공하면서 한국 영상 산업에 관심이 생겨 서울에서 어학연수 중이다. 2016년부터 우정을 쌓아온 두 사람은 급기야 룸메이트가 되기에 이르렀다.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친구가 요리를 해줘요. 중국인답게 따뜻한 차도 자주 내주고요. 처음에는 영어로 소통했는데, 점차 서로의 모국어에 익숙해지고 있죠.” 친구가 한국어를 배우는 동안 그녀도 중국어를 조금씩 익힌 덕분에 이제는 제법 의사소통이 수월해졌다고 한다. 친구의 안내로 상하이 여행을 다녀온 김차이는 그녀에게 한국을 알려주고 싶어 얼마 전 강릉 여행을 함께하기도 했다. “여행을 하면서 그동안 나 자신을 일에만 너무 가두고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찾아오는 여유로운 시간을 중히 여기며, 앞으로 더 많은 곳에 가볼 계획이에요. 소소한 것에서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도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 같아요.” 동료들과 풋살 팀을 꾸려 휴식하듯 운동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숨 고르기의 미덕을 깨우치자 목표를 대하는 자세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20대에는 “스턴트 연기의 특성상 30대 후반이면 은퇴해야 하는 게 아닐지 걱정이 많았다”던 그녀는 이제 환갑이 되어도 촬영장을 누비는 액션 베테랑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 꿈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배우로서 얼굴을 드러낸 자신을 상상하기도 한다. 다시 연기 공부를 열심히 해서 40대가 되기 전에 이름 있는 배역을 맡아보고 싶기도 하다. 그 바람을 전하는 김차이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세상은 넓어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해외에서도 일해 보고 싶어요. 언젠가 할리우드에서 활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의 앞길은 창창하니까요!” 김차이 씨가 동료와 함께 훈련 중인 모습. 촬영 현장은 항상 안전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평소 동료들과 합을 맞추는 연습에도 최선을 다한다.

이야기를 건네는 패션을 꿈꾸다

Lifestyle 2025 SUMMER

이야기를 건네는 패션을 꿈꾸다 이승주(Sung Ju Beth Lee) 디자이너가 2017년 론칭한 다시곰(Darcygom)은 한국 전통을 모티브로 삼은 패션 브랜드이다. 브랜드명에는 ‘다시 한번 더’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모던 한복과 업사이클링을 통해 새로운 패션 아이템을 제시하고 있다. 디자인이 소비자와 소통하는 매개체라 생각하는 이승주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승주 디자이너는 선염 직물인 색동이 점차 사라져가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이를 대중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승주 디자이너가 이끄는 다시곰은 전통을 현재에 맞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구현하는 브랜드이다. 옛날 선비들이 착용했던 정자관의 형태를 본뜬 가방, 한복 저고리의 동정 깃 디자인을 활용한 점프슈트, 색동을 전면에 내세운 스니커즈 등 전통적 요소에 재치와 개성을 뒤섞으며 특색 있는 디자인을 선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둔 업사이클링 디자인도 병행한다. 브랜드명 다시곰은 부사 ‘다시금’의 옛말인데, 이 작명에는 그녀가 추구하는 패션의 가치가 담겨 있다. 기존의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해석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 그녀는 미국, 캐나다, 독일, 탄자니아 등지로 옮겨다니며 해외에서 오래 살았다. 그 세월을 합치면 17년이다. 패션 문외한이었던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온 뒤 어느 날 불쑥 한복과 침구 등으로 유명한 서울 광장시장에 찾아가 옷 짓는 법을 배웠다. 그러고는 2017년 브랜드를 론칭하고 패션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후에는 오뚜기, 카스 등 국내 기업들과 다양한 협업을 펼쳤고, 디자인 영역도 계속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박물관,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과도 협업해 뮤지엄 스토어에 제품을 입점시키기도 했다. 패션 디자인과 거리가 먼 삶을 살다가 어떻게 브랜드를 만들게 되었나? 내가 해외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이 탄자니아였다. 당시에 건강이 나빠져 일을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당장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미래를 그려보다가 새로운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해외를 돌아다니는 동안 각 나라의 전통 원단이나 옷을 사 모았더라. 베트남에서는 아오자이를, 일본에서는 유카타를 사왔는데 막상 내게는 한복 한 벌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광장시장을 찾아갔고, 재봉하시는 분에게 대뜸 옷 만드는 걸 배울 수 있냐고 물어봤다. 이상한 사람 취급도 받았지만 선뜻 알려주겠다는 분이 있어 재봉을 배웠고, 서울디자인재단과 서울시 산하 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다가 브랜드까지 만들었다. 정말 우연이었다. 어릴 적, 한복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고 있나? 어린 시절을 북미에서 보냈다. 4~5살 때쯤 한복을 처음 입어봤는데 빨간색, 주황색에 장미가 그려진 옷이었다. 지금봤더라면 촌스럽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어린 내 눈에는 정말 예뻐 보였고 공주 옷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더 자라면 사이즈가 안 맞을 텐데 계속 입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했었다. 타향살이를 하면 고국에 대한 갈증이 생긴다. 남동생은 한식에 빠졌는데, 나는 옷으로 발현된 게 아닐까 싶다. 다양한 굵기와 색채의 색동을 조합해 선보인 프로젝트. 2021년 미국의 라이프스타일 잡지 『레드 핫 몽드(Red Hot Monde Magazine)』에 소개되었다. © 오승준(OH Seungjune) 색동은 다시곰의 시그너처다. 소비자들이 색동에 매료되는 이유를 무엇이라 생각하나? 나는 잊히는 것과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착이 있다. 광장시장에서 색동 원단을 구하다가 우리나라에서 색동을 만드는 곳이 이제 한 곳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요가 적으니 공급도 없어진 것이다. 색동은 한국의 문화유산인데 사장될 위기에 처한 것이 안타까웠고, 그래서 색동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다행히 반응이 좋아 여러 디자인에 적용할 수 있었다. 브랜드 이름처럼 ‘무언가를 다시’ 부흥시키는 경험이었다. 색동의 쨍한 색감에 매력을 느낀다는 이들도 있었고, 원단 자체가 주는 노스탤지어를 좋아하는 이들도 많았다. 현대무용단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와는 어떻게 같이 작업하게 됐나?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한류와 연계한 한복 프로젝트 공모전이 열렸다. 다른 사람들이 아이돌 같은 유명인과 함께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과 달리 나는 평소 좋아하던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를 중심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운이 좋게도 내 제안이 채택되었고,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와 협업해 ‘애매모호한 다시곰밀림(Ambiguous Jungle)’이라는 타이틀로 2021년 SS 컬렉션을 준비할 수 있었다. 식품 제조 기업 오뚜기와 협업한 프로젝트로, 오뚜기가 제공한 현수막으로 의상을 제작했다. © 오승준(OH Seungjune) 전통적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첫 번째로 재미있어야 한다. 재미있지 않으면 고통스럽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는 정말 많지 않은가. 나는 스토리텔링을 중시하고, 그래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을 때 작업을 시작한다. 디자인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다음은 실용성이다. 나는 “이 옷을 입고 지금 당장 지하철에 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한다. 지금 내가 안에 받쳐 입은 상의는 네크라인을 한복 저고리처럼 디자인하고, 발열 원단을 써서 만든 기능성 옷이다. 전통적인 모티프와 스타일, 기능성을 접목하는 것이 다시곰 스타일이다. 패션 잡화에 특색 있는 이름을 붙인 것도 재미 때문인가? 가방을 만들어서 ‘놀부백’이나 ‘갓백(Gat Bag)’ 등의 이름을 붙였다. 놀부는 전래 동화 『흥부와 놀부』에 나오는 심술궂은 형인데, 동화책을 보면 정자관을 쓴 모습으로 등장한다. 정자관은 조선 시대 선비들이 평상시에 착용하던 모자로, 여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가방을 제작했다. 그런데 이 가방 명칭을 ‘정자관백’이라고 지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뾰족한 형태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놀부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 같아서 그렇게 지었다. 갓백은 갓 모양을 본떠 만들었기 때문에 그대로 이름을 붙였다. 2음절이라 부르기도 쉽고, 영어 단어 ‘god’도 연상되니 재미있었다. 소금을 담는 포대는 튼튼하지만 물류비로 인해 한 번 쓰고 전량 폐기된다. 이승주 디자이너는 국내 대표적 천일염 생산지인 신안군 비금도에서 버려지는 소금 포대들을 업사이클링해 의상을 제작했다. © JUNG Ji Hoon 전통 복식의 실루엣을 현대인의 체형에 맞게 디자인하는 노하우가 있다면? 한복의 아름다운 부분 중 하나는 자연스럽게 잡히는 주름이다. 그 주름이 체형을 보완해주고 움직임을 편안하게 한다. 그래서 평면 재단이 답이다. 입체 재단으로는 구현이 어렵다. 업사이클링 디자인에서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디자인을 먼저 잡고 그다음에 어울리는 소재를 찾는다. 하지만 업사이클링은 주어진 원단을 가지고 시작한다. 즉 디자인 프로세스가 다르다. 그래서 나는 일단 기상천외한 원단을 찾는다. 어릴 적에 패션 디자이너 경쟁 프로그램인 를 즐겨 봤다. 말도 안 되는 미션이 주어졌는데도 출연자들이 해결해 가는 모습을 보며 쾌감을 느꼈다. 나도 그렇게 챌린지를 한다는 마음으로 임할 때가 있다. 언젠가는 친구 차가 폐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동차 시트 원단을 떼어내 옷을 만든 적이 있다. 폐현수막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이 나온다. 기업들이 행사에서 사용한 현수막의 양도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기업과 연계를 맺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더 뿌듯한 마음이 든다. 해외 박물관들과는 어떤 협업 과정을 거쳤나? 오뚜기와의 협업을 눈여겨본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의 제안으로 뮤지엄 스토어에 몇 가지 제품을 입점하게 됐다. 이후에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과도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다. 내 작업을 흥미롭게 여긴 것 같다. 동대문에 위치한 서울패션허브 봉제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승주 디자이너. 그녀는 전통의 재해석과 업사이클링을 통해 지속가능한 패션을 꿈꾼다. ‘한국적’인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와 비슷한 세대라면 델몬트 오렌지 주스 병을 알 것이다. 옛날에는 주스를 다 마시고 나서 그 병에 보리차를 담아 사용하는 집들이 많았다. 그 병에 보리차를 보관하면 한동안은 보리차 뒷맛에서 희미하게 오렌지 향이 느껴진다. 그게 한국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스라하게 남아 있는 것. 오늘 하루를 사는 데 크게 필요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내 안에 남아 있는 것이 한국적인 것이 아닐까?

문화의 차이를 즐기다

Lifestyle 2025 SPRING

문화의 차이를 즐기다 고베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나리카와 아야(Aya Narikawa) 씨는 오랫동안 아사히신문 문화 담당 기자로 활동했다. 그런 그녀를 한국으로 이끈 것은 바로 한국 영화였다. 그녀는 최근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박사 과정을 마치고, 한국과 일본 양국의 문화를 전파하는 일에 한층 더 힘쓰고 있다. 아사히신문 기자에서 영화 칼럼니스트로 변신한 나리카와 아야 씨가 홍대 앞에 위치한 독립영화관 인디스페이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 달에 4편가량 한국 영화를 감상하는 그녀는 독립영화에도 관심이 많아 이곳을 자주 찾는다. 한 편의 영화를 두 번 이상 관람해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나리카와 아야는 2021년 개봉 20주년을 맞아 재개봉한 한국 영화 < 고양이를 부탁해(Take Care of My Cat) >를 다시 보면서 생각했다.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 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딱 20대 초반 시절의 나와 닮았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이다. 오사카에서 태어나 고치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녀는 일본을 떠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가족과 멀어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나로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나리카와 씨는 가까운 나라인 한국에서 그 바람을 이뤘다. 2002년에는 어학 연수생, 2005년에는 교환 학생으로 서울을 찾았던 그녀는 9년간 기자 생활을 했던 아사히신문을 떠나 2017년 한국에 정착했다. 오랜 시간 그녀를 사로잡은 한국 영화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가교 역할 나리카와 씨는 영화관을 운영했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함께영화 감상을 즐겼고, 어학 연수를 계기로 한국 영화에 깊이 빠져 버렸다. 문화 담당 기자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일본에 방문한 한국 영화인들을 인터뷰하거나 그들의 통역을 도맡기도 했다. 한국어에 능통한 일본인이자 한국 영화 팬으로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갈증이 있었다. “한국 드라마와 K-Pop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는데, 그에 비해한국 영화에 대한 일본 대중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았어요. 일본에서 < 설국열차(Snowpiercer) >가 개봉했을 때 제가 봉준호 감독을 인터뷰했는데, 봉준호 감독이니 기사를 크게 실어줘야 한다고 부탁하자 그게 누구냐고 묻던 아사히신문 데스크의 반응에 실망했던 기억이 나요. 한국 영화를 마음껏 깊이 취재할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직접 탐구를 시작해 보자는 마음으로 한국 유학을 결심했어요.” 주변에서는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학생으로 돌아가겠다는 그녀의 선택에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나리카와 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영화로 배운 한국 나리카와 씨는 자신의 사연에 흥미를 느낀 한국 기자의 제안을 받아 수년째 중앙일보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일본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 문화 이야기를 쓴다. 경기도 일산에 거주 중인 그녀는 부산, 전주, 제천 등 한국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다가 겪은 일에 대해서도 적었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아끼는 지역은 제주라고 한다. 제주도는 자연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상흔도 간직하고 있는 섬이기 때문이다. 최근 나리카와 아야 씨가 한국과 일본에서 펴낸 책들. 그녀는 한국에서 일본 책과 영화를 소개하는 북카페를 운영하는 것이 꿈이다. 그녀는 제주 해변에서 돌고래를 목격한 것도 행복했지만, 일본에서 온 가족들과 함께 4·3평화기념관(Jeju 4·3 Peace Memorial Hall)에 다녀온 일도 뜻깊었다고 한다. 이창동 감독의 < 박하사탕(Peppermint Candy) >(2000)으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처음 접했고, 오멸 감독의 < 지슬(Jiseul) >(2013), 류승완 감독의 < 군함도(The Battleship Island) >(2017), 장준환 감독의 < 1987 >(1987: When the Day Comes)(2017) 같은 영화를 보며 한국 현대사의 맥락을 익힌 그녀는 무작정 역사를 공부하는 것보다 재밌는 영화를 통해 다른 나라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이 더 효과적인 공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덕분에 그녀는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에서 재일코리안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연구소 주최로 ‘재일코리안 영화제’를 개최하며 뿌듯했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2025년 2월, 나리카와 씨는 마침내 박사 과정까지 마치고 대학원을 졸업했다. 박사 논문 주제는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영화 교류 양상 연구(South Korea-Japan Film Exchanges Since the Normalization of Diplomatic Relations)’였다. 한국과 일본의 다양한 매체에 한국 영화와 관련한 글을 기고하고, 방송에 출연해 양국의 문화를 알려온 그녀다운 선택이었다. 이 논문에는 재일코리안 촬영 감독 이병우(Lee Byung-woo), 일본의 한국 영화 배급사 시네콰논(Cinequanon) 대표 이봉우(Lee Bong-woo) 등의 사례도 언급된다. 모두 양국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던 시절부터 활동해 온 인물들이다. 나리카와 씨는 “지금보다 상황이 어려웠을 때 양국 교류에 나섰던 사람들이 택한 방법을 알아가면서 현재의 나도 해낼 수 있으리라는 용기를 얻었다”라고 곱씹었다. 논문 집필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아사히신문 선배 기자와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이병우 촬영 감독의 손녀를 만난 일이다. 재일코리안 영화인들에 관한 기록이 부족해 연구가 쉽지 않던 차에 이병우 씨의 손녀에게 귀중한 자료들을 전달받은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 “기자 생활을 하며 쌓았던 내공 덕분일까요? 제가 만나야 할 사람, 필요로 하는 자료가 있을 때 우연히 제 앞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일들이 한국 생활에도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북카페의 꿈 논문이 무사히 통과된 다음, 나리카와 씨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도쿄에 다녀왔다. 2020년 한국에서 출간된 후 2024년 10월 일본에서도 출간된 저서 『어디에 있든 나는 나답게』의 북토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나리카와 씨가 한국에서 써온 칼럼들을 묶어서 펴낸 책이다. 행사가 열린 공간은 ‘독서가의 거리’로 알려진 진보초의 한국 책 전문 서점 ‘책거리(Chekccori)’였다. 이날 서점 스태프들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양국의 문화를 전파 중인 나리카와 씨에게 근사한 상장을 만들어 선물했다. 상장에는 그녀에게 항상“차이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했던 어머니의 말도 인용되어 있었다. 나리카와 씨는 북토크 자리에서 많은 독자들에게 응원을 받았다. 그녀는 독자들의 질문을 듣고 5년 후 계획을 고민해 봤다고 한다. “‘책거리’의 반대 버전, 그러니까 한국에서 일본 책과 영화를 소개하는 북카페를 운영해 보고 싶어요. 그곳에서 극장에서 개봉하지 못한 독립영화 상영회도 열고 싶고요. 이렇게 말하다 보면 도와주는 사람이 또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리카와 아야 씨가 운영하는 온라인 사이트. 영화 칼럼을 비롯해 신문에 연재하는 기사들과 자신의 일상 이야기를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있다. 자신만의 북카페를 상상하며 미소 짓는 나리카와 씨는 이제 자신을 걱정하던 일본 친구들에게서도 “정말 즐거워 보인다”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녀는 “일부러 즐거워 보이려고 애쓴 적이 없는데도 그런 말을 자주 들어서 신기하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그렇게 얻은 지식을 말과 글로 나누는 동안 자연스럽게 웃는 법을 배운 것은 아닐까? “타지에서의 삶이 어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에요. 그렇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위해 한 발짝 나가본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어요. 한번 해보고 나면 기대한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수 있어요!” 나리카와 씨는 작은 도전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고른 책들이 진열된 공간에서 신선한 일본 영화를 감상할 날이 매우 기다려진다.

삶을 이야기하는 아트 토이

Lifestyle 2025 SPRING

삶을 이야기하는 아트 토이 한국의 아트 토이 신(scene)은 해외에 비해 출발이 늦은 편이지만, 꾸준히 성장하며 발전하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들로부터 꾸준히 러브콜을 받으며 협업하는 작가들도 여럿이다. 올해로 결성 18년째인 핸즈인팩토리(Hands In Factory)도 그중 하나다. 이들은 조형미가 뛰어난 피규어를 넘어 삶을 매개하는 아트 토이 작업을 선보인다. 2008년 결성된 핸즈인팩토리는 한국 아트 토이 신의 1.5세대에 속한다. 업템포(사진 오른쪽), 락쿤, 하종훈(사진 왼쪽) 세 사람이 시너지를 일으키며 팀을 이끌어간다. 이들은 국내외 전시 및 글로벌 브랜드와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작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아트 토이는 창작자의 철학이 깃든 장난감이다. 작가의 세계관과 기획력을 바탕으로 조형화된다는 점에서 단순히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입체화한 피규어와는 차이가 있다. 국내에서 서브 컬처로 치부되었던 아트 토이가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현대 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2000년대 중반부터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는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젊은 소비자들이 신규 컬렉터층으로 등장했고, 온라인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로써 소수의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향유되던 아트 토이 문화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핸즈인팩토리는 국내 아트 토이 분야의 현재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크루이다. 2008년 결성된 이 그룹은 업템포(UpTempo, 본명 이재헌), 락쿤(RocKOON, 본명 박태준), 하종훈(Ha Jong-hun) 세 사람이 함께 이끌어 가고 있다. 이들은 자유로운 스트리트 컬처를 원동력 삼아 한국 아트 토이 신의 새 지평을 활짝 열어가고 있다. 아트 토이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껴 시작했나? 업템포: 우선 평면의 그래픽 디자인을 입체로 만들어 현실 세계로 불러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아트 토이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와 주제를 구현하는데, 이런 점을 젊은 층이 힙하다고 느끼며 열광한다. 아트 토이 문화의 기반이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마치 악보를 읽지 못하는 이들이 기존 질서에 반하는 랩을 만들고, 오늘날 힙합이 전 세계를 관통하는 장르가 된 것처럼 말이다. 아트 토이도 일종의 ‘카운터 컬처’인 셈이다. 또한 아트 토이는 팬들과 소통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의 대표적 캐릭터 ‘러닝 혼즈(Running Horns)’는 ‘Run again and the again’이 슬로건이다. 내 작업을 좋아해 주는 이들에게 “남들 눈치 보지 말고, 당신의 속도대로 꿋꿋하게 달려라”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업템포 작가의 대표 캐릭터는 뿔 달린 초식 동물을 의인화한 ‘러닝 혼즈’다. 최근에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을 캐릭터에 담아내고 있다. 핸즈인팩토리가 작업을 지속해 나가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하종훈: 한마디로 명쾌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아트 토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이유이다. 좋아하기 때문에 힘들 때도, 돈이 되지 않을 때도, 어떤 조건에도 상관없이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창작하는 일 자체가 흥미롭다. 만들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떠오른다. 이것이 꾸준히 창작을 이어올 수 있었던 또 다른 원동력인 것 같다. 각 캐릭터들의 성장과 세계관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는 것 같다. 업템포: 보통 아트 토이 작가들은 캐릭터를 창조할 때 자신이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요소를 투영한다. 내 경우도 과거에는 스트리트 컬처의 반항적 성격을 표현하거나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인형 놀이하듯 캐릭터에 입히곤 했다. 그래서 초기 작품에는 농구 시합하는 청년들이나 래퍼의 모습을 한 러닝 혼즈가 많았다. 최근에는 우편 집배원이나 정비사 같은 새로운 캐릭터가 생겨났다. 시간이 점점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사회적 기준이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멋지게 보이더라. 하종훈: 도마뱀을 모티프로 한 캐릭터 ‘하자드(Hazard)’를 만든 게 2016년이다. 나 역시 당시에는 캐릭터의 외형 묘사에 집중했다. 10년 정도 지난 지금은 캐릭터의 성격을 확장하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데 주력한다. 겉모습이 귀엽다거나 스타일이 좋다는 평가를 들을 때마다 아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도마뱀 사육장을 디오라마로 연출하고 있다. 캐릭터가 살아가는 환경을 구현함으로써 생태계의 공존과 삶의 방식을 강조하고 싶었다. 하종훈 작가의 ‘하자드’는 꼬리가 잘려도 계속 살아가는 도마뱀을 형상화한 캐릭터이다. 그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강인한 의지로 삶을 이어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캐릭터에 반영한다. 북청사자 프로젝트가 뜨거운 관심을 받았는데 어떻게 작업하게 됐나? 업템포: 우리는 러닝 혼즈와 하자드 캐릭터를 북청사자와 접목해 2023년 12월 공개했다. 스니커즈 브랜드 세븐에잇언더의 협업 제안을 받았을 때 우리는 단순히 그 브랜드의 신발을 신고 있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기존의 스니커즈 디자인에 핸즈인팩토리의 성격을 어떻게 매치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문득 북청사자가 떠올랐다. 거대한 사자 가면을 뒤집어쓰고 여러 사람이 호흡을 맞춰 춤을 추는 북청사자놀음(Bukcheong Saja Noreum, Lion Mask Dance of Bukcheong) 말이다. 그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는 한 번도 한국적인 작업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 기회에 전통 민속놀이를 모티프로 한 작업을 시도해 보고 싶었다. 세븐에잇언더가 북청사자의 털을 신발끈으로 연출해 보자는 제안도 해줘서 더욱 생동감 있는 결과물이 탄생할 수 있었다. 2023년 말, 핸즈인팩토리가 스니커즈 브랜드 세븐에잇언더와 협업하여 제작한 북청사자 캐릭터. 한국의 전통 민속놀이인 북청사자놀음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했다. 핸즈인팩토리 제공 한국은 아직 아트 토이 마켓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아쉬움은 없나? 업템포: 지금 우리나라에는 아트 토이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플랫폼이나 채널이 없다. 아트페어에 참여하거나 전시회를 개최할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이 개인 웹사이트나 소셜미디어, 온라인 스토어에서 작품을 거래한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중개자가 개입되었을 때보다 구매자와 작가가 더 직접적으로 교류하고 친밀감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대량생산이 가능한 시장과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아트 토이가 ‘문화’를 넘어 ‘산업’의 단계로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아트 토이의 트렌드는 어떤가? 하종훈: 과거에는 점토가 주된 재료였고, 3D 프린터가 상용화되면서는 대부분 이 방식으로 제작한다. 하지만 근래에는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이루어 낸 상향 평준화의 반향으로 레트로 느낌이 물씬한 수제 아트 토이가 떠오르는 추세이다. 예컨대 나무를 재료로 써서 의도적으로 투박한 느낌을 주는 식이다. 레진을 사용할 때도 조각칼로 디테일을 덧입히는 등 핸드 메이드의 흔적을 남기려고 한다. 하종훈 작가의 또 다른 캐릭터 바인(VINE)은 퇴근길에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음악을 선곡해 듣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핸즈인팩토리 제공 솔로보다 팀으로 활동하는 이점은 무엇인가? 업템포: 혼자 작업할 때는 한계가 명확하다. 스튜디오에서 제작에만 열중하다 보면, 다른 분야에 관심을 두기 어렵고 익숙한 영역에만 머무르게 된다. 하지만 다양한 분야를 전공한 이들이 팀을 이루어 활동하면 지속적으로 새로운 의견을 접할 수 있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피드백을 얻기도 한다. 팀원들에게 아이디어를 얻을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도움도 받으면서 혼자였다면 결코 구현하지 못했을 작업을 해나가기도 한다. 핸즈인팩토리의 올해 계획은? 업템포: 패션 브랜드 뉴에라의 마스코트 캐릭터 ‘팔로(FFALO)’ 디자인을 우리가 했다. 올해 10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컴플렉스콘(ComplexCon)에 뉴에라와 함께 참여할 예정이다. 아트 토이 작가로서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업템포 작가의 작업 공간. 언젠가는 러닝 혼즈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하종훈: 내 작품을 2D나 그래픽으로만 전시해 보고 싶다. 우리끼리 대화하면서 디자인이 정말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데, 오로지 디자인으로만 전시를 꾸려 관객들에게 그 중요성을 전달하고 싶다. 스티커만 몇 백 장씩 있는 전시회는 어떤 모습일지 머릿속에 그려 본다. 스케치 작업을 하고 있는 업템포 작가(왼쪽)와 도색 작업 중인 하종훈 작가(오른쪽). 아트 토이 산업이 발달한 해외에서는 작업 과정을 세분화해 분담하는 경우가 많지만, 핸즈인팩토리는 디자인과 모형 제작, 도색 등 일련의 과정을 모두 각자 혼자서 전담한다.

가족을 맞이하듯 손님을 맞이한다

Lifestyle 2024 WINTER

가족을 맞이하듯 손님을 맞이한다 낯선 도시에서 실패 없는 식사를 하려면 택시 기사에게 물어보라는 말도 있다. 어디로든 이동이 가능한 기사들은 곳곳에 위치한 가성비 좋은 음식점들을 훤히 꿰고 있을뿐더러 시간과 경험을 바탕으로 검증된 리스트이니 신뢰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위치한 ‘감나무집 기사식당’은 맛집에 밝은 기사들의 발길이 밤낮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감나무집 기사식당 주인 장윤수 씨가 손님상에 내 놓을 음식을 서빙하고 있다. 한국에서 기사식당은 말 그대로 기사, 그중에서도 택시 기사들을 위한 식당이다. 기사들을 주 고객으로 맞이하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우선 차를 댈 수 있는 넉넉한 주차 공간이 필요하다. 메뉴는 다양할수록 좋지만, 시간이 걸리면 곤란하다. 직업의 특성상, 새벽이나 밤중에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저렴한 가격, 푸짐한 양, 변함없는 맛이 더해져야 한다. 365일, 24시간 열려있는 식당 감나무집 기사식장의 주인인 장윤수(張倫秀) 씨의 하루의 시작은 매일 다르다. “새벽부터 나올 때도 있고, 시장을 가는 날이면 좀 늦을 때도 있고. 시간을 정해두고 일을 하지는 않아요. 집에서 잠시 쉴 때도 모니터로 가게를 수시로 들여다봐요. 모니터링하다가 손님이 많다 싶으면 만사 제쳐두고 냅다 뛰어가죠.” 한국의 기사 식당은 주차장 구비, 푸짐한 한 상, 빠른 회전 등이 특징이다. 주차장, 식당, 살림집이 나란히 붙어 있는 구조다. 일과 휴식을 분리할 수 없는 이 구조는 장 씨에게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집이 가까워야 통제가 돼요. 바쁘다고 호출하면 금방 갈 수 있으니까. 24시간 전천후지.” 한 번에 70여 명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은 점심식간이면 순식간에 만석이 된다. 연중무휴, 24시간 영업 중인 감나무집이 문을 연 건 25년 전이다. “다른 데서 한정식집도 하고, 갈빗집도 했는데 잘 안됐어요. 다 털어먹고 집으로 들어왔지. 여긴 우리 집이니까. 처음에는 함바집(건설 현장에 임시로 지어 놓은 식당)을 했어요. 일꾼들이 일을 일찍 시작하니까 우리도 새벽 장사를 했는데 그러다 보니 근처를 오가던 택시기 사들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 사람들이 더 늦게까지 장사하면 좋겠다고 해서 24시간 문을 열기 시작한 거죠.” 언제 찾아가도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데다 값은 저렴하고 음식은 맛있다. 국과 반찬도 매일 바뀐다. 당연히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근처에 기사식당이 많았는데 순댓국, 설렁탕 같은 단일 메뉴만 있었어요. 우리는 백반집이었지. 당시 기사들은 대부분 형편이 좋지 않고 맞벌이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일하다 보면 집에서 밥을 못 챙겨 먹으니까, 집밥이 그리웠겠죠. 사 먹는 음식은 혼자 먹기도 어렵고, 비싸기도 했으니까요. 여기 오면 미역국, 된장국, 콩나물국처럼 집에서 늘 먹는 국과 반찬이 있으니까 좋아하더라고요.” 집에서 먹던 음식 그대로 장윤수 씨의 고향은 충청도이다.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대가족 속에서 살았다. 농사를 크게 짓느라 집은 언제나 일꾼들과 가족들로 북적거렸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할머니와 어머니는 늘 주방에서 밥을 짓고, 김치를 담그고, 나물을 무쳤다. “맨날 다듬고 무치고, 그거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어요. 친구들이 놀러 오면 배추 뽑고 오이 따서 잘라보고 무쳐보고 짜다, 싱겁다, 이거 넣어보자, 저거 넣어보자면서 놀았죠. 국물 내고 밀가루 반죽해서 칼국수도 만들고…. 어른들이 먹어보고 맛있다고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어요. 엄마가 가서 공부하라고 혼내면 도망 다니고…. 재미있는 게 따로 있는데 공부가 되겠어요? 나는 요리사하고 음식 장사 하련다, 그거 하면서 재미있게 살련다, 생각했죠.” 집에서 해 먹던 음식 그대로 만들어 손님에게 내놓는다. 강원도에서 농사지은 콩으로 된장도 직접 담근다. 감나무집의 인기 메뉴인 돼지불백과 오징어볶음 “기사들에게 빨리 내놓을 수 있는 음식, 그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 저렴하지만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뭘까 하고 연구 많이 했어요. 그래서 나온 게 돼지불백이죠.” ‘돼지불백’ 즉 ‘돼지불고기백반’은 이곳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이다. 메인 메뉴인 돼지불고기를 푸짐하게 쌈 싸 먹을 수 있게 상추, 배추같은 야채도 함께 낸다. 여기에 밑반찬 서너 가지와 계란프라이, 잔치 국수가 쟁반에 함께 나온다. 밥이 가득 담긴 밥솥이 식당 한쪽에 있어 추가로 주문하지 않아도 밥을 양껏 먹을 수 있다. 메인 메뉴인 돼지불고기를 제외한 나머지 반찬과 국 등도 리필할 수 있다. 식사 후에는 자판기의 무료 커피와 건빵으로 입가심도 할 수 있다. 연말에는 택시 안에 놓아둘 수 있는 작은 달력을 만들어 나눠준다. “전에는 눈대중, 손대중으로 내가 간을 보면서 만들었는데, 우리 아들이 군대 가기 전에 내 레시피를 다 문서로 만들었어. 옛날 맛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거지.” 레시피와 일일 판매량은 ‘일급비밀’이다. 집 같은 식당, 가족 같은 손님 이전에는 감나무집을 찾는 손님은 단연 기사들이 많았는데, 요즘엔 일반인들의 비중이 훨씬 많다. 다양한 반찬을 맛볼 수 있는 백반집이 점점 사라져 있는 요즘, 집에서 해 먹는 것보다 가성비 있게 즐길 수 있어 젊은이들이나 아이가 있는 가족들도 많이 찾는다. 또 한국의 집밥을 체험해 보고자 하는 외국인 여행객들도 많이 찾는다. 장윤수 씨의 하루는 손님이 많은 때와 적은 때로 나뉜다. 매일 새벽 시장을 봐서 가게로 온다. 바쁜 아침 시간에는 식사를 거르고 손님이 뜸해지는 오후 두 시경에 점심을 먹는다. 세 시부터 일곱 시까지는 가능하면 휴식을 취한다. 휴대전화를 잠깐 들여다보고 모자란 잠을 보충한다. 주말 저녁 시간이 제일 바쁘다.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손님의 행렬이 새벽까지 이어진다. 주방과 홀을 오가며 손님들의 상을 살피면서 부족한 것은 채우고 필요한 것은 가져다준다. 어떤 걸 잘 먹는지, 무엇을 남기는지 체크하여 더하고 덜할 반찬을 정한다. 밤 열 시쯤 늦은 저녁 식사를 한다. 최근에는 택시기사뿐만 아니라 집밥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 한국의 집밥을 체험해보고자 하는 외국인 등 다양한 손님이 24시간 방문하고 있다. 평일에는 새벽 한 시쯤 식당을 나서지만 주말에는 새벽 서너 시가 되어서야 손을 털 수 있다. 남편은 함께 장을 보고 바쁜 시간이면 주차장도 관리한다. 엄마를 닮아 요리를 좋아하는 아들은 든든한 동지가 되어 함께 일한다. 일일 2교대 또는 3교대로 일하는 직원은 스무 명이 넘는데 십 년 넘게 일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모두가 가족이고 ‘한집에서 함께 살며 끼니를 같이하는’ 식구이다. 집밥을 먹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까지. 돼지불백, 순두부찌개, 생선구이 세 가지로 시작한 메뉴는 이제 열 가지로 늘었다. 다양한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기사들을 위해 줄기차게 연구한 결과물이다. “후회는 안 해요. 지금도 요리하는 거 좋아하고,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 그렇게 행복해요. 여기에 밥 먹으러 오는 이들도 나한텐 식구나 다름없어요. 가족 밥 해 먹이는 일이 이렇게 좋아. 난 피곤한 줄도 모른다니까.” “돼지불백 하나요!” 성미 급한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앉기도 전에 외친다. 장윤수 씨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번진다.

LP로 맺어진 인연

Lifestyle 2024 WINTER

LP로 맺어진 인연 커티스 캄부는 모험심으로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대학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오게 되었다. 12년 후 그는 자신이 두 개의 음반 레이블을 운영하고, 한국의 유명 뮤지션 박지하와 결혼하여, 중고 레코드 가게 두 곳을 운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울 마포구 상수역 근처에 위치한 두 번째 빈티지 음반 가게 모자이크 웨스트에서 음반을 듣는 커티스 캄부.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에는 스포티파이, 애플뮤직, 유튜브 뮤직 등의 플랫폼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손쉽게 스트리밍할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LP 앨범이 다시 유행하고 있으며, 그 추세는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레코드산업협회에 따르면, 세계 최대 규모의 음악산업을 보유한 미국에서는 지난 해 LP 판매량이 CD 판매량을 앞섰다. 글로벌 팝 스타부터 한국 현대 음악가까지 많은 아티스트들이 LP로 앨범을 발매하고 있으며, 젊은 층이 LP 구매를 주도하고 있다. 서울에서 두 개의 빈티지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커티스 캄부 씨에게는 이러한 트렌드가 낯설지 않다.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난 그는 17살에 고향을 떠나 파리로 갔다. 이후 전 세계를 돌아다니기로 결심하면서 뉴욕, 도쿄 등을 제쳐놓고 가장 낯선 도시인 서울을 택했다. 캄부 씨는 2012년 한국에 도착해 교환학생 과정을 마친 후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그는 음악 덕분에 자신의 사업적 감각을 발견하게 되었다. 음악 애호가로서 몇 년 동안 중고 음반 업계 사람들과 인맥을 쌓으면서 그의 음반 컬렉션은 점점 늘어났다. 2020년에는 광희문 근처 신당동 뒷골목에 자신의 첫 번째 빈티지 레코드 숍인 모자이크를 오픈했다. 신당동 일대가 유명세를 타기도 전이었다. 첫 매장이 성공을 거두자 그는 온라인 판매 사업을 시작했고, 지난해 홍대 근처에 두 번째 오프라인 매장을 오픈했다. 재능은 있지만 해외에 판매 채널이 부족한 국내 아티스트들을 알리고 싶어서, 브레인댄스레코즈를 통해 한국 일렉트로닉 아티스트의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또한, 대한일렉트로닉스를 만들어 오래된 음반을 재발매하거나 국내 아티스트의 새 앨범을 발매했다. 그는 이 앨범에 대해 “세월의 흐름에 잊힐 뻔했다가 구해낸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매장도 관리하고, 벼룩시장에서 레코드를 찾고, 매주 사무실에 입고되는 수천 장의 레코드도 분류하느라 바쁘게 보내지만, 여유가 있을 때는 그의 오랜 취미인 디제잉을 즐기기도 한다. 음악은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나? 어렸을 때 어머니가 LP판과 CD를 가지고 계셔서 항상 음악을 찾았다. 어머니는 친구들이 준 믹스 테이프를 차 안에서 들으시곤 했다. 소울을 특히 좋아하셨고, 디페쉬 모드, 더 휴먼 리그 같은 영국 신스팝을 많이 들으셨다.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가 있는지? 젊었을 때는 힙합을 많이 들었다. 집에서는 주로 빅 웨더, 마빈 게이, 샤데이 등 정통 소울 음악을 즐겼다. 그러다 사이키델릭 록 장르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이것저것 다양하게 들었다. 6개월에서 1년 정도 한 장르만 듣다가 다른 장르로 넘어가곤 했다. 한국에 왔을 때는 아방가르드, 실험 음악, 일렉트로닉 음악 등 다소 특이한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에 머무르게 된 계기는? 콕 짚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사회에서 나의 역할을 찾았다랄까. 한국의 음악 산업은 블루오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름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돕고, 사람들은 나에게 도움을 준다. 나만의 방식으로 사회에 녹아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정착하게 되었다. 졸업 후에는 어떤 일을 했나? 현대카드에서 스페이스 마키팅팀에서 일했고, 이후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로 부서를 옮겨 부매니저로 일했습니다. 어떻게 음반 레이블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주변에 해외 발매를 할 만한 수준의 아티스트들이 있었지만, 인맥이 없어서 해외에서 음반을 발매하지 못하고 있었다. 메이저 회사에는 인맥이 있는 분들이었지만, 언더그라운드의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나는 배급사나 음반사 대표들을 꽤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음반을 발매 및 배급하기로 결정하고 진행하게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나에게 최고의 프로젝트는 퓨어디지탈사일런스(PDS)라는 밴드였다. 정말 실력이 좋은 친구들이었는데, 내가 그들을 만났을 때는 콘서트를 쉰 지 한참 됐을 때였다. 여전히 소음 실험을 하는 두 명의 남자들만 남아있었다. 그래서 밴드를 다시 모아 웰메이드 앨범을 발매하게 되었다. 앨범은 한 학생이 1990년대 후반 퓨어디지털사일런스 밴드에 대해 만든 아마추어 다큐멘터리를 리마스터링한 것이었다. 전부 영어로 번역하고 프로젝터를 구해 20년 만에 처음으로 라이브로 상영했다. 정말 많은 분이 찾아주셔서 전 좌석 매진을 기록했다. 큰 모험이었지만 나에게는 인생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다 . 해외에서의 반응은 어땠나? 많은 분들, 특히 재미교포들로부터 감사하다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한국어가 유창하진 않았지만, 반응은 한결같았다. 자신에게 한국적인 정체성이 있다고 느끼고 있지만, 한국에도 비주류 문화를 함께 즐기는 커뮤니티가 있기를 바랐다는 것이었다. 어떤 계기로 빈티지 레코드 샵을 운영하게 되었는지? 원래는 퓨어디지탈사일런스의 2집 앨범을 발매하려고 했지만, 당시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배송비가 문제였다. 배급사에 보내면 손해가 막심할 것 같았다. 현대카드에서 이직하고 사회통합프로그램을 통해 거주 비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소소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몇 백만 원씩 투자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비자가 나온 후에는 지금의 빈티지 레코드 숍인 모자이크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서울 중구 신당동의 오래된 주택가 골목에 있는 모자이크 서울  ⓒ 모자이크 매장 위치로 신당동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신당동에서 멀지 않은 창신동에서 산 적이 있다. 그리고 자리를 빨리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예산이 많이 부족했는데 아내는 광희문 일대가 좋다고 했다. 그래서 부동산 몇 군데를 찾아다니며 물어봤지만, 그들에게서 “없어, 없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나는 나이 드신 분들을 많이 만나봤고,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나만의 기술이 있었다. 그 후 몇 주 동안 비타민 병 음료를 사 들고 부동산에 여러 번 찾아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리가 났다는 연락이 왔다. 직접 가보니 아직 공개 매물로 나오지 않은 곳이었다. 가서 보자마자 느낌이 딱 왔다. 가격도 좋고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모자이크의 인기 비결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다양성과 퀄리티, 그리고 꾸준하게 새로운 앨범을 들여오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대량으로 레코드가 입고된다. 진짜 최고 중의 최고의 음반은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음반들만 들여오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객의 일반적인 연령대는 어떻게 되는지? 꽤 다양하지만, 20대~40대가 대부분이다. 40대는 40~49세까지 다양하다. 그와 직원들은 매장에 진열된 앨범과 책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손 글씨로 메모해 놓기도 한다. 두 매장은 어떻게 차별화되어 있는가? 1호점은 아프리카, 브라질, 레게, 희귀한 그루브(미국 1960~70년대, 소울, 펑크 등) 등 월드뮤직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재즈 음반도 많이 선보인다. 2호점은 좀 더 ‘길거리’ 음악에 가깝다. 힙합, 하우스, 테크노, 디스코, 1980년대 댄스 음악, 뉴욕에서 형성된 다양한 음악들과 얼터너티브 록, 인디, 뉴웨이브, 포스트 펑크, 펑크 메탈, 트래시, 하드록, 록 클래식도 다수 갖추고 있다. 매장을 찾는 손님들이 어떤 경험을 하기를 바라는지 궁금하다. 사람들이 레코드 매장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도서관과 비슷하다. 우리가 세심하게 나눠 놓은 다양한 장르별로 직접 음반을 찾아보고 들으면서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내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현재 함께 일하고 있는가. 5년 전에 만났다. 아내의 앨범을 발매하고 싶었지만 결국 발매하지는 않았다. 아내의 음반사에서 이미 역할을 잘하고 있더라. 아내는 그 분야에서는 꽤 유명인이다. 아마존 MGM 스튜디오에 개봉한 (2023)이라는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기도 했다. 많은 프로젝트에서 협업 제안을 받고 있어서, 해외 작업에서는 내가 영어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주고 있다. 그는 모자이크를 통해 많은 이들이 다양한 음악을 경험해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향후 계획이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 중고 음반 산업이 하나의 비즈니스로서 제대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한국에서는 아직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정식 사업으로 인정받고 국내에 더 많은 매장이 생겨서 젊은이들이 일하고 싶어 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액션의 재구성

Lifestyle 2024 WINTER

액션의 재구성 류승완(柳昇完) 감독의 2015년 블록버스터 < 베테랑 >의 후속작 < 베테랑2 >는 비질란테가 사적 제재를 가하는 과정에서 선과 악의 구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칸 영화제에서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류승완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류승완(Ryoo Seung-wan, 柳昇完)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과 인간 본성을 날카롭게 조명하면서도 대중성을 잃지 않는 연출 스타일을 보여 주는 감독이다. 특히 역동적인 액션 연출과 캐릭터 중심의 강렬한 서사가 돋보이며, 사회적 메시지와 오락성을 조화롭게 결합한다. CJ ENM 제공 류승완 감독은 20년 넘게 한국 영화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액션 영화로 유명한 그는 사회 문제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문제의식을 담아내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 흥행 돌풍을 일으킨 < 밀수 >에서는 평화롭던 바닷가 마을에 화학 공장이 들어서면서 생계를 잃게 된 해녀들이 겪는 사건을 다루기도 했다. 올해는 연쇄살인범을 쫓는 형사들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왔다. < 베테랑 2 >는 추석 연휴 직전인 9월 개봉해 15일 만에 6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한편 전작 < 베테랑 >은 국내 박스오피스에서 9천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리며, 한국 영화사상 다섯 번째로 높은 수익을 거둔 영화가 되었다. 그 인기는 국내를 넘어서, 2019년에는 유명 배우 살만 칸(Salman Khan) 주연으로 인도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미국 영화감독 마이클 만(Miachel Mann)이 또 다른 리메이크작을 준비 중이며, 많은 이들이 기다리는 < 히트 2 > 가 완성되는 대로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 베테랑 >은 2015년 토론토 국제 영화제(TIFF)를 통해 처음으로 해외에 선보였고, < 베테랑 2 >는 올해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에 초청받아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그동안 칸 영화제에는 다수의 한국 영화가 공식 초청된 바 있다. 김지운(金知雲) 감독의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 한재림(韓在林) 감독의 < 비상선언 >, 나홍진(羅泓軫) 감독의 < 황해 >, 박찬욱(朴贊郁) 감독의 < 아가씨 >, 윤종빈(尹鍾彬) 감독의 < 공작 >,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2019년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봉준호(奉俊昊) 감독의 < 기생충 >이 있다. 류승완 감독은 2005년 권투 영화 < 주먹이 운다 >로 감독주간에 초청받아 칸 영화제에 데뷔했다. 지금은 유명 스타가 된 동생 류승범(柳昇範), 그리고 2004년 칸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인 박찬욱 감독의 < 올드보이 >로 전 세계 관객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한국 영화의 아이콘 최민식(崔岷植)이 함께 출연한 작품이다. 류승완 감독의 초기작 중 하나인 < 주먹이 운다(Crying Fist) >(2005)는 왕년의 복싱 스타이자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였던 주인공이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세련된 테크닉과 액션을 배제하고, 인물들의 내면과 감정에 중점을 둔 영화이다. 용필름(Yong Film) 제공 전편 < 베테랑 >에서는 황정민(黃晸玟)이 거침없고 화끈한 형사 역을 맡아, 부패하고 사디스트적인 재벌 3세를 잡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아인(劉亞仁)이 재벌 3세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유머와 강렬한 액션, 사회적 불평등과 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관객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 베테랑 2 >에서는 오달수(吳達秀), 장윤주(張允柱) 등 전편에서 감칠맛 나는 연기를 펼쳤던 배우들과 황정민이 다시 호흡을 맞췄다. 여기에 정해인(丁海寅)이 강력 범죄 수사대에 새로운 멤버로 합류한다. SNS에서 범인의 정체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전 국민을 혼란으로 몰아넣는 가운데, 주인공 형사와 그의 팀원들은 수사 방법과 논리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류승완의 최신작 의 한 장면. 2024년 9월 개봉한 이 영화는 전국적으로 750만 명이 넘는 누적 관객수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CJ ENM 제공 2005년과 비교해 이번 칸 영화제 경험은 어땠는가? 19년 전에는 뤼미에르 대극장을 멀리서 바라보는 아웃사이더였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때는 훨씬 더 어렸고, 모든 것이 신선하고 새롭고 재미있고 흥미롭게 다가왔다. ‘나도 언젠가는 여기에서 내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인사이더가 되어, 내 영화가 상영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또 다른 의미 있는 변화는 한국 영화에 대한 인식이다. 19년 전만 해도 한국 영화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객석이 꽉 차지도 않았고, 인터뷰 요청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액션 영화에 매료된 계기는 무엇인가? 학교에 다니기 전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나는 충청남도 아산(牙山)이 고향인데, 대도시는 아니지만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부터 홍콩 영화 등 아시아 작품까지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었다. 특히 그 시절 나는 홍콩 무술 영화와 멋진 배우들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액션 배우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뼛속까지 영향을 주었고, 동작과 제스처를 포착하는 예술로서의 영화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액션에 대한 나의 접근법도 진화했다. 지금의 나에게 ‘액션’은 단순한 신체 동작이나 바디 랭귀지가 아니다. 캐릭터의 진화, 심리, 사건의 전개, 스토리에 따라 바뀌는 관객의 생각과 기분까지 담고 있는, 그 이상의 것이다.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 (2006)는 무술 감독이자 액션 배우인 정두홍(Jung Doo-hong, 鄭斗洪)과 함께 감독 자신이 주연으로 직접 출연한 영화다. 와이어에 의존하지 않은 맨몸 액션의 효과가 극대화된 작품이다. ⓒ 씨네21 < 베테랑 >의 성공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9년이 지나 < 베테랑 >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든 이유가 궁금하다. 1편의 성공은 정말 기대 이상이었고, 솔직히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처음에는 내 스타일에 충실한 장르 영화를 만들어 국내 관객들에게 탈출구 같은 재미있는 영화를 선보이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영화 속 사건과 유사한 사회적 논란이 불거지면서 흥행에 성공했다. < 베테랑 >을 촬영하면서 인물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펼쳐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사실 1편의 성공 때문에 같은 소재로 바로 뛰어들기가 쉽지 않았다. 1편에서는 선과 악에 대한 묘사가 너무 도식화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명료한 구분이 성공 요인이었을 수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피상적으로만 다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의 정의 실현 방식은 복잡한 현실의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 현실에서는 선과 악의 경계가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다. < 베테랑 >의 흥행 이후 그 뒤를 잇는 다양한 국내 영화와 드라마가 나오고 성공을 거두면서, 나는 전작을 답습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간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그중에는 2021년 아카데미 영화상에 한국 영화 출품작으로 선정된 정치 스릴러 < 모가디슈 >도 있었다. 9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새로운 방식으로 < 베테랑 >을 다시 선보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3년 개봉작 < 베를린(The Berlin File) >은 국제적인 음모에 휘말려 서로를 쫓은 이들의 추격전을 그린 영화다. 완벽한 캐스팅과 창의적 액션, 밀도 높은 스토리 등으로 한국 액션 영화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류승완의 동생이기도 한 배우 류승범(Ryoo Seung-bum, 柳昇範)은 류 감독의 페르소나로 불린다. ⓒ 씨네21 속편에서 논란이 된 ‘박선우’는 어떤 인물인가? 의도적으로 캐릭터와 스토리에 논란의 여지를 두었다. 어떤 반응이든 관객들이 그들 자신의 반응을 보여주길 바랐다. 관객들이 어떤 논란에 대해 개인적인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은 관객이 그 논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의도한 바가 바로 그것이다. 홍콩의 대표적인 영화 감독 조니 토에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몰입감 있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굵고 짧게 대답했다. “주인공이 실수를 해야 한다”는 아주 마음에 드는 답변이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사적 제재를 가하는 사람은 결국 벌을 받는다. 류승완의 영화에서는 이것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닌 듯하다. 흥미로운 지적이다. 내 영화에서 실제 주인공은 박선우가 아닌 서도철 형사다. 서도철이라는 인물의 장점이자 박선우와의 차이점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 있더라도 자신의 임무에는 충실하다는 점이다. 범죄자라도 일단 목숨은 살리고 보는 인물이고, 그것이 서도철에게는 진정한 정의다. 박선우를 전통적인 빌런으로 묘사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정의에 대한 두 가지 다른 개념, 그리고 그사이의 갈등을 탐색하고자 했을 뿐이다. 정의(正義)는 관점과 역사적 맥락, 적용 방식에 따라 다르게 정의(定義)된다. 따라서 절대적인 정의나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본다. 감독이 관객에게 특정한 메시지를 강요하는 것보다는 관객 스스로 자신의 가치관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2편의 스토리는 어떻게 달라졌나?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옛날이 더 편하고 쉬웠고 현재가 제일 힘들다는 인식이 항상 있다. 자신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나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인생은 수월하고 다른 곳이 더 편안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결국 누구나 똑같다.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발전의 속도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 베테랑 > 1편이 개인보다는 사회와 시스템 전체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2편은 사회 전체적인 구조에서 벗어나 개인의 이야기를 주로 다뤘다. 예를 들어, 서도철의 아내가 베트남 여성과 아이들을 돕는 장면이 있다. 공무원이 아닌 일반인의 모습이다. 아무리 절망적인 사회에서도 한 사람만이라도 깨어 있고 자각하고 있다면, 희망의 씨앗은 이미 거기에 있다. 인류를 구하겠다며 말만 거창하게 늘어놓는 정치인보다는 가족, 친구, 동료를 돌보며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더 큰 희망이 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여론의 영향력이 바뀌었다고 보는가? 한국 사회에는 연대감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한국만의 독특한 지리적 여건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육로를 통해 다른 나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반면,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다소 단절된 느낌이다. 한국인이 해외로 여행하려면 비행기나 배를 타야 하고, 육로로 국경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게다가 남과 북이 분단되어 있어, 섬나라나 다름없이 고립되어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함께 뭉쳐야 했기 때문에 강한 연대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상황이 다르다. 인터넷과 SNS 덕분에 기성 세대에 비해 전 세계와 훨씬 더 많이 연결되어 있다. 해외에 있는 사람들과 쉽고 빠르게 소통할 수 있어 뛰어난 글로벌 감각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 세대에서는 공동체 의식이 강했지만, 이제는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유대감은 여전히 강한 편이지만, 젊은 세대들의 글로벌 커뮤니티 참여가 확대되면서 변화하고 있다. < 베테랑 3 > 제작 가능성은? 현재 첩보 액션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러시아 국경 근처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파헤치는 남북한 비밀 요원들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 베테랑 3 >에 대해서는 배우들과 논의 중이다. < 베테랑 2 >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에 따라 후속편 제작을 검토할 예정이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 밀수(Smugglers) >(2023)는 밀수의 세계에 빠진 해녀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영화다. 몰입감 높은 연출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시대 배경을 잘 살린 미술이 호평을 이끌어 냈다.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NEW)

누구나 그리고 즐기는 민화의 즐거움

Lifestyle 2024 AUTUMN

누구나 그리고 즐기는 민화의 즐거움 과거 민화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민화 수집가나 연구가들이 등장하고 민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화가들의 작품이 주목 받으며 관심이 높아졌다. 최근에는 취미로 민화를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고, 공모전, 아트페어, 갤러리를 중심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민화 강사 신상미 씨는 취미로 시작했던 민화의 매력에 빠져 지금은 민화를 배우고 싶어 하는 이들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다. 직장인에서 민화 강사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신상미 씨. 열의에 가득 찬 수강생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이 공간의 이름은 모리화(毷離畫)이다. 번민 모, 떠날 리, 그림 화 즉 ‘일상의 근심을 떠나 보내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민화’를 배운다. 민화는 조선시대 때 집안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한 실용화이다.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을 위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이라는 의미에서 ‘민화’로 불린다. 한 겹 한 겹 색을 쌓다 신상미(申湘媄) 씨에게는 두 종류의 ‘날’이 있다. 수업이 있는 날과 수업이 없는 날. 일주일 중 사흘은 수업이 있고, 사흘은 없다. 나머지 하루는 ‘배우는 날’이다. 수업이 있는 날에는 7시쯤 일어나 중학생인 딸을 학교에 보낸 후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작업실로 간다. 경복궁 근처에 있는 21평짜리(69m²) 오피스텔로,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처음에는 집에서 동네 분들 모아놓고, 돈도 안 받고 가르쳤어요. 본격적으로 수업을 해보자 마음먹고 일 년 전쯤 작업실을 얻었어요. 경복궁 근처라 임대료는 비싸지만, 그 덕분인지 전국에서 배우러 와요.” 작업실에 도착하면 전기차를 충전시켜 놓고 강아지들과 산책을 한다. 이후 작업실로 돌아와 작업용 앞치마를 메고 화분에 물을 준 다음 수업 준비를 한다. 첫 수업은 오전 10시 30분에 시작해 3시간을 꽉 채우고 끝이 난다. “처음에는 책상 다섯 개를 놓고 시작했어요. 지금은 여덟 개가 되었죠. 한 클래스에 8명 정도 들어오시고, 총 여섯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어요. 자리가 나면 들어오려고 대기하고 있는 분들도 많아요.” 민화는 전공자, 비전공자의 차이가 별로 없다. 밑그림이 있어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골라 채색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추어도 쉽게 시작할 수 있고 결과물도 좋은 편이다. 신 씨의 수강생들이 그린 작품들. 같은 밑그림이라도 그리는 이의 취향과 선호하는 색 등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로 완성된다. “민화는 가루 물감을 아교로 개어 한 겹 한 겹 색을 계속 쌓아가는 작업이에요. 한 작품 완성하는 데 몇 개월씩 걸리는데, 명상하듯이 천천히 하다 보면 계속하고 싶어지는 매력이 있어요.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문화죠. 다들 재미있게 다니세요.”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이 없어도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난다. 일상의 소소한 근심을 까맣게 잊고 온전히 몰두하는 시간이다. 밥 먹고 그림만 그렸다 민화 강사가 되기 전, 신상미 씨는 20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다. 대기업에서 벽지, 바닥재, 가구 필름 등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였다. “2000년 초반, 컬러와 패턴 등 디자인이 다양한 장판(壯版 한국의 주택에서 방바닥에 까는 PVC로 된 시트) 시장이 어마어마했어요. 장판에 민화 나비를 넣어보고 싶어서 민화 작가를 소개받았어요.” 그것이 처음 만난 민화였다. “직장을 정말 열심히 다녔어요.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일요일에도 일을 했죠. 그러다가 4년 전쯤 아이가 아파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어요. 수십 년 동안 매일 하던 일을 갑자기 안 하게 되니 스트레스가 컸어요. 몸도 마음도 엉망이었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어디 가서 꽃이라도 그리자’ 하고 집 앞 공방을 찾아갔어요. 그때부터 민화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재미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정말 밥 먹고 그림만 그린 나날이었다. 한 곳에서 그릴 수 있는 민화가 한계가 있다 보니 화실을 서너 군데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그렸다. 그러다 보니 실력이 늘어갔다. 남들이 10년 걸려 배울 걸 2~3년 만에 익혔다. 어느 순간 병풍 하나 정도는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병풍 그리기를 시작했다. 1년쯤 걸리는 작업을 3개월 만에 끝냈다. 그때 그린 병풍으로 ‘제 15회 대한민국 민화공모대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 정도면 화실을 차려도 될 것 같아 작업실을 열고 수강생을 받기 시작했다. “저는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안 맞는 사람이더라고요. 뭔가를 시작하면 몸이 상할 정도로 몰두해요. 칭찬받고 싶고, 잘하고 싶고. 그림을 시작하면서 활력이 생기고 아이를 돌볼 시간도 생겨서 아이도 저도 건강해졌어요.” 빠른 시간 안에 민화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힌 이유 중 하나는 직장생활 때의 경험이었다. 벽지, 바닥재, 가구 필름 등을 디자인하면서 빨강, 노랑, 파랑으로 색을 조합하는 작업만 20년을 했다. “제가 색을 만드는 데 특화되어 있었던 거죠. 민화는 정해진 색이 없어요. 같은 그림이라도 작가마다, 공방마다 색이 다르죠. 여러 색을 실험해 보고 칠해보면서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는 거예요. 오방색(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청색, 흰색, 적색, 흑색, 황색)을 화려하게 써야 민화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간색’이라고 불리는 중간색을 적극적으로 쓰는편이죠. 오방색은 한옥에는 어울리지만, 현대적인 인테리어와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제가 출품한 병풍도도 출품작 중 제일 어두운 그림이었어요. 요즘은 톤 다운된 노란색, 겨자색에 꽂혀 있어요.” 매주 화요일은 민화 명장 스승님께 전통 민화 그림을 배우러 간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1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듣는다. “시상식 날 원로 선생님들께서 앞 줄에 앉아 계셨는데, 아빠랑 너무 비슷하게 생기신 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분한테 가서 ‘저 좀 받아주세요’ 했어요. 그림 속 꽃 하나, 나비 하나에도 다 의미가 있거든요. 그리다 보면 알고 싶어져요. 그래서 책도 많이 읽고 수업도 듣는 거죠. 수업 중간에 밥도 먹고 막걸리도 한잔하면서 선생님께 수업을 받고 있어요.” 어설픔도 맛이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작업실에 나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여기서 제 작업도 해야지 싶었는데, 점점 회사처럼 되다 보니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져요. 그래서 개인 작업은 집에서 해요. 그런데 이제는 화실 이름도 걸려 있고, 제가 가르치는 사람이 되니 그림에 힘이 들어가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그림 그리는 것이 예전만큼은 재미가 없어요. 회원들 그림 봐 드리고, 그 그림들이 점점 나아지는 걸 보는 게 훨씬 좋아요.” 수강생은 주로 40~50대 여성들이다. 작업대에 그림과 재료를 잔뜩 펼쳐놓고 수다를 떨며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인다. 그렇게 세 시간 동안 스트레스를 날린다. 민화는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나오는 그림이다. 그래서 전공자, 비전공자 할 것 없이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문화라고 말한다. “혼자서 작업을 하면 그야말로 무념무상이에요. 쉬는 날에 종일 미적거리다가 저녁에 시작할 때가 많은데 정신차려보면 새벽이에요. 저희 엄마가 70대인데 엄마도 제 수강생이에요.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고, 아마추어의 어설픔도 민화의 맛이에요. 저희 화실은 아직 회원전을 연 적은 없지만, 회원전을 열면 작품도 절 팔린다고 하더라고요.” 수강생들의 즐거움이 신 씨의 보람이자, 회사 다닐 때는 몰랐던 기쁨이 된다. 새벽 서너 시까지 그리고, 서너 시간 자고, 하루 아홉 시간 수업이 있는 날에는 한 끼 챙겨 먹기도 힘들지만, 모든 게 감사하다. 열정을 쏟았던 직장생활의 끝에 새롭게 찾은 길이 감사하고, 경력이 짧은 자신에게 배우기 위해 먼 길을 오는 사람들이 감사하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최근 아버지를 위한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겨자색, 그리고 파란색으로요.”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미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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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미용실 일본인 나카야시키 겐타(NAKAYASHIKI KENTA, 中屋敷) 씨에게 미용사는 다양한 사람들과 따뜻하게 소통하는 직업이다. 그가 한국에서 활동한 지는 이제 6년 조금 지났지만, 이 나라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오래도록 같이 나이 들어가길 꿈꾼다. 나카야시키 겐타(NAKAYASHIKI KENTA, 中屋敷 健太) 씨에게 오는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그는 한 번에 한 명의 손님 만을 받는다. 오롯이 그 사람에게 집중하기 위해서다. 겐타 씨의 미용실에선 누구나 주인공이 된다. 동시에 여러 손님을 받는 대신 한 사람씩 예약제로 고객을 맞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두 사람이다. 가족이 함께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는 극소수의 손님에게 자신의 시간을 오롯이 내어준다. 미용실 창밖엔 나무들이 울창하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서울 강남구(江南邱)에 자리하고 있지만, 바깥에 작은 공원이 있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철마다 누릴 수 있다. 고객과 마음을 나누기에 더없이 좋다. “미용사는 누군가와 만나서 가까워지는 직업이에요. 미용실 운영으로 큰돈을 벌기보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좋은 사람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서 한국에 오기 전엔 일본 도쿄의 번화가인 오모테산도(Omotesando 表参道)에서 미용사로 일했다. 그가 고용된 미용실엔 손님이 아주 많았다. 한 시간에 무려 14명이나 커트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밀려드는 고객들을 상대하기 바빠 그는 손님의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게 너무 부끄러웠다. 그가 미용사가 된 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어서였다. 그랬던 첫 마음과 너무 멀어져 있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했어요. 잠을 거의 못 잤죠. 그렇게 6년쯤 일하다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 겨우 스물일곱 살에요. 계속 이렇게 살다 간 죽을 수도 있겠다 싶던 차에 새로운 기회가 생겼어요. 제가 일했던 미용실 부사장님이 한국에서 미용실을 차려보라고 권하셨거든요. 때마침 한국에 관심이 생겼던 터라 별 망설임 없이 날아왔어요.” 한국으로 이끈 한정판 운동화 한 켤레 그게 2018년이었다. 사실 그전까지 그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런 그가 한국에 관심을 품게 된 건 한정판 운동화를 사러 도쿄의 한 매장에 들렀을 때였다. 어느 젊은 남성과 같은 신발을 동시에 집으면서 눈이 마주쳤는데, 머리부터 신발까지 일본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남성이 누구인지는 얼마 뒤 TV를 보다 알게 됐다. K-팝스타 지드래곤(G-Dragon 보이그룹 ‘빅뱅’의 리더이자 싱어송라이터)이 바로 그였다. 미디어에 비친 그는 음악도 패션도 기존의 틀을 모두 뛰어넘고 있었다. 그런 아티스트가 존재하는 나라에 문득 깊은 호기심이 생겼다. “도쿄 오모테산도가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라 여겨왔는데, 그보다 더 앞서나가는 곳이 한국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이후로 우리 미용실에 오는 한국인 손님들을 유심히 봤어요. 일본으로 유학 온 손님도, 일 때문에 건너온 손님도, 하나같이 자기 삶을 멋지게 가꾸는 분들이더라고요. 이런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면 몇 년 안에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겠구나 싶었어요. 직접 가보고 싶어졌죠.”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는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인사말도 모르고 온 그에게 가장 큰 언어 선생님은 다름 아닌 고객이었다. 어학원을 찾아가는 대신 혼자 한국어 교재를 사서 공부하길 선택했지만, 손님들과의 대화 덕분에 그의 한국어 실력은 금세 늘어났다. 서울의 몇몇 동네에서 일하다 3년 전 이곳 도곡동(道谷洞 Dogok-dong)에 미용실을 냈다. 별도의 홍보를 하지 않고도 이전 미용실의 고객이 또 다른 고객을 소개해 줘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이곳의 고객들은 열 살이 안 되는 어린이부터 칠십 대 어르신까지 다양하다. 직업도 제각각이다. 그 덕분에 미용실에 가만히 있어도 드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그를 처음 만난 손님에겐 세번쯤 와줄 것을 권한다. 헤어 스타일, 모발 상태 등에 따라 처음부터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스타일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연을 이어가며 손님과의 합을 맞춰나가는 것이 그에겐 중요한 작업 중 하나다. 한국인의 정(情)에 빠지다 “일본 사람들은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아요. 진심을 알기가 어렵죠. 하지만 제가 만난 한국인들은 거의 모두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더라고요. 그래서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서 편할 때가 더 많아요. 제가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으니까요.” 그는 한국인들을 흥(興) 많고 정(情) 많고 화(火) 많은 사람으로 표현한다. 그 가운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한국인 특유의 정(情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이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는 한국인들이 자기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에 매우 놀랐다. 일본에선 누군가를 함부로 돕는 것이 큰 실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한국인들의 넓은 오지랖(이 일 저 일에 관심도 많고 참견도 많이 한다는 뜻)이 아주 좋다. 따뜻한 마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잘 아는 까닭이다. “일본에선 미용사와 고객이 평생을 함께하는 경우가 많아요. 근데 한국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 문화만큼은 일본의 것을 옮겨 오고 싶어요. 저는 우리 미용실에 처음 오는 고객들에게 지금 당장 손님 마음에 들게 해드릴 순 없다고 이야기해요. 손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함께 만들어갈 테니, 속는 셈 치고 세 번만 와 달라고 부탁하죠. 거의 모든 고객이 그 이야기를 따라줘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대신 그는 손님들이 건네 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매번 최선을 다해 들어준다. 미용사의 자질에는 고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절한 순간에 알맞은 공감을 표시하는 게 그만의 무기다. 고객의 머리를 예쁘게 해 주는 것만큼 고객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에서 그는 큰 보람을 느낀다. 차분하면서도 정돈된 나카야시키 겐타 씨의 성격을 닮은 듯한 미용실 일본에 있을 때보다 훨씬 적은 수의 고객을 만나는데도 그의 수면시간은 여전히 짧다. 새벽 네다섯 시에 잠들고 아침 여덟 시 반쯤 눈을 뜬다. 침대에서 벗어나면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패션 또는 헤어 관련 유튜브를 본다. 업계의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열 시쯤 미용실로 출근해 열한 시에 영업을 시작하지만, 퇴근 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손님들의 예약 시간이 제 각각이라서다. 별도의 휴일이 없는데도 그는 별 불만이 없다. 오늘은 또 어떤 만남을 갖게 될지 기대하는 마음이 그보다 늘 더 크다. 손님들과 같이 나이 들어가는 꿈 그의 고향은 일본 도호쿠 지방에 자리한 이와테현(岩手県 Iwate-ken)이다. 지방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도 일찌감치 대도시에서의 삶을 꿈꿨다. 이왕이면 ‘멋’을 삶의 중심에 두고 싶었고, 만 18세에 도쿄 하라주쿠의 한 미용학교에 입학해 꿈을 향해 출발했다. 그 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는 동안 이자카야 서빙, 콜센터 상담원, 옷 가게 판매원 등 10여 개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그 경험들이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지금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선배에게 물려 받아 17년 째 사용하고 있는 그의 가위 “일본에서도 아직 활동해요. 세 명의 유명 아티스트와 한 팀의 아이돌 그룹을 담당하고 있어서 요즘도 틈틈이 일본에 가요. 그래도 한국에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요. 손님들과 같이 나이 들어가는 게 꿈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한국에서 계속 살게 될 것 같아요.” 그는 선배한테 물려받은 가위를 17년째 쓰고 있다. 모든 것들이 점점 빨라지는 시대에 오래된 가위를 손에 쥐고 오래가는 인연을 꿈꾸며 산다. 자기만의 속도를 지키는 그의 얼굴에 자기다운 행복이 흐르고 있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즐거움

Lifestyle 2024 AUTUMN

우리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즐거움 세이수미(Say Sue Me)는 2012년 결성된 4인조 록 밴드이다. 부산 광안리에서 출발한 이들의 음악은 동시대 한국 록 밴드 음악의 최전선에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제 지역과 국경을 넘어 전 세계 무대를 향하고 있다. 세이수미는 2023년 10월 < 타이니 데스크 코리아(Tiny Desk Korea) >에 출연해 < Old Town > 등 대표곡들을 불렀다. 지난해 8월 출항한 이 프로그램은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NPR 뮤직이 진행하는 <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Tiny Desk Concerts) >의 한국판 버전이다. ⓒ 타이니 데스크 코리아 한반도 남동쪽 끝에 자리한 부산은 서울에서 약 400㎞ 떨어져 있는 국내 최대의 항구 도시이다. 이곳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백화점이라 일컬어지는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Shinsegae Centum City)가 우뚝 솟아 있는가 하면 서민들의 발걸음이 분주한 수산 시장도 있다. 수십만 원대의 코스 요리로 유명한 5성급 호텔이 서울과 제주 다음으로 많은 곳이지만, 저렴한 시장 음식이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 말투와 달리 억양에 높낮이가 약간 있는 부산 말씨를 쓰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록 밴드 세이수미가 있다. 보컬과 기타의 최수미(Sumi Choi, 崔守美), 리드 기타의 김병규(Byungkyu Kim, 金秉奎), 베이스의 김재영(Jaeyoung Kim, 金才永), 드럼의 임성완(Sungwan Lim, 林性完). 네 명의 멤버들은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화요미식회’를 진행한다. 리처드 오스먼의 범죄 소설 『목요일 살인 클럽(The Thursday Murder Club)』에 등장하는 네 명의 주인공들만큼은 아니지만, 이날은 멤버들 사이에 긴장감이 꽤 흐른다. 화요미식회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인기 먹방(mukbang) 프로그램 (2015~2019)에서 따온 이름이다. 저녁 식사로 먹고 싶은 메뉴를 각자 정한 뒤 가위바위보를 통해 결정된 최종 승자가 결정권을 갖는 일종의 회식 배틀이다. 이들은 때로 신경전을 펼치기도 하지만, 모두를 평화로 인도하는 공통적인 선호 메뉴가 있다. 다름 아닌 돼지국밥이다. 세이수미(Say Sue Me)는 부산 출신의 4인조 인디 록 밴드로,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독자적 음악 세계를 펼쳐 보인다. 2012년 팀을 결성해 2년 후 1집 < We’ve Sobered Up >을 발매했다. 그로부터 3년 후에는 영국 레이블 댐나블리(Damnably)와 계약을 맺고 첫 해외 투어를 성공리에 마쳤다. 광안리 서프 록 해운대(海雲臺)와 함께 부산이 자랑하는 대표적 휴양지인 광안리(廣安里) 해수욕장에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작은 동네 골목. 한 건물의 지하 계단을 내려가면 100㎡쯤 되는 작은 공간이 나타난다. 이곳은 세이수미의 아지트이자 연습실, 녹음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DIY 방식으로 운영하는 비치 타운 뮤직(Beach Town Music) 레이블의 사무실이기도 하다. 2012년 결성 이래 세이수미는 지금껏 이 자리를 지켰다. 멤버들은 음악 연습을 하다가 지치거나 뭔가 잘 풀리지 않으면 3분쯤 내리막길을 걸어 바닷가로 향한다. 그러고는 함께 맥주를 마시곤 한다. 그룹명 세이수미는 보컬 최수미의 이름에서 따왔다. 초기에 그들은 주로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펍에서 공연하며 한 명씩, 두 명씩 팬을 늘려 갔다. 그룹명 중 ‘수미(Sue Me)’를 “Sue me”로 읽은 이방인들에게 이들은 꽤 흥미롭게 다가왔을 것이다. 최수미가 쓰는 영어 가사는 문법적으로는 어색했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귀엽게, 한국인들에게는 힙하게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 광안리 밤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조금 지글거리면서도 몽환적이고 청량하기도 한 사운드가 이 밴드의 매력이었다. 누군가는 광안리 앞바다에 ‘서식’하는 이 그룹의 음악에 ‘서프 록(surf rock)’이란 장르명을 붙여 줬다. 하지만 1960년대 미국의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나 딕 데일(Dick Dale)이 구사한 대서양 연안의 서프 록과는 확실히 다르다. 드림 팝(dream pop)이나 슈게이즈(shoegaze)의 꿈결 같은 소릿결, 인디 팝(indie pop)의 속삭이는 듯한 수줍은 태도, 때로는 펑크 록(punk rock)의 무모한 질주감까지 오가는 세이수미의 음악은 한두 가지 장르로 못 박기 힘들다. 터닝 포인트 “2014년 발표한 1집 < We’ve Sobered Up>은 광안리 출신 록 밴드나 서프 록 밴드라는 외부 시선을 어느 정도 의식하며 제작한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는 그때그때 와닿는 메시지와 사운드에 집중하면서 우리만의 음악을 만들고 있어요.” 김병규의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2018년 발매한 2집  < Where We Were Together >는 세이수미의 커리어에 터닝 포인트가 됐다. 수록곡 중 하나인 < Old Town >은 영국의 전설적 싱어송라이터 엘턴 존이 자신의 팟캐스트 ‘엘턴 존의 로켓 아워(Elton John’s Rocket Hour)’에서 극찬해 화제가 됐다. 그리고 세이수미는 그해 월드 투어‘Busan Calling!’을 시작했다. 또한 같은 해에 이들은 미국의 유명 콘서트 프로그램 < Live on KEXP >에 한국 음악가 최초로 출연해 공연했다. KEXP는 워싱턴주 시애틀의 유서 깊은 공영 라디오 방송이다.  이듬해 세이수미는 이 음반으로, 한국의 그래미 어워즈라 불리는 한국대중음악상(Korean Music Awards)에서 인디 밴드로는 이례적으로 무려 5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그중 최우수 모던 록 음반, 최우수 모던 록 노래 부문에서 두 개의 트로피를 수상했다. 올해 6월, 인천 파라다이스시티(PARADISE CITY)에서 펼쳐진 아시안 팝 페스티벌(Asian Pop Festival) 무대에 오른 세이수미. 파라다이스 문화재단(Paradise Cultural Foundation)이 주관한 이 행사는 아시아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뮤지션들 가운데 라이브 공연이 특히 뛰어난 아티스트들로 라인업이 꾸려진다. ⓒ 아시안 팝 페스티벌 해외 음악 팬들 몇 년 전부터 보수동쿨러(Bosudong Cooler)나 해서웨이(Hathaw9y) 같은 부산 지역 밴드들이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세이수미와 함께 합동 공연 무대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부산 신(scene)은 크지 않다는 게 세이수미의 진단이다. 김병규는 이렇게 말한다. “대구가 그렇듯이 부산도 명맥을 유지하는 대표적인 라이브 클럽이 하나 정도 있을 뿐이에요. 서울 홍대 앞처럼 왕성하진 않죠.” 대신에 요즘은 지역과 국경을 넘어 해외 음악 팬들 사이에서 세이수미의 음악이 편견 없이 확산되고 있다. 최수미는 “일본, 중국은 물론이고 멀리 북중미에서도 젊은 팬들이 느는 걸 체감한다”고 전했다. 지난해 투어 마지막 일정으로 찾은 멕시코시티에서는 전체 관객의 약 90%가 20대 젊은 층이었다. K-팝, K-드라마 덕도 있다고 한다. tvN에서 방영된 TV 드라마 < 유미의 세포들(Yumi’s Cells, 柔美的细胞小将) >(2021~2022)이나 JTBC의 < 알고 있지만(Nevertheless, 无法抗拒的他) >(2021) 등에 이들의 음악이 삽입된 것도 해외 팬들을 더 매혹한 계기가 됐다. 최수미는 “영어 작사에 대한 고민이 늘 깊은데, 해외 팬들은 갈수록 한국어 가사에 더 열광하는 분위기여서 놀랍다”고 말했다. 2022년 발매된 정규 3집 < The Last Thing Left >의 컴팩트 디스크.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10개의 곡들이 트랙을 채우고 있다. 최수미가 모국어로 부른 타이틀곡 < 꿈에(To Dream) >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통해 응원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세이수미 제공 2022년 결성 10주년을 기념해 공개한 EP < 10 >의 리미티드 에디션 카세트테이프. 기존 대표곡들을 편곡한 작품들과 함께 요 라 탱고(Yo La Tango), 페이브먼트(Pavement) 등 세이수미가 평소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노래를 커버한 트랙들이 담겼다. 세이수미 제공 수년간 투어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묻자 네 가지 답이 나온다. 김병규는 2018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공연을, 임성완은 2019년 영국 웨일스의 그린 맨 페스티벌(Green Man Festival)을 꼽았다. 김재영에겐 지난해 일본 가고시마의 그레이트 사츠마니안 헤스티벌(The Great Satsumanian Hestival)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최수미는 2018년 첫 유럽 투어 당시 프랑스 소도시 콜마르(Colmar)의 가정집 뒷마당에서 했던 공연을 잊을 수 없다고. “아, 맞다. 폴란드 크라쿠프(Krakow)에서 술고래 아저씨랑 진탕 마셨단 것도요!” 최수미가 기억을 끄집어내자 다른 멤버들이 손뼉을 치며 웃는다. 이들은 폴란드식 만두 피에로기(pierogi)와 함께 그곳의 술 문화를 제대로 체험했다고 한다. 이들의 월드 투어는 일일이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우여곡절이 많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곳은 하나다. 지금 이 자리, 부산 수영구 남천바다로의 비치 타운 뮤직. 인터뷰 말미에 최수미가 이런 말을 던진다. “어떤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을 내놓는 것도 좋겠지만, 그런 것보다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즐거움을 최대한 담아내고 싶어요. 그게 바로 밴드 하면서 사는 거죠.”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보컬과 기타의 최수미(Sumi Choi, 崔守美), 리드 기타의 김병규(Byungkyu Kim, 金秉奎), 드럼의 임성완(Sungwan Lim, 林性完), 베이스의 김재영(Jaeyoung Kim, 金才永). 이들은 자신들의 음악적 정체성이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솔직담백함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동네 사랑방이 되어가는 약국

Lifestyle 2024 SUMMER

동네 사랑방이 되어가는 약국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 그늘처럼 아무 때나 잠시 쉬어가거나 이웃끼리 마음을 나누는 장소를 일컬어 한국인들은 ‘동네 사랑방’이라고 표현한다. 동네 사랑방은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오가며 안부를 묻고 정을 쌓아가기 때문이다. 정초롱(丁초롱 Jeong Cho-rong) 약사가 고향 영월에 차린 그녀의 약국은 도시화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영월에서 작은 약국을 운영하는 정초롱 약사. 그녀의 약국은 약을 구입하려는 손님뿐만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할머니,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 짐을 맡겨놓는 사람들도 오가며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한다. 그녀의 하루는 단순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매우 바쁘다. 휴일인 주말을 제외하면 아침 9시에 출근해서 퇴근하는 오후 6시까지 약국에서 손님들을 만난다. 조금 한가할 때면 틈틈이 피로회복제 같은 상품 스티커나 약국에 붙일 포스터 디자인 작업을 한다. 오며 가며 쉬어가는 곳 약국 안에서 늘 정신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기 일쑤지만 그녀는 안에 있어도 사계절을 오롯이 느낀다. 약국 안 커다란 통유리 바깥으로 나무들이 철마다 옷을 갈아입기 때문이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건 자연만이 아니다. 이 약국에는 잠시 짐을 맡기고 가는 고객들이 꽤 있다. 근처 시장이며 마트에서 장 본 것을 이곳에 둔 뒤 병원, 은행, 군청 등에서 볼일을 보고 오는 단골손님들이다. 그들이 맡겨 둔 장바구니 안에는 지금의 계절을 알 수 있는 채소며 과일이 들어있다. “이것 좀 맡아달라고 말씀하실 때 어머님들 표정이 참 귀여우세요. 이 공간을 편하게 생각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한 마음이에요. 제가 꿈꿨던 모습이거든요.” 약국에는 손님들을 위한 휴식 테이블이 있다. 간식도 비치되어 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쌍화탕(雙和湯 피로 해소와 감기 완화에 좋은 한방 드링크제)과 약과(藥果 한국의 전통 과자), 비타민이나 자일리톨이 함유된 캔디 같은 것들이다. 약이 나올 때까지 잠시 앉아 기다리는 테이블이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손님들도 많다. 근처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를 기다리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갈 버스가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亭子나무, 집 근처에 있는 큰 나무) 그늘처럼, 손님들이 아무 때나 쉬어가며 오가는 이들과 마음을 나눈다. 약사세요 악국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동네 ‘사랑방(舍廊房)’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복약 상담 “단골손님이 대부분이라 방문하시는 손님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 건강도 상담하기도 해요. 되도록 자세하게 설명해 드려서, 우리 약국을 이용하는 분과 그 가족이 좀 더 건강한 삶을 사시도록 돕고 싶어요.” 한국에선 약국과 약사의 역할이 크다. ‘약은 약사에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약국에서 약사의 설명을 듣고 약을 구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병원이나 의원이 많지 않은 시골에선 당장 병원을 가야 할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약국의 역할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숙취 해소, 피로회복제 등 증상에 따라 필요한 약을 묶은 패키지에 직접 디자인한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정초롱 약사. 특히 이곳 영월군(寧越郡)에는 젊은이들보다 노인 인구가 많아 약사의 복약지도도 아주 중요하다. 정초롱 약사는 그 임무에 충실한 약사다. 평소 어떤 불편을 겪는지, 어떤 음식을 즐겨 먹고 어떤 약들을 복용 중인지 꼼꼼히 묻고 답한다. 손님이 잘못 알아들을까 봐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일이 그녀에겐 전혀 번거롭지 않다. 정확한 상담으로 환자의 건강 상태가 좋아질 때마다,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잊지 못할 일들이 많아요. 어느 날은 모자를 쓰고 오신 중년 여성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분이 항암 치료 중인 걸 알게 됐어요. 잘 이겨낼 수 있다는 용기를 드리고 싶어 손을 꼭 잡아 드렸는데 왈칵 눈물이 나더라고요. 당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거라곤 손을 잡아 드리는 것이 전부였는데도, 그분이 정말 고마워하셨던 기억이 나요. 지금은 완치하셔서 건강한 모습으로 약국을 찾아오시고 있어요. 뵐 때마다 애틋해요.” 치매 관련 영양제를 사러 왔던 중년의 여성분도 기억에 남는다. 약을 추천하기 위해 그녀가 이런저런 질문을 건넸더니, 손님의 어머니가 치매를 앓아 곧 요양원에 가신다고 했다. 그날도 그 손님과 같이 울었다. 건넬 수 있는 위로의 말이 없어 마음 아팠지만, 속상한 마음을 나누며 함께 울고 난 뒤 손님이 보여준 미소가 여태 기억에 남아 있다.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같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병을 치료할 순 없지만, 상대방이 다시 힘낼 수 있는 마음을 건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가 경청과 공감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이유다. 고향에서 누리는 행복 영월군은 그녀가 나고 자란 곳이다. 강원도 남부에 자리한 작은 도시로 산과 계곡, 강과 호수가 수려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 눈부신 땅에서 그는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도시의 약학대학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났다가, 2019년 4월 이곳에 약국 문을 열면서 다시 왔다. “대학 졸업 후엔 도시의 약국에서 근무 약사로 2년 반 정도 일했어요. 처방전을 받아 약을 짓는 게 주된 업무였는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밀려드는 처방전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손님들께 약에 대한 설명조차 제대로 해드리지 못했거든요. 어느 날 문득 기계처럼 약을 짓는 것 말고 약 하나를 드리더라도 손님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만의 약국을 열기로 결심한 거죠.” 처음엔 일하고 있던 충주시(忠州市)에 약국을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땅한 자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고심이 깊어 가던 어느 날 영월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30년 넘게 옷 가게였던 지금의 약국 자리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이었다. 시골 약사로 지내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먹었다. 따뜻하게 소통하는 약국을 만들기에 고향처럼 적합한 곳은 없을 것 같았다. 그 예감은 적중했다. 어느 집 딸인지 잘 아는 손님들은 자식 같고 조카 같은 그녀를 진심으로 반겼다. “개업한 뒤 1년이 채 안 돼 코로나19로 난리였어요. 마스크 대란이나 진통제 품절 같은 일들을 차례로 겪으며 힘들었지만, 그 시간을 손님들과 함께 견뎌내면서 더 단단한 유대감이 생긴 것 같아요.” 일상으로 돌아온 요즘, 지난 몇 년과는 다르게 약국에서도 잘 팔리는 약이 달라졌다. 전에는 질병을 치료하는 약이 주로 팔렸다면, 요즘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약의 판매가 크게 늘었다. 면역력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커진 것이다. 그는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건강정보를 기억하고 고객별로 기록도 해둔다. 아는 만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옆집의 수저 개수도 안다’는 우리의 옛말처럼,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웃들의 정보가 쌓여간다. 웃음이 또 하나의 치료제가 되다 약사세요 약국에는 익살스러운 풍경이 곳곳에 있다. 뇌, 눈, 간, 위 등의 장기가 그려진 캐릭터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 캐릭터는 도시에서 근무 약사로 일할 때 SNS(www.instagram.com/yaksaseyo_pharmacy)에 재미 삼아 연재하기 시작한 웹툰 속 주인공이다. 손님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방법을 고민하다, 단발머리 시절의 본인 모습을 캐릭터로 만들어 몸속 장기와 해당 약품을 벽면에 부착했다. 직접 디자인한 스티커도 퍽 재치 있다. 숙취해소제나 피로해소제 등에 손수 그린 캐릭터 스티커를 붙여 판매하니 손님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 그녀는 직접 만든 캐릭터로 SNS에 웹툰을 연재하고 있다. 약국을 열게 된 이야기부터 약국 손님 유형, 약의 사용법 등 다양한 스토리가 있다. © yaksaseyo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영월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에 만화를 연재하고 있어요. 약국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만화에 담고 있죠. 독자들이 제 만화를 보며 잠시라도 웃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다. 손님들과 따뜻한 마음과 공간을 나누고, 그녀를 닮은 캐릭터로 위트를 전하며, 복약상담으로 건강을 책임진 그녀가 약국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 낮에 틈틈이 구상한 디자인 작업과 만화 작업 마무리를 하다 보면 어느새 영월의 하늘이 별빛으로 가득 차 그녀의 밤을 예쁘게 물들인다.

한국 재료로 즐기는 파인 다이닝

Lifestyle 2024 SUMMER

한국 재료로 즐기는 파인 다이닝 셰프인 조셉 리저우드는 한국의 식재료를 사랑한다. 여러 상을 받은 그의 레스토랑은 한식 메뉴의 가능성을 재정의하며, 기억에 남는 경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식의 매력에 빠져 한국에 정착한 뒤 퓨전 한식 레스토랑 에빗을 운영 중인 조셉 리저우드(Joseph Lidgerwood). 그는 전국 각지를 돌며 재료를 채집하고, 새로운 식재료를 탐색하는 일에 진심이다. 14개월 가까이 안정적인 수입이나 일상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한 조셉 리저우드는 제주도 해변에 앉아 있었다. 산소통도 없이 해산물을 채취하는 제주 해녀들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제가 해녀에게 질문을 할 때마다 그녀는 제 입에 성게를 넣어 주셨어요. 그래서 그냥 거기에 앉아 먹기만 했죠. 해녀들이 물질을 끝내고 잠수복을 입은 채로 스쿠터에 올라타 휑하고 가버리는 장면은 제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라며 애정 어린 마음으로 당시를 회상했다. 호주 태즈매니아 섬에서 자란 리저우드는 집 안의 냉동실을 가득 채울 만큼 해산물을 잡을 수 있는 곳에서의 가족 여행을 즐겼다. 그렇지만 냉동실을 가득 채운 해산물과는 달리 그가 평소에 주로 먹는 음식은 고기와 삶은 야채 그리고 으깬 감자였다. “외식은 약 5~6달러를 내고 펍(Pub) 음식을 먹는 것이었고, 그것이 그 당시 저에게는 최고의 ‘파인 다이닝 경험’이었어요.” 햄버거 뒤집기부터 시작해 실력 있는 셰프가 되기까지 리저우드가 십대가 되었을 때, 그는 어머니를 도와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호주 정부에서는청소년들에게 진로 결정을 위한 교류 프로그램을 장려했는데, 그는 여느 친구들처럼 전기기사나 정비사가 되는 것보다 요리사가 되는 것이 멋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첫 직장은 강가에 있는 도시 프랭클린의 고급 카페였고, 그곳에서 햄버거를 굽는 일을했다. 그 후 그는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일했다. 주로 ‘중간에 블루치즈가 들어간 스테이크’ 같은 음식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이전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 직장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스테이크하우스의 셰프 중 한 명이 당시 막 영국에서 돌아왔는데 그에게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은 “지옥 같았지만 보람 있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리저우드가 영국으로 갈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런던에서 그의 첫 직장은 프랑스 요리를 다루는 곳이었고, 그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 필립 하워드가 공동 소유한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인 더스퀘어(The Square)에서의 일이 포함되었다. 그 다음에는 하워드가 공동으로 소유한 또 다른 런던의 아이콘인 레드버리(Ledbury) 레스토랑에서도 일했다. “그 레스토랑의 주방 일은 완전 미쳤어요. 네 시간 자고 일하는 데 적응하느라 오래 걸렸어요. 어떤 사람들은 한달 만에 그만두기도 했어요. 그냥 레스토랑을 떠나는 게 아니라 아예 요리하는 걸 그만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36세인 리저우드는 여전히 당시 레스토랑에서의 경험이 그의 열정, 헌신, 집중력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엄청난 경험이긴 했지만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죠. 그때 사용한 레시피 중 어떤 것도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요. 다만 당시 배운 것 중 여전히 유효한 것은 어떻게 나의 하루를 더 잘 관리하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깨끗하고, 체계적이고, 빠르고, 정확하게 일하는 실력 있는 셰프가 될 것인가 하는 거죠.” 원스타 하우스 파티 2016년, 리저우드는 색다른 프라이빗 다이닝 서비스 론칭 계획을 하고 있는 친구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며 팝업 다이닝 경험을 제공하는 ‘원스타 하우스 파티(One Star House Party)’를 만들었다. 비교적 간단한 요리, 보통 서너 가지의 요리만 제공했으며, 미식계의 최상층을 목표로 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이들만의 방식은 빠르게 열렬한 팬들 만들어냈다. 이벤트가 매번 매진될 정도였다. 이들이 시도한 독특한 지역 중에는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손님이 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승객들이 이층침대에서 네 가지 코스 요리를 먹었던 베트남의 야간열차도 있었다. 한국의 첫 방문 서울에서 열릴 원스타 하우스 파티를 앞두고 그는 제주도를 방문했다. 이는 그가 경험한 첫 한국이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해녀들과 함께 조개를 채취하고 싶었지만, 해녀들은 경험 없는 그들을 데려가면 작업이 느려질 것이라며 거절했다. 그래서 리저우드는 결국 해변에 앉아 곧 다가오는 다이닝 이벤트를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그가 해녀들의 생활이나 한국 식재료에 관해 물어보려 할 때마다 해녀들은 그의 입에 성게를 넣어주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리저우드는 서울의 원스타 하우스 파티를 마치고 미국으로 갔다. 그런데 서울 행사에 참석했던 한 고객이 서울에 새로 지은 자신의 건물에 공간을 제공하겠다고 연락해왔다. 2019년에 아내 지니의 지지를 받아 리저우드는 레스토랑 에빗(EVETT)을 열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대부분은 푸아그라와 캐비어 같은 고급 재료에 의존하던 시기였는데, 에빗은 약간 색다른 것을 제시했다. 호주 출신 셰프가 한국 식재료를 중심으로 만든 메뉴를 선보인 것이었다. 한국 사람조차 잘 몰랐던 한국 식재료에 대한 탐구와 발효를 접목한 요리로 에빗은 오픈1년 만에 미쉐린 가이드 1스타에 이름을 올렸다. “저희 요리는 퓨전이 아닙니다. ‘혁신적인 한국 요리’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은 놀라운 지역의 식재료의 가치입니다. 그 식재료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라고 그는 설명한다. 리저우드 셰프는 한국 음식 중 발효의 역할에 경의를 표한다. 또 그는 정기적으로 즐기는 채집활동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이 채집활동을 ‘산에서 훔치기’라고 표현한다. 그는 한국 고유의 식재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며 좀 더 자세히 말했다. “재료가 사용되는 방식이나 음식이 요리되는 방식, 그리고 층층이 쌓이는 맛을 경험하는 것, 바로 이곳 한국에서만 가능하죠. 모든 것이 너무나 역동적이에요. 그리고 사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할 수 없어요. 간장게장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호주에서 식품법상으로 가능하지 않아요. 막걸리 역시 다른 곳에서 만들어지기 어렵죠. 미생물들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어서 프랜차이즈를 내거나 과도하게 위생적으로 만들면 그 마법이 사라져 버려요. 기술적으로는 한국 음식일지 모르지만, 진짜 한국 음식은 아니게 되는 거죠.” 리저우드의 최근 요리 중에는 모과 동치미가 있는데, 일종의 물김치인 이 메뉴를 만들기 위해 그는 멍게, 제주 감귤, 염소젖, 그리고 당귀 뿌리를 사용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맛의 조합 중 하나라고 말한다. 가족 같은 에빗 에빗에는 9개의 테이블이 있고 한 번에 약 25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다. 메뉴는 코스요리로만 제공되는데, 리저우드는 “몇 가지 시그너처 요리를 더해 완성도를 높였다”라고 설명한다. 레스토랑에서는 15명의 셰프가 테이블에서 요리에 대해 직접 설명하고 마무리한다. 리저우드는 복잡하고 정교하게 정제된 음식은 그의 팀이 끊임없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최고의 메뉴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쓴 결과를 보여준다고 믿는다. 그는 외국인이 한국 음식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웠지만, 오픈 이후 그의 레스토랑은 음식비평가와 고객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이 우리가 한국의 식재료를 사랑하는 것을 아주 좋게 봤다는 것이었어요. 큰 동기부여가 되었죠. 저희 음식이 항상 멋지거나 놀랍지는 않지만, 고객들이 음식의 진가를 알아주죠.” 2020년 미쉐린 1스타를 비롯해 여러 가지 상과 찬사를 받은 레스토랑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한국의 파인 다이닝 요리 현장의 절정에 있다. 레스토랑을 리모델링하고, 최근에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으로 이전했는데. 올해 미쉐린 2스타를 받지 못한 것엔 실망했지만, 그는 레스토랑의 성공이 미슐랭 평가에 달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레스토랑의 현 상태와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합니다. 멋진 고객들을 모시고 있으며, 그들은 저희 음식을 정말 좋아합니다. 또 저는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식재료를 발견하고요.” 그의 수준 높은 한국 요리를 칭찬하는 긍정적인 리뷰가 넘쳐나지만, 가장 의미 있는 건 비평가들의 절제된 평가이다. 한 평론가는 에빗에서 식사하는 것이 가족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캐러맬라이즈 된 크림을 가득 채운 후 흑마늘 멸치와 수수떡을 올린 메주 도넛이다. 한국 발효의 핵심인 메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요리로, EVETT의 요리를 대표하는 디쉬가 되었다. ⓒ 에빗 특별한 경험 10코스 이상의 메뉴와 전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한국의 술을 곁들여 제공하는 메뉴는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요리사들은 끊임없이 창작의 압박을 받는다. 어떻게 하면 고객에게 기억 남는 식사를 제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끊임없이 그들을 따라다닌다. 모든 테이블의 고객들은 특별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지만, 모든 고객이 각 요리와 그 재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리저우드 셰프는 고객들이 좋아하고 가치 있게 여길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각 테이블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가장 좋은 사례는 에빗에서 식사를 한 근처 치킨집 가게 주인 이야기일 것이다. 리저우드 셰프는 맥주 몇 병을 마시며 그에게 레스토랑의 철학을 설명했다. 치킨집 주인은 왜 호주 출신 셰프가 한국 식재료를 이용해 요리하길 원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후 치킨집 사장은 그의 아내와 에빗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음식이 “나쁘지 않네”라고 말했다. 리저우드에게 이 평가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 말은 제 마음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는 말이었어요. 저희가 한국의 식재료가 얼마나 훌륭한지 보여주기 위한 원동력이 되어주는 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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