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즈는 작가의 예술관을 일상으로 옮겨 놓는 작업의 확장판이자, 창작 생태계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원동력이다. 아티스트 굿즈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세상에 나온다. 자체 브랜드를 내세워 작업 세계를 굿즈로 확장하기도 하고, 인기 아이돌과 손잡고 K팝과 미술의 랑데부를 모색하는 작가도 있다. 유명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해 대중적 파급력을 넓히는가 하면, 소셜 미디어에서 얻은 인기를 발판으로 오프라인에 진출하기도 한다.
나난의 대표작 〈 Long Long Time Flower 〉의 ‘감사 에디션’. 소중한 사람에게 전하는 감사의 마음이 오랫동안 시들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제작했다.
나난 제공, 사진 사이이다
예술가는 가난하다? 이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고가에 작품이 거래되는 일부 작가를 제외하면, 작품 판매만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 힘들다는 점에서 여전히 많은 예술가가 넉넉하지 않다. 하지만 온라인을 무대로 자기 홍보가 활성화된 시대가 아닌가. 어떤 예술가들은 갤러리나 딜러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대신 온라인에서 관람객들과 직접 소통하는 길을 선택한다.
특히 굿즈는 더 많은 대중에게 작가의 이름을 알릴 기회가 되며, 판매 수익은 생계에 보탬이 될 뿐 아니라 작업을 지속하는 자원이 되기도 한다. 또한 굿즈는 원화를 구입하기 어려운 예술 애호가들에게 작품 세계의 일부를 소장하는 기쁨을 안긴다. 이처럼 굿즈는 예술의 문턱을 낮추는 동시에 작품이 전시장 밖 일상과 만나는 방식을 새롭게 제안한다.
김선우와 불가리의 협업 상품. 불가리 세르펜티 75주년을 기념해 2023년 진행된 ‘세르펜티 인 아트’ 프로젝트에서 자신의 시그니처 도도새를 활용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김선우 제공
굿즈, 작업의 또 다른 이름
예술가들이 굿즈를 통해 대중에게 다가서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브랜드 컬래버레이션을 통해서다. 이러한 방식으로 최근 대중에게 인지도를 높인 대표적 작가 중 하나가 ‘도도새 아티스트’라 불리는 김선우 다. 그는 17세기에 멸종한 도도새에게 현대인의 모습을 투영한다. 천적이 없는 모리셔스 섬의 안락한 환경에 적응하며 비행 능력을 잃은 도도새는 인간과 외래종의 유입 이후 끝내 지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김선우는 현실에 안주한 채 꿈과 개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도도새에 투영한다. 하지만 작가는 도도새를 귀엽고 친근한 캐릭터로 되살려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는 여행자로 탈바꿈시킨다. 화폭에서 부활한 도도새의 힘찬 날갯짓은 우리도 어두운 현실을 딛고 다시 비상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건넨다. 도도새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아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김선우는 여러 기업들과 럭셔리 브랜드들의 러브콜을 받으며 두터운 팬덤을 쌓았다.
한편 어떤 작가들에게 굿즈 제작은 완성된 작품을 상품화하는 일이 아니라, 작업의 세계를 다른 매체로 확장하는 창작 행위다. 나난 은 꽃과 자연을 매개로 회화, 오브제, 퍼포먼스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는 작가다. 꽃은 로맨틱한 선물이지만, 신경 쓰지 않으면 금세 시들어 버린다. 나난의 대표작 <롱롱타임플라워> 시리즈는 우리에게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을 선사한다. 종이로 만든 알록달록한 꽃과 갖가지 모양의 풀잎을 겹겹이 포개 화병에 꽂으면, ‘눈으로 맡는 향기’가 집 안을 가득 채우는 마법이 펼쳐진다.
박혜인 은 ‘유리의 연금술사’다. 2015년부터 ‘글로리홀(Gloryhole Light Sales)’이라는 이름으로 예술 창작과 상업 활동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글로리홀이란 작업 과정에서 성형 중인 유리를 다시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재가열하는 화로다. 작가는 뜨거운 화로 속에서 불과 유리가 만나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고 생의 약동을 떠올렸다. 말랑말랑하게 녹아 불 속에서 춤추던 유리는 그녀의 손을 거쳐 비정형의 조명 기기로 탄생한다. 흔히 볼 수 있는 원형이나 타원형이 아니라, 마치 유령이나 식물처럼 신비로운 생명체를 닮은 형태다. 박혜인에게 조명은 단순히 빛을 발하는 사물이 아니라 유리의 물성을 탐구하는 조형적 실험이다. 그녀는 파이프 끝에 녹은 유리를 감아올려 입으로 부는 글라스 블로잉, 토치의 불꽃으로 유리를 가열해 형태를 빚는 램프워킹 등 전통적인 유리 공예 기법을 활용한다. 여기에 물질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선을 더해 전통과 동시대가 교차하는 자신만의 조명을 창조한다.
빛과 유리를 주 매체로 작업하는 박혜인의 조명 작품 〈 ShimmerClear 〉. 미술 작품과 생활 조명의 경계를 탐구한 작업이다.
박혜인 제공
K팝 아이돌과 함께
이미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입힌 강아지 모양의 세라믹 괄사와 스트링 파우치. 아일릿 미니 4집 (2026)의 괄사 세라믹 오브제 버전에 포함된 구성품이다.
이미미 제공
박지은 은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보호하는 네 명의 수호신 ‘사천왕’을 동시대 여성 캐릭터로 번안해 왔다. 전통 불화의 등장인물이 대부분 나이 든 남성으로 그려지는 데 문제의식을 느끼고,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21세기 버전의 사천왕도를 구상했다. 그렇게 탄생한 시그니처 캐릭터가 ‘소녀사천왕’이다. 기존 사천왕의 상징성에 현대인의 취향과 일상 감각을 결합했다. 중생의 말에 귀 기울이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이어폰을 끼고, 세상을 굽어보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선글라스를 쓰는 식이다. 인물마다 별자리와 MBTI를 설정하는가 하면, 비건이나 논바이너리 등의 정체성을 부여해 동시대의 다층적인 면모를 반영한다. 소녀사천왕은 그림뿐 아니라 컵, 연하장, 마스킹 테이프, 스티커 등 다양한 굿즈로도 제작되었다.
그런가 하면 박지은은 2024년 걸그룹 아이브의 <해야> 뮤직비디오에서 2D 원화의 작화 총괄과 캐릭터 디자인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민화 속 호랑이와 두루마리, 산수화 등 한국 전통 회화의 모티프를 살리면서, 소녀사천왕 특유의 당당한 기세에 아이브 멤버들의 개성과 의상 포인트를 섬세하게 녹여냈다.
이미미 는 드로잉을 바탕으로 귀엽고 키치한 그림을 그린다. 그를 대표하는 색깔은 단연 핑크다. 연분홍, 진분홍, 살구색, 형광색 분홍 등 화면 위에 다채로운 분홍빛의 스펙트럼이 활짝 펼쳐진다. 그 핑크빛 세계에서는 꽃과 풀, 강아지와 고양이, 만화 주인공, 뽀글뽀글 파마머리의 아이가 행복하고 귀여운 에너지를 발산한다. 고전적인 공주 서사가 왕자의 구원을 기다리는 수동적 여성상을 그려왔다면, 이미미의 소녀들은 혼자서도 생기발랄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작가는 2024년부터 세상에 하나뿐인 티셔츠를 만들어 왔다. 좋아하는 캐릭터의 한정판 티셔츠를 구하기 어려웠던 경험을 계기로, 흰 티에 패브릭 마카로 직접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짱구, 둘리, 파워퍼프걸, 보노보노, 하울 등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자신만의 드로잉 언어로 재해석한 수작업 티셔츠를 온라인에서 선보였다. 소셜 미디어에서 입소문을 탄 그의 작업은 2025년 걸그룹 아일릿과의 협업으로 이어졌다. 이미미는 멤버 한 명 한 명의 이미지와 개성을 연구한 뒤 각자에게 어울리는 고양이 캐릭터를 창안해 옷에 녹여냈다. 아일릿은 이 옷을 입고 TV 음악 프로그램 <뮤직뱅크>에서 신곡 <빌려온 고양이>를 불렀는데, 때마침 그날 음악 방송 첫 1위를 차지했다.
아이브의 두 번째 EP 앨범 타이틀곡인 <해야(HEYA)>(2024) 뮤직 비디오 티저를 위해 박지은이 제작한 작품. 전통 회화 양식으로 표현한 아이브의 세계관을 두루마리 형태에 담았다.
스타쉽엔터테인먼트 제공
온라인에서 손끝의 일상으로
2026년 DDP 《키크니 특별전: 그렸고 그런 사이》에서 선보인 ‘키크니 프렌즈’ 피규어. 작가의 일러스트레이션 속 캐릭터들을 입체적인 굿즈로 구현했다.
키크니 제공
온라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스타툰 작가 키크니 는 ‘언어의 마술사’다. 기발한 위트와 언어유희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콘텐츠를 선보인다. 대표작은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 시리즈. 사람들이 댓글로 원하는 장면을 요청하면 유머와 말장난이 짭짤하게 섞인 한 컷 만화로 답한다. 가령 ‘회사 가기 싫은 상황’을 그려달라는 의뢰에 직장인들이 ‘회’ 사 가기를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식이다. 황당하고 웃긴 만화만 그리는 건 아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세상을 떠난 반려동물과 얽힌 사연에는 가슴 먹먹한 위로를 담아 수많은 독자의 눈시울을 적신다. 재치와 공감을 두루 갖춘 콘텐츠로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120만 명을 훌쩍 넘어섰고, 그 인기는 자연스럽게 굿즈로 이어졌다. 자체 제작한 달력부터 브랜드 협업 상품, 개인전과 연계된 한정판 기념품까지 특유의 재치를 담은 굿즈가 ‘키크니 파워’를 입증했다.
그림비 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를 무대로 영향력을 넓혀 온 일러스트레이터다. 젊은 부부의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이나 반려묘와 함께하는 한때 등 평범하고 사소한 풍경에서 반짝이는 장면을 포착한다.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오밀조밀한 그림체와 따뜻한 파스텔 색감으로 표현해 젊은 세대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행복을 붙잡은 그림은 주변 세계를 조금 더 따뜻한 시선과 여유로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한다. 포근한 감성이 담긴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온라인 화면을 뚫고 나와 손에 잡히는 굿즈로도 변신했다. 엽서와 아트 포스터를 비롯해 키링, 스티커, 티셔츠, 스마트폰 케이스까지 그림 속 일상이 우리의 진짜 일상으로 쑥 들어왔다.
그림비와 오덴세 디자인 스튜디오가 2021년 《In the Pool》 전시를 위해 협업한 글라스웨어. 여름 휴양지에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림비 제공
이현 『아트인컬처』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