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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아세안
꿈을 심는 한국 속 태국농장 – 안유정
안유정
한국에 사는 태국 출신 안유정 씨는 요즘 베테랑 농부로 불립니다. 20년 전, 한국에 처음 발 디딘 그녀는 가족들의 응원에 힘입어 ‘한국 속 태국농장’이라는 새로운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옛말처럼,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도 열정적으로 가꿔온 유정 씨의 농장에는 어느덧 정성을 먹고 자란 채소가 가득합니다. 11월호에서는 꿈을 심는 농부 유정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Q. 태국과 토양도 날씨도 다른 한국에서 태국 채소 농장을 운영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처음 태국 채소 모종을 들여와 농사를 해보겠다고 생각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처음엔 제가 먹으려고 재배를 시작했어요. 한국 마트에는 동남아시아산 채소가 거의 없었거든요. 마침 씨앗을 구할 기회가 있어서 직접 재배를 시도했는데 처음부터 잘된 건 아니었어요. 싹도 안 트고 시들고··· 여러 번 실패했지만 계속 심었어요.(웃음) 태국 날씨가 한국의 여름 날씨와 비슷하니까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는데, 정말로 어느 순간부터는 채소들이 잘 무르익기 시작했어요. 신이 나서 더 많이 재배하다 보니 잉여채소들이 생겼고 그때부터 ‘한국 속 태국농장’을 가꿔보자 결심했습니다.
Q. 그때 가장 먼저 응원해준, 혹은 도움을 주신 분은 누구였나요?
아버지, 아! 저희 시아버님이요. 제가 시아버님을 아버지라 부르거든요. 아버님은 젊을 때부터 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에 기술이 남다르세요. 저는 태국에서도 농사를 지어본 적 없는 초짜였는데 아버님께서 저를 믿고 잘 가르쳐주신 덕분에 꼼꼼히 배울 수 있었고, 베테랑 농부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Q. 요즘은 어떤 채소들을 재배하시나요?
가장 많이 재배하는 건 태국 고추인데 한국 고추에 비해서 작고 얇고 맵습니다. 태국 가지를 두 번째로 많이 재배하고 레몬그라스, 공심채, 카이란(kailaan)도 조금씩 기르고 있습니다. 저 혼자 하는 농사이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고 가능한 만큼만 재배하려고 해요. 채소는 수확 시기 내에 다 수확하지 못하면 꽃이 피어버리니까 욕심내서 한꺼번에 많이 심으면 안 되거든요.
Q. 한국에서 태국 채소를 기르다 보면 서로 닮은 한국과 태국의 채소를 발견하실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비슷한 채소가 꽤 있어요. 대부분 맛은 비슷한데 모양이 약간 달라요. 대표적으로 태국 고추는 한국 고추보다 얇고 자랄 때 위로 솟아올라요. 태국 고추가 좀 더 매운 걸 제외하면 맛은 비슷하고요. 된장찌개에 얇게 썰어 넣으면 더 개운하게 드실 수 있답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 많이 재배하는 초이삼이 한국에도 있어요. 모양은 좀 다른데 맛은 한국의 ‘청경채’랑 같습니다.
Q. 농사를 지으며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몇 년 전 친정엄마가 한국에 방문하셨는데, 농장을 보신 후 첫마디가 ‘네가 한 거라고? 어떻게 네가 이런 걸 만들어냈니?’ 였어요. 태국에서는 농사를 지어본 적 없었거든요. 고구마를 사먹으면서도 고구마가 어디에서 자라는지, 씨앗은 어떻게 싹트는지 전혀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한국에서는 베테랑 농부가 되어있으니 놀라신 거죠. 더 보람있는 건 어머니가 한국에 계시는 동안 제 농장에서 태국 가지를 재배하는 방법을 배우시고는 요즘 태국에서 직접 가지를 재배하신다는 거예요.(웃음) 너무 재밌죠?
Q. 12년 차 베테랑 농부로서 꼭 지키고 있는 ‘농사 철칙’이 있나요?
‘농약을 치지 않는 것’입니다. 농약은 눈에는 안 보이지만 몸에 큰 해를 끼칩니다. 사실 올해는 폭우 때문에 비닐하우스 안에 물이 차면서 벌레가 함께 들어와 잎새를 파먹었는데, 이 철칙을 지키느라 농약을 뿌리지 않고 세 번이나 돌려보내줬어요. 처음 발견했을 때 ‘약 안 뿌릴 거니까 먹고 싶으면 네 맘대로 먹어라’하고 용서해줬더니 잎새 먹고 자란 벌레가 새로 자란 잎새를 또 먹더라고요. 그때도 상품가치가 떨어진 채소를 걷어내기만 하고 약을 뿌리지 않았더니 최근에는 몸이 더 커진 벌레가 이쪽 먹고 저쪽 먹고, 또 그 옆쪽도 먹어버리더라고요. 얘들 너무 한 거 아닌가요?(웃음) ‘너희 또 오면 다음번엔 진짜 혼쭐난다!’ 하고 소리쳤는데 벌레들이 제 경고를 들었는지 모르겠네요.(웃음)
Q. 결혼하시기 전 남편분과 처음 태국에 왔을 때, 남편분께서 태국 고추를 아무 가공 없이 드셨다가 아주 매워하셨다고요. 그날의 에피소드를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그날 정말 깜짝 놀랐어요. 남편이 태국 고추를 손으로 딱 잡더니 그대로 먹어버린 거예요. 한국에서는 생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거나 그냥 먹기도 하지만 사실 태국에서는 생으로 잘 안 먹거든요. 너무 매우니까 얇게 썰거나 빻아서 양념을 하거나, 어떻게든 조리를 해 먹지 그냥은 안 먹어요. 한국식 표현으로, 남편은 입에서 불을 뿜었죠.(웃음) 눈물을 흘리고 땀도 뻘뻘 나서 괴로워했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그랬던 남편이 지금은 저보다 더 태국 고추를 잘 먹게 되었답니다.
Q. 태국 고추를 한국에 널리 알리고 외국으로 수출하는 것과, 아이들과 함께하는 ‘농장체험’을 운영하시는 게 꿈이시라고요. 좀 더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이루어질 가능성이 낮아도 꾸준히 염원하고 있는 꿈이에요. 유기농인증을 받는 것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시간이 제법 걸릴 거에요. 친환경인정기관에서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게 정말인지 여러 번 땅을 파 검사를 진행하는데, 검사를 마친 후에는 개인 교육을 받고 시험도 통과해야 해요. 저는 한국말이 아직 서툴러서 이 시험에서 계속 떨어져요.(웃음) 언젠가 유기농인증을 받으면 태국 고추를 한국에 널리 알리고 나중에는 가까운 외국에도 수출하고 싶습니다.
‘농장체험’은 올해 충청남도 교육청에서 인증을 받고 모든 준비를 마쳤었어요. 봄에 고추 모종을 준비하고 체험활동을 진행할 수 있는 농장을 마련해뒀는데 안타깝게도 코로나19가 발생하는 바람에 개장을 못 했습니다. 나중에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농장체험장을 열어서 아이들에게 태국 고추를 재배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우리 농장에서 채소를 길러보도록 할 거예요. 심었던 씨앗이 열매가 되면 함께 먹어보고 맛은 어떤지, 모양은 어떤지 이야기도 나눠보고 싶네요. 올해는 아쉽게도 문을 열 수 없겠지만 내년에는 꼭 개장할 수 있길 소망해봅니다.
Q. 아드님이 진로를 태국어 학과 쪽으로 정했다고요. 그렇게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지요? ‘유정 씨의 한국어 실력’과, ‘아드님의 태국어 실력’을 비교하자면 승자가 누굴지도 궁금합니다.
천상이(아들)의 목표는 태국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부산외국어대학교 태국어 트랙에 진학하는 거예요. 부산외국어대학교는 매년 태국에 있는 대학교랑 연계수업을 진행하는데, 알고 보니 제가 졸업했던 태국의 시나카린위롯 대학교(Srinakharinwirot University)와 연계수업을 하고 있더라고요. 한국 대학생은 태국에, 태국 대학생은 한국에 오가며 양국이 활발히 교류하는 연계수업이 있는데, 아마 그 수업을 보고 부산외국어대학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아들의 태국어 실력이 제 한국어 실력보다 좋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20년이나 살았지만 아직도 한국어가 서툴러요. 오히려 이제 막 한국에 온 태국 사람들이 다문화센터를 통해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서 저보다 더 잘하죠. 훨씬 먼저 온 선배인데 후배보다 한국말을 못해서 요즘 다문화센터에 자주 못 갑니다.(웃음) ‘언니, 한국에서 몇년 지냈어?’ 물을 때 20년 동안 살았다고 말하기 부끄럽더라고요. 그만큼 요즘 한국의 다문화센터나 이주여성을 위한 기관들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Q. 시아버님께서 유정 씨의 성실함을 눈여겨보시고 한평생 익힌 농사기술을 모두 가르쳐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유정 씨의 농기계를 직접 갈아주신다고요. 시아버님과 둘도 없는 사이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먼 타국에서 온 저를 아버님께서 많이 돌봐주셨어요. 특히 아버님이 제게 가르쳐주신 농사는 이제 제 인생이 되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한 저만의 생계수단이자 꿈입니다. 아버님은 제가 부족한 모습을 보일 때는 눈감고 못 본척해주시고, 제가 조금이라도 잘하는 일은 크게 칭찬해주셨어요. 전 많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아버님은 그런 제게서 좋은 부분만 보려고 노력해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아버님께 지금까지 제게 해주신 모든 것에 다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어요. 아버님이 안 계셨다면 한국에서 적응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아버님 덕분에 지금껏 한국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Q.‘시부모님을 잘 만난 것도 큰 복이었다’라고 말씀하신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생전 시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님은 정말 착한 분이셨어요. 아버님을 좋아하고 잘 따르셨고요. 아버님이 왼쪽으로 가라 하면 왼쪽으로 가시는 분이었어요. 남편이 왼쪽으로 가라 하면 청개구리처럼 오른쪽으로 가는 저와는 다른 스타일이셨죠.(웃음) 아버님께서 저를 다정히 대해주시니 어머님도 아버님처럼 저를 잘 돌봐주셨어요. 드라마 속 한국 시어머니들은 되게 무서운데, 우리 어머님은 제게 잔소리 한 번 없으셨어요. 둘도 없을 좋은 분이셨습니다.
Q. 한국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태국의 좋은 문화가 있나요?
“Thailand is the land of smile.” 태국은 미소의 나라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잘 웃고 농담을 건네요. 손이 일할 때 입도 같이 일하면 너무 힘들지만, 손은 일하더라도 입은 웃고 있으면 즐겁잖아요. 한국분들께는 우리가 느려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 한국 사람들은 일을 즐기진 않지만 신속하게 끝내고, 태국 사람들은 좀 느리지만 즐겁게 일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두 나라의 문화가 적절히 섞이면 딱 좋겠죠?
Q. 유정 씨 외에도 한국이나 타국에서 생활하는 태국 사람들, 또 아세안인들이 많습니다. 끝으로 이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파이팅 하세요! 제가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파이팅 하라는 말밖에 없습니다. 타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처음부터 편할 수는 없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인내하고 도전하면서 살아가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언젠가 반드시 행복한 날이 찾아올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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