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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SPRING

문화 예술

아트리뷰 우리는 지금 그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여성 도착하다」(The Arrival of New Women, 2017년 12월 21일~2018년 4월 1일)는 근대 시각 문화에 등장하는 신여성의 이미지를 통해 한국의 근대성을 탐구하는 전시다. 한 세기를 가로질러 여성이 여성을 돌아보는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신여성(New Women)’은 서양 문물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 전반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개화기 때 신식 교육을 받고 교양을 쌓은 여자를 가리키던 말이다. 국내에는 이 용어가 1890년대 이후 소개되었고, 잡지와 신문 등 언론 매체에서 192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해 1930년대 말까지 다양하게 사용됐다. 특히 신여성은 근대적 이념과 문물을 추구하는 존재로 형상화되곤 했다.

신여성을 상징하는 단발머리
실존 인물들을 조명한 소설가 조선희(趙善姬)가 2017년 여름에 발표한 장편 『세 여자』는 20세기 초를 불꽃처럼 살았던 여성 혁명가 주세죽(朱世竹 1901~1953), 허정숙(許貞淑 1902~1991), 고명자(高明子 1904~?)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룬다. 이들은 어느 날 동지이자 친구로서 뜻을 같이해 단발을 결행한다. 당시로선 비장하면서도 쾌활한 ‘우정의 연대’였다. 소설은 이 사건을 식민 시대에 경성을 풍미했던 월간지 『신여성』에 실린 한 장의 흑백사진으로부터 가져온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신여성』의 편집장이었던 허정숙은 1925년 10월호 ‘단발 특집호’에 이날의 일을 사진과 함께 이렇게 기록했다.
“웬일인지 서로 알지 못한 위대한 이상과 욕망이나 이룬 듯이 무조건으로 기뻤습니다.”
1920년대 여자들의 단발은 큰 화제였다. 단발 여성들은 조선을 통틀어 아직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고, 이들의 단발은 “나는 독립된 인격체요”라고 외치는 1인 시위였다. 잠잘 때가 아니고선 쪽진 머리를 푸는 일이 없었던 조선의 여성들이 단발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강한 의지를 보여 주는 담대한 행위였다. 제국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동서양 문화의 충돌이라는 몇 겹의 억압과 모순 속에서 신여성들은 전통적인 현모양처 의식과 신식 ‘모던 걸(modern girl)’ 사이에서 분열하는 자신들의 의식을 머리 자르기로 표출하며 ‘자아’를 주장했던 것이다. 덕수궁미술관 전시장으로 들어선 관람객이 처음 마주하는 100여 년 전 얼굴들이 바로 이 단발랑(斷髮娘)들이다.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여성 도착하다」 전시의 제3부는 20세기 전반 선구적 삶을 살았던 다섯 명의 여성들에 대한 오마주이다. 한국인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 작가이자 번역가였던 김명순(1896~1951), 현대무용가 최승희(1911∼1969),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주세죽(1901~1953), 대중음악가 이난영(1916~1965)의 시대를 앞선 이상과 좌절을 오늘의 시각에서 되돌아본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회화, 조각, 자수, 사진, 인쇄 미술, 영화, 대중가요, 서적, 잡지 등 500여 점의 풍성한 시청각 매체들을 3부로 나눠 보여 주는데, 대부분 단발머리가 등장한다.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근대 시각 문화에서 단발머리는 신여성을 상징하는 전형적 이미지였다. 취미를 주제로 한 월간지 『별건곤(別乾坤)』의 1933년 9월호 표지화를 통해서도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단발에 서구식 화장, 몸의 곡선이 드러나는 상의, 탄력 있는 다리의 움직임을 암시하는 모던한 치마, 유혹적인 붉은색 벨트와 하이힐 차림으로 표현되었다.

1920~40년대 여성 잡지와 소설의 표지화에 등장하는 신여성은 대체로 적극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안석주가 그린 『별건곤』 1933년 9월호의 표지화처럼 단발머리는 예속에서 벗어나 자아의 실현을 추구했던 신여성의 전형적인 상징이었다 (좌로부터 시계 방향으로) 『연애 소설 뜨거운 애정』, 1957년 12월호, 세창서관 발행, 권진규미술관 소장. 「9월의 매력」, 『신여성』, 1933년 9월호, 안석주, 개벽사 발행, 권진규미술관 소장. 『부인』, 1922년 7월호, 노수현(盧壽鉉), 개벽사 발행, 권진규미술관 소장. 『별건곤』, 1933년 9월호, 안석주, 개벽사 발행, 오영식 개인 소장.

“여자들은 씩씩했고 운명에 도전했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우리는 지금 연봉이나 승진 문제를 따지다가 우울해하지만 이 여자들은 현실의 것들을 그닥 개의치 않았고 목숨조차 가벼이 여겼으며 혼자 몸으로 역사를 상대했다.”

「자화상」, 나혜석, 1928년(추정), 캔버스에 유채, 88 × 75 ㎝,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

금기의 영역에 도전하다
조선의 여성은 ‘안방마님’이라는 단어가 보여 주듯 집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안방에 묻혀 사는 존재였으며 남성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바깥 출입을 삼가고 오로지 살림과 자녀 양육에만 힘쓰는 ‘내자(內子)’였다. 하지만 바뀐 세상을 맞이한 신여성은 이제 거리로 나섰다.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신의 힘으로 배우고 일하며 살아가는 독립적 인간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양주남(梁柱南) 감독의 1936년 작 영화 「미몽」(迷夢)에서 여주인공 애순은 “나는 새장의 새가 아니야”라고 외치며 가족을 남겨둔 채 집을 뛰쳐나간다.
전시의 제1부 ‘신여성 언파레-드’는 거리를 활보하는 신여성의 활동성에 초점을 맞췄다. ‘언파레-드’는 공연을 마친 배우들이 무대 위에 일렬로 선 모습을 일컫는 영어 표현‘온 퍼레이드(on parade)’의 1930년대 한국식 표기다. 전시에서 한국 신문 소설 삽화계의 선구자였던 안석주(安碩柱)는 무용수의 발랄한 몸짓을 빌려 신여성들의 군상을 그려 냈다.
제2부에서는 화가로 활약했던 신여성들의 면면을 더듬는다. 여전히 부덕을 기르고 순종하는 역할을 강조했던 근대기 여성 교육에서 미술은 일종의 탈출구였다. 새로운 가치관과 예술혼이 결합돼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통로가 됐다. 하지만 여성이 화가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10년대를 전후로 처음 화가가 된 여성이 기생 출신의 서화가였다는 점은 그 방증이다. 여염집 처자들보다 비교적 외부 활동이 자유로웠던 기생은 사군자나 서예에서 장기를 보였지만, 그렇다고 독립 화가로서 인정받지는 못했다.
걸출한 1세대 여성 화가들이 배출된 것은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서였다. 일본 유학을 거친 동양화가 박래현(朴崍賢 1920~1976), 천경자(千鏡子 1924~2015)가 대표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보다 한 세대 앞서 활동했던 서양화단의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단연 발군이었다.

그는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인이었으나 여성의 주체성을 주장한 근대 여성운동가로 더 기억된다. 나혜석은 그림뿐 아니라 논설과 소설, 수필 등 다양한 글쓰기로 남성 동료들을 압도했다. 그가 1928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유화 「자화상」은 변혁기를 살아가는 지식인이자 예술가로서 여성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우울을 어두운 색조로 표현하고 있다.

「SF Drome 주세죽」, 김소영, 2017년, 3채널 영상, 작가 소장.

「탐구」, 이유태(Lee Yoo-tae 李惟台), 1944년, 화선지에 먹과 채색, 212 × 153 ㎝,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언젠가 그날」, 천경자, 1969년, 종이에 채색, 195 × 135 ㎝, 뮤지엄 산 소장.

신여성에 대한 오마주
나혜석을 비롯한 다섯 명의 신여성을 통해 당대 그들이 품었던 이상을 오늘에 비춰 본 것이 제3부인데, 그들의 행보를 거울 삼아 대한민국의 현대 여성을 돌아봤다는 점에서 자못 신선하다. 여기서 전시는 2018년을 살고 있는 여성들이 그 시대로부터, 신여성으로부터 과연 얼마나 발전했는지 묻고 있다.
시작은 나혜석이다. 그는 일본 동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한 조선 최초의 여성 화가로서 봉건적 가족 제도와 결혼 제도의 부당함을 반박하는 신랄한 글을 여러 편 발표했다. 그중 하나가 일본 동경의 조선 유학생 학우회의 기관지였던 『학지광(學之光』 제3호에 실린 「이상적 부인」이다. 그는 “양처현모는 남성 본위의 교육이며 여성을 노예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라고 비판했다. 또한 1924년 『신여성』에 실린 「나를 잊지 않는 행복」의 한 구절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회복하자는 외침으로 들린다.
“우리는 너무 겸손하여 왔다. 아니 나를 잊고 살아 왔다. 자기의 내심에 숨어 있는 무한한 능력을 자각 못 했었고, 그 능력의 발현을 시험하여 보려 들지 않을 만큼 전체가 희생뿐이었고 의뢰뿐만이었다.”
그런가 하면 당대를 뜨겁게 살았던 또 다른 대표적 신여성들, 작가이자 번역가였던 김명순(金明淳 1896~1951), 현대무용가 최승희(崔承喜 1911∼1969),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주세죽, 대중음악가 이난영(李蘭影 1916~1965)을 되새기는 공간은 장엄한 신여성의 전당이다. 그들이 남긴 삶의 궤적을 더듬는 관람객들 사이에서 작은 흐느낌이 일었다.

제3부 전시가 흥미로운 것은 이들 5인의 신여성에 대한 현대 여성 작가들의 오마주 때문이다. 지금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남성 권위주의 사회의 철벽을 뚫고 비상했던 다섯 여자에 대한 존경의 염(念)은 새로운 예술로 발화한다. 그 신선한 공감이 21세기 여기서 사는 여자들의 자각과 분발을 촉구한다.
1세대 여성 문인으로서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던 김명순에 대해 김세진(金世珍) 작가는 비디오 작품 「나쁜 피에 대한 연대기」로 추억한다. 의붓자식이자 기생의 딸이라는 태생적 신분을 뚫고 터져 나온 김명숙의 창작 열망이 시낭송 형식으로 피어난다. 영화감독 김소영(金素榮)은 무산자 혁명을 꿈꿨던 사회주의자 주세죽의 영혼을 달래는 영상물 「SF Drome: 주세죽」을 바쳤다. 그런가 하면 「목포의 눈물」로 아직도 우리 귓가에서 맴도는 절창 가수 이난영의 삶은 권혜원(權慧元) 작가의 미디어 설치물 「모르는 노래」로 되살아났다. 작가는 이난영이 1939년 녹음한 블루스 곡 「다방의 푸른 꿈」의 여러 버전을 가져와 끊임없이 회전하는 무대 위에 다른 얼굴로 변주한다.
앞서 소개한 소설가 조선희는 『세 여자』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썼다.
“세 여자가 태어난 것이 20세기의 입구였는데 나는 그녀들과 함께 백 년 넘게 산 기분이다. 이 소설의 세 여자가 살았던 때는 역사의 가장 음침한 골짜기, 비유나 풍자가 아니라 말 그대로 ‘헬조선’, 조선이라는 이름의 지옥이었다. 하지만 세 여자의 인생도 그저 지옥은 아니었다. 여자들은 씩씩했고 운명에 도전했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우리는 지금 연봉이나 승진 문제를 따지다가 우울해하지만 이 여자들은 현실의 것들을 그닥 개의치 않았고 목숨조차 가벼이 여겼으며 혼자 몸으로 역사를 상대했다.” 전시장을 나서는데 마지막 구절이 입가를 맴돌았다.
“혼자 몸으로 역사를 상대했다.”
어쩌면 이 전시에 등장한 모든 신여성이 그러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그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처절하게 유토피아를 찾아 삶을 던졌던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에게 큰절을 올린다.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 신여성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정재숙(Chung Jae-suk 鄭在淑) 중앙일보 문화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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