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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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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AUTUMN 827

정신력과 열정으로 이룬 쾌거 정신력과 열정으로 이룬 쾌거 최근 여러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한국 음악인들의 수상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이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일찍 음악을 시작하고,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 속에서 성장하며 음악적 재능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김수연(Kim Su-yeon 金秀姢)은 올해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한국인 피아니스트로서는 처음으로 1위를 차지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최고 연주자 과정에 재학 중인 그는 이어 10월에 열리는 쇼팽 콩쿠르에도 도전할 예정이다. ⓒ Denise Tamara, 금호문화재단 제공 2020년부터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는 클래식 음악계도 얼어붙게 만들었다. 특히 지난해에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3년마다 개최되는 리스트 콩쿠르(International Franz Liszt Piano Competition)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5년에 한 번 열리는 쇼팽 콩쿠르(International Frederick Chopin Piano Competition)가 예정되어 있었다. 전자는 연기를 거쳐 결국 취소되었으며, 후자는 올해 가을로 연기되었다. 올해는 사정이 조금 나아져 각종 콩쿠르가 재개되었는데, 우수한 성적을 올린 한국인 연주자들의 소식이연이어 들려왔다. 이 외에도 바리톤 김기훈(Kim Gi-hoon 金基勳)이 영국 BBC 카디프 세계 성악가 콩쿠르(BBC Cardiff Singer of the World)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성악 콩쿠르로서 이 대회의 권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과거에 가곡 부문에서 한국인이 1위를 차지한 적은 있었지만, 본상 우승은 그가 처음이다. 퀸 엘리자베스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한국인들이 해마다 늘어나자, 2011년 벨기에 국영 RTBF 방송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집중 취재해‘한국 음악계의 미스터리’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한국 연주가들이 콩쿠르에 강한 이유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조기 교육과 치열한 경쟁을 꼽는다. 성악 분야를 제외하면 대개 어릴 때부터 음악을 시작해 일찌감치 재능을 찾아내고, 그런 과정을 통해 경험을 쌓아간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이 대표적인 영재 교육기관이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 입학 자격을 얻게 되는데 입학 후에도 1년마다 치러지는 오디션에서 탈락자가 생길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현재의 기량보다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고 선발한 학생들이 결국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런가 하면 한국인들의 강한 정신력도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된다. 또한 과거에 비하면 국제 콩쿠르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늘어나 재능을 발현할 기회가 많아진 것도 큰 변화이다. 피아니스트 김수연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Montreal International Musical Competition)는 만 33세 이하 젊은 음악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대회다. 성악, 바이올린, 피아노 부문이 한 해씩 돌아가면서 열린다. 바이올린과 성악 부문에서는 한국 연주자들이 그동안 수차례 수상한 전력이 있었지만, 피아노 부문에서는 올해 1위를 차지한 김수연(Kim Su-yeon 金秀姢)이 처음이다. 지난해 말 김수연은 2021년으로 연기된 콩쿠르가 결국 온라인으로 치러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별된 27명의 연주자들이 각각 다른 도시에서 녹음을 하고, 결과 발표 후 추가로 결선 무대를 촬영하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낯선 진행 방식이 다소 염려스럽기는 했지만, 담담하게 연습을 이어갔다. 첫 촬영은 4월 초, 자신이 살고 있는 잘츠부르크에서 조금 떨어진 빈에서 녹음을 마쳤다. 이후 4월 말 파이널리스트 결과가 발표됐고, 결선 연주는 일주일 후 브뤼셀에서 촬영됐다. 이때 그녀는 베토벤의 와 스크랴빈의 , 라벨의 를 연주했고 콩쿠르 위촉곡인 캐나다 작곡가 존 버지의 도 포함됐다. 그녀는 같은 시기 브뤼셀에서 진행된 퀸 엘리자베스 국제 음악 콩쿠르(Queen Elizabeth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에서도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준결선에 진출한 상태였다. 두 개의 콩쿠르를 동시에 준비하며 영상 촬영까지 해야 하는 과업이 주어졌다. 그녀는 “청중 앞에 서는 것이 아니어서 현장에서 느끼는 긴장감은 덜했지만, 온라인 연주를 위해 카메라와 녹음기 앞에서 연주하는 게 다소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마치 빈 벽을 상대방으로 여기고 감정을 담아서 연기해야 하는 배우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는 뜻이다. 김수연은 이번 대회를 통해 “주목할 만한 세련된 테크닉과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아티큘레이션, 미니어쳐 밸류를 가진” 연주자로 평가됐다. 그녀는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서 폭넓은 레퍼토리를 배우며 음악적 상상력을 키웠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최고 연주자 과정에 재학 중이다. 이번 대회는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치러졌지만, 실전 무대만큼 엄격했다. 김수연은 결선 무대에서 베토벤, 스크랴빈, 라벨, 그리고 캐나다 작곡가 존 버지의 작품을 연주했다. ⓒ 2021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 유튜브 영상 캡처 첼리스트 한재민과 피아니스트 박연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열리는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George Enescu International Competition)는 루마니아 출생의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 제오르제 에네스쿠를 기념하여 1958년 시작됐다. 창설 당시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부문을 대상으로 진행됐고, 이후 성악과 작곡 부문이 추가되어 1971년까지 3년 주기로 열렸다. 2009년부터는 첼로 부문이 추가되며, 2년 주기로 총 네 부문을 대상으로 열리고 있다. 동유럽권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열리는 제오르제 에네스쿠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진행된다. 한국인 수상자가 수차례 배출된 이 대회는 지난해 개최 예정이었다가 올해로 연기되었는데, 연도를 변경하지 않고 원래대로 ‘2020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로 표기했다. 지난 3월, 한경필하모닉 정기 연주회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을 연주하는 첼리스트 한재민(Han Jae-min 韓載慜)을 보고 깜짝 놀랐다. 14세 소년이 거침없이 성숙한 기교로 곡을 해석해 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2개월 뒤 그의 제오르제 에네스쿠 우승 소식을 접했을 때는 덜 놀랐다. 그는 이 대회 역사상 모든 부문을 통틀어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웠는데, 그럴 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재민은 그동안 다비드 포퍼 국제 첼로 콩쿠르(David Popper IX. International Cello Competition), 돗자우어 국제 콩쿠르(International Dotzauer Competition for Young Cellists)에서 1위를 수상했는데, 성인 대상 콩쿠르에 나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내 실력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싶었고, 경험 삼아 도전했다”고 말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피아노 반주자를 동반한 데 반해 그만이 주최 측에서 정해 준 루마니아 피아니스트와 함께 연주했다. 덕분에 세미 파이널에서 에네스쿠의 를 연주할 때 루마니아적인 정서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요즘 이슈트반 바르더이와 지안 왕의 연주를 즐겨 듣는다는 그는 “앞으로 나이 제한에 근접할 때까지 할 수 있는 한 많은 콩쿠르에 나가 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음악인 집안에서 태어난 한재민은 5세 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시작했고, 바이올린보다 큰 악기의 울림에 흥미를 느껴 첼로로 전공을 바꿨다.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는 바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최연소로 입학했다. 이 대회의 피아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박연민(Park Yeon-min 朴淵敏)은 서울대 음대와 하노버 국립 음대 석사 과정 졸업 후 최고 연주자 과정에 재학 중이다. 그녀는 지난해 열릴 예정이던 프란츠 리스트 국제 콩쿠르의 14명 준결선 진출자 중 하나였지만, 코로나19로 콩쿠르가 취소되고 말았다. 마음을 다잡고 참가한 이번 대회에서 어렵기로 유명한 라흐마니노프의 을 선택했는데, 압도적인 힘과 열정으로 연주한 끝에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올해 14세인 첼리스트 한재민(Han Jae-min 韓載慜)이 지난해 개최 예정이었다가 올해로 연기된 ‘2020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 첼로 부문에서 우승했다. 1958년에 시작한 이 대회 역사상 모든 부문을 통틀어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운 그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재학 중이다. ⓒ Andrei Gindac, George Enescu International Competition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개최된 2020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1등을 차지한 박연민(Park Yeon-min 朴淵敏)이 라흐마니노프의 을 연주하고 있다. 2014년 금호영아티스트 콘서트로 데뷔한 그는 현재 하노버 국립음대 최고연주자 과정에 재학 중이다. ⓒ Andrei Gindac, George Enescu International Competition test 한국 연주가들이 콩쿠르에 강한 이유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조기 교육과 치열한 경쟁을 꼽는다. 성악 분야를 제외하면 대개 어릴 때부터 음악을 시작해 일찌감치 재능을 찾아내고, 그런 과정을 통해 경험을 쌓아간다. 피아니스트 이동하와 아레테 스트링 콰르텟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콩쿠르(Prague Spring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는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과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멤버들이 1946년 창설했다. 만 30세 이하의 젊은 음악인들을 대상으로 두 부문씩 매년 번갈아가며 열린다. 올해는 피아노와 현악 4중주 부문에서 경연이 펼쳐졌고, 각각 이동하(Lee Dong-ha 한자)와 아레테 스트링 콰르텟(Arete String Quartet)이 1위에 올랐다. 이동하는 연세대 졸업 후 하노버 국립 음대 석사를 거쳐 뮌스터 국립 음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국제 콩쿠르에 처음 참여한 그는 이번 대회를 위해 평소 좋아하던 곡들을 선택했는데, 많은 연주자들이 연습하는 곡들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음악적 해석에 더 신중을 기했다고 한다. 지난 5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예정보다 한 달가량 앞당겨진 일정 때문에 여러모로 힘들었지만, 심사위원들로부터 자신의 연주에 대한 객관적이고 상세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던 점이 뜻깊었다고 말했다. 아레테 스트링 콰르텟은 바이올리니스트 전채안(Jeon Chae-ann 全彩顔)과 김동휘(Kim Dong-hwi 金東暉), 비올리스트 장윤선(Jang Yoon-sun 張允瑄), 첼리스트 박성현(Park Seong-hyeon 朴星昡)으로 구성됐으며 2019년 9월 창단했다. 2020년 금호 영체임버 콘서트를 통해 데뷔한 이들의 데뷔 실황 연주는 신예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KBS 라디오 클래식 FM에 소개되었다. 이들은 현재 노부스 콰르텟, 에스메 콰르텟의 뒤를 잇는 차세대 콰르텟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 이 팀은 무려 16년 만에 열린 현악 4중주 부문에서 우승 외에도 5개의 특별상을 차지했다. 피아니스트 이동하(Lee Dong-ha 李東夏)가 2021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연주하고 있다. 국제 콩쿠르에 처음 출전한 그는 1위라는 수상 결과보다 훌륭한 심사위원들로부터 조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더 값지다고 말했다. 연세대 졸업 후 하노버 국립 음대 석사를 거쳐 현재 뮌스터 국립 음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 Petra Hajská, Prague Spring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 2021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콩쿠르 현악사중주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아레테 스트링 콰르텟(Arete String Quartet)은 특별상까지 포함해 이번 대회에서 6관왕을 차지했다. 2019년 창단한 이 그룹은 국내 실내악 분야를 이끌어 갈 차세대 콰르텟으로 주목받고 있다. ⓒ Petra Hajská, Prague Spring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 류태형(Ryu Tae-hyung 柳泰衡)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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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AUTUMN 580

천년 수도의 아름다운 파동 오랜 역사와 문화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는 도시, 땅을 파면 문화재가 나오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된다는 고대 왕국의 수도. 경주는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 찬란했던 문명을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자리한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높이가 13.4m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감은사는 신라 30대 문무왕이 삼국 통일을 완성한 후 짓기 시작한 절로 지금은 지상에 이 탑들만 남아 경주의 동쪽 바다를 지키고 있다. 비트 세대 대표작가 잭 케루악(Jack Kerouac 1922~1969)— 그가 말년에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던 걸 상기하며, 한때 불교문화의 심장이었던 경주로 향하는 길에 두근거리는 맥동을 느꼈다. 그가 쓴 소설의 제목이 바로 이 칼럼의 이름 “On the Road” 였다. 경주를 요약하는 단어는 ‘천년 수도’다. 정확하게는 992년 동안 수도였으니 천년에서 8년 모자라지만 아름다운 도시니까 그냥 넘어가자. 기원 전 57년부터 936년까지 하나의 나라로 살았던 사람들, 그 나라의 이름은 신라였다. 천년간 지속된 국가는 몇 개 떠오르지 않는다. 비잔티움과 신성로마제국을 포함하며 오랜 역사성 부문에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로마제국 정도만 생각날 뿐. 아, 파라오 왕조도 상당했었지. 그런데 아시아 동쪽 끄트머리의 작은 땅에도 천 년 동안 지속하며 찬란한 문화를 남긴 국가가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경주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나 장안(시안), 바그다드 같은 화려하고 유명한 대도시와 같은 리그에서 뛴 선수였다고 볼 수 있다. 경주는 고대 실크로드를 통해 아라비아를 너머 유럽과 교류하던 중국과도 활발한 교류를 해서 신라인의 무덤에서 로만 글라스가 출토되기도 한다. 시야가 좁지 않고, 경기장을 넓게 쓰며 세계시민으로 존재감을 가진 나라였던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제국주의의 행패와 전쟁으로, 웬만한 건 다 무너졌던 이 나라에 아직도 신라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비도를 지나면 궁륭천장으로 짜인 원형공간의 주실이 나온다. 연꽃 모양의 돔으로 이루어진 천장과 본존불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부처와 보살, 수호신들이 고대의 건축술과 조형미를 보여준다. 현재는 보존 문제로 관람객이 주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며 유리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에서 지나가며 볼 수 있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한석홍 비밀스러운 아름다움 나는 배를 타고 온 이방인 탐험가처럼 동쪽 바다에서부터 경주로 들어가 문무 대왕(~681 文武大王)을 기리는 첫 유적지, 감은사지(感恩寺址)를 만났다. 이 절의 네이밍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왕의 은혜를 팔로우하고 틈만 나면 ‘좋아요’를 계속 누르겠다는 뜻이다. 감은사지의 느낌은 조금 특별하다. 관광명소 특유의 과도한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자칫 버려진 듯 보일 지경이다. 입장료도 없고 관리인도 보이지 않았다. 낡아버린 쌍탑만 달랑 남은 절터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이 쌍탑은 아주 오랫동안 이 자리에 우뚝 서 있다. 고대의 감은사 아래는 바닷물이 닿는 곳이었고, 절 아래로 용이 드나들 수 있는 수로가 설계되어 있었다. 두 개의 탑이 용이 된 왕을 지키는 중인지 용이 두 개의 탑을 지키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탑의 수수한 아름다움이 눈길을 오래 잡아끌어 시선을 돌리기 싫을 정도다. 이 탑을 해체하고 복원할 때 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舍利具)에는 신라의 정교한 금속 공예술이 가득 담겨 있다. 이 보물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아주 그냥 미친듯이 예쁘다. 탑의 겉모습인 수수한 아름다움과의 대비가 선명하다. 보이지도 않는 탑 속에 숨겨진 이 보물이 신라의 찬란한 문명을 만든 기본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하되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 아름다움은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스스로 빛난다는 걸 가르치는 것인가. 신라의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을 더 보고 싶어 경주 속으로 빨리 파고들었다. 곧 경주로 향하는 바닷바람을 막는 토함산이 나타났고, 산 깊은 곳에 있는 석굴암(石窟庵)이 등장했다. 경주의 아름다움을 담당하는 최전방 국가대표선수는 누가 뭐래도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 투톱이다. 불국사의 부속암자인 석굴암은 로마에 있는 판테온과 비슷한 구조로 설계되었는데 고대에 그런 상당한 건축 기술의 교류가 있었다는 놀라움도 있지만, 나는 당장 눈앞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도 충분히 바빴다. 석굴암은 불교국가였던 신라의 깊은 불심으로 만든 아름다운 인조 돌 동굴 속 불교미술이자 건축미의 절정이다. 빗물도 스며들지 않고 안에 이끼도 끼지 않는다고 한다. 돌을 뚫어 석굴을 만들자니 화강암이 너무 단단해서 조립식 건축 기법으로 이 인조 석굴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점이 중국이나 인도의 불교 석굴과 다른 점이고, 그래선지 상당히 유니크한 매력을 뿜어낸다. 내가 찾아간 날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 내내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석굴암의 내부 역시 문화재 보호를 위해 많이 가려져 있고, 줄 서서 지나가야 해서 자세히 볼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긴 시간 빤히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름다움은 가슴에 와락 안기는 종류였다. 조각 예술의 강렬한 미학이 파동처럼 번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 같은데, 잠깐 스쳐봤으나 망막에 본존불상의 표정이 배어버린 느낌이었다.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중턱에 있는 석굴암의 석가여래좌상은 불교미술사에서 두드러진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전실과 원실 사이, 비도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에 20여 년에 걸쳐 축조되었으며 고대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된 그리스 로마 건축양식에 불교미술이 접목된 화강암 석굴이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한석홍   빈티지 미학 탄력을 받은 나는 다음 차례의 아름다움을 찾아 불국사로 향했다. 대웅전(大雄殿) 앞 쌍탑을 보며 한 자리에 오래 남아있는 것의 빈티지 미학을 느꼈다. 신라가 멸망한 뒤, 다음 왕조들에서도 주요한 지방 거점의 역할을 하며 존재해 온 경주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빈티지일 것이다. 한때의 찬연했던 광휘와 오래 견뎌온 것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었다. 이 두 개의 탑이 얼마나 오래 이곳에서 시공간을 봐왔겠는가. 왕조의 흥망성쇠를 보았고, 그들의 삶이 이곳을 스쳐 지나가는 세월의 굴곡도 보았을 것이고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쌍탑을 비롯해 불국사의 구조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균형미를 갖고 있다. 불국사의 보물인 다보탑(多寶塔)에 조각된 네 마리 사자상 중 세 개는 유실되었다. 석가탑(釋迦塔)은 보수 공사 중에 떨어뜨리고, 탑 속의 사리함이 깨지는 등의 난리와 풍파도 겪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유물들은 번뇌를 초월한 듯 무덤덤해 보였다. 뭐든 견뎌낸 것들은 참 고혹적이다. 침략을 받고, 땅을 빼앗기고, 지진이 나고, 도굴당하고, 유물이 사라지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문화재를 지키려 노력해 온 이들의 마음이 찬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석가탑 안에선 당시의 목판 인쇄술을 보여주는 다라니경(陀羅尼經)도 발견되었다. 이 또한 신라의 자랑스러운 보물이다. 인쇄술이 인류문명 발전에 얼마나 큰 속도감을 부여했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니까. 빈티지 유물들이 보여주는 시공간의 크기와 깊이에 압도되다 불국사를 빠져나오니 문학관이 하나 보였다. 경주 출신인 김동리(1913~1995 金東里), 박목월(1915~1978 朴木月)두 작가를 함께 기념하는 시설이었다. 이들은 꽤 아름다운 글들을 썼다. 신라 문화와 한국 근대문학은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나는 하나의 연결점을 떠올렸다. 신라시대에 만든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라는 거대한 범종의 금석문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당시 사람들은 재물을 싫어하고 글재주를 사랑했다.” 내겐 이 글귀가 신라 사람들이 돈이나 탐하는 대신 문학을 사랑했다는 얘기로 해석됐다. 이렇게 아름다운 생각을 했던 나라였으니,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을 잔뜩 남긴 것 아닐까? 어릴 때부터 경주의 문물을 보고 자랐을 작가들이 부러웠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덕에 그들은 아름다움에 대해서라면 풍부한 시야를 자동으로 가졌을 것 같다. 그들을 상상하며 걷다 보니 문득 박목월 시인의 기념관에 흐르던 육성 시 낭독이 들려왔다.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 (William Wordsworth 1770~1850)처럼 광의의 낭만주의 시를 써온 시인의 서정에는 인생과 자연에 대한 통찰이 압축되어 있었다. 경주의 보물은 유물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작품 또한 오래도록 남아 계속 빛나고 있다. 나의 문학기행은 문학관에서 짧게 마무리했지만 더 깊은 탐구를 위해 두 작가의 생가와 주요 작품의 배경지들을 둘러보는 코스도 잘 마련되어 있다. 토함산 서쪽 중턱의 불국사는 석굴암과 함께 신라 불교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정교한 석축으로 조성된 터에 대웅전, 극락전 등 전각과 석가탑과 다보탑, 백운교와 연화교 등을 품고 있다. 석굴암과 더불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약 3만 8,000평의 평지에 23기의 원형 분묘가 솟아 있는 대릉원은 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군이다. 경주 시내 한가운데 황남동에 자리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비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죽음의 한복판에 삶의 한복판이 있다니. 삶과 죽음의 관계는 조화일까 부조화일까. 현대와 고대의 간극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까. 경주란 여러가지 선명한 대비만으로도 독특한 존재성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곳이다. 통일신라시대년에 주조된 성덕대왕신종은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cm, 무게 18.9톤에 이르는 범종으로 현존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종이다. 종의 맨 위에서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은 한국 동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며, 깊고 그윽한 여운이 오래 지속되는 신비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동리목월문학관은 경주 출신 소설가 김동리(1913-1995)와 시인 박목월(1915-1978)을 기리기 위해 2006년 토함산 자락에 건립되었다. 한국 현대문학에 큰 자취를 남긴 두 문인의 원고, 작품집, 동영상 등을 전시하고, 각기 생가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로 연결되는 투어도 제공한다. 동리문학관 안에 복원된 소설가 김동리의 창작실이다. 동리목월문학관은 동리문학관과 목월문학관으로 나뉘어져 각 작가의 유품, 동상을 전시하고 있다. 소설가 김동리의 육필 원고이다. 복원된 그의 창작실에는 생전에 사용하던 만년필, 안경, 책장, 집필노트 등 다양한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찬란한 종소리 문학관을 떠나 대릉원(大陵苑)에 다다른 나는 거대한 무덤들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의 그로테스크함에 감탄하다 시공간에서 내 좌표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 한 무덤 속으로 피신했다. 실내를 관람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천마총 내부였다. 발끝이 서늘했다. 경주 기행 내내 비가 많이 왔는데 발이 젖는 줄도 모르도록 경주는 계속 신선한 볼거리를 선사하는 곳이었다. 무덤 속은 무섭거나, 신비하거나, 칙칙하거나 할 것 같았지만, 아름다웠다. 사람이 죽어서 누워있던 자리는 몰락의 느낌 없이 편안해 보였고 그 정성 들인 장례에 동원된 품을 생각하니 옛날 사람들의 부지런함도 경이로웠다. 내 게으름을 반성하며 무덤에서 나오자 경주 시내 황남동 번화가가 나왔다. 나는 현대에 조성된 번화가와 고대 무덤가의 간극에 살짝 황당해졌다. 죽음의 한복판에 삶의 한복판이 있다니. 삶과 죽음의 관계는 조화일까 부조화일까. 현대와 고대의 간극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까. 경주란 여러가지 선명한 대비만으로도 독특한 존재성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곳이다. 짧은 여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앞서 언급했던 성덕대왕 신종 앞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경주를 찾은 내가 가장 다시 만나고 싶었던 신비였다. 이 종의 표면에 새겨진 반쯤 뭉개진 글자들, 그러니까 재물을 싫어하고 글재주를 사랑했다는, 그 아름다운 문장을 내 눈앞에 생생히 홀로그램으로 띄워주는 듯했다. 그리고 이 종의 독특한 공명을 가진 소리를 떠올렸다. 독자에게 종소리를 직접 들려줄 수 없어 아쉽지만, 이 거대한 범종이 퍼트리는 맥놀이 현상은 현대의 파동 역학을 잘 알고 만든 것 같은 소리라 소름이 돋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경주에 오면 이 웅혼한 종소리를 꼭 한 번 듣고 가면 좋겠다. 이 종소리가 지닌 파동은 경주의 빈티지 미학을 잘 보여주는 유물들과, 문학에 대한 이해의 경건함과, 세계와 교류하던 고대의 대도시를 지키는 용이 스스로의 찬란함에 감탄하며 내지르는 포효 세리머니와 같을지도 모른다. 간접적으로라도 그 파동을 부디 전달받을 수 있길 바라며. 아름다움에 경도되는 파동이 영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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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AUTUMN 278

밀리터리 콘텐츠의 새 풍경 분단된 한반도 상황에서 군대를 소재로 한 TV 프로그램이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최근 특수부대 출신 출연자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인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가 색다른 기획으로 화제를 만들어냈다. 한국에서 군대 소재 콘텐츠는 스테디셀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튜브 콘텐츠로 화제가 됐던 (虚假的男人, Fake Man; 2020)는 특수부대 훈련을 통해 불굴의 정신력을 기른다는 기획 의도 아래 지나치게 출연자들을 혹사시키는 장면들로 인해‘가학 논란’속에 방영이 중단되었다. 그러니 ‘군대’라는 소재 자체가 시청자들에게 불편함의 잔상을 남기고 있었던 상황에, 또 다른 밀리터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시작 전부터 우려 섞인 반응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올 3월부터 6월까지 케이블 TV 채널 A를 통해 방영된 는 여섯 개 특수 부대 예비역들이 출연한 서바이벌 밀리터리 예능이다. 각기 소속되었던 부대에 따라 특수 기술을 가진 출연자들이 극한의 대결을 펼쳐 최종 우승 부대를 가리는 방식이 시청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 채널 A 기대 밖의 열풍 하지만 올 3월 23일부터 6월 22일까지 3개월 동안 채널A가 매주 화요일 밤에 방영한 (钢铁部队, Steel Troops)는 시작과 함께 이런 우려들을 기대감으로 바꿔 놓았다. 특수부대 출신 예비역들로 팀을 꾸려, 최고의 부대를 가려낸다는 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애초에 훈련 과정이 불필요했다. 철저히 준비된 출연자들이 부대별로 대결을 벌인다는 점에서 가학 논란도 개입될 수 없는 구성이었다. 대신 자신이 속했던 부대의 명예를 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스포츠맨십이 더해졌다. 차가운 밤바다에 뛰어들어 인명을 구조하고, 250kg 무게의 타이어를 네 사람이 한 팀을 이루어 계속 뒤집어가며 300m를 이동하거나, 40kg 군장을 한 채 10km 산악행군을 하는 혹독한 미션들은 단지 승패만이 아니라 완주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미 탈락이 결정된 팀마저 끝까지 함께 미션을 완수한 것은 부대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의지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패자에게도 아낌없는 박수가 쏟아졌다. 여기에 남다른 체격에 잘 생긴 외모를 갖춘 출연자들이 벌이는 ‘대테러 작전’, ‘서울함 탈환작전’ 등은 마치 게임 같은 환상으로 여성 팬들까지 끌어 모았다. 레인보우식스나 배틀그라운드 같은 일인칭 슈팅 게임(FPS)을 실제 버전으로 보는 듯한 긴박감 넘치는 장면들이 열띤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압도적인 피지컬의 출연자들은 회차가 진행될수록 인기를 몰아갔다. 그 중 해군 특수전전단 UDT/SEAL 폭발물처리대대에서 하사로 전역한 육준서(陸俊書)는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출연자 중 한명이다. 그가 속한 UDT가 결국 우승팀이 됐다. © 채널 A 밀리터리 콘텐츠의 계보 이전에도 한국에는 다양한 밀리터리 콘텐츠들이 꾸준히 등장해왔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KBS 2TV 코미디 프로그램 의 한 코너로 방영되었던‘동작 그만’은 병영생활을 콩트 코미디 형식으로 다뤘다. 군대 경험에 대한 시청자들의 폭넓은 공감대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서열문화를 슬쩍 비튼 이 콩트 코미디는 한국인들이 군대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이중적인 감정을 잘 건드렸다. 즉 한창 나이인 20대에 병역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던 경험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힘겨움에 대한 불편한 감정과 그들만이 겪은 일들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감정의 복합적인 심리상태로 이어진다. ‘동작 그만’은 그 힘겨움과 자랑스러움에 대한 공감과 함께, 병영 내 서열 문화의 불편함을 살짝 곁들여 웃음으로 전해주며 큰 인기를 끌었다. 1989년부터 1997년까지 MBC TV가 방영했던 (友情的舞台)는 전형적인 군대 위문 공연 프로그램으로, 이후 2003년부터 2007년까지 KBS 1TV가 방영한 같은 유사한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만 해도 군대는 지금보다 훨씬 더 외부와 격리된 환경이었고, 따라서 이런 위문 공연 방식의 프로그램들은 군인들과 일반인들이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시간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의 마지막 코너였던 ‘그리운 어머니는 군부대를 찾아온 어머니와 아들이 만나는 장면이 늘 화제가 되었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 상황에서 군대는 외부에 공개되기가 쉽지 않은 공간이다. 하지만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시즌을 나눠 MBC TV에서 방영됐던 (真正的男人, Real Men)는 여러 부대에 연예인들이 단기 입소해 그 경험을 담는 파격을 선보였다. 당시 예능 프로그램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던 관찰카메라(일명 리얼리티쇼)가 군대 내무반까지 들어가 그 생생한 체험을 담았던 것이다. 물론 보안상의 이유로 어느 정도 ‘준비된 내무반’의 상황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지만 과거에 비해 한국의 군대가 훨씬 개방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였다. 2013년 공군이 영화 (悲惨世界, Les Miserables)을 패러디해 홍보영상으로 만든 (Les Militaribles)은 영화에서 자베르 경감 역할을 연기했던 러셀 크로우가 언급하면서 국제적인 화제가 되어 영국 BBC에서보도되기도 했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육군은 당시 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었던 싸이의 (绅士, Gentleman)을 패러디한 (GentleSoldier)을 내놓았다. 한국의 군대가 과거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고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3~4회에서 특수부대 예비역들이 IBS 침투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은밀한 해상 침투나 정찰 등의 목적에 사용되는 고무보트 IBS는 무게가 250kg에 달한다. ⓒ 채널 A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만나다 시대가 바뀌면서 대중들의 감수성도 바뀌었다. 를 패러디한 는 ‘진짜가 되려는 가짜들의 도전’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경쟁을 통해 선발된 일반인들이 해군 특수전전단 (MUSAT) 훈련을 받는 혹독한 과정들을 담았다. 상대적으로 표현이 자유로운 유튜브라는 플랫폼의 특징 때문에, 가혹할 정도로 강도가 높은 훈련과정들이 가감 없이 공개되었고, 이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튜브 콘텐츠는 주로 1인 크리에이터들의 방송이라 알려졌지만, 는 여러 유명 유튜버들이 모여 함께 만든 통합적인 방송으로 유튜브에도 블록버스터급 콘텐츠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특히 를 통해 대중에 알려진 일부 특수부대 출신 교관들은 방송이나 유튜브를 통해 유명인이 될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영국 Discovery Channel에서 2006년부터 2011년가지 방영된 (荒野求生, Man vs. Wild)의 베어 그릴스가 영국 육군 하사 출신 예비역으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이제 한국의 특수 부대 출신 예비역들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또한 지난 해 특전사 출신 여성 교관이 여성 연예인들의 유튜브 서바이벌 프로그램 (我還活著, I′m a Survivor)로 화제가 된 것은 이제 군대 소재 콘텐츠가 보다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으로 확장되고 있는 현상을 잘 보여준다. 는 바로 이 변화의 정점에서 이제까지의 군대 콘텐츠들과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정수를 성공적으로 엮어낸 경우다. 분단과 대치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군대는 폐쇄적인 곳일 수밖에 없었고, 민주화 이후에도 쉽게 개방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기성세대들이 뒤로 물러나고 새로운 세대들이 주역으로 등장하며 한국의 군대도 조금씩 변화를 겪고 있다. 꾸준히 대중의 관심을 받아온 밀리터리 콘텐츠들의 변화 과정은 그래서 실제 군대의 변화 과정과 맞닿아 있다. 고립되고 닫혀 있던 군대가 조금씩 속살을 드러내고 있고, 이제는 그 경험이 TV 프로그램을 통해 즐거움을 선사하고 더 나아가 일상의 생존을 위한 노하우로도 소비되고 있으니 말이다. 꾸준히 대중의 관심을 받아온 밀리터리 콘텐츠들의 변화 과정은 그래서 실제 군대의 변화 과정과 맞닿아 있다. 2회에서 최강대원 선발을 통한‘대진 결정권’을 두고 여섯 부대가 대결을 벌이고 있다. 메인 미션 사이에 베네핏을 건 서브 미션들이 함께 진행되었다. ⓒ 채널 A 정덕현(Jung Duk-hyun 鄭德賢)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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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AUTUMN 539

침묵이 흐르는 대학가 원룸촌 “원룸, 투룸, 자취방, 풀 옵션 방, 신축 원룸, 원룸 임대….” 대학가 골목 담벼락과 대로변 전신주, 가로수, 버스 정류장 쉘터에 붙여 놓은 전단들이 바람에 들썩거린다. 그러나 마스크를 쓴 채 지나가는 행인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 대학가 주변에는 침묵만 가득하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대학가 임대업계는 걱정이 많다.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되면서 대학촌에 학생들이 사라졌고, 덩달아 원룸을 찾는 수요가 줄거나 끊겼다. 중국 유학생들은 오래전에 돌아갔고, 기존에 방을 쓰던 지방 출신 학생들도 떠나기 시작했다. 대면 수업이 재개되어 학생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월세가 전반적으로 하락했다. 과거에는 타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학교 근처에서 대개 하숙을 했다. 방만 빌려 쓸 뿐 혼자 끼니를 만들어 먹고 살림을 해야 하는 자취 생활에 비해 하숙은 여러모로 이점이 많았다. 가족과 떨어져 객지에서 지내야 하는 학생들은 하숙집 아주머니가 만들어 주는 따뜻한 밥과 푸짐한 반찬들을 끼니때마다 먹을 수 있었고, 인심 좋은 아주머니들은 빨래와 청소까지 해 주기도 했다. 학생들은 그런 보살핌 속에서 외로움을 달래며 위안을 얻을 수 있었고, 함께 사는 다른 하숙생들과 마치 형제자매처럼 친밀하게 지내곤 했다. 하숙집 생활에는 농경 사회 대가족 체제의 공동체 정서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풍경들은 점차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대학과 대학생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한 지붕 아래에서 가족처럼 함께 사는 하숙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과거의 가족적 공동생활보다 개인의 사생활 보호가 더 우선시되는 사회 분위기와 더불어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대학촌에 전 세대 원룸들로 구성된 신축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로써 집주인과 학생들 사이의 끈끈한 인간적 관계는 임대인과 세입자 관계로 바뀌었다. 여기에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대학가 원룸촌에서 젊음을 비워 버렸다. 남향의 작은 베란다와 최소한의 규모만 갖춘 주방, 좁지만 그런대로 깔끔한 욕실, 붙박이장과 책상, 그리고 작은 침대 하나…. 젊은 날의 꿈과 고뇌와 열정으로 충만했던 원룸이 텅 빈 채 사나운 여름빛만 가득하다. 초가을 2학기가 시작되면 이 방에 희망을 품은 새 주인이 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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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AUTUMN 518

젊은 영국 여성이 바라본 북한 외교관 남편을 따라 2년간 북한 평양에 둥지를 틀었던 영국 여성. 사회주의 체제 이면의 곳곳에서 보고 느낀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과 그들과 나누었던 다정한 교감은 귀국 후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의 기억 속에 살아 움직인다. 30대 영국 여성이 경험한 북한은 생각보다 다정하고 친절한 곳이었다. 평양 생활은 2년 남짓은 그의 가치관을 크게 바꿔 놓기에 짧지 않았다. 외교관 남편과 함께 평양에서 2년 머물고 영국으로 돌아온 린지 밀러는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예상 불가능했던 북한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책을 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유를 당연하게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 Lindsey Miller 작곡가이자 음악 감독인 린지 밀러(33·Lindsey Miller)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외교관 배우자와 북한에 머물며 만난 사람들의 사진과 이야기를 묶어 지난 5월 책으로 펴냈다. 200쪽의 이 책 제목부터 범상하지 않다. (North Korea: Like Nowhere Else). 북한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는 그곳 사람들이 마치 차가운 로봇 같을 것이라 예상했다. 특히 외국인들에게는 더없이 냉담하거나 적대적일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평양에서 2년을 살다 돌아온 지금, 그런 생각은 편견이었다고 밀러는 말한다. 그가 만난 북한 주민들은 우호적이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외국인들은 흔히 열병식이나 집단체조, 미사일 같은 선입관을 가지고 북한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도 매우 엄하고 딱딱할 것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손주를 귀여워하고,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죠.” 평양 주변은 물론 시골길에서도 마을과 마을 사이를 오가는 군용 트럭 뒤에 빼곡히 앉은 군인들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밀러가 본 군인은 딱딱하고 무서운 존재가 아닌 그저 미소를 짓고 인사도 건네는 젊은이들이었다. ⓒ Lindsey Miller 그들은 군인이기에 앞서 평범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는 이 사진을 찍은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군인들과 인사를 주고받았고, 그들 중 한 명은 밀러에게 손 키스를 보냈다. 확실한 변화 밀러는 북한 사회의 획일화된 분위기 속에서 작은 변화를 발견했다. 어느 날 오후, 단속과 제재를 상징하는 로동신문사 앞을 손잡고 걸어가는 젊은 연인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 광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책에 담았다. 그뿐 아니라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젊은이들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 어린 학생들은 미국 디즈니사의 캐릭터들이 그려진 가방을 메고 다니기도 했다. “미국 문화의 상징인 디즈니 가방을 북한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북한 국영 텔레비전에서도 디즈니 만화영화를 봤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저는 북한 주민들이 그런 것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지 궁금했습니다.” 밀러는 자신이 찍은 수천 장의 사진 중 트럭을 타고 가는 북한 군인들 사진을 가장 좋아한다. 이 사진에는 그가 북한과 그곳 사람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잘 표현돼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 군인이라 하면 김정은 정권을 떠올리지만, 밀러가 보고 느낀 그들은 군인이기에 앞서 평범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는 이 사진을 찍은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군인들과 인사를 주고받았고, 그들 중 한 명은 밀러에게 손 키스를 보냈다. 다들 웃기 시작했다. 밀러도 똑같이 손 키스를 보냈다. “우리는 북한에 이런 일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군복에 너무 집중해 그 사람 자체를 보는 것을 잊곤 하죠. 저는 북한에 살면서 그들이 누군지, 어디서 왔고, 가족과 그들의 인생은 어떨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주민들과의 접촉 외국인 거주자들은 꽤 자유롭게 평양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쇼핑을 하거나 외식을 하고, 거리에서 마주친 주민들과 비교적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놀랍게도 많은 북한 주민들이 기본적인 영어 회화를 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영어를 하려고 먼저 다가오기도 했다. 반면 관광객들과는 달리 외국인 거주자가 지켜야 하는 규칙과 제약도 있었다. 버스나 택시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고 북한 주민의 집 방문도 불가능했다. 북한 주민들과 항상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감시 체계를 많이 경험했다. 길에서 만나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한순간 표정을 바꾸고 갑자기 자리를 뜰 때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영락없이 양복 입은 남자가 서 있곤 했다. 평양 시내의 상점들 역시 이방인을 선뜻 반기지는 않았다. 가끔 가게안에 여러 손님이 있는데도 밀러가 들어오면“영업이 끝났다”고 하기도 했다. 밀러가 가장 흥미롭게 느꼈던 대상은 평양의 젊은 여성이었다. 특히 또래 여성들에게 관심이 갔다. 연애와 결혼, 커리어에 대한 그들의 사고 방식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제가 만난 평양의 젊은 여성들은 결혼과 출산보다는 일과 커리어를 더 중시했어요. 제가 결혼을 했는데도 왜 아이가 없을까 매우 궁금해했습니다. 장시간 일하는 게 너무 피곤하다는 얘기를 한 여성도 있었죠. 결혼하기 싫다는 여학생도 있었어요. 물론 평양의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경우들이었죠. 제가 북한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북한 사회의 상위 권력 계층이었고 외부인들과 접촉도 많이 경험해본 상태였어요.” 그는 외교단지가 있는 평양 동부의 문수동에서 살았다. 각국 대사관, 국제기관, 국제 구호단체들이 있는 지역이다. 규모가 크지 않았고 가끔 전력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위성TV를 볼 수 있었고 인터넷 접속이 가능했으나 속도가 아주 느렸다. 외교단지 안에는 외국인 학교도 있지만, 수준이 높지 않아 대부분의 외교관 자녀는 홈스쿨링을 하고 있었다. 밀러는 북한으로 떠나기 전, 그곳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외화인 달러, 유로, 위안화등을 준비해 오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구겨진 달러는 받지 않았다. 도착 직후 현지인 운전자를 통해 공항 주차장 요금정산소에서 1달러를 줬는데 구겨지고 더럽다며 거절당했다. 평양에선 물건을 산 뒤 거스름돈 대신 껌, 주스 같은 간식거리를 받는 것이 흔한 일이다. 백화점에서는 잔돈을 북한 화폐 원으로 거슬러 주기도 했다. 외국인들은 자동화폐입출금기(ATM)를 사용할 수 없었다. 외화 현금이 동나면 잠시 외국을 다녀오는 지인에게 부탁해 전달받았다. 많은 외국인들이 북중 국경 도시 단둥의 ATM에서 현금을 찾아왔다. 평양의 한 지하철 역에 거대한 김정일 초상화가 우뚝 서 있다. 그 아래를 지나가는 일은 그곳 주민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또 하나의 일상으로 보였다. ⓒ Lindsey Miller 2018년 가을 어느 날 오후 평양 시내 한 작은 아파트의 정경이다. 밀러는 북한의 기성세대가 보고 경험한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믿는 북한의 미래가 어떤 것인지 늘 궁금했다. ⓒ Lindsey Miller 2018년 한 열병식에서 김정은 앞을 지나 평양 거리를 통과하는 여군들이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군중은 이들에게 풍선과 꽃을 건네며 환호했다. 밀러는 이 사진을 책 표지로 결정하는데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 Lindsey Miller 짧지만 강렬한 기억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은 밀러에게 가장 흥미롭고 강렬한 기억을 남겨주었다. 그는 이미 외신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하고 있었지만, 북한 방송은 회담 소식을 하루 늦게 발표했다. 알고 지내던 북한 사람들이 밀러에게 와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하며 설명해 달라고 했다. 평양 시내에 ‘우리는 하나’라는 슬로건과 함께 김정은과 트럼프의 악수 장면을 담은 대형 사진들이 걸렸다. 북한 사람들이 남한 가요를 듣거나 TV 프로그램을 본다는 소문은 많았지만, 밀러 자신이 직접 보거나 듣지는 못했다. 북한에서 남한의 콘텐츠를 접하는 것은 최고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행위이다. 북한 사람들은 밀러가 서울에 가봤는지, 서울은 어땠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한 북한 주민은 그가 발리 해변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너무 아름답다며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그들은 영국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물어봤다. 그러나 성평등이나 동성 결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밀러의 초기 북한 사진에는 건물이 많이 등장한다. 그의 눈에 건축의 외양이나 디자인이 이색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빠르게 사람들로 초점이 바뀌어 자신이 바라보는 북한 사람들의 일상을 창의적인 시각으로 담았다. 간혹 차마 사진에 담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고 밀러는 그들을 존중하기 위해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처음엔 책을 출판할 계획이 없었다. 하지만 영국으로 돌아가 사진을 정리하면서 북한에서의 추억이 떠올랐고 자신이 겪은 경험과 감정들을 돌이켜보면서 이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책은 연출되지 않은 사진 200장과 16편의 이야기로 엮었다. 북한의 체제나 정치 상황보다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췄다. 이라는 제목에는 함의가 많다. “북한이 어떤 곳이냐는 질문에 간단히 답하긴 정말 어려웠습니다. 제가 아는 모든 곳, 제가 경험해 본 모든 장소 중, 이 세상에 북한과 같은 곳은 없거든요. 신분의 외국인들에게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이 확연히 구분돼 있어요. 제 책의 제목을 이렇게 붙인 이유입니다.” 밀러는 북한에서 영국으로 돌아간 뒤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이미 북한에 먼저 살아본 경험이 있어 더욱 가슴이 벅찼고, 비무장지대(DMZ)에서 특히 감정이 남달랐다. “비록 국경은 닫혔지만 북한에 대한 마음까지 닫아서는 안 됩니다. 북한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인터뷰를 마치며 그가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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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AUTUMN 644

토란에 숨겨진 신비 감자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끈적이는 점액질을 품어 쫀득한 식감을 동시에 가진 토란은 가을에 만날 수 있는 오래된 식재료다.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토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①주로 밭에서 키우는 토란은 굵은 줄기 끝에 큰 잎 한 장이 붙어있다. 토란은 버릴 것 없는 유익한 식재료다. 잘 말린 토란잎은 여름철 쌈이나 나물로 먹는다. 토란대는 살짝 말려 껍질을 벗긴 다음 짧게 삶은 뒤 들깨와 함께 볶으면 아삭한 식감의 좋은 밥반찬이 된다. 알토란은 특유의 미끌거리는 식감으로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어떤 식재료도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②토란의 단면에서 나오는 끈적이는 성분은 ‘뮤신’이라는 다당류 점액물질로 단백질을 분해해 소화와 흡수를 돕는다. 뮤신은 장어나 연근, 마에도 있는데 위와 장의 뛰어난 윤활제 역할을 한다. ③가려움을 유발하는 토란 껍질을 손질할 때에는 팔팔 끓인 쌀뜨물에 토란을 잠깐 삶으면 된다. 몇 번 문지르지 않아도 쉽게 토란 껍질을 깔 수 있다. 토란 속 전분과 함께 들어 있는 바늘 모양의 수산칼슘 결정이 가려움을 유발하고 아린 맛을 내기도 한다. ⓒ신혜우 음식은 수수께끼와 같다. 하나의 음식 속에는 여러 가지 사실이 숨겨져 있다. 토란이란 이름을 생각해보라. 껍질을 벗긴 알맹이의 모양이 감자와 비슷하다. 그런데 왜 토란이라고 불렀을까? 토란이 한반도에 처음 들어왔던 시기에는 ‘감자’라는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땅에서 나는 알처럼 생겼다’는 뜻으로 토란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문자 기록상 감자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시기는 조선시대인 1824년이다. 토란은 이보다 6백 년 앞선 고려시대 의서 (鄕藥救急方 Emergency Prescriptions in Local Medicine; 1236)에 등장한다.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문인 이규보의 시문집 (東國李相國集 Collected Works of Minister Yi of the Eastern State; 1241)에는 시골에서 토란국을 끓였다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토란국은 미끌미끌 넘어가는 토란 특유의 감촉을 잘 느낄 수 있는 음식이다. 소고기와 무, 토란을 넣고 간장으로 간을 해 끓인 맑은 국은 주로 추석 명절에 끓여 먹던 전통음식으로 담백하면서도 시원하고 깊은 맛이 있다. ⓒ KOREAN FOOD FROMOTION INSTITUTE 해독을 위한 지혜 감자와 마찬가지로 토란도 덩이줄기이다. 덩이줄기란 식물이 영양소를 저장하기 위해 줄기를 부풀린 형태를 말한다. 한국에서 토란은 추석 때 먹는 전통 음식이다. 구체적 조리법은 1920년대 방신영(方信榮 1890∼1977)의 조리서 (朝鮮料理製法 Recipes for Korean Dishes; 1917)에 나온다. 토란을 잘 씻어 먼저 한 번 삶는다. 맑은 장국이나 곰국에 토란을 넣어 끓이는데 다시마를 조금 썰어 넣고 끓인다. 서울식 토란국 조리법이다. 남도에서는 들깨를 갈아 넣은 고소한 맛의 국물에 토란을 넣어 끓인다. 국 속의 토란은 언뜻 보기에 감자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입에 넣고 씹을 때 식감은 감자와 전혀 다르다. 미끈거리면서 물렁물렁하다. 토란에 끈끈한 점액질 성분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감 때문에 토란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점액질 성분 대부분은 건강에 유익하다. 토란 속 점액질을 이루는 다당류는 장내 유익균의 먹이인 프리바이오틱스로 작용한다. 이들 다당류는 물을 쉽게 흡수하여 부풀어 오른다. 덕분에 점액 다당류를 이용해 입안에 넣으면 물 없이도 녹는 구강붕해정을 만들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수분을 제외하고 토란에 가장 많이 들어있는 성분은 전분이다. 토란에 있는 전분 알갱이의 크기는 작은 편이어서 소화가 잘 되지만 생으로 먹을 수 없다. 바늘처럼 날카로운 수산칼슘 결정(calcium oxalate crystals)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수산칼슘 결정은 토란잎이나 토란대에도 있는데 단백질 분해효소와 함께 저장되어 있어 날로 먹으면 아린 맛이 난다. 먼저 바늘 같은 결정이 피부 점막을 찔러 상처를 낸다. 설상가상으로 효소가 그 상처에 작용하여 염증, 통증을 일으킨다. 토란을 손질할 때 즙액이 손에 묻으면 가려우니 장갑을 끼고 다루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사실 이런 독성은 토란과 같은 천남성과(天南星科) 식물의 공통적 특징이다. 그대로 먹었다가는 점막을 자극하는 통증과 가려움증을 피할 수 없으므로 다른 동물은 천남성과 식물을 먹지 않고 피한다. 섬에서 염소를 방목해도 천남성은 무성하게 자란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이다. 하지만 잡식 동물로서 인간은 독보적이다. 불이라는 강력한 도구로 음식을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인간에게 토란의 독성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다. 토란이나 토란대를 하루 전에 물에 담갔다가 삶아서 걸쭉한 물을 버리고 쓰면 된다. 이렇게 가열하면 토란 속의 효소는 변성하여 작동을 멈추고 수산 결정은 물에 녹아 제거된다. 완벽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자극을 줄여 먹기 좋은 정도로 만드는 데 충분하다. 이런 처리에 대해 잘 모르고 가을에 토란이나 토란대를 사다가 바로 국을 끓이면 아린 맛이 남아 있어 먹기 힘들다. 추석에 즐겨먹는 토란국 속에는 식재료의 독성을 제거하는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있다. 토란을 한입 크기로 썰고 꽈리고추와 통마늘을 곁들여 간장, 설탕을 넣고 졸인 토란조림이다. 자박한 국물과 함께 떠 먹으면 깊은 감칠맛을 느낄 수 있다. ⓒ 10000recipe 토란의 아린 맛을 빼기 위해 약간 삶은 후, 감자칩처럼 통째로 슬라이스해 구우면 바삭한 식감과 고소한 맛의 토란칩이 된다. 열량이 낮아 다이어트 간식으로도 좋다. ⓒ momcooking 다양한 요리와 디저트 ‘알토란 같다’는 말이 있다. 내용이 충실하거나 옹골차고 실속이 있다는 뜻이다. 원래 알토란은 너저분한 털을 다듬어 깨끗하게 만든 토란을 말한다. 접두사 ‘알’은 알밤, 알몸처럼 겉을 덮어 싼 것이나 딸린 것을 다 제거했다는 뜻이다. 감자와 고구마가 나타나기 전까지 토란은 농가에 매우 중요한 구황작물이었다. 그러니 속이 꽉 찬 알토란이 실속의 대명사가 된 것도 이해할 만하다. 역사가 긴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토란의 소비는 주로 가을 명절에 한정된다. 9월이면 시장에 토란이 쏟아져 나오지만 추석이 지나면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예전에는 토란국 외에도 찜, 구이, 송편, 장아찌 등으로 다양하게 요리해 먹었다. 토란을 쪄서 껍질을 벗기고 찹쌀가루와 섞어 기름에 지져 토란병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다른 채소와 함께 반죽해서 전으로 부쳐먹기도 한다. 요즘에는 토란 자체보다 육개장에 넣은 토란대를 찾아보기 쉬워졌다. 껍질을 벗기고 말린 토란대를 물에 삶고 여러 시간 우려내어 아린 맛 성분을 제거한 다음 여러가지 채소, 소고기와 함께 넣고 끓인다. 졸깃한 토란대를 씹는 맛이 고기의 식감과 묘하게 대비되면서 맛이 극대화된다. 토란의 대표 산지는 전남 곡성이다. 전국 토란 재배지의 절반이 곡성에 있고 생산량으로는 전체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곡성은 다양한 토란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들깨 가루를 듬뿍 넣고 끓인 들깨 토란탕은 곡성의 대표 음식이다. 토란의 고소한 향기가 들깨, 소고기와 잘 어울린다. 맑은 토란국, 찐 토란, 토란 전병, 토란 미숫가루, 토란 누룽지도 먹어볼 만하다. 토란빵, 토란 스콘, 토란쿠키, 토란칩, 토란초콜릿칩과 같은 가공제품도 많다. 최근에는 토란을 넣은 아이스크림과 사과파이도 나왔다. 토란이 생소한 젊은 층을 위해 개발된 간식이다. 하지만 토란국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젊은이라도 이미 토란의 맛에 익숙할 것이다. 사실 토란은 열대 아시아와 태평양 제도가 원산지인 식물 타로(Colocasia esculenta)의 변종이다. 타로 버블티나 타로 밀크티를 마셔봤다면 토란을 맛본 것과 다름없다. 재배지역과 품종에 따라 흰색을 띄기도 하고 보랏빛일 때도 있지만 고소하고 달콤한 맛과 부드러운 질감은 타로와 토란의 공통적 특징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 태평양의 하와이 같은 섬나라까지 세계 전역에 타로를 이용한 요리와 디저트, 가공제품이 무수히 많다. 타로의 다양한 변주를 맛보면서 지구를 한 바퀴 돌아도 될 정도이다. 토란국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젊은이라도 이미 토란의 맛에 익숙할 것이다. 토란은 열대 아시아와 태평양 제도가 원산지인 식물 타로(Colocasia esculenta)의 변종이다. 타로 버블티나 타로 밀크티를 마셔봤다면 토란을 맛본 것과 다름없다. 토란은 열대지방에서 재배하는 타로의 변종으로 Taro, Kalo, Talo, Dalo, Dasheen, Eddo 등 다양한 이름으로 전세계 식탁에 오른다. ‘열대성 감자’라고도 불리는 타로는 습한 기후에도 잘 자라며 늪지에서도 번식한다. 토란이 낯선 젊은 세대도 타로가루와 우유를 혼합해 만드는 타로티에는 익숙하다. 토란 꽃의 경고 토란을 토련이라고도 부른다. 두껍고 넓은 방패 모양의 잎이 마치 연잎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토란을 보면 시골에서 비오는 날 토란잎을 우산처럼 쓰고 다녔던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다. 반대로 토란꽃을 본 사람은 많지 않다. 토란꽃은 100년에 한 번 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희귀했다. 열대식물인만큼 온대기후인 한국에서는 꽃이 피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전국 여러 곳에서 매년 토란꽃이 피어나고 있다. 한반도의 기후가 고온다습한 아열대성으로 바뀌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지금은 지구 온난화의 위기에 빠르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때이다. 토란 꽃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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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AUTUMN 399

정직한 돌을 쪼는 우직한 석공 이재순(Lee Jae-sun 李在珣) 씨의 지난 반세기는 화강암과의 씨름이었다. 단단하고 결이 치밀해 석공에게는 큰 도전이지만, 한국의 석조 문화재는 대부분 이 돌로 만들어졌다.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석장 부문의 최초 명장인 그의 손끝에서 많은 문화재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현대식 기계와 장비가 도입되면서 전통 석조물 제작 기법이 차츰 사라져가고 있는 요즘, 이재순(Lee Jae-sun 李在珣) 씨는 여전히 망치와 정으로 돌을 쪼아 작품을 만든다. 그는 2007년 신설된 국가무형문화재 석장 분야에서 최초의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재순 석장의 경기도 구리시 작업장엔 돌조각들이 가득했다. 입구에는 높이 10m가 넘는 미륵상이 우뚝 서 있었고, 주변에 부처상과 사자상 등 수많은 석상들이 자리를 차지하며 각기 명장의 솜씨를 드러내고 있었다.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난 이 석장이 돌을 처음 손에 잡았던 것은 그의 나이 불과 13세 때였다. 석공 일을 하던 외삼촌과 형의 일손을 도우면서부터였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와 일머리가 좋아 썰매나 팽이를 직접 만들었던 그는 석공 일도 남들보다 빨리 배웠다. 외삼촌을 따라 문화재 공사 현장을 다니며 돌 다루는 기초 기술을 익혔다. 좋은 스승 그는 타고난 솜씨뿐만 아니라 좋은 스승을 만나는 행운도 누렸다. 1970년엔 서울의 유명한 석공 김부관(金富宽) 선생을 찾아가 일을 배웠고, 2년 뒤에는 당대 석조각의 대가 김진영(金璡榮) 선생의 문하에서 본격적인 석공예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스승 밑에서 돌을 다루는 기술과 더불어 장인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와 작품을 보는 안목까지 기를 수 있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 잠시 방황했던 시간도 있었다. 사소한 실수가 빌미가 돼 작업장에서 쫓겨난 뒤 갈 곳 없던 그는 무작정 경주 석굴암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의 깨달음이 인생을 바꿔 놓았다. “석굴암의 조형미에 압도되었어요. 사람의 손으로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니, 죽기 전에 한번 그런 작품을 꼭 만들고 싶었어요.”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간 그는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배웠다. 그는 “선생님은 건축, 종교, 미술사, 실내 장식 분야 교수들과 자주 어울리셨는데 그런 자리에 늘 저를 데리고 가셨어요.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와 불교 미술 전반에 대한 견문을 넓혀갔어요”라며 당시를 돌아보았다. 그는 21세의 나이로 1977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 석공 부문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이후 국내 각종 공모전에서 연이어 수상하며 명성을 얻었고, 1989년 석공예 명장, 2005년 경기도무형문화재 석장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2007년 신설된 국가무형문화재 석장 분야 최초의 보유자로 지정받은 것은 그가 이 분야 최고의 자리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 화강암. 82 × 27 × 98 ㎝. (WDH) 가운데 안상 안에 봉황 한 쌍을 구름 문양과 함께 새기고 네 귀퉁이와 기단부는 당초문으로 장식해 화려함을 더한 작품이다. 성인이 출현해 천하가 태평하면 나타난다는 상상의 새 봉황은 성스러운 동물로 여겨져 주로 궁궐 장식에 이용되었고, 왕족 여인들의 예복이나 장신구 무늬로도 활용되었다. ⓒ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 화강암. 23 × 20 × 50 ㎝. (WDH) 어린 소녀의 모습을 통해 불교의 청정한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머리를 양쪽으로 틀어올린 쌍계(雙髻)는 길게 땋은 머리와 함께 동자상의 가장 보편적인 머리 모양이다. ⓒ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지광국사탑이 복원 전 서울 경복궁에 놓여 있을 때의 모습이다. 고려 시대 국사(國師) 해린(海麟 984~1067)의 사리를 봉안한 이 탑은 원래 강원도 원주 법천사지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반환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한국전쟁 시 폭격으로 심하게 손상되어 1957년 재건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지만, 다시 보존 처리가 필요한 상황이 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진 후 2016년 전면 해체하고 보수를 시작하여 올해 복원이 완료되었다.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승탑이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돌의 매력 이 석장은 화강암을 주로 쓴다. 한반도에 가장 많이 분포된 이 암석은 강도가 높고 광택이 뛰어난 장점이 있지만, 흡수성이 적고 결이 치밀해 조각하기가 매우 어렵다. 불상, 석탑, 석교 등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의 고대 석조 기술은 4세기 이후 삼국 시대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잦은 전란에도 불구하고 화재를 이겨내어 수많은 석조 문화재가 전해 내려온다. 또한 석재는 사찰과 궁궐 건축의 주요 자재일 뿐 아니라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돌로 쌓는 성의 축조 또한 활발했다. 그 동안 수많은 문화재 복원과 재현 작업에 참여해 온 이 석장은 가장 힘들었던 작업을 꼽아달라고 하자, ‘대수술 끝에 올해 초 새로 태어난’ 강원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을 꼽았다. 그는 “이보다 더 어려운 석조 문화재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매우 고단한 작업이었다”고 했다. 지광국사탑은 고려 시대에 국사(國師) 칭호를 받은 해린(海麟 984~1067)의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이전 시대 전통 석탑의 모양에서 벗어난 색다른 구조에 탑 전체를 정교하고 화려한 구름·연꽃·보살·비천상 문양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승탑(僧塔)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경복궁 마당에 옮겨 놓았던 이 탑은 6.25 전쟁 때 폭격을 맞아 수많은 조각으로 부서졌다. 전쟁이 끝나고 1957년 깨어진 조각들을 일일이 붙이고 시멘트로 땜질했는데, 당시는 문화재 복원 기술이 많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땜질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등 훼손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상태가 가장 안 좋았던 지붕돌의 절반 정도를 새 석재로 복원했는데, 새 돌을 깨고 쪼아서 원래 돌 사이에 끼워 맞추는 작업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요. 기술 이수를 끝낸 제자 두 명하고 셋이서 1년 반을 꼬박 매달렸죠.” . 화강암. 33 × 27 × 55 ㎝. (WDH) 선의 역동성에 중점을 두고 몸의 비늘과 갈기를 표현한 작품이다. 상상의 동물인 천록은 잡귀를 물리치는 성스러운 동물로 인식되어 궁궐의 석조 장식물로 쓰였다. 경복궁 영제교(永齊橋)에서도 볼 수 있다. 이재순 석장이 사용하는 수공구들이다. 돌을 채취하거나 다듬을 때 쓰는 정, 돌을 쳐낼 때 사용하는 메를 비롯해 틈새에 박아 그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쐐기, 표면을 곱게 쪼아낼 때 쓰는 도드락망치 등 용도에 따라 다양한 공구가 사용된다. 복원과 재현 2008년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 복원,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보수 등 굵직한 문화재 복원 현장마다 그가 있었다. 궁궐과 사찰을 포함한 전국의 석조 문화재 중 그의 손길이 닿은 작품만 2000여 점에 이른다. 또한 그는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과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의 복제품을 만들었고, 북관대첩비는 복원과 재현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함경도 의병들이 왜군을 물리친 것을 기리기 위해 1709년 주민들의 발의로 길주군에 세워진 북관대첩비는 일제가 1905년 자국으로 불법 반출한 뒤 2000년대 초까지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 비석이 일본에 있을 때는 기단과 지붕돌 없이 비신 위에 커다란 자연석만 얹어 놓은 상태였어요. 유홍준(兪弘濬) 당시 문화재청장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이 비석이 환수될 때를 대비해서 지붕돌과 기단을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돌 만지는 장인으로서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일본 측에선 “본래 북한 지역에 있던 것이니 북한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환을 미루고 있었다. 일본은 북한이 쉽게 허락할 리가 없다고 본 것이다. “유 청장이 묘안을 내서 서울에 몇 달 둔 다음 북한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했고, 이 제안을 받아들인 북한이 일본에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돌려주게 된 거죠.” 2005년 드디어 한국 땅으로 돌아온 북관대첩비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어 경복궁에서 전시된 후 이듬해 그가 만든 지붕돌 및 기단과 함께 북한으로 보내졌다.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워진 이 비석은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었고, 현재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앞뜰에 전시된 복제품은 이 석장이 실물과 같은 크기로 제작한 것이다. “숭례문 복원 공사 때는 현장에 화재의 기운이 남아 있어 피부병도 걸리고 기관지가 안 좋아졌지요. 하지만 큰 재난 후 새로운 역사를 쓴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고, 옛 석공들의 지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서 공부가 많이 됐습니다. 그들이 돌을 다듬으면서 비가 올 때를 대비해 빗물을 흘려보내는 방법까지 치밀하게 계산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구전으로만 듣던 걸 해체 작업을 하면서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거죠.” “돌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무심하게 툭툭 때리면 무심하게 모양이 나오고, 화가 나서 쪼면 화난 모습 그대로 나오거든요. 정직해서 매력적인 것이 바로 돌이지요.” 국내 석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화강암은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암석이기도 하다. 화강암은 강도가 높고 빛깔이 고우며 광택이 뛰어난 장점이 있지만, 결이 치밀해 작업하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한국의 석공예는 섬세한 조각보다 선으로 특징을 잡아 표현하는 조각이 주를 이룬다. 거친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는 돌에 새긴 부드러운 선은 한국 석조 문화의 특징이다. 변함없는 일과 이 석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1995년 타이완 신베이시 시즈구(新北市 汐止區)의 자항기념당(慈航記念堂)에 조성한 아미타불상을 꼽았다. 앉아서 입적한 후 등신불로 모셔진 자항대사를 기리는 공간에 안치할 불상을 제작하기 위해 당시 타이완 신도들이 세계 여러 나라의 석불을 돌아보고 나서 “석굴암 본존불이 최고”란 결론을 내리고는 그에게 의뢰를 한 것이다.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한 부처님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부피가 그것의 1.7배가 넘는 거대한 불상을 만들게 됐지요. 완성된 불상을 배로 옮겨 현장에 안치하던 날, 아미타불이 서쪽을 향해 앉자 구름이 걷히고 빛이 퍼졌다고 들었어요. 나중에 영상을 봤는데 정말 신기하게 석양빛이 불상을 감싸고 있었어요. 많은 분들이 감동했던 모습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우직하다. 눈을 뜨면 바로 작업장으로 향하는 게 변함없는 그의 일과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종일 돌을 깨고 쪼고 나면 온몸이 아프다. 그러나 돌에 대한 그의 사랑과 경외심은 변함이 없다. “돌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무심하게 툭툭 때리면 무심하게 모양이 나오고, 화가 나서 쪼면 화난 모습 그대로 나오거든요. 정직해서 매력적인 것이 바로 돌이지요.” 그의 아들 이백현(李伯鉉) 씨가 아버지의 기술을 전수받아 뒤를 잇고 있다. 그러나 전통 석공 기술의 우수성이 후대로 계속 이어 나가려면 개인의 노력과 함께 사회의 관심과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 석장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젊은이들이 우리 전통 기술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합니다.”반 세기를 한결같이 돌과 함께 살아온 명장의 말이 느릿느릿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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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UMMER 540

산이 젊어진다 산이 젊어진다 가끔 한밤중에 잠이 깰 때면 나는 어둠 속에 누워 마음속의 산길을 오른다. 집들이 멀어지고 숲이 시작되는 비탈길. 숲길에서 숨을 고른다. 왼발, 오른발. 빛과 그늘의 교차. 빠른 심장 박동, 이마와 등에 흐르는 땀. 정상의 큰 바위. 건듯 불고 지나가는 산바람과 함께 맛보는 해방감과 열린 풍경의 광대함을 상상한다. © Yang Su-yeol 무려 4000개가 넘는 산들이 솟아 있는 이 나라에서는 어디를 가나 뒷산 혹은 앞산이 보인다. 특히 인구 1000만이 넘는 서울은 남산을 품에 안고 안산, 인왕산, 관악산, 불암산, 도봉산, 북한산에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한 시간 안에 도달하는 도심의 대자연, 특별한 준비 없이 간편한 차림으로 당일에 다녀올 수 있다. 산길은 안전하다. 범죄나 야생 동물의 공격에 노출되는 일이 거의 없다. 잘 정비되고 친절하게 안내된 등산로에는 대피소가 갖추어져 있어서 여유롭게 자연 경관과 도시 전경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등산의 풍경도 변했다. 40~60대 중년들의 취미였던 산행에 온라인 커뮤니티, 취미 플랫폼을 매개로 20~30대 젊은 등산 마니아들이 나섰다. 젊은이들은 등산 패션에서도 그들 특유의 강한 개성을 자랑한다. 울긋불긋 비슷한 아웃도어 패션 대신 스타일리시한 레깅스, 산악 러닝화를 애용한다. 인스타그램에 자신만의 등산 모습을 올린다. 어떤 젊은이들은 취미를 공유하는 플랫폼을 만들어 새로운 관계를 맺고, 쓰레기 줍기 같은 ‘클린 하이킹’에도 나선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하여 해외로 떠나지 못하고 갇혀 지내게 되자 폐쇄적 환경에서 벗어나고 암울한 청년기의 고빗길을 넘기 위한 돌파구로 밀레니얼 세대는 산과 숲으로 간다. 금년 3월 북한산 국립공원 탐방객은 67만 명, 전년 같은 기간보다 41% 증가했다고 한다. 비대면 여행 취미로 산의 풍경이 젊어졌다. 나는 어둠 속에 누워, 간편한 차림으로 혼자 산정에 올라 광대한 세계와 대면하는 젊은이들을 부러워하며 젊어진 산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나도 걷는다, 왼발 오른발…. 김화영(Kim Hwa-young 金華榮)/문학평론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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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UMMER 618

DILKUSHA ‘기쁜 마음의 궁전’ 1919년 3.1운동을 해외에 최초로 알린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와 그의 영국인 부인 메리 린리 테일러(1889-1982)가 살았던 집‘딜쿠샤(Dilkusha)’가 여러 해에 걸친 복원을 끝내고 올해 3월 1일 기념관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그들의 꿈과 사랑, 그리고 한국의 독립을 도우려는 열정이 담긴 보금자리가 옛모습으로 돌아왔다.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와 그의 영국인 부인 메리 린리 테일러가 1923년 서울 행촌동에 지은 서양식 벽돌집 ‘딜쿠샤.’2009년서울시가 펴낸 『돈의문 밖, 성벽 아랫마을: 역사·공간·주거』에 실린 옛 모습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딜쿠샤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이루어졌으며 20세기 초 한국에 지어진 서양식 가옥의 건축 기법을 보여 준다. 특히 외벽에는벽돌의 옆면과 마구리를 번갈아 가며 쌓는 프랑스식 공법(rat-trap bond)이 적용되었다. 1890년대 말, 아버지, 동생과 함께 금광 채굴 사업 차 한국에 온 앨버트 테일러는 일본에 공연 여행 온 영국인 연극 배우 메리린리를 만나 결혼한 후 1942년 일본에 의해 강제 추방될 때까지 딜쿠샤에서 살았다. 영국인 연극 배우 메리 린리 서울 행촌동 언덕의 빽빽한 주택가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특이한 건물 하나가 있다. 머릿돌에 ‘DILKUSHA1923’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이 집의 내력은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미국인 조지 테일러(George Alexander Taylor 1829~1908)와 그의 두아들 앨버트, 윌리엄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대한제국 선포 즈음인 1890년대 말이었다. 입국 목적은 당시 평안북도에 있던 운산(雲山) 금광 채굴 사업을 위해서였다. 앨버트는 그 후영국인 배우 메리 린리(Mary Linley)와 결혼한 뒤 신혼살림을 위해 서양식 주택을 짓고, 그 이름을 딜쿠샤라 했다. 신혼여행 중에 방문했던 북부 인도의 궁전 이름으로,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Palace of Heart's Delight)’이라는 뜻이다. 잊힌 집 앨버트는 단순히 금광 개발업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 중심 소공동에 테일러상회(W. W. Taylor& Company)를 세워 미국산 자동차를 비롯해 다양한 생활용품과 건축 자재를 수입 판매했는가 하면, UPI와 AP 서울 통신원을 맡아 이곳 소식을 미국에 타전하는 역할도했다.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1919~2015)가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난 날은 1919년 2월 28일로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저항해 전 국민이 일어선 3.1운동이시작되기 하루 전이었다. 메리 린리 테일러가 쓴 회고록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The Book Guild Ltd., 1992)에 의하면, 조선인 간호사들이 일본경찰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어떤 서류 뭉치를 갓 태어난 아기의 강보 밑에 감춰 놓았다고 한다. 저녁 무렵 남편 앨버트가 와서야 비로소 그것이 「기미독립선언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독립선언서’잖아! 그가 놀라서 소리쳤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서운한 마음에 그날의 일을 힘주어 말한다. 당시 갓 신문 기자가 된 브루스는 아들을 처음 만난 것보다 그문서를 발견한 것에 더 흥분했다고 말이다. 바로 그날 밤, 시동생 빌이 독립선언문 사본과 그에 관해 브루스가 쓴 기사를 구두 뒷축에 감춘 채 서울을 떠나 도쿄로 갔다. 금지령이 떨어지기전에 그것을 전신으로 미국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Kor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he exclaimed, astonished. To this day,I aver that, as a newly fledged newspaper correspondent, he was more thrilled to find those documentsthan he was to find his own son and heir. That very night, Brother Bill (Albert’s younger brother) leftSeoul for Tokyo, with a copy of the Proclamation in the hollow of his heel, to get it off, with Albert’sreport, over the cables to America, before any order could be issued to stop it.)” 당시 온 국민이 제국주의세력에 대항해 봉기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식민 지배가 시작된 지 9년 만에 조선에서는 대대적인 민중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앨버트가 타전한 기사를 받아 3월4일 중국의 영문 매체 『대륙보(China Press)』를 시작으로, 10일에 미국 인디애나 『사우스벤드 뉴스 타임스(South Bend News-Times)』, 13일에는『뉴욕타임스』에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하다 (Koreans Declare For Independence)’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는 이후 3.1운동 진압 과정에서 일본이자행한 수많은 민간인 학살과 방화 사건들도 열심히 취재해 보도했다. 사업가로서 일본 당국으로부터 여러 면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개인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의 무력적인 탄압행위를 세상에 알리고, 조선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한 것이다. 그런 활동은 일본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다. 결국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적성국시민’의 거주를 허용하지 않았고, 앨버트는 그해 12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 부근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부부가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이후 그와 그의 가족은한국인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브루스 테일러와 그의 딸 제니퍼 테일러(1958~)가 2006년 방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테일러 부부가 추방된 지 64년 만의 일이었다. 딜쿠샤 2층 거실. 테일러 부부가 거주하던 당시의 모습을 사진 자료를 통해 그대로 재현했다. 풍경화, 화병, 램프, 의자, 삼층장등 가구와 장식품에 동서양 문화가 혼합되어 있다. 테일러 가족의 방문 필자가 10여 년 전 방문했을 때만 해도 딜쿠샤는 건물 내외부가 모두 쇠락한 상태였다. 안전 진단 결과더 이상 거주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육안으로 대충 보아도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벽돌이며 부서진 콘크리트 사이로 보이는 철근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추방 전 일본 군인들이 체포하러 왔을 때테일러 가족이 몸을 숨겼다는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 아래 공간, 2층 서재의 벽난로, 현관과 계단, 마룻바닥, 창틀 등 내부 시설은 함부로 없애거나 덧댄 나머지 누더기처럼 변해 있었다.비가 새는 지붕에는 얼기설기 비닐 천막이 덮여 있었다. 서울시와 중앙 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즈음이었다. 브루스 부녀의 방한으로 딜쿠샤의 내력이 알려지자, 더이상의 훼손을 막고 역사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2017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되었다. 이듬해 건물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고 내부 시설을 갖춘 후 2021년 3월 1일 일반에 개방되었다.글렌우드 난로(Glenwood Heater)를 비롯해 메리가 남긴 사진들을 기반으로 재현한 가구와 화병, 촛대 등 소품에 이르기까지 마치 192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살렸다. 특히앨버트 부부의 생활 유품과 옛 사진을 비롯한 1,026건에 달하는 자료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면서 딜쿠샤는 더욱 풍성한 전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집은 단순히 한외국인 가족이 살았던 공간이 아니다. 딜쿠샤는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 그리고 세계 만방에 식민지 민중이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 주인공의 보금자리였다. 일생을통해 미국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었던 앨버트는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고, 1948년 캘리포니아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있는자신의 아버지 묘 옆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그의 아내 메리가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미군 군함에 유골을 싣고 돌아와 소원을 이뤄준 것이다. 메리는 1982년 92세에세상을 떠나 캘리포니아에 묻혔다. 2006년 브루스와 제니퍼가 방한했을 때 메리의 묘에서 퍼온 흙을 앨버트의 묘에 뿌렸고, 그의 묘의 흙을 떠다가 캘리포니아의 메리 묘에 뿌린 것으로알려졌다. 딜쿠샤 1층 거실. 고증을 거쳐 2년여 동안 꼼꼼하게 재현되었다.ⓒ 이정우(Lee Jeong-woo 李政雨) 이 집은 단순히 한 외국인 가족이 살았던 공간이 아니다. 딜쿠샤는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 그리고 세계 만방에 식민지 민중이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주인공의 보금자리였다. 이방인 조력자들 앨버트 테일러뿐만 아니라 당시 외국인 중에 음으로 양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운 이들이 적지 않았다.딜쿠샤에서 약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살았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T. Bethell 1872-1909)은 1904년 조선에 들어와 언론인 양기탁(梁起鐸1871~1938) 등과 함께 『대한매일신보(Korea Daily News)』를 발행했다. 그는 언론 활동을 통해 일본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정부에 떠안긴 거액의 외채를 조선인들 스스로 십시일반 모금해 갚자는 국채보상운동 때에도 전면에 나서서 지원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Daily Mail)』 기자프레데릭 매켄지(Frederick Mackenzie 1869-1931)는 1906년부터 1907년 사이 경기도와 충청도, 강원도의 산중을 찾아다니며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들을 만나취재했다. 그 결과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1908),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1920) 등의 저서를남겼다. 이 책들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일반 민중까지도 치열한 게릴라 항전을 이어갔음을 증명해 주는 귀중한 사료다. 또 영국 태생의 캐나다 선교사이며 의학자인 프랭크스코필드(Frank Schofield 1889-1970)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교수로 봉사하며 한편으로 일본의 조선인 학살을 취재해 해외 언론에 알리기도 했다. 이를 구실로 1920년강제 출국 당했다가, 1969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최초의 외국인이다. 이 외에도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변호한 일본인 인권 변호사후세 다쓰지(布施辰治 Datsuji Fuse 1880-1953)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운 중국인 저보성(褚輔成 Chu Fucheng 1873-1948), 한국광복군의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한 중국인 쑤징허(蘇景和 Su Jinghe 1918-2020) 등 외국인들의 조력이 있었다. 딜쿠샤는 그런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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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UMMER 540

넷플릭스와 한국 콘텐츠의 즐거운 상생 한국 시장 진출 이후 5년– 넷플릭스는 그동안 한국 콘텐츠의 수준을 높였고, 세계 시장에서 K-콘텐츠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같은 순항의 이면에는 지속적인 투자와 과감한 도전, 그리고 우수한 제작자들의 협력이 있었다. 2016년 한국 시장에 진출한 이후 지금까지 OTT(over-the-top) 미디어 스트리밍 서비스의 최강자 넷플릭스(Netflix)는 괄목할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양질의 외국 콘텐츠가 한국시장에 쏟아졌고, 한국의 우수한 콘텐츠도 해외 관객을 만났다. 넷플릭스 덕분에 한국 콘텐츠 제작자들이 세계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한국 덕분에 넷플릭스는 세계 시장에서 구독자 수를 늘려나갔다. 콘텐츠 교류의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윈윈’ 관계를 확실히 구축한 것이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 콘텐츠 시장은 전례 없는 격변을 맞았다. CJ ENM의 티빙(TVING), KT의 Seezn, SKT의 wavee가 시장 선점을 위해 경쟁 중이다. Disney+등 외국의 대형 OTT 서비스도 한국 시장 진출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19 이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파격적인 시작 넷플릭스는 한국 진출을 선언할 때부터 파격이었다. 740억원이나 되는 거액을 투자해 제작한 봉준호(Bong Joon-ho 奉俊昊) 감독의 대작 (玉子, Okja; 2017)를 한국 넷플릭스의 간판으로 걸었기 때문이다. 국내 멀티플렉스 극장들은 “OTT와 극장 동시 상영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보이콧을 선언하기도 했으나, 봉 감독은 이 작품으로 할리우드에 눈 도장을 찍었다. 어찌보면 (寄生虫, Parasite; 2019)이 거둔 미국 아카데미 4관왕의 첫 단추는 넷플릭스와의 공조였던 셈이다. 넷플릭스는 이후 (甜蜜家园, Sweet Home; 2020), (灵能教师安恩英, The School Nurse Files; 2020), (乐园之夜, Night in Paradise; 2021)의 공개로 계속 라인업을 확장했다. 의 경우 지난해 12월 18일 공개한 이후 한 달 만에 2200만 계정이 시청했다. 이는 넷플릭스 전체 콘텐츠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순위에 해당하며, 한국 콘텐츠의 잇단 흥행 성공에 힘 입어 전 세계 구독자수가 지난해 2억명을 돌파했다. 영화 에서 환경단체 ALF(Animal Liberation Front)의 목적은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숨겨진 실체를 파헤치는 것이다. © 넷플릭스(Netflix) 주인공 미자(우)는 잃어버린 친구 옥자를 되찾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유전자 조작을 통한 ‘슈퍼돼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대표 낸시 미란도를 만난다. 주목하는 이유 넷플릭스는 한국을 단순히 소비시장으로 보지 않았다. 인구 5000만명의 나라는 매력적인 시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가 아시아에서 지사나 사무소를 둔 곳은 싱가폴, 인도, 일본, 그리고 한국 네 나라뿐이다. 인도는 12억 인구로 시장이 방대하다. 싱가폴은 동·서양을 잇는 교두보로 필요하다. 일본은 애니메이션 생산을 위해서 마련됐다. 지리적 위치도, 인구 수도 수익을 보장할 수 없어 보이는 한국에 넷플릭스가 뛰어 든 이유는 뛰어난 콘텐츠 제작능력이 있어서다. 우수한 드라마·영화 제작자들이 구미를 당기게 했다. 콘텐츠 생산 전초기지로 알맞아 보인 것이다. 넷플릭스의 선택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오리지널 콘텐츠로 제작한 (尸战朝鲜/屍戰朝鮮, Kingdom;시즌 1 2019, 시즌 2 2020)이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한국의 조선시대(1392~1910)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좀비 이야기가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혼합한 콘텐츠로 주목을 끌었다. 김은희(Kim Eun-hee, 金銀姬) 작가의 필력도 한 몫했다. 미국에서는 조선의 양반들이 쓰던 모자 ‘갓’을 구매하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넷플릭스는 해외 팬들이 K-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플랫폼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한류의 창구가 되기도 한다. 한류가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인 아시아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선진국인 영국과 미국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해외 팬들이 넷플릭스가 제공하는 한국 콘텐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영국인 소피 씨(Sophie Abdoul, 23)는 14살 때부터 K-팝과 한국 드라마, 그리고 영화를 꾸준히 챙겨 봤다. 아이돌 음악은 유튜브에서 쉽게 볼 수 있었지만, 드라마만큼은 장벽이 높았다. 하지만 최근 넷플릭스가 한국 콘텐츠를 연달아 공개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관람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넷플릭스로 인해 한국 콘텐츠에 대한 접근성이 매우 좋아졌다”면서 “우울할 때마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덕분에 최근에는 한국 문화 전도사처럼 친구와 가족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일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고 했다. 미국인 첼시 씨(Chelsea Anosik, 18)는 한국 드라마 팬이다. 넷플릭스의 한국 콘텐츠 서비스가 시작되기 전부터 K-드라마를 즐겨 온 그는 요즘 더 많은 한국 드라마를 찾아 보고 있다. (奶酪陷阱, Cheese in the Trap; 2016)을 시작으로 , (虽然是精神病但没关系, It’s Okay to Not be Okay; 2020)까지 즐기는 장르도 다양하다. 그는 “한국 드라마는 너무 매력적인 요소가 많다”면서 “감정을 자극하는 데 탁월한 것도 인기 요소”라고 했다. 이어“넷플릭스가 한국 작가, 감독, 배우들에게 기존 TV에서는 할 수 없었던 다양한 도전을 촉구하는 모습이 반갑다”면서 “한국 드라마는 로맨스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보다 훨씬 더 내용이 풍부하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고도 했다. 아시아에서도 K-콘텐츠와 넷플릭스의 협업이 큰 호응을 받고 있다. 필리핀인 마리 (Marié Olivia Garcia) 씨는 “넷플릭스에 올라오는 한국 콘텐츠는 기존 TV 프로그램보다 더 많은 옵션을 제공한다”면서 “한류 팬들에겐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영화 (屍速列車, Train to Busan; 2016)으로 한국 콘텐츠에 빠져든 인도인 스라비카(Shravika Wanjari) 씨 역시 “좀비물·스릴러물이 굉장히 뛰어난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넷플릭스 플랫폼을 점령할 것 같다”고 예상했다. 2020년 9월 25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은 정세랑(Chung Serang, 郑世朗)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시즌 1은 총 6화로 러닝타임 298분이다. ©넷플릭스(Netflix) 조선 왕조를 위협하는 좀비가 등장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은 넷플릭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포물 중 하나이다. 두 번째 시즌은 첫 번째 시즌보다 더 큰 인기를 끌었다. 김성훈(Kim Sung-hoon 金成勳) 감독은 곧 방영 예정인 스페셜 에피소드 이 세 번째 시즌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할 것이라 말했다. 올 해 공개될 드라마 은 주동근(Joo Dong-geun 朱東根) 작가의 동명 웹툰이 원작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도시 속 한 고등학교에 고립된 이들과 그들을 구하려는 자들이 극한 상황을 겪으며 벌어지는 내용을 담았다. 4월 9일 넷플릭스를 통해 단독 공개한 박훈정(Park Hoon-jung 朴勋政) 감독의 영화 은 한국형 누아르에 전에 없던 여성 캐릭터까지 더해지며 스토리와 영상미를 함께 잡았다. 군대를 소재로 한 한준희(Han Joon-hee 韩俊熙) 감독의 는 평범한 이등병이 ‘군무이탈 체포조’가 되어 탈영병을 쫓으며 마주하는 혼란스러운 청춘에 관한 이야기다. 대규모 투자 넷플릭스는 세계 시장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과의 협업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더욱 치열해져 가는 OTT 서비스 경쟁에서 더 많은 투자로 우위를 점한다는 계획이다. 한국 콘텐츠 제작에 올해 5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계획의 일환이다. 지난 5년간 누적 투자액이 7억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역대 최고 수준이다. 안정적인 제작 환경을 위해서 경기도 연천과 파주 두 곳에 대규모 스튜디오를 마련하기도 했다. 넷플릭스가 임대 계약을 체결한 두 스튜디오는 ‘YCDSMC 스튜디오 139’와 ‘삼성 스튜디오’다. YCDSMC 스튜디오 139는 6곳의 스테이지를 갖춘 총 면적 9000 제곱미터, 삼성 스튜디오는 3곳의 스테이지로 총 면적 7000 제곱미터에 이른다. 이 같은 전폭적인 지원으로 올해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 면면이 화려하다. 의 프리퀄인 (屍戰朝鮮:雅信傳, Kingdom: Ashin of the North)은 전지현(Jun Ji-hyun, 全智賢)의 캐스팅을 확정 짓고 올해 방영을 앞뒀다. 유품 정리사의 눈을 통해 죽은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Move to Heaven:我是遺物整理師, Move to Heaven)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제훈(Lee Je-hoon, 李帝勳)이 주인공을 맡아 한류 팬들의 관심이 뜨겁다. 정해인(Jung Hae-in,丁海寅), 구교환(Koo Kyo-hwan, 具敎煥) 김성균(Kim Sung-kyun, 金聲均)이 주연을 맡은 영화 (D.P:逃兵追緝令)도 기대작이다. 탈영병들을 쫓는 군무이탈 체포조들이 마주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김보통 작가의 동명 웹툰이 군대 내 부조리와 가혹행위들을 여과없이 그려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코리안 좀비 시리즈는 올해도 계속된다. 바이러스가 퍼진 고등학교를 구하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殭屍校園, All of Us Are Dead)의 스틸컷이 최근 공개되어 학교 운동장에 가득한 피투성이 좀비떼들의 모습이 팬들의 기대를 높이고 있다. 한류 스타 공유(Gong Yoo, 孔劉)와 배두나(Bae Doo-na, 裵斗娜), 이준(Lee Joon, 李準)이 주연하는 영화 (寧靜海, The Silent Sea)>도 넷플릭스에서 선보인다. 세계적인 사막화로 물과 식량이 부족해진 지구가 배경이다. 달에 버려진 연구기지에서 벌어지는 정예대원들의 이야기로, 한국형 SF 기대작으로 손꼽힌다. 넷플릭스의 대규모 투자에 자극을 받은 국내 OTT 서비스 플랫폼들의 경쟁에도 불이 붙었다. KT는 2023년까지 4000억원 이상을 투자해 오리지널 대작 드라마 100편을 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지상파 3사(KBS·SBS·MBC)와 SK Telecom이 만든 wavee는 3년간 3000억원을 콘텐츠 제작에 쏟아 붓는다. CJ와 JTBC 연합인 TVING도 3년간 4000억원 투자를 선언했다. OTT 플랫폼 공룡들의 전쟁에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한류 팬들은 즐겁기만 하다. 넷플릭스는 세계 시장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과의 협업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더욱 치열해져 가는 OTT 서비스 경쟁에서 더 많은 투자로 우위를 점한다는 계획이다. 시즌 3는 스페셜 에피소드 에 이어 매우 기대된다. 스페셜 에피소드에서 전지현(Jun Ji-hyun 全智賢)은 좀비를 조종하는 것 같은 해적 여왕 아신으로 출연한다. Kwon Ki-bong Writer Ahn Hong-beomPhotograp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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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UMMER 791

마음의 실을 이어 하늘의 수를 놓다 자수장 최유현(Choi Yoo-hyeon 崔維玹)은 70여 년 동안 바늘과 실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아왔다. 그는 불화(佛畫)를 바탕으로 한 대작과 독창적 기법으로 한국 자수의 차원을 한층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삼세불도(三世佛圖)⟩ 중 ‘석가모니불도’(부분). 257 × 128 ㎝. 비단에 명주실. 자수장 최유현(Choi Yoo-hyeon 崔維玹)은 1970년대 중반부터 불화를 자수로 표현하는 수불(繡佛)에 도전했다.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를 표현하는 ⟨삼세불도⟩는 완성하는 데 10년이 넘게 걸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아름답고 섬세한 자수 작품을 대하면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되지만, 수틀 앞에 앉아 바늘로 한 땀 한 땀 그림을 만들어 나가는 작업은 매우 고되고 지루하여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특히 전통 자수는 현대 자수에 비해 대체적으로 제작 과정이 더 복잡하고 기법 또한 다양한 데다가 그 안에 담긴 정신까지 표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수가 힘들고 지루하기만 했다면 어떻게 평생 이 일을 했겠어요? 재미있고 즐거우니까 했죠.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 자수를 내 손으로 복원하고 싶다는 바람도 컸고요.”고생스럽지 않냐는 질문에, 최유현 자수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본질에 천착하다 “제 나이가 이제 80이 훨씬 넘었어요. 우리 어렸을 땐 바느질이 일상이었어요. 집집마다 옷도 손수 만들어 입고, 혼수에 들어가는 수도 직접 놓았죠. 제가 7남매 중 막내인데, 어머니가 늘 수를 놓고 계시니 저도 자연스레 옆에서 따라 하게 됐어요. 10대 때 학교 숙제로 자수를 해 갔다가 칭찬을 받은 게 재미를 붙이는 계기가 됐고요. 한때는 하루 스무 시간 넘게 수틀 앞을 떠나지 못한 적도 있어요. 밥 먹는 시간, 세수하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매달렸죠.” 열일곱 살에 당시 자수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던 권수산(権寿山) 선생을 만나 체계적으로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자수를 시작하게 될 무렵, 한국 전통 자수는 암흑기였다. 그 당시 자수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여성들이었고, 이들은 귀국 후 여자대학교 가정과나 양장학교에서 일본풍의 자수나 생활 소품에 치중된 자수를 가르쳤다. 이런 경향은 오랫동안 지속됐다.최 자수장은 1960년대 초반 자수 학원을 열어, 전통 자수의 본질에 천착하고 우리 것을 되찾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베갯모나 방석 같은 생활 소품에 전통 문양을 수놓는 수준이었지만, 점차 소재를 전통 회화로 확대해 나갔다.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옛 미술품들을 재해석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확립해 나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자수는 바늘 다루는 솜씨와 타고난 색감도 중요하지만 디자인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다른 사람의 작품을 따라 하기만 해선 자신만의 독창적 세계를 구축할 수 없어요. 한국 전통 도자기와 산수화, 민화 등을 밑그림으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1. ⟨연화장세계도(蓮華藏世界圖)⟩. 270 × 300 ㎝. 비단에 명주실. 경상북도 예천 용문사(龍門寺)의 만다라를 자수로 표현한 작품으로 최 자수장에게 1988년 제1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안겨 주었다.ⓒ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도전과 성취 사회 일반적으로 한국 고유의 전통 문화가 경시되었던 시절, 그의 이 같은 노력은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전통 자수에 매혹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다. 특히 그의 작품은 외국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당장의 경제적 이익보다 전통 자수의 발전을 먼저 생각했던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는 작품 판매보다는 전통 자수 연구와 전시 활동에 집중했으며, 불화를 자수로 표현하는 수불(繡佛)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불교 미술이야말로 전통 예술의 총화라는 생각에서였다. 그중 석가모니의 일생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팔상도(八相圖)⟩와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를 아우르는 ⟨삼세불도(三世佛圖)⟩는 그의 70여 년 자수 인생을 대표하는 화룡점정이라 할 만하다. 전통 기법과 창작 기법이 화려하게 어우러졌을 뿐 아니라, 재료도 명주실은 물론 면사, 양모사, 인견사 등을 활용해 질감을 다양하게 살렸다. 두 작품 모두 완성하는 데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스님들이 수행과 정진에 힘쓰듯 참선하는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았어요. 특히 ⟨팔상도⟩는 통도사에서 처음 그림을 접한 후 10년간 ‘이 작품을 내 자수로 짓게 해 달라’고 기원을 드렸습니다. 가까스로 절의 승인을 받아 제작에 착수했는데, 높이 2미터가 넘는 작품 8점을 수놓다 보니 완성하는 데 12년이 걸렸어요. 그나마 제자들과 함께했기에 망정이지 저 혼자였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남다른 열정과 집념은 큰 상의 수상으로 이어졌다. 예천 용문사(龍門寺)의 만다라를 수놓은 ⟨연화장세계도(蓮華藏世界圖)⟩로 1988년 제1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1996년에는 마침내 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2. ⟨팔상도(八相圖)⟩ 중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236 × 152 ㎝. 비단에 명주실. 이 작품은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팔상도를 밑그림으로 삼았으며, 자수 표현이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크게 여덟 가지 장면으로 나누어 보여 주는 ⟨팔상도(八相圖)⟩는 한 화면에 여러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효제충신도(孝悌忠信圖)⟩ 8곡 병풍 중 ‘염자도(廉子圖)’(부분). 128 × 51 ㎝. 비단에 명주실. 1960년대, 한국 전통 자수의 본질에 천착하게 된 장인은 문자도를 포함한 민화의 재해석에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보존과 계승 한국 전통 자수의 역사는 삼국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한국 문화에 대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은 고대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이 수를 놓은 화려한 옷을 입었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에는 궁궐에 자수 장식을 전담하는 수방(繡房)을 설치해 왕실의 의복과 장식품에 수를 놓았고, 민간에서는 가정마다 가풍에 따라 전승되는 자수 양식이 있었다. 최 자수장의 예술 철학은 ‘심선신침(心線神針)’이라는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2016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전시회의 제목이기도 했던 이 말은 ‘마음의 실을 이어 하늘의 수를 놓는다’는 뜻이다. “작품 한 점 한 점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완성됩니다.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면서 자수로 재현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해 본을 뜨기까지 그 과정도 만만치 않지만, 어떤 질감과 색감의 천과 실을 사용할지, 색 배합은 어떻게 할지, 어떤 기법을 사용할지, 머릿속에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가며 작업해야 해요. 구성과 위치에 따라 실의 굵기를 달리해야 하니 실도 직접 꼬아야 하고, 마음에 드는 기법과 색감을 찾을 때까지 수를 놓았다가 뜯어내 버리는 과정을 숱하게 반복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뭐 하나 대충 넘기는 법이 없다. 언제나 기본을 강조하며 전통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후대에 제대로 전수하기 위해서다. 이는 그가 부산대학교 한국복식문화연구소 석좌교수로 출강하며 후학 양성에 열과 성을 다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전통 자수가 아름답고 좋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선뜻 해 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도 부지기수고요. 제대로 교육받았다 해도 부단한 인내로 오랜 수련을 거쳐야만 비로소 작가로 거듭날 수 있어요.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 도전 자체를 꺼리는 거죠.” 그는 자신의 자수 인생을 돌아보는 자서전 『최유현 자수사』의 발간을 앞두고 있다. 생활 소품에서 민화, 다시 불화로 변화를 거듭해 온 그간의 여정을 시기별로 정리한 책이다. 제자들을 위한 교육용 자료 편찬 작업도 서두르고 있다. 이미 100여 점이 넘는 작품에 주석을 달아 정리한 작품집을 여러 권 펴냈고, 자신이 개발한 독창적 기법에 이름을 붙여 상세하게 기록한 책도 조만간 출간할 계획이다. 그런가 하면 대작으로선 마지막 작품으로 예상되는 양산 신흥사(新興寺) 대광전(大光殿) 벽화를 모본으로 하는 ⟨관세음보살도⟩도 완성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색(紫色) 천에 금색 실로만 수를 놓은 이 작품은 그 정교함과 화려함이 가히 극치에 달한 느낌이다. 지난 3년간 작업해 온 역작이다. “앞으로 이처럼 대규모 작품은 더 이상 하기 힘들 것 같아요. 눈도 침침하고 체력도 달려서 2~3시간 작업하는 것도 힘에 부치거든요. 이젠 작품 제작보다 제자들 교육에 집중해야죠.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전수하는 게 제 남은 숙제니까요.”그가 거의 반세기 동안 팔지 않고 보관해 온 자신의 작품과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수백여 점의 전통 및 현대 작품이 문화재청 지원 아래 전주 국립무형유산원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머지않은 날 자수 전문 박물관이 건립돼 이 작품들을 오래도록 보존하고 전시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1. 최 자수장은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명주실, 면사, 양모사, 인견사 등 다양한 소재와 색상의 실을 사용해 질감을 표현하는 한편 전통 및 창작 기법을 두루 활용해 수를 놓는다. 2. 그는 지난 3년 동안 경상남도 양산 신흥사(新興寺) 대광전(大光殿) 벽화를 모본으로 하는 를 작업 중이다. 이 작품은 자색 비단에 금색 명주실로만 수를 놓아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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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2021 SUMMER 922

문화예술을 품은 서촌의 시간 속으로 왕이 거닐던 옛 산수화 속 동네, 식민지 암흑시대 한 호리한 시인이 몸을 웅크린 채 저항시를 쓰던 동네, 서울의 옛 도심 빌딩 숲 한가운데 한옥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동네 서촌으로 떠났다. ‘서촌’은 경복궁 서쪽으로 옛 서울의 경계를 이루었던 인왕산 자락 아래 동네들을 일컫는 별칭이다. 인왕산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눈을 돌리면 북악산 밑으로 경복궁과 청와대가 자리잡고 있다. 고즈넉한 한옥과 어울리며 제각기 멋을 풍기는 아담한 빌딩들이 들어선 서촌은 과거와 현재가 흥미롭게 공존하는 곳이다. 이 마을에선 오래된 한옥이 이국적인 디저트 카페로 다시 태어나고, 조선 시대(1392~1910)의 수묵화가 21세기 화가의 캔버스 위로 펼쳐진다. 사람의 훈기가 가득한 체부시장과 통인시장에서 수성(水聲)계곡으로 올라가는 좁은 골목들은 마치 실존주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집필실이 있던 체코의 황금소로 22번지 골목처럼 아늑하다. 때로는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뒷골목을 걷는 느낌도 든다. 북촌에 이어 서촌이 최근 서울의 명소로 떠올랐다. 아기자기한 골목과 맛있는 음식점, 감각적인 카페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예술을 자연스레 몸으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인왕산에는 코로나 19사태속에 홀로 하는 등산에 재미를 느낀 사람들이 찾아와 눈 앞에 펼쳐지는 서울의 경관에 빠져들기도 한다. 서촌에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살았지만, 문화예술만은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 이곳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문화예술이 형형색색 모여 미로 같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옥인동에 위치한 수성계곡은 나무 그늘과 물소리가 시원해 예로부터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장소이다. 한양도성은 14세기 조선 건국 직후 왕도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데, 서쪽 벽이 인왕산을 가로지르며 서촌을 품고 있다. 옛 사람들의 자취 2013년 9월에 설립된 박노수 미술관은 이 곳에서 40여 년간 거주하던 박노수 화백의 기증작품과 컬렉션 등 1000여 점의 예술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1941년 연희전문 학생이던 윤동주는 자신이 존경하던 소설가 김송(金松·1909~1988) 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하며 시를 썼다. 이 곳에서 ‘별을 헤는 밤’을 비롯한 대표작을 썼으나 당시의 집은 남아 있지 않다. 서촌의 높은 곳에 올라 펜으로 길거리와 마을의 풍경을 담는 김미경 화가. 그는 20년의 기자생활을 끝낸 후 2005년 뉴욕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다시 2012년 서촌에 자리를 잡고 그림 그리며 ‘옥상화가’로 알려졌다.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에 인접한 서촌은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 즉 후일의 세종대왕 (1397~1450 世宗大王)을 비롯한 여러 왕자들이 나고 자란 동네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곳은 수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왕실군락지’였다. 서촌이 배경인 산수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1418~1453 安平大君)이 꿈에 도원에서 노니던 광경을 화가 안견(安堅)에게 설명해서 그리게 한 작품이다. 이 그림 속 옥인동 수성계곡은 안평대군뿐 아니라 세종의 둘째 형님 효령대군(1396~1486 孝寧大君)도 살았던 장소다. 학문과 덕성이 출중했던 그는 동생인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권력의 갈등에서 비켜나 불교의 중흥에 힘쓴 인물로 추앙 받는다. 또한 이 동네에는 겸재 정선(1676~1759 謙齋 鄭敾)이 살며 조선 문화 절정기였던 진경시대(眞景時代)의 걸작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1751)⟩를 그리기도 했다. 국보 제 216호인 이 유명한 그림은 고 이건희(1942~2020 李健煕) 삼성그룹 회장의 소장품이었는데, 최근 국가에 기증되어 다시 한번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조선 중기부터 서촌에는 왕실 가족보다는 양반과 상민의 중간 신분이었던 중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역관과 의관, 내시 등 궁중관리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즉, 현재의 사직동, 옥인동, 효자동 등 여러 동네를 아우르는 이 지역은 사대부가 살았던 북촌과 달리 궁궐의 운영에 필수적인 기능인들의 거주지였다. 그래서 북촌의 한옥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웅장한데 비해 서촌의 한옥은 아담하고 소박하다. 서촌에 실핏줄 같은 작은 골목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의 몰락에 이어 일제강점기(1910~1945)에 이르자 이곳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시인 윤동주(1917~1945 尹東柱), 이상(1910~1937 李箱), 노천명 (1911~1957 盧天命)과 소설가 염상섭(1897~1963 廉想涉)이다. 또한 화가 구본웅(1906~1953 具本雄), 이중섭 (1916~1956 李仲燮), 천경자(1924~2015 千鏡子)도 이곳에 살았다. 같은 시기 서촌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완용(1858~1926 李完用)과 윤덕영(1873~1940 尹德榮) 같은 거물 친일파들의 호화로운 서양식 저택이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을 일으키고 향유되는 문화예술은 어둠 속에서 껍질을 깨고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키는 새의 부화와 같다. 단단한 껍질에 포위된 채 살기 위해 쪼아야 하는 아기새처럼, 당시 예술가들은 치열한 창작 활동을 통해 가난과 절망의 시기를 탈출하려 노력했다. 이들의 흔적을 찾는 것이 이번 서촌 기행의 은밀한 화두이기도 하다. 1941년 효자동 인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위해 조성된 공설시장이 모태인 통인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서촌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며 지금의 시장 형태를 갖추게 됐다. 향기를 따라 나는 먼저 청운동의 ‘청운 문학도서관’과 ‘윤동주 문학관’이 자리한 ‘시인의 언덕’ 으로 향했다. 언덕 너머 서울 구 도심이 부채처럼 펼쳐지며 멀리 남산타워와 한강 너머 롯데타워도 보였다. 산비탈에 한옥을 잘 복원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청운 문학도서관에 비해 철문의 콘크리트 건물인 윤동주 문학관은 삭막한 감옥을 연상시켰다. 옥외에 카페 정원과 벤치가 있는 이 건물은 2013년 동아일보(東亞日報)와 건축전문지 ⟨SPACE⟩가 공동실시한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 조사에서 상위에 올랐다. 윤동주 문학관의 영상실 콘크리트 벽에는 식민지 시절 서촌에 살며 저항시를 썼고, 일본 유학 중 항일운동에 가담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시인의 일대기가 펼쳐진다. ‘무기를 들고 직접 싸우지 못하고 골방에 숨어 고작 시나 써서 창피하고, 심지어 그 시가 잘 써지기까지 해서 더욱 창피하다’고 쓴 그의 일기가 떠올라 마음이 처연해진다. 이곳에서 미로 같은 골목을 빠져나와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의 집’으로 갔다. 흔히 서촌 문화예술 탐방자들이 출발점으로 삼는 장소이다. 그런데 이상이 세 살에 양자로 들어가 이십여 년을 살았던 원래 집은 없어지고 집터만 남아서 지금의 이상의 집은 그의 사후에 새로 지은 집이다. 이곳에는 그의 친필 원고 등 주로 문학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수성동 계곡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청아한 산수화를 즐겨 그렸던 한국화가 박노수(1927~2013 朴魯壽)의 작품이 모여있는 ‘박노수미술관’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윤동주 시인이 대학생 시절에 살던 하숙집터도 나온다. 이제 마침내 서촌의 끝인 수성동 계곡에 당도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여성 화가가 마스크를 쓰고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서촌의 옥상화가’로 이름이 난 김미경 씨였다. 20년 경력의 신문기자였던 그는 8년 전 직장을 그만 두고 제도용 펜으로 후벼 파듯 서촌의 옥상 풍경들을 그리고 있다. 인왕산을 비롯해 한옥, 일본식 적산가옥, 빌라 등의 옥상으로 올라가 서울의 역사가 압축된 서촌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다. 처음엔 그가 화가인 줄 모르던 주민들이 ‘지도를 그리는 간첩’으로 신고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이젠 그의 그림이 서촌의 여러 가게에 걸려있다. 문득 그가 앞으로 그려나갈 서촌의 미래 모습이 궁금해진다. 1941년 효자동 인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위해 조성된 공설시장이 모태인 통인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서촌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며 지금의 시장 형태를 갖추게 됐다. 1940년대에 지어진 보안여관에는 여러 화가와 문인들이 즐겨 묵었다. 2004년까지 여관으로 운영되다가 최근에 전시, 공연 등을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윤동주 문학관 이상의 집 사직공원 경복궁 미로 속에 뒤를 돌아보다 마지막으로 통의동 보안여관에 들렀다. 화가 이중섭, 시인 서정주(1915~2000 徐廷柱) 등의 예술가가 묵었던 이 여관은 1942년에 지은 건물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 중이다. 1936년 서정주 시인이 동료 시인들과 힘을 모아 창간한 동인잡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 서니 역사의 자취가 곳곳에 묻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과 옹기종기 비좁은 전시실이 오래된 매력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 반가왔다. 보안여관의 최성우 대표는 화가의 꿈을 안고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미술경영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이 곳을 서촌을 대표하는 복합문화센터로 만들었다. 현재는 보안여관 바로 옆에 4층 건물을 지어 문화사업을 더욱 확장하고 있는데, 실험적인 젊은 국내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뿐만 아니라 해외프로젝트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보안여관 기획전에 앞으로는 외국 작가들도 초청할 계획이다. 4층 건물의 3, 4층이 게스트하우스이자 레지던스 작가들의 작업공간이기도 하다.서촌에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살았지만, 문화예술만은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 이곳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문화예술이 형형색색 모여 미로 같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골목길 여행의 장점은 미로 속에 자주 길을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낯선 길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또한 느닷없이 때때로 골목이 막혀 뒤돌아 나오며 자신의 발자취를 뒤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나는 이번 기행에서 자주 눈을 떴고 자주 뒤돌아보았다. 대오서점이 개점하던 1950년대에는 인근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책을 사거나 또는 팔러 오는 학생들로 붐볐다. 처음에는 한옥의 창고를 개조해 만든 책방이 점점 현관으로, 집안으로 확장됐다. 현재는 다시 규모가 줄었고, 뒤편 공간에는 북카페가 운영 중이다. ©Newsbank ‘먹자골목’으로 유명한 서촌의 체부동은 낮부터 밤까지 미식을 즐기러 찾아 드는 다양한 세대로 붐빈다. 아담한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미로 같은 골목이 이어진다. 이산하(Lee San-ha 李山河)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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