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내 삶을 바꾼 한국국제교류재단

올여름 초, 제2회 유럽한국어교육자협회 워크숍에 참가하기 위해 터키 안탈랴 근처의 앙카라대학 촐라클리 컨퍼런스센터를 방문하였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육자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유익했던 이 행사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후원으로 개최되었다. 한국국제교류재단 설립 이후 유럽 내 한국학과 한국어 교육은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한국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한국과 유럽 간 문화교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한국 관련 학문의 발전은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나 역시 워크숍에 참가하는 것이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그 의미가 컸다. 15년 전 한국에서 함께 공부했지만, 긴 시간 서로의 소식을 듣지 못했던 터키 친구를 다시 만났을 때, 가슴 한구석에서 짙은 감격이 밀려왔다.
이번 워크숍에 내가 처음으로 가르쳤던 학생들 중 한 명과 함께 참석하게 된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자랑스럽게도 그 제자는 지금 조교수가 되었다. 워크숍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사람들, 다시 보고 싶었던 사람들은 물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다양한 사람들과 나누는 유쾌한 대화는 소중한 추억을 선물하며 마음을 풍요롭게 해준다.
지난 15년간 나는 헌신적이고 친절한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임직원들은 물론 KF 펠로를 지낸 많은 이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그들의 프로정신과 문화적 감수성, 따뜻한 배려는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이들과 공통의 관심사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국국제교류재단과 함께하는 커다란 공동체의 일부가 된 나 자신을 발견한 순간, 이 공동체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졌다. 한없이 발전하고 있는 이 활기 찬 ‘가족’의 일원인 것은 매우 행복하고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좋은 펠로들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소속감은 내게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다른 사람들, 특히 새로운 학생들에게 전해주고 함께 나누도록 격려해준다. 이 기나긴 과정을 통해 내가 배운 모든 것을 가르치고 전달할 책임감을 느낀다.
이 모든 것은 소피아대학에 처음으로 한국어 강좌가 개설된다는 사실을 알고 흥분했던 1992년에 시작되었다. 1993년 3월, 나는 30여 명의 한국어 펠로 1기생 중 한 명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부푼 가슴속에는 한국과 한국어에 대한 기대와 열정이 가득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내게 18개월간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한국에서 보낸 처음 몇 주 동안 많은 한국인 친구들을 만났고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소중한 친구들로 남아 있다. 한국과의 만남은 내게 참으로 운명적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만남으로 인해 나의 남은 삶이 완전히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1995년 가을 이후, 매년 소피아대학에서 1학년 학생들을 한국어 과정에 입문시키고 있는데, 이 일은 내게 굉장히 큰 만족감을 안겨준다. 한국과의 인연은 1997년에도 계속되어, 나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한국 연구 펠로로 6개월간 한국에서 한국 현대문학 속의 전통적인 상징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이 연구는 내게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스파스 랑겔로프(Spas Rangelov), 최권진 등 두 명의 동료와 함께 한국의 현대 시선을 편찬하여 불가리아어로 출판한 일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준비했던 시간들과 그 책을 처음으로 불가리아에 소개하기 위해 일했던 몇 주는 아마도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소중한 시간들로 남을 것 같다.
불가리아에서는 ‘산은 산을 만나지 못하지만 사람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한국을 불가리아로 가져올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의 언어와 문학에 대한 연구, 한국의 예술 작품, 경제적•문화적 성취, 한국의 생활양식과 일상생활에 대한 이해를 통해 양국의 사람들을 연결할 수는 있다. 이런 일은 미술 전시회, 음악과 무용 공연, 학술 회의 등을 통해 일어날 수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이 활발하게 지원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있어 진심으로 기쁘다. 그들의 배려와 노력이 15년 전, 한 청년의 삶을 바꿔놓은 것처럼, 앞으로도 누군가의 삶을 영원히 바꿔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