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김정임 이 2012년부터 이끌고 있는 건축사사무소의 이름은 ‘서로아키텍츠(Seoro Architects)’다. ‘서로’는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을 뜻하는 한국어 단어다. 사명에 담긴 의미처럼 김정임은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다기한 요소들의 상호작용과 관계성을 고찰하고, 그것을 건축 공간에 반영하는 데 관심이 많다.
서울 우면동에 위치한 삼성전자 R&D캠퍼스의 ‘서울 디자인 오피스’ 내부. 반투명 벽체와 격자형 구조물이 공간을 느슨하게 구획하며, 서로 다른 영역 간 시각적 연결을 유지시킨다.
ⓒ 신경섭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 건축가의 일이다. 서로아키텍츠는 여기에 더해 공간 운영의 총체적 시스템을 조직하는 데에도 탁월한 대안을 제시해 왔다. 김정임이 디자인한 공간에서는 서로 떨어져 있던 것들이 만나고, 공고하게 나뉘어 있던 경계가 느슨해진다. 도시와 건물, 회사와 직원, 교실과 복도, 집단과 개인이 공간적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 초기 대표작이 구(舊) 대우센터빌딩을 리노베이션한 서울스퀘어다.
1977년 옛 대우그룹의 사옥으로 지어진 대우센터빌딩은 압도적인 위용을 과시하며, 한국의 압축적인 경제 성장을 상징하는 건물로 인식되어 왔다. 서울역 맞은편에 거대한 벽처럼 자리 잡은 이 고압적인 건축물이 김정임의 주도로 2009년 미디어 캔버스를 갖춘 빌딩으로 변모했다. 4만 2천여 개의 LED 램프로 구현된 미디어 파사드는 큰 화제를 일으키며 곧바로 서울의 명물이 됐다. 미디어 파사드 공개 당시 투사된 영상 작품 중 줄리안 오피의 <군중(Crowd)>은 도시를 바쁘게 걷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시각화한 작업으로, 미술과 그것을 지지하는 건축이 조화를 이룬 공공예술 작업이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오피스 빌딩은 단순한 업무 시설이 아니라, 도시를 향해 이미지를 발산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거대한 인터페이스가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건물의 낡은 외관을 새롭게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건물과 도시 사이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작업으로서 의미가 있다.
서울 성수동은 옛 공장과 창고, 트렌디한 카페와 상업 공간이 뒤섞여 있는 곳이다. 이곳에 자리한 ‘누디트 서울숲’은 지역의 이러한 혼성적 성격을 ‘어번 하이브리드(Urban Hybrid)’라는 개념으로 풀어냈다. 업무와 상업 등 서로 다른 기능을 한 건물에 담고, 모든 층에 발코니를 설치해 건물 내외부를 연결했다.
ⓒ 노경
경계의 재구성
김정임은 사람과 사람, 건축과 도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는 데 주목해 온 건축가다. 기존 환경을 존중하며, 서로 다른 요소가 상호작용하는 ‘총체적 환경’을 지향한다.
ⓒ 텍스처온텍스처
부동산 개발 기업인 SK D&D의 오피스 플래닝 프로젝트(2019)는 폐쇄적이고 평면적이었던 기존 사무 공간을 입체적이고 유동적인 동선으로 재구성해 풀어낸 작업이다. 경직된 업무 환경을 개선하고 창의적인 조직 문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자율좌석제를 도입하고, 직원들이 일하며 소통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공간을 개방적으로 열어주었다. 김정임은 “사람의 꽉 막힌 혈관을 풀어주는 장면을 상상하며 공간을 디자인했다”고 설명한다.
초등학교 공간 재구조화 사업에서도 김정임의 관심은 경계를 여는 일로 향했다. 서울특별시 교육청의‘꿈담교실(꿈을 담은 교실)’ 프로젝트에서 그녀는 2017년부터 3년간 총괄 건축가 역할을 맡았다. 서울의 노후한 초등학교 공간을 리모델링한 이 작업에서 그녀는 교실과 복도를 나누는 단단한 벽을 ‘유연한 경계’로 바꿈으로써 서로 단절돼 있던 두 공간을 중첩시켰다. 이로써 놀이와 모둠 활동이 많은 어린 학생들에게 복도는 단순한 이동 공간이 아니라 교실 활동이 확장되는 장소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김정임에게 건축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매개하는 장치로 작동해 왔다. 나아가 최근에는 그 관계의 대상이 훨씬 넓어지고 있다. 그녀는 건축물과 관계를 맺는 존재가 비단 사람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형, 자연, 오래된 재료와 폐기물, 심지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의 생태계까지 건축적 고려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건축가라면 누구나 건축물이 놓이는 환경에 관심을 갖지만, 김정임은 그 대상들을 단순한 컨텍스트나 조건이 아니라 사람만큼이나 건축과 상호작용하는 요소로 바라본다. 서로아키텍츠 설립 초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허물던 건축적 실천이 인간과 비인간, 새것과 오래된 것 사이의 관계를 잇는 일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그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작업이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 있는 양천공원 책쉼터(2020)다. 이곳은 부지 선정부터 건축가가 직접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최종적으로 그녀가 선택한 부지는 건물을 세울 수 있는 일반적인 공터가 아니라 어린이 놀이터와 오래된 감나무 한 그루가 자리 잡고 있는 땅이었다. 그녀는 이 작업에서 건축물의 형태를 먼저 정하고 그에 맞춰 주변을 정리한 것이 아니라, 감나무를 그대로 두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새 건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건축의 형태를 조절했다. 원래 있던 요소들이 먼저이고, 나중에 들어온 건축이 그 사이에 자기 몸을 맞춘 것이다.
김정임은 이 작업을 “원래 이 땅에 존재했던 나무와 지형, 인공 환경에 건축이 ‘실례합니다’라고 양해를 구하며 슬며시 들어온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이 설계는 그간 김정임이 주로 해왔던 대기업 클라이언트의 프로젝트와는 달리 소규모, 저예산으로 진행된 공공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그녀가 오래전부터 고민해온 경계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건축가의 일관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기존 부지에 있던 감나무와 놀이터를 없애는 대신 그대로 수용해 건물을 앉힌 양천공원 책쉼터. 김정임은 건축물이 공원 풍경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누구나 편하게 머물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도록 했다.
ⓒ 노경
리모델링의 가치
SK가스 본사 지하 1층의 프리미엄 라운지. 임직원들의 휴식과 창의적인 교류를 위한 복합 공간으로 조성됐다.
ⓒ 노경
서울특별시 교육청 ‘꿈을 담은 교실’ 사업으로 새롭게 구성한 원효초등학교 1학년 교실. 복도와 교실의 경계를 느슨하게 풀어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 신경섭
김정임은 최근 물질과 생명에 대한 책을 읽으며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건축이라는 행위가 기본적으로 파괴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되, 조금 덜 파괴하는 방법을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기존 건물을 부수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일이 빈번한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모색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꼭 필요한 시도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는 최근 리모델링 작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김정임은 리모델링 프로젝트에서도 건물의 표면을 바꾸는 것보다 작동 방식을 바꾸는 데 집중해 왔다. 사람들이 어디로 들어오고 어디로 이동하는지, 막혀 있던 동선을 어떻게 다시 연결할지, 기존 공간을 어떤 방향으로 경험하게 할지를 바꾸는 것이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성형 수술’보다는 ‘외과 수술’에 가깝다. 겉모습을 새롭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몸속의 막힌 부분을 찾아 흐름을 다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녀는 리모델링을 통해 ‘재사용하는 것’ 자체의 가치를 인식하게 됐다. 과거에는 오래된 건물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로 흔히 역사적 가치나 건축적 가치를 내세웠지만, 이제는 물질적 가치 또한 중요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특별하지 않은 건물이라도 그 자체가 자원이자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 김정임이 대구광역시의 의뢰를 받아 리모델링 중인 오래된 창고 건물은 건축 유산이 아닌 평범한 건물이다. 그녀는 다시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수지 않고 리모델링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얘기한다. 물리적인 변화를 가하기 전에 원래 있던 존재를 인정하는 쪽에 손을 들어준 셈이다. 그녀는 이 프로젝트에 이어 오래된 집과 빈집, 혹은 창고를 다시 사용하는 작업들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작업들은 그녀가 서로아키텍츠를 설립하기 전, 한국의 대표적 원로 건축가 중 하나인 유걸 의 아이아크건축사사무소에서 일할 때부터 수행해온 대형 사옥 프로젝트들에 비하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작업이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공공 공간을 디자인하는 데 큰 매력을 느낀다. 양천공원 책쉼터가 생긴 이후 삶의 만족도가 무척 높아졌다는 주민들의 이야기는 건축가에게 소규모 공공 공간 프로젝트의 가치를 다시 확인하게 해주었다.
제주시 애월읍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하우스 오브 레퓨즈’는 오랫동안 방치된 건물을 리모델링한 프로젝트이다. 나무와 풀이 자라고 있는 지하 공간을 그대로 살려 선큰가든으로 조성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동선을 디자인했다.
ⓒ 진효숙
총체적 환경의 구현
서로아키텍츠의 다음 10년을 준비하는 김정임이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축적 화두는 무엇일까? 땅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기존에 존재했던 것들과 새로 형성되는 것들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자연과 건축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공존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일 것이다. 여기에 건축과 조경, 인간과 식물, 생명과 물질을 따로 떼어 생각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전체’로 바라보는 시각이 더해진다.
이는 그녀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홀리스틱(holistic)’이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다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구현될지,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온 ‘건축’의 모습일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한다. 물리적 공간이 점점 온라인으로 이동하는 시대에, 건축이 건축다울 수 있는 길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과 공존하며 끈끈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투자·배급사 NEW의 논현동 사옥. 경사진 대지의 특성을 살려 로비 바닥의 높이를 달리하고, 앉아 있는 사람과 골목을 지나는 보행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주치도록 설계했다.
ⓒ 신경섭
정다영 CAC(Curating Architecture Collective)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