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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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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UMMER 54

산이 젊어진다 산이 젊어진다 가끔 한밤중에 잠이 깰 때면 나는 어둠 속에 누워 마음속의 산길을 오른다. 집들이 멀어지고 숲이 시작되는 비탈길. 숲길에서 숨을 고른다. 왼발, 오른발. 빛과 그늘의 교차. 빠른 심장 박동, 이마와 등에 흐르는 땀. 정상의 큰 바위. 건듯 불고 지나가는 산바람과 함께 맛보는 해방감과 열린 풍경의 광대함을 상상한다. © Yang Su-yeol 무려 4000개가 넘는 산들이 솟아 있는 이 나라에서는 어디를 가나 뒷산 혹은 앞산이 보인다. 특히 인구 1000만이 넘는 서울은 남산을 품에 안고 안산, 인왕산, 관악산, 불암산, 도봉산, 북한산에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한 시간 안에 도달하는 도심의 대자연, 특별한 준비 없이 간편한 차림으로 당일에 다녀올 수 있다. 산길은 안전하다. 범죄나 야생 동물의 공격에 노출되는 일이 거의 없다. 잘 정비되고 친절하게 안내된 등산로에는 대피소가 갖추어져 있어서 여유롭게 자연 경관과 도시 전경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등산의 풍경도 변했다. 40~60대 중년들의 취미였던 산행에 온라인 커뮤니티, 취미 플랫폼을 매개로 20~30대 젊은 등산 마니아들이 나섰다. 젊은이들은 등산 패션에서도 그들 특유의 강한 개성을 자랑한다. 울긋불긋 비슷한 아웃도어 패션 대신 스타일리시한 레깅스, 산악 러닝화를 애용한다. 인스타그램에 자신만의 등산 모습을 올린다. 어떤 젊은이들은 취미를 공유하는 플랫폼을 만들어 새로운 관계를 맺고, 쓰레기 줍기 같은 ‘클린 하이킹’에도 나선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하여 해외로 떠나지 못하고 갇혀 지내게 되자 폐쇄적 환경에서 벗어나고 암울한 청년기의 고빗길을 넘기 위한 돌파구로 밀레니얼 세대는 산과 숲으로 간다. 금년 3월 북한산 국립공원 탐방객은 67만 명, 전년 같은 기간보다 41% 증가했다고 한다. 비대면 여행 취미로 산의 풍경이 젊어졌다. 나는 어둠 속에 누워, 간편한 차림으로 혼자 산정에 올라 광대한 세계와 대면하는 젊은이들을 부러워하며 젊어진 산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나도 걷는다, 왼발 오른발…. 김화영(Kim Hwa-young 金華榮)/문학평론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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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UMMER 151

DILKUSHA ‘기쁜 마음의 궁전’ 1919년 3.1운동을 해외에 최초로 알린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와 그의 영국인 부인 메리 린리 테일러(1889-1982)가 살았던 집‘딜쿠샤(Dilkusha)’가 여러 해에 걸친 복원을 끝내고 올해 3월 1일 기념관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그들의 꿈과 사랑, 그리고 한국의 독립을 도우려는 열정이 담긴 보금자리가 옛모습으로 돌아왔다.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와 그의 영국인 부인 메리 린리 테일러가 1923년 서울 행촌동에 지은 서양식 벽돌집 ‘딜쿠샤.’2009년서울시가 펴낸 『돈의문 밖, 성벽 아랫마을: 역사·공간·주거』에 실린 옛 모습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딜쿠샤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이루어졌으며 20세기 초 한국에 지어진 서양식 가옥의 건축 기법을 보여 준다. 특히 외벽에는벽돌의 옆면과 마구리를 번갈아 가며 쌓는 프랑스식 공법(rat-trap bond)이 적용되었다. 1890년대 말, 아버지, 동생과 함께 금광 채굴 사업 차 한국에 온 앨버트 테일러는 일본에 공연 여행 온 영국인 연극 배우 메리린리를 만나 결혼한 후 1942년 일본에 의해 강제 추방될 때까지 딜쿠샤에서 살았다. 영국인 연극 배우 메리 린리 서울 행촌동 언덕의 빽빽한 주택가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특이한 건물 하나가 있다. 머릿돌에 ‘DILKUSHA1923’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이 집의 내력은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미국인 조지 테일러(George Alexander Taylor 1829~1908)와 그의 두아들 앨버트, 윌리엄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대한제국 선포 즈음인 1890년대 말이었다. 입국 목적은 당시 평안북도에 있던 운산(雲山) 금광 채굴 사업을 위해서였다. 앨버트는 그 후영국인 배우 메리 린리(Mary Linley)와 결혼한 뒤 신혼살림을 위해 서양식 주택을 짓고, 그 이름을 딜쿠샤라 했다. 신혼여행 중에 방문했던 북부 인도의 궁전 이름으로,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Palace of Heart's Delight)’이라는 뜻이다. 잊힌 집 앨버트는 단순히 금광 개발업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 중심 소공동에 테일러상회(W. W. Taylor& Company)를 세워 미국산 자동차를 비롯해 다양한 생활용품과 건축 자재를 수입 판매했는가 하면, UPI와 AP 서울 통신원을 맡아 이곳 소식을 미국에 타전하는 역할도했다.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1919~2015)가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난 날은 1919년 2월 28일로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저항해 전 국민이 일어선 3.1운동이시작되기 하루 전이었다. 메리 린리 테일러가 쓴 회고록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The Book Guild Ltd., 1992)에 의하면, 조선인 간호사들이 일본경찰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어떤 서류 뭉치를 갓 태어난 아기의 강보 밑에 감춰 놓았다고 한다. 저녁 무렵 남편 앨버트가 와서야 비로소 그것이 「기미독립선언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독립선언서’잖아! 그가 놀라서 소리쳤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서운한 마음에 그날의 일을 힘주어 말한다. 당시 갓 신문 기자가 된 브루스는 아들을 처음 만난 것보다 그문서를 발견한 것에 더 흥분했다고 말이다. 바로 그날 밤, 시동생 빌이 독립선언문 사본과 그에 관해 브루스가 쓴 기사를 구두 뒷축에 감춘 채 서울을 떠나 도쿄로 갔다. 금지령이 떨어지기전에 그것을 전신으로 미국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Kor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he exclaimed, astonished. To this day,I aver that, as a newly fledged newspaper correspondent, he was more thrilled to find those documentsthan he was to find his own son and heir. That very night, Brother Bill (Albert’s younger brother) leftSeoul for Tokyo, with a copy of the Proclamation in the hollow of his heel, to get it off, with Albert’sreport, over the cables to America, before any order could be issued to stop it.)” 당시 온 국민이 제국주의세력에 대항해 봉기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식민 지배가 시작된 지 9년 만에 조선에서는 대대적인 민중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앨버트가 타전한 기사를 받아 3월4일 중국의 영문 매체 『대륙보(China Press)』를 시작으로, 10일에 미국 인디애나 『사우스벤드 뉴스 타임스(South Bend News-Times)』, 13일에는『뉴욕타임스』에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하다 (Koreans Declare For Independence)’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는 이후 3.1운동 진압 과정에서 일본이자행한 수많은 민간인 학살과 방화 사건들도 열심히 취재해 보도했다. 사업가로서 일본 당국으로부터 여러 면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개인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의 무력적인 탄압행위를 세상에 알리고, 조선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한 것이다. 그런 활동은 일본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다. 결국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적성국시민’의 거주를 허용하지 않았고, 앨버트는 그해 12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 부근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부부가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이후 그와 그의 가족은한국인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브루스 테일러와 그의 딸 제니퍼 테일러(1958~)가 2006년 방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테일러 부부가 추방된 지 64년 만의 일이었다. 딜쿠샤 2층 거실. 테일러 부부가 거주하던 당시의 모습을 사진 자료를 통해 그대로 재현했다. 풍경화, 화병, 램프, 의자, 삼층장등 가구와 장식품에 동서양 문화가 혼합되어 있다. 테일러 가족의 방문 필자가 10여 년 전 방문했을 때만 해도 딜쿠샤는 건물 내외부가 모두 쇠락한 상태였다. 안전 진단 결과더 이상 거주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육안으로 대충 보아도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벽돌이며 부서진 콘크리트 사이로 보이는 철근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추방 전 일본 군인들이 체포하러 왔을 때테일러 가족이 몸을 숨겼다는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 아래 공간, 2층 서재의 벽난로, 현관과 계단, 마룻바닥, 창틀 등 내부 시설은 함부로 없애거나 덧댄 나머지 누더기처럼 변해 있었다.비가 새는 지붕에는 얼기설기 비닐 천막이 덮여 있었다. 서울시와 중앙 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즈음이었다. 브루스 부녀의 방한으로 딜쿠샤의 내력이 알려지자, 더이상의 훼손을 막고 역사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2017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되었다. 이듬해 건물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고 내부 시설을 갖춘 후 2021년 3월 1일 일반에 개방되었다.글렌우드 난로(Glenwood Heater)를 비롯해 메리가 남긴 사진들을 기반으로 재현한 가구와 화병, 촛대 등 소품에 이르기까지 마치 192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살렸다. 특히앨버트 부부의 생활 유품과 옛 사진을 비롯한 1,026건에 달하는 자료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면서 딜쿠샤는 더욱 풍성한 전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집은 단순히 한외국인 가족이 살았던 공간이 아니다. 딜쿠샤는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 그리고 세계 만방에 식민지 민중이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 주인공의 보금자리였다. 일생을통해 미국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었던 앨버트는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고, 1948년 캘리포니아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있는자신의 아버지 묘 옆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그의 아내 메리가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미군 군함에 유골을 싣고 돌아와 소원을 이뤄준 것이다. 메리는 1982년 92세에세상을 떠나 캘리포니아에 묻혔다. 2006년 브루스와 제니퍼가 방한했을 때 메리의 묘에서 퍼온 흙을 앨버트의 묘에 뿌렸고, 그의 묘의 흙을 떠다가 캘리포니아의 메리 묘에 뿌린 것으로알려졌다. 딜쿠샤 1층 거실. 고증을 거쳐 2년여 동안 꼼꼼하게 재현되었다.ⓒ 이정우(Lee Jeong-woo 李政雨) 이 집은 단순히 한 외국인 가족이 살았던 공간이 아니다. 딜쿠샤는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 그리고 세계 만방에 식민지 민중이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주인공의 보금자리였다. 이방인 조력자들 앨버트 테일러뿐만 아니라 당시 외국인 중에 음으로 양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운 이들이 적지 않았다.딜쿠샤에서 약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살았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T. Bethell 1872-1909)은 1904년 조선에 들어와 언론인 양기탁(梁起鐸1871~1938) 등과 함께 『대한매일신보(Korea Daily News)』를 발행했다. 그는 언론 활동을 통해 일본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정부에 떠안긴 거액의 외채를 조선인들 스스로 십시일반 모금해 갚자는 국채보상운동 때에도 전면에 나서서 지원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Daily Mail)』 기자프레데릭 매켄지(Frederick Mackenzie 1869-1931)는 1906년부터 1907년 사이 경기도와 충청도, 강원도의 산중을 찾아다니며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들을 만나취재했다. 그 결과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1908),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1920) 등의 저서를남겼다. 이 책들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일반 민중까지도 치열한 게릴라 항전을 이어갔음을 증명해 주는 귀중한 사료다. 또 영국 태생의 캐나다 선교사이며 의학자인 프랭크스코필드(Frank Schofield 1889-1970)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교수로 봉사하며 한편으로 일본의 조선인 학살을 취재해 해외 언론에 알리기도 했다. 이를 구실로 1920년강제 출국 당했다가, 1969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최초의 외국인이다. 이 외에도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변호한 일본인 인권 변호사후세 다쓰지(布施辰治 Datsuji Fuse 1880-1953)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운 중국인 저보성(褚輔成 Chu Fucheng 1873-1948), 한국광복군의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한 중국인 쑤징허(蘇景和 Su Jinghe 1918-2020) 등 외국인들의 조력이 있었다. 딜쿠샤는 그런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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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UMMER 105

넷플릭스와 한국 콘텐츠의 즐거운 상생 한국 시장 진출 이후 5년– 넷플릭스는 그동안 한국 콘텐츠의 수준을 높였고, 세계 시장에서 K-콘텐츠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같은 순항의 이면에는 지속적인 투자와 과감한 도전, 그리고 우수한 제작자들의 협력이 있었다. 2016년 한국 시장에 진출한 이후 지금까지 OTT(over-the-top) 미디어 스트리밍 서비스의 최강자 넷플릭스(Netflix)는 괄목할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양질의 외국 콘텐츠가 한국시장에 쏟아졌고, 한국의 우수한 콘텐츠도 해외 관객을 만났다. 넷플릭스 덕분에 한국 콘텐츠 제작자들이 세계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한국 덕분에 넷플릭스는 세계 시장에서 구독자 수를 늘려나갔다. 콘텐츠 교류의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윈윈’ 관계를 확실히 구축한 것이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 콘텐츠 시장은 전례 없는 격변을 맞았다. CJ ENM의 티빙(TVING), KT의 Seezn, SKT의 wavee가 시장 선점을 위해 경쟁 중이다. Disney+등 외국의 대형 OTT 서비스도 한국 시장 진출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19 이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파격적인 시작 넷플릭스는 한국 진출을 선언할 때부터 파격이었다. 740억원이나 되는 거액을 투자해 제작한 봉준호(Bong Joon-ho 奉俊昊) 감독의 대작 (玉子, Okja; 2017)를 한국 넷플릭스의 간판으로 걸었기 때문이다. 국내 멀티플렉스 극장들은 “OTT와 극장 동시 상영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보이콧을 선언하기도 했으나, 봉 감독은 이 작품으로 할리우드에 눈 도장을 찍었다. 어찌보면 (寄生虫, Parasite; 2019)이 거둔 미국 아카데미 4관왕의 첫 단추는 넷플릭스와의 공조였던 셈이다. 넷플릭스는 이후 (甜蜜家园, Sweet Home; 2020), (灵能教师安恩英, The School Nurse Files; 2020), (乐园之夜, Night in Paradise; 2021)의 공개로 계속 라인업을 확장했다. 의 경우 지난해 12월 18일 공개한 이후 한 달 만에 2200만 계정이 시청했다. 이는 넷플릭스 전체 콘텐츠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순위에 해당하며, 한국 콘텐츠의 잇단 흥행 성공에 힘 입어 전 세계 구독자수가 지난해 2억명을 돌파했다. 영화 에서 환경단체 ALF(Animal Liberation Front)의 목적은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숨겨진 실체를 파헤치는 것이다. © 넷플릭스(Netflix) 주인공 미자(우)는 잃어버린 친구 옥자를 되찾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유전자 조작을 통한 ‘슈퍼돼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대표 낸시 미란도를 만난다. 주목하는 이유 넷플릭스는 한국을 단순히 소비시장으로 보지 않았다. 인구 5000만명의 나라는 매력적인 시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가 아시아에서 지사나 사무소를 둔 곳은 싱가폴, 인도, 일본, 그리고 한국 네 나라뿐이다. 인도는 12억 인구로 시장이 방대하다. 싱가폴은 동·서양을 잇는 교두보로 필요하다. 일본은 애니메이션 생산을 위해서 마련됐다. 지리적 위치도, 인구 수도 수익을 보장할 수 없어 보이는 한국에 넷플릭스가 뛰어 든 이유는 뛰어난 콘텐츠 제작능력이 있어서다. 우수한 드라마·영화 제작자들이 구미를 당기게 했다. 콘텐츠 생산 전초기지로 알맞아 보인 것이다. 넷플릭스의 선택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오리지널 콘텐츠로 제작한 (尸战朝鲜/屍戰朝鮮, Kingdom;시즌 1 2019, 시즌 2 2020)이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한국의 조선시대(1392~1910)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좀비 이야기가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혼합한 콘텐츠로 주목을 끌었다. 김은희(Kim Eun-hee, 金銀姬) 작가의 필력도 한 몫했다. 미국에서는 조선의 양반들이 쓰던 모자 ‘갓’을 구매하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넷플릭스는 해외 팬들이 K-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플랫폼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한류의 창구가 되기도 한다. 한류가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인 아시아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선진국인 영국과 미국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해외 팬들이 넷플릭스가 제공하는 한국 콘텐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영국인 소피 씨(Sophie Abdoul, 23)는 14살 때부터 K-팝과 한국 드라마, 그리고 영화를 꾸준히 챙겨 봤다. 아이돌 음악은 유튜브에서 쉽게 볼 수 있었지만, 드라마만큼은 장벽이 높았다. 하지만 최근 넷플릭스가 한국 콘텐츠를 연달아 공개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관람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넷플릭스로 인해 한국 콘텐츠에 대한 접근성이 매우 좋아졌다”면서 “우울할 때마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덕분에 최근에는 한국 문화 전도사처럼 친구와 가족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일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고 했다. 미국인 첼시 씨(Chelsea Anosik, 18)는 한국 드라마 팬이다. 넷플릭스의 한국 콘텐츠 서비스가 시작되기 전부터 K-드라마를 즐겨 온 그는 요즘 더 많은 한국 드라마를 찾아 보고 있다. (奶酪陷阱, Cheese in the Trap; 2016)을 시작으로 , (虽然是精神病但没关系, It’s Okay to Not be Okay; 2020)까지 즐기는 장르도 다양하다. 그는 “한국 드라마는 너무 매력적인 요소가 많다”면서 “감정을 자극하는 데 탁월한 것도 인기 요소”라고 했다. 이어“넷플릭스가 한국 작가, 감독, 배우들에게 기존 TV에서는 할 수 없었던 다양한 도전을 촉구하는 모습이 반갑다”면서 “한국 드라마는 로맨스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보다 훨씬 더 내용이 풍부하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고도 했다. 아시아에서도 K-콘텐츠와 넷플릭스의 협업이 큰 호응을 받고 있다. 필리핀인 마리 (Marié Olivia Garcia) 씨는 “넷플릭스에 올라오는 한국 콘텐츠는 기존 TV 프로그램보다 더 많은 옵션을 제공한다”면서 “한류 팬들에겐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영화 (屍速列車, Train to Busan; 2016)으로 한국 콘텐츠에 빠져든 인도인 스라비카(Shravika Wanjari) 씨 역시 “좀비물·스릴러물이 굉장히 뛰어난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넷플릭스 플랫폼을 점령할 것 같다”고 예상했다. 2020년 9월 25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은 정세랑(Chung Serang, 郑世朗)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시즌 1은 총 6화로 러닝타임 298분이다. ©넷플릭스(Netflix) 조선 왕조를 위협하는 좀비가 등장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은 넷플릭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포물 중 하나이다. 두 번째 시즌은 첫 번째 시즌보다 더 큰 인기를 끌었다. 김성훈(Kim Sung-hoon 金成勳) 감독은 곧 방영 예정인 스페셜 에피소드 이 세 번째 시즌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할 것이라 말했다. 올 해 공개될 드라마 은 주동근(Joo Dong-geun 朱東根) 작가의 동명 웹툰이 원작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도시 속 한 고등학교에 고립된 이들과 그들을 구하려는 자들이 극한 상황을 겪으며 벌어지는 내용을 담았다. 4월 9일 넷플릭스를 통해 단독 공개한 박훈정(Park Hoon-jung 朴勋政) 감독의 영화 은 한국형 누아르에 전에 없던 여성 캐릭터까지 더해지며 스토리와 영상미를 함께 잡았다. 군대를 소재로 한 한준희(Han Joon-hee 韩俊熙) 감독의 는 평범한 이등병이 ‘군무이탈 체포조’가 되어 탈영병을 쫓으며 마주하는 혼란스러운 청춘에 관한 이야기다. 대규모 투자 넷플릭스는 세계 시장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과의 협업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더욱 치열해져 가는 OTT 서비스 경쟁에서 더 많은 투자로 우위를 점한다는 계획이다. 한국 콘텐츠 제작에 올해 5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계획의 일환이다. 지난 5년간 누적 투자액이 7억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역대 최고 수준이다. 안정적인 제작 환경을 위해서 경기도 연천과 파주 두 곳에 대규모 스튜디오를 마련하기도 했다. 넷플릭스가 임대 계약을 체결한 두 스튜디오는 ‘YCDSMC 스튜디오 139’와 ‘삼성 스튜디오’다. YCDSMC 스튜디오 139는 6곳의 스테이지를 갖춘 총 면적 9000 제곱미터, 삼성 스튜디오는 3곳의 스테이지로 총 면적 7000 제곱미터에 이른다. 이 같은 전폭적인 지원으로 올해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 면면이 화려하다. 의 프리퀄인 (屍戰朝鮮:雅信傳, Kingdom: Ashin of the North)은 전지현(Jun Ji-hyun, 全智賢)의 캐스팅을 확정 짓고 올해 방영을 앞뒀다. 유품 정리사의 눈을 통해 죽은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Move to Heaven:我是遺物整理師, Move to Heaven)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제훈(Lee Je-hoon, 李帝勳)이 주인공을 맡아 한류 팬들의 관심이 뜨겁다. 정해인(Jung Hae-in,丁海寅), 구교환(Koo Kyo-hwan, 具敎煥) 김성균(Kim Sung-kyun, 金聲均)이 주연을 맡은 영화 (D.P:逃兵追緝令)도 기대작이다. 탈영병들을 쫓는 군무이탈 체포조들이 마주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김보통 작가의 동명 웹툰이 군대 내 부조리와 가혹행위들을 여과없이 그려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코리안 좀비 시리즈는 올해도 계속된다. 바이러스가 퍼진 고등학교를 구하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殭屍校園, All of Us Are Dead)의 스틸컷이 최근 공개되어 학교 운동장에 가득한 피투성이 좀비떼들의 모습이 팬들의 기대를 높이고 있다. 한류 스타 공유(Gong Yoo, 孔劉)와 배두나(Bae Doo-na, 裵斗娜), 이준(Lee Joon, 李準)이 주연하는 영화 (寧靜海, The Silent Sea)>도 넷플릭스에서 선보인다. 세계적인 사막화로 물과 식량이 부족해진 지구가 배경이다. 달에 버려진 연구기지에서 벌어지는 정예대원들의 이야기로, 한국형 SF 기대작으로 손꼽힌다. 넷플릭스의 대규모 투자에 자극을 받은 국내 OTT 서비스 플랫폼들의 경쟁에도 불이 붙었다. KT는 2023년까지 4000억원 이상을 투자해 오리지널 대작 드라마 100편을 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지상파 3사(KBS·SBS·MBC)와 SK Telecom이 만든 wavee는 3년간 3000억원을 콘텐츠 제작에 쏟아 붓는다. CJ와 JTBC 연합인 TVING도 3년간 4000억원 투자를 선언했다. OTT 플랫폼 공룡들의 전쟁에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한류 팬들은 즐겁기만 하다. 넷플릭스는 세계 시장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과의 협업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더욱 치열해져 가는 OTT 서비스 경쟁에서 더 많은 투자로 우위를 점한다는 계획이다. 시즌 3는 스페셜 에피소드 에 이어 매우 기대된다. 스페셜 에피소드에서 전지현(Jun Ji-hyun 全智賢)은 좀비를 조종하는 것 같은 해적 여왕 아신으로 출연한다. Kwon Ki-bong Writer Ahn Hong-beomPhotograp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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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UMMER 184

마음의 실을 이어 하늘의 수를 놓다 자수장 최유현(Choi Yoo-hyeon 崔維玹)은 70여 년 동안 바늘과 실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아왔다. 그는 불화(佛畫)를 바탕으로 한 대작과 독창적 기법으로 한국 자수의 차원을 한층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삼세불도(三世佛圖)⟩ 중 ‘석가모니불도’(부분). 257 × 128 ㎝. 비단에 명주실. 자수장 최유현(Choi Yoo-hyeon 崔維玹)은 1970년대 중반부터 불화를 자수로 표현하는 수불(繡佛)에 도전했다.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를 표현하는 ⟨삼세불도⟩는 완성하는 데 10년이 넘게 걸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아름답고 섬세한 자수 작품을 대하면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되지만, 수틀 앞에 앉아 바늘로 한 땀 한 땀 그림을 만들어 나가는 작업은 매우 고되고 지루하여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특히 전통 자수는 현대 자수에 비해 대체적으로 제작 과정이 더 복잡하고 기법 또한 다양한 데다가 그 안에 담긴 정신까지 표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수가 힘들고 지루하기만 했다면 어떻게 평생 이 일을 했겠어요? 재미있고 즐거우니까 했죠.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 자수를 내 손으로 복원하고 싶다는 바람도 컸고요.”고생스럽지 않냐는 질문에, 최유현 자수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본질에 천착하다 “제 나이가 이제 80이 훨씬 넘었어요. 우리 어렸을 땐 바느질이 일상이었어요. 집집마다 옷도 손수 만들어 입고, 혼수에 들어가는 수도 직접 놓았죠. 제가 7남매 중 막내인데, 어머니가 늘 수를 놓고 계시니 저도 자연스레 옆에서 따라 하게 됐어요. 10대 때 학교 숙제로 자수를 해 갔다가 칭찬을 받은 게 재미를 붙이는 계기가 됐고요. 한때는 하루 스무 시간 넘게 수틀 앞을 떠나지 못한 적도 있어요. 밥 먹는 시간, 세수하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매달렸죠.” 열일곱 살에 당시 자수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던 권수산(権寿山) 선생을 만나 체계적으로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자수를 시작하게 될 무렵, 한국 전통 자수는 암흑기였다. 그 당시 자수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여성들이었고, 이들은 귀국 후 여자대학교 가정과나 양장학교에서 일본풍의 자수나 생활 소품에 치중된 자수를 가르쳤다. 이런 경향은 오랫동안 지속됐다.최 자수장은 1960년대 초반 자수 학원을 열어, 전통 자수의 본질에 천착하고 우리 것을 되찾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베갯모나 방석 같은 생활 소품에 전통 문양을 수놓는 수준이었지만, 점차 소재를 전통 회화로 확대해 나갔다.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옛 미술품들을 재해석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확립해 나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자수는 바늘 다루는 솜씨와 타고난 색감도 중요하지만 디자인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다른 사람의 작품을 따라 하기만 해선 자신만의 독창적 세계를 구축할 수 없어요. 한국 전통 도자기와 산수화, 민화 등을 밑그림으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1. ⟨연화장세계도(蓮華藏世界圖)⟩. 270 × 300 ㎝. 비단에 명주실. 경상북도 예천 용문사(龍門寺)의 만다라를 자수로 표현한 작품으로 최 자수장에게 1988년 제1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안겨 주었다.ⓒ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도전과 성취 사회 일반적으로 한국 고유의 전통 문화가 경시되었던 시절, 그의 이 같은 노력은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전통 자수에 매혹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다. 특히 그의 작품은 외국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당장의 경제적 이익보다 전통 자수의 발전을 먼저 생각했던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는 작품 판매보다는 전통 자수 연구와 전시 활동에 집중했으며, 불화를 자수로 표현하는 수불(繡佛)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불교 미술이야말로 전통 예술의 총화라는 생각에서였다. 그중 석가모니의 일생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팔상도(八相圖)⟩와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를 아우르는 ⟨삼세불도(三世佛圖)⟩는 그의 70여 년 자수 인생을 대표하는 화룡점정이라 할 만하다. 전통 기법과 창작 기법이 화려하게 어우러졌을 뿐 아니라, 재료도 명주실은 물론 면사, 양모사, 인견사 등을 활용해 질감을 다양하게 살렸다. 두 작품 모두 완성하는 데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스님들이 수행과 정진에 힘쓰듯 참선하는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았어요. 특히 ⟨팔상도⟩는 통도사에서 처음 그림을 접한 후 10년간 ‘이 작품을 내 자수로 짓게 해 달라’고 기원을 드렸습니다. 가까스로 절의 승인을 받아 제작에 착수했는데, 높이 2미터가 넘는 작품 8점을 수놓다 보니 완성하는 데 12년이 걸렸어요. 그나마 제자들과 함께했기에 망정이지 저 혼자였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남다른 열정과 집념은 큰 상의 수상으로 이어졌다. 예천 용문사(龍門寺)의 만다라를 수놓은 ⟨연화장세계도(蓮華藏世界圖)⟩로 1988년 제1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1996년에는 마침내 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2. ⟨팔상도(八相圖)⟩ 중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236 × 152 ㎝. 비단에 명주실. 이 작품은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팔상도를 밑그림으로 삼았으며, 자수 표현이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크게 여덟 가지 장면으로 나누어 보여 주는 ⟨팔상도(八相圖)⟩는 한 화면에 여러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효제충신도(孝悌忠信圖)⟩ 8곡 병풍 중 ‘염자도(廉子圖)’(부분). 128 × 51 ㎝. 비단에 명주실. 1960년대, 한국 전통 자수의 본질에 천착하게 된 장인은 문자도를 포함한 민화의 재해석에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보존과 계승 한국 전통 자수의 역사는 삼국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한국 문화에 대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은 고대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이 수를 놓은 화려한 옷을 입었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에는 궁궐에 자수 장식을 전담하는 수방(繡房)을 설치해 왕실의 의복과 장식품에 수를 놓았고, 민간에서는 가정마다 가풍에 따라 전승되는 자수 양식이 있었다. 최 자수장의 예술 철학은 ‘심선신침(心線神針)’이라는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2016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전시회의 제목이기도 했던 이 말은 ‘마음의 실을 이어 하늘의 수를 놓는다’는 뜻이다. “작품 한 점 한 점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완성됩니다.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면서 자수로 재현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해 본을 뜨기까지 그 과정도 만만치 않지만, 어떤 질감과 색감의 천과 실을 사용할지, 색 배합은 어떻게 할지, 어떤 기법을 사용할지, 머릿속에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가며 작업해야 해요. 구성과 위치에 따라 실의 굵기를 달리해야 하니 실도 직접 꼬아야 하고, 마음에 드는 기법과 색감을 찾을 때까지 수를 놓았다가 뜯어내 버리는 과정을 숱하게 반복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뭐 하나 대충 넘기는 법이 없다. 언제나 기본을 강조하며 전통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후대에 제대로 전수하기 위해서다. 이는 그가 부산대학교 한국복식문화연구소 석좌교수로 출강하며 후학 양성에 열과 성을 다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전통 자수가 아름답고 좋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선뜻 해 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도 부지기수고요. 제대로 교육받았다 해도 부단한 인내로 오랜 수련을 거쳐야만 비로소 작가로 거듭날 수 있어요.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 도전 자체를 꺼리는 거죠.” 그는 자신의 자수 인생을 돌아보는 자서전 『최유현 자수사』의 발간을 앞두고 있다. 생활 소품에서 민화, 다시 불화로 변화를 거듭해 온 그간의 여정을 시기별로 정리한 책이다. 제자들을 위한 교육용 자료 편찬 작업도 서두르고 있다. 이미 100여 점이 넘는 작품에 주석을 달아 정리한 작품집을 여러 권 펴냈고, 자신이 개발한 독창적 기법에 이름을 붙여 상세하게 기록한 책도 조만간 출간할 계획이다. 그런가 하면 대작으로선 마지막 작품으로 예상되는 양산 신흥사(新興寺) 대광전(大光殿) 벽화를 모본으로 하는 ⟨관세음보살도⟩도 완성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색(紫色) 천에 금색 실로만 수를 놓은 이 작품은 그 정교함과 화려함이 가히 극치에 달한 느낌이다. 지난 3년간 작업해 온 역작이다. “앞으로 이처럼 대규모 작품은 더 이상 하기 힘들 것 같아요. 눈도 침침하고 체력도 달려서 2~3시간 작업하는 것도 힘에 부치거든요. 이젠 작품 제작보다 제자들 교육에 집중해야죠.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전수하는 게 제 남은 숙제니까요.”그가 거의 반세기 동안 팔지 않고 보관해 온 자신의 작품과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수백여 점의 전통 및 현대 작품이 문화재청 지원 아래 전주 국립무형유산원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머지않은 날 자수 전문 박물관이 건립돼 이 작품들을 오래도록 보존하고 전시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1. 최 자수장은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명주실, 면사, 양모사, 인견사 등 다양한 소재와 색상의 실을 사용해 질감을 표현하는 한편 전통 및 창작 기법을 두루 활용해 수를 놓는다. 2. 그는 지난 3년 동안 경상남도 양산 신흥사(新興寺) 대광전(大光殿) 벽화를 모본으로 하는 를 작업 중이다. 이 작품은 자색 비단에 금색 명주실로만 수를 놓아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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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UMMER 351

문화예술을 품은 서촌의 시간 속으로 왕이 거닐던 옛 산수화 속 동네, 식민지 암흑시대 한 호리한 시인이 몸을 웅크린 채 저항시를 쓰던 동네, 서울의 옛 도심 빌딩 숲 한가운데 한옥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동네 서촌으로 떠났다. ‘서촌’은 경복궁 서쪽으로 옛 서울의 경계를 이루었던 인왕산 자락 아래 동네들을 일컫는 별칭이다. 인왕산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눈을 돌리면 북악산 밑으로 경복궁과 청와대가 자리잡고 있다. 고즈넉한 한옥과 어울리며 제각기 멋을 풍기는 아담한 빌딩들이 들어선 서촌은 과거와 현재가 흥미롭게 공존하는 곳이다. 이 마을에선 오래된 한옥이 이국적인 디저트 카페로 다시 태어나고, 조선 시대(1392~1910)의 수묵화가 21세기 화가의 캔버스 위로 펼쳐진다. 사람의 훈기가 가득한 체부시장과 통인시장에서 수성(水聲)계곡으로 올라가는 좁은 골목들은 마치 실존주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집필실이 있던 체코의 황금소로 22번지 골목처럼 아늑하다. 때로는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뒷골목을 걷는 느낌도 든다. 북촌에 이어 서촌이 최근 서울의 명소로 떠올랐다. 아기자기한 골목과 맛있는 음식점, 감각적인 카페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예술을 자연스레 몸으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인왕산에는 코로나 19사태속에 홀로 하는 등산에 재미를 느낀 사람들이 찾아와 눈 앞에 펼쳐지는 서울의 경관에 빠져들기도 한다. 서촌에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살았지만, 문화예술만은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 이곳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문화예술이 형형색색 모여 미로 같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옥인동에 위치한 수성계곡은 나무 그늘과 물소리가 시원해 예로부터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장소이다. 한양도성은 14세기 조선 건국 직후 왕도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데, 서쪽 벽이 인왕산을 가로지르며 서촌을 품고 있다. 옛 사람들의 자취 2013년 9월에 설립된 박노수 미술관은 이 곳에서 40여 년간 거주하던 박노수 화백의 기증작품과 컬렉션 등 1000여 점의 예술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1941년 연희전문 학생이던 윤동주는 자신이 존경하던 소설가 김송(金松·1909~1988) 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하며 시를 썼다. 이 곳에서 ‘별을 헤는 밤’을 비롯한 대표작을 썼으나 당시의 집은 남아 있지 않다. 서촌의 높은 곳에 올라 펜으로 길거리와 마을의 풍경을 담는 김미경 화가. 그는 20년의 기자생활을 끝낸 후 2005년 뉴욕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다시 2012년 서촌에 자리를 잡고 그림 그리며 ‘옥상화가’로 알려졌다.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에 인접한 서촌은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 즉 후일의 세종대왕 (1397~1450 世宗大王)을 비롯한 여러 왕자들이 나고 자란 동네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곳은 수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왕실군락지’였다. 서촌이 배경인 산수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1418~1453 安平大君)이 꿈에 도원에서 노니던 광경을 화가 안견(安堅)에게 설명해서 그리게 한 작품이다. 이 그림 속 옥인동 수성계곡은 안평대군뿐 아니라 세종의 둘째 형님 효령대군(1396~1486 孝寧大君)도 살았던 장소다. 학문과 덕성이 출중했던 그는 동생인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권력의 갈등에서 비켜나 불교의 중흥에 힘쓴 인물로 추앙 받는다. 또한 이 동네에는 겸재 정선(1676~1759 謙齋 鄭敾)이 살며 조선 문화 절정기였던 진경시대(眞景時代)의 걸작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1751)⟩를 그리기도 했다. 국보 제 216호인 이 유명한 그림은 고 이건희(1942~2020 李健煕) 삼성그룹 회장의 소장품이었는데, 최근 국가에 기증되어 다시 한번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조선 중기부터 서촌에는 왕실 가족보다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 신분이었던 중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역관과 의관, 내시 등 궁중관리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즉, 현재의 사직동, 옥인동, 효자동 등 여러 동네를 아우르는 이 지역은 사대부가 살았던 북촌과 달리 궁궐의 운영에 필수적인 기능인들의 거주지였다. 그래서 북촌의 한옥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웅장한데 비해 서촌의 한옥은 아담하고 소박하다. 서촌에 실핏줄 같은 작은 골목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의 몰락에 이어 일제강점기(1910~1945)에 이르자 이곳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시인 윤동주(1917~1945 尹東柱), 이상(1910~1937 李箱), 노천명 (1911~1957 盧天命)과 소설가 염상섭(1897~1963 廉想涉)이다. 또한 화가 구본웅(1906~1953 具本雄), 이중섭 (1916~1956 李仲燮), 천경자(1924~2015 千鏡子)도 이곳에 살았다. 같은 시기 서촌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완용(1858~1926 李完用)과 윤덕영(1873~1940 尹德榮) 같은 거물 친일파들의 호화로운 서양식 저택이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을 일으키고 향유되는 문화예술은 어둠 속에서 껍질을 깨고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키는 새의 부화와 같다. 단단한 껍질에 포위된 채 살기 위해 쪼아야 하는 아기새처럼, 당시 예술가들은 치열한 창작 활동을 통해 가난과 절망의 시기를 탈출하려 노력했다. 이들의 흔적을 찾는 것이 이번 서촌 기행의 은밀한 화두이기도 하다. 1941년 효자동 인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위해 조성된 공설시장이 모태인 통인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서촌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며 지금의 시장 형태를 갖추게 됐다. 향기를 따라 나는 먼저 청운동의 ‘청운 문학도서관’과 ‘윤동주 문학관’이 자리한 ‘시인의 언덕’ 으로 향했다. 언덕 너머 서울 구 도심이 부채처럼 펼쳐지며 멀리 남산타워와 한강 너머 롯데타워도 보였다. 산비탈에 한옥을 잘 복원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청운 문학도서관에 비해 철문의 콘크리트 건물인 윤동주 문학관은 삭막한 감옥을 연상시켰다. 옥외에 카페 정원과 벤치가 있는 이 건물은 2013년 동아일보(東亞日報)와 건축전문지 ⟨SPACE⟩가 공동실시한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 조사에서 상위에 올랐다. 윤동주 문학관의 영상실 콘크리트 벽에는 식민지 시절 서촌에 살며 저항시를 썼고, 일본 유학 중 항일운동에 가담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시인의 일대기가 펼쳐진다. ‘무기를 들고 직접 싸우지 못하고 골방에 숨어 고작 시나 써서 창피하고, 심지어 그 시가 잘 써지기까지 해서 더욱 창피하다’고 쓴 그의 일기가 떠올라 마음이 처연해진다. 이곳에서 미로 같은 골목을 빠져나와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의 집’으로 갔다. 흔히 서촌 문화예술 탐방자들이 출발점으로 삼는 장소이다. 그런데 이상이 세 살에 양자로 들어가 이십여 년을 살았던 원래 집은 없어지고 집터만 남아서 지금의 이상의 집은 그의 사후에 새로 지은 집이다. 이곳에는 그의 친필 원고 등 주로 문학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수성동 계곡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청아한 산수화를 즐겨 그렸던 한국화가 박노수(1927~2013 朴魯壽)의 작품이 모여있는 ‘박노수미술관’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윤동주 시인이 대학생 시절에 살던 하숙집터도 나온다. 이제 마침내 서촌의 끝인 수성동 계곡에 당도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여성 화가가 마스크를 쓰고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서촌의 옥상화가’로 이름이 난 김미경 씨였다. 20년 경력의 신문기자였던 그는 8년 전 직장을 그만 두고 제도용 펜으로 후벼 파듯 서촌의 옥상 풍경들을 그리고 있다. 인왕산을 비롯해 한옥, 일본식 적산가옥, 빌라 등의 옥상으로 올라가 서울의 역사가 압축된 서촌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다. 처음엔 그가 화가인 줄 모르던 주민들이 ‘지도를 그리는 간첩’으로 신고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이젠 그의 그림이 서촌의 여러 가게에 걸려있다. 문득 그가 앞으로 그려나갈 서촌의 미래 모습이 궁금해진다. 1941년 효자동 인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위해 조성된 공설시장이 모태인 통인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서촌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며 지금의 시장 형태를 갖추게 됐다. 1940년대에 지어진 보안여관에는 여러 화가와 문인들이 즐겨 묵었다. 2004년까지 여관으로 운영되다가 최근에 전시, 공연 등을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윤동주 문학관 이상의 집 사직공원 경복궁 미로 속에 뒤를 돌아보다 마지막으로 통의동 보안여관에 들렀다. 화가 이중섭, 시인 서정주(1915~2000 徐廷柱) 등의 예술가가 묵었던 이 여관은 1942년에 지은 건물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 중이다. 1936년 서정주 시인이 동료 시인들과 힘을 모아 창간한 동인잡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 서니 역사의 자취가 곳곳에 묻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과 옹기종기 비좁은 전시실이 오래된 매력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 반가왔다. 보안여관의 최성우 대표는 화가의 꿈을 안고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미술경영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이 곳을 서촌을 대표하는 복합문화센터로 만들었다. 현재는 보안여관 바로 옆에 4층 건물을 지어 문화사업을 더욱 확장하고 있는데, 실험적인 젊은 국내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뿐만 아니라 해외프로젝트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보안여관 기획전에 앞으로는 외국 작가들도 초청할 계획이다. 4층 건물의 3, 4층이 게스트하우스이자 레지던스 작가들의 작업공간이기도 하다.서촌에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살았지만, 문화예술만은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 이곳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문화예술이 형형색색 모여 미로 같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골목길 여행의 장점은 미로 속에 자주 길을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낯선 길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또한 느닷없이 때때로 골목이 막혀 뒤돌아 나오며 자신의 발자취를 뒤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나는 이번 기행에서 자주 눈을 떴고 자주 뒤돌아보았다. 대오서점이 개점하던 1950년대에는 인근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책을 사거나 또는 팔러 오는 학생들로 붐볐다. 처음에는 한옥의 창고를 개조해 만든 책방이 점점 현관으로, 집안으로 확장됐다. 현재는 다시 규모가 줄었고, 뒤편 공간에는 북카페가 운영 중이다. ©Newsbank ‘먹자골목’으로 유명한 서촌의 체부동은 낮부터 밤까지 미식을 즐기러 찾아 드는 다양한 세대로 붐빈다. 아담한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미로 같은 골목이 이어진다. 이산하(Lee San-ha 李山河)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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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UMMER 158

탈북민 환자들의 한의사 최초의 탈북 한의사 석영환(石英煥 Seok Yeong-hwan) 원장의 ‘영등포 100년 한의원’은 북한의 전통침술을 적용한 치료법으로 알려져 있다. 탈북민과 중국 교포들이 그의 북한식 진료의 혜택을 받고 있다. 100년 한의원은 탈북자들 사이에서 ‘탈북자병원’으로 불린다. 아픈 곳이 있어 찾아가면 주머니 걱정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석 원장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등포 100년 한의원’의 풍경은 여느 한의원과 조금 다르다. 실내 구조는 비슷하지만, 환자들이 맞는 침(鍼)이 사뭇 굵다. 얇고 가느다란 침만 보던 이들은 겁먹을 정도다. 이곳은 침술이 독특하다. 북한 전통침술인 ‘대침’, ‘불침’으로 유명하다. 지름 0.5cm 정도의 황금 침도 있다. 평양의 고위간부들이 많이 받던 치료법이라고 한다. 서울 문래동에 위치한 이 한의원의 석영환(55세) 원장은 남북한 한의사 면허 1호다. 진료실 책장에 꽂혀 있는 ⟨고려의학(高麗醫學)⟩ 같은 북한 책들이 말 해주듯 석 원장의 진료는 ‘고려의학’ (Koryo medicine), 즉 북한식 한방 요법에 따른다. 환자는 대부분 서울 시민이지만,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탈북민과 중국 교포도 많다. 중국 교포들은 식사나 생활습관이 북한 주민들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이곳에서 처방하는 약과 치료법이 제법 잘 맞는다고 한다. 100년 한의원이 광화문 부근에 있었을 때는 정부 고위인사들도 자주 찾아왔다. 그러나 높아만 가는 건물 임대료를 견디다 못해 2017년 ‘광화문 100년 한의원’을 문래동으로 옮겨 ‘영등포 100년 한의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실내 규모는 과거보다 2배나 넓어져서 661㎡(200평) 가 되었다. 또 하나의 도전 석 원장의 고향은 양강도 갑산이다. 그는 1998년 10월 지금의 아내인 연인과 함께 휴전선을 넘어 남한에 왔다. 그 후 결혼을 했고 현재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큰 아들, 고교생인 둘째 아들, 중학생인 딸을 두고 있다. 북한에 두고 온 부모와 삼 형제를 비롯한 가족의 소식은 끊긴 지 오래다. “연기도 없이 사라졌어요. 소리소문없이 증발했다고 해요.” 그저 간단히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탈북 당시 석 원장은 현역 군의관 신분이었다. 남한의 대위계급에 해당하는 북한군 88호 병원 응급실 진료부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김일성종합대학 소속인 평양의학대학 동의학부를 졸업하고 ‘고려의사’ 자격을 딴 그는 북한 기초의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기초의학연구소는 흔히 ‘만수무강연구소’로 불린다. 아버지가 호위사령부(청와대 경호실에 해당) 고급군관이어서 혜택을 누린 셈이라고 했다. 그가 북한의 현실에 절망을 느끼게 된 것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후 지방의 군부대병원으로 출장 가서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군인들을 보면서였다. 게다가 외국에서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동료 의사들의 얘기를 들으며 남쪽으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함께 탈북을 결심했다. 제3국을 경유하지 않고 탈북 경로를 휴전선으로 선택한 것은 군 장교의 신분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홀몸이 아니었기에 더욱 커다란 모험이었다. 기차를 타면 검문을 받아야 했으므로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서 얻어 타는 등 온갖 수단을 써가며 평양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꼬박 2박 3일이 걸렸다. 그는 남한 정착 3년 만에 한의사국가자격시험에 합격해 의사 면허를 얻었다. 남북한 한의사 자격을 모두 따낸 최초의 기록을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탈북민의 의사자격 기준이 없었다. 1999년 대한한의학회 전문가들의 테스트와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교육부와 보건복지부에서 국가고시 응시 자격을 얻어냈다. 교회에서 만난 교수들로부터 대학 교재를 추천받고 한의사 국가고시 수험서를 사서 동네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어려운 한자가 가득한 남한의 한의학 교재를 읽는 게 힘들었다. 북한에서는 기초한자 정도만 배웠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 도서관에서 옥편을 잡고 진땀을 흘리고 나자 한자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한의사 자격을 딴 후 경희대 한의대학원에서 석사학위도 받았다. 2002년 마침내 ‘광화문 100년 한의원’을 열어 새 삶의 터전을 잡았다. 이후 19년 동안 그는 형편이 어려운 탈북민 환자들에게 진료비를 받지 않고 있다. “어디가 아프다고 얘기해도 말이 달라 못 알아듣는 병원이 많다고 합니다. 나라도 알아주니 환자가 마음이 덜 불편하고 하소연도 할 수 있다고 하네요. 제가 그들보다 먼저 서울에 왔고, 같은 문제를 이미 겪었으니까요.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100년 한의원은 탈북자들 사이에서 ‘탈북자병원’으로 불린다. 아픈 곳이 있어 찾아가면 주머니 걱정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석 원장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한의학의 가장 큰 차이는 침 요법입니다. 북한의 침은 아주 크거든요. 그래도 맞고 나면 시원해 탈북민이 그리워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1. 석 원장은 자신이 힘들게 서울에 정착해 자격증을 따고 한의원을 개원하는 과정에서 남한사회에서 받은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무료진료 등의 봉사활동을 꾸준히 펼쳐왔다. 2004년부터 매주 이어온 봉사활동이 지금은 코로나 19로 잠시 보류되는 중이다. 2. 그가 창립하고 이사장으로 있는 ‘하나사랑협회’는 현재 남한과 북한 출신의 의사, 간호사를 비롯한 자원 의료 봉사 인원이 40명으로 늘어났다. 또 하나의 도전 석 원장의 고향은 양강도 갑산이다. 그는 1998년 10월 지금의 아내인 연인과 함께 휴전선을 넘어 남한에 왔다. 그 후 결혼을 했고 현재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큰 아들, 고교생인 둘째 아들, 중학생인 딸을 두고 있다. 북한에 두고 온 부모와 삼 형제를 비롯한 가족의 소식은 끊긴 지 오래다. “연기도 없이 사라졌어요. 소리소문없이 증발했다고 해요.” 그저 간단히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탈북 당시 석 원장은 현역 군의관 신분이었다. 남한의 대위계급에 해당하는 북한군 88호 병원 응급실 진료부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김일성종합대학 소속인 평양의학대학 동의학부를 졸업하고 ‘고려의사’ 자격을 딴 그는 북한 기초의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기초의학연구소는 흔히 ‘만수무강연구소’로 불린다. 아버지가 호위사령부(청와대 경호실에 해당) 고급군관이어서 혜택을 누린 셈이라고 했다. 그가 북한의 현실에 절망을 느끼게 된 것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후 지방의 군부대병원으로 출장 가서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군인들을 보면서였다. 게다가 외국에서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동료 의사들의 얘기를 들으며 남쪽으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함께 탈북을 결심했다. 제3국을 경유하지 않고 탈북 경로를 휴전선으로 선택한 것은 군 장교의 신분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홀몸이 아니었기에 더욱 커다란 모험이었다. 기차를 타면 검문을 받아야 했으므로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서 얻어 타는 등 온갖 수단을 써가며 평양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꼬박 2박 3일이 걸렸다. 그는 남한 정착 3년 만에 한의사국가자격시험에 합격해 의사 면허를 얻었다. 남북한 한의사 자격을 모두 따낸 최초의 기록을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탈북민의 의사자격 기준이 없었다. 1999년 대한한의학회 전문가들의 테스트와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교육부와 보건복지부에서 국가고시 응시 자격을 얻어냈다. 교회에서 만난 교수들로부터 대학 교재를 추천받고 한의사 국가고시 수험서를 사서 동네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어려운 한자가 가득한 남한의 한의학 교재를 읽는 게 힘들었다. 북한에서는 기초한자 정도만 배웠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 도서관에서 옥편을 잡고 진땀을 흘리고 나자 한자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한의사 자격을 딴 후 경희대 한의대학원에서 석사학위도 받았다. 2002년 마침내 ‘광화문 100년 한의원’을 열어 새 삶의 터전을 잡았다. 이후 19년 동안 그는 형편이 어려운 탈북민 환자들에게 진료비를 받지 않고 있다. “어디가 아프다고 얘기해도 말이 달라 못 알아듣는 병원이 많다고 합니다. 나라도 알아주니 환자가 마음이 덜 불편하고 하소연도 할 수 있다고 하네요. 제가 그들보다 먼저 서울에 왔고, 같은 문제를 이미 겪었으니까요.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100년 한의원은 탈북자들 사이에서 ‘탈북자병원’으로 불린다. 아픈 곳이 있어 찾아가면 주머니 걱정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석 원장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한의학의 가장 큰 차이는 침 요법입니다. 북한의 침은 아주 크거든요. 그래도 맞고 나면 시원해 탈북민이 그리워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3. 석 원장은 북한의 한의학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다. 김일성 전 주석이 평소에 즐겨했던 자연요법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김일성 장수건강법⟩도 그 중 하나이다. 4. 북한의 전통 한의학인‘고려의학’ 정보가 담긴 ⟨생명을 살리는 북한의 민간요법⟩. 북한 한의학에 대한 자부심 석 원장은 평양 기초의학연구소에서 심장·혈관계 연구원으로 근무한 경험을 살려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복용한 것으로 알려진 유심환(柔心丸), 태고환(太古丸)을 직접 만들고 있기도 하다. 두 가지 약은 각각 스트레스 질환과 노화 방지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는 고려의학에 대한 자부심도 크다. “고려의사는 한방과 양방을 함께 배우죠. 양방 외과에서 수술 집도까지 배웁니다. 북한에서는 보통 한방과 양방 검사를 같이해서 진단을 내립니다. 진맥과 양방 기본검사를 다 해서 그 자료를 바탕으로 진단을 하고 치료는 주로 한방으로 합니다. 제가 고려의학부를 졸업할 당시 제 학년이 30명이었는데 그 중 한 두 명 정도만 양방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교육 기간은 6년 6개월이고, 6개월은 임상실습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인턴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남한처럼 양의학 한의학을 엄격히 분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또 다른 차이점에 주목한다. “북한에서는 한글로 고려의학을 공부합니다. 남한의 한의학 교재는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어 어려웠습니다. 북한에서는 객관식 문제를 풀어본 일도 없었습니다. 북한의 시험은 모두 주관식이고, 답을 작성한 후 말로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북한의 한의학은 조선시대 의관 허준(1539~1615 許浚)이 편찬한 ⟨동의보감(東醫寶鑑)⟩(1610)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남북이 분단된 이후 발전 양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북한은 치료의학이 발달했다. 조선 말기 한의사 이제마(1837~1900 李濟馬)의 사상의학을 토대로 체질을 분류해 치료한다. 만성 질환은 한방치료 대상으로 꼽는다. 체질을 개선해야 면역이 형성되고 병과 싸울 수 있어서다. “북한은 한약 처방이 잘 되고 있는 편입니다. 치료 위주의 약 처방이 구체적으로 체질에 따라 배분이 잘 돼 있지요. 임상시험을 통해 객관화·규격화가 돼 있고 효능도 비교적 좋습니다. 또한 침술이 뛰어납니다. 남한에서는 자극을 덜 주기 위해서 얇고 작은 침으로 쓰지만, 북한 침은 아주 굵습니다. 굵은 침이 더 아플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는 이어 ‘환자 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본인의 정신력이 우선이고, 그 다음 어떤 의사한테 어떤 약과 치료법을 처방받는가에 따라 다르다’고 말한다.남북한 양쪽의 한의학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북한에 우수한 약재가 많아 남북간의 협력연구가 바람직하지만 현재의 모든 여건이 희망적이지 않아 아쉽다고 석 원장은 말한다. 봉사활동으로 보답 석 원장은 그사이 틈틈이 ⟨생명을 살리는 북한의 민간요법⟩(2003), ⟨등산도 하고 산삼도 캐기⟩(2003), ⟨김일성 장수건강법⟩(2004), ⟨북한의 의료실태⟩(2006) 등 4권의 책도 펴냈다. ⟨김일성 장수건강법⟩은 일본어로도 번역, 출판됐다. 늦었지만 박사학위까지 딸 계획이다.그가 외부 의료봉사를 이어온 지도 어느덧 17년째가 됐다. 한의원을 개원한 지 2년 만인 2004년 다른 탈북 한의사 한 사람과 어르신 무료진료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정착하는 과정에서 남한 국민 세금을 받고 남한 사회로부터 많은 배려를 받았습니다. 보답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죠. 게다가 봉사를 하면 저 자신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냥 한없이 기분이 좋지요.”‘탈북의료인연합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봉사활동 조직은 2015년 ‘사단법인 하나사랑협회’로 확대 개편되었으나 석 원장이 줄곧 이사장을 맡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동안 탈북의료인수효가 늘어나고 취지에 공감한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봉사자와 후원자도 늘어났다. 한의사, 물리치료사 등 의료인력 30여 명을 포함해 모두 130여 명의 회원들이 봉사에 참여하고 있다.어떤 일이든 1호의 무게는 남다르다. 석 원장 역시 1호의 짐을 평생 짊어지고 갈 수 밖에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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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UMMER 167

미나리의 보편성 미나리는 독특한 향미와 아삭한 식감이 매력적인 식재료다. 최근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Lee Isaac Chung) 감독의 자전적 영화 ‘미나리’가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미나리가 단순한 식재료를 너머 한국인의 강인한 적응력과 생명력의 상징이 되었다. 들판의 풀 대부분은 독성 물질을 함유하고 있어 입에 넣으면 쓰다. 어린이가 본능적으로 쓴맛을 거부하는 것도 이러한 독성 식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이다. 인류의 식문화는 먹을 수 있는 식물과 먹을 수 없는 식물을 구분하는 지식의 기반 위에 성장해왔다. 미나리와 독미나리는 언뜻 보면 비슷한 모양이다. 줄기 속은 비어있고 잎의 가장자리에는 뾰족한 톱니가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미나리의 이파리는 달걀을 세로로 자른 모양인 반면 독미나리는 길고 끝이 뾰족한 창날 모양이다. 미나리는 식용이고 독미나리는 먹을 수 없다. 미나리와 독미나리는 같은 과 식물이다. 미나리에는 독성 물질이 들어있지 않아서 날로 먹을 수도 있고 익혀 먹을 수도 있으며, 독특한 향미로 인해 예부터 한국에서 인기 있는 식재료였다. 실제로 1920년대 신문에 미나리의 시장가격이 실릴 정도로 흔한 음식이었다. 미나리가 이렇게 인기 있었던 것은 다른 나물보다 향기가 진하면서도 상큼한 맛이 독특하기도 하지만, 공심채처럼 속이 빈 줄기채소라서 살짝 데쳐 입에 넣고 씹으면 아삭아삭한 느낌이 무척 상쾌하다. 달면서도 맵고 서늘한 성질의 여름 식재료 미나리는 비타민과 무기질, 섬유질이 풍부하다. 17세기 조선시대 의서 동의보감 에 따르면 미나리는 갈증을 풀어주고 머리를 맑게 해주며 두통이나 구토에도 효과적이다 © Shin Hye-woo 申惠雨 미나리 잎의 가장자리에는 뾰족한 톱니가 있는데, 자세히 보면 이파리의 모양이 달걀을 세로로 자른 것과 비슷하다. 수분을 머금어 탱탱한 미나리 줄기는 씹으면 아삭한 식감이 상쾌하다. 미나리는 크게 논미나리와 밭미나리가 있는데, 물에서 자라는 논미나리는 줄기 속이 비어있고 밭미나리는 비교적 차있다. 특별한 식감 19세기말 조선시대의 조리서 에 소개된 미나리강회 조리법을 살펴보자. 미나리를 뿌리와 잎을 떼고 다듬어 끓는 물에 데쳐 준비한다. 달걀 지단, 석이버섯, 붉은 고추, 양지머리를 가늘게 채 썰어서 가운데 잣을 넣고 데친 미나리로 돌돌 말아낸다. 이를 접시에 가지런히 담고 초고추장을 곁들여 먹는다. 이 요리의 중심에 있는 것은 다른 재료를 묶어주는 아삭아삭한 미나리이다. 우리는 왜 아삭한 식감을 사랑하는가? 신경문화인류학자 존 앨런(John S. Allen)은 자신의 책 에서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인간이 오래 전부터 곤충을 즐겨 먹은 영장류라는 게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는 불을 이용한 조리로 식재료를 원래보다 더 바삭한 음식으로 만들어 먹으며 바삭한 식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마지막 이유는 신선한 식물이 아삭한 식감을 낸다는 것이다. 수분이 가득 차 세포벽이 부풀어 오른 채소는 씹으면 ‘아사삭’하는 소리와 함께 터지면서 즙을 낸다. 반대로 오래 보관하여 수분이 빠져나간 채소는 흐물흐물하고 질긴 느낌이다. 수분을 머금어 탱탱한 미나리는 가볍게 데치거나 볶아도 아삭한 식감이 살아있다. 김치나 장아찌로 만들어주어도 아삭함이 유지된다. 새콤한 맛의 유기산이 세포벽을 단단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나리의 아삭한 맛을 더 확실히 즐기는 방법은 재배지로 가서 갓 수확한 미나리를 날 것 그대로 맛보는 것이다.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한재 마을에서 나는 한재미나리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초현리, 음지리, 평양리, 상리 일원을 한재라고 부르는데, 배수가 잘 되는 화산암 토양 특성이 미나리 재배에 알맞다. 미나리는 크게 논미나리와 밭미나리로 나눈다. 자라는 내내 물속에서 재배하는 논미나리는 앞서 설명처럼 줄기 속이 비어있다. 반면 밭미나리는 줄기 속이 비교적 차있다. 한재 미나리는 두 가지를 절충한 방식으로 재배하여 속이 대부분 차있다. 아삭하면서 향이 좋다. 봄에 수확하는 미나리를 구운 삼겹살과 함께 쌈을 싸먹는다. 상추 대신 미나리를 날것 그대로 깔고 삼겹살, 마늘, 된장을 올려 먹으면 미나리의 상큼한 향이 돼지고기의 느끼함을 잡아준다. 불판에 고기를 구운 뒤에 미나리를 함께 올려서 살짝 익혀서 먹기도 한다. 매력적인 향기 미나리의 향기는 테르펜(terpene)이라고 불리는 휘발성 물질 때문이다. 미나리를 한입 넣고 씹을 때 소나무, 전나무, 개입갈나무(cedar)가 울창한 침엽수 숲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피넨(pinene), 미르센(myrcene) 같은 테르펜 물질이 입속에서 진동하기 때문이다. 감귤류 과일, 라임 껍질, 생강, 갈랑갈 느낌을 주는 향기 성분도 함께 들어있다. 그래서 미나리를 넣어주면 요리 속의 비린내를 줄여준다. 미나리를 매운탕 같은 생선 요리에 많이 쓰는 데는 이런 과학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미나리의 향긋한 냄새는 구수한 감칠맛을 내는 된장과도 잘 어울린다. 된장찌개에 미나리를 넣어 먹는 사람이야 이미 많이 있었지만, 1939년 4월 2일 조선일보에는 된장에 박은 미나리 요리법이 소개됐다. “미나리를 깨끗이 씻어 한 시간정도 더운 물에 담갔다가 대접에 된장을 깔고 그 위에 얇게 올린다. 그리고 또 다시 된장을 깔고 미나리를 올린 뒤 뚜껑을 덮어둔다. 이틀이 지나서 꺼내 먹으면 맛이 그럴 듯하다. 된장이 좋을수록 맛이 좋다.” 식물 속에 들어있는 이러한 향기 물질은 기본적으로 세균이나 곤충과 같은 외부 침입자들에게 저항하기 위한 무기이다. 그래서 미나리 향은 물속에서 보다 밭에서 기를 때가 더 강하다. 산이나 들판에서 자란 미나리에는 야생이라는 의미의 접두어 돌을 붙여 돌미나리라고 부른다. 돌미나리는 논, 밭에서 재배한 미나리보다 더 향이 강하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항성 향기 물질을 많이 만들기 때문이다. 미나리에는 향기 물질 외에도 다양한 항산화물질이 들어 있어 항염증, 항산화, 간장보호 효과 등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복어 요리에 미나리를 넣는 것도 미나리의 해독 효과로 혹시 복어 독이 남아있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미나리를 넣는다고 복어의 독을 해독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맛을 더 좋게 하는 용도로 이해하는 게 맞다. 달걀지단, 쇠고기 볶음, 버섯 등 가늘게 채 썬 여러 재료를 데친 미나리로 돌돌 말아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미나리강회는 조선 시대 궁중 수라상에 오르거나 연회에 차려지던 고급 음식이었다. ©(사)궁중음식연구원(Institute of Korean Royal Cuisine) 육즙 가득한 삼겹살과 신선하고 시원한 미나리는 매우 어울리는 식재료다. 깨끗이 씻은 생미나리를 구운 삼겹살에 곁들이거나, 처음부터 삼겹살과 함께 구워 먹어도 좋다. © 유은영(Yu Eun-young) 향이 강한 미나리는 ‘동양의 파슬리’라고도 불리며 최근에는 파스타의 재료로 많이 쓰이고 있다. ©이밥차 (2bob.co.kr) 다진 미나리를 올리브유에 절여 놓은 미나리 페스토는 파스타의 주재료는 물론 바질 페스토나 시금치 페스토처럼 빵에 발라 먹어도 맛있다. 강인한 생명력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란단다.” 정이삭(Lee Isaac Chung) 감독의 영화 에서 할머니가 손자에게 하는 말이다. 낯선 땅 아칸소에 도착한 한국인 가족에게 정착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곳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 이민자의 삶은 미나리를 닮았다. 얼핏 미나리는 그저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식물로만 보인다. 하지만 사실 미나리는 주변의 위협과 맞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미나리를 맛본 적 없는 사람에게 미나리와 그걸 먹는 사람이 생소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미나리는 알고 보면 누구에게나 가깝게 느껴질 만한 채소이다. 미르푸아, 소프리토에 사용하는 당근과 셀러리가 모두 미나리의 친척이다. 셀러리의 아삭한 식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미나리와도 금방 친해질 수 있다. 바질 대신 미나리를 넣어 페스토를 만들거나 오일 파스타에 미나리를 썰어 넣고 함께 볶아도 맛이 아주 잘 어울린다. 세계 여러 지역의 식문화를 비교해보면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속 이민 가족의 삶을 보면서 누구나 공감하게 되는 것도 인간이 공유하는 그런 보편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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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PRING 424

추억 속에 불을 밝힌 시골 간이역 최근 서울에서 안동을 잇는 고속열차가 개통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제 안동 북쪽에 인접해 있는 내 고향 영주까지 1시간 40분이면 갈 수 있게 되었다. 60여 년 전인 1955년 초 어느 추운 겨울날, 열세 살 가난한 산골 소년이었던 나는 영주역에서 생애 최초로 혼자 기차를 탔다. 아침에 탄 완행열차는 낯선 이름의 많은 역들을 다 통과하고 나서 날이 어두워져 갈 무렵에야 종착역인 서울에 도착했다. 이제 그 머나먼 길을 한 시간 반 남짓이면 갈 수 있게 되었다니 얼마나 큰 변화이며 발전인가! 그러나 이 새로운 교통 수단의 편리와 안락과 속도에 대한 놀라움과 고마움의 한편에는 지난 긴 세월의 밑바닥에 침전된 삶의 느리고 정다운 풍경들이 그리움과 함께 가라앉아 있다. 소년의 첫 기차 여행은 두렵고 신기하고 가슴 설렜다. 옆자리에 앉은 어른이 무얼 하러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려고 서울 간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객차 안에는 좌석과 복도에 승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면 객실 안이 캄캄해졌다가 곧 다시 환해졌다. 기관차가 내뿜는 검은 연기와 그을음이 열린 차창으로 들어왔다. © 안홍범 작은 시골 역에서 기차가 멈춘다. 내게 삶은 계란을 나누어 주던 앞자리 아주머니는 침을 흘리며 자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보따리를 챙긴다. 객차에서 내린 아주머니와 함께 교복 입은 어린 학생의 뒷모습이 저 멀리 사라져 가는 간이역…. 코스모스 같은 일년생 꽃들이 덧없이 피어 바람에 흔들리는 화단…. 이런 시골 역들의 풍경은 내 기차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일부가 되었다. 이제 쾌속의 KTX 열차는 그 작은 역들을 모른 채 무심히 지나쳐 갈 뿐이다. 아니 많은 시골 역들이 오래전 그 기능을 잃고 폐역으로 철거되었다. 또는 용도 폐기된 작은 간이역 역사를 카페, 간이 음식점, 작은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사람들의 추억 속으로 소환하고 관광 상품으로 되살리기도 한다. 한밤에 선잠이 깨면 나는 간혹 어린 소년이었던 나를 그 외딴 간이역의 어둠 속에 앉혀 본다. 그리고 흘러간 내 생애의 간이역 대합실들에 흐린 불을 켜 놓고 곽재구(郭在九) 시인이 노래한 를 그려 본다. “……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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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PRING 427

봄식탁의 보물, 두릅 쌉싸름하고 거칠고 서걱하면서도 탄력있는 식감이 매력인 두릅은 짧아진 봄처럼 빠르게 나타났다가 금새 몸을 감추는 봄나물이다. 요즘엔 한식과 양식의 경계를 두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조리되어 계절의 향기를 전한다. 채소를 많이 섭취하는 한국인에게 봄은 특별한 계절이다. OECD 국가 중 1인당 하루 채소 섭취량에서 한국인이 항상 선두권을 달리는 이유가 둘 있다. 하나는 채소를 발효한 김치, 다른 하나는 신선한 나물이다. 상당수의 나물은 봄에만 먹을 수 있다. 식물이 자랄수록 조직이 더 단단해지고 경우에 따라 독소가 생성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두릅나무의 새순을 잘라 나물처럼 살짝 데쳐서 먹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두릅은 벛꽃이 피는 때에 맞춰 수확한다. 들에서 재배하는 경우 남쪽에서는 4월 초순, 중북부에서는 4월 중하순에 수확한다. 모든 싹이 한 번에 올라오는 것은 아니어서 3~4회에 걸쳐 수확한다. 요즘은 온실에서 재배하여 이른 봄, 여름, 심지어 겨울에도 두릅이 나온다. 일년에 한 달, 4월에 수확해 먹는 두릅은 짧아진 봄처럼 강렬하게 왔다가 금세 떠나는 귀한 봄나물이다. © Shin Hye-woo 申惠雨 매력적인 식감 두릅은 쌉쌀한 맛에 나무 같기도 하고 풀 같기도 한 향미가 독특하다. 그러나 두릅이 가진 매력은 그 식감에 있다. 끓는 물에 살짝 데친 두릅을 입에 넣으면 부드러우면서도 서걱하게 씹힌다. 두릅에는 다른 봄나물에서 느껴지는 질깃한 식감이 없다. 표면에 잔 가시가 있어서 처음에는 조금 거친 느낌인데 치아에 부딪힐 때마다 일정한 탄력이 느껴지면서 가는 실뭉치처럼 끊어진다. 묘한 식감 때문에 두릅을 처음 먹는 사람은 자꾸 씹어보게 된다. 이런 식감으로 인해 두릅을 먹는 방법은 생선 회를 먹을 때와 아주 비슷하다.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데 오징어를 데쳐서 함께 먹기도 한다. 오징어와 두릅의 전혀 다른 식감이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오징어 대신 돼지고기를 삶아 만든 편육을 곁들여 먹기도 한다. 1924년 출간된 한국 최초의 컬러 인쇄판 요리책 (“Various New Korean Recipes”)에 소개된 조리법도 가볍고 단순하다. “생두릅을 무르지 않게 잠깐 삶아 약에 감초 쓰듯 어슷썰어 놓고 소금 치고 깨소금 뿌리고 기름을 흥건하도록 쳐서 주무르면 풋나물 중에 극상등이요, 아무든지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 두릅을 오래 삶으면 조직이 무르게 되어 지루하고 밋밋한 음식이 되어 버린다. 짧은 시간 삶아서 먹어야 풍미와 식감이 좋다. 땅두릅이라고 불리는 독활 순이나 개두릅이라 불리는 음나무 순도 모두 데쳐서 숙회로 먹는다. 1959년 4월 30일 동아일보에는 이렇게 깨소금과 기름에 두릅을 무쳐 먹는 요리법에 더해 껍질을 벗겨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곱게 다진 쇠고기와 함께 양념을 넣고 볶아 먹는 방법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방법이 제일 흔하지만 이 경우 소스 맛이 두릅 향을 가린다는 단점이 있다. 장아찌를 만들어 먹으면 자연 그대로의 두릅 향을 더 진하게 즐길 수 있다. 두릅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빼고 저장 용기에 켜켜이 쌓은 다음 간장, 식초, 설탕, 물을 1:1:1:1.5 의 비율로 섞어 끓여낸 소스를 부어 준 뒤 실온에서 이삼 일 숙성시켰다가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는다. 쓴맛은 줄어들고 나무와 약초를 섞은 듯한 향이 더 진해진다. 먹고 나면 왠지 더 건강해지는 듯한 맛이다. 새순을 잘라 살짝 데치면 두릅 숙회를 맛볼 수 있다. 두께가 두꺼운 두릅은 세로로 반을 자르거나 밑둥에 십자 모양으로 칼집을 내어 안까지 고루 데친다. © blog.naver.com/lovejnkm 식초, 설탕, 소금을 섞은 단촛물을 살짝 끓여 양념한 밥에 데친 두릅을 올리고 김으로 말아주면 봄 향기가 상쾌한 두릅 초밥이 완성된다. © blog.naver.com/magicpt78 비빔밥에 각종 나물과 함께 제철 두릅을 데쳐 올리면 독특하면서도 강한 풍미가 더해진다. © blog.naver.com/cgr61 다양한 활용 충북 제천의 두릅 재배자 천용호 씨는 두릅 순을 이용한 장아찌와 김치로 특허를 받았다. 장아찌 염장액에 사용하는 간장, 물, 설탕, 식초의 혼합 비율과 숙성 방법이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세 번에 걸친 숙성으로 완성된 두릅 순 장아찌는 진공 포장되어 냉장고에서 3년 이상 보관할 수 있다. 김치는 일반 김치와 동일한 방법으로 담그지만 두릅 순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쳤다가 물기를 짜낸 다음 사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두릅을 소금에 절여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소금기를 빼서 먹기도 한다. 두릅은 아스파라거스와 유사한 면이 있다. 두 가지 모두 봄철에 나는 순이다. 살짝 데친 두릅의 식감은 데친 아스파라거스의 식감과 아주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하다. 파스타 면을 끓이고 남은 면수에 두릅을 잠시 데쳐서 앤초비 오일 파스타에 넣으면 동서양이 만나는 듯한 맛의 요리가 된다. 길쭉하게 썬 쇠고기를 두릅과 번갈아 꼬챙이에 끼워 구워먹던 70년대의 요리법이 요즘에는 햄이나 맛살에 아스파라거스를 끼워 만드는 산적으로 변화한 것도 아마 두릅과 아스파라거스의 유사점에 착안한 누군가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두릅에 얇은 반죽을 입혀 튀겨 먹는 일본에서는 아스파라거스도 템푸라로 튀겨 먹는다. 2018년 3월 17일 중앙일보에는 두릅 그라탱 레시피가 실렸다. 데친 두릅에 삶은 계란을 다져 섞은 후 베샤멜 소스를 더해 오븐에 구워낸 요리이다. 봄철 두릅은 서울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메뉴에도 자주 오른다. 지역 식재료에 한식 요리법과 다른 나라 요리법을 창의적으로 함께 응용하는 것은 봄의 향기를 만끽하고 싶은 미식가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살짝 데친 두릅의 식감과 데친 아스파라거스의 식감은 아주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하다. 파스타 면을 끓이고 남은 면수에 두릅을 잠시 데쳐서 앤초비 오일 파스타에 넣으면 동서양이 만나는 듯한 맛의 요리가 된다. 식재료의 정체성 두릅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뭐라고 말할까. 왜 나를 한식이 아닌 이탈리아식으로 또는 프랑스식으로 요리했냐고 물어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보다는 ‘내가 잘려서 당신의 식탁에 오르지 않았다면 어떤 모습으로 컸을지 아는가’ 묻지 않을까. 우리는 종종 어떤 음식이 하나의 생명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식재료로서 두릅나무의 순은 본 적이 있지만 그 순을 그대로 두면 어떤 나무로 자라게 되는지 본 사람은 드물다. 스테이크에 곁들인 아스파라거스는 수 없이 먹어봤지만 아스파라거스 순이 자라면 어떤 모습의 식물이 되는지 본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행히 두릅 순을 잘라내거나 아스파라거스를 채취한다고 그 식물이 죽지는 않는다. 수확하고 난 뒤에 가지를 잘라주고 적당한 수의 가지만 남겨주면 여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커다란 식물로 자라난다. 그대로 방치하면 두릅나무는 키가 3~4m가 되도록 자란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농부의 입장에서는 나무를 관리하고 두릅을 수확하기가 어려워진다. 가지를 자르고 싹을 솎아주고 줄기 수를 조절하면 나무의 키를 조절하면서 두릅 순의 수확량을 늘릴 수 있다. 온실에서 재배하는 경우에는 온도가 너무 높아지면 새순이 웃자라 살이 적어지고 맛과 향이 떨어지므로 농부는 밤낮으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주어야 한다. 마트에서는 두릅나무가 아닌 두릅 순만 볼 수 있으니 대부분의 소비자는 그 이상 알기 어렵다. 이제 식탁에 오른 두릅을 보면서 스스로 한번 물어 보는 것은 어떨까. 나는 두릅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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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PRING 150

한국형 크리처물의 진화 웹툰 원작의 넷플릭스 드라마 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폭발적이다. 스토리와 영상의 높은 완성도로 한국 크리처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국내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 관객까지 사로잡은 이 드라마의 매력은 무엇일까? 2020년 12월 넷플릭스로 전 세계에 방영된 10부작 드라마 의 인기가 연일 화제다. 공개된 지 4일 만에 홍콩, 싱가폴, 대만, 말레이시아, 페루 등 13개국에서 일일 랭킹 1위를 기록했고, 넷플릭스가 인기 순위를 알려주는 70개 이상 국가에서 모두 ‘탑10’안에 들었다. 세계 순위로는 3위까지 올랐다. 국내에서 최초로 제작된 크리처물이자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받는 등 불리한 조건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의 성공 배경에는 그동안 쌓아온 K-콘텐츠에 대한 넷플릭스의 신뢰가 있었다. 김칸비(Kim Carnby) 원작 스토리에 황영찬(Hwang Young-chan)의 그림을 입힌 동명의 원작 웹툰은 2017년 10월부터 2020년 7월까지 연재되며 이미 9개 언어로 서비스돼 글로벌 누적 조회 수 12억 건의 기록을 세웠다. 웹툰 속 다양한 괴물들의 영상화에는 앞서 공개된 드라마 이 한국형 아포칼립스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려 놓았다. 여기에 영화 이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이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 4개 부문의 상을 받으며 K-콘텐츠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드라마 이 나설 자리는 이처럼 토양이 잘 다져지고 시의적절했다. 넷플릭스는 총 300억 원의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 부으며 개봉 전부터 대작(大作)의 출현을 예고했고, 뛰어난 CG 기술과 세트 퀄리티 등으로 관객이 기대했던 ‘보는 맛’을 충분히 충족시켰다. 지휘봉은 TV 드라마 으로 절절한 스토리와 아름다운 영상미를 입증한 이응복 감독이 쥐었다. 이 감독은 한 인터뷰를 통해 “평소 크리처물을 잘 보지 않는데, 원작 웹툰을 보는 순간 한국 드라마의 소재를 확장하는 차원에서 도전하고 싶었다. 글로벌한 소재로도 적합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칸비 글, 황영찬 그림의 웹툰 원작 한국 드라마 이 2020년 12월 18일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되었다. 작품 공개 이후 첫 4주 동안 전 세계 2200만 유료 구독가구를 기록했다. 방영된 시즌 1은 10회로 구성됐으며 러닝타임은 총 515분이다.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Netflix Original Series) 욕망의 감염 이야기는 은둔형 외톨이인 고등학생 현수(Hyun-su)가 홀로 이사 온 아파트 ‘그린홈’에서 시작된다. 현수를 비롯한 거주민들이 각양각색 괴물들과 대항하는 내용으로, 자신만 살아남으려는 자, 희생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들이 늘어나는 괴물들과 사투를 벌이며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다. 작품 초반부는 정체불명의 원인으로 인해 인육을 탐하는 괴물이 등장하는 전형적 좀비 아포칼립스를 표방한다. 고립된 아파트 건물을 최후의 보루 삼아 벌이는 서바이벌 투쟁도 종전에 보아 온 익숙한 좀비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괴물에게 물린 이가 다시 괴물이 되어 그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간다’는 좀비의 감염 공식은 이 작품에서 과감하게 부정된다. 애초부터 이 드라마에서는 인간이 바이러스 감염 같은 질병에 의한 것이 아닌 무언가로 말미암아 언제든 자아를 잃고 끔찍한 괴물로 변한다. 그 이유는 각기 자신의 욕망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형태 또한 갖가지 개인의 음험한 내면을 구상화했다. 환자복을 입은 채 촉수를 뻗어 흡혈하는 괴물, 근육 덩어리 몸으로 연신 “프로틴”을 외쳐대는 괴물 등이 이 같은 원인을 증명하며, 좀비 아포칼립스와 선을 긋는 미지의 공포로 작동한다. 이 감독 역시 “욕망으로 인해 괴물이 된다는 발상 자체가 참신해 영상으로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고 말한 바 있다. 에 등장하는 크리처의 움직임 연구에는 안무가 김설진(金雪镇 Kim Seol-Jin)이 참여했다. 그는 동물의 본능적인 움직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시즌 1 2화에서 주인공 현수의 집에 들어오는 연근 괴물. 주인공 현수는 세상을 차단하고 방 안에만 틀어박힌 히키코모리지만, 위기에 처한 공동체를 구하기 위해 문 밖으로 나간다. 시즌 1 3화에서 현수가 무기를 들고 연근 괴물을 처리하기 위해 나서는 장면.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Netflix Original Series) 극 중 국어 교사 정재헌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과 달리 검도를 수련한 경험을 살려 진검을 무기로 크리처와 싸운다. 시즌 1 3화에서 그가 프로틴 크리처를 유인하기 위해 몸을 날리고 있다. 에서는 극 중 인물들이 감염이 아닌 개인의 욕망에 의해 괴물로 변한다. 시즌 1 3화에서 그린 홈 주민들이 TV를 통해 생중계되는 대통령의 담화에 놀라고 있다.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이타적인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집단을 위한 희생을 감수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비로소 성장한다. 한국적 정서의 가족 드라마 누구나 언제든 괴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구축한 전선은 오히려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져 간다. 사람들은 괴물로 변할 가능성이 있는 이를 배척하고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의심하며 창을 겨눈다. 그럼으로써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이들의 신념을 끊임없이 흔들고 시험한다. 주인공 현수는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고 홀로 남은 인물이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로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그가 괴물이 되다 만 채 누구보다 나약했을 자아를 다잡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회차가 진행될수록 관객들은 서서히 이 드라마가 단순한 크리처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이타적인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집단을 위한 희생을 감수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비로소 성장한다. 이 드라마는 십여 명 이상의 등장 인물 저마다에 사연을 부여하고 살아 있는 인간으로 그려내려 한다. 이들이 생존을 위해 끝내 협력하는 험난한 과정은 당연히 극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인간에 관한 것이다. 과연 괴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는 이 감독의 이야기도 이와 맞닿아있다. 극중 대사가 이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눈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사람도 세상도 신의 뜻도(I realized that what you see isn’t everything – people, the world and god’s will.).” 인물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가는 과정은 각자의 드라마와 함께 인간성을 응원하는 작품의 주제와도 정확히 연결된다. 한국 드라마 특유의 ‘가족지향형 연대’마저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것으로 그려낸 배경이다. 긴장과 쾌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 특유의 재미 또한 여느 작품에 뒤지지 않는다. 생생한 공포를 선사하기 위해 이 감독이 1년간 할리우드의 특수효과팀과 머리를 맞댄 결과다. 배우들의 실제 연기를 촬영한 뒤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해 괴물들을 만들어냈고 이들의 움직임은 안무가 김설진이 구상했다. 이에 긴박한 상황 변화와 잘 짜인 액션이 긴장과 쾌감을 더해준다. 현관문을 두드리며 절규하는 여인이 섬뜩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아파트 정문에 나타난 괴물은 기다란 촉수를 뻗어 사람의 피를 빤다. 상악골이 절단된 채 청각에만 의존해 건물 안을 헤집고 다니는 괴물이나 거대한 근육질 괴물은 개중에도 더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해 각기 다른 형태의 스릴을 선사한다. 거대한 눈알 형상을 하거나, 거미를 연상시키는 등 괴물의 형태엔 애초에 정형화된 틀이 없다. 다양한 생김새에 기반한 각각의 습성 때문에 대응하는 인간들 또한 매번 임기응변을 펼칠 수밖에 없으니 서스펜스는 자연히 극대화된다. 특히 작품 후반부에 벌어지는 또 다른 인간 집단과의 싸움은 관객의 감정을 극한으로 치닫게 한다. 그렇게 은 폐허에 가까운 외딴 아파트 단지 안에 온갖 드라마를 쓸어 담으며 두려움과 쾌감뿐만 아니라 인간의 욕망, 그 속에서 자라나는 유대감을 모두 아우르는 휴먼 스펙터클로 탄생했다. K-콘텐츠의 전과 후를 나누는, 기준으로 도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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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PRING 467

고창, 위대한 씨앗이 움트는 고장 전라북도 고창 일대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가슴저린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고장이다. 빨간 동백꽃이 핀 이른 봄 날, 한국 농민운동의 큰 발자취가 남아 있는 땅으로 시인 이산하가 달려갔다. 수천 년 내려 온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코로나 19 한 방으로 휘청거린다.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는 적이 첨단미사일 못지 않게 무섭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이 전대미문의 상황을 견디어 나가고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죽어도 다가가 눈을 감겨줄 수 없다. 얼굴을 보며 꽃을 바칠 수도 없다. 코로나 19는 자유도 슬픔도 용납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동안 자유를 방종으로 기만하며 살아온 우리의 삶에 대한 강력한 경고일 것이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타인의 슬픔이나, 또는 나의 슬픔을 이용해 잇속을 챙긴 일이 없었나 돌이켜 볼 일이다. ‘메멘토 모리’– 이 무력한 순간에 가슴에 새기고 싶은 문구다.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 도솔암 올라 가는 길 옆의 마애여래좌상은 한 국에서 가장 큰 마애불상 중 하나로 고려시대에 조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체 높이 15.7m, 무릎 넓이 8.5m로 암벽 표면 6m 높이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1890년대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이 불상 앞에서 거사가 성공하기를 빌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혁명의 씨앗 고창으로 떠나기 며칠 전부터 잠을 설쳤다. 13부작 미국 드라마 >에 푹 빠진 탓이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덕분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혼자 넷플릭스의 세계에 탐닉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서울 용산역에서 출발한 KTX 고속열차가 1시간 40분 만에 광주 송정역에 도착했다. 코로나 사태로 승객이 줄자 목적지 근처인 정읍역을 건너뛰었다. 마중 나온 후배 차에 실려 거꾸로 고창을 거쳐 고부를 향해 달렸다. 고창읍내로 들어가는 로터리 홍보전광판이 ‘한반도 첫 수도 고창 방문을 환영합니다. 사계절 아름다운 선운산, 동학농민혁명(1894 東學農民革命) 성지’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그렇다. 여기는 조선 후기 19세기 말 동학농민혁명의 깃발이 처음 펄럭였던 곳이다. 그리고 그 전사들의 피와 뼈가 묻힌 무덤이다. 전광판 옆에 ‘복분자, 장어 특산품 원산지’, ‘전봉준(1855~1895 鄭鳳俊) 장군 동상건립 모금운동에 적극참여 부탁드립니다’라는 현수막들도 보였다. 정부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세운 전봉준 동상이야 여러 개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역 민간인들의 자발적 참여로 만든다는 의미인 듯했다. 승용차가 넓은 들판을 지나 한 작은 기와집 앞에 멈췄다. 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죽산마을 송두호(1829~1895 宋斗浩)의 집이다. 대문은 없고 오른쪽 콘크리트 기둥에 ‘동학농민혁명 모의장소’라는 커다란 글자가 보였다. 이 집이 바로 조선을 뒤흔든 농민혁명의 씨앗이 처음 뿌려진 곳이다. 위로 솟는 것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게 씨앗이다. 그 씨앗을 뿌리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서로 눈빛을 보며 결사항전을 약속했다. 그 결의의 결정체가 전봉준, 손화중(1861~1895 孫華仲), 김개남(1853~1895 金開男) 등 22명의 이름이 적힌 한 장짜리 ‘사발통문(沙鉢通文)’이다. 사발통문이란 주동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사발을 엎어놓고 그린 원을 중심으로 둥글게 서명해 지지자들에게 알리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둥글게 앉으면 지위고하를 판단하기 어렵다. 중세 유럽의 원탁회의와 유사하다. 이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이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랜 폭정에 항거하기 위한 풀뿌리 민중의 계획적인 사건이었음을 증명한다. 이 문서에 적힌 4개의 행동지침도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향하자는 일종의 전쟁 선포였다. 그런데 이 혁명군의 극비문서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53년 전 이 마을에 사는 송준섭(宋俊燮)씨의 집 마루 밑에 묻혀 있던 것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당시 혁명이 실패하자 정부 진압군이 여기는 ‘역적의 마을’이라 하여 마을 주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집은 불태워버렸다. 사발통문은 누군가 몰래 매장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이 집의 바로 앞집이 나를 안내하는 후배의 할아버지가 살던 집이었다. 후배가 계속 두 집을 번갈아 보았다. 눈빛이 젖어갔다. 가슴에 파문이 이는 듯했다. 내가 굳이 여기를 먼저 찾은 이유는 126년 전에 참수당한 한 혁명가의 숨결부터 찾아 묵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동학혁명모의탑’이 보였다. 사발통문 서명자들의 후손들이 건립한 것이다. 거기서 또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동학농민군위령탑’이 있다. 이름 없이 죽은 수십만 무명용사들을 기리는 탑이다. 고부의 1차봉기(반정부투쟁)는 성공했으나 공주 우금치(牛禁峙)의 2차봉기(항일독립투쟁)는 참패를 당했다. 조선군과 일본군의 총에 농민군은 전멸했다. 죽창과 총은 애당초 싸움이 될 수 없었다. 위령탑 앞에 하얀 쌀밥 한 그릇이 놓여 있다. 밥을 위해 굶주린 농민들이 곡괭이와 낫을 높이 들었다. 마스크를 나누어 쓰듯 함께 나누어 먹어야하는 게 밥이다. 광활한 들판을 보니 서울로 진군하는 동학농민군과 로마로 진군하는 스파르타쿠스 전사들이 겹쳐졌다. 두 혁명은 참수되었다. “빈손을 쥐면 주먹이 돼”라고 외치며 싸웠던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들.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노예해방을 이루고 자유를 얻었는데도 자조적으로 내뱉는 절규가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돈이 없으면 자유도 없어.” 그렇다. 밥 없는 자유는 죽음이다. 밥을 굶을 자유밖에 없는 약자들은 여전히 노예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현대판 노예는 발의 족쇄가 마음의 족쇄로 바뀌었을 뿐이다. 매년 3월 하순이면 국내 최대 동백꽃 군락지인 선운사 주변의 동백이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빨간 꽃잎과 짙푸른 잎사귀가 천년 고찰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 고창군청 선운사 대웅전과 마주 보고 있는 위치에 개방된 양식의 만세루(萬歲樓)는 설법을 위한 강당의 용도로 건축됐다. 이 절의 기록에 따르면 1620년 대양루(大陽樓)로 지어졌다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52년 다시 지으며 만세루로 불리게 되었다. 천정 대들보와 서까래 및 기둥을 다듬지 않은 원목을 그대로 사용해 지은 것이 특색이다. 바다가 주는 선물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자 가슴이 막혔다. 터널 속에 갇힌 듯 답답했다. 고창의 고인돌 유적지로 가다가 무거운 돌이 내 가슴을 누를 것 같아 선운사(禪雲寺)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고요한 절에 가서 나를 가라앉히고 마음속의 먼지도 씻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니 절은 동백꽃을 보러온 사람들로 넘쳤다. 동백꽃은 도솔암(兜率庵) 바위 절벽의 마애불과 함께 선운사의 대표적인 두 상징이다. 선운사는 577년 백제의 검단(黔丹)스님과 신라의 의운(義雲)스님이 서로 뜻을 모아 창건했다. 당시 두 나라는 전쟁 중이어서 피난민들이 많았다. 비록 적국의 국민이었으나 두 스님은 난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힘을 모아 절을 지어 공동체생활을 했다. 굶주린 백성들의 생계를 해결하고 고아들을 거둬 공부시켰다. 그래서 이 절은 원래 난민구제소였다. 약 1300년 뒤 농민군이 도솔암 마애불 앞에서 거사성공을 기도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대웅전 뒤편의 울창한 붉은 동백숲 사이로 오가는 스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절에서 나와 바닷가로 달렸다. 부안의 변산반도 격포항(格浦港)이 마주 보이는 동호해수욕장과 구시포 해수욕장의 명사십리(明沙十里)였다. 1km 이상 직선으로 펼쳐진 고운 백사장을 따라 수백 년 된 소나무숲이 울창하다. 새싹 같은 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솔향에 귀를 씻었다. 솔숲의 바람소리는 찻물 끓는 소리와 닮았다. 백사장 너머 갯벌이 아득히 펼쳐져 있다. 우리나라 서해는 세계 어느 바다보다도 조수간만의 차가 크기로 유명하다. 매일처럼 바다가 육지가 되고 육지가 바다가 되는 일이 반복된다. 내가 서 있는 지금은 바다가 육지다. 드넓게 펼쳐진 갯벌을 보니 바다 한 잎을 떼어내 염전을 만든 사람이 떠올랐다. 임진왜란(1592~1598) 때 이순신(1545~1598 李舜臣) 장군은 전쟁군수품이 바닥나자 해변 한 자락을 떼어내 큰 가마솥을 만들고 바닷물을 부어 증발시켰다. 그렇게 대량 생산된 소금을 팔아 수천 톤의 군량미를 마련했다. 그는 탁월한 전투지휘관이자 영민한 경영자였다. 이곳 바닷물은 염도가 높아서 피부병과 신경통 환자들의 해수욕이나 모래찜질 장소로 유명하다. 주변에 대규모 염전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소나무숲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맨발로 긴 백사장을 걷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걸었다. 맨살이 차가운 모래에 닿을 때마다 새로운 감각기관이 생겨나는 듯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그렇게 백사장을 산책하는 사이 석양이 지기 시작했다. 저녁노을은 동백꽃이 떨어지기 직전처럼 관능적이었고 장엄했다. 저녁식사는 고창 땅을 밟은 이상 풍천장어 구이와 복분자 술을 먹어야 한다. 이 지역의 명물인‘풍천장어’는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곳에서 잡아 특히 건강식으로 이름이 높다. 번화가가 아닌‘아는 사람만 간다’는 들판의 외딴 곳에 있는 한 식당으로 갔다. 정원과 실내 모두 넓은 ‘형제수산 풍천장어’집이었다. 주인이 직접 구워주는 참숯불 생장어구이는 양념장이 남달랐다. 소스에 들어간 재료가 한약 약초, 곡물 효소, 약초술 등 무려 20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계절따라 달리 나오는 반찬의 식재료도 모두 유기농 재배이다. 직접 담근 복분자 술도 혀를 갖고 놀았다. 장어와 술이 어우러져 성장판이 다시 열릴 것 같은 맛이었다. 고창군 공음면(孔音面) 학원농장 일대 청보리밭은 매년 봄이면 50만여 명이 찾는 관광 명소다. 이 곳의 청보리밭 축제는 지역 최대의 행사인데, 지난해부터 코로나 19 상황으로 잠정 보류되었다. 청보리밭 일대의 위치를 표시해주는 작은 장승. 안내판을 겸한 이런 장승들이 30여만평 규모의 넓은 청보리밭 주변 곳곳에 서 있다. 꽃이 져야 열매가 맺어지듯 아름다움을 버려야 새 생명이 탄생한다. 새삼 봄비에 젖어가는 저 들판의 새싹들이 경이롭다. 이번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은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여행이었다. 고창군에는 약 1,600기의 선사시대 지석묘가 분포되어 한국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룬다. 고창 고인돌 유적은 화순, 강화 유적과 함께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주말이면 고창읍성 앞 놀이마당에서 고창농악 공연이 펼쳐졌다. 읍성 앞에는 조선 후기 판소리의 대가 신재효(1812~1884 申在孝)의 생가가 있어 이곳에서도 전통음악을 공연했는데, 코로나 19로 인해 지난해부터모든 공연과 행사가 취소된 상태다. 고인돌 군집 다음날 아침 일찍 읍내의 고인돌 전시장을 둘러보고 대산면으로 갔다. 천연의 역사가 살아있는 원형 그대로의 고인돌을 대면하고 싶었다. 마을 입구에서 대산 중턱으로 올라가는 오솔길마다 고인돌 천지였다. 커다란 산 하나가 야외 선사 박물관이었다. 고인돌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었고 위로 올라갈수록 숫자가 낮아졌다. 산꼭대기의 1호까지 보고 싶었지만 너무 지쳐서 포기했다. 전 세계 고인돌의 60퍼센트가 몰려 있는 한반도에서도 고창 유적은 1천 여 기에 달하는 가장 큰 군집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형식도 독특하고 다양해서 고인돌 축조과정의 변천사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로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고창은 군 전체가 문화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3년에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생물자원의 다양성을 인정받아 군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오후에 지친 다리를 끌고 학원농장의 청보리밭으로 갔다. 아직은 철이 이르지만 매년 4월이 되면 인근의 유채꽃까지 활짝 피어 한 해 수십만이 찾아 오는 관광 명소이다. 파릇파릇 어린 싹이 돋아나는 밭뚝 사이로 걸어 나오며 이제 고창 여행을 마무리할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꽃이 져야 열매가 맺어지듯 아름다움을 버려야 새 생명이 탄생한다. 새삼 봄비에 젖어가는 저 들판의 새싹들이 경이롭다. 이번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은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여행이었다. 고전리 염전마을 운곡람사르습지 고창고인돌박물관 고창판소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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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PRING 446

하나의 코리아를 향한 공동 작업 북한 출신 작가 코이와 그의 멘토이자 미술치료사 신형미 작가의 전시회 ‘다시, 남향집’이 2020년 11월 25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열렸다. 이 전시는 두 작가가 공동 작업을 통해 북한이탈주민의 남한 정착과정 및 남북한 주민들의 상호 이해와 통일을 향한 염원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여 많은 관심을 끌었다. 탈북민 출신 작가 코이(Koi)는 자신을 드넓은 강물에서 맘껏 헤엄치며 살기 위해 어항을 탈출한 물고기에 비유한다. 흔히 ‘비단 잉어’로 불리는 코이는 작은 어항에 넣어두면 5~8㎝밖에 자라지 않는다. 반면, 연못에서 15~25㎝, 강물에서는 90~120㎝까지 너끈히 큰다. 코이라는 예명이 ‘넓고 자유로운’ 남한 땅에서 그가 키워가는 당찬 꿈을 말해준다. 코이는 열여덟 살이던 2008년 12월 홀로 함경북도 청진 고향 집을 떠나 국경을 넘어 중국에 도착했다. 그가 위험한 여정을 택한 것은 앞서 가족과 함께 남한에 와 살고 있던 친한 친구의 강력한 권고 때문이었다. 부모님도 그의 뜻을 꺾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태국을 거쳐 2009년 3월, 꿈에 그리던 남한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겁 없이 넘어왔다고 당시를 돌아본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라면 엄두도 못 낼 것 같다며. 북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코이는 서울에서 미술대학 진학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대안학교인 하늘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입시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2012년 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에 입학했다. 이 학과의 첫 탈북민 학생이었다. 2020. 목재, 아크릴페인트. 160 x 100 cm. 인사동 로포하우스에서 2020년 11월 25일부터 30일까지 열렸던 북한 출신 작가 코이와 그의 멘토이자 심리치료사 신형미 작가의 전시회 에 전시되었던 공동 작품으로 수열의 합 시그마에서 영감을 받아 한반도를 표현했다. 2020. 특수 패브릭(섬유원단) 100 x 100 cm. 수많은 사람들의 통일을 향한 염원이 모여 하나된 한반도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코이 작가의 생각을 담은 단독 작품이다. 우연, 또는 인연 입학 후 코이는 탈북청년크리스천연합회에서 미술치료사인 신형미(Shin Hyung-mee 辛亨美) 작가를 만났다. 신 작가는 코이를 처음 만났던 그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2013년 첫 만남에서 코이가 아주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지녔다는 걸 단박에 느꼈죠. 당시 제가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탈북청년들을 위해 지원하는 집단 심리 상담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코이가 저의 개인적인 지도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줄곧 멘토 역할을 해주고 있어요. 코이는 제가 주는 모든 것을 감사하게 받으며 끊임없이 발전해나가고 있습니다.” 남북한 출신 두 작가가 ‘통일’을 주제로 아홉 작품을 선보인 ‘다시, 남향집’은 멘토와 멘티로서 이들이 이어 온 특별한 인연의 결과이자 작가 코이를 알린 첫 전시이기도 했다. 통일부 남북통합문화 콘텐츠 창작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된 이 전시에는 두 작가의 공동 작품 3점과 각기 개인 작품 3점씩이 출품되었다. 회화, 섬유미술, 설치, 물감 프로젝트 등 다채로운 장르를 아우르는 작품들에 탈북민들이 자유와 평화 속에 더 나은 삶을 누리고자 남한으로 찾아 드는 모습을 담았다.‘남향집’은 햇볕이 잘 드는 마음 속의 따뜻한 집을 상징한다. 공동 작품 가운데 하나인 ‘시그마가 품은 한반도 지도’는 수열의 합 시그마(∑ Sigma) 에서 영감을 받아 삼천리 금수강산을 묘사했다. ‘색으로 소통하다’프로젝트에 참여한 59명이 힘을 더한 작품이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북한이탈주민 30명과 남한 시민 29명이 각자 생각하는 통일에 대한 이미지를 자기만의 색으로 표현해 물감을 만들었고, 여기에 두 작가가 작품 활동 중에서 느낀 ‘감정의 색’을 더해 모두 101개의 물감을 전시했다. 전시가 끝난 뒤 이 물감들은 통일교육이 필요한 여러 곳에 기증되었고, 앞으로 릴레이식으로 이어나갈 계획이다. 코이 작가의 단독 작품 ‘너와 함께 걷는 남향집 가는 길’은 마치 그가 북한에서 매일 신고 다녔던 운동화 50켤레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설치미술이다. “북에 있는 제 친구 50명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한 명 한 명에게 손편지를 신발에 써넣었어요. 북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들을 향한 그리움과 통일에 대한 소망을 담았습니다. 많은 관람객들이 이 작품 앞에서 오랜 시간 머무셨어요. 운동화 속 편지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꼼꼼히 읽고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계셨고, 어떤 분들은 큰 감명을 받았다는 감상평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제게도 가장 소중한 작품이었죠.” 그의 또 다른 작품‘유닛 하모니(Unit Harmony)’는 소원을 적어 날리면 이뤄지는 종이비행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나 하나의 유닛은 각기 다른 개인의 꿈을 상징한다. 이 모든 꿈들이 하나로 합쳐져 더 큰 꿈을 이루듯이 통일을 바라는 염원이 모여 하나된 한반도를 이룰 수 있음을 표현했다 소통과 인내 신형미 작가의 단독 작품 ‘오래 달리기 트렉’은 미술치료사로 일하면서 그가 만난 수많은 탈북민 가운데 기억에 또렷이 남는 46명의 길고 힘든 여정을 구현했다. “저에게 오래 달리기는 어릴 때부터 어려운 일이에요. 북한이탈주민들이 남한에 도착하기까지 위험한 순간도 경험했고, 안도의 순간들도 있었을 텐데 장거리 트렉에서 느끼는 감정과 비교하면 어떨까 상상해 보는 것이죠.” 신 작가의 또 다른 단독 작품 ‘자리’는 의자 시리즈 중 하나로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몇 명의 탈북민 내담자를 표징한다. 남다른 멘토와 멘티 관계이지만 두 작가는 살아온 환경과 과정이 다른 만큼 이번 작업을 하면서 가치관의 차이를 실감하기도 했다. 소통과 배려, 인내가 필요했다. 협력하는 과정을 통해 ‘남과 북의 통합’을 고민했다. 코이 작가는 예상보다 많은 관람객들이 자신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고 말한다. “코로나 19로 관람이 저조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뜻밖에 많은 분들이 찾아줘서 놀랐습니다. 저의 재능이 통일을 위해 의미 있게 쓰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특히 혼자 무언가를 해내는 것보다 ‘남한 출신 작가와 북한 출신 작가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통일의 첫 단추를 끼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전시는 신형미 작가가 기획을 제안해 추진했다. 2008년 서울여대와 인천동부교육청 프로젝트 ‘하나 됨을 위한 탈북 청소년 예술치료 교육’이 발단이 되어 열린 전시회 의 연장선상에 있는 전시다. 올 봄 민주평화통일자문회 평화나눔갤러리에서 한 번 더 전시회가 열린다. “저희는 기획단계부터 일회성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되는 전시로 준비했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더 큰 전시 프로젝트로 발전해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소통하며 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으로 북한에 자연스럽게 다가가고자 가교 역할을 할 계획입니다.”신 작가의 설명이다. 이 모든 꿈들이 하나로 합쳐져 더 큰 꿈을 이루듯이 통일을 바라는 염원이 모여 하나된 한반도를 이룰 수 있음을 표현했다. 2020. 패브릭, 핸드라이팅, 신발 설치작품 50컬레. 코이 작가가 자신이 북한에서 신던 것과 같은 운동화 50 켤레 안에 친구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손으로 쓴 편지를 넣어서 그리움을 표현했다. 미술치료사 신형미 작가(왼쪽)와 그의 멘티이자 북한 출신 작가인 코이가 이어온 특별한 인연은 ‘통일’을 주제로 아홉 작품을 선보인 전시회 에서 첫 열매를 맺었다. 신 작가는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코이 작가의 예술 세계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 것이 즐겁다고 말한다. 꿈을 향한 발걸음 코이 작가는 현재 패션 관련 기관에서 일하며 홍익대 패션대학원 패션비즈니스학 석사과정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2016년에는 코오롱그룹 후원으로 커먼그라운드에서 남북한 청년 작가 9명이 함께한 전시회를 기획하고 참여했다. 그의 꿈은 통일에 대비해 패션산업과 문화예술 분야에 영향력 있는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신형미 작가는 2004년부터 탈북민들과 깊은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한 탈북소년을 알게 된 것이 계기였다. 미술치료사인 그는 북한이탈주민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하나원에서 그림을 통한 심리상담으로 그들의 마음을 치료하고 소통해왔다. 미국 오하이오대학교에서 순수미술 회화를 전공한 신 작가는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치료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차의과대학교 임상미술치료학 박사과정 중이다. 탈북민이 남한 사회에서 건강한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한 국가•사회적 과제라는 신념으로 한국 사회의 다양한 시각 전환 교육을 위한 여러 활동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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