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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AUTUMN

한국적인 현대 회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이대원 (1921~2005)은 선명한 색채와 경쾌한 붓놀림으로 소박한 전원 풍경을 주로 그렸다. 그는 당대 서구 미술의 유행을 따르는 대신 한국 전통 공예와 동양화의 조형 원리를 오랫동안 연구하고, 여기에서 습득한 회화적 언어를 유화로 풀어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이대원: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이 처음으로 마련한 이대원의 대규모 회고전으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명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대원의 그림 앞에 서면 먼저 색이 보인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듯한 나무와 푸른 연못, 노란 들판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가까이 다가가면 풍경은 수많은 점과 짧은 선으로 흩어진다. 빨강과 파랑, 노랑과 초록은 서로 섞이지 않은 채 화면 곳곳에서 반짝인다.

이대원은 오랫동안 ‘과수원 화가’로 불렸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화가’라는 별명도 따라다녔다. 경성제국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한때 반도화랑을 운영했으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장과 홍익대학교 총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지냈다. 그의 밝은 그림과 화려한 이력은 서로 잘 어울려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인 질문이 계속 남는다. 그의 그림은 왜 이토록 밝고 화려한가? 그 색은 어디에서 왔는가? 단지 작가의 타고난 낙천성 때문일까?

재능 있는 소년

이대원은 점과 선의 표현을 통해 독자적 회화 세계를 구축한 화가이다. 전통 공예의 색과 빛, 동양화의 기법을 재해석하며 한국적인 현대 회화의 가능성을 평생 탐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대원은 독학 화가로 알려졌다. 그가 그림을 시작한 시기는 매우 이르다. 13세이던 1933년 이미 전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 대회에서 입선했다. 그의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은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의 미술 교사 사토 구니오 (佐藤九二男, 1897~1945)였다. 사토는 수업 시간에 피카소와 야수파 등 서양의 새로운 미술 사조를 소개하는 한편, 조선 공예의 아름다움도 강조했다. 유영국 (1916~2002), 장욱진 (1917~1990), 권옥연 (1923~2011) 등 훗날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게 되는 화가들도 이 교실을 거쳤다.

1938년 18세의 이대원은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유화를, 공예부에 납힐(蠟纈) 염색 병풍을 출품해 모두 입선했다. 납힐은 밀랍으로 무늬를 막은 뒤 천을 물들이는 전통적인 방염 기법이다. 한 학생이 같은 해 회화와 공예 두 분야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작가의 출발점이 회화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통 미의식과 표현 원리

이대원의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서 조르주 쇠라의 점묘나 빈센트 반 고흐의 역동적인 붓질을 떠올리기도 한다. 과연 그의 회화 언어는 서양 근대미술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1957년 이대원은 아시아재단의 추천으로 미국과 유럽의 미술관을 둘러볼 기회를 얻었고, 독일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귀국한 뒤 그의 관심은 서구 미술을 모방하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한국의 미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소반과 목기, 반닫이 같은 조선 시대 공예품을 오랫동안 수집하고 자수와 나전 같은 공예 기법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89년 그는 화문집(畫文集) 『혜화동 50년』을 발간했는데, 이 책에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조선 시대의 공예품이지요. 조선조 여인들의 정성이 알알이 담긴 자수의 그 곱고 화려한 색감에는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전통적인 것을 너무 소재에만 집착시키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점은 다시 생각해 볼 일이에요. 물론 작품의 소재를 통해 전통미를 추구하는 것도 방법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선인들이 갈고 닦은 표현 양식과 기법, 그리고 미의식을 현대적으로 어떻게 수용하고 발전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 말은 그의 회화를 이해하는 열쇠다. 20세기 한국 화가들에게 ‘한국적인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전통 산수화나 도자기, 민속 문양을 화면에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그 답을 찾는 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대원은 전통의 외형을 인용하기보다 전통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예컨대 자수에서 붉은 실과 푸른 실을 나란히 놓으면 두 색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 맞닿아 있으면서 각각의 색을 유지한다. 나전의 빛도 그에게는 하나의 단서였다. 어두운 옻칠 위에 박힌 자개는 빛을 공기 속으로 흩어 놓기보다 표면에서 반사한다. 또한 그는 전통 산수화와 사군자를 배우며, 점과 선으로 산과 나무를 표현하는 동양화 기법을 익혔다. 따라서 이대원의 회화에서 한국성은 그림을 그리는 방식 안에 있다. 그는 오랫동안 축적돼 온 전통적인 미의식과 표현 원리를 자신의 유화 안에서 새롭게 작동시켰다.

이 점에서 그의 색점은 조르주 쇠라의 점묘와 차이가 있다.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은 서로 다른 색을 나란히 놓아 관람자의 눈에서 시각적으로 혼합되게 하는 원리를 활용했다. 반면 이대원의 점은 멀리서도 개별적인 색을 유지하고, 여러 겹의 색층에서 자신의 자리를 갖는다. 작가 자신도 자신의 점이 처음부터 서양의 점묘법을 의식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수묵의 효과를 유화로 옮기기 위해 산의 능선 같은 것을 그릴 때 점을 찍기 시작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담(秘苑)〉. 1986. 캔버스에 유화 물감. 208 × 504cm.
가로 5미터가 넘는 대작으로, 전통 자수와 나전에서 길어 올린 이대원 특유의 색채 감각을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같지만 다른 풍경

1970년대 초 이대원은 고향 파주의 농원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0년 동안 이곳의 풍경을 반복해서 그렸다. 그러나 같은 그림을 되풀이한 것은 아니었다. 계절이 바뀌고 햇빛이 달라질 때마다 농원은 새로운 화면이 되었다.

1970년대의 농원에서는 아직 서양식 원근법이 비교적 분명하게 나타난다. 가까운 곳에 큰 나무가 서고 시선은 그 뒤의 먼 풍경으로 이동한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 공간은 점차 압축되고, 푸른색과 보랏빛 계열의 색조가 화면에서 두드러진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변화는 더욱 뚜렷해진다. 멀리 있던 산이 화면에서 사라지고 나무와 연못, 꽃의 색선이 화면 전체에 고르게 퍼진다. 앞과 뒤의 차이는 눈에 띄게 약해진다.

점의 성격도 달라졌다. 1970년대의 색점이 나무와 산, 들판의 형태를 따라 비교적 차분하게 놓였다면, 1980년대 이후에는 점이 길어지며 짧고 빠른 색선이 화면을 덮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방향의 색선들이 화면 곳곳으로 뻗어나간다. 이러한 움직임은 어느 한곳으로 집중되지 않는다. 얇은 색층을 반복해 겹치면서 화면 전체에 고르게 퍼진다. 이대원의 후기 풍경이 강렬한 색채를 지니면서도 지나치게 격렬하거나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이후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그림에서 원근의 깊이가 줄어들수록 오히려 화면의 크기는 커진다. 1990년대 이후 제작된 작품들은 가로 길이가 2m를 넘어 5m, 7m까지 이른다. 그 앞에 서면 관람자는 풍경을 멀리서 바라보기보다 그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나의 소실점이 사라진 화면에서 시선은 나무에서 연못으로, 다시 꽃과 들판으로 끊임없이 이동한다. 동아시아에는 산수화를 이와 비슷하게 경험해 온 오래된 전통이 있다. 옛사람들은 명산을 그린 그림을 방 안에 펼쳐두고 마음으로 그 안을 여행했다. 이를 ‘와유(臥遊)’라 불렀다. 이때 그림은 바깥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창이라기보다 감상자가 들어가 노닐 수 있는 또 하나의 공간이었다.

이대원의 후기 과수원도 점차 이러한 공간에 가까워진다. 파주의 농원에서 작업하는 이대원의 사진을 보면, 그는 높은 곳에서 풍경 전체를 내려다보기보다 나무 사이, 땅 가까이에 앉아 있다. 사방에서 솟아난 과일나무 가지가 그의 머리 위를 덮는다. 그가 그린 것은 멀리서 눈으로 바라본 과수원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마음으로 경험한 과수원이었다. 한국 근현대 회화의 한 흐름을 전통적인 ‘산수’에서 서구적인 ‘풍경’으로의 이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이대원의 후기 회화에서는 그 방향이 다시 뒤집힌다. 그는 풍경을 그리면서 그것을 감상자가 들어가 경험하는 산수의 공간으로 되돌렸다.

〈북한산〉. 1938. 캔버스에 유화 물감. 80 × 100cm.
가을날 북한산에서 받은 인상을 강한 색채 대비로 표현한 작가의 초기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중 하나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한국적인 현대미술

〈전설의 마을〉. 1964. 캔버스에 유화 물감. 129 × 79cm.
산과 나무, 사슴, 구름 등 십장생도의 구성 요소들을 평면적으로 병치했다. 전통 회화와 민예에서 자신의 회화적 가능성을 탐구하던 시기의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을수록 ‘무엇이 한국적인가’라는 질문도 다시 떠오른다. 이대원의 작업은 한국적 현대미술이 과거의 외형을 재현하지 않고도 전통과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화면에는 조선 시대 자수나 나전칠기가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전통 산수화의 산을 그대로 옮겨 그리지도 않는다. 대신 자수처럼 색을 나란히 놓고, 나전처럼 빛을 표면에 머물게 하며, 전통 회화처럼 점과 선을 쌓아 자연을 만든다. 전통의 모양을 빌린 것이 아니라 전통이 화면을 만들어 온 원리를 자신의 회화 언어로 바꾼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이대원의 대규모 회고전 《이대원: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가 열리고 있다. 올해 8월 6일에 시작해 11월 8일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는 학창 시절 초기작부터 말년의 대형 작품에 이르기까지 약 70년에 걸친 작가의 화업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고고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김원룡 (1922~1993)은 오랜 벗이었던 이대원의 그림을 두고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이 말에서 가져왔다. 이대원의 그림은 실제로 밝다. 그러나 그 밝음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수십 년 동안 한 장소를 바라보고, 점 하나와 선 하나를 반복해서 놓고, 그 위에 다시 색을 겹치며 만들어낸 밝음이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이 이대원을 다시 바라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서양에서 들어온 유화라는 매체 안에서 그 원리를 키워냈고, 전통 소재의 재현이나 모방에도 머물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과수원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다. 그곳에는 한국의 ‘전통’이 ‘현대’가 되는 하나의 방식이 있다.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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