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2018 SUMMER

문화 예술

포커스 도시 공간의 치유가 가져온 변화들

수명을 다한 건축물과 낙후된 산업 시설, 노후화된 주거 지역들이 최근 전면 재개발 대신 도시 재생이라는 방법으로 변모하고 있다. 발길이 뜸해지고, 버려지고, 잊혔던 장소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면서 공간 자체는 물론 그곳에 일상을 기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서울 외곽 상암동에 자리한 문화비축기지는 1970년대부터 사용하던 석유 비축용 탱크들을 복합 문화 공간으로 리모델링한 사례이다. 사진 중앙에 보이는 커뮤니티 센터는 기존 탱크들에서 해체한 철판을 재활용해 신축한 건물로 강의실, 회의실 등이 들어서 있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어난 한국은 지난 60여 년에 걸쳐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며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들은 이제 노후화된 도시 공간을 어떻게 재생할 것인가라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 그런 가운데 최근 큰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도시 재생 사업이다. 거시적인 정책 결정에 고비용과 장시간이 소요되는 전면 재개발과 달리 도시 재생은 일정 부분 도시의 역사와 미관을 보존하면서 개발에 따른 갈등을 줄이는 한편 고용 창출 효과도 볼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서울 구도심 세운상가 5층에 있는 팹랩 서울(Fab Lab Seoul)에서 방문객들이 3D 프린터와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해 원하는 제품을 만들고 있다. 2015년 서울시의 ‘다시 세운 프로젝트’를 통해 새롭게 단장한 세운상가는 오래된 주상복합 시설의 이미지를 벗고 예술과 기술이 융합된 공간으로서 정체성을 다시 만들어 나가고 있다.

공간의 상징성에 최적화된 방식
구 서울 도심 전자 제품 쇼핑의 명소였던 세운상가의 변신은 철거 위기에 봉착해 있던 노후 건물이 화려하게 부활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1968년 준공된 세운상가는 서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종로와 청계천을 중심으로 도심의 주요 도로를 연결하며 지어진, 남북 전체 길이가 1km에 달하는 대규모 주상복합 건물이다. 전자 제품의 메카였던 세운상가는 한때 “거기 가면 인공위성도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없는 게 없는” 장소였고, 당시로서는 새로운 스타일의 주거 지역으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 강남과 용산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준공 당시 기대했던 ‘국내 최고급 주거 단지와 상업 복합 시설’의 의미는 차츰 퇴색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마저 슬럼화되어 1990년대에는 철거 및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사라질 운명에 처했던 이곳에서 본격적인 도시 재생 운동이 일어난 건 2015년부터다. 세운상가의 원주민 격인 전자 제품 수리 장인들의 뛰어난 기술력에 젊은 예술인들의 재능이 결합하고, 여기에 3D 프린트, 드론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이 더해지면서 이곳은 예술과 기술,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되고 있는 중이다.

도시 재생 사업은 단순히 공간의 용도를 변경하고, 건축물을 새로운 용도에 맞게 수리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기존에 만들어진 이미지 혹은 상징성을 견지하고 극대화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운상가와 유사한 사례가 하나 더 있다.
과거 동대문 지역의 의류 상권을 지원하는 봉제 공장 밀집 지역이었던 서울 창신동과 숭인동 일대도 흥미로운 변화의 현장이다. 서울시는 봉제 산업의 침체로 이 지역의 노후화가 계속되자 이곳에 뉴타운을 조성하기로 했다. 그러나 뉴타운 사업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로 난항을 겪으면서 철회되었다. 대신 국토교통부에 의해 ‘도시 재생 선도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철거 대신 도로를 비롯한 필수 기반 시설과 봉제 거리의 활성화를 포함한 문화 시설 확충이 이뤄지게 되었다. 2014년부터 4년 동안 진행된 재생 사업으로 봉제역사관, 생활창작예술 거점 공간인 창신소통공작소 및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을 꾸며서 만든 백남준 기념관 등 여러 문화 시설이 완성되었거나 완공을 앞두고 있다.

문화비축기지 커뮤니티 센터 뒤쪽에 있는 탱크는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기존 탱크의 철재를 모두 제거해 야외 무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꾸몄다. 지하에는 200석 규모의 실내 공연장이 마련되어 있다.

기존의 탱크 5동 중 1동은 원형을 살려 전시 공간으로 꾸며졌다. 주로 미디어 관련 전시에 사용되는데 내부 구조를 자세히 볼 수 있다.

도시 재생 사업은 단순히 공간의 용도를 변경하고, 건축물을 새로운 용도에 맞게 수리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기존에 만들어진 이미지 혹은 상징성을 견지하고 극대화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지하 벙커의 흥미로운 변신
도심의 버려진 작은 현대사 공간을 부활시킨 재미있는 사례도 있다. 여의도에 있는 세마(SeMA)벙커가 그것인데, 이 군부 독재 시절의 비밀스런 지하 시설은 지난 2005년 버스 환승 시설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1970년대에 지어진 이 지하 벙커는 VIP실 80㎡와 수행원 대기실 800㎡ 규모로, 유사시 대통령의 대피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애당초 서울시는 이 공간을 지하 상가로 개발하려 했으나 “유동 인구가 적고 실효성이 없다”는 판단 아래 방치된 상태였다. 그렇게 버려져 있던 이 공간은 2017년 서울시립미술관 산하의 ‘벙커미술관’으로 개관돼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서울시가 도시 재생 역점 사업의 일환으로 펼친 야심찬 프로젝트도 있다. 2017년 9월 개관한 문화비축기지가 그것이다.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뒤편 매봉산 자락에는 22년간 1급 보안 시설로 분류돼 일반인의 접근이 통제되었던 석유비축기지가 있었다. 1973년 1차 석유 파동 이후 서울시는 1976~1978년에 걸쳐 당시 서울 시민의 한 달 사용량에 해당하는 석유를 비축할 수 있는 지름 15~38m, 높이 15m의 콘크리트 탱크 5개를 건립했다. 그러나 이 석유비축기지는 2000년까지 일반인들에게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안전상의 이유로 기지 이전이 결정되었으나 이후 12년간 다시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201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전문가와 시민들이 “기지 전체를 친환경 복합 문화 공간으로 조성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어 16개국에서 총 95개의 작품이 접수된 국제 현상 공모를 통해 선정한 설계안에 따라 기존 5개의 탱크 중 1개는 원형을 그대로 전시용으로 보존하고, 나머지 4개는 원래의 모습을 유지한 채 용도에 맞게 리모델링하였다.
다섯 개의 탱크 중앙에는 탱크의 원형을 오마주한 커뮤니티센터가 건립되었다. 외부 마감도 기존의 탱크 벽체에 사용되었던 철판을 그대로 활용해 마치 기존 탱크와 동시대에 지은 건물처럼 보이게 했다. 탱크들은 공연장과 전시실, 복합 문화 공간 등으로 개조하였으며, 탱크들 앞 너른 광장은 다양한 문화 행사 개최가 가능한 오픈 스페이스로 조성하였다.
또한 탱크들을 둘러싼 주변 공간과 능선에는 둘레길을 만들어 다종다양한 식생의 생태 공간도 마련했다. 이러한 개조를 통해 석유를 비축하였던 기지는 문화를 담은 매력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이곳은 개관 이후 여러 장르의 공연과 전시 및 문화 관련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이어지면서 새로운 문화 명소로 빠르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

서울 성수동은 1960년대부터 인쇄소와 섬유 공장, 물류 창고가 즐비한 도심 속 공업 지역이었지만, 최근에는 문화 공간으로 점차 바뀌고 있다. 50여 년 동안 정미소와 창고로 쓰였던 대림창고도 갤러리 카페로 개조한 이후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산업 시설에서 문화 시설로
포천아트밸리는 낡은 산업 시설이 도시 재생 사업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변모했는지 잘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선도적 사례이다. 포천은 서울의 북쪽에 위치한 소도시로 화강암을 캐던 유명한 채석장이 있었다. ‘포천석’이라 불리는 이곳의 화강암은 재질이 단단하고 무늬가 아름다워 건축 자재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채석량이 줄고 상대적으로 값이 저렴한 중국산 석재 수입이 늘면서 채석 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후 이곳은 버려진 흉물스런 공간이 되었다.
이에 포천시는 2003년 훼손된 자연 경관의 복원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이곳을 복합 문화 공간으로 개조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채석으로 생긴 큰 구덩이에 빗물을 모아 인공호수를 조성하고, 주변에 조각 공원과 크고 작은 야외 공연장도 마련했다. 2009년 10월 개장한 포천아트밸리는 이제 한 해 방문객 수가 40만 명을 넘으며 성공적 지자체 사업으로 자리를 굳혔고, 2017년에는 ‘경기도 유망 관광지 10선’에 선정되었다.
노후화되었거나 방치된 도시 공간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도시 재생 사업은 환경을 개선하고, 사회 문화적 활동을 통한 주민들의 정신 건강과 유대를 강화하며, 더 나아가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한다. 다만 해당 지역 고유의 정체성과 특성을 매력적으로 살려내는 설계가 필수적이라는 고민은 늘 뒤따라야 할 것이다. 도시 재생은 오래되어 쓸모 없어진 도시 공간을 치유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까지 개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015년 서울 은평구에 설립된 서울혁신파크는 사회,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혁신적인 프로젝트를 지원해 주는 곳으로 1960년부터 국립보건원, 질병관리본부 등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사진은 시민들을 위해 운영 중인 공부방 모습이다.

공장 건물을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인디아트홀 공(Gong). 서울 구도심의 동쪽에 위치한 성수동과 함께 서부 외곽의 오래된 공업 지역인 문래동 역시 예술가들이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윤희철 (Yoon Hee-cheol 尹熙徹) 대진대학교 휴먼건축공학과 교수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