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K-팝 음반 판매량이 감소하는 가운데 굿즈가 K-팝 시장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K-팝 굿즈는 단순한 소장용 기념품을 넘어 패션과 생활용품의 영역까지 파고들었으며, 아티스트의 세계관과 미감을 체험하는 매개체로 진화 중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의 2026년 한국 근대 거장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전시를 위해 제작된 굿즈. 한국 추상 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의 작품을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이 다양한 생활용품으로 풀어냈다.
ⓒ 일상의실천
만약 당신이 ‘굿즈’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면, 아마도 현재 K-팝 또는 일본 대중문화의 팬이거나 한때 팬이었던 사람일 것이다. 팬덤 문화가 빠르게 발달한 일본에서는 팬덤 관련 상품 전반을 굿즈라 불렀고, 이 용법은 한국에도 그대로 흘러들었다. 그러므로 굿즈라는 말은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떠돌아다니다 자리 잡은 상용어이다. 국내 유통업계에서는 보통 기획 상품을 ‘MD(Merchandise)’로 지칭하지만, K-팝을 소비하는 사람 가운데 굿즈를 굳이 MD로 바꿔 부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팬들 사이에서는 굿즈가 일상화된 단어라는 얘기다.
굿즈는 2026년 현재 K-팝 산업에서 가장 큰 화두다. 굿즈가 높은 부가가치와 지속적 수익을 창출하는 핵심 사업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K-팝의 새로운 성장축
K-팝을 대표하는 엔터테인먼트 기업 하이브가 2026년 2월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하이브의 상품 및 라이선싱 매출은 2023년 약 3,256억 원에서 2024년 약 4,202억 원으로 29.1% 증가한 데 이어, 2025년에는 약 5,706억 원으로 다시 35.8% 늘었다. 이는 비단 하이브만의 성장세는 아니다. 흔히 K-팝 3대 기획사로 불리는 SM 엔터테인먼트, YG 엔터테인먼트, JYP 엔터테인먼트도 마찬가지다. 각 사의 활동 자료를 취합한 YG 엔터테인먼트의 2026년 공시 자료에 의하면, 이들 4개 기업의 상품 및 라이선싱 합산 매출은 2024년 8,034억 원에서 2025년 1조 705억 원으로 약 33% 증가했다.
K-팝 굿즈 시장의 빠른 성장세가 단순한 성장 이상의 의미를 갖는 건, 이러한 현상이 지금까지 K-팝 시장을 앞장서 이끌어 온 음반 시장의 하락세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K-팝 음반 판매량은 세계 시장 확대와 코로나19 특수를 주요 동력으로 삼아 2023년 ‘꿈의 1억 장 시대’를 달성했다. 그러나 이후 감소세로 돌아서며 좀처럼 반등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부 최상위 인기 아티스트 중심으로 판매가 집중되는 쏠림 현상, 팬덤의 다량 구매에 의존해 온 마케팅 등이 한계에 달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또한 듣지도 않는 앨범을 순위 경쟁과 이벤트 참여 때문에 중복 구매하면서 발생하는 플라스틱 폐기물, 음반 생산 및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 등 K-팝 소비로 인해 야기되는 환경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유지해 온 관성을 버리고 당장 앨범 판매 방식을 전부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진퇴양난 속에서 30여 년의 K-팝 역사 동안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K-팝 위기론’이 다시 고개를 들려는 찰나, 구원 투수가 등장했다. 그게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인 굿즈다. 아직도 K-팝 굿즈를 응원봉이나 인화 사진, 포토 카드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머릿속 K-팝 굿즈 목록을 어서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하기 바란다. 2026년 기준, K-팝 굿즈 시장은 신세계라고 해도 좋을 만큼 화려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치는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2021) 시즌 1의 공식 굿즈인 스페이스 래빗 인형. 드라마 촬영을 위해 사전 제작돼 소품으로 활용됐으며,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일반에도 판매되었다.
ⓒ 스튜디오 드래곤
팝업 스토어가 바꾼 굿즈의 문법
편의점 브랜드 GS25가 출판사 민음사, 캐릭터 브랜드 ‘오늘의 귀여움’과 협업해 출시한 빵이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과 시집 표지 디자인을 패키지에 적용하고, 책 모양 책갈피 20종을 랜덤으로 넣어 문학 작품을 굿즈와 연결했다.
ⓒ GS리테일
서서히 성장하던 K-팝 굿즈 시장을 급격한 호황으로 이끈 건 2020년대 들어 흥행한 K-팝 팝업 스토어의 힘이 컸다. 이전까지만 해도 굿즈는 공연장이나 소속사가 직접 운영하는 자사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소소하게 판매되었다. 그러다가 새 앨범 발매나 데뷔 기념일 같은 다양한 이유로 개최되는 대형 팝업 스토어와 함께 쑥쑥 성장해 나갔다. K-팝 아이돌의 강력한 IP를 활용한 체험형 공간이자 팬덤의 결속력을 높이는 기회가 된 팝업 스토어는 코로나19로 멈춘 월드 투어와 단독 콘서트, 팬 미팅의 빈자리를 너끈히 메웠다. 오프라인 이벤트 취소와 함께 닫혔던 소비 심리가 폭발적으로 반응하면서, 인기 그룹의 팝업 스토어가 10만 명이 넘는 누적 방문객을 기록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뮤지션의 세계관과 서사를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신한 팝업 스토어의 눈부신 발전 속에서, 굿즈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좋은 음악, 멋진 퍼포먼스, 재미있는 자체 제작 콘텐츠처럼 잘 만든 굿즈 역시 그 자체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뮤지션의 이미지를 끌어올렸다. 이제 각 기획사는 앨범 콘셉트나 비주얼만큼이나 센스 있는 굿즈 만들기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이 본격적인 경쟁의 시작에는 그룹 뉴진스가 있었다. 이들이 데뷔한 2022년까지만 해도 K-팝 무대는 강렬한 퍼포먼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뉴진스의 등장은 K-팝 레이더의 방향을 ‘음악’과 ‘미감’으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소비자의 눈높이도 한층 높아졌다. 단지 아이돌 얼굴이나 이니셜이 들어가 있다는 이유로 신이 나서 구매 버튼을 누르는 시대는 지나갔다. 팬들은 자신이 아끼는 가수가 질 높은 굿즈를 만들길 바랐고, 대중의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한 굿즈는 비단 ‘내 가수’의 것이 아니더라도 K-팝에 관심 있는 사람들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는 화젯거리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헬로키티로 유명한 산리오와 협업해 팬덤 상품의 느낌을 현저히 줄인 NCT, 팬덤 상품이라는 느낌 없이 쿨하고 스포티한 콘셉트의 의류를 선보여 온 르세라핌 등이 있다. 여기에 더해 블랙핑크의 제니 는 2025년 10월 9일 한글날을 기념해 한글 글꼴 ‘젠 세리프(ZEN SERIF)’를 무료로 배포했다. 이제는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굿즈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될 정도다.
한솔제지가 K-팝 앨범 콘셉트로 제작한 샘플북. 실제 앨범 패키지처럼 구성해 고급 화보 용지의 인쇄 품질을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K-팝 굿즈의 문법을 제지업계에도 적용한 사례다.
ⓒ 스튜디오 고민
앨범이 굿즈가 되다
2021년 첫선을 보인 넷플릭스 예능 <솔로지옥>의 굿즈. 커플이 되어 ‘지옥도’를 벗어나 ‘천국도’로 향하는 프로그램의 설정을 캐리어와 여권, 항공권 등 여행을 연상시키는 물건으로 제작했다.
ⓒ 넷플릭스, 사진 제공 씨네핀하우스
최근에는 굿즈형 앨범도 주목받고 있다. 이 유행을 선두에서 견인한 이들을 꼽자면 뉴진스와 샤이니의 키 (KEY)를 들 수 있다. 뉴진스의 경우 첫 EP (2022)를 가방 형태로도 내놓았다. 동그란 모양에 검정, 하양, 빨강 세 가지 색으로 출시된 이 가방은 뉴진스 팬은 물론 유행에 민감한 패셔니스타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키는 앨범 콘셉트를 패키지 디자인까지 치밀하게 확장하는 대표적인 가수이다. <스타워즈>나 <스타트렉> 같은 레트로 SF 영화의 미학을 재해석한 미니 앨범 (2021)는 광선총 장난감을 연상시키는 패키지로 눈길을 끌었다. 이듬해 발표한 정규 2집 에서는 VHS나 플로피 디스크 등 21세기에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지난 시대의 매체를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반영해 자신만의 독특한 미감을 어필했다.
이렇게 기존 통념을 깬 디자인은 나날이 진화하며 K-팝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다. 2024년 가장 큰 화제는 에스파가 첫 정규 앨범 을 발표하며 내놓은 CD 플레이어형 앨범이었다. 판매가가 14만 5천 원으로 꽤 높게 책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3차 예약 판매까지 진행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외에도 데이식스의 (2025)는 인이어 버전으로, 소녀시대 태연 의 (2025)은 마이크 형태의 블루투스 스피커 형태로도 출시됐다. 그런가 하면 엔믹스의 (2025)는 조개 모양으로 레트로하게 디자인된 MP3 플레이어로도 판매되었다. 또한 국내에서 꾸준히 사랑받는 캐릭터 ‘리틀 미미’ 인형을 활용한 아일릿의 (2025)나 스트레스 볼이 들어 있는 르세라핌의 (2025)도 요즘 트렌드를 반영한 발 빠른 움직임으로 평가되었다. 가방에 인형 키링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시대, 날개 달린 별 모양의 위츄(WICHU) 마스코트로 캐릭터 인형 앨범 시장에 일대 파란을 불러일으킨 엔시티 위시(NCT WISH)의 활약도 눈부시다.
굿즈에서도 결국 모든 것은 ‘감각’으로 귀결된다. 지금의 K-팝 시장은 무엇이든 감각적이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적자생존의 장이 되었다. 무얼 내놓든 팬이라면 기꺼이 구매할 것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전 세계 한류 팬이 2억 명을 넘어선 지금, 자신이 누군가의 팬이라는 걸 굳이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소속감은 충분히 느끼고 싶은,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곳이 미학적으로도 훌륭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팬들이 늘고 있다. 지금 K-팝 굿즈는 IP의 힘만 믿고 게으름을 부리다가는 금세 도태되어 버릴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다.
한국적 모티브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패브릭 브랜드 그린플레어의 액막이 북어 키링 ‘복태’이다. 액운을 막고 복을 기원하며 북어를 걸어두는 풍습을 오늘의 감각으로 풀어냈다.
ⓒ 그린플레어
디자인 스튜디오 오이뮤와 플라스틱 재활용 브랜드 노플라스틱선데이가 협업해 개발한 한자 ‘복(福)’ 키링. 내부에 NFC 칩을 넣어 스마트폰을 태그하면 매일의 운세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디지털 기술과 환경적 가치가 어우러진 굿즈이다.
ⓒ 오이뮤
이승윤건국대학교 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